"어쩌면 그때가 내 유년 시절의 마지막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독가에 지성과 기품이 넘치는 부모님,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소녀 조반나. 그의 행복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숨죽여 한 말을 엿들었을 때부터였다. "조반나가 빅토리아를 닮아가." 소녀는 귀를 의심했다. '빅토리아 고모'라니. 연락이 끊긴 아버지의 누이 빅토리아는 "추함과 사악함의 대명사"로 통했다. 부모님은 고모를 수치스러워한 나머지 없는 사람 취급해왔다. 언제나 달콤한 칭찬을 늘어놓던 아버지가 소녀를 그런 고모와 동급으로 끌어내린 것이었다. 조반나는 슬픔 속에서도 빅토리아의 얼굴을 알고 싶다는 묘한 열망에 휩싸이지만, 아버지의 앨범 속 고모의 사진은 모조리 검은색 사인펜으로 칠해져 있다. 빈민가에서 자라 자수성가한 아버지에게 고모를 비롯한 친가 식구들은 평생 얽히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조반나는 직접 빅토리아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보기로 결심하는데…
조반나는 회상한다. "그때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망가져버렸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가 내 유년 시절의 마지막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확고하다고 믿어왔던 세계에 생긴 균열. 그 어긋남을 외면하고 지나치려 하자 와르르 무너져내린 하나의 세계. 붕괴는 서서히 진행된다. 마치 길고 끈질긴 장마처럼. 뇌우를 동반한 폭풍우, 예고 없는 소나기와 찰나의 햇빛과 같은 사건들. 그 모든 것은 의심 없이 행복할 수 있었던 삶에 종결을 고하고 '유년기'라는 이름을 붙인다. 폭풍이 휩쓴 자리에 허무만이 남았을 때, 조반나는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무언가에 단단히 가려져 볼 수 없었던 것들과 일부만 두드러져 보였던 것들의 이면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나폴리 4부작>으로 우리를 매혹시킨 엘레나 페란테가 또하나의 강렬한 작품으로 돌아와 새로운 계절을 연다.
- 소설 MD 권벼리 (2020.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