インスタントラ一メンが海を渡った日
Copyright ⓒ TOSHIO MURAYAMA,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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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냄비에 끓이는 거라고
그렇게 무시하는 거 아니다!
김정운(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드디어 ‘라면책’이 나왔다. 내 책이 나온 것처럼 기쁘다. 무라야마 선생과의 관계, 그리고 이 책의 출간에 관해서는 도입부가 조금 긴 설명이 필요하다.
2012년 1월 4일 난 일본으로 느닷없이 건너왔다. 나라奈良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 있는 나라현립대학의 객원교수로 왔다. 벌써 3년 반이 지난 일이다. 일본에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한국의 교수직을 충동적으로 사표 냈다. 그리고 6개월 가까이 좁은 다다미방에서 뒹구르기만 했다. 앞이 캄캄했다. 뭔가 다시 시작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나라에는 노인들과 사슴밖에 없었다. 낮에는 관광객이 넘쳐나지만 밤이 되면 인근 오사카나 교토로 죄다 돌아갔다. 그 허전한 밤거리를 얼마나 헤매듯 걸었는지 모른다.9개월쯤 그렇게 지내다가 나도 나라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교토에 가기로 했다. 일단 교토에 가면 뭔가 새로운 비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교토에 내가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당시 나라 시에서 내게 일어를 가르치던 아주 얌전한 도쿠다 아쯔코가 교토에 가면 무라야마 선생을 만나보라고 했다. 자신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분이라고 했다.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 선생의 이름이 왠지 익숙했다. 무라야마 담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토에 이사한 후, 아쯔코가 전해준 번호로 바로 전화했다. 내가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한국인임을 밝히자 무라야마 선생은 한국어로 이야기를 했다. 전화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분명 한국 사람 같았다. 무라야마 선생은 한국 사람보다 더 정확히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일본인이 쓴 한국 라면의 숨은 역사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영화배우 안성기 선배가 자신의 집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내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일본 사람이 자신에 관한 평전을 썼는데,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목은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였다. 원래 일본어 제목은 《アン·ソンギ: 韓國「國民俳優」の肖像(안성기: 한국 ‘국민배우’의 초상)》이다. 저자인 그 일본 사람을 잘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 선배는 일본에서 열린 자신의 영화제에서 만났던 일이 전부라고 했다. 책의 내용을 보니 자료조사가 정말 철저하다며, 일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에 관해 자세한 책을 쓸 수 있는지 놀랍다고 했다.
정말 세상 참 좁다! 그 넓은 일본에서 그때 안성기 선배로부터 전해 받은 책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의 일본인 저자를 아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와 나는 같은 시기에 고려대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외국인을 위해 개설된 어학과정에 있었다. 당시 안암동의 하숙집과 자취방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다가, 왜 하필 고려대학교에 갔느냐고 물었다. 외국인을 위한 어학과정은 당시 연세대학교의 한국어학당이 훨씬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선생은 혁명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순간 난 많이 당황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혁명’?
무라야마 선생은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사회의 근본적 개혁은 천황제가 폐지되고 자본주의 모순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전공투 시대가 끝난 후, 일본 시민사회의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이 희미해져가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는 당시 군사독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한국 학생운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바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당시 데모가 가장 격렬했던 고려대학교의 한국어 어학과정에 입학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데모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였다.
데모만 일어나면 고대생들을 쫓아다니며 ‘짱돌’을 날랐다. 최루탄 가스에 괴로워하는 고대생들이 눈을 씻을 수 있도록 물 주전자도 날랐다. 무라야마 선생은 그 시절이 참 행복했다고 한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한국에 머물며 일본어 학원의 선생을 했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새로운 사회는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았다. 수년간에 걸친 방황의 시절을 거쳐 그는 일본 교토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시내 중심가에서 작은 한국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원 이름이 ‘녹두학원綠豆學院’이다. 일본 교토 한복판에 웬 뜬금없는 ‘녹두綠豆’냐고 물었다. 계급질서를 넘어설 수 없었던 봉건제의 조선과 서양 제국주의 흉내를 내며 한반도를 침탈해오던 일본 사이에서 사회변혁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던 녹두장군 전봉준을 존경해서라고 했다. 그의 작은 ‘녹두학원’에는 오늘도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는 일본 할머니들이 수년째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물론 가끔 한류 배우를 좋아하는 젊은 여인들이 드나들기도 한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 라면처럼 술술 풀 수 있기를
요즘 무라야마 선생은 책의 저술과 번역을 통해 왜곡된 한일관계를 풀어내는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본에 한국의 국민배우 안성기를 소개한 책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에 이어, 지난해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일대기를 다룬 책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이소선 여사의 추모식에 다녀오겠다며 수업 시간을 바꾸고 한국에 급히 다녀오기도 했다.
한일 관계의 긍정적 발전을 위한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던 무라야마 선생은 몇 년 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주제를 찾아낸다. 바로 ‘라면 이야기’다. 저자 서문에도 소개되듯, 수십 년 전 처음 맛본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강렬함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일본의 미지근한 라면과는 많이 달랐다. 일본 라면이 한반도에 건너와 일본인이 상상할 수 없는 매운 맛으로 변했다면, 달달하고 느끼한 일본 라면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의 라면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음식이다.
일본의 라면이 바다를 건너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중적 음식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작은 계기라도 주어질 수 있지 않겠냐고 무라야마 선생이 이야기했다. 나는 적극 찬성했다. 한국에서의 자료수집이나 사진촬영이 필요하면 적극 돕겠다고 했다.
수차례 한국의 삼양식품의 흔적과 도쿄 인근의 묘조식품 공장이 있던 곳을 찾아다녔다. 이제는 은퇴한 묘조식품 관계자들을 찾아내 인터뷰하는 곳에도 함께 다녔다. 선생이 인터뷰하는 동안 나는 나름 ‘비싼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물론 그다지 만족스러운 사진은 없다. 그래도 무라야마 선생의 십 년도 더 된, ‘후진’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 것보다는 사뭇 깨끗한 사진이 몇 컷 나왔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이 출간될 때까지는 이 같은 전후 사정이 있었다. 그가 책을 쓰는 동안, 나는 그에게 지속적으로 일어를 배웠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지난해 일어 책을 한 권 번역해서 출간했고, 요즘 또 한 권을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나를 도와준 것의 극히 일부분이다. 내가 그림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자, 무라야마 선생은 교토 시내의 모든 대학을 함께 찾아다녔다.
내가 ‘교토사가예술대학’(전문대학)에서 2년간 일본화를 전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일어 능력이 부족해 입학이 불가능하다는 그 대학의 직원에게 영어로 소리만 버럭 지르며 화를 내는 나를 진정시키고 부총장과의 면담을 가능케 한 것도 무라야마 선생이었다. 교토사가예술대학의 부총장은 무라야마 선생의 설명을 듣고 기꺼이 내 입학을 허가해줬다. 학교가 있는 아라시야마에서 집을 구하는 일도 무라야마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내 교토 생활은 무라야마 선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서양 와인, 파스타, 커피에는 능통하면서 ‘우리 라면’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
나는 무라야마 선생의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이 한국에서 정말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삼양식품의 설립자 전중윤 회장과 일본 묘조식품의 오쿠이 사장 사이의 감동적인 우정이 주는 교훈이 요즘의 한일 관계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무라야마 선생 같은 분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져야 한일 관계의 미래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를 통한 한일 관계의 개선은 이래저래 물 건너갔다는 것이 요즘 내 생각이다.
단지 한일 관계 개선의 측면에서만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내 개인적인 인연 때문만도 아니다. 라면이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관한 ‘라면의 문화사’로서도 이 책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라면의 생성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정치사회적 맥락에 관한 무라야마 선생의 자세한 서술은 참으로 흥미롭다. 라면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또 다른 시선을 배우는 것도 덤으로 얻는 재미다.
주말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서양의 와인 리스트, 파스타의 종류, 커피의 역사는 그렇게 자세히 알면서도, 출출하면 바로 뜨거운 물 부어 먹는 ‘우리의 라면’에 그리 무지해서는 안 된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가 자기 집 문 앞에서 ‘라면 먹고 가실래요?’라고 물어보기를 그렇게 기대하는 남자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추운 겨울 밤, 보초근무를 교대하고 들어와 페치카의 시뻘건 불에 라면 끓여 먹으며 그렇게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 라면이 어떻게 군대 페치카에까지 왔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있어야 한다. 라면 값이 싸다고 라면이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가치까지 그렇게 무시하면 정말 안 되는 거다. 양은 냄비에 대충 끓여 먹는 음식이라고 그렇게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2015년 7월 26일
일본 교토 아라시야마에서
(이 책이 출판된 후, 아사히신문, 도쿄신문 등이 라면을 둘러싼 한일간의 우정을 기사화했다. 한일 관계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일본의 사회·문화계에도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쿠이 사장의 말을 인용한 “일본은 한국전쟁 덕분에 전후의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책 내용에 대해 일본 내 극우파들의 험악한 항의도 있었다.)
한국인의 영혼을 가진 일본인,
한국식 라면 맛에 빠지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해왔던 일을 다 접고 친한 사람들과 작별을 한 뒤 바다 건너 한국을 알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고 한 것이다.
나이 서른이 넘어 내린 결단이었다.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 귀국하고 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앞날이 너무나 막막했다. 그래도 내 마음을 북돋운 것이 있었다. 그게 미지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었는지, 한눈에 반해버린 상대를 그리워하는 열정이었는지 모르지만, 불안보다는 호기심과 열정이 나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나는 조금씩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갔고, 한국어를 배우는 틈틈이 일어 과외 ‘알바’도 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나는 서울의 일본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도심 빌딩숲에서 식당을 찾아 헤맸다. 그때 문득 눈에 띈 간판이 바로 ‘라면 전문점’이었다. 한국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구나! 나는 기대에 부풀어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런데 몇 안 되는 메뉴 중에서 하나를 골라 시킨 라면을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빨간 국물에 가라앉은 굵은 면발이 나를 압도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눈에 스몄다. 국물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워 보였다. 한 입 먹어보니 혀가 저리고 목구멍을 지나간 국물이 목을 찌르듯 매워서 그만 콜록거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국 라면과의 이런 예기치 못한 만남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이 인스턴트 라면이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일본에서는 인스턴트 라면을 식당에서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중에 이 일을 좀 차분하게 생각해보면서 일본과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두 나라의 라면은 양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 라면은 무게가 80~90그램 정도인데 비해, 한국 라면은 120그램을 쉽게 넘겼다.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라면을 간식 정도로 여기지만 한국에서는 당당히 한 끼 식사로 라면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인에게 라면이란 식당에서 정식으로 사 먹는 ‘진짜’ 라면만 식사라고 부를 수 있지, 인스턴트 라면은 임시적이고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스프 한 그릇을 만드는 데만 몇 시간씩 육수를 끓이고 정성을 들이는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일본의 풍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본가로 숭상하는 ‘진짜’ 라면 같은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간단하고 싸다는 이유만으로 인스턴트 라면이 서자 취급을 받을 까닭이 없었다.
한국 라면의 독특한 맛은 시간이 갈수록 내 입에도 익숙해졌다. 두 나라의 봉지 라면을 양손에 들고 보니 왠지 꼬불꼬불하고 기다란 면의 끝이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한국에 오기 위해 바다를 건너올 때 느꼈던 묘한 일체감과도 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라면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역사를 살펴보기로 했다. 한국과 일본 현대사의 흐름에 배를 띄워서······.
1945년을 기점으로 두 나라가 걸어온 현대사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전쟁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기면서, 한편으로는 전 세계에 냉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 시기에 일본은 미국을 중심축으로 한 반공산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었고, 평화헌법의 이념과는 상반된 재무장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식민통치의 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존이념을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눈앞의 경제적 필요성과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방향을 따라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 책에 등장하는 1950~1960년대의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막 진입하는 중이었고, 한국은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간신히 일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전쟁의 위기감이 감돌았고, 서민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그리며 열심히 살아보려는 에너지가 물씬 느껴지던 시대였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경영자 역시 그러한 시대적 뜻과 포부를 품고 저마다의 길을 걷다가, 운 좋게도 우연한 만남을 통해 더욱 거대하고 멋진 삶을 살았다.
라면이 한일 양국 간에 단단한 가교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역사의 거센 풍랑 속에서 당장이라도 고기밥이 되어버릴 것 같은 자그마한 배가 과감하게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것이다. 그 사실을 우리 기억 속에 깊이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매콤한 라면 한 그릇을 먹을 때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심정을 함께 곱씹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제관계가 전례 없이 복잡 미묘하여 상호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요즘, 반세기 전, 라면이라는 맛있는 음식을 매개로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 이어져온 돈독한 관계와 뜻 깊은 일들이 앞으로 두 나라의 미래를 인도하는 나침반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필자와 한국 라면과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 내가 종종 가곤 했던 그 라면 전문점은 삼양식품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다. 당시 삼양식품 본사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시내 중심부에 있었는데, 그곳은 우연찮게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 바로 근처였다. 회사 안에는 인스턴트 라면만 파는 식당이 있었는데,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밥과 김치가 ‘무한 리필’되었기 때문에 종종 점심 식사를 하곤 했다. 내가 라면 마니아가 된 것도 모두 그 식당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월이 흘러 이렇게 라면에 대한 책을 쓰게 될 줄이야······. 이야말로 기막힌 인연이 아닐까.
이 책이 탈고에 들어갔을 무렵인 2014년 7월 10일,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노환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아산병원에서 95년의 생을 마감했다. 2010년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한 달에 한두 번 대관령 목장을 찾아가 독서와 집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성실한 기업인으로서, 고난의 시대에 일본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奧井淸澄와 함께 한일 양국 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 역사를 개척한 그의 공적은, 두 나라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거듭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너무 인사가 늦은 감이 있지만, 집필에 아낌없는 성원과 협조를 해주신 삼양식품과 묘조식품의 모든 분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미야모토 야스히사宮本雍久, 오쿠이 미츠오奧井美津雄를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귀중한 자료 제공과 사진 촬영에 도움을 주신 한국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선생께도 진심 어린 감사를 올린다.
2015년 여름 교토에서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
누구나 가슴속에 라면의 추억이 있다
오사카 이케다 시에는 인스턴트 라면 발명기념관이 있다. 안도 스포츠 식품문화진흥재단이 운영하는 곳이다. 한큐 다카라즈카 선 이케다 역에서 ‘면의 거리’라고 이름 붙여진 거리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연한 갈색 돌담에 싸인, 흡사 미술관 느낌이 풍기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그 건물 앞뜰에는 치킨라면 봉지를 손에 든 닛신日淸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 것 같은 눈빛에 이끌려 입구로 들어가자, 왼쪽으로는 8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즉석 면 제품들이 터널처럼 꾸며진 길쭉한 장식장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면의 역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서 1958년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에 서니, 달랑 치킨라면 봉지 한 개가 그 수많은 제품들의 출발점임을 알리는 듯 놓여 있다. 그곳에서 내가 걸어 들어온 길을 다시 거슬러 가면, 다윈의 ‘진화의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패널이 미래를 여행하는 듯 뻗어 있다.
바로 옆에는 초창기 시절에 판자를 이어서 만든 연구소를 그대로 재현하여,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반죽을 부드럽게 하는 달걀을 얻기 위해 길렀던 닭이나, 밀가루를 옮겨오기 위해 사용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전거, 갓 없는 전구 아래 놓인 자그마한 제면기, 기름이 가득 담긴 중국 냄비, 저울과 소쿠리, 괘종시계······.
안도 모모후쿠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일본 식탁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인스턴트 라면의 발명가다. 안도는 식민지하 대만의 타이난 현에 있는 작은 도시, 보쿠시 시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잃는 참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기모노 옷가게를 경영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덕분에 어릴 때부터 독립심을 키울 수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사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스물두 살 때 일찌감치 타이페이 시에 속옷 판매점을 열어 대성공을 거둘 정도였다고 한다. 이어서 오사카로 건너와 섬유 사업을 확대해나가고, 전쟁 중에는 군수품으로까지 사업 반경을 넓히면서 “무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더니 사업에 대한 힌트는 무궁무진했다”고 할 정도로 사업에 몰두했다.
자서전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안도의 새로운 사업에 대한 열망과 투지는, 마치 어린아이가 너무도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눈이 휘둥그레지고 반짝이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 역시 좌절의 순간을 수없이 맛보아야 했다. 군용기 엔진 부품을 제조하는 공장 경영에 참가했을 때는 부품을 빼돌린다는 혐의를 받고 헌병대로 소환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전도유망한 청년들을 육성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작한 제염製鹽과 영양식품 개발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탈세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만계 신용조합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는,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도산해버린 조합을 수습하느라 전 재산을 잃기까지 했다. 이렇게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라면 사업이었다.
1958년 봄, 초라한 가건물 연구소에 모인 안도와 가족은 환희와 감격의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금까지 걸어왔던 험난한 여정을 회상했다. 그들 앞에 놓인 대접에선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치킨라면의 뜨거운 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눈물 자국마저 가려버렸다. 빈곤했던 시대, 폐허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릿한 조명 사이로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토록 초라하고 좁디좁은 연구소에서 탄생한 인스턴트 라면은 드디어 일본뿐 아니라 온 세계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원조국인 일본을 따라잡은 건 물론이고 현재는 중국이 전 세계 라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인당 소비량으로는 한국이 세계 1위다.
중화면의 본고장인 중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 사람들은 왜 이토록 인스턴트 라면을 좋아하는 것일까? 한국의 ‘보릿고개’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40대들에게 소박한 의문을 품은 채 질문을 해보았더니 이런 증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 처음 인스턴트 라면을 먹어본 것이 언제입니까?
“아주 어릴 때였죠.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있다가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오시는 인기척이 나면 화들짝 눈이 떠집니다. 어머니가 “금방 끓여 올게요” 하시면서 부엌으로 들어가시고, 잠시 후면 작은 양은 냄비가 차려져 나옵니다. 아버지는 거기에 얼굴을 가져다대고는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맛나게 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라면이었던 거죠.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맛있는 냄새가 나서 이불 밖으로 빠끔히 얼굴을 내밉니다. 아버지가 “너도 좀 먹을래?” 하고 말해주시길 기대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야속하게도 아버지는 냄비를 몽땅 비워버리십니다. 라면 맛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다가 냄비에 남아 있는 국물과 건더기를 바닥이 뚫어져라 긁어서 먹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맛있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 맛은 가히 충격적이었죠. 그것이 라면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 라면은 주로 어떤 때 드시나요?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종종 근처 만화 가게로 가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야구 만화를 읽었는데요. 어느 날 맞은편에 앉은 아저씨가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가져다놓았더라고요.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자, 다 됐습니다!” 하면서 양은 냄비 하나를 가지고 나오지 뭡니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허기를 채울 요량이었나봐요. 바로 눈앞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후다닥 엄마에게로 달려가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천 원짜리 지폐를 받아 들고 가게로 뛰어왔습니다. 옛말에 당구장에서는 짜장면, 만화 가게에서는 라면이라고 하던데, 이상한 건 집에서 끓이면 그 맛이 안 난다는 거예요. 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 라면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까?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은 군대에서 먹었던, 군용 도시락에 끓인 라면입니다. 일본은 징병제가 아니라서 군대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시죠? 한국에서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유사시를 대비해 군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힘들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행복했던 추억들도 많아요. 그중 하나가 혹한기 훈련 때 눈 속에서 먹었던 바로 그 라면! 군용 도시락에 눈을 넣고 녹인 다음, 연기가 많이 나지 않는 나뭇가지를 골라서 불을 피웁니다. 고참병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라면을 입에 넣는 순간을 상상하면 절로 군침이 흘렀죠. 물이 끓으면 라면 다섯 개 정도를 반으로 쪼개서 넣습니다. 김치나 단무지를 넣는 녀석들도 있는데, 나는 오로지 라면만 넣는 게 최고더라고요. 배부르게 먹으려고 면이 불어터질 때까지 끓입니다. 도시락 뚜껑에 라면 한 젓가락을 올려서 입에 넣는 그 순간의 행복이란······! 이대로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니까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라면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는 듯하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양은 냄비에 보글보글 끓인 라면은 빈곤과 좌절, 혹은 작은 희망과 꿈이 모두 응축되어 오늘도 주인공의 배를 채우고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아온 라면이 언제부터 한국인들과 고락을 같이하게 된 것일까?
잊혀져가는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뜻밖에도 한일韓日 양국의 우정이 담긴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의 삼양식품을 세운 전중윤과 일본 묘조식품의 창업자 오쿠이 기요스미. 인스턴트 라면이 맺어준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길이 없다. 식민지 지배의 상처도 충분히 아물지 않은, 두 나라 사이의 국교도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야기는 195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비관할 일만은 아니야. 이번 실패는 반드시 다음 도전 때
성공을 가져다줄 열쇠가 될 걸세.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 해.
어차피 밑바닥에서 시작한 거 아닌가?
열 번 시도해서 한 번 성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렇게 끙끙 앓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앞으로 여덟 번은 더 실패해도 끄떡없어.”
‘또 전쟁이 시작됐군.’
국철(지금의 JR 야마테 선 등 근교 노선 전철) 역 앞을 걷고 있던 오쿠이는 막 찍어나온 호외를 주워들며 짧게 중얼거렸다.
“북한군 남한 침투, 모든 전선 총공격 개시, 개성 점령······.”
호외 지면을 가득 메운 꺼림칙한 느낌의 글자들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이라도 당장 눈앞에 폭탄이 떨어질 것 같은 긴장과 불안이 몰아쳤다. 올해로 갓 스물여덟이 된 청년 오쿠이는 동료 몇 명과 농림성의 가공 위탁을 받아, 이노카시라 공원 역이 코앞에 있는 무사시노 지역에 즉석 면을 제조하는 묘조明星식품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그에게도 군인 시절이 있었다. 패전을 당하기 수년 전에 일본군이 신설한 육군 기상교육대에서 자동차반 반장으로 종군했다. 기상교육대는 육군이 작전을 수행할 때 활동 지역의 날씨 등을 예측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부대다. 태평양전쟁의 첫 포문을 여는 날짜를 결정할 때도 기상 정보를 제공했다. 기상대는 지상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후방 근무 부대에 가까웠지만, 개중에는 동남아시아 전선으로 파병된 다른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