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미 어엿한 바둑철학자라는 지극히 소박한 생각을 토대로 <바둑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바둑에 관해서는 이미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바둑에 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를 써서 애기가들을 웃고 울리며 사랑을 받아 왔지요.
그러나 바둑이 학문으로 인정받아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고, 자연스레 바둑에 관한 학술서적은 지극히 희소한 실정입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바둑철학 연구를 지향하는 이 책은 일단 그것의 성패를 엄정히 가려야 할 야심적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요행이나 운수에 지배받지 않는 바둑의 특성상 18급 초심자로부터 바둑황제 조훈현에 이르기까지 승리를 쟁취하고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끝없는 연구와 실전, 그리고 복기(復棋)가 필요합니다. 바둑을 수담(手談)이라고 부르는 한, 철학의 본질을 소크라테스적 대화에서 찾는 한, 바둑과 철학의 연분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짙은 농도를 지녔다는 데도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실제로 마치 예술 작품처럼 한 판의 바둑에는 바둑두는 이의 바둑관, 바둑철학, 인격, 그리고 영혼 전체가 담겨 있게 마련이라 여기곤 합니다. 이미 그 성격상 철학적인 바둑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한 수순의 전개라고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에 의해 오늘 한국 바둑은 세계 정상에 섰고, 바둑학의 선편도 우리가 자랑스레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통합적 연구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경적한다면 통합적 인지과학의 꽃인 컴퓨터 바둑의 정복은 또 다시 서양인의 몫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 이창호와 의연하게 겨루는 조훈현 국수의 모습에서 교수인 저는 한국 학계의 나아갈 바를 봅니다. 바둑에서 한 수 배워 바둑학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학문 전체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냘픈 기대가 어쩌면 이 책을 집필한 진짜 동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agora.co.kr의 '박우석의 다리놓기'란을 방문하시면 바둑철학 게시판에서 제 책을 내용을 함께 논의하실 수 있습니다. 신랄한 비판을 받아 반점이라도 제 바둑철학이 늘기를 원합니다.
(2002년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