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맞춤법은 중요하다?!
맞춤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맞춤법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글쓰기 학계의 공통 의견이기도 하다.) 이는 맞춤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맞춤법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글쓰기에서든 발표에서든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이를 ‘어떻게 말하는가’, 즉 ‘주제’와 ‘구조’다. 맞춤법이 글의 주제나 구조보다 중요한가? 아니다. 글이든 말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하는 바 그 자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보다 맞춤법을 틀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맞춤법 오류 사례를 유형별로 나눠 따져 보면 맞춤법 오류가 잦다기보다는 비슷한 유형의 맞춤법을 계속 틀릴 뿐이다. 따라서 자주 틀리는 맞춤법 유형을 파악하기만 하면 고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둘째는 맞춤법을 틀리는 이유가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늘 마감에 임박해 급하게 글을 쓰기 때문에 미처 교정할 틈이 없어서 맞춤법을 틀린다는 것. 이 경우 퇴고할 시간을 미리 마련해 두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믿는다.
반면 맞춤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다. 잠시 인터넷으로 기사만 검색해 보아도 세간이 우리말의 훼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의견이 갈릴까? 사실 두 의견은 같은 내용이다. 모두 맞춤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고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맞춤법은 법이니 적어도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다만 전자는 글쓰기나 발표를 통해 중요한 문제를 계속 다루다 보면 맞춤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신호를 지키거나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등의 사소한 행동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삶을 위해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일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나는 맞춤법 오류는 기본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한다.
그들이 야밤도주를 한 것은 않 중요한 일예요.
야반도주 안 일이에요
이런 오류는 16차선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오류가 많은 문장을 쓰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에게 공식적인 일을 맡기기는 어렵겠다’, ‘중요한 일을 함께할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급해서 오자를 수정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사정을 모르고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존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니 글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한다면 기본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특히 공식적인 상황, 예의를 지켜야 할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상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책은 그 기본에 익숙해지는 방법을 공유하기 위해 쓰였다.
내 머릿속 장치 이해
언어학자 놈 촘스키Noam Chomsky는 우리 머릿속에 언어에 대한 장치가 있다고 말했다. 단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힘은 놀랍다. 다섯 살짜리 아이조차 한국어 조사와 어미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같은 시대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의 언어 장치에는 현대 우리말의 언어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그 덕에 따로 배우지 않아도 능란하게 우리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맞춤법을 공부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머릿속 언어적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어렵다면 맞춤법 총칙으로 풀어보자. 한글 맞춤법 총칙은 우리가 맞춤법을 공부할 때 단서가 되어 준다.
•한글 맞춤법 제1장 총칙
제1항 한글 맞춤법은 ① 표준어를 ② 소리대로 적되, ③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맞춤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표준어의 소리와 어법, 즉 문법을 이해해야 한다. ① 때문에 스스로 ‘표준어’ 사용자가 맞는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이 어느 지역에서 나고 자라 어떤 방언을 사용하든 어릴 때부터 학교, 미디어 등에서 표준어를 배워 왔기 때문이다. ③의 ‘어법’은 앞서 말한 머릿속 언어 장치의 질서, 즉 한국어 문법이다.
맞춤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표준어의 소리와 표기 원리를 배우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문법이다. 우리말 문법은 전적으로 머릿속 장치의 질서를 따른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이미 잘 쓰고 있다는 뜻이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해 온 이 질서를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 이것이 맞춤법 공부다.
문법이라고 하면 괜히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문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어려운 문법을 거의 매 순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도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늘 사용하는 언어를 궁금해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힘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 맞춤법 공부다. 미처 몰랐던 나의 능력을 발견하는 일이라니. 설레지 않는가?
함께 생각하기
맞춤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함께 생각하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언어는 어떤 경우에도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음절이든 단어든 문장이든 마찬가지다. 쓰이지 않은 단어와의 관계까지 함께 생각해야 맞춤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날으는’과 ‘나는’의 구분이 어려울 때 무작정 ‘나는’이 맞는 표기라고 외우는 것이 맞춤법 공부가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외우기만 하면 금방 잊게 된다. ‘날으는’과 ‘나는’이 혼동된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물 중 그 단어와 관련된 것이 없는지 생각해 보자. 궁금한 것이 동사, 형용사라면 먼저 ‘나는’의 기본형 ‘날다’를 떠올리자. 그리고 ‘날다’와 비슷한 모양을 가진 기본형을 나열해 보자.
•날다
동사: 갈다, 걸다, 굴다, 깔다, 끌다, 날다, 널다, 놀다, 달다,
돌다, 들다, 떨다, 말다, 물다, 빌다, 벌다, 불다, 빨다,
살다, 썰다, 쓸다, 알다, 얼다, 열다, 울다, 일다, 절다,
졸다, 털다, 틀다, 팔다, 풀다, 헐다
형용사: 길다, 달다, 멀다, 설다, 질다, 여물다, 가늘다,
가물다, 거칠다, 낯설다, 둥글다, 모질다, 어질다
이 단어들은 ‘날다–날으는’과 같은 질서로 움직이지 않는다. ‘갈다–가는(동사)’, ‘길다–긴(형용사)’와 같이 ‘ㄴ’ 앞에서 ‘ㄹ’을 탈락시킨다. 이것이 대다수 동사, 형용사가 갖는 규칙이다.
맞춤법은 ‘날다’라는 단어 하나만을 보고 정하는 것이 아니다. 국어에서 ‘날다’와 같은 모양을 가지는 무수한 단어의 질서를 반영하여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움직이는 것들을 떠올려 발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질서를 읽어낼 수 있다.
원리 생각하기
‘원리 생각하기’도 중요하다. 맞춤법에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 중요성을 판단하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 ‘안 돼’와 ‘안 되’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는 우리말의 중요한 구조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언어다. 다시 말해 한국어 동사, 형용사는 어미 없이 문장에 쓰일 수 없다.
밥을 잘 먹- → 먹어, 먹자, 먹니, 먹는구나
물건을 잘 팔- → 팔아, 팔자, 파니, 파는구나
‘–어’, ‘–자’, ‘–니’, ‘–는구나’와 같은 어미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는 의미다. 기본형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다’, ‘날다’, ‘먹다’, ‘팔다’에서 이 단어들의 의미는 ‘가–’, ‘날–’, ‘먹–’, ‘팔–’에 있다. 그런데도 기본형이 ‘가다’, ‘날다’, ‘먹다’, ‘팔다’인 이유는 어미 없이는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안 되’로 돌아가 이 오류가 중요한 이유는 기본형 ‘되다’가 어미 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떤 공부를 하든 항상 위계(位階)를 생각하는 연습을 하자. ‘위(位)’는 등급을 말할 때 쓰는 한자이다. 맞춤법을 공부할 때 위계를 생각하고, 그 원리를 공부하는 연습을 하면 머릿속의 질서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
맞춤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우선 우리가 쓰는 언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당신이 썼던 글을 다시 읽어 보라. 이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사소한 문제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맞춤법은 중요하다.. 중요한 맞춤법을 찾아두고 틈틈이 익히기로 하자. 마침표 하나 없애기
글을 쓸 때 굳이 마침표를 두 개 쓸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 주로 문장을 옮기거나 삭제할 때 마침표를 누락해서 생기는, 습관이 만든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을 보면서 ‘나는 어떤 맞춤법을 자주 틀리는가’를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위와 같이 사소한 편집상의 오류도 실수 목록에 포함시키고, 결과를 모두 모아 파일로 만들어 보관하면 좋다.
그간 쓴 글을 다시 보면 평소 내가 어떤 어휘를 자주 쓰는지, 문장을 쓸 때 어떤 방식을 활용하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멋진 교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글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책임감. 오래 전에 쓴 글을 다시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스스로도 부끄러워 보기 어려운 것을 다른 이에게 보라고 내던질 수는 없다. 그 독자가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그렇다. 퇴고하는 습관을 들이면 강점도, 부족한 점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토대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길 바란다.
저번 겨울, 정말 춥데.
올해는 더 춥대.
‘데’와 ‘대’를 구분하려면 주어를 확인하세요. 위 예시에서 ‘춥다’의 주어가 말하는 사람 자신이라면 ‘데’를 쓰면 됩니다. 여기서 ‘데’는 ‘더라’가 굳어진 것으로, 이전 경험을 떠올려서 전달할 때 쓰는 말입니다.
너무 춥더라.
= 춥데 주어: 말하는 사람
그렇다면 ‘춥대’의 주어는 누구일까요? 앞의 사례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춥다’만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대’는 ‘다고 해’의 준말이니 주어는 ‘춥다고 말한 사람’이 됩니다.
더 춥다고 해.
= 춥대 주어: 말하는 사람이 아님
‘데’와 ‘대’의 혼동을 줄이고 싶다면 입말과 글말을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글말에서는 ‘춥다고 해’를 줄여서 ‘춥대’로 쓸 일이 거의 없거든요. ‘춥대’는 입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문자 메신저 등에서 주로 쓰입니다. 지금 하는 말이 줄임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두면 맞춤법을 지키는 것이 더 쉬워진다는 말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까요? 좀 더 복잡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벌써 추운데? 날씨가 도대체 왜 이런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 짝을 이루는 ‘-ㄴ데’와 ‘-ㄴ대’가 한 묶음이라는 점이에요. 어미 중에는 이렇게 ‘ㄴ’과 같은 자음이 다른 것과 합쳐져서 한 묶음을 이루는 것이 생각보다 많아요. ‘공부할까’를 생각해 보세요. 기본형은 ‘공부하다’겠죠? 그러면 ‘공부하-+-ㄹ까’로 나눌 수 있어요. 그러면 ‘-ㄹ까’가 한 묶음으로 하나의 어미가 되는 거예요. 사실 여기에는 한국어의 역사가 관련되어 있어요. 이전에는 각각으로 쓰이던 것이 오랫동안 함께 쓰이다가 한 묶음으로 변화한 것이죠.
‘-데’, ‘-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ㄴ대’는 의문에 약간 못마땅한 느낌을 더한 종결 어미입니다. 그리고 ‘-데’는 감탄을 표현하면서 청자의 반응을 기다리는 종결 어미입니다. 이들은 앞의 ‘ㄴ’과 함께 하나의 어미를 이룹니다.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런 단어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추후에 나올 ‘-걸’, ‘-게’ 역시 ‘ㄹ’과 한 덩어리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들: 엄마, 저 게임 딱 1시간만 할게요.
엄마: 안 돼.
아들: 30분만!
엄마: 안 된다고 했어.
‘돼’와 ‘된다’는 같은 말이죠. 모두 기본형이 ‘되다’니까요. 이렇듯 기본형을 알면 맞춤법이 쉬워집니다. ‘돼’는 ‘되어’의 준말이고, ‘된다’는 ‘되다’에 ‘지금 그렇다’는 의미의 ‘-ㄴ(는)’을 넣은 거예요. 우리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본형의 의미 부분이 절대 혼자 쓰일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되-’는 반드시 뒤에 ‘-어’와 같은 연결 어미가 필요해요. 좀 더 쉬운 ‘먹다’로 예를 들어 볼까요?
지금 안 먹어.
먹+어 만약 ‘어’가 없다면 ‘지금 먹’이 되므로 문장이 유효하지 않음
‘되다’를 위 예의 짝으로 생각하면 이 경우에는 ‘되’가 옳은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안 돼.
되+어 → ‘돼’로 줄어듦
되(×)
‘되’와 ‘돼’는 발음이 거의 같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워요. 그러니 ‘-어’가 없으면 옳은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아요. ‘되어’의 준말이 아니라면 ‘돼’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요.
안 된다.
되+ㄴ+다 ‘되어’가 아니므로 ‘다’로 쓸 수 없음
앞서 맞춤법을 제대로 익히려면 연결되는 단어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되다’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단어들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죠?
‘ㅚ다’의 사용 예시
괴다: 아랫돌 빼어 윗돌 괘(괴어).
되뇌다: 자꾸 되(되뇌어).
뵈다: 선생님을 찾아 봬(뵈어).
쇠다: 설을 쇄(쇠어).
죄다: 마음을 좨(죄어).
그 일이 안 급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안’과 ‘않’을 구분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사실 이 둘의 구분은 어렵지 않습니다. ‘않’의 ‘ㅎ’에 주목하면 돼요. ‘않’에서 ‘ㅎ’은 ‘하다’에서 온 거예요. ‘안 하다’라는 말을 많이 쓰다 보니 줄여서 ‘않다’가 된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점, ‘하다’는 절대 ‘하-’만으로 독립해 쓰일 수 없어요. 국어의 모든 기본형이 그렇지요. 그러니 기본형 ‘않다’에서 ‘않’만 띄어쓰기 앞에 놓이는 일은 일어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않 했어요.
이는 ‘안 하 했어요’와 같으므로 우리말 질서에 어긋남
날이 갈수록 ‘안’과 ‘않’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요. 그 이유는 둘의 발음이 [안]으로 같기 때문이에요. 우리말 받침에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ㅇ’ 7개의 소리만 쓰입니다. 그러니 ‘안’이든 ‘않’이든 모두 [안]으로 소리날 수밖에요. ‘안’과 ‘않’ 뿐만 아니라 ‘만’과 ‘많’, ‘끈’과 ‘끊’ 역시 발음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기본형입니다. 기본형의 발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둘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안’은 ‘안’ 또는 ‘아니’로만 쓰이니 기본형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그러나 ‘않’은 기본형을 찾아야만 합니다. ‘않’은 형태가 50가지 이상으로 변하거든요.
않고, 않아서, 않으니, 않으므로, 않으니까, 않으면, 않더라도, 않을수록, 않으니까, 않는다, 않거든, 않아 등의 기본형 = 않다[안타]
기본형 ‘않다’의 발음은 [안타]입니다. 본래 기본형은 변하지 않은 부분인 ‘않-’ 뒤에 ‘-다’를 붙이는 거잖아요. ‘않다’의 경우 기본형으로 바꾸니 ‘-다’의 발음이 [타]가 됐습니다. ‘ㅎ’이 있기 때문이에요. ‘ㅎ+ㄷ’은 ‘ㅌ’이니까요.
여기서 발음과 표기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표기가 먼저일까요? 발음이 먼저일까요? 당연히 발음이 먼저입니다. 발음으로 단어의 원래 모습을 찾아 표기에 반영하는 것이니까요.
[만타](발음) → 많다(표기)
‘타’라는 발음 덕분에 이 단어에 ‘ㅎ’ 받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ㅎ’을 받침으로 두는 모든 기본형이 그렇습니다. 기본형이니 ‘다’로 끝나야 하는데 [타]로 발음된다면 받침에 ‘ㅎ’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단어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직접 발음해 보면서 왜 ‘ㅎ’을 쓰는지 그 원리를 깨우쳐 보세요. 특히 많이 틀리는 어려운 맞춤법이니까요.
여기서 새로운 질문, ‘않’과 같이 ‘ㄶ’ 받침을 가진 단어에는 동사, 형용사만 있는 걸까요?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면, 스스로를 충분히 칭찬해 주세요.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말에서 ‘ㄶ’이나 ‘ㅀ’ 받침을 쓰는 것은 동사와 형용사뿐입니다. 때문에 ‘않’, ‘끓’ 등의 단어가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ㅎ’ 받침을 가진 기본형 단어
놓다[노타], 낳다[나타], 닿다[다타], 땋다[따타], 쌓다[싸타],
찧다[찌타], 좋다[조타], 많다[만타], 않다[안타], 끊다[끈타],
곯다[골타], 끓다[끌타], 닳다[달타], 뚫다[뚤타], 싫다[실타]
혼례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어떤 일을 겪었다고 표현할 때 ‘일을 치루다’라고 잘못 표현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명쾌하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말에 ‘치루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치르다’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알아 두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거예요.
요금을 치르다. 계산하다
무슨 일을 치르다. 겪어 내다
특히 자주 쓰이는 용법은 이 두 가지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더 자주, 더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곤 합니다. 많이 쓰인다면 더욱 자주 확인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은 걸까요? 비밀은 ‘치르다’의 ‘으’에 있습니다. 아래의 예를 보세요.
장례를 치러, 홍역을 치러, 손님을 치러, 곤욕을 치러,
대가를 치러, 경기를 치러 등
기본형은 ‘치르다’이지만 위 예시에는 ‘르’, 즉 ‘ㅡ’가 없죠? 이렇게 ‘ㅡ’가 탈락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치르다’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쓰다 → 써
크다 → 커
모으다 → 모아
‘ㅡ’가 탈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그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국어에서 ‘ㅡ’가 가장 약한 모음이라는 사실이 약간의 힌트가 될 뿐이죠. ‘ㅡ’가 탈락됐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기본형의 발음에 있습니다. 기본형 ‘ㅡ다’로 끝나는 모든 말들은 ‘쓰다 → 써’처럼 ‘ㅡ’가 탈락합니다. 이를 ‘으 탈락 규칙’이라고 묶어 부릅니다. 여기서 잠깐, ‘-르다’의 모양을 가진 기본형 중에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들이 있어요. 아래 예를 비교해 보세요.
① 치르다, 따르다 → 치러, 따라 으 탈락 규칙
② 다르다, 모르다 → 달라, 몰라 르 불규칙
①의 예시에서는 ‘ㅡ’만 탈락했는데 ②는 조금 다릅니다. ‘ㅡ’가 없어진 것은 같은데, ‘ㄹ’이 하나 더 생겼다는 점에서 다르죠? 정확히는 ‘르’가 ‘ㄹㄹ’로 바뀌었습니다. 규칙적이지 않은 변화입니다. 이렇게 ‘르’의 움직임은 불규칙하다고 해서 ‘르 불규칙’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치르다’로 돌아가 볼까요? ‘치르다’는 ‘ㅡ’를 규칙적으로 탈락시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탈락된 ‘으’를 발음이 비슷한 ‘우’라고 잘못 생각해 ‘치루다’와 같은 잘못된 표기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말 기본형의 모음 ‘으’는 규칙적으로 탈락되니까 이것을 복원해서 기본형을 만들어야겠다고요.
‘ㅡ’를 가진 기본형 단어
‘ㅡ’ 탈락 규칙
담그다, 잠그다, 다그다, 따르다, 치르다, 다다르다, 모으다, 크다, 트다, 움트다, 부르트다, 아프다, 슬프다, 고프다, 어설프다, 애달프다, 헤프다, 서글프다, 가냘프다, 고달프다, 구슬프다
★ 주의: ‘르 불규칙’과 구분하기 (80페이지 참조)
불 좀 켜라! 안 되면 손전등이라도 켜든지.
불을 붙이거나 일으킬 때, 전자제품을 작동시킬 때 우리는 ‘켜다’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