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말이 투명하다는 건 유일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
이 아니다. 말이 투명할 때는 근거를 가졌을 때이다.
말의 근거를 삶으로 채워보지만 충분하지 않다,
모든 존재자가 그러하듯.
그리하여 말의 근거를 찾는 날이 계속된다.
말의 근거를 찾는 건 말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의 근거를 찾으면 말이 찾아진다.
2019년 11월
스무 해 전 세상에서 시인이 되었다. 시인으로 살고픈 날이 오래되었다.
시인으로 산다는 건 백지가 된다는 것, 백지를 대하는 것. 지금 백지에는 불이 온다.
삶은 기다린다는 것. 나의 창이 가득 기다림이 될 때까지. 설렘이 가슴을 이룰 때까지.
내가 기다린 건 의미가 아니었다. 나무가 새를 기다리듯 새가 나무를 기다리듯 하였다.
사랑의 자취를 세상에 보내는 이곳은 은빛으로 가득하다. 살아 있으라는 말이, 무거운 별의 가지처럼 땅에 내려앉는다.
2014 여름
임선기
겨울나무가 잎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서 있는 풍경이 보인다. 풍경이 다가와서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풍경이 말을 걸면, 나라는 그 누구는 또 실은 저도 풍경의 일부이면서, 대상을 받아들이는 몸짓을 한다. 그 몸짓을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면서 詩를 생각한다.
겨울나무가 겨울나무와 함께 얼기설기 숲길을 가리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거기에는 미결정 상태의 무수한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의미가 이 무의미하다는 세계를 살아 숨쉬게 하는지도 모른다.
만상에 봄이 오면 시 아닌 것이 없을 터인데, 나는 그 꽃시절에 오늘의 풍광을 기억하고 싶다. 오늘은 내일의 시이고, 내일은 오늘을 제사 지내는 날이니 시의 언저리를 사랑하는 자에게 삶과 죽음이란 진즉 虛言일 뿐이다.
새삼스레 그런 경계 없는 속에서 즐겁게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