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걷듯이 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내가 믿는 것이 곧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오직 어떤 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서. 비록 그것이 다 환상일지라도.
《사랑의 몽타주》, 《너는 불투명한 문》, 《눈을 감고 걷기》, 《겨울 데자뷔》 등을 썼다.
눈을 감아본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 눈꺼풀 속에서 움직이는 눈의 온기를 느끼는 동안 기억의 배경이 나타난다. 새카만 강가의 반딧불이 한 무리. 천장 너머로 쏟아지는 빗소리. 아득히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
내가 걷고 있는 세계가 조금씩 두꺼워진다.
이 책의 원고를 쓴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여느 때보다 그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오래 기억될 여름을 떠나 보냈다. 많이 걸었고 많이 마셨다.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장면이 뒤죽박죽이다.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오래된 나무들 사이를 서성인다.
느낌의 세계를 그리는 사람과 함께 한 권의 책을 낸다는 것이 기쁘다. 오랫동안 그림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더더욱.
여기서 우리는 시제가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말없이, 기억의 공동체로서.
눈을 감고도, 느낌의 세계 어딘가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