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김소연 옮김
황금 모자를 써라
그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라
높이 뛸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그녀가 이렇게 외치게 하라.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그대여,
난 반드시 그대를 차지하고 말겠어요!”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필명-옮긴이)
나는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에 아버지에게 들은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남을 비판하고 싶거든 세상 사람들이 다 너와 같은 혜택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유독 잘 통했던 나는 그 말에 담긴 더 큰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일에 판단을 미루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자 내 주변엔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꼬여들었으며, 결국 떠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다. 정상적인 사람한테서 이런 면이 나타나면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재빨리 그점을 알아채고 들러붙는다. 그 바람에 나는 대학 시절 정치인처럼 군다는 부당한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사연을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그들의 비밀은 대부분 내가 원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극히 사적인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하면 오히려 잠을 자는 척하거나 바쁜 척했다. 어떤 때는 작정하고 입이 헤픈 사람처럼 굴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고백이나 적어도 그들이 고백할 때 쓰는 표현은 남의 말을 표절하는 경우가 많고, 진실을 드러내기 보다는 무조건 숨기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판단을 미루면 무한한 희망을 품게 된다. 아버지는 세상일에 달관한 듯 “근본적인 품격에 대한 지각은 사람마다 불공평하게 타고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 또한 뭘 좀 아는 사람처럼 이렇게 말하며 다닌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그 점을 잊어버린 채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 조금 두렵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관대한 사람입네 하고 과시하지만 그 아량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사람의 행실은 단단한 바위에든 축축한 습지에든 뿌리를 둘 수 있지만 나는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그 뿌리가 어디에 있든 상관하지 않는다. 지난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세계가 똑같은 제복을 차려입고 도덕적인 면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를 보여주길 원했다. 무슨 특권이라도 지닌 양 사람의 마음속을 기웃거리는 요란스러운 외도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책에 자신의 이름을 내어준 개츠비만은 예외였다. 개츠비, 그는 내가 경멸해 마지않던 것들의 총체였다. 연속선상에 놓인 성공적인 제스처를 인간의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마치 1만 6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발생하는 지진을 탐지하고 기록하는 복잡한 장치가 몸에 달려 있기라도 한 듯 그는 탁월한 민감성으로 삶의 가능성들을 잡아냈다. 그러한 민감성은 흔히 ‘창의적 기질’로 미화되는 나른한 감수성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것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이며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낭만적인 적응력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에게서도 그런 재능을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볼 수 없을 듯하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문제가 없었다. 무산된 삶의 괴로움과 즐거움, 벅찬 환희에 내가 한때나마 관심을 닫아버린 이유는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를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고, 그것이 바로 개츠비를 잠식한 원흉이었다.
우리 집안은 이 중서부의 도시에서 삼대에 걸쳐 풍족함을 누리며 살아온 명문가다. 캐러웨이 가문은 말하자면 씨족공동체와 비슷한데, 버클루 공(公)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부계로 보면 우리 가문의 실질적인 조상은 큰할아버지다. 1851년 이곳에 정착한 큰할아버지는 남북전쟁 때 다른 사람을 대신 내보내고 철물 도매업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아버지가 가업을 잇고 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나는 큰할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아버지 사무실에 걸린 옹고집쟁이처럼 보이는 그분의 초상화를 보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정확히 이십오 년 뒤인 1915년에 뉴헤이븐(예일대학을 뜻함-옮긴이)을 졸업했고 얼마 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알려진 지리멸렬한 ‘튜턴족(Teutonic)의 대이동’에참가했다. 반격의 묘미에 흠뻑 빠져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계의 온화한 중심지였던 중서부가 이젠 낡아빠진 변방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동부로 가서 채권업을 배우기로 했다. 아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채권업에 몸담고 있어 그 일이라면 남자 하나쯤은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계획을 두고 집안 어른들은 마치 내가 들어갈 사립 고등학교라도 고르는 양 논의를 거듭했고, 마침내 심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이렇게 말했다.
“뭐, 그래 보든지.”
나는 일 년 동안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지원받기로 한 뒤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가 1922년 봄, 그때 생각으론 아주 눌러앉겠다며 동부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 살려면 우선 시내에 방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봄이어서 날씨도 좋고 넓은 잔디밭과 쾌적한 나무가 많은 시골에서 살다가 이제 막 도시로 나온 참이라 같은 사무실의 젊은 동료가 통근할 수 있는 소도시에 집을 얻어 나눠 쓰자고 했을 때 좋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받아들였다. 그는 교외에서 비바람에 닳은 월세 80달러짜리 단층집을 구했다. 하지만 이사를 앞두고 갑자기 워싱턴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결국 그 집엔 나 혼자 살게 되었다. 그 대신 개 한 마리가 내 벗이 되어주었다. 적어도 도망치기 전 며칠 동안은 그랬다. 결국 내 곁을 지켜준 건 낡은 닷지(자동차 상표명-옮긴이) 한 대와 핀란드인 가정부였다. 그녀는 내 잠자리도 봐주고 아침밥도 차려주었는데 전기스토브 앞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면 늘 혼잣말로 핀란드 금언을 웅얼거리곤 했다.
하루 이틀쯤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침 길을 걷는데 웬 남자가 불러 세웠다. 보아하니 나보다 늦게 이 동네에 들어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웨스트에그 마을엔 어떻게 가야 합니까?”
나는 그 남자에게 길을 알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길을 걷는데 더는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동네의 안내자이자 길잡이이고 토박이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 남자 덕분에 비로소 그 동네의 주민이 된 듯한 자유를 느꼈다.
나는 빨리 돌린 영화 장면처럼 나뭇가지에서 무럭무럭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나는 잎사귀와 햇빛을 보며 이 여름과 함께 삶이 다시 태동하기 시작함을 확신했다.
무엇보다 읽어야 할 책이 많았고, 젊은 숨결을 내뿜는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자 온몸 구석구석까지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은행과 신용 그리고 투자증권에 대한 책을 열 권 정도 샀다. 그 책들은 조폐공사에서 갓 찍어낸 지폐처럼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찬연히 빛을 발하며 내 책꽂이 한쪽을 차지했는데, 마치 미다스 왕과 J. P. 모건 그리고 마에케나스(고대 로마의 정치가이며 예술의 보호자로 유명함-옮긴이)만이 아는 눈부신 비밀을 낱낱이 펼쳐 보이겠다고 약속하는 듯했다. 그뿐 아니라 내겐 그 옆에 꽂힌 수많은 책까지 반드시 독파하겠다는 야무진 기대가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제법 글재주가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는 〈예일 뉴스〉에 비록 내용은 뻔하지만 자못 근엄한 어조로 사설을 연재한 적도 있다. 그 때문에 학창 시절의 모든 경험을 현재의 삶 속으로 되살려 전문가들 가운데 아주 소수만이 도달한다는 이른바 ‘전인격을 갖춘 인간’이 되려는 큰 포부를 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삶은 하나의 창문으로 바라볼 때 훨씬 더 제대로 보인다는 말은 단순한 경구가 아니었다.
내가 북미 대륙에서 별나기로 유명한 지역 가운데 한 곳에 집을 얻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정착한 곳은 뉴욕에서 정확히 동쪽으로 뻗어 나간 지점에 자리 잡은 폭이 좁고 시끌벅적한 섬이었다. 뉴욕 부근에는 자연이 빚어낸 진귀한 산물이 많은데 그중 특이하게 생긴 섬이 둘 있다. 둘 다 뉴욕 시에서 30킬로미터 조금 더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아주 커다란 달걀처럼 생겼다. 이 두 섬은 좋게 봐서 만이지 그저 좁디좁은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서반구에 있는 바다 가운데 인간의 손을 가장 많이 탄 롱아일랜드 해협의 안뜰 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다. 엄밀히 말해 타원형은 아니며 콜럼버스 이야기에 나오는 달걀처럼 맞닿은 면이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하지만 생김새가 워낙 닮아서 그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에겐 영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게 분명하다. 날개 없는 생명체들에게는 이 두 섬이 생김새와 크기 말곤 전혀 닮은 게 없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굳이 비교하면 나는 둘 중 덜 세련되고 덜 화려한 쪽인 웨스트에그 섬에 살았다. 두 섬을 대조해 이상하고 악의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피상적인 꼬리표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살던 집은 섬의 맨 끄트머리에 있었는데 해협에서 불과 50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것도 계절당 1만 2천 달러에서 1만 5천 달러의 세를 받는 대저택 두 채 사이에 찌그러져 있었다. 오른쪽 집은 어느 모로 보나 화제가 될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실제로 노르망디 시 청사를 그대로 본떠 지은 집으로, 한쪽에 세운 첨탑은 야트막한 야생 담쟁이넝쿨에 덮인 채 싱그러운 위용을 자랑했고 대리석으로 만든 수영장과 함께 16만 제곱미터가 넘는 잔디밭과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개츠비의 저택이었다. 아니, 그보다 그때는 개츠비를 몰랐으니 그런 이름의 신사가 사는 저택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 집에 비하면 내가 사는 집은 보잘것없었고 그마저 너무 작아서 남의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탁 트인 바다와 이웃집의 잔디밭 일부를 내다보는 호사와 더불어 백만장자와 지척에 산다는 뿌듯함까지 누릴 수 있었다. 그것도 한 달에 단돈 80달러만 내고 말이다.
이름이 좋아 만이지 좁은 바닷물 너머에 있는 이스트에그 섬에서는 하얀 궁전 같은 저택들이 해안선을 따라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해 여름의 역사는 그곳에 사는 톰 뷰캐넌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러 차를 몰고 가던 날 저녁에 시작된다. 톰의 아내 데이지는 나와 팔촌쯤 되는 먼 친척 여동생이었고, 톰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 시카고에서 이틀간 두 사람과 함께 보낸 적도 있었다. 데이지의 남편은 몸을 쓰는 분야에선 다방면으로 독보적인 성과를 이루었는데, 특히 ‘뉴헤이븐’의 풋볼 선수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엔드(end, 풋볼 포지션의 하나-옮긴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국적인 유명 인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스물한 살에 이미 인생의 정점을 찍고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톰의 집안은 어마어마한 갑부였다. 심지어 대학 시절에도 제멋대로 행동하며 돈을 물 쓰듯 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시카고를 떠나 동부에 정착했는데 그 면면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를테면 레이크포레스트(시카고 북쪽의 미시간 호 연안에 있는 도시-옮긴이)에서 폴로 경기용 조랑말을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나 옮겨왔다고 했다. 내 또래의 남자가 그런 짓을 할 만큼 돈이 넘쳐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왜 동부로 왔는지는 모른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프랑스에서 일 년을 지낸 뒤 부자들끼리 모여 폴로 시합을 연다고 하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데이지는 나와 통화하면서 이번만큼은 완전히 정착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데이지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쳐도 왠지 톰은 다시 선수로 돌아갈 수 없는 풋볼 시합의 극적인 역동성을 동경하며 영원히 떠돌아다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일은 비록 나와 알게 된 지는 오래됐지만 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을 만나러 차를 몰고 이스트에그 섬에 갔던 어느 따스하고 바람 부는 날 저녁에 일어났다. 두 사람의 집은 예상보다 공을 많이 들인 듯 보였는데, 생기 있는 붉은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룬 조지 왕조풍의 저택이 만을 굽어보고 있었다. 해변에서 시작된 잔디밭은 해시계와 벽돌로 만든 인도 그리고 불타는 듯 화려한 정원을 건너뛰고 현관까지 4백여 미터를 죽 내달렸다. 그러다 저택에 다다르면 이제껏 이어온 질주에 가속도를 내듯 밝은 포도 넝쿨로 변해 집의 옆면을 타고 올라갔다. 저택 앞면을 한 줄로 장식한 유리문들은 반사된 햇빛 때문에 황금색으로 이글거리며 오후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승마복 차림의 톰 뷰캐넌은 현관 앞에서 다리를 떡 벌리고 서 있었다.
뉴헤이븐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톰은 뻣뻣한 머리칼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삼십 대 남성이 되어 있었고 굳게 다문 입에선 완고함이, 몸에선 거만함이 묻어났다. 그의 얼굴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오만한 광채를 내뿜는 눈은 남들에게 언제나 공격적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여성적인 화사함을 주는 승마복도 그의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거대한 힘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번쩍이는 부츠도 그의 몸을 가두기가 벅찬 듯 맨 위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가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얇은 겉옷 아래로 엄청난 근육 덩어리가 따라 움직이는 게 그대로 보였다. 엄청난 지렛대 역할을 해낼 법한 가히 비인간적인 몸이었다.
약간 쉰 듯 걸걸하면서도 높은 톰의 음성은 성마른 인상을 더욱 강하게 풍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방에 대한 가부장적인 멸시가 담겨 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한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뉴헤이븐에는 그의 후안무치한 태도를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단지 내가 당신들보다 힘이 세고 더 나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이 최종적이라고 보지는 마시오.”
톰을 보면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와 나는 같은 사교클럽(senior society,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들어가는 예일대학의 폐쇄적인 클럽-옮긴이) 소속이었지만 친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호감을 보였으며 뭐랄까 거침없는, 일종의 반항적인 동경심에서 나도 자기에게 호감을 가져주었으면 한다는 인상을 늘 받았다.
우리는 해가 내리쬐는 현관 앞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집 근사하지 않나?”
톰은 불안하게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한 팔로 나를 돌려세우더니 크고 평평한 손으로 원래 바닥보다 낮게 꾸며놓은 이탈리아식 정원에서 톡 쏘는 향기를 내뿜는 2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빽빽한 장미꽃밭과 파도가 일어나는 앞바다에 코를 박고 있는 넓적코 모양의 뱃머리가 달린 모터보트까지 눈 앞의 경치를 죽 훑었다.
“드메인이라는 석유 업자의 집이었네.”
그는 정중하지만 갑작스럽게 나를 다시 돌려세웠다.
“안으로 들어가지.”
우리는 천장이 높은 복도를 지나 장밋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방으로 들어섰다. 양쪽 가장자리에 달린 유리문에 의지해서 본채와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약간 열린 창문들은 아스라하게 흰색으로 반짝거리며 마치 집 안으로 자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바깥의 싱싱한 풀빛과 대조를 이뤘다. 방 안으로 스며들어 온 산들바람에 커튼 끝이 창백한 깃발 처럼 한쪽은 안으로, 다른 한쪽은 밖으로 나부끼며 웨딩케이크 처럼 꾸민 우윳빛의 천장 장식을 향해 돌돌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커튼은 포도주 빛 바닥 깔개 위로 물결치듯 내려 앉으며 바람결에 일렁이는 바다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방 안에서 유일하게 고정된 사물은 거대한 소파 하나였다. 젊은 여인 둘이 마치 닻을 내린 풍선 위에 탄 듯 소파 위에 사뿐히 올라앉아 있었다. 똑같이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두 여인은 집 주변을 잠시 날아다니다 막 집 안으로 날아들어 온 듯 둘다 옷자락에 잔주름이 물결치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커튼이 빚어내는 ‘휙’ 또는 ‘찰싹’ 하는 소리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톰 뷰캐넌이 뒤쪽 창문을 쿵 하고 닫자 방 안에 나부끼던 바람은 잦아들었고 이내 커튼도, 바닥 깔개도 그리고 두 젊은 여인도 풍선이 내려앉듯 바닥에 서서히 내려앉았다.
두 사람 중 나이가 더 어린 쪽은 낯설었다. 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 끄트머리에 몸을 쭉 뻗고 누워 있었다. 마치 턱 위에 뭔가를 올려놓고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곁눈질로 나를 본 것 같았지만 정작 본인은 시치미를 뗐다. 솔직히 나는 방해가 됐나 싶어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낼 뻔했다.
또 다른 여인은 데이지였다. 그녀는 적어도 몸을 일으키려는 시늉은 했다. 그녀는 애써 성의 있는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살짝 일으키곤 생뚱맞지만 매력적이고 귀여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 행복해서 온몸이 마비됐나 봐요.”
데이지는 대단히 재치 있는 말이라도 한 양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내 손을 잡더니 이 세상에서 나만큼 보고 싶어 애태운 사람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매력이었다. 데이지는 소파에 누워 균형을 잡고 있는 여자의 성이 베이커라고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항간엔 그녀가 속삭이듯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려고 자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을 깎아내리는 데 아무 도움도 못 되는 비난인만큼 합당한 평가는 되지 못한다.
어쨌거나 베이커 양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내게 보일락 말락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고는 애써 균형을 잡고 있던 물체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살짝 젖혔다. 내 입에서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뻔한 순간이었다. 어떤 모습이건 완벽한 자기 확신을 보여주는 사람을 보면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내 눈은 이제 나지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여동생에게 향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두 번 다시 연주될 수 없는 곡조를 빚어놓은 듯 그녀의 목소리엔 절로 귀를 기울이고 음의 높낮이를 일일이 따라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밝고 환한 눈동자와 밝고 열정적인 입술처럼 밝은 요소들이 어우러진 그녀의 얼굴에서 우울함과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면 그녀의 목소리에선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라면 좀처럼 잊기 어려운 열정적인 흥분이 묻어났다. 즉 노래하고 싶은 충동, 속삭임으로 바뀐 ‘경청’, 방금 전까지 한껏 신나고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계속해서 똑같이 신나고 재미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약속과도 같은 흥분 말이다.
나는 동부로 오는 길에 하루 짬을 내서 시카고에 들렀던 이야기며,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데이지에게 들려주었다.
“그 사람들이 내가 보고 싶대요?”
그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외쳤다.
“온 동네가 쓸쓸하던걸. 자동차란 자동차는 죄다 왼쪽 뒷바퀴를 장례식 화환처럼 새까맣게 칠했고 북쪽 해안가엔 구슬피 우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어.”
“어머, 멋지다! 톰, 우리 돌아가요. 내일 당장요!”
데이지는 이 말 끝에 얼토당토않은 말을 덧붙였다.
“오빠한테 우리 애를 보여줘야 하는데.”
“나도 보고 싶다.”
“지금은 잠들었어요. 이제 세 살이 됐어요. 우리 딸 본 적 없죠?”
“한 번도.”
“그렇담 꼭 봐야겠네요. 우리 앤…….”
이제껏 방안을 불안하게 서성이던 톰 뷰캐넌이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요즘 뭐하나, 닉?”
“채권업에 몸담고 있어.”
“누구하고?”
내 대답을 듣더니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생판 모르는 이름들이군.”
나는 그 말에 짜증이 치밀어 짧게 대답했다.
“앞으로 듣게 될 거야. 물론 자네가 동부에 계속 있을 때 얘기지만.”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당연히 동부에서 살 거니까.”
톰은 뭔가 더한 충격에 대비하려는 듯 데이지와 나를 차례로 힐끗거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이런 곳을 놔두고 딴 데 가서 산다면 그게 바보천치가 아니고 뭐겠나.”
바로 그때 베이커 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내가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입 밖에 낸 말이었다. 그녀도 나 못지않게 놀랐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하품을 하고 재빨리 몸을 추스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몸이 다 뻣뻣하네. 언제부터 이 소파에 누워 있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
그러자 데이지가 쏘아붙였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내가 점심때부터 널 뉴욕에 데려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때마침 주방에서 칵테일 넉 잔이 들어오자 베이커 양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뇨, 난 됐어요. 훈련 중이라 술은 절대 사절이에요.”
집주인인 톰은 그녀를 수상쩍게 바라봤다.
“훈련 중이라!”
그는 유리잔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을 마시듯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켜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 대단해.”
나는 베이커 양이 해낸다는 ‘그런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절벽이나 다름없는 가슴 그리고 꼿꼿한 몸가짐. 젊은 사관생도처럼 어깨를 뒤로 젖힌 자세는 그런 특징들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햇빛에 혹사당한 잿빛 눈으로 정중한 호기심을 드러낸 채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매혹적이지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어디선가 그녀를 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그녀의 사진이라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비웃는 듯이 내게 말했다.
“웨스트에그 섬에 사시나 봐요. 저도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도 개츠비 씨는 아시겠죠.”
그러자 데이지가 캐물었다.
“개츠비? 어떤 개츠비?”
내가 그 사람과 이웃이라는 말을 하려는데 마침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톰 뷰캐넌은 건장한 팔을 내 겨드랑이에 푹 쑤셔 넣곤 체커 판의 말을 옮기듯 나를 방 밖으로 끌어냈다.
젊은 두 여인은 엉덩이에 양손을 살짝 얹고서 가녀리고 나른한 몸을 이끌고 석양을 향해 품을 연 장밋빛 현관으로 앞장섰다. 현관에 놓인 탁자 위에서 촛불 네 개가 잦아든 바람결에 깜빡이고 있었다.
“웬 촛불이람?”
데이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촛불을 홱 낚아챘다.
“이제 이 주만 기다리면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이 와요.”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어때요, 다들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막상 그날이 되면 잊곤 하나요? 난 그러는데.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날이 되면 잊어버리고.”
“우리도 뭐든 계획을 세워봐야겠네.”
베이커 양은 하품을 하더니 마치 잠자리에 드는 사람처럼 힘을 빼곤 식탁 앞에 주저앉았다.
“좋아. 우리 어떤 계획을 세울까요?”
데이지가 말했다. 그녀는 대책 없는 얼굴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떤 계획을 세워요?”
내 입에서 미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더니 투덜거렸다.
“이것 좀 봐! 상처가 났어요.”
우리는 일제히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손마디가 검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원망스럽게 말했다.
“톰, 당신 때문이에요. 본심이 아닌 줄은 알지만 어쨌든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 이게 모두 내가 짐승 같은 남자하고 결혼해서 생긴 일이죠 뭐. 그것도 크고 엄청나고 강압적인 체구의…….”
“제발 그 강압적이라는 말 좀 그만해.”
톰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을 잘랐다.
“장난으로라도.”
“맞잖아요, 강압적인 것.”
데이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데이지와 베이커 양은 식탁에 앉자마자 남들이 알 수 없는 은밀한 분위기에서 실속 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잡담 축에도 못 끼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이 입은 흰 드레스나 모든 욕구가 사라진 냉담한 눈빛 못지않게 심드렁했다. 두 사람은 톰과 나를 저녁 식사 자리에 받아들였으되 깍듯하고 유쾌한 태도로 손님을 접대하는, 또는 접대받는 정도로만 성의를 베풀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저녁 식사가 끝날 테고 그러면이 밤도 끝나고 무심코 잊힐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의 사고는 서부 사람들의 사고와 완전히 달랐다. 서부의 밤은 끊어질 줄 모르는 아쉬운 기대감 속에서, 아니면 그 순간순간에 대한 순전하고 초조한 두려움 속에서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며 종말로 치닫는다.
“데이지, 네 말을 들으니 내가 현대 문명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 같다.”
나는 코르크 냄새가 나긴 해도 제법 괜찮은 클라레(와인의 일종-옮긴이)를 두 잔째 마시며 솔직하게 말했다.
“농작물이나 그 비슷한 얘기 좀 할 수 없을까?”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반응은 기대하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다. 톰이 난폭하게 끼어든 것이다.
“지금 우리 문명은 산산조각 나고 있어. 난 요즘 매사에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됐네. 자네 혹시 고다드라는 친구가 쓴 《유색 제국의 봉기》(로스롭 스토더드가 쓴 《색의 밀물The Rising Tide of Color》을 빗댄 표현-옮긴이)라는 책 읽어봤나?”
“글쎄, 못 봤는데.”
나는 그의 격앙된 말투에 적잖이 놀라며 대답했다.
“그래? 좋은 책이지. 그런 책은 누구나 읽어야 해. 그 책의 요지는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 같은 백인종은 저들 밑으로 완전히 가라앉는다는 거야. 철저히 과학적인 근거에 따른 책이지. 물론 입증도 됐고.”
“톰은 나날이 심오해지고 있어요.”
데이지는 무념무상의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긴 문장에 어려운 단어가 나열된 심오한 책들을 읽죠. 그 뭐였더라, 우리가…….”
“과학적으로 철저히 입증된 책들이라니까.”
톰은 그녀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 친구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해. 우리가, 그러니까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인종인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얘기야. 그러지 않으면 생판 다른 인종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고.”
“우리가 그 사람들을 전부 때려눕혀야겠네요.”
데이지는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눈이 부신 듯 눈을 연신 깜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 같은 데서 살아야 하는데…….”
베이커 양이 입을 열었지만 톰은 앉은 자리에서 육중한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꿔 앉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이 친구 주장은 우리가 북유럽 인종이라는 거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당신도. 그리고…….”
찰나에 가까운 망설임 끝에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함께 데이지도 같은 범주에 넣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또다시 눈을 깜박였다.
“게다가 문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건 다 우리가 만들었잖아. 그렇지, 과학이며 미술이며 모두. 안 그래?”
예전보다 한층 신랄해진 자만심이 양에 안 찼는지 한껏 열을 올리는 톰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안쓰러웠다. 그때 안쪽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현관에 있던 집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데이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집의 비밀 한 가지 알려줄까요?”
그녀는 의욕에 넘쳐 속삭였다.
“저 집사 코에 관한 이야기예요. 어때요, 듣고 싶어요?”
“오늘 밤에 내가 여기 온 게 바로 그 때문이야.”
“그게, 저 사람은 원래 이 집의 집사가 아니에요. 예전엔 뉴욕에서 2백여 명의 손님에게 은제 식기 서비스(격식을 차린 만찬에서 은으로 된 포크와 스푼으로 음식을 대접하는 일-옮긴이)를 제공하는 업체에서 식기 닦는 일을 했대요. 그러다 그 후유증으로 코에 이상이 생겨서…….”
“갈수록 악화되었죠.”
베이커 양이 거들었다.
“맞아요. 상태가 점점 나빠져서 하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대요.”
마지막 햇빛이 낭만적인 따사로움을 품고 데이지의 눈부신 얼굴에 아주 잠깐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저절로 숨을 죽이면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눈부심은 곧 희미해졌고 가닥가닥의 햇빛 역시 해 질 녘에 신나게 놀다 거리를 떠나는 아이들처럼 그녀에게 아쉬운 회한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집사가 돌아와 톰의 귀에다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인상을 쓰며 의자를 뒤로 밀치더니 아무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게 그녀 안에서 뭔가를 치밀어 오르게 했는지 데이지는 또다시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녀는 은은한 매력을 풍기며 노래하듯 말했다.
“우리 집 식탁에서 오빠를 보게 돼서 진짜 좋아요. 음, 오빠를 보니 장미꽃 생각이 나요,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장미꽃. 그렇지 않니?”
그녀는 맞장구를 쳐주길 기대하며 베이커 양 쪽을 돌아봤다.
“완벽한 장미꽃이 떠오르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눈곱만큼도 장미꽃과 닮은 데가 없었다. 데이지가 즉흥적으로 꾸며댄 말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선 마음을 흔드는 온화함이 물결치듯 흘러나왔다. 마치 숨 막히도록 짜릿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춰진 그녀의 심장이 나를 향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가 냅킨을 식탁에 팽개치더니 먼저 일어선다며 양해를 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베이커 양과 나는 별 뜻 없이 의식적으로 짧은 눈길을 주고 받았다.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쉿!” 하고 말했다. 식당 너머의 방에서 나지막하지만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그 소리를 들으려고 몸을 기울였다. 중얼거림은 어느 순간 집요하게 이어지다가 낮게 가라앉았고 다시 흥분해서 고조되다가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당신이 말한 개츠비 씨가 실은 제 이웃에…….”
나는 말을 시작했다.
“입 다물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어야겠어요.”
“벌어지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까?”
나는 순진하게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베이커 양은 진짜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
“이런…….”
그녀는 망설이며 말했다.
“톰이 뉴욕에 여자를 숨겨놨거든요.”
“여자요?”
나는 멍하니 다시 물었다.
베이커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양 있는 여자라면 저녁 식사 시간에 남자 집에 전화를 걸진 않겠죠. 안 그래요?”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간신히 알아차릴 즈음 드레스 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가죽 부츠의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톰과 데이지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만!”
데이지가 한껏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베이커 양과 나를 탐색하듯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잠시 밖을 내다봤는데 어찌나 낭만적이었는지. 잔디밭에 새 한 마리가 앉았는데, 내가 볼 땐 틀림없이 커나드(선박회사 이름-옮긴이)나 화이트 스타 라인(선박회사 이름-옮긴이) 배를 타고 건너온 나이팅게일이었어요. 그 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곧 노래가 되었다.
“톰, 낭만적이지 않아요?”
“대단히 낭만적이군.”
톰은 이렇게 대답한 뒤 우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녁을 마치고 나서 해가 좀 남아 있으면 자네한테 마구간 구경을 시켜주고 싶군.”
그때 갑자기 집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데이지는 톰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마구간 이야기는, 사실상 모든 이야기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날 식탁에서 마지막 오 분 동안 산발적으로 벌어진 일들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촛불들이 도로 켜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데이지와 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과연 겉보기에 뼛속까지 회의론자임이 분명한 베이커 양마저 과연 다섯번째 손님이 보낸 찢어지는 금속성의 다급한 신호를 머릿속에서 철저히 배제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기질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내가 본능에 따랐다면 당장 경찰서에 전화했을 것이다.
당연히 말 이야기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톰과 베이커양은 1, 2미터 정도 떨어진 석양을 사이에 두고 뒤쪽 도서관으로 산보를 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손이 닿을 듯한 거리에 시신을 두고 그 옆에서 밤샘 기도라도 하러 가는 사람들 같았다. 그동안 나는 신이 나고 흥미로운 척, 귀가 잘 안 들리는 척하면서 데이지를 따라 앞 현관과 차례로 이어진 베란다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에 내려앉은 깊은 어둠 속에서 등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데이지는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촉감으로 느껴보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곤 비단결 같은 황혼을 음미하듯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한 상태인 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어린 딸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우린 서로 별로 아는 게 없네요.”
그녀가 난데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