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마술처럼
2장 비워 둔 방
3장 무언가 섞여 온 게 아닐까
4장 인간이 아니다
5장 절대로 갈 수 없는 곳
6장 내가 꾸는 꿈에 머물러 줘
작가의 말
프로듀서의 말
“웰컴 투 서울! 환영합니다!”
캡슐 커버가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2호 캡슐의 탑승객은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누운 채로 멍하니 지시를 기다리는 그에게 스태프가 다가왔다.
“혹시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가요?”
“어…… 네. 괜찮아요.”
탑승객들은 간혹 멀미나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청년은 다소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 것 외에 별달리 문제가 없어 보였다.
“좋습니다. 이제 일어나시고요, 두고 가시는 물건 없도록 꼼꼼히 확인 부탁드립니다.”
청년은 안내에 따라 시트에서 내려와 수하물 수납함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바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시면 입국 심사장이 나올 거예요. 거기서 입국 수속 밟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테이션의 풍경이 어쩐지 생경했다. 좁고 어두운 데 갇혀 있다가 훤히 트인 곳에 나와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공기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는 화살표를 따라가는 대신 B구역 뒤편에 마련된 대기석으로 이동했다. 일행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대기석에는 온통 모르는 얼굴들뿐이었다. 다들 어디에 있지? 그는 빈자리에 앉아 캐리어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쨌든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때 누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익스큐즈 미. 한국인이시죠?”
고개를 드니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스태프가 서 있었다.
“실례지만 잠시 사무실로 같이 가 주시겠어요?”
“저요? 왜요?”
“탑승 정보에 관해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요.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면 됩니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스태프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눈치였다. 청년은 못 미더워하면서도 그를 뒤따랐다. 스태프는 청년을 B구역 관리자 사무실로 데려갔다.
사무실은 아담했다. 통유리창으로 B구역의 캡슐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각 캡슐의 CCTV 영상이 분할되어 비쳤다. 직원은 한 명뿐으로, 필시 그가 관리자일 터였다.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던 관리자가 청년을 향해 의자를 빙글 돌렸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B구역 매니저 홍순천입니다.”
“무슨 일이죠?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뇨, 아닙니다. 저희 쪽 전산에 사소한 오류가 발생한 것 같아서요. 워낙에 컴퓨터가 오래돼서 가끔 말도 안 되는 말썽이 생기곤 합니다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남희수예요.”
“예, 남희수 씨. 간단히 말해 현재 남희수 씨의 탑승 정보가 누락된 상황입니다. 화면이 먹통이 된 적은 있어도 내용이 사라진 건 처음이라 솔직히 저도 당황스럽네요. 무임승차하셨을 리도 없는데 말이죠.”
그가 곧바로 희수를 안심시켰다.
“하하, 농담입니다.”
“오래 걸리나요? 밖에서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네, 최대한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빈칸만 다시 채우면 돼요. 먼저 탑승권을 좀 보여 주시겠어요?”
희수가 휴대폰 전원을 켜서 도즈 앱을 열었다. 그런데 화면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네트워크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사진 앨범에 미리 저장해 놓은 탑승권 이미지가 있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열어 매니저에게 보여 주었다.
“뉴질랜드 타우랑가에 다녀오셨네요. 성명은 아까 말씀해 주셨고, 주민번호가…… 어?”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도 타이핑을 멈췄다.
“남희수……?”
“네?”
“남희수 씨라고 하셨죠?”
“네.”
“죄송한데 탑승권 말고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여권이나 다른 증명서도 상관없어요.”
매니저는 희수에게서 여권을 건네받더니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한 번씩 시선을 돌려 희수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희수는 어안이 벙벙해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사소한 오류 이상의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때쯤 매니저가 돌아왔다. 그는 건장한 체격의 보안검색요원 두 명과 함께였다.
“저기, 선생님께선 여기 이분들 따라가시면 됩니다.”
“뭐가 잘못됐나요? 어디 가는데요?”
희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매니저는 보안검색요원들에게 손짓했다. 두 남자는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희수를 데려갔다. 이 과정이 강압적이진 않았으나 희수로서는 거부할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관리자 사무실보다 더 협소한, 창문조차 없어서 어쩐지 취조실처럼 느껴지는 소회의실에 그는 다시 얼마간 방치되었다. 식구들에게 연락하려 했으나 여전히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직책이 높아 보이는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희수의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희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남희수 씨. 본인 맞습니까?”
“아까 탑승권이랑 여권 보여드렸어요. 왜 이런 데 가두시는 거죠? 탑승 정보가 누락돼서 그것만 전산에 입력하면 된다고 들었는데요. 전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그녀가 어떻게 설명할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사고가 있었습니다.”
* * *
여행은 우격다짐으로 추진됐다.
처음에 아버지가 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 희수와 태하는 그것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방학이고 새해가 밝을 텐데 어디 경치 좋은 데서 며칠 지내며 식구들 간에 단합을 도모하자는 얘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진지했고, 그 진지함은 결국 형제에게도 전해졌다.
“진짜로 가요?”
“어디 갈지는 너희끼리 정해라.”
기나긴 토의를 거쳐 형제는 여행지를 결정했다. 곧 방학이 됐고 새해가 밝아 세 식구는 계획한 대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뉴질랜드의 항구도시인 타우랑가였다.
남반구는 여름이었다. 그들은 숙소에 짐을 대충 풀어 놓고 해변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백사장에서 몇 걸음 걷다 말고 그늘로 피신했고, 희수와 태하는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석양이 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의 일정도 첫째 날과 대체로 비슷해 그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이국의 풍광과 계절을 만끽했다. 저녁 무렵에 아버지가 형제를 불렀다.
“슬슬 식사하러 가자.”
형제는 숙소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그들은 곧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웬 한국인 여자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알록달록한 원피스 차림의 아주머니로, 분위기로 짐작하건대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모르긴 몰라도 초면은 절대 아닌 듯했다. 게다가 아주머니 옆에는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꼭 붙어 있어 얼핏 보기에 셋은 마치 한 식구 같았다.
태하가 괜스레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구지?”
“글쎄.”
희수가 엄지손가락을 잘근거렸다.
머뭇거리는 형제를 아버지가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하고들 있니?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 이분은 그러니까…… 아버지 친구야.”
“여자 친구요?”
희수가 묻자 아버지가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뭐,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군.”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장남인 남희수라고 하고요, 이쪽은 둘째인 남태하입니다. 저는 올해 고3 올라가고, 태하는 중3 올라가요.”
희수가 꾸벅 인사하자 태하도 얼결에 같이 허리를 굽혔다. 아주머니는 생글생글 웃는 인상이었다.
“반가워요. 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들들이 아주 듬직하네. 우리 아이는 손서림이라 하고, 이번에 초등학교 4학년이 돼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장소를 옮기지.”
아버지가 어색하게 끼어들었다. 얼굴이 벌그레한 게 볕을 오래 쬐어서는 아닐 터였다.
그들은 호텔 인근의 중식당으로 이동했다. 요리를 앞에 두고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로 희수가 묻고 아주머니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아주머니는 경찰인데, 무슨 사기 사건의 수사와 관련해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됐다고 했다. 올해 마흔세 살이니까 아버지와는 일곱 살 차이였다. 아버지의 어떤 면을 보고 호감을 느꼈는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원래는 서울에서 만나서 함께 오기로 했다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서 하루 늦게 합류했다고 했다.
“여기 너무 좋아. 햇볕이 따뜻해.”
“지금은 저녁이라 선선한데 낮에는 엄청 더워질 거야.”
“그래도 난 좋아!”
딸인 서림은 아주머니를 닮아 생김새가 예쁘장하고 체구가 작은 편으로,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생기발랄한 아이였다. 아버지와는 이미 만난 적이 있어서 그렇다 쳐도 초면인 희수와 태하 형제에게까지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형제는 자연히 깨달았다. 애초에 이번 여행은 아버지가 여자 친구를 소개할 목적으로 계획했던 것임을, 단합이란 단지 세 식구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었음을 말이다.
그런데 사실 아버지의 계획은 그 이상이었다. 내내 뻣뻣하게 굴던 아버지가 식사를 마칠 즈음 부자연스러운 헛기침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너희들만 괜찮으면 오는 봄쯤에 양쪽 살림을 합칠까 하는데.”
둥그런 테이블이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당황하여 빨개진 얼굴을 보건대 심지어 아주머니와도 조율이 안 된 이야기인 듯했다.
“재혼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희수가 신중히 말을 골랐다.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할까 한다는 말이지.”
그게 뭐가 어떻게 다른지 각자 뉘앙스를 곱씹으며 갸웃거리는 사이 아버지가 슬그머니 계산대로 도망쳤다.
서림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저만치 앞서가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조잘거렸고, 나머지 셋은 한참 뒤에서 나란히 밤거리를 걸었다.
희수가 물었다.
“아주머니도 재혼 생각 있으세요?”
“글쎄,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일은 식구들 의견도 중요하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생각 있으신 거죠?”
아주머니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응. 그래.”
“그럼 됐네요. 가장 중요한 건 식구들이 아니라 두 분의 의견이니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러한 전개에 대해 모두가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사실 호텔 로비에서부터 태하는 줄곧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오붓한 가족 여행에 불청객이 끼어들었으니, 또한 그 불청객이 아버지의 여자 친구이며 급기야 재혼 얘기까지 나왔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꿈만 같던 여행이 대번에 지리멸렬한 악몽이 돼 버린 셈이었다.
태하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속없이 비위나 맞춰 주는 형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분 나쁜 건 태하 자신도 아주머니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아주머니가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수야, 태하야. 오늘 뜻하지 않게 진도가 한 번에 너무 많이 나갔는데, 당장은 우리끼리 서로 알아가는 게 우선인 것 같아. 게다가 모처럼 여행도 왔으니 골치 아픈 생각은 나중으로 미뤄 두고 여기서는 그냥 즐거운 추억 만드는 데만 집중하자. 아이스크림 어때?”
“좋아요.”
희수가 대답했다. 아주머니가 이번엔 태하에게 물었다.
“태하도 같이 갈래? 아니면 사다 줄까?”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태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저는 됐어요.”
그는 형에게 키를 받아 혼자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 날에도 태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겉돌았다. 여럿이 함께하는 일정에 건성으로 참여하거나 아예 불참했다. 물놀이는 시들해졌고 식사 자리는 가시방석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더디 흘렀다.
반면 나머지 식구들은 금세 가까워졌다. 형은 아주머니와 대홧거리가 끊이지 않았고, 꼬맹이는 아버지와 형 곁에서 시종일관 까불었다.
“오빠도 같이 가자. 응?”
서림은 태하에게도 몇 번이나 손길을 내밀었다. 식구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태하의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번번이 거부했다. 억지로 비위를 맞추느니 차라리 외톨이가 되기를 택했다.
어느새 여행 마지막 밤이 됐다. 희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태하를 일으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자.”
“형이나 갔다 와. 난 쉴래.”
“네가 솔깃할 얘기가 있는데 오늘이 아니면 안 할 거야. 그래도 싫다면 강요는 안 할게.”
태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뭔데.”
호텔 앞 망가누이 해변엔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다. 희수와 태하는 데크를 따라 걷다가 한적한 곳에서 멈추었다. 하늘엔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파도는 잔잔했다.
“나오길 잘했지?”
“할 말이 뭐야?”
“먼저, 아주머니랑 서림이한테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 나도 그렇지만 두 사람도 많이 노력하고 있어.”
“형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태하가 섭섭함을 토로했다.
“아버지 진짜 재혼하시게 놔둘 거야?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았던 터라 마음의 준비는 했었지만 그래도 식구들은 상심이 컸다.
희수가 말했다.
“알아.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엄마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엄마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고.”
“당연히 배신이지! 그 아주머니가 엄마 자리를 차지하는 건데.”
“그게 차지하겠다고 차지해져? 우리 엄마가 엄마가 아니게 되냐고. 아주머니도 우리 엄마를 대신할 생각 없으셔. 그냥 우리랑 한 식구가 되는 것뿐이야. 한집에서 같이 사는 거 말이야. 그 이상으로 의미 부여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
“아무리 그래도…….”
“내 얘기 들어 봐.”
희수가 태하의 말을 잘랐다.
“솔깃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나 올해 수능 보잖아. 지금 성적만 유지해도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는 덴 문제 없어. 그런데 그 학교가 집에서 다니기엔 꽤 멀 거란 말이지. 그럼 어떻게 될까?”
“기숙사에 가겠지.”
“자취할 거야. 그러면 그때 너도 데려가 줄게.”
헉, 태하가 숨을 들이켰다.
“나도?”
“둘이 따로 살자. 그러니까 새 식구들이랑 어색하고 껄끄러워도 1년만 참고 지내. 엄마도 네가 항상 웃고 살길 바라시지, 멀리 여행 와서까지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 마음이 안 좋으실걸? 그러니까 고민은 이걸로 끝.”
문득 태하는 어쩐지 엄마가 형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하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희수는 엄마를 빼닮았다.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성격도 그랬다. 그런 형이 괜찮다고 하니 정말로 괜찮을지 모른다.
태하가 곧 마음을 정했다.
“대신에 방은 따로 쓸 거야.”
* * *
아침부터 기운차게 깡충거리던 서림은 로비에서 태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간 먼저 다가갈 때마다 철저히 무시당한 학습의 결과로 이제는 거리를 두고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태하가 먼저 인사했다.
“굿모닝.”
어색하고 무뚝뚝한 인사를 받은 서림은 마치 말하는 고릴라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태하가 다가가자 서림은 옴씰옴씰 뒷걸음쳐서는 그대로 엄마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이거 네 거지?”
태하가 내민 손에는 낯익은 물건이 있었다. 전날 잃어버린 너구리 인형이었다.
“어?”
“이거 네 거 맞지? 엘리베이터 앞에 떨어져 있더라.”
“썬구리야.”
“썬구리가 얘 이름이야?”
“응!”
서림이 신나서 설명했다. 〈스파이 애니멀〉이라는 만화에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 인형으로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썬구리라고 했다. 너구리 캐릭터에 얽힌 사연을 한참 들려주던 서림은 대뜸 감사를 표했다.
“찾아 줘서 고마워, 오빠.”
이 일을 계기로 서림은 태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 태하도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동생에게 그가 지닌 품성 이상의 상냥함을 발휘하려 애썼다. 그 결과 오후 무렵엔 둘이서 대화하는 데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부모들도 흡족해했다. 이번 여행에선 아이들끼리 서로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중식당에서의 폭탄 발언 이후로 아무도 재혼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들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가까운 시기에, 어쩌면 정말로 봄이 오기 전에 두 식구가 살림을 합칠지도 모르겠다고.
노을이 질 무렵에 그들은 타우랑가 공항으로 이동했다.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나는 걸 서림이 신기하게 올려다봤다.
“비행기다. 저거 타고 집에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글쎄? 한 여섯 시간쯤?”
태하가 대답했다.
“최소 열한 시간은 걸린대. 그것도 직항일 때 얘기고, 중간에 어디 경유하면 열네다섯 시간쯤 걸려.”
희수가 정정했다. 그도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고 안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럼 점심에 출발하면 새벽에 도착하겠네?”
아주머니도 슬쩍 끼었다.
“예전엔 다들 그렇게 다녔어. 더 옛날엔 배로 가느라 몇 달씩 걸리기도 했고. 엄마가 보기엔 지금이 더 말이 안 돼. 세상이 진짜 좋아졌어.”
그들이 이용하는 것은 항공기가 아니라 차세대 교통수단인 ‘도즈(Doze)’였다. 도즈는 일립시스(EllipSys)사에서 개발한 텔레포트 캡슐이다.
도즈의 이용 요금은 전 세계 어디든 99달러로 동일하다. 전송 시작부터 완료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으며, 탑승 시각이 지정되어 있지 않아 24시간 아무 때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특히 기상 등 각종 요인으로 인한 지연, 연착 및 취소의 부담이 없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도즈는 오랜 시범 운영 기간을 거쳐 3년 전에 처음으로 상용화되었다. 이후 이용객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스테이션도 대거 증설되었다. 이에 따라 지구 전역이 말 그대로 1일 생활권이 되었다. 부산에서 눈을 떠서 뉴욕에서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거닐다가 밤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감상하는 식의 하루짜리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선 하루에 10개국의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인증 영상을 올리는 챌린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도즈는 장거리를 이동할수록, 체류 기간이 짧을수록 더 유용하다. 그러나 워낙에 편의성과 접근성이 탁월해 단거리의 국내 여행에서도 도즈가 다른 교통수단을 점차 대체하는 추세다. 여행은 그 과정까지 전부 포함하는 것이라지만 도즈의 등장 이후로 그것도 옛말이 됐다.
타우랑가 스테이션이 그러하듯 도즈 스테이션은 대개 기존의 공항에 별관으로 부설되어 있다. 그러나 대도시나 유명 관광지에는 도심에 단독으로 설치되어 있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는 두 개 이상 설치되기도 했다. 서울 스테이션은 인천공항 스테이션과 별도로 삼성역 인근의 40층짜리 빌딩에 위치해 있다.
희수와 태하 형제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도즈를 이용했다. 경험이 없는 탑승객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들도 한국을 떠날 적에는 꽤 불안해했었다. 인터넷에서 도즈에 관한 괴담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누구는 전송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겨 기계에 반쯤 파묻힌 상태로 발견됐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곤죽처럼 흐물거리는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했다고도 한다. 캡슐이 닫히기 직전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두 생명체가 동시에 전송된 결과 처참한 몰골의 파리 인간으로 합성되었다는 글도 있었다.
“그 파리 인간이니 뭐니 하는 건 옛날에 나온 영화 얘기야. 다른 것들도 죄다 헛소문이니 신경 쓰지 마라.”
형제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아버지가 일축했다. 애석하게도 그다지 권위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아버지 역시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서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형제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런데 막상 캡슐에 탑승하고부터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캡슐에 각각 탑승한 형제는 스태프가 안내하는 대로 캐리어를 수납함에 넣고 시트에 누웠다. 스태프는 탑승객의 안전벨트를 체결한 뒤 캡슐 바깥에서 커버를 닫았다. 이내 조명이 꺼졌고, 동시에 외부와 차단됐음을 알리는 전자음이 들렸다. 이어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진동도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전송이 시작됐다.
여유는 바로 이때뿐이었다. 기대든 걱정이든 할 수 있었으나 둘 다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암흑 속에서 섬뜩한 망상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그들은 까무룩 잠이 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타우랑가 쪽의 캡슐에 도착한 뒤였다. 커버가 열리자 느껴지는 공기부터 달랐다. 그들은 여름에 와 있었다.
“형도 기절했어?”
“너도?”
희수와 태하는 서로 머쓱하게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잠이 들었었다고 했다.
스테이션에 비치된 팸플릿에 따르면 전송 중에 깜빡 정신을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애초에 ‘도즈’라고 이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전송을 한 차례 경험한 덕에 타우랑가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스테이션에서 그들은 마음이 한결 느긋했다. 적어도 괴담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전송은 두려운 게 아니라 신기한 거였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마술처럼, 어쩌면 죽었다 되살아나는 마법처럼.
희수 일행은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해 출국장에 들어왔다. 푸드 코트에서 배를 채우고 면세점도 구경했더니 시간이 꽤 지체돼 있었다.
“슬슬 갈까? 서울 도착해서 집까지 가는 시간도 생각해야지.”
“돌아가려니 아쉽다.”
“다음에 꼭 다시 오자.”
일요일 밤이라 출국장은 귀국하는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일행은 상대적으로 한산한 E구역으로 갔다. 그들은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앉아 순번을 기다렸다.
각 구역엔 도즈 캡슐이 열두 대씩 비치되어 있고, 캡슐마다 담당 스태프가 배정되어 있었다.
“굿바이! 카 키테 아노!”
스태프들은 캡슐 커버를 닫기 전에 꼭 그렇게 말했다. 이를 지켜본 서림이 신기한 듯 발음을 따라해 보았다.
“뭐라고 하는 거지? 카 키테 아노?”
“여기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쓰는 언어야. 탑승객이 내릴 때는 ‘하에레 마이’라고 하지? 그건 환영한다는 뜻이고 ‘카 키테 아노’는 다시 만나자는 뜻이래.”
희수가 설명했다. 팸플릿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순번이 가까워졌을 무렵 갑자기 태하가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응? 벌써 차례가 됐어?”
“아니, 아직이긴 한데…….”
잠깐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금방 따라갈 테니 먼저 서울에 가 있으라며 태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야, 태하야. 기다려.”
희수가 재빨리 그 뒤를 따라갔다. 다른 식구들을 돌아보며 방금 들은 말을 고스란히 읊었다. 태하 데리고 금방 따라갈 테니 먼저 서울에 가 계시라고.
때마침 전광판에 아버지의 대기 번호가 표시됐다.
“뭐, 데려온다니까 괜찮겠지. 우리는 서울에서 기다립시다. 내가 가서 기다릴 테니 서림이부터 태워 보내요.”
잠시 망설이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캡슐 쪽으로 걸어갔다. 아주머니도 서림도 곧 자기 순번이 되어 캡슐에 탑승했다.
한편 희수에게 덜미를 잡힌 태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난처해했다.
“어디 가는데? 너 또 뭐 잃어버렸지?”
“그냥 배 아파서 화장실 가려는 거야. 나는 느긋하게 볼일 보고 갈 테니까 형은 얼른 다시 돌아가. 형 차례 다 됐겠다.”
“이미 늦었어. 화장실 갔다 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하…….”
뒤통수를 벅벅 긁던 태하는 마지못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실은 기념품 가게에서 인형 하나를 사려 한다고.
“오마귀라는 녀석이야. 까마귀인데 깃털이 오렌지색이라 오마귀야. 썬구리랑은 원래 숙적이었는데 무슨 사건을 계기로 둘도 없는 절친이 됐대.”
“서림이랑 얼마나 붙어 다녔다고 고새 인형 박사가 다 됐네. 〈스파이 애니멀〉 인형도 모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아까 가게에 갔을 때 서림이가 그걸 만지작거리더라고.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그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나중에 후회할 바엔 지금 하나 사 줄까 했지.”
희수는 놀란 눈치였다.
“대견한 생각이긴 한데, 그러니까 나만 빼놓고 치사하게 혼자서 점수 따려고 했다는 거네?”
“형만 뺐다기보다는, 그 뭐냐, 빼도 되지 않을까 했다는 말이지.”
태하가 아버지의 말투를 흉내 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진짜로 배가 아프기도 하고.”
“알았으니까 방귀 그만 뀌고 얼른 갔다 와.”
여동생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산 형제는 다시 대기석으로 갔다. 식구들이 떠난 시간보다 30분가량 지체됐다. 잠시 기다리니 둘의 대기 번호가 거의 동시에 전광판에 떴다.
“이번에도 동시에 도착하겠다. 혹시 또 뭐 잊은 거 없나 잘 생각해 봐. 내 선물이라든지.”
“없어. 아까 뭐라고 했더라? 카 키테 아노!”
형제는 각자 캡슐에 탑승해 시트에 누웠다.
캡슐은 좁고 어둡고 꽉 막혀 있었다. 희수는 자기가 꼭 관에 누워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캡슐은 관으로, 전송은 죽음으로 흔히 비유되곤 했다.
생각은 곧 어머니에 관한 것으로 옮겨 갔다. 어머니와 함께 타우랑가에 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도즈가 없었으니 항공기로 왕복해야 했겠지만. 병약한 어머니가 그걸 견딜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이동하느라 고스란히 하루를 날리는 호사스러운 여행이 됐겠지만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희수는 어머니가 건강하던 시절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기억엔 어쩐지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이 또렷했다. 푸석푸석한 머리칼과 메마른 피부, 갈라진 입술밖에 생각이 안 났다. 그리고 이 말도.
“희수야, 사랑해. 동생 잘 돌봐 줘.”
“그럴게. 나도 사랑해, 엄마.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해.”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을 때 희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평온한 모습이 마치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날 어머니도 어디론가 전송됐다면, 거기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불현듯 그는 오한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지금 한겨울이었지, 희수는 생각했다. 서림이네랑 헤어지기 전에 붕어빵 하나씩 먹자고 할까? 웅웅웅,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는 붕어빵 파는 노점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내려 했다.
한편 태하는 탑승 시트에 누우면서 만반의 각오를 다졌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도즈의 전송이란 캡슐 내부의 물질을 원자 수준으로 해체해 그것을 동기화된 다른 캡슐로 이동시켜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때 육신이 해체됨에 따라 의식 역시 불가피하게 끊어지는데, 일립시스사에서는 이를 두고 잠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엄밀히 따지면 잠드는 것과는 구별해야겠으나 이른바 마케팅적 허용인 셈이었다.
그런데 만약 전송 중에도 의식을 붙들고 있다면? 잠들지 않고 어떻게든 버텨 낸다면?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 미디어에는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는 동안 의식을 잃지 않고 기존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의 증언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것은 환각 상태와 유사하며 자신과 우주가 하나가 되는 황홀한 체험이었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했고, 환상과 실재는 구분되지 않았으며, 일부는 전체이고 전체는 일부였다고 한다. 물론 아무도 그걸 증명할 수 없었다.
이것은 태하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전송 중에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보상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련의 전송 과정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위험이 다분했다. 그럼에도 태하는 깨어 있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의 경험담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려면 직접 겪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잠만 안 자면 되는 것이다.
물론 바로 그 ‘잠만 안 자면 되는’ 부분이 사실은 대단히 어려웠다.
태하가 검색해 보니 탑승객이 의식을 잃는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꼽혔다. 하나는 해체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자연히 의식이 끊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종의 사유로 인해 탑승객을 먼저 잠재우고서 해체 과정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일립시스 측에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어도 탑승객은 자연히 의식을 잃으나 순조로운 전송을 위해 캡슐 내부적으로도 적절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설명한 바 있었다. 기필코 재우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재우겠다는 의지와 그에 저항해 깨어 있겠다는 의지의 대결이었다. 첫 전송 때는 경황이 없었던 탓에 기절했다지만 태하는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로서 연달아 굴욕을 당할 순 없었다.
그는 시트에 눕기 직전에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어금니로 혀도 잘근잘근 씹었다. 속으로 곱셈 구구를 불경처럼 외기도 했다. 칠사이십팔, 칠오삼십오, 칠육사십이, 칠칠…….
이윽고 전송이 시작됐다.
동시에 태하의 의식도 흐릿해졌다.
* * *
“사고라뇨……?”
희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자는 물통에 손을 뻗어 희수 앞에 놓인 유리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마침 갈증이 나던 터라 희수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여자가 신중히 운을 뗐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도즈 캡슐에서 사고가 발생할 확률은 40억 분의 1이에요. 도즈 이전에는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 항공기였어요. 항공기 추락 사고는 대형 참사로 이어지게 마련이라 사전에 철저히 대비했거든요. 그래도 사고를 완전히 막진 못했지요. 원인은 다양했어요. 기체에 결함이 생기거나 조류와 충돌하거나 테러를 당하거나……. 아무튼 그럴 때마다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지요.”
그녀가 안경을 콧등 위로 치켰다.
“바로 이 점에서 도즈는 혁신적입니다. 사고 발생 확률도 지극히 낮거니와, 설령 최악의 경우에도 피해는 오로지 탑승객 개인에 국한되지요. 어쨌거나 캡슐은 1인승이니까요.”
“그래서요?”
“저희 일립시스에선 사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자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연구를 하고 시스템을 개선해도 발생 확률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작동이 발생하는 원인도 아직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과연 오작동이 맞는지조차 불분명한 실정이에요. 이 점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똑똑. 밖에서 누가 여자를 호출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여자가 나가자 희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신호를 확인했다. 아직도 먹통이었다.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도즈 캡슐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어떤 것인지는 희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참담 그 자체였다. 출발지에서 전송한 캡슐이 통째로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다는 얘기다.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여자는 그런 일이 희수의 가족에게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 말하진 않았지만 맥락으로 보건대 그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여자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통화가 조금 길어졌네요.”
“그런 건 됐고요, 40억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는 그 사고가 저희 가족한테 일어났다는 거잖아요. 알려 주세요. 누구예요?”
그녀가 희수를 진정시켰다.
“자, 말씀드릴 테니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시고요. 제가 빙빙 에둘러 말하는 건, 솔직히 저희도 이 일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태하예요? 저랑 같이 출발했는데 왜 도착을 안 했죠? 그리고 다른 식구들은 왜 못 만나게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남희수 씨.”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감입니다만 사고를 당한 건 남희수 씨였어요.”
* *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주위가 환했다. 순간적으로 태하는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어디지? 젠장, 도착했구나……. 속이 메스꺼웠으나 뭔가를 게워 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번에도 잠들어 버렸다는 패배감에 입맛이 썼다.
캡슐 커버가 열리자 서늘한 냉기가 침투했다.
“웰컴 투 서울! 환영합니다!”
스태프의 환영 인사를 들으니 비로소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그가 캡슐에서 나오자 멀리 대기석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와 서림이 오라고 손짓했다. 아버지도 옆에 있었다.
“갑자기 어디 갔다 온 거냐? 도대체 언제 오나 했다.”
“금방 왔잖아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태하가 곁눈으로 서림의 눈치를 살폈다. 선물을 전달할 적당한 타이밍이 있을 터였다. 지금은 아니고.
태하가 서림에게 말했다.
“붕어빵 좋아해? 이따 나가서 붕어빵 사 먹자.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파는 것 봤어.”
“그러면 나는 슈크림. 팥은 이에 껴서 별로야.”
“오케이, 접수.”
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