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옌 莫言
중국 대륙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국의 윌리엄 포크너, 프란츠 카프카로 불리며 2007년 중국 문학평론가 10명이 선정한 ‘중국 최고의 작가’ 1위로 뽑힌,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본명은 관모예(管謨業). 글로만 뜻을 표할 뿐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莫言)’이라는 필명을 쓴다. 1955년 산둥 성 가오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수년간 농촌 생활을 하다 열여덟 살에 면화가공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했다. 1976년 고향을 떠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했고, 해방군 예술학원 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베이징 사범대학과 루쉰 문학창작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그는 1985년 발표한 「투명한 홍당무」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발표한 장편 『홍까오량 가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작품의 일부를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2000년 중편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가 영화 <행복한 날들>로 제작되면서 모옌과 장이머우 감독은 다시 한번 조우했다.
중국 다자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로 문학상, 홍콩 아시아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문화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오랫동안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2012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주요 작품으로 『열세 걸음』 『달빛을 베다』 『개구리』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술의 나라』 『풍유비둔』 『탄샹싱』 『사십일포』 『인생은 고달파』 『풀 먹는 가족』이 있다.
月光斬
by Mo Yan
月光斬 ⓒ Mo Yan, 2006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08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This transla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Mo Yan through Imprima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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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Imprima Korea를 통해 Mo Yan과 독점 계약한 (주)문학동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 및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 작가의 말 |
어린 시절 내 삶에 가장 깊은 인상을 새겨준 것은 굶주림과 외로움을 빼놓으면 바로 공포, 그것이었다.
나는 어느 폐쇄되고 낙후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자라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났다. 그곳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접어들어 겨우 전깃불이 들어갔기 때문에,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석유등잔과 촛불로 어둠을 밝혀야 했다. 초는 사치품이라 설날처럼 큰 명절에만 켜고 평상시에는 석유등잔으로 불을 밝힌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석유는 배급표에 따라 공급받는 데다 또 값이 비싸 석유등잔 역시 아무 때나 마음대로 켜지 못했다. 나는 저녁밥을 먹을 때만이라도 등잔을 켜자고 요구했으나,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성내며 꾸짖으셨다.
“등잔불을 켜지 않으면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간다던?”
옳은 말씀이다. 등잔불을 켜지 않아도 우리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밥숟가락을 콧구멍이 아니라 정확히 입속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 세월 동안 날마다 밤이 되면 마을은 칠흑 같은 암흑 세상이 되어 손을 눈앞에 내밀어도 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길고 지루한 밤을 보내기 위해 노인네들은 어린것들에게 요괴나 귀신, 도깨비가 나오는 옛날이야기를 곧잘 해주셨다. 이런 옛날이야기들 속에서 거의 모든 식물과 동물은 사람으로 탈바꿈하거나 인간의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등장했다. 노인네들이 정말인 것처럼 아주 그럴듯하게 꾸며내곤 했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진짜 그런 일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이런 옛날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공포를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흥분시키기도 했다. 들을수록 두렵고 두려울수록 더 듣고 싶어졌다. 수많은 작가들이 모두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의 옛날이야기 중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고,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노인들이 귀신이나 도깨비 괴담을 들려주던 그 캄캄한 밤이야말로 내게 있어 최초의 문학교실이었다고 생각된다. 덴마크가 안데르센과 같은 위대한 동화작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그 시대에 전기가 없었고, 또 덴마크 역시 하룻밤 길이가 유별나게 길고 지루한 나라였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전등 불빛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진 방에서는 아름다운 동화도 태어나지 않을뿐더러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괴담이나 무서운 귀신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도 나올 수 없다.
최근에 나는 고향에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골 아이들이 도시 아이들처럼 전깃불이 환하게 밝혀진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마주하고 앉아 그들 나름대로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안다. 귀신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괴담이나 옛날이야기, 동화가 만들어지던 밤은 이제 마무리 지어졌음을, 그리고 내 어릴 적 체험했던 그런 종류의 공포감을 지금 이 시대 아이들은 다시 체험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어쩌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똑같은 공포감이 조성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느낀 공포감은 우리들의 시대에 내가 체험했던 공포감과는 분명히 크게 다를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 속에서, 여우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뱅이 사내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기도 하고, 해묵은 고목은 늙은이로 둔갑해서 길거리를 한가로이 거니는가 하면, 강물 속 늙은 자라는 몸집 다부진 장정으로 둔갑해서 마을 장터에 나타나 술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며, 수탉은 영특하게 잘생긴 젊은이로 둔갑하여 주인댁 따님과 연애를 하기도 했다. 수탉이 준수한 청년으로 둔갑한 이야기는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두려운 괴담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어느 부잣집에 무남독녀 외동딸을 하나 두었는데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했다. 시집갈 나이가 되어 부모는 중매쟁이를 놓아 혼처를 물색했는데, 신랑 댁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또 신랑이 아무리 잘생기고 똑똑해도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더란다. 어머니는 의심을 품고 남몰래 눈여겨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깊은 밤 인적이 고요해지자 딸의 방 안에서 남녀가 사랑을 즐기는 기척이 들려왔다. 어머니는 딸을 모질게 닦달했고, 딸은 어쩔 수 없이 바른대로 불고 말았다. 딸의 얘기로는, 날마다 한밤중에 온 세상이 고요해지면 으레 영특하게 잘생긴 청년 하나가 찾아와서 그녀와 밀회를 했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입은 옷은 아주 심상치 않은 것이어서 화려한 광채가 번쩍번쩍 빛날 뿐 아니라 비단보다 매끄러웠다. 어머니는 딸에게 넌지시 계책을 하나 귀띔해주었다. 그 영준한 젊은이가 밤중에 다시 찾아왔을 때, 딸은 어머니의 분부대로 그가 벗어놓은 옷을 반닫이에 감추었다. 날이 밝아 잠자리에서 깨어난 청년은 떠나려고 옷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딸에게 옷을 내달라고 애걸했다. 딸은 옷을 내어주지 않았다. 사내는 할 수 없이 낙담한 기색으로 그녀를 원망하며 떠나갔다. 그날 밤 큰 눈이 펄펄 내리고 높새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닭장을 열어보았더니 털 빠진 수탉 한 마리가 알몸뚱이로 툭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딸더러 옷 궤짝을 열어보게 했다. 그리고 옷 궤짝이 온통 닭털로 가득 찬 것을 발견했더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옛날이야기는 결혼의 자유를 부모에게서 쟁취하려는 청춘남녀의 희극으로 고쳐 만들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줄거리가 되겠지만, 내 어린 시절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났을 때의 심정은 닭장 속에 갇힌 수탉에 대한 공포감이 전부였다. 어쩌다 길거리에서 준수하게 잘생긴 청년과 마주쳤을 때 그 역시 수탉이 둔갑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심까지 품었다.
할머니는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곧잘 흉내 내는 작은 동물이 있는데, 모양새가 족제비를 닮았다고 했다. 이놈은 달빛이 아주 밝은 날 밤만 되면 앙증맞은 붉은 가죽 저고리를 입고 담장머리에서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이게 바로 내가 달 밝은 밤중에 고개를 쳐들고 담장머리를 올려다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더구나 우리 마을 뒤쪽 작은 돌다리에 ‘헤헤헤!’ 웃는 귀신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밤중에 누구든지 돌다리를 건너가면 등 뒤에서 어깨를 툭 치고 ‘헤헤헤!’ 하고 비웃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하셨다. 이 귀신의 구체적인 형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내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귀신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나는 어느 면화 가공(棉花加工) 공장에서 품앗이를 했는데, 야간작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는 반드시 그 작은 돌다리를 지나쳐야만 했다. 달이 밝은 때라면 그래도 괜찮았으나 달빛이 없는 어두운 밤중이면 나는 돌다리가 가까워질 때부터 어김없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나서 쏜살같이 치달려 그 돌다리를 건너뛰곤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고 식은땀에 옷이 흠뻑 젖어들기가 십상이었다. 그 돌다리는 우리 집에서 사 킬로미터 남짓 떨어졌으나, 어머니는 내가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계셨다. 당시 나는 변성기에 접어들 때라 목이 쉬고 갈라져,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귀곡성(鬼哭聲)이나 늑대 울부짖는 소리와 별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어째서 한밤중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들짐승처럼 울부짖느냐고. 나는 무서워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 무서우냐고 물으셨고, 나는 ‘헤헤헤 귀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무튼 나는 그 돌다리를 건널 때마다 나도 모르게 뜀박질을 하게 되고 목청껏 악을 써야만 직성이 풀렸다.
이렇듯 귀신과 요괴를 두려워하면서도 나는 이날 이때껏 귀신이나 요괴를 만나본 적이 없거니와 또 어떤 귀신이나 요괴도 내게 상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청소년 시절 귀신과 요괴에 대한 공포감 속에서도 실상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그런 귀신이나 요괴를 만나보고 싶은 기대감이 조금은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아리따운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든가, 달밤에 담장머리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작은 동물을 그저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수십 년 이래 내게 진정으로 해를 끼친 것은 역시 인간이었으며 진정으로 내게 공포감을 느끼게 한 것도 역시 인간이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이전의 중국은 ‘계급투쟁’으로 가득 찬 국가였다. 도시와 시골 농촌을 막론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몇몇 일부 사람들이 온갖 황당한 이유으로 자기네와 다른 소수의 사람들에게 압박과 통제를 받아야 했다. 몇몇 일부 아이들은 조상님이 남보다 부유하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 도시에 들어가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도 물론 없었다. 또 다른 몇몇 소수의 아이들은 자기네 조상이 가난뱅이였다는 이유로 이런 모든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그 정도뿐이었다면 공포를 조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성된 공포는, 바로 이런 권리를 장악한 가난뱅이와 그 아이들이 자기네들 손에 타도당한 부유층 사람들과 그 아이들에 대한 감시와 압박이었다. 나의 조상님들도 한때는 부유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부유해봤자 기껏해야 토지 십여 묘(畝, 약 삼사백 평)에 논밭갈이 황소 한 마리가 전부였지만—아무튼 나는 소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 나는 길고 지루한 세월 동안 매사에 조심하고 말과 행동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부모님께 재앙을 초래할까봐 전전긍긍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마을 안 관공서에서 마을 당 간부들의 사나운 호통 소리, 그들에게 손발이 묶인 채 고문당하는 이른바 ‘나쁜 사람들’이 터뜨리는 처참한 신음 소리와 비명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극도로 큰 공포감에 휩싸이곤 했다. 이런 공포감이야말로 모든 귀신과 요괴 따위가 조성하는 공포감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엄중한 것이었다. 이때에야 나는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당초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에 들짐승이나 귀신, 요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단순히 알아들었으나, 지금에 와서야 나는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제아무리 사나운 맹수나 귀신, 요괴라 하더라도 이성과 지혜를 상실하고 양심을 저버린 인간보다는 더 무섭지 않으리라고. 이 세상에는 호랑이, 늑대, 이리 같은 맹수에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분명 있고, 또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이나 요괴에 관한 전설도 분명 있기는 있다. 그러나 수천수만의 인간을 비명에 죽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며, 수천수만의 인간을 학대받게 만드는 것도 역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잔혹한 행위를 합법화시키는 것이 암흑 정치요, 이런 잔혹한 행위를 포상하고 권장하는 것이야말로 병든 사회다.
비록 ‘문화대혁명’이 이십여 년 전에 마무리되고 이른바 ‘계급투쟁’이란 것도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처럼 그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저 옛날에 세도를 빙자하고 제멋대로 날뛰며 잔학무도한 짓을 저지르던 사람들과 마주친다. 저들은 이제 얼굴 가득 아첨 띤 미소를 머금고 내게 인사를 건네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저들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손히 허리 굽혀 답례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 가슴속 그득히 공포심을 품은 채로. 가는 길에 당시 저들이 ‘나쁜 사람’을 고문하던 몇 칸짜리 집을 지나칠 때마다, 비록 그 건물이 오래전에 손댈 수 없으리만치 낡아빠지고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폐허로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소름이 돋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마치 그 작은 돌다리에 애당초 ‘헤헤헤 귀신’ 따위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죽어라고 뜀박질하고 목청껏 고래고래 악을 쓰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는 확실히 굶주림과 외로움, 그리고 공포 속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숱한 고난을 겪고 참고 견뎌야 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았거니와 타락하지도 않고 어엿한 작가로 성장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길고 지루한 암흑의 세월을 보낼 수 있게 지탱해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도 못하는 세월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을까 희망하며 살아왔다. 사방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붉은 조류(潮流)로 가득 찬 시대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우의와 인간애와 관심을 얻을 수 있을까 희망하며 살아왔다. 공포는 내가 목청껏 노래 부르면서 돌다리 위를 뜀박질하게 만들었으며, 공포는 내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봉건으로 낙후된 시골 마을에서 도망쳐 나갈 역량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인류가 공포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기를 희망하지만, 공포란 것은 역시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공포 속에서 희망은 마치 암흑천지 속의 불빛처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춰주고, 아울러 우리에게 공포와 싸워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준다. 나는 장차 닥쳐올 미래의 시대에는 악한 사람이 빚어내는 공포는 갈수록 줄어들기를 희망하지만, 귀신과 요괴들이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나 괴담, 동화가 빚어내는 공포만큼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귀신과 요괴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와 동화야말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과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지향을 가득 품은 것이며, 또한 문학과 예술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縣) 문화국에서 일하는 사촌 아우가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형님, 요즈음 우리 현에서 발생한 큰 사건을 첨부해 보내드리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8월 7일, 오전 여덟시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현 사무처 건물 5층 보안실의 기밀 담당요원 샤오펑(小馮)은 형님의 동창생 펑궈칭(馮國慶)의 둘째딸입니다. 샤오펑은 그날 출근하자마자 보온병에 끓인 물을 담으려다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우는 소리를 듣고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두리번거리다가 소나무 맨 꼭대기 높다란 나뭇가지 초리에 희끄무레한 물건이 하나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처음에는 까마귀 녀석들이 거기에 둥지를 트는가 싶어 다소 시큰둥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이어 까마귀들이 마치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들처럼 번갈아가며 그 시커먼 물체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 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통이었습니다. 샤오펑은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보온병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나마 보온병이 깨지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었습니다.
때마침 문건 서류를 정리하던 샤오쉬(小許)—그 처녀 역시 형님이 아시는 옛 전우의 셋째딸입니다—마저 창틀 앞으로 달려가서 내다보다가 더욱 새된 목소리로 날카롭게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워낙 엄살 많고 지나치게 수선스러운 처녀였으니까요. 몇 분 후, 현 위원회 건물 남쪽으로 트인 창문들이 모조리 활짝 열리고 현 위원회 너르디너른 마당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말벌 집에 불이 났더라도 그런 대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의 머리통이 비록 만신창이로 까마귀들에게 쪼여 구멍이 뻥뻥 뚫렸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현 위원회 부서기 류푸(劉福)의 얼굴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참담할 정도로 창백해진 낯빛이 평소 그가 정성 들여 옻칠 먹이듯 새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의 검은빛을 한결 돋보이게 했습니다. 두 눈알은 벌써 까마귀란 놈들이 쪼아 먹어 눈빛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숨이 끊기던 임종의 순간에 공포와 두려움에 질렸는지 분노하고 있었는지 상상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전혀 무감각한 상태였는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는지도 알 도리가 없었지요.
누군가 한마디 했습니다. “어쩌면 까마귀들이 눈알을 쪼아 먹은 게 아닌지도 몰라. 범인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거든. 왜냐하면 서양에는 특수한 기술을 써서 죽은 자의 망막에 담긴 정보를 꺼내어 컴퓨터에 입력해 범행의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그런 점으로 미루어보자면, 이 범행은 범죄학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고도의 지능을 보유한 자가 저지른 짓이지, 절대로 일반적인 악당은 아니라고 판단되네.”
또 한 사람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닭 잡은 피로 원숭이를 겁먹게 한다(殺鷄儆猴)’는 속담 못 들어봤나? 사람의 머리통을 베어다 현 위원회 안마당에 걸어놓았다는 것은 일벌백계로 남한테 경고한다는 뜻이 있네. 그런 만큼 정치적인 의도를 띤 것이 분명해. 따라서 일반적인 치정 살인이나 재물을 탐낸 살인 사건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을 듯싶네.”
류 부서기는 조직부장이 천거해서 들어온 인물입니다. 간부들의 발탁과 임용을 주관해온 지난 여러 해 동안 과묵할 정도로 말수가 적고 사람 됨됨이도 신중해 평판도 좋고 입소문도 나쁘지 않은 사람인데, 도대체 어떤 자가 이렇듯 훌륭한 간부를 잔인하게 죽였단 말인가요?
소문을 듣고 우리 현 공안국 소속 경찰차들이 거의 총출동하여 고막이 찢어지도록 시끄럽게 울리는 경적과 호루라기 소리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온통 파묻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현 소방중대 소속 소방차 한 대가 안마당으로 굴러 들어오더니 히말라야산 소나무 줄기에 사다리를 걸쳐 세웠고 황색 소방복을 입은 소방대원 하나가 기어 올라가 붉은빛 실크 보자기를 펼쳐서 사람의 머리통을 떼어가지고 엄숙한 기색으로 조심스레 싸기 시작했습니다. 먹잇감을 잃게 된 까마귀들이 분노한 나머지 소방대원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으나, 그는 팔뚝 하나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보호한 채, 나머지 한 팔로 머리통을 안아 끼고 재빠르게 사다리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머리통은 법의학 의사에게 넘겨졌습니다. 흰 가운을 헐렁헐렁하게 걸친 의사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떠받들고 경찰차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리고 경광등을 번쩍번쩍 돌리면서 출발했습니다. 시 소속 경찰차와 시 위원회 지도급 간부들이 탄 차들마저 뒤따라 들이닥치는 통에, 그 널따란 앞마당에조차 차량을 세울 데가 없어 곧바로 건물 앞 융안 대로(永安大路)에 줄줄이 주차시켰습니다. 현에 소속된 테러 방지 경찰과 무장경찰 중대 병력들이 벌써부터 큰길에 인의 장막을 펼치고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도로봉쇄망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행인들과 자전거 행렬이 길거리 양편 바리케이드 끄트머리에서 참새 떼처럼 우글우글 들끓으며 구경하느라 너나 할 것 없이 머리통을 들이밀랴 고함을 지르랴 백중사리 때를 만난 듯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경찰이 메가폰을 들고 행인들에게 길을 돌아가라고 외쳐댔으나, 인파는 기를 쓰고 자꾸만 앞으로 밀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씨(馬氏) 성을 가진 공안국 정치부위원장이 권총을 꺼내 하늘에다 대고 공포를 몇 발 경고 사격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아쉬운 기색으로 마지못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이렌 소리는 그쳤으나 차량 지붕에 얹힌 경광등이 감시자의 눈초리가 휘둘러보듯 가슴속까지 써늘하게 만드는 빛줄기를 번쩍번쩍 돌아가며 계속 비췄습니다. 현 위원회 건물의 모든 창문은 경찰의 명령에 따라 빠짐없이 닫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빛은 여전히 자기네도 모르게 바깥쪽을 향해 기울어졌습니다. 설사 저들의 시선이 사팔뜨기처럼 바깥쪽을 곁눈질하지 않고 책상 위의 책이나 서류 또는 유리판 아래 끼워놓은 사진을 보고 있다 해도, 그 머릿속에는 역시…… 그래요, 좋습니다, 형님. 난 솔직히 말해서 형님에게 류 부서기가 피살된 직후 현 위원회 건물 안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표면적으로 봐선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상임위원들은 5층 소회의실에 숨듯이 몰려 앉아 긴급회의를 열고, 각 사무실 사람들은 여느 때보다 더 엄숙한 태도로 집무에 열중했습니다. 편협하고 좀스런 상사들이 하찮은 일로 꼬투리 잡아 부하를 매섭게 질책하는가 하면, 부하들은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자기네들의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앓이만 할 뿐 말로 전할 수 없는 불만을 품고 있었지요.
소문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현성(縣城) 안에 유일한 별 셋짜리 호텔의 호사스런 객실에서 류 부서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 말입니다. 시신은 짙은 쪽빛 양복 차림에 자줏빛 넥타이를 맨 채 단정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어깨 위에 머리통만 얹으면 곧바로 보고서라도 작성할 것처럼 말입니다. 객실 청소를 맡은 종업원이 반나절 동안이나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있다가 손님의 머리통이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했답니다. 해괴한 노릇은, 목이 떨어졌는데도 핏자국이 한 방울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누르스름한 미색 화학섬유 양탄자를 강력한 진공청소기로 빨아내어 먼지 한 톨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이 끊긴 부위는 마치 인두로 지진 것처럼 매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속냉동기술로 처리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매끄러웠다고도 합니다. 객실 안에는 그 어떤 격투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범인이 남겨놓았을 법한 단서 역시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해괴한 범죄현장에 현과 시에서 파견 나온 형사들의 골머리가 푹푹 썩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상급 성(省) 공안청 소속 사건 해결 전문가들이 차를 몰고 총알같이 날아왔습니다. 현장을 본 그들 역시 두 토막 난 시체를 놓고 연구했으나 의혹을 풀 도리가 없었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두 가지에 집중되었습니다. 도대체 류 부서기의 피가 어디로 흘러갔을까? 범인은 어떤 흉기를 썼기에 이렇듯 깔끔하게 처리했을까?
성, 시, 현의 사건 해결 전문가들이 머리통을 쥐어짜며 생각에 잠겼을 무렵, 하나의 전설이 현성의 골목 모퉁이 구석구석을 바람처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하다못해 융안 대로상의 주민들이 가장 애용하는 건물 두 군데, 외벽에 초록빛 모자이크 타일을 붙이고 안쪽은 백색 모자이크 타일을 붙인 공동변소까지 빠뜨리지 않고—소변기 위쪽 백색 모자이크 타일 벽에 누군가가—어쩌면 귀신일지도 모르는 자가 그림 그리는 붓으로 큼지막하게 이렇게 써놓았다고 합니다.
달빛을 베다(月光斬)
이 한마디에 담긴 전설은 당연히 우리 현성에서 향(鄕), 촌(村)으로 파급되었고, 심지어는 바깥 현, 바깥 성, 외국에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이 글자들은 하나같이 축구공만큼이나 커다랗고 필적은 치졸하기 짝이 없어 얼핏 보기엔 장난꾸러기 개구쟁이의 낙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고 연구해보면 또 서법의 기초를 착실히 닦은 사람이 필체를 속이고 일부러 서투르게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째서 ‘달빛을 베다’라고 했을까? 사람들은 곧바로 홍콩에서 촬영된 텔레비전 연속극 제목을 연상해냈습니다. 극중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시퍼런 서슬이 번쩍거리는 보도(寶刀)를 손에 잡고 전적으로 달 밝은 보름날 밤만 골라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전설 속의 ‘달빛 베기’는 홍콩 텔레비전 드라마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전설 속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1958년, ‘대련강철(大煉鋼鐵)’ 운동 시기*에 도심 외곽 몇몇 기관의 공사(公司) 간부들이 갑작스레 기발한 착상을 내놓았습니다. 새로 지은 화장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신설된 시체 소각로를 강철 제련에 이용하자는 얘기였습니다. 화장터 기술요원은 이 사람들에게 해명했습니다. 시체 소각로와 강철을 제련하는 용광로는 근본적으로 같은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고집불통의 간부들은 화장터 기술요원이 혀가 닳아빠지도록 설득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떠들어라, 우리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 테다. 한마디로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톈허와(天河洼) 국영농장에 가서 우파분자 두 사람을 초빙해 시체 소각로를 용광로로 개조하는 데 거들게 하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두 사람의 우파분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름이 ‘런니싱(任你行)’, 다른 한 명은 ‘링후퉤이(令狐退)’**라고 불렸답니다. 런니싱은 원래 강철공장의 부수석 기사(技士) 출신으로 소련에 유학해서 준박사(準博士) 학위까지 획득한 정규 엔지니어였습니다. 그리고 링후퉤이는 성(省) 단위 야금학교 교감 출신으로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재료학(材料學) 전문가였습니다. 이들 두 진정한 전문가의 수준은 당시 재래식 방법으로 용광로를 세워 제련하던 사람들과는 천양지차로 달랐습니다. 만약 저들이 우파분자로 분리되지 않았던들 우리처럼 보잘것없이 작은 현성(縣城)에선 여덟 명이 떠메는 커다란 가마를 동원한다 해도 초빙해올 수 없었겠지만, 우파분자로 낙인찍히고 나자 단 한 번 초빙에 저들을 거뜬히 모셔왔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시체 소각로를 제련 용광로로 개조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놋쇠 요강 따위를 던져주었다 해도 황금을 녹이는 도가니로 개조할 수 있었을 겁니다. 드디어 시체 소각로를 개조한 용광로에서 쪽빛이 나도록 순수한 강철 한 덩어리가 제련되어 나왔습니다. 그 강철 덩어리는 마치 임금님의 왕비가 구리 기둥을 부여안고 산고를 치른 끝에 낳은 왕자처럼 신기하고도 현묘했습니다. 그들이 용광로에 던져 넣은 것은 다 녹슬어빠진 일본군 철모 백여 개, 무쇠 가마솥 오십여 개, 무덤을 파헤쳐 죽은 이들의 관에서 뽑아낸 못 만여 개, 거기에 또 뤄한쳰(羅漢錢)이란 이름으로 쓰이던 옛날 엽전 만여 닢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광로에서 흘러나온 것은 한 국자도 채우지 못할 만큼 작은 양의 쇳물이었습니다.
*1958년 이른바 ‘대약진 운동’ 시대, 마오쩌둥이 강철과 기타 주요 공산품의 생산량을 십오 년 이내에 영국의 생산수준을 뛰어넘도록 지시한 목표를 추진하던 시기. 마오쩌둥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행정 수단을 총동원하여 재래식과 현대식이 혼합된 방식으로 추진했으나, 결과적으로 인민의 노동력과 재산만 허비한 채 참담한 손실을 초래하고 중단되었다.
** 홍콩 작가 김용의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의 이름을 패러디한 것. 소설에서 ‘마교’로 지탄받는 일월신교 교주 임아행(任我行)의 이름을 풀이하면 ‘내 멋대로 한다’는 뜻인데, 이것을 뒤집어 런니싱(任你行行), 곧 ‘네 멋대로 해라’의 뜻으로 바꿔 썼다. 아울러 또 다른 주인공인 영호충(令狐沖)의 이름자 ‘돌격하다, 들이받다’란 뜻의 ‘충(沖)’ 자를 뒤집어 ‘퇴각하다, 물러서다’라는 뜻의 ‘퇴(退)’로 바꿔놓아 풍자적인 의미를 띠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금속의 정화(精華)로서, 일곱 가닥 매서운 쪽빛 광채가 곧바로 하늘 끝을 찌르고, 일곱 개의 북두칠성이 쪽빛 광채에 따라 쇳물 담긴 국자에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것들이 강림했을 때 금빛 광채와 쪽빛 광채가 극렬하게 마찰을 일으키고 눈부시도록 강렬한 광선을 쏘아냈으며, 아울러 얼음이 탈 때처럼 사람을 혼미 상태에 빠뜨리는 짙은 향기를 발산했습니다—얼음을 숯불에 태우다니, 그것은 우리같이 못된 개구쟁이들이 곧잘 하던 장난질이었지요. 아무튼 제가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물리학 원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압니다만, 어차피 이것은 전설이니까 우선 터무니없는 얘기라도 적당히 들어두시면 됩니다. 북두칠성이 쇳물 담긴 국자에 떨어져 들어간 직후, 표면장력을 일으켰던 쇳물이 국자 테두리에 딱 알맞게 가지런히 수평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우파분자 가운데 한 사람, 링후퉤이가 했을 수도 있고 런니싱이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좌우간에 손수 쇳물 담긴 국자를 받들어다 미리 준비해둔 장방형의 거푸집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들은 거푸집을 백여 개나 준비했으나, 실제로 쓰인 것은 딱 한 개, 그것도 거푸집 용량의 절반 정도만 채웠을 뿐이었습니다. 이 강철 덩어리—우선 급한 대로 강철이라고 부르지요—는 거푸집 속에서 천천히 식어갔습니다. 강철을 제련하던 용광로의 불길도 꺼졌습니다. 단지 인근에 화장장을 갖춘 인민병원의 재래식 소각로 불씨만이 모락모락 피어났을 따름입니다. 얼마 안 있어 인민병원의 재래식 소각로 불씨마저 꺼졌습니다. 그 무렵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덩그러니 떠올라 옅디옅은 코발트 빛 광휘를 온 세상에 쏘아 비추고, 문제의 강철 덩어리는 거푸집 속에서 어스름한 코발트 빛 광채를 발산하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장엄하고도 신성한 감회를 자아냈습니다.
코발트 빛깔을 지닌 문제의 강철 덩어리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주 여러 가지 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어느 설, 어느 견해든 도무지 조사할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강철 제련에 참여했던 사람들 태반이 작고하고,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제공한 증언 모두가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애매모호하여, 그 증언들을 토대로 조사에 나섰다가는 마치 태양 광선이 온 세상천지 사면팔방에 흩뿌려지는 것처럼, 어떤 것은 식물로 바뀌고 어떤 것은 기체로 화하고 또 어떤 것은 인류가 도저히 인식할 길이 없는 물질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빠르게, 또 사람을 흥분시키는 전설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우리 현성 동문 밖에 원래 둥관춘(東關村)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 리씨(李氏) 성을 가진 대장장이가 살았답니다. 대장장이 리씨는 나이 육십에 상처를 하였고, 성년이 된 아들 셋을 두었으나, 이들은 모두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고 부친을 따라서 대장장이로 생업을 삼았습니다. 네 부자가 하나같이 까막눈의 문맹이라, 설날이 되자 마을에서 개인적으로 서당 훈장 노릇을 한 적이 있는 선비한테 문기둥에 붙일 춘련(春聯) 대구(對句) 한 벌을 써달라고 청했습니다. 한데 이 선비란 작자가 해학을 즐기는 익살꾼이라, 붓을 들어 이렇게 휘갈겨 썼다고 합니다.
한 집안에 홀아비 노총각만 넷이니(一門四光棍),
부자 넷에 굵다란 망치가 여덟 자루일세(父子八大錘).
그리고 상인방(上引枋)에 가로 붙일 시구는 규격에 맞지 않게 딱 세 글자만 써주었답니다.
뚝심에는 뚝심으로(硬碰硬)
점잖게 쌍소리를 섞어 쓴 익살맞은 이 춘련 대구는 아주 유명해져서 우리 현성 안의 사람들 치고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전설은 바로 이 대장장이 부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대소동이 벌어지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저녁, 대장간 화덕 불을 재로 덮어두고 나서 옥수수를 가루로 빻아 끓인 향기로운 강냉이죽 냄새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대장장이는 엄청난 대식가들이라 버들가지로 짠 알곡바구니보다 더 큰 두 귀 달린 무쇠 솥을 화덕 위에 걸어놓고, 솥에 황금빛 강냉이죽을 무려 한 초롱이나 족히 되게 쏟아 부었습니다. 삼형제는 무쇠 솥 주변에 빙 둘러서서, 제각기 큼지막한 뚝배기 사발에 강냉이죽을 담아 하나씩 손에 받쳐 들고 후룩후룩 쩝쩝 소리가 나도록 아주 맛있게 들이마셨습니다. 집 안이 온통 죽 끓는 소리였지만 이따금 늙은 대장장이 아비의 끙끙 앓는 소리가 섞여 나왔습니다. 늙은 대장장이는 병이 들어 흙벽 한 귀퉁이에 거적자리를 깔고 다 낡아빠진 양가죽 이불 한 장을 덮어쓴 채 웅크려 앉아 있었습니다. 화덕에 정처 없이 살랑살랑 피어오르는 쪽빛 불씨가 어쩌다 늙은 대장장이의 구릿빛 깡마른 얼굴을 비추고 나서 이내 스러지고, 방 안은 또다시 깊은 어둠 속에 잠겼습니다.
형들보다 마음씨가 세심한 막내아들 라오싼(老三)이 입 안 가득히 강냉이죽을 머금은 채 흐리멍덩한 말투로 늙은 아버지에게 한마디 건넸습니다. “아버지, 그래도 죽 한 사발 드셔보세요. 사람은 무쇠요, 밥은 강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한 끼니라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 견디지 못한다니까요!”
늙은 대장장이가 쿨럭쿨럭 잔기침을 한바탕 쏟아내더니 헐떡헐떡 숨 가쁘게 물었습니다. “장터에서 양식거리로 사온 강냉이 값이 한 근에 몇 전이나 올랐느냐?”
맏아들 라오다(老大)가 걸쭉한 목소리로 퉁명스레 대꾸했습니다. “한 근 값이 얼마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오르면 오르라고 하죠! 강물이 불어나면 배가 뜨고, 양식 값이 오르면 우리네 공임도 따라서 올리는 거 아닌가요?”
둘째아들 라오얼(老二)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올해 또 얼마나 큰 소동이 날지 모르는데, 양식 값이 몇 푼 오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오늘 먹고 살면 됐지, 내일 걱정일랑 개나 물어가라고 하죠!”
늙은 대장장이가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세 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오늘 밤에 잔업을 좀 해야겠다. 징강산(井岡山) 홍위병 녀석들이 주문한 쇠꼬챙이를 무더기로 만들어야 할 텐데, 돈 몇 푼이라도 더 벌어 준비해두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거든 아예 관외(關外)로 도망치자꾸나.”
막내가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아버지, 관외라고 혼란스럽지 않을 듯싶습니까? 홍위병들이 불어대는 나팔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사해 오호(四海五湖)가 온통 빨갱이 세상’이란 말이에요!”
대장장이 네 부자는 이래저래 떠들고 마셔대면서 현성 안쪽에서 한번씩 울려오는 기관차의 처량한 기적 소리를 듣고, 열차가 역으로 진입할 때마다 구르는 바퀴에 지표면이 들썩거리는 진동을 느끼느라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살그머니 대장간 안으로 스며드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돈점박이 표범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집 안에 번뜩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양귀비 꽃떨기만 한 쪽빛 불씨가 덮어두었던 화덕 잿더미 속에서 피어올라 허공에 떠돌면서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은 채 이제 막 들어선 불청객의 모습을 비췄습니다.
손님은 나이가 어림잡아 열대여섯쯤 들어 보이는 아가씨였습니다. 초록으로 물들인 모조품 군복을 걸치고, 허리께에 유별나게 폭이 넓은 쇠가죽 허리띠를 맨 것이 그녀의 몸매를 한결 영특하고도 용맹스러운 기품으로 돋보이게 해주었습니다.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아 자그만 댕기를 드리우고, 짙은 두 눈썹에 부리부리하게 커다란 두 눈망울 하며 통마늘 코에 길게 째진 입과 두툼한 입술이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한 기질을 드러냈습니다. 당연히 그녀의 팔뚝에는 붉은 완장이 둘려 있었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가슴에 품어 안고 있는 검정 보따리였는데, 얼핏 봐도 엄청나게 무거운 듯싶은 그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대장장이 삼형제는 하나같이 한창 혈기 방장한 노총각 건달 녀석들인 데다, 불쑥 찾아든 손님이 어린 계집아이이기는 해도 여자는 여자인지라, 모두들 화끈 달아오른 열정적인 눈빛으로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았습니다. 아가씨가 품고 있던 보따리를 땅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덜커덕!’ 둔탁할 정도로 묵직한 소리가 나면서 땅바닥마저 흔들렸습니다.
“여봐, 아가씨, 징강산 소속이여?” 셋째 막내가 물었습니다. “당신네들이 쓸 창 꼬챙이는 내일에나 두드려 만들 수 있어!”
곧이어 둘째도 한마디 던졌습니다. “돌아가서 당신네 우두머리한테 전해! 맞돈 내면 물건을 넘겨주겠노라고 말이야!”
맏이 역시 빠지지 않았습니다. “강냉이 가격도 올랐겠다, 석탄 값도 올랐겠다, 그러니 우리가 만드는 쇠꼬챙이 값도 올랐어. 한 대에 이 위안씩 내야 할 거야!”
아가씨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양손 엄지와 식지를 허리띠에 꾹 질러 겉저고리 옷깃을 팽팽하게 가다듬더니 다시 허리띠 밑의 옷깃마저 아래로 잡아당겨 편 다음, 앞가슴을 불쑥 내밀고 쌀쌀맞게 응대했습니다. “난 징강산 소속도 아니고 둥팡훙(東方紅) 소속도 아니에요! 나는 독립부대 소속이에요!”
막내는 이 소리를 듣고 웃었습니다. “하하, 누굴 속이려고? 우리 현성에는 애당초 그런 홍위병 조직이 없다니까.”
아가씨가 내처 대꾸했습니다. “난 당신들하고 쓸데없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한테 좋은 강철이 한 덩어리 있는데, 칼 한 자루 만들어 쓰게 당신네들이 도와주세요.”
“좋은 강철이라니, 어디 한번 꺼내 보여줘.” 막내의 요구에, 아가씨는 땅바닥에 쭈그려 앉더니 보따리 매듭을 끄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검정 보자기 한 겹, 이어서 쪽빛 보자기 한 겹, 그러고 나서는 붉은 보자기 한 겹, 마지막으로 흰 보자기 한 겹이었습니다. 마지막 흰 보자기를 끌렀을 때 화덕 위에 떠돌던 불씨가 겁을 먹은 듯 담보 작은 생쥐처럼 석탄 무더기 속으로 훌쩍 파고 들어갔습니다. 연기에 쏘이고 불티에 찌들어 시커멓게 빛바랜 대장간 바닥이 갑작스레 어스름한 코발트 빛깔의 빛에 쬐여 사면 벽과 집 안까지 온통 밝게 빛나는 유약으로 채색된 것처럼 가슴이 설레도록 환한 빛을 발산했습니다. 대장장이 형제들은 강냉이죽을 게걸스럽게 마시던 것도 잊었는지, 하나같이 죽사발을 손에 들고 그 커다란 입을 딱 벌린 채 두 눈으로 멍청하니 그 강철 덩어리만 노려보았습니다.
신비스런 강철 덩어리는 흰 보자기 위에 누워 있습니다. 마치 아득히 머나먼 상고시대 물고기 화석처럼. 계집아이가 손가락을 내밀어 그 강철 덩어리를 가볍게 건드리더니 재빨리 움츠렸습니다. 기막히도록 차가운 감촉이었는지, 아니면 뜨거운 불덩어리를 만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녀가 도발적인 말투로 충동질했습니다. “당신들, 다 보았죠? 바로 이런 강철 덩어리예요. 난 당신네들이 이 쇳덩어리로 칼 한 자루를 만들어주었으면 해요. 모양새의 도면도 가져왔어요. 하지만 당신네들한테 그대로 만들어낼 솜씨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종알종알 지껄이면서, 그녀는 안주머니에서 아이들이 장난삼아 터뜨리는 종이 폭죽 형태로 차곡차곡 접힌 종잇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종잇장을 활짝 펼쳐서 제일 가까이 있는 막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모양으로 만들어줘요.”
종잇장을 받아든 막내가 강철 덩어리의 빛에 비춰가며 거기에 그려진 도형을 훑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낡아빠진 옛날 양식의 단도(單刀)였습니다. 칼자루는 손잡이 전체가 둥글둥글한 형태였고, 매끄럽게 반원형으로 구부러진 칼등은 완연히 묘령의 처녀의 등허리 뼈를 연상시켰습니다. 칼끝과 칼등이 맞닿은 접합 부분은 둔각을 이루고, 칼날이 뻗어나간 윤곽선은 영락없이 물고기의 배였습니다.
“이런 칼이라면 두드려 만들기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지.” 막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면서 종잇장을 둘째한테 건네주었습니다. 둘째가 보고 나서 또 맏이에게 넘겼습니다. 종잇장을 받아든 맏이가 물었습니다. “아가씨, 공전을 낼 수 있는지 모르겠군. 우리 품삯이 얼만지 알아?”
아가씨가 차갑게 코웃음 쳤습니다. “흥! 당신네가 이 강철 덩어리를 불려가지고 이런 모양새로 칼 한 자루 만들 수만 있다면 가공비 따위야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내죠.”
“꼬마 아가씨, 큰소리치지 말라고! 네 아버지가 은행장도 아닐 텐데, 허풍이 너무 센 거 아냐? 설사 은행장이라 해도 그만한 돈은 너희 집에 있을 리 없을 텐데, 안 그래?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쇳덩어리 다듬기만 삼십 년을 해온 사람이야. 우리 아버님은 대장장이 생활 육십 년이고. 그동안 세상천지 어떤 강철이든 못 보았을 듯싶어? 세상천지 어떤 쇳덩어리인들 깨부수지 못한 게 있는 줄 알아? 어디 이따위 형광 가루 칠한 쇳덩어리를 가져와서 얼렁뚱땅 우리를 속여 넘길 작정이야?”
아가씨가 또 한 번 차갑게 코웃음 치면서 앞으로 몸을 숙이기 무섭게 맏이가 들고 있던 종잇장을 덥석 빼앗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서, 쭈그린 자세로 문제의 강철 덩어리를 보자기에 도로 싸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줄곧 벽면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던 늙은 대장장이가 헐떡헐떡 숨 가쁜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이, 아가씨. 잠깐만, 그거 보자기에 싸지 말고 기다려줘. 얘, 셋째야. 날 좀 부축해다오. 내가 좀 보아야겠다.”
라오싼이 다가가서 늙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습니다. 늙은 대장장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걸음걸이로 위태롭게 다가오더니 머리 한 번 숙여 보고서 이내 두 눈 속에 광채가 번쩍 돋아났습니다. 그리고 얼굴 근육이 급작스레 팽팽히 당겨졌습니다. 병든 행색이 삽시간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땅바닥에 쭈그려 앉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쳐들어 아가씨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 숙여 강철 덩어리를 굽어보았습니다. 머리를 쳐들었다가 숙이고, 또 쳐들었다가 숙이고…… 그러고 나서 손길을 내밀어 코발트 빛깔의 강철 덩어리를 툭 건드려봅니다. 한 번 또 한 번…… 손끝으로 건드릴 때마다 흡사 잠자리란 놈이 수면을 찍듯 아주 가볍게 말입니다. 그런 뒤에 슬금슬금 일어서더니 두 손 모아 주먹을 맞쥐고 아주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정중한 예를 갖추고 나자, 그는 무척이나 경건하고 조심스런 말씨로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습니다. “아가씨, 내 아들 녀석들이 불손하게 거친 말을 내뱉어 여러모로 실례가 많았소이다. 우리 같은 재래식 대장장이들은 그저 넉가래, 곡괭이, 낫, 호미 따위 농사꾼 연장이나 두드려 만들어주고 그렁저렁 옥수수죽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왔소. 이런 보물일랑 아무래도 달리 고명한 분을 찾아가서 맡기는 게 좋을 듯싶소.”
아가씨의 입에서 청승맞은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모두들 대장장이 리씨 집안의 조상은 청나라 때 강희대제(康熙大帝)를 위해 도룡보도(屠龍寶刀)를 주조한 궁궐의 어용철장(御用鐵匠)이었다던데, 이제 보니 변변치 못하게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비할 데 없이 실망스런 눈빛으로 대장장이 네 부자를 쳐다보더니, 문제의 강철 덩어리를 보자기에 도로 쌌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힘겹게 안아들고 일어나 휘청거리는 비틀걸음으로 바깥쪽을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집 안은 삽시간에 또다시 깜깜절벽 어둠 숙으로 잠겨들었습니다. 화덕 잿더미에 숨어들었던 쪽빛 불씨가 떠오르면서 대장장이 부자 네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놓은 절간 사천왕 신상의 얄궂은 표정들이었습니다. 아가씨의 뒷모습이 마치 돈점박이 표범처럼 문턱 바깥으로 번뜩 사라지는 찰나, 늙은 대장장이가 비통하고도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가씨! 어딜 가려는 게요?”
“이 강철 덩어리를 난완(南灣) 물굽이에 던져버릴 거예요. 이게 강물 밑바닥 수렁 속에 깊숙이 잠겨서 영영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
“돌아와요, 아가씨!” 늙은 대장장이가 소리쳤습니다. “이게 내 운명이라면, 도망친다고 해서 도망칠 수도 없겠구려.”
“이걸 정복하기로 결정하셨나요?” 돌아선 아가씨의 몸놀림이 마치 돈점박이 표범처럼 날래게 대장간 화덕 곁에 와 섰습니다. 그 눈빛에 놀라움과 희열이 반짝거렸습니다. “어르신이 이것을 놓치지 않을 줄 내 진작 알고 있었죠. 훌륭한 대장장이라면 이런 강철 덩어리가 세상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을 거예요. 그래서 기묘하고도 특별한 방식으로 그것을 자기 의지대로 다뤄 세상에 둘도 없는 명검으로 바꿔놓고야 말 테죠.”
늙은 대장장이는 웃통에 걸쳤던 다 낡아빠진 홑적삼을 벗어던지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앞가슴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물통에서 냉수 한 바가지를 떠가지고 꿀꺽꿀꺽 소리가 나도록 시원스레 목구멍으로 쏟아 넣더니 입술 언저리를 쓰윽 문지르고 나서 허리를 곧게 폈습니다. 삽시간에 늙은 대장장이의 모습이 마치 스무 살쯤 젊어 보였습니다. 아니 스무 살이라기보다 서른 살쯤 되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아무튼 그는 갑자기 용맹스런 수사자라도 된 것처럼 병자답지 않게 씩씩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세 아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불을 지펴라! 어서 화덕 불을 살리라고! 불길이 활활 솟구치도록 불을 지펴라! 불을 지피라니까!”
늙은 대장장이의 둘째아들이 부집게로 잿더미에 덮인 조개탄을 이곳저곳 들쑤셔대더니 풀무 손잡이를 쥐고 힘차게 당겼다 밀었다 하기를 계속했습니다. 씨익 펄떡, 씨익 펄떡, 풀무질하는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대장간 천장까지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불티가 사면팔방으로 어지러이 튀어 날고 이어서 조개탄 더미 속에 불씨가 나타났습니다. 늙은 대장장이는 아가씨의 품에서 문제의 보따리를 넘겨받아 집 안 북쪽 정면 벽에 안치된 조상님들의 위패 앞에 내려놓고 무릎 꿇어 이른바 삼궤 구고(三跪九叩)의 대례를 올렸습니다. 무릎 한 번 꿇을 때마다 땅바닥에 이마를 세 차례 조아리고…… 이것은 세 차례 무릎 꿇고 이마 조아리기를 아홉 번 하는 임금님에 대한 큰절이었습니다. 대례를 마치자 그는 보따리를 끄르면서 애처롭고도 간절하게 축원을 드렸습니다. “역대 조상님들이시여, 보우하소서!”
축원을 마친 그는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입에 넣고 깨물어 터뜨렸습니다. 코발트의 강철 빛깔에 비춰져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마저 쪽빛이 되었습니다. 핏방울이 강철 덩어리 위에 떨어질 때마다 딸그랑딸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마치 투명하도록 맑디맑은 얼음 덩어리에 진주가 떨어지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깨물어 핏방울을 떨어뜨렸습니다. 이번에는 치지직, 치익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마치 그 강철 덩어리가 뜨겁게 달궈지는 소리 같았습니다.
대장장이 아들 셋은 괴상야릇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피를 섞어 빚은 만두를 연잎에 싸서 부뚜막 아궁이에 구웠을 때 맡은 냄새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혈제(血祭)를 다 끝내자, 강철의 코발트 빛깔이 옅어지고 담담해졌습니다. 처음 꺼내 놓았을 때의 굳세고 맹렬한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따사롭고 부드러운 기운이 늘어나 흡사 깊은 가을날 해맑은 보름달의 광휘와 닮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늙은 대장장이는 터진 손가락 상처를 헝겊으로 싸매지도 않은 채 그 강철 덩어리를 옮겨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덕의 불길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제단에서 화덕으로 옮겨가는 태도가 마치 오 대째 외아들로 이어내린 종손의 갓난아기를 안아 모시듯 조심스럽고도 근엄했습니다.
일반 강철을 불릴 때보다 십여 곱절이나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코발트 빛깔의 강철이 완전히 달궈졌습니다. 늙은이와 젊은이들 셋이 특수한 경우에만 쓰는 대형 부집게로 코발트 빛깔의 강철 덩어리를 모루 위에 집어다 놓았을 때는 대장간 건물 안이 온통 얼음처럼 투명한 세계로 바뀌고, 집 안의 사람과 물체들 모두가 마치 아득히 머나먼 상고시대 유물이 옅은 쪽빛 호박(琥珀) 안에 응고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쯤 되어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관찰해야만 물고기 형태의 강철 덩어리가 모루 위에 누워 살아 있는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고 그칠 새 없이 온 몸뚱이를 부들부들 떠는 형상을 알아볼 수 있었지요. 그 몸부림이 고통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흥분 상태였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늙은 대장장이가 작은 쇠망치를 손에 잡고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불려놓은 코발트 빛깔의 강철 덩어리를 두드린다기보다 어루만진다고 얘기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늑대, 호랑이같이 사나운 세 아들이 저마다 팔 킬로그램이 넘는 큼지막한 쇠망치를 한 자루씩 잡고 번갈아가며 한 차례씩 두들겼습니다. 이어서 늙은 대장장이의 자그만 쇠망치가 닭 모이 쪼듯 잽싼 동작으로 두들기기 시작했습니다. 두들기는 사이사이로 세 아들의 커다란 쇠망치가 신속하고도 절도 있게 번차례로 돌아가며 아주 정확하게 내리쳤습니다. 해괴한 것은, 무거운 쇠망치로 쇳덩이를 내리치는데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부자 넷이서 커다란 쇠망치를 휘둘러 치는 쇳소리가 대문 밖 큰길의 멀리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들리고 열차의 기적 소리마저 덮을 정도로 크게 울려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듯 힘차게 두들기고 힘겨운 육체노동이 극렬하기 짝이 없는데, 담장 모퉁이의 귀뚜라미 우는 소리조차 귓속에 담겨 뭇사람들에게 깊은 가을의 서글픔과 처량함을 느끼게 만들고 잠시 피었다가 스러지는 생명의 짧음을 한탄하게 만들다니 이상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손님으로 찾아온 어린 아가씨는 어쩌고 있었을까요? 그 처녀는 벽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턱을 괴고, 마치 사냥감을 포식한 뒤 큰 나무 가장귀에 뛰어올라 웅크린 자세로 휴식을 취하는 돈점박이 표범처럼 실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습니다. 더욱 이상야릇한 것은, 이렇듯 무지막지한 힘줄기로 맹렬하게 강철 덩어리를 두들기는데 모루 위에서 불티라곤 반점도 튕겨 나오거나 흩뿌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느 때 이들 대장장이 부자 넷이 쇳덩어리를 두들기면 불티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사면 벽에 부딪혔다가 도로 튕겨 나오기 일쑤요, 게다가 후드득후드득 쏟아져 나오는 소리까지, 멀리서 보고 들으면 영락없이 경축행사를 거행할 때 쏘아 올리는 폭죽 꽃불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단조(鍛造)하기를 꼬박 한 시간 남짓, 세 아들의 몸뚱이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났습니다. 땀투성이 몸뚱이가 마치 끓는 기름 가마솥에서 갓 끄집어낸 세 가닥 꽈배기처럼 매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늙은 대장장이만큼은 땀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늙은 대장장이의 손에서 작은 쇠망치 동작이 차츰 느려졌습니다. 세 아들의 큰 쇠망치질도 덩달아 완만해졌습니다. 작은 쇠망치질이 더욱 느려졌습니다. 여기 한 번 땡그랑, 저기 한 번 땡그랑, 마치 모이를 포식한 닭 한 마리가 쌀 무더기를 헤치고 그 속에서 쌀벌레만 골라 쪼아 먹는 형국이 완연했습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가늘게 뜬 실눈으로 흘겨보는 늙은 대장장이의 표정과 자태마저 영락없는 검정 수탉을 닮았습니다. 크고 작은 망치질이 갈수록 점점 더 느려집니다. 땡그랑, 땡그랑, 작은 쇠망치 소리입니다. 땅! 땅! 땅! 커다란 쇠망치로 왁살스레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땡그랑, 땅! 땡그랑, 땅! 이윽고 작은 쇠망치가 땅바닥에 내던져지고 오뚝 선 망치 자루가 몇 번 좌우로 흔들리다가 끝내 정지했습니다. 아들 셋도 마찬가지, 썩은 고목 세 그루처럼 땅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습니다. 오로지 늙은 대장장이만 여전히 서 있을 뿐입니다.
화덕 속의 불꽃이 절반쯤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쪽빛 불씨가 마치 미풍에 나부끼는 비단 실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늙은 대장장이의 정수리가 벗겨진 대머리처럼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습니다. 양쪽으로 축 늘어뜨린 입술하며, 쭈글쭈글한 목덜미의 주름살이 그를 단번에 스무 살이나 도로 늙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서른 살쯤 늙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억지로 버텨선 채 눈빛만으로 그 어린 아가씨를 불렀습니다. 어린 아가씨가 쭈뼛쭈뼛 모루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러고는 우선 늙은 대장장이에게 눈길을 한 차례 던지고 나서 고개 숙여 모루 위를 굽어보았습니다. 그녀가 또다시 머리를 쳐들고 늙은 대장장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얼굴이 온통 의혹에 찬 기색이었습니다. 그녀가 의혹을 품었다고 탓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우선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그 기이한 코발트 빛깔의 강철 덩어리가 대장장이 부자들이 휘두르는 망치질에 공기로 바뀌었거나, 아니면 빛줄기로 화해 이 대장간 집 안의 모든 물체에 칠갑을 했는지, 하다못해 인간의 피부, 머리카락, 눈썹마저 모조리 칠갑해서 지워버렸는지 모를 일입니다. 늙은 대장장이의 두 눈이 절반쯤 감기고 절반쯤 뜨인 품이, 지칠 대로 지쳐 눈꺼풀조차 쳐들 힘이 없음을 알아볼 만합니다. 목소리도 미세하고 나약한 것이, 한여름 앵앵 날아다니는 모기 소리나 다를 바 없어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알아듣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녀는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입술 틈으로 쑤셔 넣고 한입에 깨물어 터뜨렸습니다.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손가락 끝을 모루 위에 옮겨다 쳐들었습니다. 핏방울이 닿는 순간, 벽록 빛깔의 안개 연기 한 줄기가 풀썩 일더니, 집 안에는 부뚜막 아궁이에 연잎으로 싸서 사람의 피를 섞어 빚은 만두 굽는 냄새가 물결치듯 일렁일렁 번져나갔습니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칼의 형태가 모루 위에 차츰차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일 미터 길이에 가장 폭 너른 부위가 어림잡아 이십 센티, 종잇장에 그려진 도면의 형상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또다시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깨물었습니다. 똑똑 떨어지는 핏방울이 칼날 위에 떨어져 내렸습니다. 띵똥, 띵똥! 마치 진주알이 얼음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칼의 형태가 또다시 흐리멍덩해졌습니다. 마치 안개 속에 꽃을 내다보듯, 물속의 달을 보듯,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목욕하는 미녀를 훔쳐보듯……
“아가씨, 그걸 가져가시오.” 이 말을 끝낸 늙은 대장장이가 뒤로 벌렁 넘어가더니 이내 호흡이 끊겼습니다.
“아가씨, 그걸 가져가시오.” 이 말을 끝낸 늙은 대장장이의 맏아들이 이내 호흡이 끊겼습니다.
“아가씨, 그걸 가져가시오.” 이 말을 끝낸 늙은 대장장이의 둘째아들도 이내 호흡이 끊겼습니다.
“아가씨, 그걸 가져가시오.” 늙은 대장장이의 막내아들이 말했습니다.
아가씨는 그 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빛 한 토막을 도려내듯 대장장이의 막내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하고 같이 떠나요.”
이들 두 젊은이, 여인은 칼을 들고, 남자는 빈손으로 털레털레 대장간 바깥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큰길을 따라 둥관춘 마을 바깥으로 걸어 나가 휑하니 트인 벌판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스름한 코발트 빛 달빛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칼 이름을 ‘월광참도(月光斬刀)’라고 합니다.
오로지 ‘월광참도’를 써야만 사람의 머리를 베어도 핏방울이 나오지 않을 수 있고, 다림질을 한 테크론 옷감처럼 끊긴 자리가 매끄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또 하나의 전설이 생겨났습니다. 전설의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몸통과 머리통이 따로 분리된 류 부서기의 시신은 실상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정교한 마네킹이었노라고. 어느 못된 장난꾸러기 녀석이거나 아니면 류 부서기에게 따귀 한 대 얻어맞은 어느 잡놈이 그따위 저속한 코미디극을 연출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앙갚음이든 저속한 코미디이든, 이 소동은 극도로 열악한 정치적 영향을 빚어내고, 류 부서기의 명예에도 궤멸적인 상처를 안겨주었으며, 그리고 또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토록 많은 경찰차, 그토록 많은 테러 방지 경찰병력과 무장경찰대원, 그토록 많은 지방정부 관리들이 사건 해결에 몽땅 투입되었으니, 마모된 차량 손실, 오락가락하느라 소비한 휘발유 값, 공임과 출장비…… 그 숱한 비용과 인력 소모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허어, 그것 참!
험악해진 민심을 도로 만회하기 위해서 현 위원회, 현 정부는 인민광장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회(夜會)를 개최하였습니다. 중추가절을 경축하는 행사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생방송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류 부서기가 제일 먼저 담화하는 장면을 보았으며, 이어서 경극(京劇)의 창(唱)을 구성지게 불러 넘기는 노랫가락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젊은 청년여맹 단원들과 어우러져 신바람 나게 춤추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담화든 구성진 노랫가락이든, 신바람 나게 춤을 추든, 아무튼 간에 그의 얼굴은 시종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친화력도 있고 비상하리만치 평온하고 침착한 기색이었습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덧붙여온 문건을 다 보고 나서, 나는 사촌 아우에게 답신을 써 부쳤다.
사촌 아우님께,
오래도록 서신 왕래가 없어 무척이나 그리웠네. 고모님은 평안하신가? 고모부님도 평안하신지? 젠궈(建國) 사촌 형님도 편히 잘 계시겠지? 칭칭(靑靑) 사촌 누이도 잘 있겠고? 자네가 현성 시내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틈나는 대로 고향집에 돌아가 안부를 전해주어야겠네. 고모님 내외분 모두 연세가 많으시니 부디 건강에 주의하시기 바라네. 고향에 돌아가거든 나 대신에 메이젠츠(眉間尺)의 무덤에 지전(紙錢) 이백 장만 살라주게. 그리고 웨이샤오바오(韋小保)의 후손을 만나거든 아무쪼록 예의범절을 깍듯이 차려 대하게나. 차라리 군자에게 노염을 살지언정 소인배에게는 미움을 사서 안 된다는 것이 옛사람의 교훈이니, 어김없어야 하네. 이제 곧 자네도 서른 살이 될 텐데 혼인을 서둘러 해결해야 하네. 세상천지 어디에 훌륭한 규수감이 없겠는가? 죽을 둥 살 둥 샤오룽뉘(小龍女)에게만 달라붙어 놓치지 않으려 할 필요는 없네. 내가 보기에는 그 처녀 환주거거(還珠格格)*도 괜찮을 듯싶으이. 좀 상스럽고 버릇없기는 하네만 그래도 금지옥엽 귀한 따님 아닌가? 그녀와 혼사를 맺으면 자네 벼슬길에 아주 크게 이로울 것이니, 하루속히 결정하고 절대로 이래저래 두 마음을 품지 않기 바라네. 신신당부하는 말일세.
* 저자 모옌은 역시 무협소설이나 무협 드라마에 탐닉했던 모양이다. 이 단편 내용 곳곳에서 그런 기미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우선‘도룡보도’는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칼 이름, 웨이샤오바오는 『녹정기(鹿鼎記)』의 남주인공, 샤오룽뉘는 『신조협려(神雕俠侶)』의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환주거거는 홍콩 텔레비전 무협 드라마 <황제의 딸>에 나오는 공주의 이름이다. 실상 ‘환주(還珠)란, 중국 근대 역사무협소설의 원조로서 ‘무협의 황제’라고 일컫던 리서우민(李壽民)의 필명 ‘환주루주(還珠樓主)’에서 따온 것이고, ‘거거(格格)’는 청나라 황족에 대한 존칭으로서 공주마마의 ‘마마’란 뜻을 지닌 만주족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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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시내 전체를 뒤흔들었던 미술 전람회 현장에서, 우리는 무척 오래도록 사람들이 들끓는 인파를 헤치고 들어간 끝에 드디어 위대한 예술가이신 큰 스승의 면전에까지 다가들 수 있었다. 불안감으로 격심하게 설레는 심정을 품고서, 우리는 앞뒤 말이 전혀 조리에 맞지 않게 허둥거리며 위대한 예술가 어르신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숭배와 오체투지(五體投地)할 정도로 깊은 흠모와 존경의 뜻을 표했다. 위대한 스승은 땀이 끈적끈적하게 밴 자그만 손바닥으로, 긴장과 격한 감동 탓에 땀으로 축축이 젖은 우리들의 손을 부여잡고 일일이 악수해주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손길은 우리에게 잊기 어려운 인상을 남겼다. 물론 우리에게 더욱 잊기 어려웠던 것은 큰 스승의 얼굴에 띤 미소, 누구든지 쉽사리 접근하게 만드는 웃음기였다. 우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위대한 예술가에게 전화번호를 조심스레 물었을 때, 위대한 스승은 인심도 후하게 명함 몇 장을 아낌없이 꺼내 우리한테 하나씩 나눠주었다. 우리 등 뒤에 아직도 많은 숭배자들이 앞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우리에게 사근사근한 말씨로 이렇게 말했다.
“좋아, 친구들! 여기는 너무 시끌벅적 소란스러우니까, 훗날 어디 조용한 곳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나눕시다.”
갑자기 우리는 이 위대한 예술가와 우리가 어느덧 친밀한 벗으로 맺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의도는 우리더러 잠시 앞쪽에서 비켜나게 해서 뒤편 사람들을 맞아들이려는 방편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로서도 진정 원치 않는 일이었으나 현지 사정으로 보아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라. 아무튼 위대한 예술가는 무척 미안한 기색으로 고갯짓을 두어 차례 끄덕여 보였고, 우리 역시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뒤편으로 물러났다. 사실 우리가 자진해서 후퇴할 필요도 애당초 없었다. 떠밀리지 않으려고 등줄기에 잔뜩 준 힘을 풀기가 무섭게 뒤편 사람들이 곧바로 밀어닥쳤으니까.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군중들의 인파 제일 바깥쪽 변두리로 떠밀려 있었다.
전람회를 둘러본 지 이틀째 되던 날 저녁, 우리는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대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것은 뜻밖에도 예의 바른 컴퓨터 응답이었다. “미안합니다. 그런 전화번호는 없습니다.” 우리는 실망감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희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명함에 적힌 위대한 예술가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어찌 된 노릇인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것은 여전히 예의 바른 컴퓨터 응답 소리였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찾는 가입자는 서비스 구역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걸었더니 컴퓨터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찾는 가입자께서 전화를 꺼놓았습니다.” ‘서비스 구역에 없다’든가 아니면 ‘전화를 꺼놓았다’든가, 아무튼 우리에게는 하나같이 위안의 말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스승께서 우리에게 준 휴대전화 번호가 진짜라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으니까. 아니, 적어도 그 전화번호가 확실히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있으니까. 휴대전화가 불통이니 이번에는 위대한 스승의 호출기를 연결했다. 교환대 아가씨는 게을러빠진 목소리, 그러나 꿀처럼 달콤한 음성으로 우리더러 전할 말씀을 남겨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눈짓 한 번을 교환하고 나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위대한 스승님, 우리들은 스승님의 숭배자입니다. 스승님을 모시고 커피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내친 김에 스승님의 작품 전람회를 보고 느낀 점을 놓고 대화를 나누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