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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이국운

출생:1966년, 대한민국 대전

최근작
2024년 6월 <AI의 세상에서 인간을 찾다>

이국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9년부터 한동대학교 법학부에서 헌법, 법사회학, 기독교법사상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법률가 정치, 헌법이론, 헌정사, 프로테스탄트 정치철학이며, 실정법해석학을 뛰어넘는 학제 간 융합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법개혁과 자치분권 등 사회개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법과사회이론학회 및 한국법사회학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오랫동안 포항MBC의 시사토론 사회자로 봉사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헌법』, 『법률가의 탄생』,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헌정주의와 타자』, 『포항의 법률가』 등이 있고, 역서로는 마이클 왈저의 『출애굽과 혁명』, 칼 프리드리히의 『초월적 정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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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헌정주의와 타자> - 2019년 10월  더보기

緖: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전임 교수로서 헌법을 강의한 이래, 나는 줄곧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강의를 시작하는 전통을 스스로 지켜 오고 있다. 첫 강의시간에 고등학교 졸업생 티를 갓 벗은 학부 2학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 앞에 나서서, 나는 대뜸 헌법의 본질을 생각해 보기 위한 집단 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고 나서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다.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여러분의 국적을 박탈한다!” 그리곤 나는 아무 말 없이 교단을 내려와 교실 구석을 서성인다. 그런 내게, 약간은 허탈하고 약간은 웃음기가 섞인 학생들의 눈길들이 곧이어 쏟아진다.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참다못한 몇몇 학생들이 내 선언의 교육적 의미를 캐기 위해 몇 가지 수줍은 질문을 던진다. 외면하던 나는 귀찮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글쎄, 그러니까 이 강의실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무국적자들의 해방구인 셈이다!” 대개 군대를 다녀온 늙수그레한 학생들로부터 비로소 이 집단 실험의 목적을 알겠다는 미소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헌법 강의의 개시의례니까 그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사태의 전말을 전해 들었음직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2학년짜리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계속해서 기다려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다시 개입해야 한다. “좋아, 자네들 좋아하는 ‘상황 설정’을 내가 해 주지. 자, 이 해방구에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 자네, 맨 뒷줄에서 세 번째 안경 낀 여학생, 자네가 그 주위의 어떤 작자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다. 이 정도면 됐나?” 가지가지 ‘상황 설정’이 일반화된 온라인 게임 덕인지, 이때쯤 되면 이상한 헌법 교수가 주도하는 집단 실험의 의도가 홉스니 로크니 하는 이름들과 함께 기억되는 소위 ‘자연 상태’를 재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학생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재간꾼들이 배역을 찾아내려고 나서는 수준까지 집단 실험이 진척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5분 정도다. “여러분!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뭔가 조치를 좀 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특히 전염병은 이대로 두면 위험하니까요.” “그럽시다!” “자. 그러면 먼저 우리 가운데로 걸상을 돌려 마주보고 앉읍시다. 그리고 함께 뭔가를 정해봅시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우리더러 돌아앉으라는 거죠?” “아니…. 제가 언제 명령했습니까? 그냥 제안했을 뿐인데요?” “아. 그러지들 말고…. 여러분! 그러면 혼란을 없애기 위해 일단 사회자부터 정합시다. 누구 자원(自願)하실 분?”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세대적 특성 때문인지, 이 시점부터는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학생들 스스로 놀라운 즉흥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몇 해 전엔 교실 한 가운데 벽을 쌓아 전염병을 차단한 뒤 경찰을 뽑아 용의자를 체포하기도 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엔 스스로 독재자를 자처하며 나선 한 남학생을 다른 학생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연금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히죽거리며 집단 실험의 진지성을 축내기 시작할 때쯤이면, 어느새 약속한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다. 이제는 다시 내가 개입해서 끝내야 할 시점이다. “타임 오버! 타임 오버! 이제 실험은 끝났다. 여러분의 국적을 회복시킨다. 숙제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오늘 수업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각자 생각해 오는 것이다. 헌법 교과서에 헌법의 개념이나 사회계약 운운하는 부분을 찾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는 다음 시간에 토론할 내용을 각자 생각해 오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가 배워야 할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에 만들어졌고, 가장 최근의 헌법 개정은 1987년에 이루어졌다.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1948년도에 세상에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고, 1987년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참가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나밖에 없다. 자네들은 아마 부모님들의 계획 속에나 있었겠지. 그렇다면 자네들은 지금 한 번도 스스로 동의한 바 없는 대한민국 헌법을 자기의 헌법이라고 전제하고, 그 헌법을 배우겠다고 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동의한 적도 없으면서, 왜 이 대한민국 헌법이 자네들의 헌법이라는 건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헌법이 여러분을 구속할 수 있다는 건가? 이 질문에 관하여 각자의 진지한 답변을 만들어 오는 것이 오늘의 두 번째 숙제다. 헌법 교과서에 헌법의 효력 운운하는 부분을 찾아 읽으면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그럼.” 물론 이런 실험적 방식은 헌법 강의의 시작으로서 이용될 뿐이다. 그 다음 시간의 토론을 거치고 나면, 나는 다시 전통적인 헌법 강의의 궤도로 쓸쓸히 패퇴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35년 전 내가 들었던 헌법 강의들처럼 헌법 교수 혼자 앞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교과서를 죽 읽어 내려가는 소위 포어레중(vorlesung)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교과서를 쓸 생각도 없고, 포어레중은 왠지 죽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 같아 결코 하게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교과서 내용을 대요를 잡아 설명해 주고 거기에 덧붙여 내 나름의 이해를 첨부하는 방식뿐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언제나 지독히 어렵다. 어떤 날은 교과서의 개념 설명만 하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끝내기도 하고, 다른 날은 내 이론을 펼치는데 신명을 내다가 진도를 놓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 번씩 나를 절망케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맨 앞줄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받아 적는 학생의 노트가 고시촌의 유명 헌법 강사가 편집한 ‘단권화 헌법 강의-이론과 판례의 완전정복’ 쯤 되는 책이라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 헌법 강의는 그 수험 교재의 구석에 작은 글씨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요사이 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헌법 교수들이 변호사자격시험에 대비하여 객관식 문제 풀이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래도 그만큼은 시달리지 않으니 나는 아직 덜 불행한 걸까? 내가 헌법 강의의 첫 시간을 특이하기 짝이 없는 집단 실험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한국 사회의 헌법 강의가 헌법의 내용이나 본질과 너무도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헌법 문서는 온통 자유와 평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추구의 권리를 함께 외치는 우리 대한국민들의 발화(發話)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 대한국민들이 서로에 대하여 헌법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감동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정작 그 헌법을 가르치는 헌법 강의는 정반대로 진행된다. 헌법 교수만 말하고 학생들은 받아 적기에 바쁘다. 얼마 뒤에 헌법 교수는 말한 내용을 시험 문제로 낼 것이고, 학생들은 받아 적은 내용을 답으로 적어낼 것이다. 헌법 교수는 채점을 하고, 학생들은 점수를 받고, 누군가는 합격하고 누군가는 낙방할 것이다. 수험 법학의 숙명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헌법 문서를 읽어 본 사람들에겐 이러한 광경처럼 고약한 모습이 없다. 어떻게 헌법 문서가 선언하는 대한국민들 사이의 자유와 평등이 한 쪽만 말하고 다른 쪽은 듣기만 하는 지시와 복종의 일방적인 형식 속에 담길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지시와 복종의 형식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 가르쳐질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자유와 평등을 지시와 복종으로 탈바꿈시키는 헌법 강의 속에서 과연 우리는 우리 대한국민들의 정치적 상호고백인 헌법 문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수험법학의 숙명을 변명거리로 내세울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내게 배우는 학생들에게만은, 수험 법학의 콘텍스트와 별개로, 헌법 문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바가 통상적인 헌법 강의의 방식에 내포된 것과는 정반대에 가깝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나는 매년 고집스럽게 이 희한한 집단 실험을 헌법 강의의 개시의례로 시도해 왔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학년 때의 어느 가을 날, 한창 헌법 강의가 진행되던 15동 201호 대형 강의실의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무료하게 자신의 헌법 교과서를 읽어 가는 유명한 헌법 교수님의 모습이 조그만 플라스틱 자를 헌법 교과서에 대고 열심히 줄을 쳐 가며 저자 직강을 따라 외우던 친구들의 뒷모습에 겹쳐져서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던 그 풍경 말이다. 그 학기가 시작할 때, 나는 오랜 습관대로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헌법 강의의 처음에 등장하는 헌법이니 국가니 주권이니 하는 개념들이 어떻게 정의되고 또 정당화되는지를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유명한 헌법 교수님의 포어레중은 도무지 그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으며, 중요한 개념들의 설명은 단지 수험에 필요한 수준에서 별다른 논증 없이 툭툭 던져지기만 할 뿐임을 알게 되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알 수 없는 실망감에 휩싸인 나는 점점 뒷줄로 이동했고, 결국 헌법 교수님과 친구들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한 뒤 혼자만의 자문(自問)에 빠졌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헌법을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일까? 과연 이것은 헌법 강의의 올바른 방식일까? 돌이켜 보면, 헌정주의라는 단어는 입헌주의라는 이름으로 35년 전 내가 들었던 헌법 강의의 첫 부분에도 어김없이 등장했었다. 예를 들어 입헌주의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헌법에 선언해 두고 자유와 권리가 국가권력에 의하여 침해당하지 않고 보호되도록 국가권력의 근거와 행사에 관한 규범을 헌법에 규정해 둠으로써 국가권력 작용이 헌법에 구속되도록 하는 통치 원리”로 규정하는 방식이다(김철수). 하지만 이 개념 정의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왠지 그것이 무의미한 동어반복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왜 그것이 입헌주의의 정의(definition)인지를 정당화하려는 논증은 제시되지 않은 채, 단지 입헌주의를 그렇게 정의하기로 정한다는 선언만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만에 차서 자문해야만 했다. 만약 입헌주의가 그처럼 ‘조작적 정의’에 불과한 것이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그 개념을 주입하고, 외우고, 답안으로 써내고, 또 채점을 해서 줄을 세우고, 결국에는 그 점수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을 정해야 하는 것일까? 헌법 교수님의 포어레중이 계속되면서 나는 헌법 교과서의 헌정주의가 은연 중 서구적 모더니티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헌법 교과서들은 대부분 영국과 미국과 독일과 프랑스 헌정사를 마치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역사적 선례인 듯 소개하고 있다. 물론 헌법 강의에서 근대 서구의 선진국들이 겪은 헌정주의의 경험을 무시하거나 폄훼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헌정주의가 서구적 모더니티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서구적 모더니티 바깥의 세상에까지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근거를 함께 제시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헌법 강의에서 헌정주의의 보편성에 관한 논증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근본적인 논증의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 것인가? 헌법 강의실의 뒷줄에 앉아 나는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이 질문 앞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고민에 자신을 내어 맡긴 탓이었을까? 나는 학부 2학년 2학기 때부터 실정법학을 벗어나 비판법학의 길에 자발적으로 들어섰고, 결국 그 총아인 법사회학을 전공했으며, 십여 년의 노력 끝에 법률가정치론으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법학박사가 될 때까지도 학부 1학년 가을부터 괴롭혀 온 ‘도대체 헌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도무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전임교수가 되어 헌법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사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당위를 전제한 법적 실천을 시도하려면, 이 질문을 회피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 앞에서 헌법을 강의하고 정치사회적으로도 헌법에 입각한 발언과 행동을 시도할 때마다, 헌법학자로서 내 양심의 한 쪽 구석에는 ‘도대체 헌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임 교수가 되어 헌법 강의를 시작한 이후 20년 동안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 위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써왔다. 초기에 나는 법사회학적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현 시기 헌정주의의 타락한 모습을 자유주의적 법치주의(liberal legalism)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화주의 헌법이론(republican constitutionalism) 가능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바로 공화주의만으로는 궁극적인 당위의 문제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자책에 시달리면서, 헌법이론적 방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나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를 읽으면서, 헌정주의의 보편성을 논증할만한 나름의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동일자의 세계 바깥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그저 있음’으로서, 끊임없이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는 타자의 얼굴이 선재(先在)하며, 인간의 윤리는 바로 그와 같은 타자의 정언명령을 무한한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출발한다는 레비나스의 통찰이 뚜렷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2010년에 출간한 『헌법』(책세상)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에 기대어 그동안의 헌법 공부를 결산하는 방식으로 헌법과 헌정주의에 대한 내 나름의 이론화를 처음 시도해 본 야심찬 소품이었다. 그 책에서 나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 현상학의 통찰을 전유하여 헌법을 표상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으로 정의하면서, 그러한 의미의 헌법을 정치의 중심에 두려는 노력을 헌정주의로 규정했다. 그리고 성숙한 문명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헌정주의가 발현될 수 있음을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헌정주의와 동아시아의 성리학적 헌정주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했다(고전적 헌정주의). 이에 따라 여태까지 헌법 강의에서 헌정주의로 일컬어져 온 특정한 정치이념은 자연스럽게 근대적 헌정주의, 즉 서구적 모더니티가 야기한 심대한 정치적 혼란에 적응하기 위하여 시도되었던 헌정주의의 자기 혁신으로 다시 개념화될 수 있었다. 근대적 헌정주의의 핵심은 프로테스탄트 종교혁명이 가져온 유럽의 내전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안출되었던 ‘주권’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표상을 헌정주의 관점에서 재-제도화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바로 그와 같은 정치적 혁신과정 속에서 지금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근대적 헌정주의의 원리와 개념과 제도들이 탄생했음을 논증한 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서구적 모더니티의 전면화 과정에서 근대적 헌정주의의 기획이 민주주의의 절대화 및 자유와 민주의 비대칭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나아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모더니티의 액체화(liquid modernity)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오늘날에야말로 헌정주의의 또 다른 혁신이 절실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타자윤리에 입각한 헌법의 주어 찾기와 공간적 권력분립에서 그 실마리를 찾자고 주장했다. 이 책은 지난 20년 동안 써왔던 헌법이론 및 헌법철학 논문들을 다시 매만져 하나의 단행본으로 구성한 것이다. 앞서 출간한 『헌법』에서 제시했던 헌정주의와 헌법의 개념을 더욱 심화시키는 동시에 나는 이 책에서 특별히 두 가지 구체적인 과제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타자 윤리의 입장에서 시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헌정주의와 헌법의 개념을 찾아 정당화한 뒤, 이를 헌법학의 방법론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1부]의 다섯 글은 이에 관한 탐구이다. 둘째는 이처럼 타자 윤리에 입각한 헌법철학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헌법적 현장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몇 가지 주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는 것이다. [2부]의 다섯 글은 이 과제를 겨누고 있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비판법학과 법률가정치론으로 크게 우회했던 때를 포함하여 지난 30여 년 동안의 헌법 공부길이 은연중 하나의 일관된 헌법 철학적 입장을 지향하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헌정주의와 타자’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 입장을 표상하고 있다. 이제 나는 이 책의 구성을 간단히 소개하고, 이 책 전체를 통하여 나누고 싶은 화두(話頭)를 제시함으로써 난삽한 헌법철학 논문집을 읽을 귀한 독자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이 [1부]는 타자 윤리와 헌정주의, 그리고 헌법학 방법론을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다섯 글 가운데 독자들이 가장 주의 깊게 읽어 주었으면 하는 글은 4장 ‘헌정적인 것’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글부터 곧장 읽는 것은 피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수험 헌법학의 인식 프레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무엇보다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헌법적 사유에 전제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래적 관계로 돌아가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장에서 3장까지의 세 글은 바로 이와 같은 벗고(脫) 놓는(解) 작업을 돕기 위하여 배치되었음을 유의해주길 부탁드린다. 우선 1장 ‘공화주의 헌법이론의 구상’은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헌법이론을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로 명명하면서 그것이 근대적 헌정주의, 즉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편향적인 이해임을 드러내고, 이에 맞서는 정치적 사유의 흐름으로서 공화주의 정치사상을 정립한다. 이어지는 2장 ‘현대 헌법이론에서 ‘타자’의 복권‘은 최근 영미 철학의 중심 주제로 지목되고 있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이 의외로 동일자중심주의라는 공통의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폭로한 후에,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가 현대 헌법이론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을지를 다소 잠언적인 방식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3장 ’법과 ‘이웃’: 법치의 본원적 관계형식에 관한 탐색‘에서는 공화주의와 타자 윤리라는 두 이질적인 사유의 흐름이 법과 ‘물화’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다름 아닌 ‘이웃’의 정치신학으로 수렴될 수 있음을, 다분히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의식하는 맥락 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주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1부]의 중심은 ‘헌정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 타자 현상을 헌법 현상으로 전환시켜 헌정주의와 헌법의 개념을 구축하는 4장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그 앞의 세 글에 담긴 중층적 전전반측을 먼저 속속들이 경험해 달라고 독자들에게 요청하고 싶다. 그래야만 5장 ‘헌법학 방법론 연구: 해석학에서 현상학으로’가 제시하는 것처럼 헌법해석학을 넘어 헌법현상학을 중심으로 헌법학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입장 또한 받아들이기가 수월할 것이다. 지독하게 사변적이기만 한 [1부]에 비하여 [2부]의 다섯 글은 한결 쉽게 읽히리라고 나는 전망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이유는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의 헌법적 현장을 함께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각기 ‘똘레랑스’, ‘헌법 제1조’, ‘촛불집회’, ‘경제민주화’, ‘연방주의’를 다루고 있는 [2부]의 다섯 글을 읽을 때, 독자들이 대한민국의 70년 헌정사와 그것이 서로에게 가지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환기했으면 좋겠다. 6장 ‘민주공화국의 탈권력적 정당화’는 한국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대한민국 1세대에 대한 연민 없이 읽을 수 없는 글이고, 7장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한 해석’은 2008년 이후 촛불집회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는 헌법적 현상, 즉 대한국민들이 헌법 제1조를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 대한 묵상 없이 읽을 수 없는 글이다. 같은 맥락에서 8장 ‘직접행동민주주의와 헌정수호’는 자신의 몸을 권력 앞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헌정수호를 외치는 헌법적 시민들에 대한 경의 없이 읽을 수 없고, 9장 ‘경제 헌법과 경제 민주화’는 해방공간 이래 대한민국의 물적 기초를 이루어 온 귀속재산에 관련하여 앞 세대의 대한국민 전체에 대한 고마움 없이 읽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재통일을 전망하고 있는 10장 ‘민주적 연방주의와 평화’ 역시 적이거나 동지이기 전에 ‘이웃’으로 타자를 먼저 대우하려는 깊은 다짐이 없다면, 도무지 읽기 힘든 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동료 대한국민으로서 서로를 향하여 타자 윤리에 입각한 연민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고 또 존중하면서 이 글들을 함께 읽어 가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 이미 출간된 다른 헌법논문집들을 살펴보건대, 이 책은 아마도 사서들의 분류작업을 어렵게 만드는 특이한 경우로 취급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이 책에 전제된 헌법철학적 입장을 선명하게 밝혀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책은 헌정주의와 헌법을 타자를 향한 하나의 현상, 즉 현상으로서의 타자 앞에서 헌법적 주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바라본다. 이와 같은 헌법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 자신이 스스로를 타자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開顯). 이것은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대한민국이라는 헌법적 현장 속에서 서로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야말로 이 글을 쓰고 또 읽는 작업의 본질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공동 작업을 돕기 위하여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내 자신의 헌법 공부길을 회상하는 짧은 추기를 덧붙였다. 본문을 읽기 전이건, 읽은 후건, 아니면 읽어 가는 중이라도, 도무지 지은이의 문제의식 자체가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에는, 잠시 멈추고 편지 형식의 이 추기를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여전히 빈 곳이 많고 모순투성이의 글들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 전체를 통관하는 화두를 밝혀 두고 싶다. 그것은 바로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라는 질문이다. 내가 보기에, 자유와 평등을 지시와 복종으로 바꾸어 놓는 헌법 강의들이나 우리 대한국민들의 감동적인 발화를 수험 법학의 무미건조한 답지들로 바꿔치기 하는 헌법 교과서들은 하나 같이 이 질문에 대하여 동일한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우리나라를 위한 헌법…이라는 동일한 지향성이다. 이는,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 타자가 아니라 동일자를 위한 지향성,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헌정주의와 타자를 연결시키려는 이 책의 입장에서는 이 근본적인 지향성에 관하여 반드시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지향성은 과연 옳은 것인가? 헌법은 진정으로 나를, 우리를, 우리나라를 위한 것인가? 헌법은 타자가 아니라 동일자를 위한 것인가? 헌법 공부를 하면서 누구나 한 번은 부딪히게 마련인 글들 가운데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이 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눈앞에 마주할 수 있는 이 짧은 텍스트를 가지고 헌정주의와 타자의 문제를 잠시 고민해 보자. 누구든 단 한 번만 이 연설문을 정독하더라도, “여든하고 일곱 해 전에(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로 시작하는 이 유명한 글에 왠지 모를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이 연설문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현장을 국립묘지로 봉헌하는 행사에서 낭독되었다거나, 저자인 링컨 자신이 연설 이후 비극적인 암살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글은 그에 더하여 글 자체만으로도 마치 죽음에 직면한 것 같은 깊은 비원(悲願)을 담고 있다. 왜 그럴까? 연설의 중간 부분에서 아브라함 링컨은 게티스버그 언덕에 모여 자신의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 잔혹한 내전을 거쳐 살아남은 남북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자신을 포함한 그 살아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게티스버그 언덕에 잠든 전몰자들의 주검 앞으로 돌아와야 하며, 그리하여 이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을, 또 미래에 등장할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요청한다. “…(중략)…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로서 이곳에서 싸웠던 그분들이 그토록 애타게 이루고자 염원했던 미완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마땅히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예롭게 죽어 간 분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해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더 헌신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그분들로부터 얻고, 그분들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우리 앞에 미완으로 남아 있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하략)…” 이 연설의 말미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이 위대한 과업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가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이다. 나는 이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다시 던져 보고 싶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를 말할 때, 과연 그 인민은 동일한 인민인가 아니면 세 종류의 다른 인민인가? 문법적으로 보자면, 아브라함 링컨은 이 셋을 정부를 통하여 하나로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민의 정부에서 인민은 소유이고, 인민에 의한 정부에서 인민은 능동이지만, 인민을 위한 정부에서 인민은 단지 객체이자 대상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소유와 능동이 객체이자 대상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 세 종류의 다른 인민을 정부를 통하여 연결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 연설에서 링컨은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는 곧이어 찾아온 자신의 죽음으로 답변을 대신할 뿐이다. 헌법이론가로서 나는 게티스버그 연설에 나오는 이 유명한 표현에 깊은 의문을 표시하고자 한다. 인민의 정부의 인민과, 인민에 의한 정부의 인민과, 인민을 위한 정부의 인민은 같은 인민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셋을 정부를 통하여 연결시키려는 아브라함 링컨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허망한 것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인민의 정부와 인민에 의한 정부와 인민을 위한 정부 사이의 투쟁 정도에 불과하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인민의 정부의 인민과, 인민에 의한 정부의 인민과, 인민을 위한 정부의 인민이 각기 어떻게 서로에게 관련될 수 있는지를 문제 삼은 점에서 오래도록 기념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은 제공하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제안하고 싶다. 한 번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표현에서 정부를 헌법으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 보자는 것이다. 인민의 정부가 아니라 인민의 헌법, 인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라 인민에 의한 헌법, 인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인민을 위한 헌법으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더라도 인민의 헌법, 인민에 의한 헌법, 인민을 위한 헌법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인민이 곧바로 하나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헌법이 아니라 정부에 의하여 그 셋을 연결시키고자 할 때 등장했던 논리적 모순은 한결 완화될 수 있다. 그리고 헌법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인민의 헌법, 인민에 의한 헌법, 인민을 위한 헌법에 등장하는 인민들을 서로에게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생겨난다. 소유이자 능동으로서의 인민을 객체이자 대상으로서의 인민과 조화시켜 개념화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이와 같은 가능성을 헌법철학적으로 구체화해갈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라는 질문을 헌법적 사유의 화두로 공유함으로써 이 문제에 다가가 보려고 한다. 바로 이 화두야말로 동일자중심주의의 방향이 아니라 타자중심주의의 방향으로 헌법적 사유와 실천을 끊임없이 교정하게 만드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건대, 이 화두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거나 그 답변에 머무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차라리 그 답변을 다시 문제 삼을 수 있는 궁극적인 방향성과 용기를 제공한다(出出世間!). 인민의 헌법이나 인민에 의한 헌법, 즉 소유나 능동의 주체로서 인민을 이해할 경우, 그 인민은 항상 어떤 경계선 안쪽의 확인된 사람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민을 위한 헌법으로 인민을 이해할 경우, 그 인민은 앞서의 인민에 의하여 객체이자 대상으로 관념되었던 그 인민 바깥의 사람들까지를 포괄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헌법이론의 방향을 설정하게 만들 수는 있다. 게다가 이 객체이자 대상으로서의 인민 그 자체를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 속에 집어넣으면 헌법적 사유는 비로소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이념적 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처럼 결코 완결될 수 없는 급진성이야말로 타자 윤리에 입각한 헌정주의의 진면목라고 나는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수험 법학의 분위기에서 무료한 포어레중으로 헌법을 배우면서 홀로 답답해 할 때,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들이 헌법규범을 대체하는 광경을 보며 헌법이론의 빈곤을 절감할 때, 촛불집회의 현장에서 헌법 제1조를 주권자들이 함께 노래하는 광경을 처음 목격하고 감격할 때, 대한민국 헌정사의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피해자들은 물론 가해자들에게까지 헌법적 시민으로서의 깊은 연민을 느낄 때, 그리고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헌정주의의 입장에서 기획하며 남몰래 기도할 때까지, 내 자신이 그러한 질문이나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 답변을 다시 계속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화두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이제 그와 같은 사유의 궤적을 담은 이 책을 세상에 내보면서 나는 헌법적 사유를 이끄는 급진적인 화두 하나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 바로 이 질문이 이 책을 이끄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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