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편지"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고고학자를 꿈꾼다. 단단한 흙을 파헤쳐 고대의 비밀을 밝혀내는 작업의 매혹. 인류의 과거 흔적을 쫓는 그 작업은 곧 자기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시인이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고대 근동 고고학'을 배우기 위해 훌쩍 독일로 떠난 까닭은. 그렇게 오랫동안 나가 있을지 몰랐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10년이 넘게 이국에 머물고 있는 그가 곱게 다듬어 묶은 글들을 보내왔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지인들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그는 이 땅이 그리운 모양이다. 백여 개의 짧은 글 가운데 유난히 먹거리 이야기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마음이 허허로운 탓일까. 알싸한 갓김치에 깻잎 장아찌, 꽃밥이라 불리는 진주 비빔밥, 쑥과 어린 봄굴을 넣고 된장을 풀어넣어 끓인 국, 꽃잎이 지던 막걸리 주발... 입에 침이 고이면서, 시인의 그리움이 마음 안으로 슬며시 들어선다.
유럽 사회를 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늙은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간명하게 묘사하고, 문득문득 부모님과 친구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산문집이 값있게 느껴지는 건, 그가 이 땅을 떠나 먼 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백한다. 자신이 내뱉었던 그 많은 '말'에서 도망치기 위해 다른 기슭으로 향한 거라고. 말에 대한 애증때문에 삶이 목졸리는 것을 더 견딜 수 없어서, 다른 말을 쓰는 곳에선 자동적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테니까.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말에 갇혀버리고 말 거라는 공포, 말이 나를 부패시키고 말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이 나라를 떠났던 것이다.
그는 서툴게 남의 언어를 배우면서 많이 차가워지고, 고향에서 살아왔던 이야기들에서도 얼마간 놓여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강냄새, 바다냄새, 고향냄새에 끙끙 앓는다는 시인. 그는 말에서 놓여난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날, 말을 하는 근원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말을 하는 날, 그 새로운 언어가 저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날,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겠다고 말한다.
형식은 산문집이지만 '시'같은 리듬과 울림을 지닌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사이사이 하얗게 비어있는 여백은, 시집의 그것처럼 미처 말로 화하지 못한 감정들이 조심스레 묻혀있는듯 하다. 참 정갈하고 단아하고, 착한 책이다. 먼 이역땅의 시인은, 언제쯤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될까. -
박하영(2003-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