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자와 사코 相澤 沙呼
1983년 사이타마 현에서 태어났다. 2009년 《오전 0시의 상드리용》으로 제19회 아유카와데쓰야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1년 〈원시인 런어웨이〉가 제6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단편 부문)에, 2018년 《마츠리카 마요르카》가 제18회 본격미스터리대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미스터리, 청춘소설, 라이트노벨 장르를 넘나들며 독자를 사로잡아왔다. 특히 2019년에 발표한 《영매탐정 조즈카》는 제20회 본격미스터리대상 수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등 전무후무의 5관왕을 기록하며 일대 신드롬을 일으켰고, 기요하라 가야 주연의 TV드라마로도 제작되는 등 아이자와 사코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악스러운 반전 덕에 속편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중평을 보란 듯이 불식하며, 작가는 이 년 만에 영매탐정의 두 번째 이야기 《인버트》를 탄생시킨다. 《인버트》는 범인과 범행부터 보여준 뒤 역으로 이를 추적해나가는 이른바 ‘도치서술 미스터리’. 캐릭터는 한층 깊어졌고, ‘도치invert된’ 만큼 구성은 더욱 치밀해졌다. 발매 즉시 찬탄의 독후감이 줄을 이었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본격미스터리 베스트10 등 미스터리 소설 랭킹에서 또다시 수위권에 오르며 1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옮긴이 김수지
전문 번역가 겸 프리랜서 통역가.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통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영매탐정 조즈카》 《신의 카르테 2: 다시 만난 친구》 《신의 카르테 4: 의사의 길》 《가끔 너를 생각해》 《기억술사 0》 등 다수가 있다.
일러스트 ⓒSHIHO ENTA
디자인 홍세연 유향주 ⓒ 김영사 디자인실
“생각을 바꿀 마음은 전혀 없어?”
일말의 희망을 끌어안으며 고마키 시게히토는 나지막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시다 나오마사는 알아챈 기색도 없이 주방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대꾸했다.
“뭐야. 그 얘기하러 왔냐?”
코웃음을 치는 듯한 음성이었다.
요시다는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취미가 요리라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고마키는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설거지할 그릇이 쌓여 있고 조미료는 시치미七味 정도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요리에 공들이는 이의 주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시다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냄비로 뭔가를 끓이는 중이었다.
요시다가 질문에 대답할 것 같지 않자 고마키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별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
“냄새 한번 고약하네. 대체 뭘 만드는 거야?”
코가 뒤틀릴 것 같은 불쾌한 냄새가 떠다니고 있다.
요시다는 돌아보지 않은 채 웃었다.
“탕약. 누구 때문에 아직까지 다리가 아파서 말이지. 어제 새로 처방받았는데 이 약은 잘 드는 것 같더라고.”
고마키는 입을 다물었다.
요시다가 말한 통증의 원인을 자신이 일부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그때 시작됐다.
그때부터 머리 위에는 두꺼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단 한순간도 걷히는 일 없이 고마키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이봐.”
고마키는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재고할 마음은 없어?”
“없어.”
요시다는 마침내 몸을 돌려 이쪽을 보았다. 입가에는 비웃음마저 걸려 있다.
“이미 팔기로 정했어. 외부에 파는 게 더 돈이 돼.”
“피크타일은 내 프로젝트야. 내가 기획하고 개발했어. 끈기 있게 기다리면 유저 수도 더 늘 거고 이익도 낼 수 있다고. 그걸 그렇게 쉽게…….”
“네 프로젝트가 아니야. 내 회사의 프로젝트지.”
“네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두 찬성했어. 다음 주 회의에서 정식으로 결정될 거야.”
“그렇다면 적어도 내 이름을…….”
“네 이름?”
요시다는 우습다는 듯 안경 안쪽에 있는 눈동자를 번뜩였다.
“벌써 내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했어. 너처럼 누군지도 모르는 엔지니어 이름을 갖다 붙이면 누가 거들떠보겠냐. 새 시대를 열 천재 프로그래머 요시다 나오마사가 기획한 새로운 서비스. 그러니까 다들 관심 보이면서 떠드는 거고 통째로 사고 싶다는 기업도 나오는 거야.”
태연히 스스로 천재라 칭하는 모습에서 요시다라는 사내의 성격이 짙게 드러났다. 고마키가 어안이 벙벙해지거나 말거나 요시다는 수다스레 지껄이며 냉장고에서 뭔가 꺼냈다. 노란 라벨이 눈에 띄는 탄산음료 페트병이었다. 한 손에 들고 주방에서 나오더니 고마키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라도 마시고 좀 진정해라.”
고마키는 멍하니 페트병을 받아 들었다.
“넌…… 그런 식으로 항상 네 잇속만 챙기지.”
“잊었나 본데 회사를 여기까지 키운 건 나야. 넌 코드 작성밖에 할 줄 모르잖아. 지금껏 내 판단이 틀린 적이 있었냐? 넌 내 말대로 순순히 따르면 돼.”
요시다는 주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뒷모습을 향해 고마키가 결의를 던졌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라면 난 다른 데로 가겠어.”
“네가 이직을?” 요시다는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꿈도 크네. 남들이랑 커뮤니케이션도 제대로 못 하는 음침한 녀석을 받아줄 회사가 있겠냐?”
고마키는 페트병을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청소를 안 했는지 요시다의 회사 책상처럼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제 주변 정리도 못하는 녀석에게 커뮤니케이션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고마키는 분노를 꾹 참으며 주머니에서 꺼내 든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19시 58분.
여기까지다.
모든 인내는 오늘 이 순간까지다.
발치에 내려둔 배낭에서 재빨리 그것을 꺼낸다.
상흔이 남지 않도록 무거운 렌치에 얇은 우레탄 시트를 감았다.
“요시다.”
“응?”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요시다가 돌아보았다.
고마키는 높이 치켜든 흉기에 힘을 실어 내리쳤다.
그 순간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혈류만이 귓속에서 굉굉히 울리는 것을 느꼈을 뿐.
비명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요시다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고, 검은 테 안경은 심하게 뒤틀려 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경악의 빛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고마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은 없다.
요시다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죽었나?
아니면…….
흥분으로 숨이 가빠졌다. 고마키는 일단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배낭에 흉기를 쑤셔 넣었다. 배낭 바깥 주머니에서 비닐장갑을 꺼내 착용한다. 시간은 별로 없다. 요시다의 몸을 뒤집어 천장을 보게 한 뒤 호흡을 확인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
계획대로다.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니 그리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 낙관하긴 했는데, 어쨌거나 운이 좋다. 허무하게 죽어버렸다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다른 플랜을 실행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기절한 요시다의 안경을 벗겨 거실에 있는 낮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배낭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질식하지 않도록 코는 드러낸 채 요시다의 머리에 씌웠다. 언뜻 봤을 때는 이마의 출혈량이 적었지만 혹시라도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고 나서 요시다의 몸을 겨우겨우 안아 들어 욕실까지 끌고 갔다.
예상대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요시다는 날씬한 편이지만 평소 거실에 있는 재활치료용 워킹 머신으로 근육을 단련했고, 고마키는 책상에 앉아 일만 하느라 운동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수차례 호흡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끌었다. 도중에 요시다가 의식을 되찾는 불운한 사고와 맞닥뜨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자신에게는 운이 따르는 모양이다. 여태까지 지독히도 불운한 인생이었으니, 지금만큼은 하늘이 편을 들어줘도 좋을 터였다.
욕실 앞 탈의 공간에서 요시다의 옷을 벗겼다. 이 또한 번거로운 작업이긴 했지만 어찌저찌 끝낼 수 있었다. 셔츠와 양말과 속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청바지를 개어 바구니에 넣었다. 알몸이 된 요시다의 머리에서 비닐봉지를 거칠게 벗긴 뒤 다시 안아 올린다. 욕실로 끌고 들어간 다음 욕조 가장자리에 상처 난 이마를 갖다대 핏자국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텅 빈 욕조 안으로 상반신을 엎드리게 했다. 엉덩이가 바깥을 향하고 있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이 남자의 말로에 잘 어울리는 꼬락서니다.
시체를 누가 발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면을 상상하자 고마키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급탕기 버튼을 눌러 따듯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미리 이 욕조의 모델명을 검색해 인터넷으로 설명서를 확인해두었다. 이내 구동음이 울려 퍼지며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은 순식간에 요시다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도중에 눈을 뜰 때를 대비해 고마키는 한동안 요시다의 몸을 누른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움직임이 없는 요시다의 몸을 보고 익사를 확인했다.
고마키는 욕실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요시다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청바지 주머니에는 없었다. 거실로 가 보니 낮은 테이블 위, 안경집이며 안경닦이가 놓인 곳 가까이에 있었다. 고마키는 휴대전화와 요시다의 안경을 집어 들고 탈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목욕 수건을 개어 세탁기에 놓고 그 위에 안경과 휴대전화를 올려두었다.
거실로 돌아와 최종 확인을 한다. 일단계에 해당하는 중요한 작업을 끝내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오감이 지금까지 차단하고 있던 것을 알아챘다.
지독한 악취였다.
주방 쪽에서 그 악취와 함께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요시다가 탕약이라고 말한 그 냄비에 가스 불이 켜져 있는 상태였다.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채 다행이었다. 고마키는 주방으로 가 불을 껐다. 질냄비는 칙칙하고 시커먼 액체로 가득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런 걸 마시려 하는 인간의 심리를 알 수가 없다.
탄산음료 페트병에 묻은 지문도 잊지 않고 닦았다. 실수로 받아버렸지만 윗부분만 잡았으니 닦을 면적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다 닦아버리면 요시다의 지문까지도 남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어딘가에는 그의 지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가지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가능한 한 현장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고마키는 페트병을 냉장고에 넣었다.
초여름이기도 해서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고마키는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조심스레 땀을 훔쳤다. 친구로서 두 달 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니 모발 같은 게 떨어져 있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DNA 등의 흔적은 가급적 남기지 않는 편이 좋다.
자, 여기까지 뭔가 놓친 건 없나?
계획은 완벽할 터였다.
테스트 코드를 작성하듯 늘어놓은, 머릿속 체크 항목을 확인했다.
고마키는 하나씩 되짚으며 모든 항목에 성공을 표시하는 초록불을 켰다.
괜찮다. 지금까지는 완벽하다.
마지막으로 고마키는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요시다는 아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욕조에 상반신을 처박은 채 쓰러져 있었다.
따뜻한 물은 욕조의 반 정도까지 찼다.
완전히, 죽었다.
“요시다.”
고마키가 말했다.
이 말을 고하는 데 고양감마저 느끼며.
“오늘부터 난 자유야.”
고마키는 책상 의자에 앉아 한동안 성취감에 심취해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괜찮다.
요시다만 없으면 앞으로의 인생은 분명 잘 풀릴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경찰의 눈을 속이는 일뿐…….
그때 스마트폰의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고마키는 무심결에 움찔거렸다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정신을 다잡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앉은 자세를 고친 뒤 전화를 받는다.
“고마키입니다.”
“아, 고마키 씨. 아아, 받아줘서 다행이에요.”
스고였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몹시 당황한 듯했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이쪽에 경고가 엄청 떴어요. 아직 원인은 모르겠는데 서버 쪽에서 애플리케이션이 다운됐어요. 리셋 했는데도 바로 다시 다운돼버리네요.”
“하필 이럴 때…….”
“이럴 때요?”
스고가 되물었다. 고마키는 웃었다.
“아, 혼잣말이야. 벌써 늦은 시간이고, 왜 하필 다들 퇴근했을 때 이런 일이 생겼나 싶어서.”
“고마키 씨도 퇴근하셨군요?”
“아니, 아직 회사야.”
고마키는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스피커 모드로 바꾼 뒤 책상을 향해 돌아앉았다.
“저도 복귀하는 게 좋을까요?”
“아냐. 스고 씨는 인프라 담당이라서 이럴 때를 대비해 집에서도 서버에 접속할 수 있게 돼 있잖아. 먼저 에러 원인 좀 알아봐줄래? 나는 회사에서 리포지토리 살펴보고, 일단은 테스트 돌려볼게. 음, 어떤 에러인지 파악했어?”
“스택트레이스가 슬랙에 떴으니까 확인해주시겠어요? 으아, 자기 전이라 다행이에요. 잠든 사이에 터졌다고 생각하면 섬뜩하다니까요. 유저 수도 착실히 잘 늘고 있었는데.”
“그렇군. 이 에러로 서버가 다운된 걸 보니 액세스 부하는 아닌 것 같네. 바로 복구돼야 할 텐데.”
“왜 갑자기 이런 에러가 생겼을까요?”
“지난주 업데이트에 원인이 있을 것 같은데……. 신기능 추가하면서 외부 라이브러리 버전 몇 가지를 올려버렸잖아. 그게 엉켰을지도…….”
대화를 나누며, 고마키는 검은 책상 위에 있는 키보드를 옆으로 치웠다. 배낭에서 슬리브에 넣어둔 노트북을 꺼낸다. 스고가 원인을 찾으려고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키보드가 있던 공간에 노트북을 놓았다.
책상은 너저분했다. 크기 자체는 크지만 왼쪽에 서류 같은 것들이 산적해 공간을 압박하고 있었다. 전기세나 통신비 명세서, 커다란 봉투 등 잡다한 것들도 빽빽이 쌓여 차양처럼 책상 표면을 덮었다. 고마키는 그곳을 정리하고픈 유혹에 휩싸였다.
책상에 노트북을 펴고 위치를 조정했다. 디스플레이 위쪽에 노트북과 연결한 웹카메라를 설치한다. 마땅히 고정할 장치가 없어 셀로판테이프를 사용했다. 노트북의 표준 카메라와 달리 화각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고 무선이라 조작이 수월하다.
와이파이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노트북을 조작했다.
“이건…….” 고마키는 화면에 표시된 에디터의 소스 코드를 확인한 뒤 신음했다. “CSRF가 통하게 돼 있었나 보네. 생각지 못한 공격이 들어와서 거기부터 줄줄이……. 그런데 왜지? 음, 원인을 확실히 알아내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으니까 메인터넌스 공지 띄워줄래요? 그리고, 저, 스고 씨, 괜찮으면 영상통화로 해도 될까?”
“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사실 지금 꽤 졸리거든.” 고마키는 웃었다. “누가 지켜봐주지 않으면 잠들어버릴 것 같아.”
“아아.” 스고는 웃었다. “그러시죠. 나눠서 얼른 해치워버려요.”
“분담할 파일을 분류해서 지시할게. 수정 끝나면 나중에 풀 리퀘스트 해줄래? 끝나면 한꺼번에 머지merge 할 테니까.”
고마키는 노트북으로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영상통화 모드로 바꾼 뒤 스고를 호출한다. 화면 한복판에 졸음 가득한 스고의 얼굴이 나타났다.
“늦게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스고가 화면 너머에서 말했다.
그러더니 화면 밖 회사 상황을 살피듯 물었다.
“그쪽에는 고마키 씨 혼자 남아 계세요?”
고마키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응. 다들 퇴근했어. 나밖에 없네.”
“이야, 마침 고마키 씨가 계셔서 다행이네요. 코드 수정은 사내에서만 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도 없었으면 회사로 돌아갈 뻔했어요.”
고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이 작업은 회사 밖에서는 불가능하지.”
주식회사 젬레일스의 대표이사 겸 사장, 요시다 나오마사의 죽음은 업계에서 뉴스로 떠올랐다.
작은 IT 벤처기업이지만 선진적인 웹서비스 운영과 고품질 애플리케이션 개발 의뢰 등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었고, SNS상에서 요시다 나오마사의 인기도 상당했다. 그렇기에 향후 젬레일스의 행보에 불안감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사내외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확실히 혼란은 크다. 하지만 고마키는 금방 가라앉을 것이라 예측했다. 요시다 말대로 회사는 그가 이끌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시다의 재능은 경영에 편중돼 있었고 시스템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최근 수년간은 코드다운 코드를 짜본 적조차 없을 테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직원들뿐이었다. 그러나 젬레일스에는 고마키를 필두로 우수한 엔지니어가 많다. 경영 쪽도 부사장인 오이누마가 있으면 불안해할 것 없다. 오히려 실적은 지금까지보다 더 향상될 것이다. 그렇다. 고마키가 개발한 피크타일이 언젠가 성공을 거둔다면…….
범행 다음 날, 요시다의 시체가 발견된 당일에는 경찰이 다녀가느라 어수선했지만 일회성에 그친 모양이었다. 경찰이 고마키를 탐문한 횟수는 딱 한 번이었다. 장소는 젬레일스의 소회의실이었다. 담당 형사는 이와치도라는 허풍스러운 이름의 경부보였고, 형식적인 절차라며 고마키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젯밤 19시부터 21시까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거…….”
고마키는 미리 준비한 대사를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입에 올렸다.
“혹시 알리바이를 조사하시는 건가요? 잠시만요. 요시다는 살해당한 겁니까?”
“아뇨, 검시관 의견에 따르면 사고입니다.” 이와치도는 근엄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주었다. “욕조에 들어갈 때 미끄러져서 넘어졌는데 운 나쁘게 머리를 가장자리에 부딪혔다지 뭡니까. 요시다 씨 평소에 다리가 안 좋았죠? 그렇게 기절했는데 욕조 물에 빠져버린 겁니다. 하지만 사고인 경우에도 이럴 때는 만일을 위해 관계자 전원에게 확인을 해두긴 합니다. 보고서에 확실히 정리해야 하거든요.”
“음, 19시부터 21시 말씀이시죠? 그 시간대라면 회사에 있었습니다.”
고마키는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대답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회사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아, 시스템 엔지니어인 스고 씨에게 물어봐주세요. 20시쯤부터 쭉 스고 씨와 영상통화를 했거든요. 아, 그리고 19시쯤에는 옆에 있는 편의점에도 들렀으니 CCTV에 찍혀 있지 않을까요. 그 후에 20시부터 23시까지, 여기에서 계속 스고 씨와 영상통화를 하며 작업했습니다. 스고 씨와 통화를 끝낸 후에도 아마 자정 넘어서까지는 회사에 남아 있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여기에서 요시다 씨 자택까지는 편도 한 시간쯤 걸리니 사고가 아니라 해도 알리바이는 성립되네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경찰이 무언가 물은 것은 그때뿐이었다. 고마키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맥이 빠졌다. 고마키의 알리바이는 철벽이다. 같은 시간대, 고마키는 회사 밖에서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작업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록도 남아 있고 다른 엔지니어들도 증명해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철저히 준비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건은 사고로 처리되는 듯했고 순식간에 며칠이 흘러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없어졌다.
예상과 달리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범행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고마키의 일상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고마키와 요시다 나오마사의 인연은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년 시절의 요시다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같은 학년의 골목대장이었다. 당시 요시다는 고마키와 정반대로 키가 훤칠하고 쾌활했다. 교사들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난폭한 면이 있었지만 용모가 단정해서인지 인기가 많아 주변에 항상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요시다에게 고마키는 그 아이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반면 고마키에게 요시다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폭력적이고 거만한 태도로 아무렇지 않게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고마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은 최근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마키와 요시다의 관계는 중학생 때 결정적인 변화를 맞았다. 문화제 준비를 하다가 고마키의 부주의로 인해 요시다가 다쳐버린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요시다는 다리에 핸디캡이 생겼다. 보행에 지장은 없지만 걸을 때마다 통증을 느끼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학교 측도 부모님들도 고마키에게 과실이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마키는 자신의 부주의가 그런 일을 초래했다는 부채 의식을 느꼈다. 요시다는 처음에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으나 차츰 뒤에서 고마키를 탓하게 되었다. 동급생 앞에서 모욕하고 졸개 부리듯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는데, 책임을 느끼던 고마키는 거역하지 않았다. 원인이 고마키에게 있음을 다들 알아서인지 교실에서도 그를 나쁜 놈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그 이후로 고마키는 요시다의 충성스러운 심복으로 살아왔다.
물론 요시다가 창업할 때도 고마키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고마키는 뛰어난 프로젝트를 다수 만들어냈고 회사는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모든 성과는 요시다의 공으로 돌아갔다. 쉽게 말하면 고마키는 고스트라이터로 지내기를 강요받은 셈이다. 폭언과 모욕에 시달리는데 성과는 죄다 요시다가 차지하는 나날이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됐다. 고마키에게 볕이 드는 날은 없었고, 요시다는 천재 프로그래머로서 연일 각광을 받았다.
마냥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요시다를 죽인 사실을 후회하지는 않을 터였다. 욕조에 상반신을 처박은 요시다의 말로를 봤을 때는 통쾌함마저 솟구쳤다. 그런데도, 그날 이후 아무리 몸을 혹사해도 잠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심할 때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때의 광경이 재생되었다. 요시다의 머리를 내리칠 때의 감촉. 쏟아지는 물에 수몰되어가던 처량한 몰골. 그리고 증거 인멸을 위해 욕실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요시다는 없다…….
뒤돌아보면 피투성이가 된 요시다가 아무 말 없이 고마키를 응시하고 있다.
고마키는 악몽에 깨어났다. 그런데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러다 질식할 것 같다는 공포에 휩싸여 몸을 버둥거려봐도 팔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방 안에 누가 있을 리 없다. 공포를 간신히 떨쳐내고 소리 지르며 몸에 힘을 주어 벌떡 일어났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방의 조명은 켜져 있다. 휴대전화를 끌어당겨 확인하니 이제 막 20시가 지나고 있었다.
자신이 요시다를 죽인 시간…….
말도 안 돼. 고마키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밀어냈다.
수면 부족을 빌미로 정시에 퇴근해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는 건 기억한다.
하지만 악몽 탓에 한 시간 정도밖에 잠들지 못한 듯했다.
이대로 아침까지 잤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로변에서 떨어진 건물이라 실내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차가 달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선택한 집인데 지금은 정적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귓가에 소리 하나 닿지 않는다는 건, 다시 생각하면 숨 막히는 일이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고마키는 웃었다. 생각이 지나쳤다. 침대 밖으로 나와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페트병 탄산수로 목을 축였다. 냉장고에서 어제 꺼냈다가 방치한 탓에 미지근한 데다 탄산도 다 빠져 있었다. 뒤이어 확인을 하듯 실내를 살폈다. 방 하나짜리 작은 집이라 화장실이며 욕실을 대강 둘러보는 게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뭐가 있단 말인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도둑이 들어와 숨어 있기라도 할까 봐?
바보 같다.
그 순간, 느닷없이 인터폰 소리가 울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혹시 경찰일까?
숨죽인 채 모니터를 확인한다.
하지만 모니터 속에는 고마키의 예상을 뒤엎는 인물이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물결치는 갈색 머리칼이 특징적이고 프레임이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는데, 화질이 좋지 않은 모니터로도 또렷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예뻤다. 쇄골이 보일 정도로 가슴께가 드러난 원피스에 세련된 자수 카디건을 걸쳤다. 저런 여자가 찾아온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종교 같은 걸 권유하러 왔나.
여자는 한 번 더 인터폰을 울렸다.
“저, 밤늦게 죄송합니다.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아무도 안 계시나요?”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이사 업체의 트럭을 봤다. 그게 옆집이었구나.
젊은 여자가 일부러 인사하러 오는 일은 드물지도 모른다. 예의 바른 상대를 두고 집에 없는 척하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문을 열고 응대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얼굴을 내비친 여자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모니터 너머가 아니라 직접 마주한 여자는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일까. 혼혈일지도 모른다. 새하얀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안경 너머의 커다란 갈색 눈망울은 애교 섞인 빛으로 반짝이며 이쪽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크고 빨간 안경테는 완벽한 용모를 차단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스러움을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악센트였다. 고마키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이돌이나 아나운서 같은, 텔레비전 속에나 존재할 법한 인종이다. 그런 여자가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현실감을 잃을 지경이었다.
“저,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옆집에 이사 온 조즈카라고 해요.”
여자가 큼지막한 눈동자로 고마키를 바라보았다.
고마키는 마주 보지 못하고 바로 얼굴을 돌렸다.
여자는 고마키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으음.” 고마키는 허둥대며 말했다. “아, 그,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마음에 너무도 한심한 소리를 해버렸다.
옛날부터 이랬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해봐도 주눅이 들어 말을 내뱉질 못했다. 상대가 여자인 경우에는 더 심했다. 요시다는 이 점을 물고 늘어지며 지독히도 놀려댔다. 지금도, 이 사람이 비웃을 것만 같다는 두려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자신을 조즈카라고 소개한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네? 아아, 네, 죄송합니다. 고마키입니다.”
“고마키 씨.”
여자는 이번에도 생글거렸다.
“앞으로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아, 물론 그,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 취미는 없고 게임 같은 것도 안 해요. 초대할 만한 친구도 없으니 조용할 텐데, 아, 음, 그래도,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니 혹시 시끄러우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네.”
“죄송해요. 도쿄에는 친한 친구가 별로 없어서요. 엄마가 만일을 대비해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다고……. 아, 이거, 본가에서 딴 사과예요. 괜찮으시면 받아주세요.”
조즈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갈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너무 힘차게 내밀었기 때문일까. 종이봉투가 미끄러지더니 안에 든 사과가 떨어졌다.
“에구구.”
조즈카는 쩔쩔 매며 쪼그려 앉더니 굴러가려는 사과를 주웠다. 그런데 손끝으로 찌르는 모양새가 되면서 사과는 더 멀리 굴러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고마키는 허둥지둥하는 조즈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하얗고 얇은 원피스의 가슴 쪽으로 엿보이는, 홀쭉하게 튀어나온 쇄골에 시선이 꽂혔다. 사과의 것과는 다른 달콤한 향이 비강을 간질였다. 고마키는 황급히 눈길을 돌리고 같이 앉아 사과를 주웠다. 가능한 한 조즈카 쪽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주워 든 사과를 내밀었다. 조즈카는 사과를 받으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워낙 덤벙대서.”
“아닙니다.”
뭐가 아닌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고마키는 떨어져 있는 마지막 사과에 손을 뻗었다. 그것을 잡은 순간, 자신의 손가락과 하얀 손이 겹쳤다. 그 감촉이 전류처럼 고마키의 신체를 관통했다.
“앗, 죄송해요.”
조즈카가 고마키의 손가락에 닿은 손을 황급히 거뒀다.
“아아, 아니, 아뇨.”
고마키는 고개를 휙 돌리며 일어나 사과를 내밀었다.
필사적으로, 태연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더러워졌을지도 모르니 새걸로 드릴게요.”
“아, 아니, 괜찮아요. 뭘 그렇게까지. 씻어서 먹으면 돼요.”
“괜찮으시겠어요?”
조즈카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렌즈 너머의 커다란 눈동자로 고마키를 바라보았다.
“네. 그게, 사과, 좋아하거든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셨군요. 와, 다행이다.”
꽃이 피어나는 듯한 미소란 이런 표정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고마키는 그 미소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고마키 씨.”
갑자기 조즈카의 음성에서 긴장감이 느껴져 놀랐다.
조즈카는 안경 위치를 조정하며 진지한 얼굴로 고마키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저, 이상한 걸 여쭤서 죄송한데, 혹시 지금 가족이나 친구분이 계시나요?”
“네?”
고마키는 조즈카의 시선에 이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아뇨, 혼자 있습니다만.”
“아, 그러셨군요.”
조즈카는 어딘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음, 그게,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텔레비전이 켜져 있나 보네요.”
“아뇨, 텔레비전은 안 틀었어요. 다른 집 소리인가.”
뭐지.
일순간 기묘한 두근거림이 고마키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안개처럼 사라졌다.
눈앞에, 매력적인 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럼 제가 착각했네요.”
조즈카가 웃으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그러고는 “편히 쉬세요” 하고 고개를 숙인 뒤 돌아갔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상황에 고마키는 잠시 멍하게 현관에 서 있었다.
이내 옆집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고마키는 현관문을 잠그고 거실로 들어왔다.
사과가 든 종이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아무 의미도 없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조즈카.
그 성姓을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덤벙대는, 조금 특이한 여자였다는 생각을 한다. 이름은 뭘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 말이 귓가에 되살아난다. 또 만날 수 있을까. 고마키는 조즈카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닿았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예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심지어 옆집으로 이사를…….
그 녀석을 죽이자마자 운이 따라주는 것 같다.
인생을 어둡게 뒤덮었던 구름이 마침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려 하는 것을 고마키는 여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름을 알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첫 만남 이틀 후의 일이었다.
고마키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역 앞 카페에 들러 아침을 먹는다. 식사를 직접 준비하기는 귀찮기도 하고, 일반 기업에 비해 출근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라 어느 정도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구석 자리에서 모닝세트를 먹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최신 기술 정보를 찾아보거나 컨트리뷰터로 참가중인 오픈소스의 동향을 살펴보는 것이 고마키의 일과였다.
“와, 고마키 씨!”
두둥실 날아드는 밝은 목소리에 고마키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히스이가 트레이를 들고 옆에 서 있었다.
그렇다. 여자의 풀 네임은 조즈카 히스이였다. 산책 겸 외출했다가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중이었다고 했다. 히스이가 먼저 합석을 제안했기에, 고마키는 동요하면서도 맞은편에 앉아 발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히스이는 한창 구직중이라고 말했다. 작년에 상경해 고마키도 이름을 들은 적 있는 모 상사에 취직했지만 얼마 안 가 도산한 바람에 눈앞이 캄캄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출퇴근하기 좋은 곳에 집을 구했는데 집세를 내기가 어려워져 지금 집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본가로 돌아갈까 고심했으나 동경하던 도쿄에서 조금 더 버텨보고 싶다고 말하며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
고마키는 처음부터 천진스레 자기 상황을 털어놓는 히스이에게 압도돼버렸다. 젊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 거리를 좁히는지 고마키는 잘 모른다. 히스이는 고마키를 뚫어져라 보며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까지 여자가 이렇게 바라봐준 경험이 없다 보니 달아오르는 뺨을 숨기느라 힘들었다. 자신의 수수한 용모 덕분인지도 몰랐다. 요시다는 고마키가 따분하고 아둔하다며 비웃었지만, 이래 봬도 나름대로 몸차림에는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히스이도 직장을 잃어 마음이 불안할 터였다. 단순히 이웃 간 교제의 일환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더욱 가까워질 찬스를 손에 넣게 될지도 모른다.
“고마키 씨는 여기 자주 오세요?”
“아, 출근 전에 아침식사를 하러 매일 와요. 요리를 잘 못해서요.”
“우아. 그럼 또 같이 먹어도 될까요?”
히스이는 양손을 모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아, 네, 그럼요.”
역시 요시다를 죽이고부터 운이 따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죽일 걸 그랬다.
그날 이후로 아무리 잠자리가 뒤숭숭해도 아침에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뜰 수 있게 됐다. 평소보다 삼십 분은 일찍 일어나 정성스레 면도를 하고 꼼꼼히 양치질을 했다. 몇 개월도 더 전에 미용실에서 사놓고 거의 써본 적 없던 왁스로 머리칼을 정돈하고, 거울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요시다를 보고 따라 산 비싼 셔츠를 입고 집을 나선다.
언제나 고마키가 카페에 먼저 도착했고 히스이는 조금 늦게 나타났다. 매일 아침, 이십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히스이와 함께하는 식사는 더없이 행복했다. 고마키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주는 히스이를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꾸미는 데 신경을 쓰는 편인지 날마다 바뀌는 히스이의 패션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어떤 날은 안경을 쓰고 어떤 날은 안 썼는데, 쓰지 않았을 때 아름다움이 훨씬 돋보여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패션에는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지만, 모델 일을 한다 해도 수긍할 만큼 서 있는 모습이 화사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주위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제까지 여성과 변변찮은 교제 한 번 해본 적 없는 고마키에게 큰 우월감을 주었다.
히스이는 아침식사를 마치면 도서관에서 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 전까지 잠깐 동안, 매일같이 함께 아침을 먹고, 다정히 웃는 히스이의 이야기를 듣고, 잘 다녀오라며 배웅을 받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너처럼 재미없는 놈은 평생 여자도 못 만날 거다.
요시다가 수없이 내뱉은 말이 뇌리를 스쳤다. 업무적으로 여성을 알게 될 기회는 다소 있었지만 고마키가 남몰래 멋지다고 생각한 상대는 죄다 요시다가 가로챘다. 타고난 외모와 화술 덕에 여자를 쥐락펴락하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요시다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녀석은 없다. 자신의 재능과 기회를 착취하는 악마는 죽었다. 이 아리따운 사람까지 빼앗길 위험은 없다. 심지어 요시다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과 사귄 경험은 없었을 테다.
하지만……. 고마키는 생각했다.
자신은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데 재주가 없는 사람임은 틀림없다. 히스이는 대화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예전 직장에서 느낀 불만이나 푸념,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이 압박한다는 이야기마저 재미있게 건네 고마키를 즐겁게 해주는데, 정작 그는 여자가 좋아할 만한 화젯거리를 몰랐다. 히스이는 사소한 것에도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어제 저녁은 뭐 드셨어요?” “어제는 늦게까지 일하셨나요?” 매번 판에 박힌 대답밖에 할 수 없었지만 히스이는 즐거운 듯 웃으며 대화를 이끌어주었다.
언제나 그렇게 다채로운 기쁨을 선사해주건만, 언젠가 히스이가 지루해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고마키를 엄습했다. 여자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다 여자와 만날 기회를 송두리째 가로채고 있던 그 악마 탓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잖아 화젯거리가 떨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찾아들면 이 행복한 시간은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히스이가 본격적으로 구직 활동을 시작하거나 일을 하게 되면 만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설령 옆집에 산다 해도 뭔가 확실한 계기가 없다면 소원해지겠지.
“고마키 씨?”
이게 몇 번째 아침식사일까.
히스이는 어젯밤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로 봤다는 고전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마키는 영화 감상에 별 취미가 없어서 영화관에 가는 일도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재치 있는 답변을 못 하고 애매하게 대답해버려서일지도 모른다. 히스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어…….” 히스이가 눈꼬리를 내린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별로 재미없었나요?”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으음.”
고마키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그게…… 음, 즐거울 것 같네요. 조즈카 씨는 영화관에 자주 가세요? 음, 그, 남자친구랑, 같이 간다든가.”
이 질문을 덧붙인 건 멍청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마키는 불안감을 가능한 한 불식시켜두고 싶었다.
“남자친구…….”
히스이는 신기한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게, 저…… 뭐랄까, 남자를 오래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요.”
히스이를 밀어내는 남자가 있다는 뜻인가.
믿을 수가 없다는 마음으로 고마키는 히스이를 보았다.
“……제가 남들과는 좀 달라서요.”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을 고마키는 꾹 삼켰다.
이렇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여성은 드물 것이다. 덜렁대는 면도 있지만 그 또한 히스이의 매력 중 하나였다. 요시다 같은 나쁜 남자에게 걸려들지는 않을지 불안해졌다.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이죠?”
“음, 웃지 않고 들어주실 수 있는지…….”
“안 웃을게요.”
“실은…… 영감靈感…… 같은 게 있어요.”
“영감요?”
“네. 옛날부터 그런 걸 너무 강하게 느껴서……. 이걸 알면 다들 기분 나빠하더라고요.”
고마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렸다.
그런 유의 이야기를 전혀 안 믿지는 않지만, 과연 사실일까.
“불쾌하시죠……?”
조금 전까지 밝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히스이는 쓸쓸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것 때문에 지금껏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러더니 히스이는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의아한 마음에 바라보자 히스이는 결심했다는 듯 테이블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달콤한 향기가 가까워지자 고마키는 몸이 살짝 굳었다.
“저, 고마키 씨……. 최근에 가족이나 친구를 잃지 않으셨나요?”
“네?”
뜻밖의 물음에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어중간하게 멈추고 말았다.
마음이 동요하니 시선도 흔들린다. 히스이를 똑바로 보지 못했으니 동요했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지만.
히스이가 단단히 마음먹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 고마키 씨한테 인사드리러 집에 갔을 때 봤어요. 고마키 씨 뒤에서 한 남자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이게 무슨 말인가.
고마키의 가슴속에서 잔물결이 일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현관에서 히스이는 뭔가 의외의 것이라도 봤다는 눈빛으로 고마키의 등 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가 와 있는지 물었는데…….
“죄송해요. 섬뜩하시죠. 손을 떨고 계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커피가 찰랑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고마키는 다급히 잔을 컵받침에 내려놓았다. 내려놓으면서도 자신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그 남자, 어떤 사람이었죠?”
고마키는 얼떨결에 물어보았다.
“안경을 쓴 남자가 노란 라벨이 붙은 페트병을 들고 있었어요. 뭔가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페트병?
어째서 그런 걸?
아니, 고마키가 쓰러뜨리기 전에 요시다는 분명히 탄산음료 페트병을 들고 있었다.
요시다가 죽기 직전의 모습…….
설마…….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그와 동시에 늦은 밤 수없이 고마키를 괴롭히던 악몽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진짜 영능력자…….
“그 남자, 고마키 씨에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겠더라고요…….”
“으음, 남자였단 말이죠?”
“혹시 짚이는 구석은 없으세요?”
히스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고마키의 눈을 똑바로 본다.
온몸에서 불길한 땀이 스며 나왔다.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시치미를 뗄 수도 있겠지만…….
히스이는 고마키를 살피듯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자신이 거절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섞여 있다. 적어도 고마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실은…… 네. 지난달에 친구가 사고로 죽었어요.”
한숨을 내쉬며, 고마키는 가까스로 그 말만 내뱉었다.
그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군요.” 이해가 된다는 듯 히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성함은?”
“요시다입니다. 요시다 나오마사. 제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이었어요.”
“사장님이셨어요?”
“네. 저랑은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입니다만. 경찰 말로는 욕실에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혔다더군요. 그대로 상반신이 욕조에 빠져서 익사해버린 것 같아요.”
“그랬군요…….”
히스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고마키에게 말했다.
“저기,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몰라요.”
순간 모든 소리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 카페의 웅성거림이 홀연히 증발한 듯한 착각.
사고가 아니라고?
“설마.”
고마키는 애써 웃었다.
자신의 표정이 어색하다는 걸 자각하고 말았다.
히스이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보인다는 건 아닌데, 그때 요시다 씨의 표정은…… 그, 평온한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어쩌면 고마키 씨에게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게 아닐까요.”
“하고픈 말이라니 어떤 말이요?”
고마키는 히스이의 진지한 눈빛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 마당에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한낱 영감 따위에 겁을 먹어서야…….
“요시다 씨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몰라요.”
고마키는 침을 꿀꺽 삼키고 히스이를 보았다.
“그러니까 그 범인을…… 고마키 씨가 찾아주길 바라는 건 아닐까요?”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이며 튀어나온 히스이의 발언은 고마키에게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렇다. 설령 진짜로 영감이 있다 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살인자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저한테…… 말입니까?”
저도 모르게 경직된 미소를 보이고 말았다.
“글쎄요……. 살인이라니, 너무 깊게 생각하신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고마키는 컵받침에 놓인 은제 티스푼을 집어 들어 남은 커피를 휘젓는다. 우유나 설탕을 넣은 건 아니라서 아무 의미도 없는 동작이지만 긴장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손가락의 떨림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고 덜렁대는 히스이에게 그런 예리함이나 관찰력이 있을 리도 없지만.
“고마키 씨. 부탁이 있어요.”
고개를 들자 히스이가 진지한 눈빛으로 호소하듯 고마키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큼지막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저, 이런 걸 그냥 내버려두지 못해요.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저와 함께 요시다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같이 알아봐주시겠어요?”
요시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같이 알아보자고?
요시다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야 뻔하다.
날 죽인 건 이 녀석이야.
보나마나 그렇게 말하고 싶으리라.
이대로라면 사고사로 처리돼버린다.
그래서 요시다는 억울함을 풀고자 영감이 있는 히스이에게 진상을 밝혀달라고 호소하려는 것이다.
죽어서까지 나를 방해하려 하다니…….
“아니, 잠시만요.”
고마키는 웃으며, 티스푼을 잔에서 꺼내 컵받침에 내려놓았다.
“요시다는 명백하게 사고로 죽은 거예요. 경찰이 그렇게 판단했으니 틀림없겠죠. 그걸, 영감이 있다는 이유로…….”
“그렇……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내리깐다.
히스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얼굴을 숙이자 웨이브를 그리는 머리칼이 순간적으로 힘없이 너울거렸다.
“죄송해요.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죠.”
히스이는 앞으로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의자를 당기더니 등 뒤에 두었던 핸드백을 끌어당긴다.
“실례했습니다……. 저, 항상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들떴나 봐요. 고마키 씨라면 제 말을 믿어주실 줄 알고…….”
히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서 멀어지더니 카페 밖으로 나간다.
고마키는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히스이를 배신해버렸다.
이제 만날 수 없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여자를 갖고 싶다.
그 기회를 영원히 잃을 수는 없다.
요시다가 비웃는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돌아봤으면 좋겠다고, 강렬하게 생각했다.
얼마 만에 걷힌 구름인데.
행운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망설임은 한순간이었다.
“조즈카 씨!”
인파 속으로 사라지려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히스이의 가녀린 어깨가 떨리듯 움찔거린다.
채 몸을 돌리기 전에, 고마키는 말하고 있었다.
“제가…… 제가 당신을 도우려면 뭘 하면 됩니까?”
전철을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했다.
도중에 히스이는 고마키에게 자신의 능력 때문에 겪은 일들을 말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감 때문에 남들은 보지 못하는 걸 봤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것인지는 아직도 구별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도 가족이나 친구가 집에 있느냐고 고마키에게 물었다는 것이다. 항상 그런 질문을 반복한 탓에 주변에서도 히스이를 섬뜩하게 여겼다. 가족만이 이해해줬을 뿐 고향에서는 친구도 제대로 생기지 않은 것 같았다. 도쿄로 올라와 심기일전해보기로 했지만 역시나 완벽하게 숨기기는 어려워 외로웠다고 한다.
히스이는 이승을 떠도는 넋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껏 뭔가 호소하는 영혼의 원한을 풀어준 적이 여러 번 있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요시다의 영혼이 고마키의 집에 눌러 앉았는지 옆집에 사는 히스이의 베갯머리에도 가끔씩 서 있다고 했다.
“꿈속에서 요시다 씨가 제 앞에 나타날 때면 항상 페트병을 들고 있어요. 분명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의미, 라뇨?”
“예를 들어…… 요시다 씨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걸 나타내는 증거…….”
히스이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살인이라는 걸 나타내는 증거?
혹은 범인을 나타내는 증거가 그 페트병에?
전철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고마키는 목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요시다가 건넨 페트병. 그걸 만져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지문은 전부 닦았을 터였다.
아니면, 미처 닦지 못한 지문이 있나?
예를 들어 뚜껑?
페트병 바닥?
그런 부분까지 꼼꼼하게 닦았던가?
두 사람은 요시다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장을 실제로 보고 싶다고 히스이가 끈질기게 조른 결과였다. 경찰은 일찌감치 현장 감식을 끝냈다. 히스이는 요시다의 유족에게서 열쇠를 빌릴 수 있을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집은 회사 명의였다. 그래서 간부인 고마키는 회사에서 열쇠를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좀 어렵다며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만약 정말로 페트병에 살인과 관련된 단서가 남아 있다면 그 증거를 당당하게 없앨 수 있다.
18시를 조금 넘긴 시각. 고마키는 히스이를 안내해 건물로 들어섰다. 따로 보안 직원이 있는 건 아니라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가져온 열쇠로 문을 열었다.
고마키가 이곳에 온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널찍한 1LDK 구조로, 거실과 방을 구분하는 미닫이 문은 떼어놓은 상태였다. 개방감이 있으면 했다던 요시다의 말이 떠올랐다. 건물 자체는 오래된 데다 별로 크지도 않지만, 도심지에서 멀지 않아 편의성이 뛰어나고 방도 넓어서 회사와 거리가 있음에도 요시다는 이 맨션을 마음에 들어했다. 출근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거리는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고마키의 계획에 힘을 실어준 요소이기도 했다.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이사했다면 계획은 좌절됐을 테니 말이다. 입구와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설치됐지만 자전거 주차장이 있는 뒤쪽에서 비상계단을 이용하면 찍힐 일은 없다. 고마키는 수차례 드나들며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범행을 끝낸 후, 회사에 있던 열쇠로 현관문을 잠근 뒤 그 경로를 이용해 카메라에 찍히지 않고 벗어난 것이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에 발을 디딘다. 실내화를 신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아 그대로 들어섰다.
히스이는 시원해 보이는 민소매 블라우스에 짧은 자줏빛 스커트 차림이었다. 스타킹을 신은 발을 집에 들여놓더니 “실례합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처음 봤을 때처럼 빨간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뭔가 느껴지세요?”
고마키의 물음에 히스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 안에 페트병이 있을까요?”
“글쎄요.”
두 사람은 거실로 향했다.
고마키는 거실 조명을 켠 뒤 커튼과 창문을 살짝 열었다.
초여름이기도 해서 찌는 듯이 더웠기 때문이다.
돌아보자 히스이는 방 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페트병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 뭔가 깨달았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냉장고.”
히스이가 거실 한쪽으로 가더니 소형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고마키는 아무렇지 않게 뒤로 다가갔다.
“아, 고마키 씨! 이거예요!”
히스이가 몸을 돌리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수건을 이용해 탄산음료 페트병을 들고 있었다.
살인을 나타내는 증거…….
“저도 볼게요.”
히스이에게서 맨손으로 페트병을 뺏어 들었다.
뚜껑을 붙들고 있던 히스이의 손수건이 스르르 떨어졌다.
“앗, 안 돼요, 고마키 씨, 지문이 묻어버린다고요.”
“네?”
고마키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당황한 척하며 페트병 끄트머리를 잡았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탓인지 페트병 주변은 살짝 젖어 있었다. 이 상태라면 지문이 다 지워졌을 것 같긴 한데, 혹 채취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뚜껑은 젖지 않았으니 그곳에는 지문이 계속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오늘부로는 고마키의 지문이 페트병에 남아 있다 해도 수상할 게 없다.
살인을 나타내는 증거는 사라졌다.
고마키는 차가운 페트병을 싱크대 한쪽에 두고는 웃으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뭐, 그래도 경찰은 이미 다 조사했을 거고, 우리가 가져간다 한들 지문 채취를 해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히스이를 보는데 히스이는 고마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앗, 죄송해요! 저도 참……. 이거네요. 이거였어요.”
히스이가 손수건으로 뚜껑 부근을 쥔 채 냉장고에서 다른 탄산음료를 꺼냈다.
“제가 본 건 이 라벨이 붙은 탄산음료였어요. 저도 참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요.”
히스이는 혀를 내밀며 다른 손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고마키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히스이가 든 페트병의 라벨을 응시했다.
범행 직전, 자신이 만진 건 확실히 이 페트병이다. 조금 전의 페트병이 아니다. 즉 히스이가 들고 있는 페트병에는 아직…….
“아, 안 돼요. 고마키 씨. 이번에는 지문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자고요.”
히스이가 픽션에 나오는 학교 선생님처럼 ‘떽’ 하고 타이르는 어조로 말하며 웃었다.
“아, 네네, 맞아요. 그래요. 조심해야죠.”
히스이의 덜렁대는 성격이 증거 인멸을 방해하게 될 줄이야.
이제 고마키가 실수인 척 지문을 남기기는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히스이가 딴 곳을 보는 사이에 손수건으로 지문을 닦을까?
아냐, 서두를 건 없다.
애초에 경찰 조사는 끝나지 않았나.
영감이 있을 뿐인 아가씨가 증거물품을 확보했다 한들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페트병에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