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으며,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普)를 중퇴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운전 조수 생활을 했다. 1937년 경성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1938년부터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 조영)에서 녹음부서를 담당했다. 1939년 천일영화사(天一映畵社)의 제작으로, 자신이 각본을 쓴 <국경>(1939)의 연출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해방 후 최인규는 최완규와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재정비했으며, 1946년 <자유만세>를 시작으로 <죄없는 죄인>, <독립전야>(1948), <파시>(1949) 등 일제의 탄압과 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을 감독했다. 또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의 의뢰를 받아 문화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를 교육하기 위한 <인민투표>(1948), 한국의 예술과 풍물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장추화 무용>, <희망의 마을>(1948) 등이 그것이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공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배우 김신재(金信哉)의 남편이다.
출처: 한국영화인 정보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