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하나 마나 한 말을 왜 하는 걸까. 나는 책이 깨달음을 준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모든 언어는 이미 깨달은 사람, 깨달을 준비를 한 사람에게만 이해된다.(물론 이 경우에도 진짜 이해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언어의 힘을 믿는다. 언어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니까. 단지 실천할 수 있는 일일 뿐이고 그래서 나는 소설을 썼다. 앞으로도 쓸 것이다.
눈밭 위의 여우
어느 블로거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 「지상 최후의 일몰」이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되기 전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웹에 올린 적이 있다. 단편의 영문판 제목은 ‘Last Evenings on Earth’로 블로거는 영문판을 중역했다고 한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그때 막 볼라뇨 선집의 홍보 책자인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가 나왔던 것 같다. 등단 전에 쓴 단편 중 오래 붙잡고 여러 번 고쳐 발표까지 이르게 된 단편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백한 말」이다. 나는 블로거가 올린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읽고 「창백한 말」을 다시 쓰기로 했고 그때 쓴 버전이 지금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당시 소설의 제목은 ‘땅위에서의 마지막 저녁들’이었다. 그 전에는 「모스크바에서 온 일기」였고 그 전에는 「카이로의 낮과 밤」이었으며 그 전에는 「눈밭 위의 여우」였다.
처음 단편을 쓴 건 2008년이다. 마지막으로 고친 건 2015년이니까 7~8년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여러 공모전에 내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제출하기도 했다. 존 파울즈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카버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미셸 우엘베크와 쿤데라, 토마스 만을 따라 써보기도 했다.
지금의 꼴이 나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는 보리스 사빈코프, 로베르토 볼라뇨, 빅토르 세르주다. 이 외에도 플라토노프와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 카레르의 「리모노프」, 수전 손택의 빅토르 세르주에 관한 에세이와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 빚진 바가 크다.
얼마 전 지인인 홍상희가 전화해 꿈에서 내가 죽었다고 했다. 그녀의 꿈에서는 사람들이 곧잘 죽곤 하는데 죽고 나면 이상하게도 좋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작년에 한번 죽었고 올해 또 죽었다. 이번에는 얼음물에 뛰어들어 익사했다고 하는데 시체는 못 봤다고 한다. 그렇지만 죽은 게 확실해. 좋은 일 없어? 소름. 내가 말했다. 그녀에게 수상 소식을 전하자 그녀 또한 말했다. 소름. 두 번의 소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후 세계가 있나 하는 의심을 잠깐이나마 하게 된다. 그렇지만 작년에 죽은 이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이게 정말 좋은 일인 걸까.
친구는 좋은 사람이 좋은 작품을 쓰는 거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갸웃했지만 점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좋은 태도가 좋은 작품을 쓰게 하는 것 같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 작품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좋은 태도가 어떤 것인지는 말하기 힘들다. 그건 너무 복잡하고 자주 변하며 심히 단순하다. 좋은 태도는 좋은 태도다. 잘 쓰는 건 어렵지 않다.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고 잘 만든 작품이 어느 분야에나 너무 많다. 너무 매끈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작품들이 너무 많다.
소설에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과 심사위원들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
- 수상소감
(…)
『인생 연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건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어떤 종류의 만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런 만남은 그러나 우리가 크고 변화하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고정된 가치를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매순간 생성되는 낯선 세계 속에서 윤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새로운 차원의 도전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러한 순간에 와 있다. 우리는 출발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