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은 2013년 10월부터 12월까지 방송된 팟캐스트 ‘김종배의 사사로운 토크(사사톡)’의 ‘대안 경제학’ 코너를 수정, 보완해 책으로 묶은 것이다.
2. 본문에서 김종배의 말은 ‘김’으로 줄여 색으로 표시했고, 조형근의 말은 ‘조’로 줄여 검은색으로 표시했다.
3. 각 장의 맨 앞에 실린 Introduction은 편집부에서 본문을 요약, 정리해 넣은 것이다.
남태평양 칠레 연안 후안페르난데스 제도에 속한 섬 하나가 있다. 배에서 버려진 스코틀랜드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가 1704년부터 1709년까지 4년 넘게 이 섬에서 혼자 살았다. 이후로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작가 대니얼 디포가 무대를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기간은 4년에서 28년으로 늘려서 그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 를 창조해냈다.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는 일이었다. 그는 혼자인 채로도 사적 소유의 관념을 실천하는 인간형이었다. 무인도에서조차 항상 경제적 판단, 즉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관점을 견지한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적 개인이자 제국주의 침략의 원형으로, 무엇보다도 경제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원형으로 간주되어왔다. 여러 경제학자들이 로빈슨 크루소를 모델로 삼아 이론을 정립했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섬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타인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늘 외롭다. 이 무한 경쟁의 시장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 승진의 위태로운 사다리와 피 말리는 구조조정에서는 직장 동료도 경쟁 상대가 되고, 청춘의 한때를 나누는 대학 친구조차 취업의 좁은 문에서는 경쟁 상대다. 우리는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산다.
외롭다고 징징대거나 세상을 탓해서는 안 된다. “사회 따위란 없다. 오직 남자와 여자인 개인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 시대의 기수를 자처한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이다. 타인을, 세상을 믿지 말고 오직 혼자서 살아남아라.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다. 여기에 “대안 따위는 없다.” 역시 그녀의 말이다. 이 시대정신에 감동받은 지구 반대편 한국의 지도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11월,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세계화를 선언했다. 한국도 이 흐름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알렸다. 그리고 IMF 경제위기를 자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가혹하기 짝이 없는 신자유주의 처방을 대부분 수용했다.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해도 좋다. 시장의 힘이 커진 김에 그 힘을 빌려 재벌 개혁을 시도한다는 명분을 내놓았다. 그래서 재벌은 개혁되었을까? 2005년 7월 5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회의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연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다. 그 노무현 정권 시절에 삼성은 사실상 ‘국정 재벌’로서 위상을 드높였다. 그리고 퇴행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는 최소한의 명분이나 고뇌 따위조차 사라졌다. 수치심을 잃어버린 세습자본주의와 민낯의 폭력이 창궐하는 세상이다.
지구 반대편 지도자와 국민들을 감동시키거나 윽박지르던 신자유주의 종주국들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대재앙을 초래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역사에서 뼈아프게 배운 미국과 세계는 역사상 최대의 양적 완화와 협력 체제 가동을 통해 파국만은 막아낸 것 같다. 하지만 경기 회복은 요원하고 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미국에 이어서 유럽이, 브라질이, 러시아가, 마침내 중국까지 위기는 세계 곳곳을 부유하면서 세계화되어간다. 우리 시대의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이 상황을 ‘뉴 노멀’, 즉 ‘새로운 정상’이라고 부른다. 이 경제 체제 아래에서는 저성장, 심지어 무성장과 고실업, 항상적인 위기가 차라리 정상 상태라는 것이다. 이 체제 아래서는 답이 없다는 뜻이다.
아직도 자유 시장에서의 규제 없는 이기적인 경제 행위가 전체 경제의 발전으로 수렴된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이 여전히 먹힌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대안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실패가 남긴 상처는 컸다. 유토피아를 향한 에너지는 이미 소진되었다. 사람들은 거기 가보지 않고도 이미 결과를 다 안다. 아니, 안다고 믿는다. 실패가 뻔한 꿈을 꾸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꿈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무한 경쟁의 적나라한 현실, 그 현실에 대한 쓰디쓴 혐오, 그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냉소뿐이다.
이 책은 이런 냉소와 혐오의 시대에 다시 한번 꿈을 꾸자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 본성이 그토록 이기적이기만 한 것인지, 타인과 함께 살아갈 대안은 없는지 찾아보자고 제안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장은 우리 본성과 경제 체제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는 장이다. 형이상학적 본성론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구체적 상황, 구체적 제도 속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발현하는지, 협력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지 다룬다. 2~4장에서는 국가 수준에서 시도된 대안 경제의 성공과 실패 경험을 균형 있게 살피고자 한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등 현실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는지, 독일과 스웨덴은 어떻게 각자의 방법으로 성공했는지, 그들의 현재는 어떠한지 등을 가감 없이 추적한다. 5~8장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수준에서 시도되고 있는 대안 경제의 여러 사례를 다룬다. 사회적 경제, 공유 경제라는 틀을 통해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지역화폐, 마이크로크레디트 등 다양한 움직임을 분석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시도들이다. 마지막으로 9, 10장에서는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어쩌면 이미 도래해 있는 미래일 수도 있는 좀 더 급진적인 대안을 검토한다.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조건 없이 소득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기본소득론과 철저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계획경제를 주장하는 참여계획경제론이다. 어이없고 비현실적인 주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때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말도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들렸다. 꿈꾸는 데 미리 한계를 그을 필요는 없다.
각 장이 다루는 대안들은 제 나름의 장점과 단점, 가능성과 한계들을 가진다. 꼼꼼히 따져보고자 애썼지만, 그 유효성을 상대평가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대안들 간의 경쟁보다는 협력이 더 필요한 시기일 것이다. 서로 다른 대안을 엮어서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것은 경제 체제의 내적 논리, 정합성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과 결합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늘 생각하지만 경제는 경제로 완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대안 경제를 꿈꾸는 일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꾸는 실천과 결합되어 있다.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에 이어서 이 책도 김종배 씨와 함께한 팟캐스트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출판된다. 녹취된 대화를 책으로 고치면서 방송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책과 논문을 읽어야 했다. 당시의 준비 부족 탓도 있겠지만, 김종배 씨의 종횡무진 하는 질문이 항상 더 많은 생각으로 이끈 덕분이다. 늘 “제가 뭘 몰라서 하는 질문인데요.”로 시작하는 그의 질문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지점을 일깨워준다. 정말 몰라서 묻는 질문인지 궁금하면서도 참 고맙다.
이번에도 반비에서 책을 낸다. 이 책도 팟캐스트 구상 당시부터 함께 구상하고 고민한 협력의 산물이다. 줄곧 그 고민에 동참해준 김희진 편집장께는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목소리로만 남은 팟캐스트를 글로, 책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편집자 최예원 씨께도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모두 고맙다.
1623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 존 던은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자기 집 침대에 누워 죽음을 넘나들던 존 던의 귀에 날마다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들마다 이름이 있고, 서로 다른 미사전례마다 제각각의 종소리가 울리던 시절이었다.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장례미사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이웃 중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자신과 이웃의 죽음을 함께 묵상했다. 이윽고 병마에서 벗어난 후 그는 묵상과 기도의 결과를 산문집으로 옮긴다.
누구든 그 자체로 순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고,
모래톱이 그리 되어도,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땅이 잠겨도 마찬가지인 것.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 나에게 상처를 입히니
그것은 나 또한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을 다룬 소설에 이 구절을 따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제목을 붙였다. 헤밍웨이는 이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우익 군사 쿠데타로 위기에 처한 인민전선 정부 편에 서서 싸웠다. 누워서 하는 묵상에서 목숨을 건 전투에 이르기까지, 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이 책이 그 많은 방법 중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2015년 12월
조형근
우리는 신자유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끝없는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장의 만능함을 주문처럼 외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일인이 되기 위해 이기심을 자발적으로 갈고닦는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서는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 흉포함을 지적하면서도 신자유주의적 삶을 놓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가슴과 머리 사이의 거리라고 하던가.
아프게 확인한다. 머리와 가슴의 머나먼 거리를 재는 척도는 ‘기만’의 눈금이 아니라 ‘공감’의 눈금임을 확인한다. 신자유주의의 흉포함을 개개인이 견뎌내도록 내모는 세태가 사람들을 자위와 자구에만 민감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기심은 본성이기 이전에 갑옷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소망한다. ‘대안 경제’를 소개한 이 책이 삶을 되돌아보는 작은 실마리라도 되기를 소망한다. ‘대안 경제’는 체제 또는 모델이기 이전에 삶의 한 양식이라는 점,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기도 하므로 이타심이 발현되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삶의 양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 시장에서 거래를 하듯 사회에서 연대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시장 논리에 눌리고 경쟁 논리에 치이는 사람들은 끝없이 자기를 ‘계발’하려 들지만 부질없다. 중·고교 참고서처럼 요약된 인문학과 현란한 말장난으로 점철된 자기계발서는 더 큰 열패감과 자괴감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것을 읽는다고 해서 자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며 세상은 더더욱 바뀌지 않는다.
‘대안’은 ‘조건’의 대안이어야 하고, 그 조건은 이타심의 발현 조건이자 연합의 조건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 몇몇 모델을 제시한 이유는 그것이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대안적 조건’을 찾기 위한 단서 같은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은 조형근 교수가 주도했다. 팟캐스트를 기반으로 출간된 이전의 다른 책들(『사회를 구하는 경제학』과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나의 역할은 장단 맞추는 보조였을 뿐이다. 그저 조형근 교수의 오랜 연구와 사유의 결과물이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독(청)자들에게 전달되도록 윤활유를 뿌리는 역할이었다.
이 책의 출간으로 ‘공부하는 팟캐스트’를 표방하며 방송된 ‘사사로운 토크’의 버전 변경 작업은 완료된다. 한 번 듣고 잊힌다는 목소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히 남는 활자로 되새겼으니 스스로 대견하고 조형근 교수에게 감사하다. ‘사사로운 토크’의 기획 단계부터 책의 출간까지 3년 가까운 기간을 함께해온 ‘반비’의 김희진 편집장께는 특별히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출판계 사정이 어려운데도 중심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장인 정신으로 책의 질 향상에만 몰두했기에 이 책이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식과 교양마저 인스턴트가 되는 현상을 마뜩치 않게 바라보면서도 ‘가방끈’이 짧아 뾰족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소중한 인연을 만나 지식과 교양의 중개상 역할이라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사사로운 토크’를 만들며 스스로 설정한 중개상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할 작정이다. 때로는 짓궂고 때로는 가학적인 면을 동반하는 역할이기에 부담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내 역할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팔자려니 여기고 가방끈 긴 사람들을 들볶을 수밖에. 이 책은 긴긴 문장의 어느 중간에 찍힌 쉼표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사사로운 토크’는 ‘시사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5년 11월
김종배
대안 경제를 모색하는 일은 우리의 꿈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되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는,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은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 본다. 경제적 교환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 효용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오랫동안 진리로 받아들여져 온 주류 경제학의 인간관은 한국 사회가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정말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일까? 경쟁은 그저 상대를 밟고 올라서는 일에 불과할까?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데도 관습을 따르는 서양의 팁 문화처럼 우리는 이미 현실 속에서 이익과 합리에 따르지 않는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은 경제적 존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쟁이 적대적이라는 관념 역시 현실과 다르다. 프로야구에서는 경쟁에서 패배한 하위 팀을 추방하는 대신 상위 팀과의 격차를 좁히도록 지원하는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둔다. 이처럼 타자가 있어야 경쟁 자체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협력을 동반하는 경쟁 역시 현실에 무수히 존재한다.
이기적 추구가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적대적 경쟁이 시장의 본질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호혜와 협력의 경제를 되찾을 수 있을까? 이타심과 협력과 연대를 증진하는 제도적,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모델을 검토하고 그 성공과 실패의 원인, 약점과 강점을 검토해야 한다. 대안 경제를 모색하는 첫 걸음은 여기서 시작한다.
성장, 분배, 일의 보람이라는 꿈
김 앞으로 10회에 걸쳐서 ‘대안 경제’의 이론과 실제를 살펴보기로 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대안 경제가 뭡니까?
조 어렵게 생각하면 끝도 없이 어려운 질문이지만, 우선 쉽게 가보죠. ‘대안’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바라는 꿈’이라고 말해봅시다. 세 가지로 나눠보겠습니다. 첫째, 더 많은 부를 생산하고 싶다는 꿈, 둘째,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싶다는 꿈, 셋째, 일에서 성취감이나 보람을 찾고 싶다는 꿈. 대안 경제는 이런 세 가지 꿈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가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김 경제 성장, 분배, 삶의 의미라는 세 가지 틀에서 대안을 찾아가는 시도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경제 성장의 꿈을 위한 대안 경제 모델에 관해 좀 더 짚어주십시오.
조 경제 성장의 환상을 벗어던지는 데에서 출발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성장을 해야 일자리도 생기고 분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과 1인당 GDP로 정의되는 경제 성장은 실제 우리 삶의 개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삶의 풍요로움에는 해로워도 GDP는 증가하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김 하기는 GDP가 증가해도 내 일자리가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겠죠. 분배 상황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요. 1인당 GDP라는 평균의 맹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GDP 총량이 증가한다면 일자리가 늘어나거나 분배가 개선될 가능성은 커지는 것 아닙니까?
조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GDP는 환경 파괴도, 분배 불평등도, 근로 시간이나 삶의 질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과 집이 멀어지고 교통 관리 시스템이 부실해져서 교통사고가 증가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죠. 자동차 수리비와 교체 비용이 증가할 것이고, 의료 비용도 증가할 겁니다. GDP는 증가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GDP가 오히려 감소하게 됩니다. 그래서 리처드 하인버그(Richard Heinberg)라는 학자는 “GDP라는 잣대로 국가의 전반적 건강을 측정하려는 것은 음표 개수로 음악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것과 같다.”라고까지 비판했습니다. 무엇보다 GDP 개념과 측정 방식을 고안한 미국의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처음부터 GDP를 통해 경제 발전의 수준이나 성장을 측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GDP는 경제 현실의 극히 일부만 보여주는 제한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GDP 중심의 성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의 1968년 연설입니다.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연간 8000억 달러를 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됩니다. 대기 오염, 담배 광고, 고속도로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구급차, 현관문에 다는 특수 자물쇠, 이 자물쇠를 부수는 사람을 가두는 감옥, 삼나무 벌목, 도시의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경이로운 자연의 유실, 네이팜탄, 핵탄두, 도시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 장갑차, 텍사스 저격수 휘트먼의 소총, 연쇄 살인마 스펙의 나이프,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려고 폭력을 조장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것들은 모두 GNP에 합산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힘, 대중 토론이 빚어내는 집단 지성, 공직자의 청렴, 재치와 용기, 지혜와 배움, 공감과 애국심. 이것들은 하나도 GNP에 합산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GNP에는 삶을 살아갈 만하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김 정치가의 연설로는 매우 감동적인데요. 문제의식에는 깊이 공감합니다만, 경제 성장은 경제 성장대로 GDP로 측정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고려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경제 성장을 GDP 말고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까?
조 GDP를 대신하는 새로운 지표를 세우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습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아마티아 센(Amartya Sen), 장폴 피투시(Jean-Paul Fitoussi)가 함께 지은 『GDP는 틀렸다』라는 책에 그런 다양한 시도와 제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개인 저자들의 작업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설치한 위원회에 의한 공동 작업의 결과입니다. 그 요지는 생산보다는 소득과 소비에 주목하고, 가계의 입장과 분배를 부각하고, 시장에서 측정되지 않는 비시장적 행위들로 측정의 범위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경제적 복리가 제대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죠.
김 경제 성장을 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배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한 만큼 받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IMF 때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해서 경제위기가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 일부 이상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일은 안 하고 파업만 해서 경제위기가 왔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한국의 근로 시간 통계만 보여줘도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그만큼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취감이나 보람은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열심히 일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비정규직이 되고 해고되며, 잠 줄여가면서 열심히 자영업을 하는데 망해갑니다.
김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몫은 갈수록 줄어들고, 자본 가진 사람들이 가져가는 몫은 갈수록 더 커지고.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자’가 ‘본’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 노동소득 분배율과 자본소득 분배율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국민소득 전체를 임금소득과 영업잉여로 구분하고 상대적인 비율을 보는 건데요,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노동소득 분배율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통계조차도 왜곡되어 있다, 노동소득 분배율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김 그건 또 왜 그런가요?
조 영업잉여에는 기업의 이윤만이 아니라 농민이나 기타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도 포함되거든요. 아시다시피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서구가 대체로 10퍼센트 정도라면 우리나라는 3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망해가는 자영업자의 영업잉여가 자본소득에 포함되니까 소득 분배의 추이에서 자본소득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는 셈이죠. 자영업자들의 영업잉여를 제외하고 임금소득과 기업소득으로만 비교하면 분배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김 통계를 제대로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이군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할 텐데, 사람들이 과연 일에서 성취감이나 보람도 추구할까요? “직장이 전쟁터 같아도 밖에 나가면 지옥”이라고, 그저 버티고 또 버티는 게 현실 아닙니까?
조 직장이 전쟁터라는 비유는 경제가 본질적으로 적대적 경쟁의 장이라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웬 성취감이니 보람 따위를 찾느냐, 배부른 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하는 시간이 인생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교유, 취미생활 등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불행한 사람이 나머지 시간에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 긴 시간 동안 겪는 긴장, 좌절, 모욕감 같은 것이 우리의 삶과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물론 노동이 전쟁이고 일터가 전쟁터이길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강요하는 체제의 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바람을 포기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포기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그런 꿈이 있었다는 걸 의미하죠. 본래 없던 걸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김 좋습니다. 그럼 일에서 찾는 성취감, 보람이란 과연 뭘까요?
조 효율성이 엄청나게 높은 로봇을 떠올려보죠. 그 로봇이 생산성 1위를 달성했다고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시키는 대로만 일한 사람이 실적이 높아졌다고 해서 성취감이 들지는 않겠죠. 그래서 성취감은 작업 과정에서의 자율성, 창의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전문직의 직무 만족도와 성취감이 상대적으로 높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직무는 표준화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조직에 속해 있는 경우에도 직접적 노동 과정은 상당 부분 자율적 결정에 맡겨지기 때문이죠.
김 예를 들어 교사의 수업이 그렇겠군요. 교육 과정이 표준화되어 있다고 해도 교수 방법은 교사마다 다르니까요. 교수의 논문 작성도 마찬가지겠지요?
조 맞습니다. 그럼 전문직만 일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노동자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기업들이 꽤 있습니다. 구글 같은 IT 기업은 워낙 유명한 사례이고, 도요타나 볼보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 기업도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대안 경제 체제에서는 이런 자율성을 더욱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김 그런 자율성에 기반을 두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봐도 되겠군요. 그런데 성취감과 보람은 어감이 조금 다릅니다. 성취감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경제 활동의 보람은 정말 이상적인 개념처럼 들립니다. 교수님이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에서 알려주신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유명한 말이 아마 “빵집 주인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빵을 파는 건 아니다.”였죠? 그저 자기 이기심에서, 자기가 먹고살려고 빵을 만들어 파는 것일 뿐이라고요. 열심히 일하다가 보람을 느끼게 되면 좋은 일이지만,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경제 체제라니 비현실적인 것 같은데요.
조 두 명의 교사가 있습니다. 한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뭔가 보람을 얻으려 애쓰고, 다른 한 교사는 단지 직장인으로서만 충실하려고 합니다. 김종배 선생님은 어느 쪽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김 이 질문 의도가 보이는데요.(웃음) 당연히 보람 찾는 교사가 좋죠. 그럼 그건 교육이라는 영역의 특수성이 있지 않느냐는 반론을 펴게 될 텐데, 다른 직업은 왜 그러면 안 되느냐고 반박하실 거죠?(웃음)
조 그냥 혼자 다 하세요.(웃음) 보람이란 자신의 행동이나 성취가 타인과 공동체의 행복, 복리의 증진에 기여한다고 느낄 때 얻는 감정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과 연민, 공감을 동시에 말했습니다. 타인의 불행에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도덕감정이고 그게 없다면 사회는 파멸한다고요. 나는 실적 1위 해서 성취감을 잔뜩 느끼는데 동료들은 감봉되고 해고된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보람이라는 걸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나의 성공이 타인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면 그게 보람이죠. 보수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 우익을 자처하는 김훈 작가가 우익삼락, 즉 ‘우익의 세 가지 즐거움’을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보수라면 부자라서 세금 많이 내는 게 즐겁다는 거였죠.
김 그럼 부자인데도 세금 안 내는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거부하는 바보들이겠군요.(웃음)
조 그렇습니다. 기쁨을 거절하는 금욕주의자들이죠.(웃음)
협력하는 경쟁도 존재한다
김 소박하게 생각하니 현실감이 있네요. 앞으로 두 가지 차원에서 대안 경제 모델에 접근할 거라고 하셨죠. 하나는 국가 단위에서 대안 경제의 모델로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들, 또 하나는 사회 공동체 운동의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는 대안 경제의 흐름들. 오늘은 사례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대안 경제 일반에 관해서 감을 잡아보는 시간이 될 테고요. 그리고 대안 경제 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무엇일까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지요. 대안 교육의 경우, 제도 교육이 입시 교육이라고 하면 제도 교육에 맞서는 대안 교육은 인성 교육이라는 식으로 나름대로 상징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경쟁의 원리에 기초한다면 대안 경제는 협력의 원리에 기초한다,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해도 되는 겁니까?
조 큰 틀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김 그런데 경쟁과 협력이 딱 잘라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요? 같이 가는 것 아닐까요?
조 좋은 지적이십니다. 사실 자연계든 인간 사회든 경쟁 없이 협력만 하는 시스템이나 협력 없이 경쟁만 하는 시스템은 없습니다. 우리는 곧잘 경쟁이 곧 적대나 배제와 같다고 오해합니다. 즉 경쟁이 남을 이기고 짓밟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경쟁 중에서도 적대적 경쟁이죠. 적대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양식입니다. 반대로 비적대적 경쟁에서는 타자가 있어야 경쟁 자체가 가능해지고, 따라서 타자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김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경쟁도 가능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순진한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조 저를 순진한 사람으로 몰아가신다면, 저 순진한 사람 하겠습니다.(웃음)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인 프로야구를 봅시다. 프로야구는 치열한 경쟁 시스템입니다. 우승팀은 1년에 단 한 팀뿐입니다. 꼴찌 팀은 말할 것도 없고, 2등조차 루저가 되지요. 실제로 모 유명 감독이 2등도 꼴찌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적이 나쁜 팀은 감독이 경질되고 구단의 운영진이 바뀌는 등 난리가 납니다. 만약 경쟁이란 타자를 배제하는 행위라는 관점이 현실적이라면, 2등 이하의 팀들, 적어도 하위권 팀들은 모두 해체하거나 리그에서 추방하는 게 맞겠군요.
김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경쟁을 위해서는 꼴찌 팀조차 꼭 필요한 존재라는 말씀이군요.
조 프로야구 시장에서는 곧잘 ‘경쟁자도 동업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협력적 경쟁이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돈 많은 팀이 무조건 좋은 선수를 쓸어가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요. 지역 연고에 대한 배려, 하위 팀에 우선권을 주는 신인 드래프트 제도, 자유계약 선수에 대한 보상 선수나 보상금 지급 규정, 신생 팀에 대한 배려 등이 모두 그런 제도죠. 이 제도들이 전부 합리적인지 여부는 일단 별개로 합시다. 아무튼 이런 제도들은 재정이 약한 팀들도 어떻게든 살아남게 만들려는 프로야구의 시스템이 가진 특징입니다. 왜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을까요?
김 자유 경쟁에 맡기면 결국 제일 돈 많은 팀이 승리를 독식하기 때문이겠죠. 승부가 뻔한 경기는 재미가 없죠. 매일 이기는 팀의 팬들만 빼면. 그럼 다른 팀들은 해체해버릴 테고 결국 시장 자체가 붕괴할 거라는 말씀이군요.
조 예, 맞습니다. 이처럼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함께하려는 경쟁이 있는가 하면 경쟁자를 시장에서 퇴출시켜서 이윤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경쟁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후자의 경쟁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경쟁이라고 하면 무조건 적대적 경쟁만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협력적 경쟁도 광범위하게 존재합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비적대적 경쟁, 협력적 경쟁을 부정하는 것이 더 비현실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앞으로 계속해서 다양한 현실 사례를 직접 검토하게 될 겁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을 공상이라고 몰아가지는 못하리라 믿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 이뤄진 일들이 지금 한국에서 곧바로 통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실현 가능성은 차분히 따져봐야 합니다. 다만 처음부터 ‘순진한 공상’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 존재일까
김 보통 원칙과 원리를 논하면 다 좋은데 현실을 좀 보라고들 합니다. 원칙과 원리는 현실 속에서 관철시켜야 하는데 마치 원리・원칙과 현실이 별개인 것처럼 접근하는 겁니다. 사고의 오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의 기본 원리는 자유 경쟁이다, 자유 경쟁은 경쟁자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정관념이 서 있는 것이죠.
조 고정관념이지요. 잠깐 딴 길로 새면,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자본주의가 과연 자유 경쟁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는 질문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학자로 꼽히고 경제의 장기 구조사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별하면서 시장경제가 경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자본주의는 오히려 독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경쟁 자체만 살펴보더라도 치열한 경쟁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조차 본질적으로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김 완성차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과의 협력 관계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 그런 사례도 포함합니다만,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살펴볼까요? 우리 모두는 매일 거래, 즉 경제적 교환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김종배 선생님이 여기에 오시면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면 그것도 거래를 한 것입니다. 요금을 내고 서비스를 받은 거지요. 지나가다가 목이 말라서 편의점에 들어가서 캔 커피 하나를 사 먹었다면 마찬가지로 경제적 거래, 교환을 한 것입니다. 주류 경제학은 거래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애덤 스미스 말대로 이기심에서 거래하는 겁니다. 지하철 기관사 월급을 주려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아니고, 편의점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을 돕고 싶어서 캔 커피를 사 먹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만족과 효용을 실현하려고 하는 경제적 선택이지요. 그래서 이런 거래에서는 누구나 타인의 이익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즉 사는 사람은 최대한 싼 값에 사려 하고, 파는 사람은 최대한 비싼 값에 팔려는 겁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상 이런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은 인간을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 이해합니다.
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는데요.
조 거래 당사자인 우리 각자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합시다. 정의상 이기적인 존재인 거죠. 상대의 이익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익을 얻는 만큼 상대는 손해를 보는 거니까 결국은 상대가 손해를 보기를 원하는 거죠.
김 그 말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만, 인간은 도덕이라는 게 있는 존재니까 상대가 손해 보기를 원한다고만 말하기는 쉽지 않네요.
조 조금 전까지 이야기하던 적대적 경쟁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남을 짓밟아서라도 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경쟁이라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인식 말이죠. 만약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할 수 있는 한 상대방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들지 않을까요?
김 논리적으로는 그렇겠군요. 예를 들면 어떤 상황일까요?
조 가장 간단하면서도 합리적인 방법은 이런 겁니다. 상인은 손님한테 돈을 받은 다음 물건을 안 주면 됩니다. 고객이 항의하면 이미 줬다고 우기면 됩니다. 어차피 증거는 없으니까요. 고객의 경우라면 반대로 하는 겁니다. 일단 물건을 먼저 받아요. 그리고 돈을 안 주면 돼요. 상인이 화를 내면 돈 벌써 줬는데 왜 그러느냐고 오리발을 내밀면 됩니다. 굳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며 흥정하며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상인은 손님한테 받은 돈 전체가 순수익이 되고, 손님은 상인한테 받은 물건 자체가 순수익이 되죠.
김 에이, 그건 말이 안 되는데요. 상인은 돈만 받고 물건을 안 주려고 하고, 손님은 물건만 받고 돈을 안 주려고 한다면 결국 거래가 안 일어나는 거잖아요?
조 핵심 포인트를 짚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이기적이고 합리적 인간이면서 거래에서 이익 극대화 전략을 취한다면 실제로는 상거래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날마다 상거래가 무수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닐까요? 그건 사기를 치는 건데 상대가 고소를 하면 자칫 더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용케 처벌을 피하더라도 그런 일을 몇 번 겪으면 나쁜 소문이 날 겁니다. 저 가게는 주인이 곧잘 사기를 친다거나, 저 사람하고 거래하면 당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평판이 나빠지면 결국 더 큰 손해를 입는 셈이니까 사람들이 상대를 안 속이는 것 아닐까요?
조 아주 적절한 지적입니다. 권력의 처벌과 사회적 평판의 위력은 사람들이 완전히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합리적인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싶지만, 상대를 속이다가는 평판 악화나 처벌로 오히려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김 그렇다면 인간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 셈이네요. 사기를 안 치는 것도 이타적이거나 협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처벌이나 평판 악화에 따른 손해를 합리적으로 예측한 결과이자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한 거니까요.
조 맞습니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에서는 경제에서 관찰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들을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처벌이나 평판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일 수는 있어도 합리적인 행동일 수는 없지요. 사실 처벌을 받거나 평판이 나빠지면 더 큰 손해를 입게 된다는 점에서 결국 이기적인 행동조차 못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면서 합리적인 존재인 경제인은 이런 변수들을 모두 고려해서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관습의 힘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김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주류 경제학의 인간관이 세상을 설명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조 그러니까 이제부터 반례들을 검토해봐야죠. 처벌이나 평판 같은 요소가 거의 작용하지 않는 상황, 즉 합리적으로 따져보니 상대에게 사기를 쳐도 괜찮은 상황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김 그런 상황이 뭐가 있을까요?
조 흔하고 쉬운 사례를 생각해보죠. 유명 관광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관광지를 찾는 손님들은 절대 다수가 뜨내기입니다. 두 번 볼 확률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지요. 평판이 잘 형성되지도 않고, 평판에 영향을 받기도 어려운 환경입니다. 처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광객들은 시간이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손해가 크지 않다면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상인을 고발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관광 와서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시간과 비용이 아깝고 마음고생은 더욱 심할 테니까요. 증거도, 증인도 없는 데다가 현지 경찰은 상인 편을 들 가능성도 높으니 고발을 해도 상인이 처벌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관광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사기나 속임수를 쓸 유인이 매우 높다고 봐야죠.
김 와, 맞는 것 같아요. 유명한 관광지일수록 바가지 씌우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조 바가지도 문제지만 이 경우는 앞서 말한 것 같은 사기를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성수기의 바가지요금은 수요-공급의 원리를 생각해 보면 무조건 사기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기분 나쁜 횡포인 건 맞지만 속임수는 아니잖아요?
김 아, 그건 또 그렇군요. 그래도 기분은 상당히 나쁩니다.(웃음) 그런데 바가지를 씌우거나 불친절한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사기를 많이 칠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럴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고…….
조 아닐 것도 같은 건 왜 그런가요? 이익 극대화의 관점에서 보면 바가지 씌우기를 넘어서 사기를 치는 게 당연하고 합리적인데요.
김 단골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닐까요?
조 평판이 중요한 상황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유명 관광지는 평판이 쌓일 여지가 별로 없는 곳이죠. 일회성 손님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김 그런 곳에서도 굳이 사기를 치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겠군요. 상인들이 사기를 많이 치면 동네 전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테고, 그렇게 되면 관광객들이 적게 올 테니 결국 손해가 될 것 같아 사기를 안 치는 것 아닐까요?
조 상당히 설득력 있습니다만, 인간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주류 경제학의 전제에는 위배되는 설명입니다. 상인은 단지 이기적인 개인일 뿐입니다. 관광지의 평판까지 고민해서 자신의 이기심을 억제한다면 이미 이기적인 개인이 아니겠죠.
김 지역 전체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사익을 억제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셈이군요.
조 맞습니다. 이번에는 손님 측에서도 한번 생각해볼까요? 서양에는 팁 문화가 있습니다. 서비스를 받은 대가로 약간의 돈을 건네는 관습인데요, 이게 왜 생긴 걸까요?
김 글쎄요, 잘 모르겠더군요.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한국처럼 봉사료 10퍼센트를 상품 가격에 포함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골치만 아프고요.
조 처음부터 가격에 봉사료를 포함하면 편리하긴 하겠지만 받은 서비스에 대해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손님의 권리는 사라집니다. 팁 액수는 자신이 받은 서비스에 대한 점수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김 아, 그런 면도 있네요. 그리고 팁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서 다음 번 서비스가 달라질 수도 있을 테고요.
조 물론입니다. 물론 많이 준다고 무조건 서비스가 좋아지는 건 아니겠지만요. 중요한 건 팁이란 서비스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사이의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유명 관광지로 돌아가볼까요? 아까는 상인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번에는 관광객 입장이 되어보죠. 관광지 유명 식당에서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서양이라면 팁을 주는 게 보통입니다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팁을 줄 이유가 있을까요?
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팁을 줄 이유가 없겠군요.
조 그렇죠. 게다가 팁은 가게 주인이 아니라 서비스를 해준 종업원에게 주는 것입니다. 몇 년 뒤에 왔는데 그 종업원이 계속 일하고 있을 확률은 무척 낮겠지요. 설혹 계속 있다고 해도 관광객이었던 손님을 알아볼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김 알아보면 천재죠.
조 그러니까 당연히 팁을 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음번의 좋은 서비스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팁을 줍니다.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순손실인 행위인 겁니다.
김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 봐야 할 테지만, 문제는 왜 이런 관습이 생겼느냐겠군요.
조 예, 맞습니다. 아무런 이득도 없고 순손실인 게 명백한데도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이렇게 행동한다면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떤 이유가 떠오르십니까?
김 그냥 기분 좋으려고 주는 거 아닐까요? 이왕이면 마음 씀씀이가 넉넉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자기 만족감 때문에?
조 꽤 설득력 있는데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니까요. 그게 돈도 안 되고, 어떤 실익이 없는 경우라도요.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순손실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입니다만.
김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동양 사람들이 팁 안 주는 걸 아니까 서양 레스토랑에서 동양 사람들에게 서비스가 좀 불친절한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일부러 꼬박꼬박 팁을 준대요. 동양인에 대한 인식 개선의 차원에서.(웃음)
조 아시아 노벨상 같은 게 있으면 드려야 할 분이네요.(웃음) 손님에게 충분히 사기를 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기를 치지 않는 상인, 팁을 줄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팁을 주는 손님, 이런 사례들은 인간이 철저히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주류 경제학의 인간관으로는 손쉽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인간은 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익을 포기하는 걸까요? 단순하게 생각해보죠. 이 사람들은 이익을 포기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속임수를 쓰거나 팁을 안 줄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애초에 선택지가 아니었으니까 이익을 포기한 적도 없는 겁니다. 이건 그냥 관습의 힘인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경제생활에서 순수하게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 행동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주장과 달리 여전히 사회적 존재로서 행동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관습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니까요.
이기심과 이타심
김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에 관한 고민은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군요.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몸이 불편한 분들이 파는 물건을 보면 당장 쓸 일이 없지만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타심의 발로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면서도 진짜 필요한 걸 살 때는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기심과 이타심이 동일한 사람, 동일한 종류의 행위에서 같이 나타나는 거 아닙니까? 같은 사람이 여기서는 이기적이고 저기서는 이타적이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입니까, 아니면 이타적인 존재입니까?
조 인간 본성이 원래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는 따져봐야 별로 유익하지 않을 듯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대립했던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시대 이래로 계속 제기되는 질문인데 어떻게 한쪽으로 결론이 나겠습니까? 애당초 이기적 행동, 이타적 행동을 이견의 여지 없이 정의한다는 것 자체부터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김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요?
조 예를 들어볼까요? 보통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는 시대와 문화가 달라도 대부분 공감합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희생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오히려 이기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합니까?
조 진화생물학자들 중 일부나 주류 경제학의 첨단에 서 있는 분들이지요. 보통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훨씬 자식에 대해 애착이 크고 희생을 많이 합니다. 양육 노동도 대부분 어머니가 합니다. 왜 그럴까요?
김 당연히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니까 그런 거지요. 남자보다 애착이 훨씬 클 수밖에 없죠.
조 정답입니다. 그 말씀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여성은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애착이 크다는 겁니다. 친자식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배 아파서 낳았으니까요. 반면 남성은 근본적으로는 이 아이가 자기 자식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여성을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 점이 자식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김 그러니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존재에 대한 애착이다?
조 빙고!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진화생물학자들의 주장이 바로 그런 취지죠. 도킨스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니고 유전자라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 유전자가 가장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하는 행동이 바로 이기적 행동이라는 것이죠.
김 그럼 주류 경제학에서도 그런 이유로 어머니의 희생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보는 겁니까?
조 경제학은 생물학이 아니니까 유전자를 동원하지는 않겠죠. 취지는 비슷한데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으로 접근합니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동일한 여성이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할 때와 타인을 위해 희생할 때 느끼는 감정이 같을까요? 자식을 위해 희생할 때 어머니는 보람이나 기쁨을 느낍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을 향한 이타적 행위는 어머니가 좋아서 선택한 행동이라는 면에서 사실 이기적 행위라는 것이지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기적 선택이란 자신의 효용, 즉 주관적 만족을 높이는 행위니까요.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만족감이 높아졌다면 그게 바로 효용을 높인 선택이고, 정의상 이기적 행동이 됩니다.
김 왠지 말장난 같기도 합니다.
조 예, 거의 말장난 수준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는 김밥집 할머니도, 순국한 안중근 의사도, 분신한 전태일 열사도 모두 이기적 행동을 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보람, 긍지, 사명감, 기쁨 등 주관적 만족감을 얻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니까요.
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이타적 행동이라는 게 아예 없다는 말 아닙니까? 애초에 이타적 행동은 자발적 행위이기 때문에 기쁨이나 보람, 만족을 느끼는 거잖아요. 그런데 주관적 만족을 느낀다고 해서 그 행동을 이기적 행동이라고 본다면, 세상에 이타적 행동이란 없는 거죠.
조 아주 훌륭한 통찰입니다. 저런 시각에서는 강제되지 않은 행동이라면 세상 모든 행동은 모두 이기적인 선택이죠.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이완용의 매국도 결국 다 이기적인 선택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겁니다. 분석적으로 무가치한 주장이죠. 백 보 양보해서 안중근 의사와 이완용이 모두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거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두 선택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까? 사회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이것마저 부정한다면 토론할 가치가 없습니다. 두 선택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인정한다면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개념, 용어가 필요한 겁니다.
김 그 개념이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이 되겠군요.
조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용어를 인간 본성론의 차원에서, 예컨대 철학이나 진화생물학의 측면에서 깊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지만 대안 경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는 데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를 추상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지, 또 어떤 상황에서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지 구체적으로 탐구하는 편이 훨씬 유익할 겁니다.
영리에도 영혼이 깃드는 시장이 있다
조 경제사회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인 막스 베버(Max Weber)가 남긴 『경제와 사회』라는 매우 중요한 저작집이 있습니다. 여기서 베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장에서의 교환이야말로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도구적이고 계산적이며 “모든 우애적 윤리학 체계에 대한 혐오”를 보여준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시장 교환은 “비정한 갈등”이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전투”라는 것입니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갈등이며, 타협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실제 전투와 다를 뿐이라는 겁니다. 주류 경제학이 가격을 추상적인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으로 이해한다면, 베버는 가격이 시장 참여자들 간의 권력 투쟁의 결과라고 강조합니다.
김 베버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군요. 결국 베버도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본 것이네요.
조 끝까지 들어보셔야 합니다. 베버는 인간관계를 공동체적(communal) 관계와 결사체적(associative) 관계로 구별합니다. 공동체적 관계는 사람들이 함께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에 기반하는 관계지만, 결사체적 관계는 공동의 목표에 대한 합리적 동의에 기반하는 관계입니다. 베버는 경제적 행위가 주로 결사체적 관계를 통해 수행된다고 봅니다. 시장 교환 또한 당연히 그렇습니다. 자유 경쟁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는 단기간만 접촉하며 원리적으로는 다시 만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시장 참여자들은 교환을 위한 흥정에 동의한 채로 인간적 유대 없이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원자 같은 존재들이죠. 그런데 베버는 이 결사체적 관계에서조차 어느 정도까지는 공동체적 관계에서처럼 소속감이 수반된다고 통찰합니다. 상인이 고객을 대할 때 아무리 계산적이고 빈틈없다고 하더라도 시장 교환에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의미를 초월하는 정서적 가치가 포함될 수 있다는 겁니다.
김 비정한 갈등이고 전투인데도 자기 이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막상 눈앞에 사람이 있으면 너무 모질게는 못 하는 법이거든요.
조 정확히 그렇습니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경제적 교환 관계이기도 하지만 대면적 인간관계이기도 하니까요. 베버는 바로 이 측면을 지적합니다.
김 청부 살인에 관해서도 그런 말들이 있잖아요. “눈을 마주치지 마라 그럼 못 죽인다.”고요. 하물며 시장에서 사람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건데 완전히 매정해질 수는 없지요.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에누리라고 하는 게 참 좋은 관습 아닙니까?
조 한국 재래시장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다른 눈으로 보면 매우 비합리적 관행이겠지만. 재래시장에서는 영리에도 영혼이 깃들게 됩니다.
김 그렇죠. 그런데 무조건 깎는 건 아니에요. 저도 재래시장 자주 가는데 거기서 물건 파시는 할머니들, 아저씨들, 아줌마들하고 오고 가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받는 느낌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 저분이 좀 뻥을 치는 것 같다, 저분은 진짜로 싸게 주는 것 같다. 에이, 내가 조금 더 드리지, 덜 깎지, 이런 게 있단 말이에요.
조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