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자신을 온전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 ‘자신의 완성을 이루는 힘’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참으로 따뜻한 평화를 얻었고, 저자가 글을 만들기 위함만이 아닌, 실제 자신의 삶에서 대부분을 실천하고 행하며 적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숙연해졌다. 관계와 소통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타인과 진정성 있게 소통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업이나 조직,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저자의 진실한 이야기 속에서 내가 얻은 평화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쓸 수 있음에 가슴 깊이 감사한다.
박용만두산그룹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사랑하면 통한다》는 이 땅에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보내진 순수한 어린 영혼이 고뇌하며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영적 여정을 그린, 아름다운 고백서다. 진정으로 아이들이 행복하고 안전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아동학대, 아동폭력, 아동방임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는 이때, 아동기의 자녀와 함께하는 부모, 교사, 사회복지사, 상담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귀한 선물이 되리라 믿는다.
아동폭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특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 속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빌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선택이 우리 삶의 행복과 성장을 결정한다’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저자는 자아를 되찾고 자존감을 세우며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서 여유로움을 되찾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와 힘을 누리며 단호히 말한다. ‘우리는 원치 않게 폭력성을 배우고 학습했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라고’ 저자는 마침내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니 비로소 너를 사랑할 수 있고, 이제 나와 너는 남이 아닌 ‘우리’가 된다고 고백한다.
김인숙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 아동인권교육훈련연구소 소장
박재연의 책을 읽으면서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작은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려움과 불안, 슬픔과 고통을 넘어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 그 작은 길을 걸어가다 보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기쁨과 화사한 평화를 만나게 될 것 같은 설렘이 마음에 잔물결처럼 일었다. 입양을 통해 조건 없이 한 생명을 자녀로 받아들이는 부모와 또한 입양을 통해 조건 없이 한 사람을 엄마, 아빠로 받아들이는 아이들과 동반하는 여정 속에서 가장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부분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한 것이다. 생부모와 살 수 없는 조건들, 친자를 출산할 수 없는 조건들,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불안 속에는 다양한 상처와 좌절, 두려움, 우울과 슬픔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넘어 부모와 자녀가 되고 가족이 되어 가는 지난한 여정을 기꺼이 걸어가게 하는 힘은 결국 사랑할 수 있는 역량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가족이 되어가는 여정 위에 있는 입양가족들과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또한 자신이 걸어온 삶의 속살을 드러내며 ‘마침내 나를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길’을 보여 주는 저자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가족이 되어가는 여정 위에 있는 입양가족들과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남혜경 아눈시아따 수녀성가정입양원장
그녀의 책은 살아 있다. 그녀의 글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된다. 사랑하지 못했던,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우리 마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하며 그것 때문에 상처와 고통과 연결되지 못했던 것들이 조용히 치유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책을 통해 다른 어떤 것들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던 공감과 연결의 고리가 이토록 풍성하고 행복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에 참으로 놀랐다. 불화가 가득한 이 세상이 평화를 얻고 불안에 찌든 모든 인생이 평안을 누리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다!
진재혁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사랑하면 통한다》는 시중에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나 대화법과 관련한 책들과 비교할 수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저자와 교류를 해 오면서 그녀만큼 평화로운 대화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가 치유, 앎의 추구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고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리고 도무지 말이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적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최영희메타연구소장 정신과전문의, 의학박사
프롤로그
우리가 다시 회복하길
소망하며
‘왜 나는 쉽게 상처 받을까?’
‘왜 나는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간직한 채 곱씹으며 괴로워할까?’
‘분명 털어 버리면 좀 가볍게 살 수 있을 텐데 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더 건강해지기 위해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고, 많은 좌절과 눈물과 회복의 시간 뒤에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아픈 경험들 그리고 그 경험들로 형성된 신념들, 그 신념들이 바탕이 된 현재의 선택들, 선택으로 강화되는 부정적 생각들, 그 생각들로 굳어지는 외로움까지.
‘저 사람이 조금만 더 나를 배려해 주면 좋을 텐데.’
‘저 사람이 조금만 더 나를 이해해 주면 내가 행복할 텐데.’
이렇게 끝없이 남에게 제 삶의 선택권을 내어주고, 남의 평가에 신경을 쓰던 제 시선을 거두고 제 깊은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한, 진실한 사랑은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삶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노력은 연극이며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대상들은 진정한 희생자라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 채 포장하는 내 자신의 외로움이 바로‘결핍’인 것입니다.
여름이면 굵게 쏟아지는 장맛비도 저의 고통을 씻어주지 못했고, 대지를 하얗게 덮어 버리던 함박눈도 제 안의 가식을 가려주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지난 세월의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전 제가 꽤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기에 상처를 드러내어 바라보는 것보다 그것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급했습니다.
‘온전한 나’보다는 ‘온전해 보이는 나’를 가꾸기에 너무나 바빴습니다. ‘진정한 나’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지만, ‘근사해 보이는 나’는 더욱 분명하게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 저의 가면을 알아차리면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게 저의 자존심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의 Ego’(에고)였습니다.
우리의 에고와 맑은 영혼이 마주하는 순간, 그 반응은 우리의 몸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누군가의 성취나 행복을 축하해 주고 돌아선 뒤 깊고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한숨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돌아서서 홀로 창밖을 보는 멍한 표정으로도 나타납니다. 정신없이 하루를 살고 집으로 돌아와 베개를 적시는 눈물도 그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되돌아보라는 신호는 일상의 곳곳에서 주어지는 소소한 자극으로부터의 반응 속에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저의 에고가 끝없이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제 안에 살아 숨 쉬는 영적인 힘은 저에게 이제는 그만 멈추고 네 자신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에고를 알아차린 후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 저는 알몸과 같은 제 실상을 보고 그만 무릎을 꿇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날들이 두려워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덮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축복의 시작이었고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진실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픔과 고통, 후회와 좌절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팠고 힘들었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제 안에는 아픔과 고통을 품고 행복으로 걸어갈 수 있는 능력까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저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있다고 여겨져서 힘들다면, 누군가의 행동을 보며 자제하기 힘들만큼 분노하고 후회한다면, 반복적인 삶의 패턴 속에서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다면, 좀 더 평온하고 평화롭게 자신을 대하고 상대를 대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을 ‘복습’하시길 권합니다. 여기서 ‘복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미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달콤하지만 아픈 그 시간에 이 책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한 자신으로 우뚝 서서 넓고 광활한 벌판에서도 혼자 머물 수 있는 힘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용서에 대한 의무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로 승화되며, 자신을 책망했던 죄책감이 상대에 대한 깊은 아쉬움과 슬픔으로 고백되고, 내 앞을 가로막던 불안과 두려움이 내 삶의 동반자로써 평온과 함께 머물 수 있도록.
그렇게, 서로의 취약함을 내어놓고 함께 머물며
비로소, 스스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날을 마주하기 위해
2015년 2월
삶을 돌아볼 힘을 준 아들, 사랑하는 관훈이에게 감사하며
Belong to GOD, Being me, Loving you.
한 명이라도
진실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우리는 공통점 때문에 친해지고, 차이점 때문에 성장한다.”
-사티어(Satir)
“옳고 그름 저 너머에 언덕이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잘랄루딘 루미(이란의 13세기 시인)
친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을 통해 지금까지 다양하게 맺어온 관계를 봅니다. 저는 주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오며, 제 자신을 참 평화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 제가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은 주로 참고 참다가 용납하지 못할 정도에 다다르면 그를 무참히 비난하며 관계를 단절하는 식이었습니다. 내적으로든 외부로 표현을 하든, 어떻게든 상대가 알 수 있도록 비난하며 단절했습니다.
그 단절이 저에게 주는 첫 번째 이점은 그를 미워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줄여 주었고, 두 번째는 앞으로 예측되는 그와의 관계에서 비롯될 고통이나 갈등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이점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특히나 자기 자신에 대한 보호의식이 강할수록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제 삶이 무척 고립되어 가고 있고, 편협한 관계 속에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편협한 관계에서 외로움을 경험하는 원인을 여전히 타인에게 두고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얼른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솔직한 생각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대를 규정짓고 판단함으로써 관계를 단절시켜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개인을 존재 자체로 보지 못하고, 혈액형으로 구분 짓고, 성별로 구분 짓고, 여러 종류의 성격유형검사 등으로 구분지어 분석하고 평가합니다. 그 상대를 대할 때 미리 여러 가지를 진단함으로써 소통의 갈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거나 진단한 잣대에서 벗어나거나, 우리의 도덕적인 기준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면, 그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기 마음대로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다수가 이런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맺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의 방식은 정말 비참합니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전 세계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건, 미국의 911테러의 참상을 떠올려 봅시다.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 한편에서는 무기를 소유한 채 위협과 협박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다름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사고에 상대를 가두고 이용하기 위해 무차별 학살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목숨까지도 학살에 이용하며 생을 마감한 자살테러범들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비행기를 조종해 높은 건물을 향해 돌진했고, 그 결과로 너무나 무고한, 당연하고도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그들의 삶만 희생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마다 맺어왔던 소중한 가족과 친구, 모든 친밀한 관계마저도 희생되었습니다. 서로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결과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그런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상대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고 판단하고 비난할 때의 결과는 이렇듯 다른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난 섞인 댓글이나 연예인과 공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글들, 심지어 가족들의 대화 속에서도 이런 비극들은 만연해 있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우리에게는 이런 선입견, 판단, 평가를 뛰어넘는 자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 진정한 평안의 길로 여행을 가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피부색이나 배경이나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미워하는 방법을 학습 받음으로써 배웠습니다. 만약 미워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면 그들은 사랑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미워하는 것보다 우리 마음에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볼 때, 상대에 대해 다른 의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도덕적인 판단으로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이해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비폭력대화를 개발한 마셜 박사는 “우리의 내면에는 상대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려면 서로의 차이를 뛰어 넘는 다양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친구가 되는 능력은 바로 그런 다양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이들과 친구가 되고 있습니까?
평화의
시작
공황발작이 나타날 때마다 ‘내가 이렇게 미쳐서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다 이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됐는지 억울하고 분하고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정을 하고 싶지 않아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무언가를 잡고 있었나 봅니다.
어느 날 집 앞 벤치에 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가슴은 이상했습니다. 그때 정신과 최영희 박사님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공황은 쥐가 오르는 것과 같아요. 쥐가 오를 때 우리는 누구도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죠. 공황이 올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 감각에만 머무르고 가만히 있으면 사라집니다.”
그 말이 떠오르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 자신에게 속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맘대로 해 봐. 죽든지 말든지. 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아니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그리고는 벤치에 누워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습니다. 무언가 변화시키려고, 어떻게든 해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 것은 없는데 갑자기 제 가슴이 편안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것이 제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평온이란 ‘즐겁거나 슬프거나 무언가를 극복하거나 이겨내려는 것에서 한걸음 물러나,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어떤 것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때로는 노력을 했지만 얻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이 자유롭고 고요한 상태’입니다.
제가 경험해 왔던 많은 일들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혹시 어려서부터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까?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자책과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며 부모님이나 어른들의 기분을 맞춰야만 했습니까? 그렇게 살아왔다면 그것은 풍요로운 삶을 배워나가기 위해서라거나 더 성숙한 인생을 위한 고상한 경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집착하고, 행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노력하고 성취하려 할수록 평화로운 삶과는 멀어지며 우리 자신을 또 다른 집착으로 몰아넣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사람은 평화로움을 좇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가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 그동안의 삶이 그것과는 실로 반대되는 길로 향하고 있었음을 깨닫길 바랍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입니까?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충족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얼마나 지치고 외롭습니까?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많은 것을 손에 넣지 않는다 해도 내 마음대로 상대가 움직여 주지 않는다 해도 외부적으로 규정해 놓은 성공의 둘레 안에 놓여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태풍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도 그 중심의 눈은 고요하듯이, 외부적인 상황들이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쓸어간다 해도 마음은 평온하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그것이 포기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포기란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태도지만, 수용이란 자발적인 마음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적인 평온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기꺼이 다가가려 노력하며 그 결과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평온할 때,
비로소 상대의 미소와
눈물이 보입니다.
우리가 평화로울 때
상대를 위한 공간이 열립니다.
그렇게 자신을 수용할 때
상대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상대를 수용하기 위해서 내 자신을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평화는 내적인 평온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몰아치고 자신에게 그토록 냉정한데, 다른 누구를 진심으로 품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시원한 바람과 청명한 하늘이 감사히 여겨지는 가을의 한낮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고 마음도 평안합니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 제가 누운 이곳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눈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걱정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지금 당신이 있는 그곳에는 무엇이 있고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많은 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위해서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상태,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언가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 고통에 함께 머물며 느껴주는 그 상태가 바로 상대와의 평화로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내 삶의 평온에 결정적인 조건이 됩니다.
저는 평온이라는 것은 얻어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제 상황에서의 평온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평온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손에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언제라도 평온할 수 있는 것임을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내 안이 평온해지면 주변이 화평해지고 그 영향력이 세상으로 뻗어나가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각기 다른 별이 모여
아름다운 은하수가 된다
어린 내 눈에 비친 그 친구는 자기 의사를 마음껏 표현하면서도 사랑받았습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은 부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엄마에게 마구 투정을 부리면서 간식이 맛없다고 다시 해 달라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를 바라보며 점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던 그날, 내 눈에 고인 눈물은 그 친구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고, 그것은 마치 나에게 ‘너에게는 바라볼 자격조차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 저 아이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고도 저렇게 행복해 보이고 사랑받는 것 같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수록 세상은 더 불공평해졌고 살아남기 위한 내 삶은 더욱 치열해져 갔습니다. 더 노력해야 했고 더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더 많이 참으며 내 삶의 행복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참고 견디면 언젠가 이 고통이 끝나고 보란듯이 행복이 펼쳐질 거라 믿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 좋은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 진리처럼 다가오면서 내 행복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나는 소금물 같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매 순간 반복적으로 무너졌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없었고, 타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줄 수 없었으며, 타인의 슬픔을 깊이 애도해 줄 수 없었던 날들이었습니다. 내 질투는 나를 더욱 노력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이내 좌절되었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그 친구를 깎아내림으로써 내 안을 채우려 했던 시기뿐이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결국 내 삶의 행복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내가 정말 간절히 원했지만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타인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큰 박탈감을 느꼈던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내적인 고요함을 간직하길 바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바람은 외부적인 자극들로 인해 무너짐을 반복하며 우리의 불안을 키웁니다.
질투와 시기는 대개 가까운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유명한 영화배우의 아름다움에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가까운 친구의 외모에는 질투하며, 빌 게이츠의 부를 질투하기보다는 내 직장 동기의 빠른 승진을 질투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보며 내 평안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가까이에 조금 더 앞서 나가고 있는 그들의 삶이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가?’를 생각하며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질투와 시기, 그것은 우리의 삶을 건조하게 만들고 서로가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나눌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기와 질투는 결코 우리의 입 밖으로 나오거나 말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나는 네가 부럽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라는 말은 가슴에 묻어두어야 하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삶을 보고 자극이 되어 내 삶을 좀 더 경쟁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질투’나 타인의 성공을 끌어내리고 폄하하는 데 힘을 쓰는 ‘시기’는 모두 경쟁구조 속에서 생겨나고 커져 온 힘입니다.
자신의 성장과 보람, 성취를 위해 한걸음씩 걸어 나가는 삶과 타인의 삶을 좇기 위해 걸어가는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에는 과정의 기쁨과 실패의 수용과 현실의 인정과 결과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후자에는 과정보다는 결과의 수치가 중요하고 실패는 수치스러우며 현실은 외면하고 싶은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보듯이 한 발자국 떨어져 자신을 보면, 우리는 갖고 있는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얼마나 집착하며 살아가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사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안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내면의 고유한 아름다움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합니다. 내적인 성찰과 자기 모습을 수용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친절히 그 세계로 안내해 줍니다.
우리는 모두가 특별한 존재로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독특하고 고유하며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 우리 삶은 타인의 인생을 좇아가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즐기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결핍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상대의 기쁨을 축하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을 빼앗기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그런 결핍의 눈으로 바라보던 저에게 세상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기쁨을 축하해 준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풍요로움입니다. 나눌수록 나의 삶도 풍요로워진다는 인식은 질투나 시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여전히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들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마음에서 내보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무대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나는 내 삶의 무대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인생의 시계는 각각 다를 것이고 나는 내 시간의 속도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어쩌다 우리가 한 무대에서 마주친다면 무거운 삶에 지친 서로를 안아주고 나누고 위로합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당신에게는 고통일 수 있고 당신이 볼 수 없다고 해도 내 삶에도 분명 고통이 있을 테니.
세상의 많은 별들 중 하나가 당신의 것임을 축하해 주고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별들 중 하나가 나의 별임을 축하해 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만나 각각의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의 별은 하나일 때보다 각각의 눈부신 별들의 만남일 때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각각의 별로서 우주에 떠오를 때 그것이 세상을 밝혀 줄 것을 말입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축복해 주십시오.
내가 있기에
상대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식을 주문할 때, 다 통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고 옷차림도 나이대별로 비슷하다’라고 합니다. 어느새 튀면 욕을 먹고, 개성은 주눅이 들며, 독특함은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의 두려움은 선택의 기준을 나에게서 앗아가 상대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왜 그토록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는 무조건 다른 사람들이 먹고 싶은 것을 따라 먹고, 다른 사람들이 좋다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며 살았던 것입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선택이었습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우리 자신에게 깊은 애도를 표현하게 됩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잠시 참으면 된다는 생각, 저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나만 잠시 인내하자는 생각, 모든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