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희는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파리 4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경성대학교 불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르 클레지오의 《사막》,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의 자리》, 파트릭 사무아조의 《텍사코》(공역) 등이 있다.
박혜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4대학에서 불문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 불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셸 투르니에의 《빨간 난장이》,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보들레르의 마지막 나날들》, 파트릭 사무아조의 《텍사코》(공역) 등이 있다.
초판 1쇄 펴낸날·1994년 5월 9일(1권) 1994년 6월 10일(2권)
개정1판 1쇄 펴낸날· 2002년 7월 10일
개정1판 11쇄 펴낸날· 2022년 4월 1일
지은이· 시몬 드 보부아르
옮긴이· 홍상희, 박혜영
펴낸이· 김준성
펴낸곳· 책세상
등록·1975. 5. 21 제 1-517호
주소·서울시 마포구 동교로2길 27,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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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EILLESSE by Simone de BEAUVOIR
Copyright Ⓒ LES ÉDITIONS GALLIMARD, Paris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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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was by arrangement with
LES ÉDITIONS GALLIMARD (Paris)
Chaek Se Sang Publishing Co.,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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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 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붓다는 한 노인을 통해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난 붓다는 인간 조건 전부를 걸머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인간 조건 중에서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들은 피한다. 그중 ‘늙음’이라는 것을 유난히도 멀리한다. 미국 사람들은 ‘사망한’이라는 단어를 말소해버렸다. 대신 ‘가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 노년에 관계되는 모든 말들을 회피한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도 ‘늙음’은 역시 금지된 주제이다. 《사물의 힘La Force des choses》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그 금기를 깨뜨렸다. 그때 그로 인해 야기된 항의의 소리란! 나는 내가 노년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인정은, 늙음이 모든 여자들을 복병처럼 노리고 있으며, 이미 많은 여자들이 늙음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하는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친절하게 혹은 몹시 화를 내면서 내게 똑같은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노년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보다 젊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에요”라고. 우리 사회는 노년을 마치 일종의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성이나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분야에는 풍부한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반면 전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노년에 관련된 것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만화 작가는 등장 인물 중에 할아버지, 할머니 한 쌍을 집어넣었다가 만화 한 편을 온통 뜯어고쳐 다시 그려야 했다고 한다. ‘노인들을 삭제해버리시오!’1)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내가 노년에 관한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한 생각도 하셨군요!…하지만 당신은 늙지 않으셨는데요!…어찌 그런 서글픈 주제를…”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쿠제는, 소비 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 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 계급으로 취급한다. 프랑스는 노인의 인구 분포율에서 세계 최고——전체 인구의 12%가 65세 이상——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가난과 고독, 불구, 그리고 절망의 형(刑)을 언도받았다. 미국 노인들의 운명이라고 그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은 자기들이 표방하는 휴머니즘과 노인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를 타협시키기 위하여, 노인들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편리한 결정을 취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면, 그것이 인간의 목소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나가는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나는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노인들에 대하여 사회가 취하는 태도는 하나같이 이중적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을 어떤 분명한 연령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 사춘기의 위기는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하나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해준다. 18세에서 21세의 젊은이들은 성인 세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지위 향상에는 거의 언제나 ‘통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노년기가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가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지위의 확립을 기리는 ‘통과 의식’2)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법상으로는 백 살 먹은 사람과 사십대 사람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 법률가들은 질병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져야 할 형법상의 책임은 젊은이와 똑같다고 간주한다.3) 실질적으로 사람들은 노인들을 별개의 범주로 치지 않는다. 게다가 노인들도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출판물, 영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는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층을 겨냥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노년기 연령층을 위한 것들은 없다.4)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 되는 보잘것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낀다. 편리한 환상이다. 경제학자들이나 입법의회 의원들은 경제 활동 인구에게 비경제 활동 인구는 하나의 짐이며, 그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사실을 개탄한다. 그때 그들은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편리한 환상이 옳다는 것을 믿게 하는 셈이다. 현재 경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바로 미래의 비경제 활동 인간이 아닌가. 또한 그들은 현재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미래를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조합원들은 그 점을 올바르게 보고 있다. 그들이 요구 사항을 제시할 때, 퇴직 문제에 항상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경제력이 전혀 없는 노인들은 그들의 권리를 부각시킬 수단이 없다. 착취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과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 관계를 끊어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변호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산층의 사고 방식이 유포시킨 신화들과 상투적인 말들은 노인을 ‘타인’으로 보여주려고 애쓴다. “청춘기는 꽤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인생은 바로 이런 청년들을 노인들로 만든다”라고 프루스트는 지적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 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들 자신의 승화된 이미지, 그것은 백발의 후광에 싸인 경험이 풍부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 인간 조건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현자이다.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되면 노인들은 형편없이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이미지에 대립되는 이미지가 부여된다. 그것은 노망이 들어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해서 어린애들의 놀림감이 되는 실성한 노인이다. 여하튼 미덕에 의해서건 또는 타락에 의해서건, 노인들은 인간이라는 범주 밖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하다고 판단되는 최소한의 것조차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절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인 추방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 결국에는 그것이 우리들 자신을 거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모든 현실 중에서 순수하게 추상적인 개념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는 현실은 아마 노년기일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평가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생각한다. 사람들 중 대다수는 노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큰 변화를 앞당겨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늙는다는 것보다 더 자명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보다 더 예상 외인 것도 없다.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하여 물으면 젊은이들, 특히 젊은 처녀들은 자신의 인생을 제일 길게 잡아봐야 60세로 제한한다. “그 나이까지는 안 갈 거예요. 난 그전에 죽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난 그전에 자살하겠어요”라고까지 한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는 절대로 늙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종종 퇴직의 순간이 오면 갑자기 망연자실하는 노동자도 있다. 퇴직 날짜는 미리 정해져 있었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것에 대비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사실 철저하게 정치화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것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보다 앞서 그날이 가까이 오면, 이미 사람들은 보통 죽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긴 시간을 앞서서 거리를 두고 가장 명철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늙는다는 현실이다. 노년기란 우리의 직접적인 가능성들 중의 일부이며, 어느 나이에고 노년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어떤 때 우리는 노년과 매우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종종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순간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젊거나 혹은 한창 나이일 때 우리는 붓다처럼, 우리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노년기를 갈라놓고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어서 우리 눈에는 그것이 영원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 머나먼 미래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한편 죽은 사람들은 그 무엇도 아니다. 이 죽음이라는 무(無) 앞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무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죽음이라는 소멸 속에서 나는 나의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한다.5) 그러나 20세, 40세에 노파가 된 나를 생각해본다는 것, 그것은 ‘타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신체적인 변화 속에는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심지어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히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자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자 하는 욕망은, 어린 시절에는 보통 어른이라는 지위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점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마치 불명예처럼 느껴진다. 건강을 잘 간직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늙음이 가져오는 신체적인 노쇠는 눈에 금방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종(種)은 살아온 햇수에 따른 변화가, 구경거리가 될 만큼 가장 두드러지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옆구리가 홀쭉해지고 쇠약해져도 모습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변한다. 우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옆에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미래의 얼굴과도 같은 그 여인의 어머니를 볼 때 가슴이 멘다. 레비 스트로스의 보고에 따르면 남비크와라 인디언은 ‘젊고 아름답다’는 뜻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하며, 또 ‘늙고 추하다’는 뜻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는 연로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의 모습 앞에서도 미심쩍어한다. 저런 일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터무니없는 어떤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속삭인다. 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 그건 내가 아니라고. 늙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기 전에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 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과 같다. 그러나 일종의 평등성이 지배하는 집단 안에서——농촌 사회 안에서나, 또 몇몇 원시 민족들 세계에서——중년에 접어든 사람은 스스로 알고 싶어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가 노인에게 설정하는 조건이 그의 내일의 인간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농촌에서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이다. 한 농부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늙은 아버지를 가족과 격리시켜놓고 조그만 여물통 속에 음식을 담아 먹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나무 판자를 짜 맞추고 있는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다. 어린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빠, 이건 아빠가 늙었을 때 쓰려고 만드는 거야.” 그날로 할아버지는 가족 식탁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게 된다. 집단 사회의 구성원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 이익과 눈앞의 이익 사이의 타협점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절박한 필요성에 처할 때 어떤 원시인들은 할 수 없이 연로한 그들의 부모를 죽인다. 그들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을 각오하고서 말이다. 그보다 극단적이지 않은 경우에는 앞을 예측하는 선견지명과 부모 자식 간에 느끼는 감정들이 이기주의를 완화시킨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은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기계의 수명이 아주 짧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는 인간도 너무 오랫동안 쓰여서는 안 된다. 55세를 넘은 모든 인간은 폐물 처리해버려야 한다”라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류학자 리치Leach 박사는 최근 6) 어느 학술 연구회에서 말했다.
‘폐물’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퇴직 생활이란 자유와 여가의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시인들은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7)을 떠벌려 예찬한다. 그러나 이것은 염치 없는 거짓말들이다.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 수준은 너무나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역으로 살펴보자. 극빈자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여가 시간이 많다고 해서 퇴직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 마침내 여러 가지 구속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는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긴다. 그저 쓰레기 신세가 된 그는 고독과 권태 속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우리가 노인들을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체로 볼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온 과거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면 이런 자명한 사실은 우리의 목을 메게 할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절단해버리는 우리의 사회 체제를 비난하는 자들은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 사회를 뒤흔들어 동요시키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을 집중시켜야만 성공한다. 카스트 제도를 없애버리기 위하여, 간디는 천민인 파리아들의 인간 조건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또한 봉건 가족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중국은 여자를 해방시키지 않았던가. 인간은 그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는, 현 상황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전복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몇몇 제한적인 개혁을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나는 ‘노년’이라는 말에 마치 잘 정의된 어떤 현실이 내포되어 있기라도 한 듯이 말해왔다. 사실 우리 인간이라는 종(種)에게서는 노화(老化)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늙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나이 든 인간의 신체 기관은 몇 가지 특성을 나타낸다. 어떤 행동들은 정당하게 노년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모든 인간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늙는다는 것에도 존재적인 차원이 있다. 늙는다는 것은 개인이 시간과 맺는 관계를 변경시킨다. 고로 늙는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그 자신의 역사와 맺는 관계도 변경시킨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여느 연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여러 다른 관점들의 밀접한 상호 연관성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리적인 여건들과 심리적인 사실들을 분리시켜 개별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모두 알다시피 너무 추상적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의 상관 관계가 혼란스러워지는 노년기에는 이러한 관계가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개인의 정신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존재 상황에 비춰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존재 상황은 또 그의 인체에 반향된다. 그리고 역으로 한 인간이 시간과 맺는 관계는 그의 육체가 어느 정도 손상되었는가에 따라 다르게 감지된다.
결국, 사회는 신체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든지, 과거의 경험이라든지 하는 노인의 개인적인 특질을 고려하여 사회 속에서 위치와 역할을 지정한다. 또한 개인은 사회가 그에게 취하는 실제적이며 관념적인 태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므로 노년의 모든 현상을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그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노년은 이런 무한한 순환성 속에서 포착되어야만 한다.
노년에 관한 연구가 여러 면에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시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본질적인 목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연로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많은 지면을 원시적 공동체라 불리는 공동체 속에서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조건과, 인류사의 여러 다른 시기에 노인들에게 주어졌던 조건에 할애하는 것을 보고 독자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생물의 숙명으로서 노화가 초역사적인 현실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 운명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된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한 사회 안에서 노년이 지니는 의미나 무의미는 그 사회 전체를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노년을 통해서 이전의 전 생애의 의미 혹은 무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선택한 해결책들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집단들이 채택한 해결책들과 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비교를 통해 우리는 노인의 조건 중 불가피한 것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어느 정도로 또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 그런 난점들에 대해 일시적인 처방이나마 할 수 있는지,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그들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몫은 어떤 것인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상황은 보는 관점에 따라 외면성과 내면성,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외면성이란 그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며, 내면성이란 주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 초월해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타인의 노년은 앎의 대상이다. 반면 자기 자신의 노년은 자기의 상태에 대한 산 경험과 관련 있는 법이다. 이 책의 제1부에서 나는 첫 번째 관점을 채택하여 생물학, 인류학, 역사·사회학이 노년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를 검토할 것이다. 제2부에서는 인간이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자기의 육체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시간과 타인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 어떤 식으로 그것을 내면화하는가를 기술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 두 연구 중 어느 것도 우리가 노년에 대해 정의내릴 수 있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노년이 환원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이 노년을 맞게 되는 방식은 계층에 따라 다르다. 늙은 노예와 늙은 귀족, 보잘것없는 연금을 받는 퇴직 직공과 오나시스 같은 사람 간의 차이는 엄청나다. 노년의 이런 개인적인 차이에는 건강, 가족 등과 같은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범주 가운데 하나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다른 하나는 아주 적은 소수에 제한되어 있어, 착취하는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대립을 야기시킨다. 일반적으로 노년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진술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이 두 범주 간의 단절을 은폐하려 하기 때문이다.
당장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노년은 정태적(靜態的)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의 결말이며 연장이다. 이 과정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늙는다는 개념은 변화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태아, 신생아, 어린아이의 삶도 연속적인 변화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정의내렸듯이 느릿느릿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결론 지어야 할까? 분명 그렇지 않다. 그러한 역설은 삶의 본질적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매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不動)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학 의사인 랜싱Lansing 씨는 노화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난점이 우리의 연구를 즉시 방해한다. 즉 ‘불리한’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어떤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진보와 퇴보는 정해진 목표와 관련해서만 존재한다. 마리엘 구아첼 선수는 자기보다 어린 여자들에게 스키 솜씨가 뒤지던 날 스포츠 분야에서는 스스로를 늙었다고 간주해야 했다. 연령층이란 살아간다는 모험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은 훨씬 더 불명확하다. 인간의 삶이 겨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그 목표에서 멀어지는 것은 어떤 변모이고 그 목표에 다가가는 것은 어떤 변모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인간의 신체 조직만 고려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모든 신체 조직은 생명을 유지하여 존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 위하여 신체 조직은 그 균형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매번 균형을 회복해야 하고, 외부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이 세상과 가장 광대하고도 가장 확고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망에서 볼 때 ‘유리한’이라든지 ‘무관한’이라든지 ‘해로운’이라는 단어들은 명백한 의미를 지닌다. 출생에서 18세 또는 20세까지 신체 조직의 발달은 생존 기회의 증가를 목표로 한다. 신체 조직은 저항력을 더 높이며,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을 증가시키고 따라서 전체 능력도 커진다. 개인의 신체적 능력의 총체는 20세를 전후해서 활짝 꽃피어 절정에 이른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 20세까지 신체 변화는 이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변화들은 신체 조직의 개선도, 약화도 야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무관한 변화들이다. 유아 시절에 나타나는 흉선(胸線)의 퇴화나 개인이 필요로 하는 양보다 엄청나게 많은 뇌신경의 감소는 이런 무관한 변화에 속한다.
노년에 찾아오는 불리한 변화들은 매우 일찍부터 생긴다. 시각 굴절 작용의 한계는 10세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다. 우리 귀로 들을 수 있는 고음(高音)의 한계선은 벌써 청소년기 전에 낮아진다. 자연적인 기억력 가운데 한 가지 형태는 12세부터 약해진다. 킨제이 보고에 따르면 남자의 성적인 능력은 16세 이후에는 쇠퇴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 능력의 감소는 매우 제한된 것이기도 할뿐더러, 그것이 일어난다고 해도 유아와 젊은이의 신체 발달이 상승선을 유지하는 것을 저해하지는 못한다.
20세 이후, 특히 30세 이후에는 여러 조직들이 퇴화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부터 노화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육체조차 순수한 자연이 아니다. 모든 신체 기관의 능력 상실이나 변질, 쇠약은 몽타주에 의해, 기계적인 동작에 의해, 또 실제적이고 지적인 지식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특별한 경우에 결함이 발생하고, 또 그 결함에 쉽게 대처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노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 결함이 심각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그때 육체는 쇠약해지며 다소 신체적 부자유가 따른다 ——우리는 명확하게 신체가 노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고려하게 되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쇠퇴는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면 절정의 위치를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유사한 발전상을 따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신체적 퇴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정신적 손실을 상당히 겪을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정신적인 쇠퇴 기간에 지적인 이득을 꽤 실현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것에 더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신체적인 능력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 혹은 정신적인 능력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 아니면 이 두 가지의 조화로운 균형에 가치를 더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개인이나 사회가 연령층을 어떻게 분류하는가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 어떤 분류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풍부한 가능성, 엄청난 학습, 신선한 감각 면에서 어른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이 점만 가지고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퇴보한다고 평가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프로이트의 견해였던 것 같다. “아주 건강한 어린아이의 눈부신 지능과 보통 성인의 지적인 취약성 사이의 서글픈 대비를 생각해보십시오”라고 그는 썼다. 몽테를랑도 자주 그러한 생각을 전개시켰다. 그의 작품 《죽은 여왕La Reine morte》 속에서 페랑트Ferrante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 시절의 천재적인 능력은 한번 꺼지면 영원히 다시 찾아오지 않아요. 우리는 항상 나비는 애벌레에서 나온다고 말하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나비가 애벌레가 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나 몽테를랑이 어린 시절에 가치를 두는 데는 둘 다 개인적인 이유들이——서로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성숙이라는 단어 자체가 보통 우리가 어린아이나 젊은이보다는 성숙한 인간이 훨씬 우월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성숙한 인간은 지식, 경험, 능력을 획득한 상태이다. 학자나 철학자, 작가들은 보통 인간의 정점을 그의 인생의 한가운데에 둔다.1) 그중 어떤 사람들은 노년을 인생의 특혜받은 시기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들은 노년은 경험과 지혜와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고 퇴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어떤 목표에 의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절대로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각자 고유의 목표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만 쇠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상의 검토는 내가 지금까지 말한 바를 확인시켜준다. 즉 노년은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1)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은 56세에 정점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는 35세에, 영혼은 50세에 완벽한 경지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단테는 45세면 노년에 접어든다고 말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정년은 일반적으로 65세이다. 나는 65세나 그 이상 나이가 든 사람들을 가리켜 늙었다라든가, 노인, 연로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 대조할 때에는 그들의 나이를 명시할 것이다.
노화와 생물학
생물학적 차원에서 쇠퇴의 개념에는 분명한 하나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방금 보았다. 생명을 유지해나갈 가능성이 줄어들 때 신체 조직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이런 변질의 숙명성을 의식해왔다. 고대에서부터 사람들이 그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해답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의학이 생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에 종속되어왔다.
이집트를 비롯한 모든 고대 민족 사회에서 의학은 마술과 혼동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은 맨 처음에는 종교 철학이나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의학이 그 독창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오로지 히포크라테스에 이르러서였다. 그리하여 의학은 과학이며 기술이 된다. 의학은 경험과 합리적인 추론에 의하여 학문으로서 체계를 세우게 된다. 히포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가 내세운 혈액, 담, 황담즙, 흑담즙이라는 4체액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질병이란 이 4체액의 균형이 파괴된 결과로 생겨나며 노화도 똑같은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화는 56세에 시작된다고 했다. 인간 삶의 단계를 처음으로 자연의 사계절에 비교한 것도 그였고 노년을 겨울에 비교한 것도 그였다. 그가 쓴 책들 중 몇몇 권, 특히 경구들은 노인들에 대한 정확한 관찰을 모아놓았다(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음식물 섭취가 적다. 그들은 호흡 곤란, 발작적인 기침을 야기시키는 감기, 배뇨 곤란, 관절통, 신장 질환, 현기증, 뇌일혈, 전신 쇠약, 전신 소양증, 졸음 등으로 고통을 받는다. 노인들은 장(腸), 콧구멍, 눈 등으로 물을 배출한다. 흔히 노인들은 백내장이 있고 시력이 약하며, 청력도 약해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노인들에게 모든 영역에서 절제하도록 충고하며 또한 활동을 중단하지 않을 것도 충고한다.
히포크라테스의 계승자들 중에는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득세했는데, 그의 이론은 경험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색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그의 이론에 의하면 생명의 조건은 내적인 열이다. 그래서 그는 노쇠를 열이 식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인들이 신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개념을 계승했다. 즉 성감, 4체액, 체액의 혼합, 호흡[氣]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하의 로마에서 의학적 지식은 페리클레스 통치하의 그리스 때보다 발전한 것이 없었다.
갈레노스에 의해 고대 의학의 전반적인 종합이 이루어진 것은 겨우 2세기에 들어서였다. 그는 노년을 질병과 건강의 중간 상태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노년은 딱히 병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렇지만 노인의 모든 생리적 기능은 감소하고 약해진다. 그는 이런 현상을 4체액 이론과 내부 열 이론을 결합시켜 설명한다. 내적인 열은 4체액의 연소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육체의 수분이 빠지고 4체액이 증발되면 그때 체내의 열도 꺼진다는 것이다. 그는 《게로코미카Gérocomica》에서 건강 위생법을 소개했는데,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 이 건강법이 유지되었다. 그는 노인의 몸은 따뜻하고 수분이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노인은 따뜻한 목욕을 하고 포도주를 마셔야 하며 또 활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인에게 상세한 식이 요법을 추천했다. 그는 80세에도 환자들을 진찰하러 다녔고 정치 회합에도 참여했던 안티오쿠스라는 노의사와, 100살 가까운 나이까지 대단한 건강을 보존했던 늙은 문법학자 텔레포스를 예로 들었다.
수세기 동안 의학은 그의 저서를 풀이하는 데 그쳤다. 토론하기보다는 차라리 믿기를 좋아하던 시기에, 권위주의적이며 자신만만하게 자기 이론에 잘못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던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그는 그리스적인 다신교에 반대하여 동양에서 들어온 유일신교를 긍정하던 시기와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이론에서는 종교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유일한 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육체를 영혼의 물질적인 도구라고 생각했다. 교회의 신부들은 그의 관점을 채택했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도 그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중세기 내내 의학의 발전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로 노화에 대해서도 별다른 지식의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아비센나 ——그도 역시 갈레노스의 제자였다 —— 는 노인들의 만성 질환과 정신적인 장애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직도 생명을 램프 기름의 연소로 생기는 불길에 비유하는 데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이미지였다. 왜냐하면 중세기에 영혼은 흔히 불길로 표상되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의사들의 큰 걱정거리는 치유하는 일보다는 차라리 예방하는 일이었다. 서양 의학의 탄생과 발전의 산실이었던 살레르노 학파는 ‘건강과 장수의 식이 요법’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 주제에 대한 저술도 풍부하게 발전했다. 13세기에 노년을 질병으로 간주했던 로저 베이컨1)은 클레멘스 6세를 위하여 노년 건강법을 저술했다. 거기서 그는 많은 부분을 연금술에 할애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볼록 렌즈를 써서 시력을 교정할 생각을 해낸 것은 바로 그였다.2) 15세기 말까지 노화에 관한 저서들은 모두 위생법 개론들이었다. 몽펠리에 학파는 건강 식이 요법서들을 써냈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는 예술의 르네상스에 병행하여 과학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의사 제르비는 《게론토코미아》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은 노년의 병리학에 바쳐진 전문적인 첫 연구 논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 중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르네상스 초기에 눈부시게 진보한 의학 분야는 해부학이다. 중세 천 년 동안 인간 육체의 해부는 금지되어 있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공개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 해부학의 창시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는 화가였으므로 인체를 표현하는 데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육체를 정확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인체에 대한 실제 지식을 충분히 얻기 위하여 나는 인체를 10구 이상 해부했다”라고 그는 글로 밝힌 적이 있다. 사실인즉 그는 말년에 30구가 넘는 시체를 해부했다. 그는 노인들의 얼굴과 몸을 많이 그렸다. 또한 스스로 관찰한 바에 따라 노인들의 내장이며 동맥도 그림으로 그렸다.3)
해부학은 베살리우스와 더불어 계속 발전했다. 베살리우스는 해부학의 거장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학 분야는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과학은 철학에 젖어 있었다. 휴머니즘은 전통에 맞서 투쟁하려고 애썼으나 전통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16세기에 파라셀수스는 모더니즘에 신경을 써서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저서를 썼다. 그 속에서는 참신하고 주목할 만한 직관들이 엿보이나 그것들은 얽히고 설킨 복잡한 이론들 속에 잠겨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인간은 ‘화학적인 구성’이며 노화란 자가 중독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노년에 대해 씌어진 저서들은 단지 예방을 위한 위생법에만 신경을 써왔다. 진단학과 치료학에 대해서는 산발적인 정보밖에는 찾을 수 없었다. 베네치아의 의사 다비드 포미스David Pomis는 이 문제들을 처음으로 질서 있고 명확하게 다룬 사람이었다. 노년의 질병들에 관한 그의 묘사 중 몇몇 글들은 매우 정확하고 발전된 것들인데, 그중 특히 고혈압에 관한 묘사가 그러하다.
17세기에는 노년에 관한 저서들이 많았다. 그러나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없다. 18세기에도 여전히 갈레노스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에 게라르트 판 스비텐Gerard Van Swieten이 있다. 그는 노년을 불치의 병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연금술이나 점성술에서 영감을 받은 노화에 대한 치료법을 비웃는다. 그는 노화에 따른 해부학적인 변화 중 몇몇 사항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중산층의 부상과 그들이 찬동하는 합리주의와 기계주의는 아이애트로피직스, 즉 물리 의료라는 새로운 학파의 창설을 가져온다. 보렐리Borelli와 바글리비Baglivi는 라 메트리La Mettrie의 개념들을 의학에 도입한다. 즉 육체는 기계, 다시 말해서 실린더와 주릿대와 바퀴들의 총체라는 것이다. 폐는 풀무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노년에 대해 고대 기계주의자들의 이론을 다시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4) 다시 말해서 마치 기계가 닳듯이 신체 기관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면 파손된다는 생각이다.5) 이런 주장은 19세기까지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이 주장이 가장 크게 유행한 것도 바로 19세기였다. 그러나 ‘마모’라는 개념은 여전히 매우 막연한 채로 있었다. 한편 슈탈은 ‘생기론(生氣論)’이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것은 인간 속에는 뭔가 생명의 원칙, 곧 하나의 실체가 있으며 그것이 약해지면 노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사라지면 죽게 된다는 이론이다.
전통 옹호자들과 현대적 체계를 옹호하는 자들 사이에 공허한 말싸움이 많이 벌어졌다. 의학은 심각한 이론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의학은 이제 더 이상 낡은 4체액 병리학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직 새로운 기초가 발견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학은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의학은 진보하고 있었다. 시체 해부가 늘어난 덕택으로 해부학은 진보했다. 노화의 연구도 그 덕을 보았다. 러시아에서 검역 책임자로 있던 피셔Fischer는 갈레노스의 이론을 깨뜨리고 신체 기관의 노화에 따른 퇴화를 체계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저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새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761년에 나온 이탈리아인 모르가니Morgagni의 방대한 저서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는 시체 해부 중에 발견, 관찰된 사항들과 임상 증세들 사이의 상관 관계를 처음으로 수립한 사람이다. 그는 책의 한 절을 노화에 할애했다.
18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노화에 관한 책이 세 권 나왔는데, 그것들은 19세기와 20세기의 발견을 앞서는 저서들이었다. 미국인 의사 러시Rush는 관찰에 기초를 둔 생리학적·임상학적으로 중요한 연구를 발표했다. 독일인 후펠란트Hufeland도 그의 저서에 흥미로운 관찰 사항들을 많이 수집해놓았다. 그의 논문은 당시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생기론자였다. 신체 조직 하나하나에는 어떤 에너지가 주어져 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에너지가 고갈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저서는 1799년에 출판된 자일러Seiler의 저서이다. 그는 전적으로 노인 해부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체 해부에 의거했다. 그는 독창성이 떨어졌지만 그로부터 십 년 이상 그것은 가장 높이 평가받는 연구 방법 중 하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그 저서가 사용되었다.
19세기 초 몽펠리에 의사들은 여전히 생기론에 동조하고 있었다.6) 하지만 의학은 생리학과 다른 경험 과학들의 진보의 덕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화에 관한 연구들은 정확하고 체계적이게 되었다. 1817년 로스탕Rostan은 노인들의 천식을 연구했다. 그는 천식과 두뇌 장애와의 관계를 발견해냈다. 1840년 프뤼Prus는 노화에 따른 퇴행성 질병들에 관한 체계적인 첫 저서를 썼다.
노인병학——아직 이런 이름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이 실제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프랑스에서는 노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대규모 구제 병원들이 창설되면서 노인병학이 장려되었다. 라 살페트리에르 구제원은 유럽에서 가장 큰 구제원이다. 거기에는 8천 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중 2천 명 내지 3천 명이 노인들이었다. 비세트르에도 노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인들에 대한 임상 보고를 수집하기가 쉬워졌다. 라 살페트리에르는 최초의 노인병학 기구의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다. 샤르코Charcot는 거기서 노화에 관한 유명한 강연들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1886년 출판되어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상투적이며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위생학 이론들도 그 당시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예방 의학은 치료 의학에 뒤졌다. 이제 사람들은 노인들을 치료하는 데 신경을 썼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프랑스에,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도 노인들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환자들 중에 노년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퇴행성 질환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맥박수와 호흡 리듬에 대한 연구서들은 샤르코의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나왔다. 1847년에 출판된 페노크Pennock의 저서와 1852년에 나온 레베예-파리즈Réveillé-Parise의 저서가 그것이다. 1857년과 1860년 사이에 가이스트Geist는 독일·프랑스·영국에서 출판된 노인병에 관해 언급하는 저술들을 잘 종합한 책을 출판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연구가 대폭 증가했다. 프랑스에서는 1895년에 부아-테시에Boy-Tessier가, 1908년에는 로지에Rouzier가, 1912년에는 피크Pic와 바마무르Bamamour가 훌륭한 종합적인 저서들을 출판했다. 독일에서 나온 뷔르거Bürger의 저서, 1908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마이놋Minot과 메치니코프의 저서들, 그리고 1915년에 출간된 동물학자 차일드Child의 저서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그전시대와 마찬가지로 몇몇 학자들은 유일한 한 가지 원인으로 노쇠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19세기 말 어떤 학자들은 노화 현상은 생식샘의 퇴화에 기인한다는 이론을 지지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인 브라운-세카르는 72세에 쥐와 개의 고환에서 추출한 물질을 자신에게 주사로 투여했으나 지속적인 결과는 없었다. 역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인 보로노프는 나이 든 남자들에게 원숭이의 생식샘을 이식하는 방법을 고안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보고몰레츠는 호르몬을 기초로 하여 다시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혈청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 실패했다. 한편 메치니코프는 노쇠가 자가 중독에 기인한다는 관점의 현대적 형태를 받아들였다. 20세기 초 카잘리스Cazalis는 “사람의 나이는 그의 동맥의 나이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크게 성공했다. 그는 동맥경화증을 노화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가장 널리 보급된 생각은, 노화는 신진대사의 감소에서 온다는 것이었다.
노인병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사람은 미국인 네이셔Nascher이다. 노화에 관한 중요한 연구 중심지였던 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의학을 공부했다. 의학생 그룹과 함께 양로원을 방문하던 중 그는 한 노파가 교수에게 여러 가지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교수는 그 노파의 병은 다름 아닌 노환이라고 설명했다. 의학생인 네이셔는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어쩔 도리가 없는 거지.” 네이셔는 교수의 이 대답에 너무 놀라 노쇠에 대한 연구에 헌신하게 되었다. 빈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한 양로원을 방문했는데, 그곳 노인들의 건강과 장수에 매우 놀랐다. 그의 동료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그런 나이 든 환자들을 소아과 의사들이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의학의 새로운 특수 분야를 창설하도록 했는데 그는 그것을 노인병학이라고 명명했다. 1909년에 그는 첫 번째 계획을 발표했다. 1912년에는 뉴욕에 노인병학회를 창설하고, 1914년에는 그 문제에 관한 새로운 저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는 출판사를 찾느라 고생했다. 사람들이 그런 주제를 흥미롭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노인병학 외에 오늘날 노인학gérontologie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발전했다. 노인학은 노화의 병리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화 과정 그 자체를 연구한다. 20세기 초 노년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는 다른 업적들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식물이나 동물들의 삶을 조사하면서, 사람들은 부수적으로 동식물이 나이가 들면서 겪는 모든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젊음과 청춘기를 대상으로 한 전문 서적들은 많이 나온 반면, 노년기 그 자체를 위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부분 내가 이미 지적한 바 있는 금기 때문이었다.7) 노년은 유쾌하지 않은 문제였던 것이다. 1914년에서 1930년 사이에 노년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진 중요한 연구라고는 카렐Carrel의 연구밖에 없다. 그의 개념들은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는데, 그 또한 노화는 세포의 신진 대사가 만들어내는 생성물 때문에 일어나는 자가 중독증이라는 생각으로 복귀한다. 그후 상황이 변했다. 미국에서는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노인 인구가 두 배로 불어났으며 193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 산업화가 노인 인구의 도시 집중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하여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조사들은 노인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노인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게 했다. 1930년부터는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에서 노인에 관한 연구들이 전개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연구들이 발전했다. 1938년 키예프에서는 노쇠에 관한 전국적인 강연회가 열렸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는 바스타이Bastaï와 포글리아티Pogliatti의 중요한 종합적 저술이 출판되었고, 독일에서는 노쇠에 관한 최초의 전문 정기 간행물이 출판됐다. 1939년 한 무리의 영국 학자들과 의학자들은 노년에 관한 국제 연구 클럽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서는 카우드리Cowdry의 《노화의 여러 문제Problems of ageing》라는 기념비적인 책이 출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구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연구가 활발해졌다. 1945년 미국 노인학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946년 그 학회가 노년에 관한 두 번째 정기 간행물을 편찬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출판물이 증가했다. 영국에서는 너필드 경이 상당한 예산을 운용할 수 있는 너필드 기구를 창설했다. 그 기구에서는 노인병학뿐만 아니라 영국 노인들의 조건도 연구했다. 프랑스에서는 레옹 비네Léon Binet에 고무되어 노년에 관한 연구들이 새로운 비약을 이루었다. 1950년에는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국제 노인학회가 창설되었다. 그 해에는 리에주, 그 다음 1951년에는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 1954년에는 런던에서 국제 학술 회의가 열렸으며, 이후에도 그 밖의 다른 학술 회의가 개최되었다. 수많은 나라에서 연구회가 발족되었다. 1954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노인학에 관한 참고 문헌 색인에는 1만 9천 권의 참고 문헌이 제시되어 있다. 데스트랑Destrem 박사의 의견에 따르면 이제 이 숫자는 두 배로 늘어나야 할 것이다. 프랑스 노인학회는 1958년에 구성되었다. 같은 해 부를리에르Bourlière 교수가 지도하는 노인학 연구 센터가 창설되었으며, 중요한 저서들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1953년에는 그라일리Grailly와 데스트랑의 책이, 1955년에는 비네와 부를리에르의 책이 나왔다. 《프랑스 노인학》지는 1954년에 창간되었다. 마침내 파리에서는 노년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기 위한 사회 위생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에서는 시카고 대학이 1959년과 1960년에 개론서 세 권을 출판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서구에서 이루어져온 노화에 관한 진정한 결산이라 할 수 있다.
노인학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이 모든 분야에서 노인학은 한결같이 실증주의의 기정 방침에 충실하다. 노인학에서 문제는 노화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나타나는 바를 종합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제 현대 의학은 생물학적인 노화는 한 가지 원인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현대 의학은 노화를 출생이나 성장, 번식, 죽음과 똑같이 삶의 과정에 내재된 것으로 간주한다. 매케이Mc Cay의 쥐에 대한 실험 경험8)에 에스코피에 랑비오트Escoffier-Lambiotte 의사는 흥미로운 주석을 붙였다. “노화와 죽음은 에너지 소비의 일정한 특정 수준, 심장의 일정 박동수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노화나 죽음은 성장과 성숙의 확정된 프로그램이 한계에 도달하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화란 기계의 고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릴케의 말처럼 “마치 과일이 그 씨를 품고 있듯이 우리들 각자가 우리 내면에 품고 있는” 죽음과 같이, 모든 신체 조직은 애초부터 그 완성의 피할 수 없는 경과로서 노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공통된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최근까지 사람들은 세포 그 자체의 생명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단지 그 세포들의 결합만이 여러 해가 흐름에 따라 해체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렐은 이 관점을 지지했으며 그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실험들은 세포도 역시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미국 생물학자 오젤Orgel에 따르면, 보통 나이가 들면 아주 정확하게 세포의 프로테인 생성을 결정하고 계획에 따라 조직하는 시스템 상의 기능 저하가 생겨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화학 차원의 연구는 아직도 거의 진척이 없는 실정이다.
인간의 노쇠를 생리학적으로 특징짓는 것, 데스트랑 박사는 그것을 ‘세포 조직들의 부정적인 변모’라고 부른다. 신진 대사 상으로 활동하는 조직의 수는 줄어드는 반면 부동 상태에 있는 조직 수가 증가한다. 이것은 섬유가 경화된 조직간 세포들이다. 이 조직간 세포들은 탈수 현상과 지방으로 변질 현상을 겪는다. 그리고 세포 재생 능력의 현저한 저하가 일어난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포에 비해 조직간 세포의 증가는 특히 신경 체계 수준에서 놀랄 만큼 두드러진다. 그래서 주요 신체 기관들의 노쇠와 몇몇 기능의 약화를 야기시키고, 이러한 기능 저하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생화학적인 현상들이 생겨난다. 즉 나트륨과 염소, 칼슘은 증가하고 포타슘과 마그네슘, 인, 단백질 합성물들은 감소한다.
사람은 겉모습이 변하여 몇 년 사이에 노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희어지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모근의 탈색 기능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털이 희어지고 또 어떤 부분들——예를 들면 할머니의 턱——에서는 털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아래층 진피 조직 세포의 탈수와 탄력성 상실 때문에 피부에는 주름살이 생긴다. 그리고 치아가 빠진다. 1957년 8월 미국에서 이가 빠진 사람들의 숫자는 2,160만 명으로 총 인구의 13%에 달했다. 치아가 빠지면 얼굴 아랫부분이 짧아진다. 그 결과 탄력 있는 세포 조직의 수축으로 코가 길어져 턱과 가까워진다. 노화에 따른 피부 조직의 증식으로 윗눈꺼풀은 두꺼워진다. 반면 아래쪽에는 눈자위가 처지게 된다. 윗입술은 얇아지며, 귓불은 커진다. 골격 또한 변한다. 척추의 디스크들이 내려앉고 척추가 아래로 휜다. 45세에서 85세 사이의 남자 상체는 10센티미터, 여자의 상체는 15센티미터 줄어든다. 어깨 넓이는 줄어들고 골반 넓이는 늘어난다. 흉곽은 화살 모양을 띠는 경향이 있다. 근육의 쇠약, 관절의 경화는 움직이는 데 불편을 초래한다. 뼈대는 골다공증을 겪는다. 골다공증이란, 촘촘히 꽉 들어찬 뼈의 내용물이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때문에 몸무게를 지탱하는 대퇴골, 경부의 골절 사고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심장은 많이 변하지는 않지만 그 기능이 손상되고 적응 능력이 점차 상실된다. 그렇게 된 사람은 심장을 돌보기 위해 활동을 줄여야 한다. 순환기도 손상된다. 동맥경화가 노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노인들에게서 변함없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무엇이 동맥경화를 생기게 하는지 우리는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호르몬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지나친 혈압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요 원인을 지방질의 신진 대사 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맥경화의 결과는 다양하다. 때로는 뇌에 영향을 미친다. 어쨌든 혈액 순환이 느려진다. 정맥은 탄력성을 잃고 심장이 피를 내보내는 힘도 줄어든다. 혈액 순환 속도는 감소하고 혈압은 높아진다. 성인에게는 매우 위험한 고혈압을 노인들은 아주 잘 견딜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뇌의 산소 소비도 줄어든다. 흉곽은 더 단단해지고 호흡 능력은 25세에 5리터이던 것이 85세에는 3리터로 떨어진다. 근력도 줄어든다. 운동 신경은 자극을 더욱 천천히 전달한다. 그래서 반응이 느려진다. 신장과 소화샘, 간도 쇠약해진다. 감각 기관들도 타격을 받는다. 적응 능력이 감소한다. 노안은 노인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시력이 떨어지고 식별 능력도 쇠퇴한다. 청력 역시 쇠퇴하여 때로는 아주 들리지 않을 정도에 이른다. 촉각, 미각, 후각도 예전보다 예민성이 떨어진다.
내분비선의 쇠퇴는 노쇠의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두드러진 결과 중의 하나이다. 내분비선의 쇠퇴는 생식 기관의 쇠퇴를 수반한다. 이 점에 있어서 최근 몇 가지 정확한 사실들이 입증되었다.9) 나이 많은 남자의 정자는 특별히 비정상적인 점이 없다.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나이 많은 사람의 정자로도 난자를 수태시키는 일은 무한히 가능하다. 정자 생성의 중단에 관한 일반적인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부류에 따른 사례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발기는 젊은 시절보다 두 배 혹은 세 배나 느려진다.10) 그리고 사정하지 않고 오래 참고 발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자제력은 오랜 성생활 경험과 동시에 성적인 반응 강도 저하에 기인하는 것이다. 오르가슴 후의 수축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다. 또한 나이 많은 사람은 젊은이보다 새로운 자극에 훨씬 오랫동안 반응하지 않게 된다.
젊은이들의 사정은 두 단계로 전개된다. 첫 번째는 전립선 요도 안으로 정액이 분출되고, 두 번째로는 그 정액이 요도를 통과하여 요도관으로, 그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젊은 남자는 불가피하게 사정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노인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종종 두 단계가 하나로 단축되어 분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정과 발기의 기능성들은 감소되거나 심지어 소실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적 불능이 항상 리비도의 소멸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의 생식 기능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돌연 중단된다. 다른 모든 차원에서는 노화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 진전되는 데 반해 이것만 유일하게 돌연히 일어난다. 50세경 갑작스레 생식 기능이 중단된다. 이것이 바로 폐경이다. 난소 주기와 월경이 중단되고, 난소 기능이 저하된다. 여자는 더 이상 수태할 수 없게 된다. 성 기능에 관계된 스테로이드11)들이 사라지고 성 기관들이 퇴화한다.
노인들은 잠을 잘 자지 못한다는 편견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1959년 프랑스 구제원들에서 실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인들은 매일 밤 7시간 이상을 잔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수면 장애를 겪는다. 잠들기가 어렵거나, 일찍 잠이 깨거나, 숙면을 이루지 못하고 잠자다가 몇 번이나 잠깐씩 잠이 깬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수면의 원인은 생리적, 생물학적 혹은 심리적인 것이다. 80세 이후에는 거의 모든 노인들이 낮에 반수 상태로 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이러한 모든 기관의 퇴화로 인해 쉽게 피곤해진다. 어떤 노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노인들에게 육체적인 노력은 단지 좁은 범위 안에서만 허락될 뿐이다. 노인은 젊은이들보다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이 더 높다. 그러나 빈약해진 그의 신체 기관은 외부의 모든 공격에 잘 방어하지 못한다. 신체 기관의 퇴화는 외부 공격에 저항하게 해주는 안전 여유를 감소시킨다. 어떤 의사들은 노화를 질병과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최근 루마니아 태생의 유명한 노인학 여의사인 아슬란Aslan 씨는 이탈리아에서 가진 인터뷰12)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노화와 질병을 혼동하여 생각하는 것이 합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질병은 사고이다. 그러나 노화는 생명의 법칙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고 병들어’라는 표현은 이제 거의 같은 말이 반복되는 중복어법이 되었다. 페기는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불구의 축도이다”라고 쓴 바 있다.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썼다. “내 병은 천식, 수종(水腫)이다. 75세에 이런 병은 치유 가능성이 적다.” 어떤 의사가 안경을 쓴 한 노파에게 물었다. “시력에 뭐 문제가 있으십니까, 할머니? 노안이십니까 아니면 근시이십니까?” “난 말이오, 늙었다는 게 병이라우, 의사 양반.”
노화와 질병은 서로 관계가 있다. 질병은 노화를 가속시키고, 노령은 병리학적 장애가 생길 여건, 특히 노령의 특징인 퇴화 과정의 여건을 마련한다. ‘순수한 상태의 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경우를 만나기란 아주 드문 일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만성적인 여러 가지 복합 질병에 걸려 있다.
백여 명의 나이 많은 환자들과 백여 명의 젊은 환자들을 조사해보면, 의사를 보러 가거나 약을 사는 환자들의 비율은 젊은이들 쪽이 훨씬 높다. 한편 노인은 인구의 약 12%밖에 안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병원 입원자의 3분의 1이 노인들이며, 어떤 날은 환자의 절반 이상이 노인이다. 노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입원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1955년 당시 미국에서는 노인들이 인구의 12분의 1밖에 되지 않았는데, 병원 침대 수의 5분의 1을 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55년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조사는 나이가 들수록 의사에게 진찰받으러 가는 횟수가 증가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노인들의 진찰 횟수는 전체 인구의 진찰 횟수보다 50%나 더 많았다. 또한 노인들 중 여자들의 진찰 횟수가 두 배나 많았다.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 또한 여자이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오래 살지만, 남자들보다 종종 더 많이 아프다.13)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만성질환 환자 수는 평균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노인들에게서 네 배나 더 많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네덜란드에서 실시한 조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보고되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고통받는 것, 그것은 ‘원인 불명의 질병들’과 류머티즘이다. 미국의 한 통계 보고가 꼽는 노후의 주요한 질병들은 관절염, 류머티즘, 심장병이다. 또 다른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심장병, 관절염, 류머티즘, 신장병, 고혈압, 동맥경화 등이다. 또 다른 통계 조사에 따르면 정합(整合) 상의 무질서, 류머티즘, 호흡기 질환, 소화기 질환, 그리고 신경 질환 등이다. 비냐 박사는 리옹에서 보낸 의과 대학 시절, 입원한 노인들이 많이 앓고 있는 병을 순서대로 열거해봤는데 다음과 같았다. 심장-혈관 질환, 호흡기 질환, 정신 질환, 생물학적인 소모증, 혈관 질환, 신경 질환, 암,14) 운동 기능 장애, 소화 장애이다. 노년은 더할 나위 없는 정신적인 요인에 의한 신체적인 질병의 영역이다. 그래서 신체 기관의 질병들 또한 심리적인 요인들에 밀접하게 영향을 받는다.
사실 많은 경우, 정신적인 원인과 신체적인 원인을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사고는 비교적 노인들에게서 자주 일어난다. 이러한 사고는 지적인 능력—— 주의력, 지각력——과 감정적인 상태——무관심, 포기, 악의——의 이용을 요하는 몇몇 행동들의 결과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사고는 대부분 방향 감각 장애, 현기증, 근육의 긴장, 골격의 취약성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수치를 알리는 것이 좋으리라. 《국민 건강 조사》지가 조사한 그룹을 보면 남자의 33%, 여자의 23%가 그 해에 사고를 당해, 하루 또는 그 이상 동안 불구 상태가 되거나 그보다 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44세에서 55세 사이의 10만 명을 조사했을 때 그들은 1년에 평균 52건의 사고를 당한다. 75세 이상에서는 평균 수치가 338건으로 높아진다. 그중 특히 집 안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고가 때로는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노인들은 또한 교통 사고의 희생자들이다. 노인들은 이동에 어려움이 많고, 또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은 외출을 포기하고 산다.
노인 건강에 대해 낙관적인 정보를 주는 조사들도 몇몇 있다. 그러나 조사를 한 사람들이 단어에 부여한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1948년 미국에서 셸던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60세 이상의 노인 471명 중 단지 29.3%만의 건강이 정상 이하였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80세가 많았다. 그들 중 2.5%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8.5%는 집안에만 있었으며, 22%는 바로 옆집 이외에는 거동을 하지 않았다. 46%는 완전히 정상이었으며, 24.5%는 놀랄 만큼 활기에 차 있었다. 좋다. 그렇다면 셸던은 정상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40세의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일까? 틀림없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1955년 셰필드의 조사는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61세 이상의 노인 47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여자의 54.9%, 남자의 71.2%는 아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54년과 1957년 네덜란드에서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활동은 사실 어느 정도의 건강을 전제한다. 그러나 심리적·사회적인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에 활동이 신체적인 쇠약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모든 관찰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같은 나이의 사람들에서 보이는 막대한 차이이다. 연대기적인 나이와 생물학적인 나이는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신체적인 외양은 생리적인 검사보다 살아온 햇수를 더 잘 알려준다. 나이가 모든 사람의 어깨 위에서 똑같은 중압감으로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노인병 학자 하월Howell은 노쇠는 “사양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속도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연속적이고 불규칙적인 보행으로 사양길을 내려가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굴러 떨어진다”라고 말했다.15) 프로지리아라는 병이 있는데 그 병에 걸리면 모든 신체 기관들이 아주 일찍 늙어버린다.16) 1968년 1월 12일, 캐나다 체이섬 병원에서 열 살짜리 여자 아이가 죽었는데 그 아이의 겉모습은 90세 노파였다고 한다. 그 아이의 남자 형제 중 하나도 같은 병으로 11세에 죽었다. 데나르 툴레 박사는 신체 기관들의 노쇠로 45세에 죽은 부인의 예를 들었다. 이런 아주 희귀한 경우를 제외하고 만년의 노쇠는 건강, 유전, 환경, 감정, 과거의 습관, 생활 수준 등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빨라지거나 지연된다. 또한 어떤 기능들이 먼저 쇠퇴하느냐에 따라 만년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취하게 된다. 어떤 경우 노쇠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다른 경우, 꼭 자기 나이로 보이거나, 심지어 나이보다 젊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늙어버리기도 한다. 병이나 스트레스, 사별의 슬픔이나 심각한 실패가 있을 때, 사람이 갑자기 늙는 것은 신체 기관들이 갑자기 손상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체 기관들의 불충분한 기능을 가리고 있던 구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사람의 몸은 이미 노쇠해 있었으나 자동적인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인 행동으로 노쇠를 적절히 보충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방어 작용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되자 잠재적인 노화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와해는 신체 기관들에 영향을 미치며, 그래서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다. 누가 내게 63세 된 여자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여자는 건강을 아주 잘 유지했고, 치료받고 있는 심한 통증들을 용케 잘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인턴이 경솔하게 그녀에게 결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버린 후 그녀는 단번에 20년이나 늙어버렸고, 통증도 더 심해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소송에 진다거나 하는 강한 불만도 60세 남자를 정신적·신체적인 노인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종류의 충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경우, 건강이 계속 좋은 경우, 사람은 아주 고령에도 상실된 능력들을 잘 보충하기도 한다. 시험을 거친 기술과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 덕택에, 어떤 운동선수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체형을 유지한다. 국제적인 축구 선수인 테드 메러디스는 52세인데도 여전히 선수로 선발되었다. 외젠 르노르망은 63세에 수영 시범을 보여주었다. 보로트라는 56세에 테니스 챔피언이었다.
예전에는 종종 정신적인 변화와 신체적인 변화 사이에 명백한 대조가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이러한 정신과 신체의 불일치를 통탄했다. “불행한 인간 조건이여! 정신이 겨우 성숙한 지점에 다다르면, 육체는 쇠약해지기 시작하는구나!” 들라크루아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이가 가져다주는 정신의 힘과 또한 나이의 결과인 육체의 쇠약 사이의 이 기이한 불협화음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내게 자연의 법령들 중 하나의 모순으로 여겨진다.”
또한 의학의 진보는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이제 인간의 육체는 수많은 신체 기능의 불완전과 질병에서 보호를 받아, 더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이 균형과 생기를 보존하는 한, 보통 노인은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신체적 건강은 정신이 낙오될 때 망가진다. 반대로 생리적인 삶이 심각하게 저하되면 지적 능력의 장애가 온다. 어쨌든 지적 능력은 신체적인 변모들로 인해 손상된다. 받아들이는 수신기들의 질이 저하되므로 전언들은 신속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또 변형되어 전달된다. 뇌 기능의 유연성도 적다. 이미 보았듯이 뇌의 산소 소비가 줄어드는데, 혈액의 산소 함유량은 단기 기억력과 장기 기억력의 감퇴, 사고 작용의 속도 완화, 정신 작용상의 불규칙성, 행복감이나 의기소침 같은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가져온다. 우리는 노쇠를, 골드스타인이 외상을 입은 후에 일어나는 뇌 사고들에 관해 말하면서 언급한 ‘확산 절단’의 한 예로 간주할 수 있다. 그 경우에도 역시 뇌세포 손상이 있다. 뇌세포는 숫자가 많기 때문에 환자가 극단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그 상황을 쉽게 극복해나간다. 그러나 환자의 인생에 불균형이 생기거나 하면 큰 불행이 닥칠 위험이 있다. 어쨌든 어떤 경우에나 지적 노력은 환자를 지치게 한다. 일의 능력과 주의력이 떨어진다. 적어도 70세부터는 그렇다.
노인학자들은 노년 심리에 대한 연구에서 그들이 노년 생리학을 연구할 때와 똑같은 방법들을 택한다. 그들은 대상을 외적으로만 다룬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정신 현상 측정을 토대로 하고 있다. 정신 현상 측정이란 내게는 가장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은 분야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검사를 받는 사람은 인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며 또 거기서 얻는 결과는 순수하게 추상적인 것으로, 생생한 실제 현실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사실, 한 인간의 지적 반응들은 그가 처한 상황의 총체에 따라 달라진다. 가족 내의 불화로 인해 그때까지 조숙했던 아이가 겉으로 보기에 멍청한 아이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앞으로 노인 심리학을 연구할 때, 나는 그것을 생물학적·존재론적·사회적 문맥에 연결시켜, 내가 말한 순환의 원칙에 따라 총체적인 조망 속에서 연구할 것이다. 지금은 노인학자들이 해놓은 연구들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정확한 개념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므로 노인학자들이 채택한 연구 방법들은 어떤 것이며, 또한 어떤 성과를 올렸는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17년 미국 군대에서는 장교 지망생들의 지적 수준을 밝히려 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 최초로 지능 검사를 창안해냈다. 그 후 이런 종류의 연구들이 점점 증가했다. 1927년에 윌러비는 미국 군대에서 사용된 몇몇 지능 검사들을 다시 택하여, 스탠퍼드 대학 근처에 사는 일단의 가족들에게 실시했다. 1925〜26년에 존스와 콘래드는 뉴잉글랜드에서 1,191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한데 모았다. 미국, 독일, 영국에서 연구가 이어졌다. 1955년 프랑스에서는 쉬잔 파코가 20세에서 55세까지의 철도 직원들과 12년 6개월부터 15년 6개월 된 견습생 4천 명의 반응을 연구했다. 최근 부를리에르 교수는 생트페린에서 지적 제능력을 검사하기 위한 지능 검사 시리즈를 수정, 정리했다. 이 검사는 예를 들어 일련의 그림들을 보여주고 실수를 지적해내라고 요구한다. 또 미로를 하나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빠른 길을 금으로 그어보라고 요구한다. 미완성의 그림을 보충하여 완성하게 한다. 유사한 것들끼리 모으고, 상이한 것들을 분리시키게 한다. 비슷한 말들에 밑줄을 긋고, 그 말들이 주는 뉘앙스의 차이를 지적하게 한다. 문자와 숫자들의 결합을 마음대로 조종하게 한다.17) 기하학적인 형태들을 기억하여 다시 그리게 한다. 신호를 하나 주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검사한다. 행동과 인격에 관계되는 진술들에 ‘맞다’ ‘틀리다’로 대답하게 한다. 거울을 보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 이러한 검사 결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기 기억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기억력——잘 알려진 사실들에 관한 것——은 30세에서 50세 사이에 낮아진다. 논리적인 기억력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많이 손상되는 것은 새로운 연상 작용들의 형성을 포함하는 기억력, 예를 들어 새로운 언어의 습득이다. 게다가 검사 대상자의 문화 정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난다. 그로닝겐에서 실시된 3천 명을 대상으로 한 기억력 테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증명했다. 모든 사람의 기억력은 고령이 되면 감퇴한다. 그러나 손일을 했던 사람들보다 지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이 덜 감퇴하며, 전직 막일꾼들보다는 기능공들이 덜 감퇴하고, 퇴직한 사람들보다는 아직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덜 감퇴한다.
운동신경 반응은 25세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다. 운동신경의 반응 속도와 정확도는 35세부터 줄어들기 시작하고 45세 이후에는 더 많이 떨어진다. 정신 작용의 신속성은 15세까지는 증가하고 15세에서 35세까지는 안정을 유지하고 이후에는 줄어든다. 60세 이상의 사람은 시간이 제한된 지능 검사에 좋은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반대로 시간을 제한하지 않는 경우, 장년층과 같거나 장년층을 능가하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들은 잘 아는 사물들은 쉽게 재조직하지만 변화에는 저항한다. 한 ‘세트’라고 부르는 것——다시 말해서 태도와 정신적인 방향 설정——을 얻는 일은 그들에게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노인은 예전에 얻은 습관들의 노예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유연성이 부족하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단 세트를 채택하고 나면 그것을 버리기가 매우 힘들다. 더 이상 그 세트가 적합하지 않은 문제들에 부딪쳐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계속 매달린다. 그러므로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을 가능성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관찰 능력, 추상 능력, 종합 능력, 통합 능력, 구조화 능력과 같이 적응을 전제로 하는 모든 능력은 35세부터 약해진다. 그러한 능력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경우에는 특히 저하된다. 논리적인 추리력과 마찬가지로 암산, 공간 조직에도 결함이 생긴다. 어휘력에 대해서는 여러 검사의 결과들이 날조되어 있다.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경우 60세 이후에는 어휘가 빈곤해진다. 그러나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어휘력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때로는 더욱 풍부해지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 것으로 잘 받아들인 지식이나, 어휘력, 단어와 숫자들에 대한 단기 기억력이나 장기 기억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는다. 요컨대 개인에게는 유동적이고 적응성이 강한 잠재 능력과 이미 습득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결정화(結晶化)된 부분이 있는데 전자는 노후하며, 후자는 노후하지 않는다.
모든 검사와 통계를 통틀어 볼 때 거기서 우리는 두드러진 중요한 결과를 하나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상자의 지적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람의 능력 감소가 더욱 약하고 완만해진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기억력과 지능을 계속해서 단련하고 사용한다면, 그 능력들을 다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은 한 개인의 지능과 기억력을 그 사람이 삶에 대해 기울이는 주의 깊은 관심이나 이 세상에 대한 흥미, 그 사람의 모든 계획들과 연관시켜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아주 고령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높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자. 사실 많은 지적인 작업들은 시간의 제한 없이 성취된다. 숙련이나 기술, 판단력, 조직력 등으로 기억력의 결핍이나 피로, 적응 곤란 등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노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활동적이며 명석함을 그대로 보존한다.
그렇지만 노인의 심리는 신체 조직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불안정하고 무너지기 쉽다. 정신 질환 발병의 경우 젊은이들보다 노인에게서 더욱 빈번하다.18) 미국의 국립 정신 건강 연구소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똑같은 연령 집단 1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15세 이하에는 정신 질환자 수가 2.3명, 25〜34세에는 76.3명, 35〜54세에는 93명, 노인들에게서는 236.1명이다. 스웨덴에서는 거주자 7백만 명 가운데, 문자 그대로 엄밀한 의미의 노인성 정신 착란인 경우가 9천 건이나 된다. 미국은 1904년에서 1950년 사이에 총 정신 질환자 수가 네 배로 늘었는데, 그중 정신 병원에 입원한 노인들의 숫자는 일곱 배나 많아졌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노인들의 경우 정신 병원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 망설임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웨덴에서는 25년 전부터 줄곧 변화가 없다.
오늘날, 노인들은 예전보다 덜 불리한 상태에 놓여 있다. 병석에 누운 노인들 수도 더 적다. 심지어 여러 연령층을 비교해보면, 최고령층에서 그다지 노화되지 않은 외모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렇게 장수할 수 있도록 애초부터 예외적인 잠재적 건강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대개의 경우 모든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힘이 약해진다. ‘아름다운 노년’이나 ‘정정한 노년’이라고 우리가 말해도, 그건 나이 든 사람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균형을 이루었다는 뜻이지, 그의 신체 조직이나 기억력, 운동 작용과 정신 작용의 적응 능력들이 젊은이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인간은 노쇠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노쇠란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노화는 어김없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병리학적인 요소가 개입되지 않고 노화 그 자체가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는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아주 극도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알았는데 아무런 정확한 이유 없이 생명이 꺼져버렸다고 주장한다. 들로르 교수는 100살 된 노파가 걸어서 병원에 와서는 매우 피곤을 느끼니, 거기서 죽을 수 있게 침대를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할머니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부검을 해보니 신체 조직상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고 한다. 사고사와 대조적으로 ‘자연사’라고 부르는 죽음은 사실 신체 조직의 파손에 의해 일어난다.
인간의 수명은 다른 포유동물보다 길다. 믿을 만한 여러 자료들에서 나는 105세를 넘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 그는 그로사 마을에 사는 앙투안 장 지오바니라는 사람으로 108세였다.19)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장수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다른 요인들이 개입되는데 그중 첫째가 성(性)이다. 모든 동물의 종을 통틀어 암컷은 수컷보다 오래 산다. 프랑스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평균 7년을 더 산다. 그 다음으로 장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성장 조건, 영양 섭취, 환경, 경제적 조건들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노쇠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노인학자들이 수많은 조사 과정 중에 그 사실을 입증했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 있는 셰필드의 조사에서 건강은 생활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부를리에르 교수팀이 브르타뉴 지방 농부들과 어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조사에서도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도시보다 시골에 건강한 노인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인즉, 검사를 받은 브르타뉴 지방의 농부와 어부들은 모두 똑같은 나이의 부유한 파리 노인들보다 건강이 훨씬 더 좋지 않았다.20)
이러한 경제적 요인들의 역할은 생물학적으로 개인의 노쇠를 정의하려고 하는 노인학의 한계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노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들은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노인학에 의거하지 않고 노화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인학의 성과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노인학의 성과들은 단지 추상적인 한 계기를 나타낼 뿐이다. 인간의 노쇠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 관계에 있다. 경제적인 요인 자체를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정치적·사상적 상부 구조들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절대적인 의미의 생활 수준 또한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가 가난한 사회 안에 있을 때는 부자로 간주될 것이며, 부유한 사회 안에서는 가난뱅이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화의 현실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에게 지정되는 자리는 어떤 것이며, 사람들이 어떤 노인상(像)을 품고 있는가를 여러 다른 시대와 장소를 통해 조사해보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있지만 이런 시간적·공간적인 비교를 통해 우리는 노인의 조건 가운데 불가피한 것은 어떤 것인가, 사회는 노인 조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게 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대답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연구, 조사는 역사가 없는 사회, 혹은 ‘원시적’인 사회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민족학적 자료들
세련되지 못한 것일지라도 일종의 문화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 집단이란 없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여 하는 활동이 노동이다. 이러한 노동에는 사회 조직의 기원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노쇠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상상은 시도해볼 필요도 없다. 노년이라는 주제에서조차 자연이란 말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동물의 노년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한번 관찰해보자. 수많은 종 가운데——진화한 종일수록 더욱더——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동물들이 큰 위세를 누리는 것들이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이 체험에서 얻은 지식을 다른 동물들에게 전수한다. 무리 속에서 각각의 동물이 차지하는 등급은 연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점에 대해 동물학자들은 흥미로운 여러 가지 관찰 사항들을 보고했다. 갈가마귀 무리 속에서 새끼 새가 공포심을 드러낼 때 다른 새들은 그것에 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늙은 수컷이 경보를 알리면 일제히 날아가버린다. 다른 새들에게 적의 출현을 알리는 것은 경험 많은 늙은 갈가마귀들인 것이다. 동물학자 여키스Yerkes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새끼 침팬지가 복잡한 도구를 조작하여 바나나를 따먹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침팬지들 가운데 아무도 이 침팬지를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이 많은, 즉 계급이 높은 침팬지에게 같은 연습을 시켰다. 그러자 다른 침팬지들은 모두 그 침팬지를 주시하다가 그의 동작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들은 원칙에 따라 계급이 높은 침팬지만을 모방하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동물, 즉 유인원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무리 속에서든 나이 많은 수놈은 암놈들과 새끼들에게 지배자 노릇을 한다. 때로는 수놈 그룹 전체가 힘을 장악하고 암놈을 서로 나눠 갖기도 한다. 단 한 마리의 우두머리가 있어, 그가 암놈을 분배하는 경우도 있다. 위 두 가지 경우에 우두머리에 대한 공격은 발생하지 않으며, 우두머리들은 자연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나이 많은 수놈이 혼자서 암놈들을 독점해버리면 다른 수놈들이 혹독한 징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몰래 암놈들과 교미하는 일도 일어난다. 아직도 건장한 50세의 우두머리는 맹수들이 암놈과 새끼들을 공격할 때 그들을 방어한다. 젊은 수놈들은 나이가 들고 힘을 얻게 되면서 우두머리에게 반항한다. 젊은 놈들은 우두머리를 노리고, 늙은 우두머리는 점점 쇠약해간다. 가장 무서운 무기인 이빨이 부서지고 썩는다. 우두머리가 맹수와의 한판 싸움 후 지쳐 있거나 죽음에 임박해 있거나 하여 때가 오면 나머지들 중 연장자가 우두머리에게 달려든다. 흔히 그놈이 우두머리를 죽이거나 아니면 죽을 만큼 부상을 입힌다. 설령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고 하더라도 늙은 우두머리는 자신의 패배를 알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는 무리를 떠나 외로이 살고, 공격자가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다. 홀로 된 옛 우두머리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고 점점 기력이 없어진다. 흔히 야생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 일쑤이다. 혹은 죽을 병에 걸리거나 불구가 되어 먹을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어져 굶어 죽기도 한다. 훨씬 어린 수놈들에게 쫓겨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건장하다. 그는 여전히 활동적이고 또 그 집단은 풍족한 사회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집단에게 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리는 자연의 풍요로움 속에서 진화하여 수월하게 이동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식량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늙은 수놈이 냉대받는 이유는 ——그의 후계자 또한 그런 취급을 받게 되겠지만 ——그가 암놈들을 독차지했고 젊은 놈들에게 폭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은 암원숭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무리가 이들을 책임진다.
다른 많은 종류의 동물들에서와 같이 인간 사회에서도 경험이나 축적된 지식이 노인에게 성공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볼 것이다. 또한 노인이 다소 노골적으로 사회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이의 비극은 성적인 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 발생한다. 노인은 유인원들과 같이 더 이상 싸울 능력이 없는 개체가 아니라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자, 쓸모 없는 입만 남은 자이다. 노인의 조건은 결코 생물학적 여건들에만 달려 있지 않다. 거기에는 문화적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암놈을 독점하는 유인원에게 노쇠란 자신의 목숨을 다른 유인원들의 처분에 맡기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게 되는 절대적인 불행이다. 노쇠는 가혹한 죽음이나 외로운 쇠퇴를 가져온다. 반면 인간의 경우는 자연적인 재앙인 노쇠가 공동체 속에서 문명에 통합되는데, 설사 문명이란 것이 미미한 정도라 할지라도 언제나 ‘반육체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그 속에서 노쇠의 의미는 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육체적인 기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여자들을 독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위엄이 그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어떻든 간에 생물학적 여건들은 남아 있다. 각 개인에게 노쇠는 그가 두려워하는 파멸을 부른다. 노쇠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채택한 남성적 혹은 여성적인 이상과 상치된다. 신체적인 부자유 때문에 노쇠는 추함과 병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노쇠를 거부하는 것은 본능적인 태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노쇠는 직접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기초적 반응은 도덕성으로 억제하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기고 우리는 수많은 모순의 실례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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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든지 사람들은 삶을 지향하며 오래 살려고 한다. 그 사회는 젊음과 연관되는 원기와 생식력을 찬양한다. 또한 노년이 주는 쇠약과 생식 능력의 고갈을 두려워한다. 프레이저Frazer의 연구 보고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많은 집단들의 경우 우두머리는 신의 화신으로 숭앙받는다. 그래서 우두머리는 사망 후에도 계승자의 몸 속에 살아 남게 된다. 그러나 나이로 인해 신성이 약화되면 더 이상 그 집단을 효율적으로 보호할 수 없게 된다. 쇠락이 시작되기 전에 우두머리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레이저는 고대 네미의 신관의 살인과 또한 20세기 초 백나일 강의 실루크인들에게서 볼 수 있던 살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병과 쇠약, 생식 불능의 징후가 처음으로 나타나자마자 우두머리는 살해당했다.1) 마찬가지로 건강이 손상된 듯 여겨지자마자 사람들은 콩고의 대주교 시튀메를 죽였다. 만약 우두머리의 기력이 쇠퇴하여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면 신은 그와 더불어 소멸될 것이고 세상은 곧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이 캘리컷의 왕을 죽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수령이 원기가 왕성할 때 죽임을 당하면 그의 후계자에게 수령의 힘찬 영혼이 전수될 수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피지 섬이나 또 다른 여러 지역의 유사 종교에서는 노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젊을수록 사후에 오래 살아남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쇠퇴를 기다리지 않는다.
딩카족 2)이 행하고 있다고 다른 연구가들이 보고한 바 있는 ‘생매장’ 풍습은 이런 풍습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집단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여 자기 생존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부 노인들——비를 내리는 자들, 투창 낚시의 대가들 —— 에게서 노쇠의 징후가 보이면 곧장 그들은 의식과 함께 산 채로 매장되었는데 노인들도 자발적으로 그 의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만약 그들이 마지막 숨결을 그들 몸 속에 간직하는 대신 자연적으로 배출해 숨을 거두고 나면 그 집단의 삶은 그들과 더불어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집단에게 장례 의식은 오히려 일종의 부활과 생명의 근원으로 회춘을 의미했다.
시간의 흐름은 파멸과 쇠퇴를 가져온다. 부활의 신화와 제식들 속에서 나타나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부활의 신화와 의식은 고대인, 원시인,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앞선 농경 사회들 등 반복되는 모든 사회 속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의 특징은 기술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시간의 경과는 미래의 예고로 생각되지 않고 젊음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젊음을 되찾는 것이다. 많은 신화들은 인류에게 영속적인 힘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순간 젊음을 다시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즉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이렇게 상상했다. 인류는 홍수에 삼켜져버리고, 물 위로 다시 떠오른 대지 위에 또다시 인간이 살게 되었다. 이러한 신화는 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노아는 아담의 재생이며 방주의 동물들은 에덴 동산에 살던 동물들의 재생이다. 그리고 무지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나타낸다. 오늘날 태평양 주변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제식 상의 어떤 잘못 때문에 대지가 홍수로 물에 잠겼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홍수라는 재난을 모면한 어떤 전설적인 존재를 그들 씨족의 기원으로 생각한다. 나일 강의 범람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비옥하게 된 대지는 이집트인들에게 영원 회생의 사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므로 식물의 신인 오시리스는 해마다 수확과 함께 죽고, 씨앗의 싹이 틀 때 무한히 소생하는 모든 젊음의 싱싱한 기운 속에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3)
많은 제식들의 목적은 특정 주기 동안 흘러간 시간을 지우는 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흘러간 수년간의 무게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새해 맞이 의식 중에 창조의 시를 읊었다. 히타이트인들은 테슈브 신에 대항하여 싸운 뱀의 이야기와 테슈브 신이 승리를 거두어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통치하게 된 이야기를 되새기곤 했다. 많은 곳에서 묵은 한 해의 끝을 축제로 장식하는데, 사람들은 그 축제 속에서 묵은 해를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묵은 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불태우고,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지핀다. 태초의 혼돈을 되살리는 통음 난무를 벌인다. 사회 계급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사투르누스제 역시 정해진 질서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축제 속에 낡은 사회와 세상을 용해시키고, 그 후 원초의 신선한 상태로 사회와 세상을 재창조한다. 이런 축제들은 한 해의 중간에 또는 연초에 열린다. 봄축제는 봄이라는 계절에 우주적 회생의 의미를 준다. 군주의 출현은 새 기원의 개시로 간주되었다. 중국의 황제는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역법(曆法)을 정했다. 구 질서는 붕괴되고 새로운 다른 것이 태어나는 것이다. 일본에서 신도 숭배 풍습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이 재생의 개념이다. 신도 사원들은 주기적으로 전부 재건되어야 하며 가구와 장식도 전부 다시 새것으로 교체된다. 특히 종교의 중심이기도 한 이세 신궁은 20년마다 재건되었다. 지토 여왕이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이 절은 59번이나 재건되었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큰 다리와 14개의 작은 절도 마찬가지다. 신도 사원들은 개인을 세계에 이어주는 혈족 관계를 능동적으로 나타낸다. 건물을 재건하는 것은 시간이 그 유대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프레이저가 말한, 집단이 노인의 가슴을 사냥하는 시늉을 행하는 의식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도 사순절의 네 번째 일요일에 ‘노파를 톱으로 켜는’ 의식을 행했다. 그들은 톱으로 진짜 노파를 두 동강 내는 시늉을 했다. 이 거짓 사형 집행이 마지막으로 치러진 것은 1747년 파도바에서였다. 다른 경우에는 노인을 상징하는 마네킹들을 실제로 화형시켰다.
신화적 차원에서, 되풀이되는 사회들은 자연과 설립물의 훼손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방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범이 되는 과거를 숭배하며 그 과거를 관례적으로 끊임없이 소생시킴으로써 있는 그대로 보존함을 말한다.
공동체와 살아 있는 개인들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공동체는 그들과 실제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노쇠란 혐오스러운 것이므로 사람들은 노인을 추방한다. 그러나 노인이 집단의 노쇠를 나타내지 않는 한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덮어놓고 그를 제거할 이유가 없다. 그의 지위는 경험적으로 상황에 따라 확립될 것이다. 나이로 인해 비생산적이 된 노인은 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회에서는 성인이 노인의 운명을 결정하면서 그 자신의 미래를 선택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성인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기의 이익을 고려한다. 또한 아주 강한 애정의 유대가 성인으로 하여금 늙은 양친에게 집착하게 할 수도 있다. 또 한편 나이 든 남자가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 자격들을 획득하여 자기 자신을 매우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동물 사회보다 더 복잡한 원시 인류 공동 사회는 구전으로 가능한 전통보다 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만일 기억 덕택으로 노인이 지식의 보유자, 지식과 과거의 보호자가 된다면 노인은 조상으로서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는 이미 사자(死者)들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승과 저승 간의 중개자 역을 맡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무서운 힘이 주어지기도 한다. 이런 요인들은 그의 지위를 결정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된다. 게다가 원시인들 사이에서는 65세에 이르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65세 이상은 인구의 3%를 채 넘지 못한다. 원시인들은 일반적으로 50세를 노년으로, 아주 고령으로 생각했다. 본 장에서 내가 노인, 노령, 조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집단이 늙었다고 간주하고 또 대부분의 경우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노인들의 인간 조건을 연구하기 위해 나는 민족학 연구서를 근거로 삼을 것이다. 나는 사회 인류학 연구소가 친절하게 내게 전달해준 ‘인간 관계 영역 문서’들을 주로 사용했다. 수집된 정보들은 때로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충분하지 않거나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신중하게 연구해야 한다. 집단을 묘사하면서 그 집단의 가치를 채택하여 묘사하는 연구가들은 드물다. 연구가들은 자신들의 문화라는 안경을 통해서 연구 대상 집단을 포착하고 판단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집단의 규범이나 관습들로부터 고의적으로 멀어질 것이라는 가능성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다. 또한 노년에 관해서 관찰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조직적으로 보고한 연구가들도 흔하지 않다. 또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가들도 없다. 연구가들은 흔히 이해할 수 없거나 모순되는 사실들을 전달하고 있다. 나는 사회 집단의 전체 구조에 따른 노인들의 조건에 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하나로 묶어보려고 한다. 모델은 자의적일 위험성이 있지만 통계 또한 그런 위험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통계는 아무것도 밝혀주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비교와 대조를 통해 의미심장한 관계들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원시인들은 그들의 삶의 조건상 사냥 채집가들이거나 사육자들, 농부들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주는 유목민들이고 세 번째 범주는 정착민들이다. 반유목민들도 있는데, 여러 군데 다른 몰이 장소를 갖고 있는 사육민들이나 숲의 부분을 연속적으로 개간하는 농부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는 그들을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일의 형태와 환경에 따라 분류하려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의 채집자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채집자들과 아프리카 농부들 사이에서보다 훨씬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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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 집단이 만들어낸 신화들과 실제 그들의 풍습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원시 사회 속에서의 노인들의 역할에 관한 한 이러한 차이는 놀랄 만하다. 가장으로서 상속권이 없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지위를 전설적으로 끌어올린다. 에스키모인들의 경우, 많은 전설들 속에서 노인들은 기적적으로 인명을 구한다. 그리고 노인을 몰아낼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벌이 내려진다.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가진 자, 발명가,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시인들은 흔히 신들을 원기와 지혜가 가득 찬 키 큰 노인으로 표현한다. 에스키모인들에게 네르비크Nerwik 여신은 바다 속에서 사자(死者)들의 영혼들과 함께 살고 있는 아주 늙은 노파이다. 이따금 그녀는 샤먼이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러 올 때까지는 바다표범 사냥꾼들을 지켜주지 않으려 한다. 다른 곳에서 노파는 바람을 조절한다. 호피족에게 수공업을 창안해준 것은 거미 노파이다. 이런 예들은 풍부하다. 그러나 이러한 우화들이 실제 생활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극단적인 빈곤은 인간 생활을 예측 불가능으로 인도한다. 현재의 필요성이 가장 지배적이어서 사람들은 현재에 미래를 희생시킨다. 기후가 거칠면 사정도 곤란해지고, 자원도 부족하여 인간들의 노후도 흔히 동물의 노후와 비슷해진다. 시베리아 북동부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야쿠트인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가축을 키우고, 얼어붙은 겨울과 찌는 듯한 여름을 감내했으며, 대부분은 일생 동안 허기를 참으며 살아야 했다. 이런 풍요롭지 않은 문화 속에서는 지식이나 경험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종교도 겨우 미미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거기서는 마법이 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샤머니즘이 발달했다.4) 샤먼적인 계시와 입문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었을 때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미 얻은 힘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노인들 가운데서도 늙은 샤먼들만 존경을 받았다. 가정은 족장제였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소유하여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으며 아이들을 팔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흔히 딸들을 쫓아냈다. 아들이 아버지를 무시하거나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을 경우 아버지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했으며, 원기 왕성한 아버지는 폭정을 했다. 아버지가 노쇠해지면 아들들은 곧 자기 재산을 챙겼고 그가 죽게 방치했다.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그들은 늙은 양친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늙은 어머니를 학대하는 한 야쿠트인을 비난했더니 그는 “울 테면 울라지! 배도 곯아야 해! 어머니는 나를 여러 번 울렸고 내가 많이 먹는다고 불평했었지. 아무 일도 아닌데 나를 때리곤 했어”라고 대답했다. 야쿠트인들 속에서 20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트로스찬스키에 따르면 노인들은 집에서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되거나, 아들들의 노예가 되어 두들겨 맞고 힘든 일을 했다. 또 다른 연구가인 시에로셰브스키는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을 한다. “살림이 넉넉한 가정에서조차 산 해골들이 있었다. 주름투성이에 옷을 반쯤 걸쳤거나, 혹은 맨몸이 완전히 드러난 채 구석에 숨어 있다가 손님들이 없을 때만 나와 불가로 다가가서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아이들과 다투는 것이었다.” 먼 친척들에 관해서는 더욱 심하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 같이 취급받는다. 냉기 도는 구석에서 천천히 굶어 죽게 내버려진다.”이 끔찍한 운명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들은 종종 아들에게 자기 가슴을 찔러 죽여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식량 부족, 미개한 문화, 족장적 엄격함을 아직도 갖고 있는 부모에 대한 증오, 이 모든 것들이 노인들에 대해 음모를 꾸미게끔 만든다.
일본 문명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일본의 아이누인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사회 역시 미개한 사회였다. 기후는 몹시 추웠고 먹을 것은 ——날생선이 기본이었다 ——부족했다. 땅바닥에서 잤고 도구란 것은 없었으며 곰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았다. 나이 든 사람들의 경험이란 별 쓸모가 없었다. 그들의 신앙은 변변찮은 정령 숭배였다. 사원도, 종교 예식도 없었다.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나오inao로 불리며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버드나무 가지를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노래만 있었을 뿐 축제도 의식도 없었다. 그들의 주된, 그리고 유일한 오락은 술에 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노인들은 전수해줄 전통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소홀히 했고 자식들은 성인이 된 후 어머니에게 최소한의 애착밖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노인이 된 후 자식들은 부모들을 소홀히 했다. 여자들은 평생 동안 따돌림을 받았다. 여자들은 힘든 일을 했으며 기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여자들의 운명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악화되었다. 랑도르Landor5)는 1893년 한 오두막집을 방문했던 일을 이렇게 서술한다. “가까이 다가가자 하얀 머리카락 더미와 갈고리 모양의 길다란 손톱과 발톱이 보였다. 뼈다귀 몇 개가 땅 위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 구석에는 오물 덩어리들이 있었다. 냄새가 지독했다. 머리카락 더미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으로 그 머리카락들을 헤쳐보았다. 신음소리와 함께 뼈만 남은 가느다란 두 팔이 내 쪽으로 뻗치더니 내 손을 움켜잡았다…가죽과 뼈밖에 없는 여자였다. 긴 머리카락과 손톱, 끔찍한 몰골이었다…그 노파는 눈이 멀었고,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였다. 언뜻 보아 두 팔과 다리가 뻣뻣해지는 류머티즘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문둥병 자국도 있었다.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쳐다보기조차 굴욕적이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같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아들은 그 노파를 학대하는 것도, 보살펴주는 것도 아니었다. 노파는 단지 쓰레기 같은 물체였고, 따라서 그들은 그녀를 그렇게 취급할 따름이었다. 이따금씩 그들은 그녀에게 생선 한 마리를 던져주었다.”
가난이 극에 달하면 가난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가난은 감정을 억누르게 한다. 볼리비아 숲에서 살고 있는 시리오노족은 많은 아이들이 안짱다리로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갓난아이들을 죽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식들을 사랑하고 자식들은 그들에게 사랑으로 갚는다. 그러나 반유목민인 그들은 항상 허기에 시달린다. 그들은 거의 발가벗은 채 장식도, 도구도 없는 야생의 상태에서 산다. 그들은 그물 침대에서 자고 활을 만든다. 그들은 카누도 없어 걸어서 이동한다. 그들은 또한 불도 피울 줄 모른다. 그래서 불을 가지고 다닌다. 그들에게는 가축도 없다. 우기 동안 그들은 먼지 나는 오두막 속에서 엎드려 지낸다. 그들은 몇 가지 식물을 재배한다. 특히 야채와 야생 과일들을 먹는다. 건기에는 낚시를 하고 사냥을 한다. 그들에게는 신화도 마법도 없다. 시간을 계산할 줄도, 잴 줄도 모른다. 사회적 기구나 정치적 기구도 없다. 아무도 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먹는 것을 위해 서로 심하게 싸운다. 각자 생활을 위해 투쟁한다. 이런 삶은 어찌나 힘든 것인지 그들은 30세가 되면 기력이 다 쇠진하고 40세에는 노쇠해버린다. 그래서 자식들은 부모를 소홀히 한다. 노인들은 천천히 걸어다닌다. 그래서 이동에 방해가 된다. 홀름베르크Holmberg는 집단 이주 전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입을 열기도 너무나 힘들 정도로 병들어 해먹에 누워 있던 노파가 내 관심을 끌었다. 나는 마을 대표에게 그 노파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그 노파의 남편을 내게 보냈고, 남편은 거기서 죽게 내버려둘 거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그녀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마을 전체가 떠나버렸다…3주일 후…나는 해먹과 병든 여자의 유골을 다시 보았다.”
시리오노족보다는 덜 빈곤한, 가봉의 북부에 살고 있는 약 12만 7천의 팡족 대부분은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다소 백인들에게 동화된 그들은 이제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아 사라진 관습과 아직 발전하지 못한 현대적 윤리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
오랫동안 그들은 전쟁을 통한 경제적 정복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노인들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원정을 지휘하는 것은 청년 이사회였다. 원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동해야 했으므로, 계급 조직이 적절히 배치될 수 없었다. 그 사회의 우두머리들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그들은 자주 이동하여 다시 여러 마을로 떠났다. 현재 그들의 주요 활동은 사냥과 고기잡이이다. 정착 농민도 있는데, 특히 카카오 재배로 일종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 모든 집단들 속에서 가장 존경받는 것은 가장 부유한 자들이다.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로 인해 크게 무너진 상태이나 ——바구니에 보존해놓은 그들 조상의 두개골을 매개로 선조들에게 드리는 예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바구니를 소유한 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소유는 친자 관계이거나 지적·도덕적으로 유능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나이가 너무 많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나이는 이점이기는 하나, 능력보다는 못하다. 가장은 활동하는 성인들 중 장자이다. 늙은 부모는 장자와 함께 살고 아직도 ‘진짜 남자’, ‘진짜 여자’로 남아 있는 힘으로써 일종의 어떤 도덕적 권위를 유지한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그런 권위를 결코 많이 갖지 못한다. 여자들은 단순히 생식과 생산의 도구들이다. 사람들은 노파들을 마녀로 간주하여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여자들의 종말은 일찍부터, 다시 말해서 자식을 낳을 수 없을 때부터 시작된다. 반면에 남자는 손자들이 태어나서 한 지붕 아래 살게 되는, 대략 50세가 절정이다. 그 후 힘이 미약해지면 노인들은 모든 위엄을 상실한다. 팡족의 인생은 아이에서 성년까지는 상승 곡선을 그리고 그 후부터는 가장 낮은 수준까지 하강하여 죽음을 넘어 다시 올라간다. 부와 마술적 지식들이 노년의 쇠퇴를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노인들은 공공 생활에서 밀려난다. 그들은 소외되어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다. 노인들은 경멸을 당한다. 죽은 후에도 그 두개골이 예배 의식에조차 사용되지 않을 정도이다. 만약 그들에게 자식도 없다면 사정은 더 혹독해진다.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 틈에서조차도 그들은 몹시 등한시되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데, 특히 과부들은 더 심하다. 예전에는 이주하면서 사람들이 그들을 숲 속에 버리고 갔다. 한 부락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머물렀던 곳에다 그들을 완전히 빈털터리로 놓아두고 떠나는 것은 지금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들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농담까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는 데 지쳤다”고 말하며 자기를 산 채로 불에 태워주기를 바란다. 때때로 그들을 몰아내는 자들은 그들의 상속자들이다.
통가인들은 유목민이 아니다. 반투족은 남아프리카 동쪽 해안 메마른 땅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흩어져 살고 있다. 땅은 수령의 소유물로서 수령이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분배한다. 각자가 스스로 노동의 대가로 얻는 수확물을 완전히 소유한다. 관례적으로 수많은 일들이 여자들에게 맡겨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옥수수, 과일, 야채 등을 재배하고 소와 염소를 키우고 사냥과 낚시를 한다. 그들은 나무나 도자기에 약간의 조각도 한다. 그들의 민속은 춤과 노래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풍요로운 시기를 지내기도 하지만 홍수나 메뚜기 떼에 의한 기근도 겪는다. 식사는 모두 모여서 하는데 먼저 남편, 그 다음은 아이들, 그리고 여자들 순으로 음식이 분배된다. 원칙적으로는 불구자들, 노인들과도 나누어 먹는데 노인들의 몫은 적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그들은 정이라곤 조금도 없다. 3세에서 14세까지의 아이들이 조부모들과 같이 살고 있으며 조부모들은 아이들이 되는 대로 자라게 내버려둔다.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파서 도둑질을 한다. 소년들의 입문식은 아주 엄격한 시험 과정이다. 그 후 처녀 총각들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오두막집에서 같이 산다. 그들은 부모와 별 유대가 없으며 그들을 소홀하게 키운 부모 세대에게 원한을 품는다. 성인이 된 후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거칠게 대한다. 조부모와 억지로 같이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노인들을 싫어한다. 아이들은 노인들을 놀리고 노인들 몫을 먹어버리기도 한다. 통가인들에게 문화적·사회적 전통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인들의 기억이란 아무 소용이 없다. 종교는 극히 초보적이다. 가족 중에서 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장남이다. 조상들은 이따금 꿈 속에 나타난다. 그들은 ‘점치는 예언의 뼈’를 사용하여 조상들에게 뜻을 물어본다. 할머니들은 몇몇 의식을 지낼 때 노래도 하고, 종종 음란한 동작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할머니들은 어떤 금기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할머니들과 사춘기 이전의 소녀들만이 제물로 죽은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다. 이 여자들은 남성 집단에는 속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성에 대한 저주에서도 벗어나 있다. 이러한 이상한 지위 때문에 할머니들은 초자연적인 어떤 위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을과 무사들의 무기를 정화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할머니들에게 문의를 한다. 그러나 노파는 더 이상 땅을 경작할 수 없을 때——더 이상 힘이 없어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노파는 악착같이 일한다 ——짐으로 변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노쇠를 경멸한다. 흔히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노인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위신을 세우는 충분 조건이 못 된다. 통가인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가장 살찌고, 가장 힘세고, 가장 부자인 자들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여자들과 결혼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이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양식을 풍부하게 가지고 자식들에게 향연도 베풀며 손님도 맞는다. 그는 감탄과 존경을 받고 많은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나 아내가 죽고 또 자신도 주름살이 생기고, 초췌하고, 노쇠하고, 가난해지면 그의 존재는 폐물이나 짐짝 신세가 되어 사람들은 그를 참을 수 없어 하며 억지로 견딘다.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전체적으로 그들도 그것을 불평한다. 마을이 이주할 때 그들은 노인들을 버린다. 전쟁 동안에도 노인들이 많이 죽는다. 이러한 공포의 순간 다른 사람들은 도망가지만 노인들은 숲 속에 숨는다. 그러면 적에게 발각되어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짐승처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6) 그들의 죽음은 의식에 둘러싸인다. 사람들은 그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구하는 척한다. 예를 들어 야쿠트인들만큼 엄격한 조건에서 살던 북시베리아의 코랴크인들이 이러한 경우이다.7) 그들의 유일한 자원은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으로 이동하는 순록 떼들이었다. 겨울은 혹독하다. 오랫동안 걷는 일은 노인들의 기력을 쇠진시킨다. 기력이 소진한 후에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노인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마치 불치병 환자들을 죽이듯 힘없는 노인들을 죽였다. 이것이 어찌나 당연한 일이었는지 코랴크인들은 그들이 이 일을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들은 창이나 단도로 몸을 찌를 때 어느 부분이 치명적인지 가르쳐준다. 이러한 살인은 길고 복잡한 의식이 끝난 후 집단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행해진다.
백인 밀매자들과 관계했던 시베리아의 부족 추크치인들 중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이 힘들었다. 그들은 기형아나 키우기 힘들어 보이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곧바로 죽였다. 몇몇 노인들은 상업에 종사하고 약간의 재산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다른 노인들은 짐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노인들에게 아주 힘든 생활을 시켜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설득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푸는데, 그들도 참여한다. 그들은 모두 바다표범을 잡아먹고 위스키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북을 쳤다. 아들 혹은 제일 막내 아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노인 뒤로 몰래 다가가서 바다표범 뼈로 그들을 교살했다.
호피족, 크리크와 크로 인디언들, 남아프리카의 부시먼들은 마을에서 먼 외딴 곳에 지은 오두막으로 노인을 데리고 가서 약간의 물과 먹을 것을 넣어준 다음 버리고 오는 풍습이 있었다. 식량 자원이 매우 불안정한 에스키모인들은 노인이 눈 속에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리도록 부추긴다. 고기를 잡으러 원정을 나갈 때 그들은 노인들을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빙산 위에 놔두고 가거나 혹은 얼음집 속에 가둬놓고 가서 노인들을 굶어 죽게 한다. 그린란드 아마살리크의 에스키모인들에게는 노인들이 자기가 집안의 짐이 된다고 느끼면 자결하는 관습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은 일종의 공적인 고백을 하고 이삼 일 후 카약을 타고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8) 폴 에밀 빅토르Paul-Émil Victo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카약을 탈 수 없는 한 불구 노인은 자기를 바다에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익사였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그 일을 실행했지만 노인은 입은 옷이 걸려 물에 떴다. 그러자 그를 몹시 사랑했던 한 딸이 매우 다정하게 말했다. “아버지, 머리를 푹 담그세요. 그래야 가실 길이 훨씬 짧아질 거예요.”
많은 집단들에서 맑고 강건한 정신을 유지하는 노인들은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늙고 노망든 노인은 제거된다. 아프리카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호텐토트족이 그러하다. 각 가정이 모두 오두막 한 채와 양 떼를 소유하고 있으며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친밀하다.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은 친척이 아니더라도 친밀감을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사가9)*나 동화들은 노인들에 대한 존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일찍 사그라져 50세가 되면 노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일도 할 수 없게 된 노인들을 부양한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은 집단에게 유리하다. 이 사회는 노인들에게 상의하고 그들의 의견을 참작한다. 그들의 나이는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 생활에서 아주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일시적인 제식들을 주재한다. 과도기적 상황에 있는 ——현재 홀아비이거나 회복기에 있는 ——사람은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또한 위험한 인물, 곧 이노이다. 인생의 모든 나이를 거쳐, 선과 악을 초월한 사람들만이 별 지장 없이 그에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를 집단에 복귀시킬 수 있다. 복귀된 집단 소속인들 역시 이노와 같은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즉 홀아비가 다른 홀아비를 돌볼 것이고 중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이 회복기 환자를 돌보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문식에는 모든 노인들이 자격을 가진다. 바로 이 노인들 덕분에 집단의 단결이 유지된다. 능력을 상실하면 그들은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사람들 역시 그들을 홀대한다. 그래서 적어도 20세기 초까지10) 아들은 능력을 상실한 늙은 아버지를 없앨 권리를 요구했다. 요구는 항상 허락되었다. 아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노인과 작별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사람들은 노인을 소에 태워 외따로 떨어진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다가 약간의 양식과 함께 그를 버리고 오는 것이다. 그는 굶어 죽거나, 맹수에 의해 죽기도 했다. 이 풍습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부자들도 이 풍습을 따랐는데 그들은 노인들에게는—— 특히 여자들에게——마법의 힘이 있다고 간주하여 그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위니펙 호수 근처에 살고 있는 북(北) 오지브와인들은 오늘날 백인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그들의 옛 풍습을 보존하고 있었고, 아직 건강한 노인들의 지위와 쇠퇴한 노인들의 운명 사이에 놀랄 만한 대조가 있었다. 그들은 겨울이 몹시 추운 지방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기후는 건강에 좋고 땅은 비옥하여 쌀, 야채, 과일 등이 풍부하다. 각 가족들은 여름에는 50〜200개의 캠프에 집결하고 겨울에는 사냥을 하기 위해 흩어지는데 소집단으로 나뉘어 털 달린 동물들을 잡아 가죽을 판다. 아이들은 잘 보살펴진다. 3〜4세 때 젖을 떼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어디든 데리고 간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애정을 많이 쏟는다. 그리고 결코 벌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산다. 일반적으로 누구를 학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환자들도 참을성 있게 보살핀다. 이웃 사람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염려는 한편으로는 그가 불러일으키는 경계심 때문이다. 그들은 마술을 두려워한다. 종교는 특히 마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개인적인 이익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조부모들은 보통 자식들과 살면서 그들에게 조언을 해준다. 조부모 중의 한 사람이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그들은 손자들과 ‘농담하는 관계’를 갖는다. 할아버지들은 손자들을, 할머니들은 손녀들을 공평하게 대한다. 그들은 서로 놀리고 또 서로 도와준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들을 존경한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모든 노인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 또한 성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사회의 한 부분을 노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은 노인들에게 경의를 표시한다. 이런 존경은 겉치레이며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몇몇 부족 중에는 약초를 연구하는 ‘탁월한 의학 집단’이 있다. 그들은 어떤 풀은 건강과 장수를 준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 의학 집단에 들어가 입문한다. 이러한 노인들은 마술적인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위험한 인물들로 평가된다. 때때로 이 노인들은 사제들처럼 제식을 집행한다. 밤에 그 다음날 일할 계획을 알리고 충고를 하는 ‘고함치는 사람들’은 이들 중에서 모집된다. 장수에는 좋은 건강이 뒤따르므로 사람들은 장수를 찬미한다. 그들은 장수란 덕과 약초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아 신체가 부자유해지면 가정에 따라 노인에 대한 대우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노인들은 소홀하게 취급되고 또 젊은이들이 노인들 몫으로 예정된 양식을 훔치는 일 또한 자주 일어난다. 노인들이 마법의 힘을 상실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오두막이나 황량한 섬에 그들을 내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혹시 그들의 부모들 중 누군가가 노인들을 구조하려고 하면 그들은 놀리며 만류했다. 노인들은 보통 장엄하게 죽는 것을 더 선호했다. 사람들은 잔치를 베풀었고, 평화의 담뱃대를 피워 물었고 죽음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아들은 큰 도끼로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
민족학자들은 흔히 노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죽음에 쉽게 체념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관습이며 자식들도 달리 행동할 수 없다. 아마 그들 자신도 옛날에는 부모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펼쳐지는 축제를 영광으로 생각하기조차 한다. 이런 낙천주의는 어느 정도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이런 질문에 관한 자료들은 극히 드물다. 나는 그중 두 개를 찾았다. 첫째는 <나라야마>라는 일본 소설인데 후카자와는 실제 사건들에서 영감을 받아 한 노파의 종말을 표현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일본의 벽지에는, 너무 가난하여 살기 위해 노인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인들을 ‘죽음의 산’이라는 산에 데려가 버리곤 했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희생과 신앙심의 모범이며 아들 타페이가 극진히 사랑하는 오링이라는 70세 가량의 한 노파가 길에서 ‘나라야마’11)라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3년이 지나면 3년 더 늙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노인들에게 ‘순례’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사자(死者)들의 축제 전날 ‘산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부모들을 그 산에 갖다놓고 온 마을 사람들을 소집한다. 이것은 일 년 중 단 하나의 큰 축제이다. 그들은 흰 쌀밥과 가장 귀한 음식들을 먹고 정종을 마신다. 오링은 바로 그 해에 이 축제의 축하를 받겠다고 결심한다. 그녀는 모든 준비를 다 끝냈다. 아들도 재혼을 하여 집안을 돌볼 여자도 생겼다. 오링은 기운이 세어 일도 하며 치아도 모두 제 것이다. 이것조차 그녀에겐 걱정이다. 양식이 부족한 마을에서 그녀의 나이에도 무엇이든지 여전히 잘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손자들 중 하나가 그녀에게 이가 33개인 할머니라고 놀리는 노래를 부르자 아이들이 모두 그것을 낮은 소리로 따라 부른다. 그녀가 돌로 자기 이 두 개를 부러뜨리지만 놀림은 그치지 않는다. 큰손자가 결혼을 한다. 이제 집안에는 젊은 여자가 둘씩이나 되니 그녀는 자신을 쓸모 없는 사람으로 느끼며 점점 더 순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결심을 알리자 아들과 며느리는 운다. 축제가 열렸다. 그녀는 저 높은 산에 눈이 내리기를 바란다. 그것은 저승에서 그녀를 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에 그녀는 타페이가 진 지게 위에 올라탄다. 관습에 따라 그들은 남몰래 마을을 떠나며 이제는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들은 산을 기어 올라간다.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바위 밑에 시체와 해골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본다. 까마귀들이 선회하고 있다. 산꼭대기는 뼈다귀들로 덮여 있다. 아들은 어머니를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녀는 바위 밑에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거기에 주먹밥 한 덩이를 놓고 앉는다. 그녀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온 몸짓으로 아들을 쫓는다. 아들은 울면서 떠난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그것을 알리려고 발길을 돌린다. 눈은 산꼭대기에도 내려 그녀는 하얀 눈송이에 뒤덮인 채 기도를 읊조리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외친다. “눈이 오네요, 운이 좋습니다.”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떠나라고 손짓을 하고, 그는 떠난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그의 효심은 사회가 그에게 제시하는 틀 안에서만 발휘된다. 궁핍이 이런 풍습을 강요했기 때문이며, 오링을 산꼭대기로 운반함으로써 그는 충실한 아들로 보여지는 것이다.
전통과 일치되어 신들의 축복을 받는 이런 죽음과는 대조적으로, 소설에는 70세가 넘었지만 산으로 떠날 준비를 못한 늙은 마타얀의 죽음도 소개한다. 아들은 그를 내쫓으려 한다. 나라야마의 축제날 아들은 새끼줄로 그를 잡아 묶는다. 아버지는 이로 그 끈을 끊는다. 그는 아들과 집단과 신들과의 ‘인연’도 그렇게 끊어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나 아들은 그를 잡아온다. 다음날 타페이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묶인 노인이 절벽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들은 마치 다 해진 자루처럼 그를 동굴 속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까마귀가 계곡으로 달려든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죽음이다. 아들은 살인범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들이 요구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고집했으므로 이런 운명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우리는 공포와 반항 때문에 마타얀과 같은 반응을 보여 희생된 노인들이 많은지 알고 싶다. 후카자와가 소설에서 마타얀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를 부여한 것은 그의 태도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 전형적인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외는 어쩌면 오링의 모범적인 임종인지도 모른다.
노인들이 자주 자신들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놀랄 만한 자료가 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오세트인들이 만들어 체르케스인에게 구전한 나르트족의 서사시이다. 몇몇 구절들12)은 자신을 위협하는 사형 집행 앞에서 느끼는 노인들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 나르트족은 오세트인들에게 그들 고유의 풍습을 부여한 신화적인 선조들이었다. 나르트 서사시에 따르면 나르트는 세 가문으로 다시 나뉘어 산꼭대기에서 밑에까지 단계별로 나뉘어 있었다. 맨 위는 전사(戰士)들이며 제일 아래는 ‘부자들’이다. 중간에는 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알라에가테들이 있었는데 가장 고귀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나르트족은 공익에 관한 토의와 종교적 성격을 띤 연회를 위해서 그들 집에 모였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 ‘노인 살인 회의’가 지목한 세 가문의 노인들이 죽음에 처해졌다. 사람들은 그들을 독살하거나 때려죽였다. 플리니우스와 폼포니우스 멜라는 북오세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스키타이인들에게서도 노인 살해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사는 기쁨 때문에 그들이 절벽 꼭대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들을 강제로 바다에 떠밀었다. 나르트 서사시는 자발적인 죽음과 유사한 경우들도 묘사하고 있다. “우리즈마에그는 늙었다. 그는 젊은 나르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젊은이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화살에 묻은 때를 그의 옷에다 닦았다. 그는 죽을 결심을 했다. 그는 자기 말을 목졸라 죽여 그 가죽으로 자루를 하나 만들게 한 후 그 속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노인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죽음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와 법률 위에 세워진 집단의 법을 어쩔 수 없이 따랐던 것이다. 노인들은 존경도 받았고 중요한 역할도 맡았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들면 나르트들은 “그들을 갓난아기처럼 요람에 잡아 묶어두고 그들을 잠재우기 위한 자장가를 불러주었다”고 서사시에 씌어 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자장, 자장, 아버지 왕자님,
자장, 자장, 사랑스런 아버지.
…만약 자지 않으면 사랑스런 아버지
알레그들한테 데려가라 할 테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자장, 자장, 공주님.
자장, 자장, 어머니 공주님.
만약 자지 않으면 늙은 어머니
알레그들한테 데려가라 할 테요.
늙은 할머니.
알레그들이 나를 데리고 가게 하지 마, 오 나의 황금 공주님! 거기서는 늙은이들을 죽인다던데…
또 다른 장면에는 한 노인이 아내와 나누는 대화가 있다.
부인.
그렇게 괴롭히다니 그런 못된 며느리가 있나!
알레그들한테 당신을 데리고 가지나 않았으면!
알레그들한테 붙잡혀 가면,
산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던져진다던데.
남편.
입 좀 닥쳐, 당신!
만약 그들이 나를 끌고 갈 생각이 없다 해도 당신이 나를 끌고 가라고 시킬걸.
자주 들먹거리는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던데
아! 한 번만이라도 당신에게서 빠져나갈 수만 있었다면!
(바로 그를 데려가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나를 야수들의 입에 던져버려줘.
또 다른 장면은 늙은 부부의 마지막 논쟁을 말하고 있다.
노인 살인 회의 의장이 물었다. “당신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늙었소?” “더 늙은 사람은 물론 저 할망구지요”라고 노인이 입 안에서 어물어물 대답한다. 그러자 키 작은 노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요람의 가죽끈이 끊어질 정도로 온몸을 떨면서 말을 내뱉는다. “아니! 이럴 수가! 어찌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가 있소? 죽을 때가 되니까 나더러 더 늙었다고 말하다니…만약 내 말을 믿지 못하시겠거든, 우리들 이를 보십시오. 내 이는 아직도 빠진 게 없소. 저 사람 이는 두 개, 세 개나 빠졌잖소…” 의회는 그들의 이를 들여다보고서 남편이 더 늙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툴툴거리며 노인을 데리고 가서 맥주를 마시게 하고는 골짜기에 던져버렸다.
노인들을 존경하는 현대의 오세트인들은 이 서사시의 몇몇 이야기들을 수정했다. 그들은 노인 살해를 조상 전래의 풍습이 아닌 범죄적 음모였던 것처럼 보여준다. 향연 도중 젊은 영웅이 나타나 노인을 구출하기도 한다.
아주 가난하지만 노인들을 제거하지 않는 미개인들도 있다. 앞서 나온 예문들과 이것을 비교하면서 이런 차이점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연안 지방 사람들과는 반대로 내륙의 추크치족은 노인들을 존경한다. 코랴크인들처럼 그들은 북쪽의 초원 사이로 순록 떼를 몰고 다닌다. 그들은 고된 생활 때문에 일찍 늙는다. 그러나 노년의 쇠약이 사회적 영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족 간에는 아주 친밀한 유대 관계가 있다. 가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그가 순록 떼를 소유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소유권을 가진다. 왜 경제적 권한이 아버지에게 부여되었는가? 그 이유는 분명 집단 전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쨌든 그 집단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이가 적은 성인들이 어느 날 자신도 그렇게 소유권을 박탈당하게 된다는 생각을 혐오스러워해서였든지 혹은 그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안정이 보장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어쩌면 이 예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 노인은 흔히 신랑이 신부집에 바치는 결혼 준비금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한다. 즉 양 떼 혹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관습에 따라 사위와 아들 사이에 그 재산을 분배할 책임이 그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소유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재산의 법적 상속자들 사이의 중개자이다. 그래서 그들 중 누구라도 야쿠트인들과 같은 거친 민족들에게서처럼 노인의 재산을 뺏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어쨌든 노인이 재산의 소유자로 있는 한 재산이 그에게 커다란 위엄을 부여해준다. 거의 노망이 든 노인이 여전히 캠프를 지휘하는 일도 있다. 그는 이주와 여름 캠프의 장소를 결정한다. 캠프를 이동할 때 노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썰매 위에 앉는다. 만약 눈이 부족하면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업고 이동한다. 보고라츠가 말하기를 그들 중 한 명은 봄철만 되면 북극 마을의 상인들에게 살림 도구를 사기 위해 볼브랜느 강으로 갔다고 한다. 그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샀기 때문에 사냥칼을 사야 하는데 식탁용 칼을 가져오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점잖게 웃었다. “미친 노인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는 노인인걸.” 보고라츠는 60세 된 절름발이 노인이 여전히 가축 떼와 집의 소유주로 있던 예도 인용한다. 그는 해마다 시장에 가서 술을 사느라 돈을 거의 다 썼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존경을 덜 받는 것도 아니었다.
티에라델푸에고 연안에 살고 있는 3천 명가량 되는 야마나인들은13)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토착민에 속한다. 그들은 도끼도 없고, 낚싯바늘도, 부엌 살림도, 도자기도 없다. 그들은 식량도 비축하지 않는다.14) 그들은 놀이도, 의식도, 참된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신이나 샤먼들의 능력에 대한 막연한 신앙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개와 카누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물 위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사냥하고 고기를 잡는다. 그들은 몸이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그들의 생활 조건은 극히 불안정하다. 거의 언제나 굶주려 있어 먹을 것을 찾느라 모든 시간을 보낸다. 활동하지 않는 기간에는 부부 중심의 가족 단위로 나누어졌다가 캠프로 다시 집결한다. 그러나 최고 권위자는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재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이유이다. 그들은 자식들을 사랑한다. 할아버지들 역시 손자들을 귀여워한다. 그들은 어머니가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갓난아기가 기형이거나 비정상일 때만 영아를 살해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아들, 딸 모두 보살핌을 잘 받으며 그들도 부모를 극진히 사랑하여 캠프에서도 부모와 같은 오두막에서 살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랑은 부모들이 아주 늙었을 때도 지속되며 모든 노인들은 존경을 받는다. 양식은 전 집단에서 분배된다. 노인들은 제일 먼저 대접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을 오두막의 제일 좋은 자리에 모신다. 절대로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며 자식들 중 한 명이 언제나 그들을 돌본다. 이들은 결코 노인들을 놀리지 않으며 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는다. 영리하고 정직한 노인들은 도덕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다. 사람들은 가장이었던 늙은 홀아비들에게 엄격하게 복종한다. 노인들의 경험은 집단에 도움을 준다. 그들은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하며 또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다. 성문화되지 않은 법들을 전수하고 또 존중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훈계하여 필요할 때면 처신을 잘못하는 자들에게 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지위는 조화를 이룬 집단에서 확립된다. 야마나인들은 그들의 혹독한 주위 환경에 놀랄 만큼 잘 적응한다. 그들은 동족끼리 사랑하여 서로 왕래하고, 서로 돕고, 또 기꺼이 손님들을 대접한다. 그들에게 살기 위한 투쟁은 매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이 생존의 투쟁에 이기적인 탐욕은 전혀 없다. 그들에게는 위독한 병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안락사를 시행하는 법도 있다. 그러나 병자의 상태가 절망적이고 또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만 안락사를 행할 수 있다.
야마나인들의 풍습을 묘사한 연구가들은 그들 풍습의 목가적인 성격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알류트인들 역시 그들의 생존 조건이 불안정하지만 노인들의 처지는 행복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노인들의 경험에 대해 인정하는 가치와 자식과 부모를 이어주는 상호간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알류트인들은 알류샨 열도에 살고 있는 골격이 단단하고 튼튼한 몽골인들이다. 그들은 카누를 타고 이동하면서 고기잡이로 살아간다. 그들은 고래 고기와 발효시킨 생선 대가리를 먹는다. 양식은 비축하지 않는데, 먹을 것이 조금밖에 없어도 다 먹어버린다. 그들은 인내심이 많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며칠간은 견딜 수 있으며, 먹을 것이 있으면 집단 전체가 나눠 먹는다. 그들은 움막집에서 살며, 일할 때는 느리지만 능숙하고 지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기억력이 좋은데, 러시아의 장인들을 모방할 줄 알고 또 장기도 둘 줄 안다. 연구가들은 그들을 게으르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상업주의 사회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산을 모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들이 부자를 존경하는 것은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능숙한 기술 때문이지 가지고 있는 재산 때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인들의 보석은 매우 값비싼 것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수정과 값비싼 광석들을 찾기 위해 원정을 떠난다. 춤, 연극 공연, 향연 등 축제도 연다. 대부분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샤먼들의 능력을 믿는다. 그들에게서는 영아 살해가 드물다. 그들은 자식들을 매우 사랑하며, 아이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다 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아이들에게 모두 다 준다. 아들이나 조카를 잃으면 절망하여 자살하는 남자도 있다. 또한 아이들도 부모를 사랑하고 그들의 노년을 위로해주려고 노력한다. 부모를 버리는 것은 수치에 속한다. 그들은 노인들을 도와야 하며 모든 것을 같이 나누고 필요하면 그들을 위해 희생도 한다. 특히 어머니의 경우 만일 그녀가 불구이며 노쇠했다 해도 헌신적으로 돌본다. 부모를 잘 모시고 또 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으면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즉 고기잡이는 풍요로울 것이며 사람들은 천수를 다 누릴 것이다. 천수를 다한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커다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령의 노인들은 젊은이를 가르친다. 각 마을에서는 한두 명의 노인들이 청년들을 교육시킨다. 설사 노인이 허튼소리를 해도 존경심을 가지고 귀담아 듣는다. 노인들은 ——일, 월을 가리키는 성냥의 자리를 바꾸어——달력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나이 든 여자들은 병자들을 간호한다. 사람들은 노파들을 신뢰한다. 전체적으로 봐서 경제력과 효성 사이에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부모들이 그들의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있고 또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여가를 가질 만큼 자연은 충분한 자원을 제공한다. 그래서 자식들은 늙은 부모가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한다.
우리가 여기까지 고찰한 사회들은 원시적인 기술밖에는 갖고 있지 않은 사회로, 종교나 마법 또한 자리잡지 못한 사회들이다. 경제적 생활이 더 풍부한 지식을 요구하고 또 자연과의 투쟁이 덜 격렬하여 어떤 점에서는 자연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서게 될 때 마법과 종교는 발전한다. 그러면 노인의 역할은 훨씬 복합적인 것이 된다. 그는 큰 권한을 보유할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아란다인들의 경우이다. 전도사들이 오기 전에 그들은 노인 정치를 수립했다. 아란다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삼림에서 거의 벌거벗은 채 살고 있는 집단 사냥꾼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시기를 겪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양육되었으며, 가정마다 한 남자와 한 명 내지 여러 명의 아내들, 아이들 그리고 개들이 있다. 토템 숭배 집단들은 여러 가정들을 규합한다. 엄마가 갓난아기를 키울 능력이 없을 때는 영아를 살해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중 또 다른 한 명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15) 그들은 쌍둥이들을 죽인다. 또 나이가 더 많고 허약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더 어린 아이를 죽이는 일도 생긴다 ——엄마는 때로 그 향연에 참가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아이들은 잘 키운다. 어머니들은 관대하다. 그들은 아기에게 젖 물리는 것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며 젖을 아주 늦게 뗀다. 그들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놔둔다. 그들에게 성적 금기를 지키도록 하는 것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이다. 그러나 입문 의식은 아주 고통스럽다. 집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원들은 ‘회색머리의 남자들’이다. 의식이 있고 활동적인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노쇠한 ‘거의 죽은 자들’은 잘 먹고 간호도 받고 보살핌도 받는다.16) 그러나 더 이상 영향력은 갖지 못한다. 반면 ‘반백의 사람’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의 실제 경험은 집단의 후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사실 채집 사냥꾼들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어떤 표시를 보고 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물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독성이 있는 음식들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 독성을 제거해서 먹을 수 있게 하는가 등이다. 이런 반백 노인들의 눈썰미나 손놀림은 오랜 경험에 의해서만 습득되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노인들이 신성한 전통들을 ——노래, 신화, 의식, 부족 생활의 관습들 ——알고 있다면 그들의 권위는 막강해진다. 원시인들의 지식은 마법과 분리할 수 없다. 사물들의 특성을 알고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인과율에 따라서 그리고 동시에 그 주술적인 유사성에 따라서 사물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게다가 기술은 주술적인 제식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제식이 없다면 그 기술은 효력이 없다. ‘반백의 사람’의 지식은 마술적 힘의 소유와 일치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나이와 더불어 점점 커진다. 거의 신체 불수가 되는 ‘옌콘’이 되면 그들의 지식과 마술적 힘은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많은 집단을 병들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음식물 금기에는 더 이상 영향받지 않는다.17) 사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인간 조건을 초월해 있으며 그 인간 조건을 위협하는 초연적인 위험들로부터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것이——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그들에게는 더 이상 금지되지 않는다. 이러한 예외적인 조건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인 역할 수행에 지목된다. 저승에 갈 나이가 다 된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가장 좋은 중개자가 된다. 종교 생활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노인들이며 그 종교 생활은 모든 사회적 생활을 포함한다. 그들은 의식에 사용했던 신성한 물건들을 소유한다. 그들만이 ‘추룽가’를 만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 추룽가는 신화적인 선조들과 토템들을 동시에 상징하는 신성한 돌들이다. 그 돌들은 오래된 만큼 큰 가치를 지닌다. 그 돌들은 현재의 집단과 지나간 시간 속의 영웅들을 아주 가까이 만나게 해준다. 노인들이 의식을 집행하는 동안 그 돌들이 진열된다. 사람들은 그 돌들에 가장 큰 경의를 표한다. 이 축제들이 계속되는 동안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말을 걸어올 때에만 이야기한다. 노인들은 자손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자손들에게 노래와 신화, 제식들을 전수하지만 어떤 비결을 독점하기 위해 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18) 일시적인 제식들은 그들을 무서워하는 젊은이들을 그들 앞에 굴복시킨다. 노인들을 위하여 젊은이들에게는 심한 식량 제한이 강요된다. 어떤 부족에서는 노인들을 보강시키려고 젊은이들이 피를 주기도 하는데 팔의 정맥이나 손등 혹은 손톱 밑에서 피를 뽑는다. 그리고 노인들의 몸에다 그 피를 뿌리거나 혹은 그 피를 마시게도 한다. 의식에 관한 지식과 의식에 관한 활동 그리고 알고 있는 노래들로 인하여 노인들은 먹을 것을 선물로 받기도 한다. 부와 위엄으로 그들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된다. 집단을 이끌어가는 것은 원칙상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능력이 약해지면 명목상의 권한밖에는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좀더 젊은 대리인으로 대체된다. 그는 같은 나이의 남자들에게 충고한다. 족장권이 상속되는 부족들에서조차——그러므로 추장이 젊을 수도 있지만——진정한 우두머리는 노인들이다. 그들은 시비를 가리고 새 캠프가 정착할 지역을 지목하고 향연들을 준비한다. 그들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옛날 그들은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여자들을 독점했다. 그들은 모든 처녀들이 그들 몫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동기는 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적·사회적인 것이었다. 처녀들은 사춘기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며 총각들은 입문식을 기다려야 한다. 특히 노인과 그의 늙은 아내로서는 처녀가 그들을 부양해준다는 이익이 있는 것이다. 늙은 아내는 “불쌍한 늙은이는 꿀과 물을 찾아줄 어린 아내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젊은이들은 결혼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 주술, 종교는 원시 사회·문화의 본질을 이룬다. 이 세 분야는 서로 관계가 깊으며, 주술은 기술 그리고 동시에 종교와 아주 밀착되어 있다. 기술과 종교는 집단에게 이로운 것이며 주술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아란다족에게서는 ‘반백의 사람’이 이 세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지식의 보유자이며 또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에 소중한 존재이다. 그는 주술적 지식 때문에 존경과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수단의 아잔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주술이 지배적이다. 노인이 통치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