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초판의 서문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세상은 많이 변하였다. 팬데믹이 전 지구를 휩쓸고 지나갔고, AI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환력還曆을 맞이한다. 그러나 스포츠 윤리학은 10년 전 모습 그대로 낯설고 생경하다. 여전히 학문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스포츠 종사자의 비리와 부도덕을 꾸짖는 단체의 이름으로 쓰이거나 자격시험의 암기 과목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처럼 스포츠윤리가 학學으로 존재하지 않고 캠페인이나 못된 행동의 비난 정도에 머무는 이유는 아무래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인문학의 병증 탓일 거다. 기대고 있던 언덕이 무너져 내리니 견뎌낼 재간이 없다. 성급한 사람은 이미 인문학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한다. 부활의 기미도 없어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들판의 승냥이처럼 저 혼자 슬프다.
모든 것이 경제법칙에서 연역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돈도 되지 않는 책을 3쇄에 걸쳐 고쳐 발간한 이유는 천착穿鑿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오기 때문이었다. 아직 샘을 보지 못하였으나 자신이 판 우물의 흔적은 남겨야 면이 설 것 같았다. 그래봐야 미상불 스포츠윤리의 입문서에 지나지 않을 터이지만 독자에 대한 예의로 서문을 썼던 10년 전과 지금의 심정은 다르다.
입문서조차 부재했던 당시 나는 상재된 내 책이 학문적 체계를 재촉하는 마중물이기를 기대했다. 그리하여 먼저 맞는 ‘매’이기를 바랐고 새로운 담론이 시비를 걸어오기 기다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그런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런 진단과 자기변명은 어쩌면 인문학자의 두 번째 천성인 페시미즘의 발로이리라. 세상을 긍정하지 못하는 불만에 찬 인문학자. 나야말로 덕의 윤리가 필요한 부류가 아니었던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2020년의 2쇄 서문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두르는 바람에 생긴 엉성한 부분을 메우는 작업이어서 변명으로만 채워질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번 3쇄를 마치면서 비로소 구색을 갖춘 상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품上品은 아닐지언정 가져다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면면들이 부끄럽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인문학에 대해, 그리고 스포츠 윤리학이라는 일천한 인문학에 대해 지나치게 엄숙하거나 염세적일 필요도 없지 싶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여도 스포츠에서 인문학이 소비되고 유통되는 것만으로 안도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노포老鋪가 될 때까지 지식으로 소비되고 그 프리즘으로 실제의 스포츠를 간간이 들여다봐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장땡이라는 걸 환력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다. 소년에서 환력까지 내 모든 인연에 감사한다.
202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