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속이려드는 시가 아니라 이 문사철, 시서화(물론 현대적 의미의 )의 인간을 붙잡아놓을 수 있는 시가 오래도록 좋은 시로서 우리들의 삶을 떠나지 않을 듯싶다. 그런데 그런 시는 어떠한 것일까. 친구 사이는 담담한 사이가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라는 것을 그런 것에다가 앉혀야 할 나이가 된 것도 같다. 새삼 시의 계급성 같은 것을 생각해본다. 거창하게도.
미당은 제 시의 논밭 뙈기들의 저수지와 같습니다. 꼭 문학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창조적 기운을 한없이 뿜어줍니다. 새로 갈아놓은 밭 같고 새로 장만한 산등성이 같고 사랑하는 여인의 살결을 처음 만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 상을 받으면 그분의 처마 아래의 일원이 되는 걸까요? 만약 그런 거라면 저는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평생 시로 매진한 미당 선생의 정신과 여유와 꿈을 흉내 내야 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수상소감 중에서
마침 몸살이 와서 발은 만져보니 차디찬데 이마는 뜨겁다. 그 사이 몸뚱어리 전체는 속닥거린다. 지치긴 했어도 아픈 지경까진 오래간만이어서 찡그린 채 껌뻑거리며 누워 있으려니 회고의 길목이다. 아픔은 회고주의자로 몰게 마련이고 병은 때아닌 종교를 붙들게도 하는 게 이치라면 이치겠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생에서 시경(詩境)으로 출타한 것이 인생의 큰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뭉뚱그려 제쳐놓는다. 하, 그게 스물다섯 해가 되었다니! 뭐 밥그릇 수를 밝혀서 미담 제조를 하려는 맘은 추호도 없으나 그간 건너온 징검돌들의 면모가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간신히 바닥에 발붙인 돌멕들이 지금껏 내 걸음걸이의 무게는 겨우 견뎠으나 다시금 되돌아가자면 그만 부스러지고 말 것만 같다. 천상 저편으로나 하나씩 더 놓으며 가야 하리. 만해가 한겨울 널따란 냇물을 맨발로 건너며 중간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던 고초 이야기도 생각난다.
다 몸뚱어리가 쑥떡거리는 내용들이다.
나는 아직 어느 경계 안으로도 들어서지 못했다.
하긴, 출타는 들어서는 게 아니니까.
다행이다. 아프다.
2.
이렇게, 선(線) 하나를
긋고,
나는…… 나를…… 느끼고 싶다.
―인제 만해마을 서창(西窓) 아래 엎드려
악기가 하나 있습니다. 낡고 늘어진 줄을 바꾸려고 합니다. 다 풀어내고 새것을 묶을 때 설렘 끝에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새 줄에서는 어떤 음색이 날 것인가. 마음을 내보일 만한 친구를 생각하면서 줄을 감고 풀어 맞추면 그 친구를 닮은 음색이 나오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악기를 켜듯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말만이 아닌, 그런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어느 해부턴가는 돌멩이 같은 게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무엇인가를 새기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래 아무할 것이 없는 때는 가끔 그 앞에 앉아 생의 복잡을 잊는 방편으로 삼고 있었다. 헌데 그게 남에게도 보일 수 있겠다고 용기를 주는 이가 있어서 몇을 같이 싣게 되었다. 역시 전각도 판화도, 혹여 미술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린아이의 노는 뒷모습으로 간주하여 옅은 웃음과 함께 넘겨주시면 한다.
우리들이 산다는 것이 저 맑은 시냇가의 여울목만 같으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매양 앓는 저 '사랑'이라는 것도 사람들 가슴속의 여울목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대학로인가를 지나다가 '물의 정거장'이라는 글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문득 내가 쓰는 글들도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인연이란 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맑은 물에 잘 씻어 건져내 묶어야 할 것들인데 그렇지도 못한 깜냥에 어울리지 않게 호사스런 집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저 읍하며 감사할 뿐이다.
초겨울이 되면 나무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익명이 된다. 잎 떨어지는 나무들 얘기다. 죽음이 그렇다는 얘기 같기도 하다.
시를 쓰면서 혹은 불가피 산문을 써야 할 때에도 나는 나의 그것이 ‘나중에’ 읽어도 스스로 얼굴 붉히지 않을 만한 글이기를 생각했었다. 살며 단순 ‘품팔이’로서의 글을 쓰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원고료와 바꾸기 위한 글도 많았다. 스스로 즐겁지 않은 글들 말이다. 싫었다.
불멸의 거창한 글을 쓸 재주도 의지도 없었다. 건들수록 거대해지는 육체와 바라볼 때마다 미미한 영혼, 영원성에 대한 질문이면 되었다. 나의 전부가 별것이 아니었으므로. 욕망은 일었으나 웬일인지 동시에 잿더미였다. 오래전의 글들을 꺼내보는 심정은 애달프다.
근자에 쓴 글들을 덧대어 사고로 사라졌던 옛날의 글들을 다시 묶는다. 아주 잊어버릴 생각이었으나 다시 꺼내어 햇빛에 말려도 괜찮겠다는 의견이 고마웠다. 간혹 문법을 벗어나 헝클어졌는데도 쓰던 당시의 감상은 앙금으로 고스란했다. 미소가 지나갔다. 나는 일종 낭만파였구나. 혁명파의 다른 이름인.
모든 식물들은 가을이 되면 제 이름을 구현한다고 되어 있다. 글은 나이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가을이다. 가을은 의義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 철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지금, 무의미한 의여!
침묵에 든 겨울 숲, 그러나 곧 소곤거림이 시작될 것이다. 익명을 벗고 나올 나무들을 바라본다.
2015년 12월
우리는 세상을 건너간다. 어렵다. 세상을 건너는 방법 중에는 시라고 하는 것을 징검돌로 놓아가며 건너가는 방법도 있다. 시로 세상을 어떻게 건너겠다는 것인가?
우는 목구멍도 있고 떨어진 단추도 있고, 집세는 없다. 시는 그런 걸 단 한 가지도 해결할 수 없다. 그래도 인간은 세상을 건너가야만 한다. 건너가는 것은 건너가는 것이다. 삶을 버리겠는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시라는징검돌을 디뎌 세상을 건너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힘이 좀 미미하긴 하다. 미미하긴 할지언정 결정적이다. 시는 결정적이다. ‘시적’인 것으로 세상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역사를 들여다보아 알게 되는 사실이다. 결정적일 때 늘 시가, 시는 아닐지언정 ‘시적’인 것이 있었다. 무용無用하되 개인과 역사의 휘돎의 순간을 위한 무용의 언술! 빛으로 자르는 희미함들…… 시의 행간이 빛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통은 잘 모른다……
세상에는 참으로 발 구르게 하는 멋진 시들이 많다. 아쉽게도 그중 나비 발에 묻은 꽃가루만큼이나 적은 양의 시…… 그에 감응(은 실로 컸으나)한 나의 옹색한 독백들을 엮는다. 일러 ‘웅얼거림의 책’이라고 할 만하다.
질서는 미덕이지만 강요된 질서는 괴롭다. 질서 없는, 시에 대한 나의 짧디짧은 감흥이 모든 강요된 질서를 무한히 어지럽혔으면 좋겠다.
김민정이라는 은자隱者가 있어서 이러한 특유의 책을 묶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숨어 있는 세상에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더더욱 고맙다.
2015년 초겨울 삼구서원三驅書院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