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 프롤로그 |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한계를
넓히고 싶은 당신에게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디서 온 것인지조차 모르는데.”
답이 없는 시대를 산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답을 찾지 못하거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문제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서 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있다.
시작과 본질 그리고 근원을 모르는 사람은 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다. 이제 비밀은 없다. 모두에게 같은 텍스트가 주어지고 있어서다. 그런데 같은 텍스트를 읽지만, 모두의 변화는 제각각이다. 이유는 텍스트를 바라보는 ‘어떤 시선으로 읽느냐?’, ‘무엇을 찾아낼 것인가?’, ‘찾아낸 것을 삶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이 세 개의 관점과 질문의 수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좀 더 높은 수준의 소유자에게는 우주처럼 끝나지 않는 지성의 세계가 열리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2008년부터 그 문제에 대한 사색을 시작했고, 1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김종원의 세계철학전집》으로 내가 찾은 답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집의 핵심 메시지를 간단하게 압축하면 이렇다.
1. 철학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 좀 더 좋은 답도 있고, 좀 더 깊고 풍성한 답도 있다. 전집을 통해서 독자에게 읽고, 사색하며, 실천까지 옮기는 일상의 기쁨을 선물한다.
2. 전집 30권의 큰 구성은 이렇게 진행한다.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30개의 키워드를 먼저 정한 후, 거기에 가장 적합한 30명의 철학자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3. 앞으로 책에서 소개할 주인공은 각자 예술가의 상상력, 학문적인 성과, 현실적인 경험과 지혜 그리고 탁월한 창조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4. 일상의 작은 고민에서 시작해 각종 비즈니스와 삶의 현장 곳곳에서 확실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농밀하게 추출해서 소개할 예정이며,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후, 내면에 각인할 수 있도록 필사 문장을 제공할 것이다. 이로써 매일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당신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2권의 주인공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열정적인 천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언어’이다. 나이 서른, 마흔이 지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남긴 수많은 글을 통해, 그리고 일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런 위대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살아갈 세상의 한계를 결정한다.” 누군가에게는 이 사실이 축복이겠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은 지옥과도 같은 저주다.
나는 당신에게 축복을 전하기 위해 사명감을 품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미치도록 치열하게 사색하며, 섬세하게 읽고, 썼으니, 이제 당신은 그저 뜨거운 마음으로 읽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의 가치관이나
선악의 기준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직접 질문하는 것보다
더 간단하고 정확한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며
자주 미소 짓고, 웃는지
눈여겨보는 것이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당신은 무엇을 보며 자주 웃는가?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가? 결국 자주 바라보며, 눈에 담는 그것들이 내 생각과 일상을 장악한다.
가끔 의도적으로 SNS에 자랑으로 읽힐 수 있는 글을 쓰고, 반응을 관찰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로 반응하는지 지켜보기 위해서다. 그럴 때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가끔 내게 좋은 소식이 생겨서 자랑하는 방식의 글을 써서 올리면, 항상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정성스럽게 써주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참 고맙게도 늘 잊지 않고, 마음을 표시한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더욱 섬세하게 기억하려고 애쓴다. 왜일까? 그들이 나를 응원해 줘서? 전혀 그렇지 않다. 타인의 기쁜 소식에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사람들의 미래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밝아서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어둠이 그친 후 떠오른 아침 햇살과도 같다. 그들이 응원해 줘서 그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힘과 희망을 얻어가기 위해서 그들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물론 나 역시 누군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나 신간을 출시할 때, 좋은 집을 구매했거나 원하는 목적을 이뤘을 때, 늘 가서 좋은 마음을 전하려고 애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서 그렇게 한다.
“늘 타인의 기쁜 소식에
좋은 마음을 전하는 사람을
더 많이 곁에 두자.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자.
그럼 나도 마찬가지로
좋은 소식이 끊이지 않는
멋진 인생을 살게 된다.”
생활이 자꾸만 변화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물론 그런 과정과 결과는
습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눈여겨보는 것이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우리의 생활은 마치 바퀴처럼 계속 돌아가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그들의 습관이 다른 것처럼 삶의 모습도 매우 다르다.
원인은 역시 언어에 있다. 그냥 소리만 치면 꿈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제품이나 콘텐츠를 제작할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생각한 바를 현실로 부를 수 있다. 즉,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상대방이 허공에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 수 있다.
만일 늘 자신의 결과물이 불만족스럽거나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표현력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또 좀 더 선명한 표현력을 통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부르는 태도를 가지려면, 다음 7가지 사항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원하는 인생을 한 문장으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라.
2. 뭐든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다면, 잘 모르는 것이다.
3. 말줄임표를 쓰지 말고, 글을 끝까지 마무리하라.
4. 24시간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허공에 그려라.
5. 가난의 언어와 부의 언어가 무엇이 다른지 사색해 보라.
6. 늘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계산을 시작하라.
7. 보자마자 힘이 되는 말을 자주 낭독하고, 필사하라.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언어가 대물림 되는 것이고, 무지한 최악의 나날이 대물림 되는 게 아니라, 무지한 최악의 언어가 대물림 되는 것이다. 뭔가 괜히 잘 안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자기 자신과 소중한 가족에게 안 되는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더 좋은 인생을 원한다면,
그 인생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라.
좀 더 선명하게 표현할수록
원하는 인생을 살 가능성도 높아진다.”
가파르고 높은 산을 올라가려면,
무거운 배낭은 산기슭에 놔두고,
가볍게 출발해야 한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부모가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 같은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모두의 짐작과는 달랐다. 그는 유산으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재산 전부를 주변 예술가와 형제들에게 다 줬다. 그 이유는, 위에 소개한 그가 했던 3줄의 말이 대신한다. 그는 당시 자기만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상태였고, 그런 자신에게 막대한 유산은 그저 무거운 짐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직장에 다니면서 책을 쓰고, 동시에 강연도 병행할 때는,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넉넉해서 정기적으로 골프를 즐기기 위해 필드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업작가의 삶을 선택하면서부터 초기에는 매우 힘들었지만, 분명한 철학을 바탕으로 열심히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직장에 다닐 때와 비교하면, 여전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다. 더구나 책에서 나오는 인세는 월급처럼 안정적이지 않아서 삶을 예상하기 어렵다. 그런 상태에서는 누구나 이런 불안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다시 예전에 가졌던 것을 손에 쥐어야 할까?’, ‘내가 굳이 힘든 길을 걷는 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또 버리지도 못할 때, 인간은 자기 삶의 이유를 잃고, 방황만 거듭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 순간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 비트겐슈타인처럼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면, 나중에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인생 자체가 버려지는, 상상도 못할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상태가 되면, 이런 고민에 빠져 고통 속에서 아우성치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고 생각했는데,
중심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바보처럼 주변만 떠돌았구나.”
불쾌함도 세상이 주는 선물이니,
걱정마저도 고맙게 받아들여라.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앞선 내용에서 더 이어가 보자. 그럼 이렇게 살다가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의 인생은 지금 어떤가? 평생 스스로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삶만 부러워하며 살다가, 문득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가?”라는 뜨거운 열기 가득한 말에 우리의 생은 다시 바짝 마른다. 그리고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며, 그것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아무리 던져도 인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질문 자체가 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것을 버렸다. 여기에서 ‘포기’가 아닌 ‘버렸다’라는 표현을 선택한 이유는, ‘하고 싶지만 억지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원하는 삶을 위해 우선순위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버려서’다. 포기가 아닌 선택이었기에 나는 내 삶에 만족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언어 표현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만약 내가 ‘나는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라고 생각하면, ‘포기한 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잘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고민에 빠져 사소한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불쾌함도 세상이 주는 선물이니, 걱정마저도 고맙게 받아들여라.”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에서 배울 수 있다. 인생은 결국 선택이며, 그 안에는 언어가 가득하다. 그래서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인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
반대로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서
그 삶의 원칙을 추구하며 살아보라.
당장 당신의 내일이 달라질 것이다.”
자아 성찰은
강요나 억지가 아닌,
내 삶의 새로운
한 부분이어야 한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누가 어른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어른이란, 사용하는 말이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어를 골라서 사용한다.” 그럼 단어를 골라서 사용한다는 말은 뭘 의미하는 걸까? ‘자아 성찰’이 24시간 내내 이루어진다는 증거다. 그들은 억지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24시간 내내 자아 성찰을 반복한다. 어떻게? 언어 수준이 높은 지성인들은 언제나 곁에서 방법을 찾는다. 그래야 쉽게 할 수 있어서 그렇다. 그들이 찾은 답은 바로 ‘경청’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세상을 제대로 배우고, 인식하려면, 경청이 중요하다. 늘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려면, 제대로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청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제대로 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들어보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안다.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듣는 행위 자체가 곧 자아 성찰의 한 부분이라서 그렇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끝없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런가?”, “그의 말에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하나?”, “앞으로 내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제대로 경청하며, 자아 성찰을 통해 단어를 골라서 쓰는 어른의 삶을 시작하고 싶다면, 상대를 마주하는 시작부터 달라야 한다. 상대가 내 공간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저 사람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자.’라는 결심을 하고,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박하려는 마음을 잠재우지 못해서, 결국 비난과 분노로, 주어진 시간을 허무하게 소모할 가능성이 높다.
“방금 태어난 아이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을 비우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라.
그럼 그 대화의 끝에서
시작할 땐 짐작도 못했던
수많은 가르침을 얻게 된다.”
들어야만 아는 사람은 들어도 모른다.
배워야만 아는 사람은 배워도 모른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하나도 모르고 살게 된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섭섭한 마음은 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기대해서 나온 개인적인 사정이다. 섭섭하다고 느끼는 건 자유지만, 그걸 상대에게 굳이 말해서 해소하려고 한다면, 그건 미련한 선택이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당신은 절대로 짐작도 못할 부분에서 당신에게 섭섭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먼저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면, 바로 상대방도 “야, 나는 뭐 섭섭한 게 없는 줄 아냐?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라고 시작해서 ‘섭섭한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지금도 95% 정도의 사람들이 이 지겨운 섭섭한 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늪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언어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1개를 보면 100개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1개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을 나누기 힘들다. 자신이 보는 1개가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나머지 99개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더 많은 것을 고려하지 못하느냐?”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결국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처럼 1개를 보면 저절로 100개를 짐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연을 맺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압축하면, 이런 한마디가 나온다.
“사람은 결국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언어 수준이 같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진실로 소통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나?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1개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눈에 보이는 이 글만 읽고, “그렇구나.” 하고 넘긴다. 하지만 1개를 통해서 수많은 나머지 감정과 장면을 추측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 이런 방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의 진보를 이어나간다.
-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구나.
-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 마음이네.
-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며 기다리네.
- 따스한 겨울 풍경이 그려진다.
- 어른의 깊은 마음이 느껴져.
- 마음을 전부 빼앗기진 않았구나.
- 설령 오지 않아도 흔들리진 않을 것 같아.
언어 수준이 높은 사람은 한마디도 쉽게 흘리거나 스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방식으로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분리해서, 지성의 창고에 담는다. 누구든 연습으로 가능한 일이니, 위에 소개한 생각의 진보 과정을 필사하며, 잘 생각해 보라.
“언어 수준이 높아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 수준에 맞는 사람과 환경이
마치 기적처럼 주어진다.
환경을 불평하지 말고,
낮은 언어 수준을 높이는 데 집중하라.”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에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은
철학자가 가진 최고의 기술 중 하나이다.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과연 이게 무슨 말일까? 내가 쓴 글을 천천히 읽다 보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에 자신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머무는 직장이나 모임 혹은 단체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에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쓰레기 같은 사람이네!” 좋다. 그럼 당분간은 분노한 마음이 풀리고, 무엇보다 통쾌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좋은 감정은 절대로 오래 가지 않고, 사라진다. 사라진 후에는 처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