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PAUL AUSTER
동시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시인, 번역가, 시나리오 작가. 1947년 미국 뉴저지주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도회적 감수성이 풍부한 언어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우연의 미학〉을 담은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해 널리 사랑받아 왔다. 그의 작품들은 사실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해 동시대의 일상, 열망, 좌절, 고독, 강박을 빼어나게 형상화했다고 평가받으며, 전 세계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모턴 도언 제이블상, 펜/포크너상, 메디치 해외 문학상, 아스투리아스 왕자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미국 문예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소설 『브루클린 풍자극』, 『신탁의 밤』, 『환상의 책』, 『동행』, 『공중 곡예사』, 『거대한 괴물』, 『우연의 음악』, 『달의 궁전』, 『폐허의 도시』, 『뉴욕 3부작』, 『스퀴즈 플레이』, 에세이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빵 굽는 타자기』, 시나리오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 『다리 위의 룰루』 등을 썼고, 자크 뒤팽, 스테판 말라르메, 장폴 사르트르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장편소설 『4 3 2 1』은 폴 오스터가 소설가로서 모든 문학적 재능을 야심 차게 담아낸 역작이다. 각기 다른 관계와 사건과 우연으로 짜인 네 개의 평행 우주를 살아가는 주인공 아치 퍼거슨의 파란만장한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세밀하고 재치 있게 그려 낸 작품으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선택한 것들, 그리고 그로부터 뻗어 나가는 가능성이라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디자인 열린책들 김창민
4 3 2 1
by Paul Auster
Copyright (C) 2017 by Paul Auster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C) 2023 by The Open Books Co.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Carol Mann Agency through Shinwon Agency Co., Seoul.
시리 허스트베트에게
집안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퍼거슨의 할아버지는 재킷 안감에 1백 루블을 꿰매 넣은 채 자신이 태어난 도시 민스크를 걸어서 탈출했다. 서쪽으로 함부르크를 지나고 바르샤바와 베를린을 거쳐 중국여제라는 여객선에 올랐다. 배는 사나운 겨울 폭풍을 헤치며 대서양을 건넜고, 20세기의 첫날에 뉴욕항에 들어왔다. 엘리스섬의 이민국에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동료 러시아계 유대인 한 명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 남자가 말했다. 레즈니코프라는이름은잊어버리세요.여기서는아무도움도안될겁니다.미국에서의새로운삶을위해서는미국이름이필요해요,좋은미국식울림이있는그런이름. 1900년 당시 이사크 레즈니코프에게는 영어가 아직 낯선 언어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 동포에게 하나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록펠러로하세요,절대실패안할겁니다. 그 남자가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난 후 열아홉 살의 레즈니코프가 자리에 앉아 이민국 직원의 질문을 받을 때가 되자, 그는 남자가 알려 준 이름을 잊어버렸다. 이름은? 직원이 물었다. 좌절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면서, 지친 이민자 청년은 이디시어로 내뱉었다. 이크호브파게센Ikhhobfargessen(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이사크 레즈니코프는 이커보드 퍼거슨IchabodFerguson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처음이 특히 더 힘들었지만, 처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이 택한 이 나라에서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 직후 어찌어찌 아내를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 아내, 태어날 때 성은 그로스먼이었던 패니가 다부지고 건강한 세 아들을 낳은 것도 사실이지만, 퍼거슨의 할아버지에게 미국에서의 삶은 여전히 고난이었다. 선박에서 내려 땅에 첫발을 내딛던 날부터 1923년 3월 7일, 시카고의 한 가죽 제품 공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다 강도가 쏜 총에 맞아 마흔둘의 나이에 갑작스럽고 이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랬다.
사진은 한 장도 남지 않았지만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퍼거슨의 할아버지는 등판이 넓고 손이 큰 거구에, 교육을 받지 못했고, 기술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 이민자였다. 뉴욕에서의 첫날 오후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빨갛고, 가장 동그랗고, 가장 완벽한 사과를 파는 행상을 마주쳤다. 참지 못한 그는 사과를 한 알 사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기대했던 달콤한 맛이 아니라 쓰고 이상한 맛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그 사과는 기분이 나쁠 정도로 물컹해서 그는 입 안의 속살을 깨물었고, 과일의 내용물이 튀어나와 입고 있던 코트에 묽은 빨간색 물이 튀었고, 알갱이 같은 씨도 묻었다. 그게 그가 처음 맛본 신세계의 맛이었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저지 토마토와의 첫 만남이었다.
록펠러가 아닌, 어깨가 넓은 잡역부, 이름이 이상하고 가만히 있지를 못했던 이 거구의 유대인은 맨해튼, 브루클린, 볼티모어, 찰스턴, 덜루스, 시카고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했고 부두 노동자, 오대호에서 운행하는 대형 선박의 선원, 유랑 서커스단의 동물 조련사, 통조림 공장 생산 라인 노동자, 트럭 운전수, 막노동자, 야간 경비원 등등으로 일했다. 그 모든 노력에도 절대 푼돈 이상은 벌지 못했고, 덕분에 불쌍한 이케 퍼거슨이 아내와 세 아들에게 물려준 건 방랑하던 젊은 시절의 모험담밖에 없었다. 길게 보면 이야기가 돈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없지만, 당장은 결정적인 한계들이 있었다.
가죽 제품 회사에서는 약간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패니는 아이들과 함께 시카고를 떠나 뉴저지주 뉴어크로 이사했다. 남편의 친척들이 그녀를 불러들였고, 센트럴워드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의 셋방을 명목상의 월세만 받고 내줬다. 남자아이들은 각각 열네 살, 열두 살, 아홉 살이었다. 첫째 루이스는 오래전부터 루로 통했다. 둘째 에런은 시카고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이유 없이 많이 얻어맞은 뒤로 스스로를 아널드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아홉 살 스탠리는 보통 서니로 알려져 있었다. 생계를 위해 아이들의 어머니는 빨래와 삯바느질을 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들도 살림에 보탬을 주기 시작했고, 각자 방과 후에 일해 번 돈은 전부 어머니에게 줬다. 힘든 시기였고, 빈곤의 위협이 눈을 멀게 하는 짙은 안개처럼 아파트의 방들을 채우고 있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고 삶의 목적에 대한 어머니의 우울한 존재론적 결론을 세 아이들도 조금씩 받아들여 갔다. 일하지 않으면 굶는 거였다. 일하지 않으면 머리 위의 지붕이 사라지는 거였고, 일하지 않으면 죽는 거였다. 퍼거슨 가족에게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작은 세상에서는 〈모두를 위한 모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에 퍼거슨은 아직 두 살이 채 되지 않았었고, 그 말은 그에게 할머니에 관한 기억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집안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패니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미친 듯이 흐느끼는 일이 잦았고,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빗자루로 때렸고, 동네 상점 몇 곳에서 가격을 너무 깎으려다가 출입 금지를 당했다.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열네 살에 고아가 된 상태로 뉴욕에 도착했고,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창문 없는 다락방에서 모자를 만들며 몇 년을 보냈다고 한다. 퍼거슨의 아버지 스탠리는 부모 이야기를 아들에게 좀처럼 하지 않았고, 아이가 물어봐도 모호하고 짧은, 방어적인 대답만 했다. 어린 퍼거슨이 아버지 쪽 조부모에 관해 그나마 알게 된 정보는 거의 모두 어머니 로즈가 알려 준 것이었는데, 퍼거슨 집안 2세대 며느리들 중 가장 어렸던 그녀는 그런 정보를 대부분 루의 아내 밀리에게서 얻었다. 수다 떨기를 좋아했던 밀리는 스탠리나 아널드보다 훨씬 숨기는 게 적고 말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다. 퍼거슨이 열여덟 살 때 어머니가 밀리에게 들은 어떤 이야기를 해줬는데, 소문 이상은 아닌 이야기, 사실일 수도 있지만 다시 보면 아닐 수도 있는 근거 없는 추측이었다. 루가 밀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퍼거슨 집안에는 넷째가 있었다. 스탠리보다 3~4년 늦게 태어난 여자아이였는데, 당시 가족은 덜루스에 정착했고 이케는 오대호에서 운행하는 대형 선박의 선원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몇 달째 가족은 지독히 가난하게 지냈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케가 집을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곳은 미네소타였고, 마침 겨울, 유난히 추운 지역의 유난히 혹독한 겨울이었기 때문에, 가족이 살던 집에 난방 기구라곤 나무를 때는 난로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 돈이 너무 없어서 패니와 아이들은 하루에 한 끼로 식사량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돌봐야 할 아이가 하나 더 생기는 데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는, 갓난아기를 욕조에 빠뜨려 익사시켰다고 했다.
스탠리는 부모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아들에게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퍼거슨은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서른을 넘기고 두 달 후에 로즈와 결혼하기 전까지 젊은 시절의 그 어떤 모습에 관해서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퍼거슨은 아버지의 입에서 종종 무심히 흘러나오는 말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어 냈다. 스탠리는 형들에게 자주 놀림이나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 삼 형제 중 막내인 까닭에 아버지와 함께 지낸 시간이 가장 짧았고, 그래서 어머니 패니에게 가장 집착했다는 것, 성실한 학생이었고 누가 봐도 삼 형제 중 운동을 제일 잘했다는 것, 센트럴 고등학교 미식축구부에서 엔드를 맡았고 육상부에서 4백 미터 선수였다는 것, 전자 제품을 잘 다룬 덕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1932년 여름에 작은 라디오 수리점을 열었다는 것(본인 표현에 따르면 뉴어크시내아카데미가의벽에난작은구멍,구두수선점만한가게였다), 열한 살 때 어머니가 휘두른 빗자루에 맞아 오른쪽 눈을 다쳤다는 것(부분 실명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4-F등급1으로 징집을 면했다), 서니라는 별명을 아주 싫어해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이름을 버렸다는 것, 춤과 테니스를 좋아했다는 것, 형들이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본인을 무시해도 한 번도 대들지 않았다는 것, 학창 시절에 수업을 마치면 신문 배달을 했다는 것, 법학 공부를 해보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학비가 없어서 포기했다는 것, 20대 때는 바람둥이로 통했고 결혼할 생각 없이 수십 명의 유대인 여성들과 교제했다는 것, 1930년대, 아바나가 서반구 죄악의 도시이던 시절 여러 번 그곳에 드나들었다는 것, 인생 최고의 야망이 백만장자, 록펠러 같은 부자가 되는 일이었다는 것.
루와 아널드는 둘 다 20대 초반에 결혼했는데, 패니의 정신없는 집안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로, 즉 192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퍼거슨 집안을 장악한 목소리 큰 지배자에게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반면 형들이 집을 나갈 무렵에도 아직 10대였던 스탠리는 계속 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여서 그랬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도, 한 해 한 해 쌓여 11년이 지날 때까지 그는 꼭대기 층 셋방에 계속 머무르며 대공황과 전쟁의 전반부를 패니와 함께 겪었다. 어쩌면 무력감과 게으름 때문에 그대로 눌러앉았을 수도 있고,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 혹은 죄의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모든 이유들, 다른 곳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상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던 이유들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루와 아널드는 아이들을 낳았지만, 스탠리는 계속 이런저런 여성들을 만나고 자신의 작은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렇게 춤이나 추면서 20대 중반을 지나고 서른 직전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평생 독신으로 살 거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1943년 10월, 미 육군 5군이 독일로부터 나폴리를 수복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던 시점, 마침내 전쟁이 연합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 같다는 기대가 피어나던 그 시점에 그는 뉴욕시에서 지인의 소개로 스물한 살의 로즈 애들러를 만났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매력적인 생각은 금세, 그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예뻤다, 퍼거슨의 어머니는. 녹회색 눈과 긴 갈색 머리가 그렇게 매혹적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지어 보이는 미소가 그렇게 자연스러웠고, 168센티미터쯤 되는 몸 곳곳에서 드러나는 매력이 그렇게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맨 처음 그녀와 악수한 바로 그 순간 스탠리는, 무심하고 보통은 시큰둥하던 스탠리, 사랑의 열병 같은 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스물아홉 살의 스탠리는 눈앞의 로즈를 바라보며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허파에서 공기가 빠져나가고, 다시는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도 이민자 집안의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어머니는 오데사에서 태어났고, 두 사람 다 세 살이 되기 전에 미국에 왔다. 따라서 애들러 집안은 퍼거슨 집안보다는 미국에 더 많이 동화된 상태였고, 로즈 부모님의 발음에는 외국인 억양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두 분은 디트로이트와 허드슨, 뉴욕에서 성장했고, 그들의 부모님이 쓰던 이디시어, 폴란드어, 러시아어는 유창하고 자연스러운 영어에 자리를 내줬다. 반면 스탠리의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두 번째 언어를 익히느라 애를 먹었고, 어머니는 심지어 그때까지도, 동유럽의 뿌리에서 멀어진 지 반세기가 지난 1943년까지도 미국 신문이 아니라 『주이시 데일리 포워드』를 읽었으며, 자신의 뜻을 표현할 때는 어색하고 뒤죽박죽인 언어, 아들들이 〈이잉글리시Yinglish〉라고 부른, 이디시어와 영어를 결합한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썼다. 그 점이 로즈와 스탠리 부모님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였지만, 미국 생활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 혹은 적응하지 못했는지와는 별개로 운의 문제도 있었다. 로즈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불운한 퍼거슨 집안을 덮친 야만적인 운명의 장난을 어찌어찌 피할 수 있었고, 그 집안의 역사에는 공장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도, 가난 때문에 굶주림과 절망에 시달리는 일도, 아이가 욕조에서 익사하는 일도 없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로즈의 할아버지는 재단사였고 허드슨에서는 이발사였다. 옷감이나 머리를 자르는 일이 그를 부와 세속적인 성공으로 이끄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옷을 입힐 만큼의 수입은 꾸준히 올릴 수 있었다.
로즈의 아버지 벤저민은 벤 혹은 벤지로 통했는데, 191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디트로이트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먼 친척이 뉴욕 시내 의류점에 점원 자리를 구해 줬지만, 그는 지상에서의 짧은 시간을 남성용 양말과 속옷이나 팔면서 보낼 운명이 아님을 깨닫고는 2주 만에 일을 그만뒀고, 그로부터 32년 후, 가정용 세제 방문 판매원, 그래머폰 음반 배급업자, 제1차 세계 대전 군인, 자동차 판매원, 브루클린 중고차 매장의 공동 사장을 거쳐 맨해튼에 있는 부동산 회사를 소유한 세 명의 소수 주주 중 한 명이 되었고, 덕분에 1941년, 그러니까 미국 참전 6개월 전에 브루클린의 크라운하이츠에서 웨스트 58번가의 새 건물로 이사할 만큼 수입이 충분했다.
로즈가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녀의 부모님은 당시 어머니가 살던 허드슨에서 멀지 않은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열린 일요일 야유회에서 만났고, 그로부터 반년 후(1919년 11월에) 결혼했다. 훗날 로즈가 아들에게 고백한 바로는 그 결혼은 늘 수수께끼였는데, 부모님보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좀처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결혼이 40년 이상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인류의 짝짓기 역사에서 가장 큰 의문 중 하나였다. 벤지 애들러는 말이 빠르고 잘난 체하는 남자였고, 새로운 계획을 1백 개쯤 가진 활동적인 야심가였고, 농담을 잘했고, 늘 관심받는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일요일 오후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열린 야유회에서 벽지처럼 가만히 있던, 수줍음 많은 에마 브로모위츠라는 여성에게 빠진 것이다. 통통하고 가슴이 큰 스물셋의 그녀는 창백한 피부에 풍성한 붉은색 머리였고, 너무 동정인 티가 나고, 너무 경험이 없고, 감정 표현에 관해서는 너무 빅토리아 시대 사람 같아서 누구든 그녀를 보기만 해도 그 입술에 남자 입술이 닿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에마와 벤지의 결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모든 면을 고려할 때 그들은 갈등과 오해가 가득한 결혼 생활을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둘은 정말로 결혼했고, 비록 두 딸이 태어난 후로(1920년에 밀드러드, 1922년에 로즈) 벤지는 아내에게만 충실한 삶을 살지는 않았어도 어쨌거나 진심으로 그녀에게 꼭 붙어 있었고, 그녀는 반복해서 부당한 대접을 받기는 했어도 남편에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
로즈는 언니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 반대도 사실이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게, 첫째였던 밀드러드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이 내려 주신 집안의 공주 자리를 차지했고, 나중에 나타난 꼬마 경쟁자에게 프랭클린 애비뉴의 애들러 아파트에는 왕좌가 하나밖에 없음을, 왕좌 하나에 공주도 하나밖에 없음을 반드시 ─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도 ─ 알려 줘야 했기 때문이다. 왕좌를 빼앗으려는 시도에는 선전 포고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밀드러드가 로즈에게 아주 적대적이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녀의 친절함은 마치 찻숟가락으로 떠주는 것, 분, 시간, 혹은 한 달 단위로 양을 정해 놓고 내주는 것 같았고, 상냥하게 굴 때도 왕족에게나 어울릴 법한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차갑고 용의주도한 밀드러드와 다정하고 무른 로즈였다. 두 여자아이가 각각 열두 살과 열 살이 되었을 때 밀드러드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 학교 성적이 좋은 이유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만이 아니라 타고난 지적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로즈도 충분히 똑똑하고 성적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언니에 비하면 낙오자에 불과했다. 특별한 동기가 있지도 않았고 의식적으로 그런 차이를 생각하거나 어떤 계획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로즈는 서서히 자신과 언니를 비교하기를 멈췄는데, 언니를 따라 하려고 애쓰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행복을 찾으려면 다른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에서 해결책을 찾았고, 직접 돈을 벌면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열네 살이 되어 이력서를 쓸 자격이 생기자마자 그녀는 첫 번째 일자리를 구했고,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열여섯 살이 되자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야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밀드러드가 책으로 빼곡한 자신만의 머릿속 은둔처로 피신하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나고, 지난 2천 년간 쓰인 모든 책을 읽든 말든 상관없이, 로즈가 원한 것, 그녀가 속한 영역은 현실 세계,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뉴욕 거리였고, 그녀에게는 자립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는 감각이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본 영화들, 클로뎃 콜베어, 바버라 스탠윅, 진저 로저스, 조앤 블론델, 로절린드 러셀, 진 아서 같은 배우가 출연한, 대형 제작사에서 대량으로 쏟아 내던 그런 영화들 속 씩씩하고 영리한 여주인공처럼, 그녀 역시 자신이 젊고 다부진 여성 직업인의 배역을 맡은 거라고, 자신이 주인공인 「로즈 애들러 이야기」라는 영화 속을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1943년 10월 스탠리를 만났을 무렵, 그녀는 6번 애비뉴 근처 웨스트 27번가에 있는 초상 사진가 이매뉴얼 슈나이더먼의 사진관에서 2년째 일하고 있었다. 로즈는 접수원 겸 비서 겸 경리로 일을 시작했지만, 1942년 6월 슈나이더먼 씨의 조수가 입대하고 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아버지 슈나이더먼 씨는 당시 60대 중반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뉴욕에 온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였는데, 괴팍하고 무뚝뚝하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버릇이 있는 시무룩한 남자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아름다운 로즈에게 인색하나마 호의를 보이게 되었고, 그녀가 사진관에 온 첫날부터 자기 작업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수습 조수로 삼아 카메라와 조명, 필름 현상까지, 즉 사진가로서 자신의 모든 기술과 기교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로즈로서는 그때까지 진로가 막연하기만 했고, 이런저런 사무직 일을 하며 월급을 받기는 했지만 그 외에 내적 만족에 관한 기대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진관에서의 승진으로 갑자기 소명을 발견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일자리가 아니라 세상에서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매일 새로운 얼굴을 마주했고, 매일 아침과 오후의 얼굴이 달랐고, 각각의 얼굴은 나머지 모든 얼굴들과 달랐다. 머지않아 로즈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작업을 자신이 좋아한다는 걸, 절대 그 작업에 싫증 내는 일은 없을 테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스탠리는 마찬가지로 징집에서 면제된 두 형과(각각 평발과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 함께 일했는데, 몇 번의 업종 변경과 확장을 거치는 동안, 1932년에 개업한 작은 라디오 수리점은 스프링필드 애비뉴의 꽤 규모 있는 가구 및 가전제품 판매점으로 성장한 상태였고, 장기 할부, 투 플러스 원, 반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파격 세일, 혼수 상담 서비스, 국경일 특별 세일 등 당시 미국 소매점들이 쓰던 온갖 판매책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사업에 먼저 합류한 건 아널드였다. 어설프고 그리 똑똑한 편은 아니었던 둘째 형은 몇 가지 영업 관련 일을 하다가 그만뒀고, 아내 조앤과 세 아이를 먹여 살리는 데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루도 합류했는데, 가구나 가전제품에 딱히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탠리가 5년 새 벌써 두 번째로 그의 도박 빚을 갚아 주면서 신뢰와 속죄의 뜻으로 사업에 동참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고, 자신이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면 남은 평생 다시는 동생에게서 한 푼도 받아 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삼 형제 홈 월드〉로 알려진 사업체가 탄생했지만, 그 회사는 본질적으로 단 한 명, 즉 막내이자 패니의 세 아들 중 가장 야망이 컸던 스탠리의 감독하에 돌아갔는데, 그는 가족 간의 헌신이 다른 모든 인간적 가치에 우선한다는, 어딘가 뒤틀렸지만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어서, 실패한 두 형의 짐까지 기꺼이 떠맡기로 했다. 그런 동생에게 형들은 빈번히 지각하고, 주머니가 빌 때마다 금전 등록기에서 10달러 혹은 20달러씩 챙겨 가고, 날이 따뜻할 때면 점심 후에 골프를 치러 가버리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스탠리는 그런 형들의 행동에 화가 났을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불평한 적은 없었는데, 우주의 법칙이 친형제에 대해 불평하는 걸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루와 아널드에게 월급을 주느라 〈홈 월드〉의 이익이 어느 정도 줄어드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업은 넉넉하게 흑자를 냈으며, 1~2년 안에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전망은 더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되면 텔레비전이 들어올 테고 형제는 그 구역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파는 상인들이 될 것이었다. 스탠리는 아직 부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수입이 당분간 꾸준히 늘 예정이었고, 1943년 10월의 그날 밤 로즈를 만났을 때 인생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탠리와 달리 로즈는 불같이 열정적인 사랑을 이미 한번 경험해 봤다. 그녀의 연인을 앗아 간 전쟁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절대 만나지 못했을 텐데, 그녀는 10월의 그날 밤이 오기 한참 전에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약혼했던 젊은이 데이비드 래스킨은 브루클린 출신 의학도였는데, 그녀가 열일곱 되던 해 인생에 나타났다가 조지아의 베닝 기지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던 중 발생한 갑작스러운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 소식은 1942년 8월에 전해졌고, 이어진 몇 달 동안 로즈는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망연자실해서 분노하고, 넋이 나가고, 절망하고, 슬픔 때문에 반쯤 실성하고, 밤이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전쟁을 저주하기를 반복했으며, 데이비드의 손길을 더는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몇 달간 그녀를 지탱해 준 건 슈나이더먼 씨와의 사진 작업뿐이었고, 거기서 위안을 얻고, 즐거움을 얻고, 아침마다 자리에서 일어날 이유를 얻었지만, 사교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의욕이 없었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진관과 집, 친구 낸시 페인과의 극장 나들이로 이뤄진 단순한 생활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특히 마지막 두어 달 동안 로즈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 갔는데, 예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으면 맛이 느껴진다는 사실, 도시에 비가 내리면 자신에게만 그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 모든 남녀가,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웅덩이를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해 나갔다. 아니, 그녀는 데이비드의 죽음이 준 상처에서는 절대 회복할 수 없을 것이었고, 그는 미래를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그녀 옆에 늘 유령처럼 따라다닐 테지만, 스물한 살은 세상에 등을 돌리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져 죽어 버릴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스탠리를 소개해 준 사람은 낸시 페인, 비꼬는 말이나 재치 있는 말을 잘하는, 앞니가 크고 팔이 앙상한 낸시, 크라운하이츠에 살던 때부터 로즈의 절친이던 그 낸시였다. 낸시는 캐츠킬에서 열린 주말 댄스파티에 갔다가 스탠리를 만났는데, 그건 브라운 호텔이 〈짝이 없지만 열심히 찾아보려는〉 뉴욕의 유대인 젊은이들을 위해 주최하는 요란한 파티들 중 하나였다. 낸시는 그런 파티를 유대교청정육시장이라고 불렀고, 본인이 딱히 열심히 짝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그녀는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군인과 약혼한 상태였고, 그는 낸시가 마지막 소식을 받아 본 시점까지는 살아 있었다) 재미 삼아 친구와 함께 파티에 갔고, 뉴어크에서왔다는스탠리라는남자와 두어 번 춤을 췄다. 그는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고, 낸시는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순결은 다른 사람에게 주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밝히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깔끔하고 장난스럽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서 떠나려 했는데, 그때 낸시가 친구 로즈, 로즈 애들러, 다뉴브강서쪽에서가장예쁜여자이자이쪽저쪽상관없이세상에서가장착한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낸시는 실제로 로즈에 관해 그렇게 생각했고, 낸시의 말이 진심임을 이해한 스탠리는 그녀의 친구를 만나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낸시는 멋대로 이름을 꺼낸 일을 두고 로즈에게 사과했지만, 낸시가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님을 아는 로즈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물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데? 낸시 말에 따르면, 스탠리 퍼거슨은 키가 183센티미터쯤 되고, 잘생겼으며, 나이가 좀 들었는데, 스물하나인 그녀가 보기에는 서른쯤 되는 것도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있었고, 사업을 하는데 꽤 잘나가는 것 같았고, 매력 있고, 예의 바르고, 춤을 아주 잘 췄다. 일단 그 정도 정보를 얻은 로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르는 사람을 소개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생각해 봤는데, 그렇게 지난 일들을 떠올리던 중에, 데이비드가 죽은 지 1년도 더 되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좋든 싫든 다시 시험해 봐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그녀는 낸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스탠리 퍼거슨이라는 사람 만나 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훗날 로즈가 아들에게 그날 밤 일을 이야기할 때, 스탠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식당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퍼거슨은 그곳이 맨해튼 도심의 어딘가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스트사이드였는지 웨스트사이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흰색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 종업원들은 검은색 짧은 재킷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일하는 그런 곳이었을 테고, 그건 스탠리가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인상적인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어 주려 했다는, 또한 원한다면 언제든 그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려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맞다, 그녀는 그의 외모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벼운 발놀림과 우아하고 부드러운 몸동작, 그뿐 아니라 손, 딱 적당한 크기에 힘 있어 보이는 그 손에 놀랐다. 그리고 차분하고 공격적이지 않은 눈빛, 한시도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갈색 눈과 그 위의 굵고 짙은 눈썹도 알아봤다. 저녁을 함께 먹는 남자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 악수 한 번에 스탠리의 내적 자아가 얼마나 갑자기 녹아내려 버렸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녀는 식사 초반부에 그가 말이 거의 없는 점이 조금 의아했고, 그런 까닭에 그가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엄격히 보자면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조마조마했기 때문에, 그리고 스탠리가 계속 말없이 앉아만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자신과 상대방 둘 다를 위해 이야기하는 쪽이 되었고, 그건 그녀가 말을 너무 많이 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는 수다쟁이처럼 끊임없이 떠드는 자신의 모습에 점점 더 놀랐는데, 예를 들면 언니 자랑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밀드러드가 얼마나 뛰어난 학생이었는지, 지난 6월에는 헌터 대학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현재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데, 영문학과에서 유일한 여학생이고 세 명뿐인 유대인 학생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가족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른다고 했고, 그렇게 가족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아치 삼촌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버지의 동생인 아치 애들러라는 분이고, 다운타운 퀸텟의 키보드 연주자로 지금은 52번가에 있는 모스 하이드아웃 바에서 활동하는데, 집안에 음악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많은 영감을 주는지 모른다고 했다. 예술가, 돈 버는 일 외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반항아, 그랬다, 그녀는 아치 삼촌을 사랑한다고, 친척들 중에 단연 제일 좋아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필연적으로, 그녀는 슈나이더먼 씨와 하고 있는 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1년 반 동안 슈나이더먼 씨가 알려 준 모든 기술을 하나하나 열거한 후에, 성미가 까다롭고 입이 험한 슈나이더먼 씨가 일요일 오후에 종종 주정뱅이나 부랑자를 찾아 자신을 데리고 바우어리가(街)에 나간다고, 망가진 영혼들이지만 새하얀 수염에 백발을 길게 기른 두상이 아주 근사한, 고대 예언자나 왕 같은 두상을 지닌 이들을 찾아서는 돈을 주고 사진관으로 와서 모델로 서달라고 부탁한다고 했다. 그런 노인들은 특별한 의상을 입혀서, 즉 터번을 두르게 하고 가운, 혹은 벨벳으로 된 긴 옷을 입혀서 사진을 찍는데, 그건 마치 렘브란트가 17세기 암스테르담의 몰락한 인물들에게 옷을 입혔던 방식과 같다고, 그들에게 쓰는 조명 역시 렘브란트의 조명이라고 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조명, 그림자가 깊고, 모든 그림자에 빛이 아주 조금만 닿는 그런 조명이었는데, 이제 슈나이더먼 씨는 그녀를 믿기 때문에 그녀가 혼자서 조명을 설치하게 내버려 두고, 덕분에 수십 장의 사진을 직접 찍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키아로스쿠로2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 그제서야 스탠리가 자기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일본어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말에 귀 기울이며, 넋을 잃은 채 아무 말도 없이, 놀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고, 부끄러운 짓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행히도 주요리가 나오면서 독백이 잠시 끊겼고, 그 틈을 타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식사를 시작할 무렵이 되자(무슨 요리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떠들어 댄 수다가 데이비드 이야기를 하지 않게 해주는 보호막이 되어 줬음을 깨달았다. 그건 그녀가 하고 싶지 않았던 유일한 이야기,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였기 때문에, 상처를 보이지 않기 위해 그토록 길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스탠리 퍼거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고, 징집을 거부당한 것, 그래서 어디 멀리 떨어진 전장의 진흙탕을 휘젓고 다니거나 기초 군사 훈련 중에 폭발 사고로 온몸이 찢겨 나가는 대신, 세심하게 맞춰 입은 민간인 복장으로 이 식당에 앉아 있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무렴,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고, 그렇게 병역 면제를 받은 데 대해 그를 비난한다면 그녀는 무정한 사람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왜 이 남자는 이렇게 살아 있고 데이비드는 죽어야만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녁 식사 시간은 꽤 잘 흘러갔다. 일단 스탠리가 초반의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그가 호감이 가는 사람임이 드러났는데, 다른 많은 남자들처럼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집중하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눈부신 재치는 없을지 몰라도 유머를 알아들을 줄 알았고, 그녀가 재미없는 말을 해도 웃어 줬으며, 일이나 장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뭔가 단단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임이 로즈에게 확실히 전해졌다. 렘브란트나 사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업가라는 건 유감이었지만 적어도 그는 루스벨트 지지자였고(필수였다), 17세기 회화나 사진술을 포함해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솔직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가 좋았다. 함께하기에 즐거웠지만, 스탠리가 소위 말하는 좋은 짝의 조건을 모두, 혹은 대부분 지녔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낸시가 기대한 만큼 그에게 빠져들 수는 없음을 알았다. 식사 후에 두 사람은 반 시간쯤 시내를 배회하다가 술을 한잔하려고 모스 하이드아웃 바에 들렀고, 연주 전에 피아노를 조율하는 아치 삼촌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삼촌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윙크했다), 그런 다음 스탠리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웨스트 58번가의 아파트까지 걸어서 바래다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올라갔지만, 그녀는 들어왔다 가겠냐고 묻지 않았다.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며(키스를 사전에 예방하는 세련된 방법이었다) 근사한 저녁 감사했다고 말하고 돌아서서 그녀는 문을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그를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스탠리는 사정이 달랐다. 당연했다. 첫 만남의 첫 순간부터 그랬고, 그는 데이비드 래스킨이나 로즈의 상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즈 같은 여성은 지금 상태로 오래 남아 있지 않을 테고, 주변에 남자들이 떼로 몰려들 테니까, 그녀의 매력에는 저항할 수 없으니까, 말이나 동작 하나하나에서 우아하고, 아름답고, 착한 면모가 뿜어져 나오는 그녀를 보며, 스탠리는 난생처음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 보기로, 점점 몰려드는 로즈의 구애자들을 물리치고 그녀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으니까, 로즈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그의 아내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이어진 넉 달 동안 그는 자주 그녀에게 전화했는데, 귀찮아질 정도로 자주는 아니었지만 정기적으로, 끈기 있게, 여전히 집중력 있고 단호한 태도로, 상상 속의 경쟁자들을 압도할 전략적인 영리함을 갖추고 그렇게 했고, 사실 그만큼 진지한 경쟁자가 등장하지도 않았다. 로즈가 스탠리를 만난 10월 이후로 낸시는 두세 번 더 그런 만남을 주선했지만, 그 남자들은 어딘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로즈는 다시 보자는 요청을 거절한 채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말은 스탠리가, 본인은 사방에 널린 가상의 적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빈 땅을 지키는 기사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그에 대한 로즈의 감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방에 혼자 있거나 저녁 식사 후 부모님과 라디오를 듣는 것보다는 그와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고, 스케이트와 볼링, 댄스(그랬다, 스탠리는 춤을 정말로 잘 췄다), 카네기 홀의 베토벤 연주회나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두 편, 영화 몇 편을 함께 즐겼다. 그녀는 스탠리가 정통 드라마에는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베르나데트의 노래」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면서 졸았다) 코미디를 볼 때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는데, 예를 들어 전쟁 중 워싱턴의 주택 부족 사태를 재미있게 묘사한 소품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볼 때는 두 사람 다 웃음을 터뜨렸다. 조엘 매크리어(진짜 잘생겼다)와 진 아서(로즈가 좋아하는 배우들 중 한 명이었다)가 나왔지만, 그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건 미국 뚱보로 변한 일종의 에로스 역을 맡은 찰스 코번의 대사, 영화 내내 반복되던 상품(上品)에,잘빠진,멋진젊은이라는 대사였다. 마치 그게 모든 여성이 원하는 남편의 미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주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스탠리 퍼거슨은 잘빠졌고, 멋졌고, 아직 젊다고 할 수 있었으며, 상품이라는 단어가 곧고, 점잖고, 규범을 잘 따른다는 뜻이라면, 그는 그런 특징들을 모두 갖췄다고 할 수 있었지만, 로즈는 그런 것들이 자신이 찾던 미덕인지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강렬하게 불타는 듯했던 데이비드 래스킨과의 사랑을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랑은 종종 사람을 지치게 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생생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면모들을 보인 반면, 스탠리는 아주 무난하고 아주 예측 가능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런 안정감 있는 성격이 결국 미덕이 될지 흠이 될지 궁금했다.
한편, 그는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그녀가 허락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키스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가 그녀에게 완전히 빠졌다는 게, 그녀를 만날 때마다 손을 대지 않고, 키스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쓴다는 게 명백했지만 말이다.
한편, 잉그리드 버그먼이 너무 예쁜 것 같다고 그녀가 말했을 때, 그는 아니라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세상 가장 고요한 확신을 담아, 잉그리드 버그먼은 그녀에게 명함도 못 내밀 거라고 했다.
한편, 11월 말의 어느 추운 날, 그가 슈나이더먼의 사진관에 갑자기 나타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 슈나이더먼 씨가 아니라 그녀가 찍어 주기를 원했다.
한편, 그녀의 부모님은 스탠리를 인정했고, 슈나이더먼 씨도 인정했고, 심지어 밀드러드, 잘난 체하는 지식인들의 전당의 공작 부인 같은 그 밀드러드도, 로즈는 훨씬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말로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한편, 그가 완전히 신이 나서 정신을 놓아 버리는 순간들, 그의 안에서 뭔가 고삐가 풀리면서 갑자기 짓궂고 대책 없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어느 날 저녁 그녀 부모님의 아파트 주방에서 날달걀 세 개로 저글링 시범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2분 정도 아주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달걀들을 다루다가 갑자기 한 알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갑자기 남은 두 알도 일부러 떨어뜨려서 바닥을 엉망으로 만든 다음, 무성 코미디 영화의 배우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런〉이라고 내뱉었다.
두 사람은 그 넉 달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났고, 스탠리가 그녀에게 마음을 준 방식으로 로즈도 그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제 발로 설 수 있게 도와준 데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면 그녀는 당분간 그렇게 지내는 데 만족했을 테지만, 그녀 쪽에서 그와 함께 있는 데 편안함을 느끼고 둘만의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을 무렵 스탠리가 갑자기 규칙을 바꿨다.
1944년 1월 말이었다. 러시아에서는 9백 일간 이어지던 레닌그라드 전투가 마침내 끝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연합군이 몬테카시노에서 독일군에 발이 묶여 있었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마셜 제도 습격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리고 국내 전선에서는, 뉴욕 센트럴 파크 모퉁이에서 스탠리가 로즈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겨울의 환한 해가 떠 있고, 구름 한 점 없는 깊은 하늘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는데, 1월의 뉴욕을 아주 가끔만 물들이는 눈부신 파란색이었다. 그렇게 햇빛 가득한 1월의 일요일 오후, 끝나지 않는 전쟁의 피바다와 살육의 현장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스탠리는 결혼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소용없다고, 그녀를 흠모한다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 없고, 자신의 온 미래가 그녀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만약 그녀가 거절하면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을 거라고, 그녀를 다시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거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일주일만 달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예상 밖의 일이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연하다고, 일주일 동안 잘 생각해 보라고, 다음 주 일요일에, 정확히 오늘로부터 일주일 후에 전화하겠다고, 스탠리는 말했다. 그런 다음 59번가 쪽으로 난 공원 출입구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두 사람은 처음으로 키스했고, 두 사람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로즈는 스탠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봤다.
결과는, 물론 오래전에 글로 적혔다. 그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를 포함하는, 권위 있는 『지상의 삶의 기록』의 도입부에 등장할 뿐 아니라 맨해튼 기록 보관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곳 대장에 따르면 로즈 애들러와 스탠리 퍼거슨은 1944년 4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기 정확히 두 달 전에 결혼했다. 우리는 로즈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녀가 그 결정에 이르게 된 과정과 이유는 복잡한 문제였다. 수많은 요소들이 얽혀 있었고, 각각의 요소는 때로 호응하기도, 때로 충돌하기도 했는데, 모든 요소들에 대해 로즈는 양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주일은 퍼거슨의 미래 어머니에게 고단하고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첫째, 스탠리가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그녀로서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었다. 좋든 나쁘든 이제 그는 낸시 다음으로 그녀와 친한 친구였다. 둘째, 그녀도 벌써 스물한 살이었다. 여전히 어리다고 할 만큼 충분히 젊은 편이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신부들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여성이 열여덟, 열아홉에 결혼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남는 걸 로즈는 절대 원하지 않았다. 셋째, 아니, 그녀는 스탠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 언제나 성공한 결혼이 되지는 않는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고, 어딘가에서 읽은 내용에 따르면, 다른 문화권에서 지배적인 중매결혼이 서구식 결혼보다 더 행복한 것도, 덜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넷째, 아니, 그녀는 스탠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에게 느꼈던 〈대단한 사랑〉은 불가능했는데, 왜냐하면 〈대단한 사랑〉은 한 사람의 일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오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남은 평생 혼자 지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상에 조금 못 미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섯째, 스탠리에게는 짜증 나거나 역겨운 면모가 하나도 없었다. 그와 섹스하는 상상을 해도 속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섯째, 그는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다정하게 대하고, 존중해 줬다. 일곱째, 2주 전에 결혼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는 여성도 자신의 관심사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여성의 삶이 남편과 집안일에만 묶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그녀가 물었다. 네, 일이요,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스탠리와 결혼하면 슈나이더먼 사진관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는, 계속 일하면서 사진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덟째, 아니, 그녀는 스탠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홉째, 그에게는 존경할 만한 점이 많았다. 그의 장점이 단점보다 훨씬 돋보인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왜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조는 걸까? 낮에 상점에서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눈꺼풀이 떨어지는 게, 감정의 세계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는 뜻인 걸까? 열째, 뉴어크! 뉴어크에서 살 수 있을까? 열한째, 뉴어크는 확실히 문제였다. 열둘째, 부모님 곁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제 그 아파트에서 지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무척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두 분의 가식은 지긋지긋했다. 아버지의 바람기와 그걸 모른 척하는 어머니가 싫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정말 우연히, 점심을 먹으러 슈나이더먼 사진관 근처의 자동판매기 식당에 가던 중에, 아버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봤다. 그 사람은 아버지보다 열다섯 살이나 스무 살 정도 어려 보였고, 토할 것 같고 화가 난 로즈는 달려가서 아버지의 얼굴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열셋째, 스탠리와 결혼하면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밀드러드를 이기는 셈이었다. 밀드러드가 결혼에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재로서는, 언니는 짧은 연애들을 이어서 하는 데 만족하는 것 같았다. 언니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로즈는 그런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열넷째, 스탠리는 돈을 많이 벌었고, 지금 하는 걸 볼 때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돈을 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돈을 벌려면 늘 돈 생각을 해야 한다. 관심사가 온통 은행 계좌에만 쏠려 있는 남자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열다섯째, 스탠리는 그녀가 뉴욕에서 제일 예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 본인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스탠리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았다. 열여섯째, 눈에 띄는 남자가 하나도 없었다. 스탠리가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낸시가 만나 보라고 했던, 칭얼대는 불만투성이들에 비하면 대단히 훌륭한 남자였다. 적어도 스탠리는 어른이었다. 적어도 스탠리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열일곱째, 스탠리는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이었다. 선택받은 종족이었지만 종교적인 의식이나 신에 대한 맹세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말은 의식이나 미신 때문에 생활이 불편할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하누카, 매해 봄 유월절의 무교병과 네 가지 질문, 아들이 태어나면 포경 수술을 해주는 정도는 따르겠지만 기도하거나 유대교 사원에 가는 일은 없을 테고, 그녀가 믿지도 않는 걸, 두 사람 다 믿지도 않는 걸 믿는 척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열여덟째, 아니, 그녀는 스탠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탠리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만으로도 시작해 보기에는 충분할 것이었다, 첫걸음으로는. 그다음은, 누가 알겠는가?
두 사람은 애디론댁산맥의 호숫가 휴양지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그건 결혼 생활의 비밀을 알아 가는 일주일, 짧았지만 끝나지 않던 시간이었다.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그저 그 경험들이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한 시간 혹은 하루처럼 묵직하게 느껴졌고, 초조하고 조심스럽게 맞춰 가는 시기, 작은 성취와 친밀한 드러남이 있던 그 시기에 스탠리는 로즈에게 처음으로 운전을 가르쳐 주고, 테니스의 기초를 알려 줬다. 여행을 마친 두 사람은 뉴어크로 돌아와 결혼 생활의 초반부를 보내게 될 아파트로 이사했다. 위퀘이크 구역의 밴벨저플레이스에 있는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였다. 슈나이더먼은 결혼 선물로 한 달의 유급 휴가를 줬고, 다시 일하러 나갈 때까지 3주 동안 로즈는 맹렬하게 요리를 익혔는데, 어머니가 생일에 준, 미국 주방 기술에 관한 확고한 지침서인 『정착지 요리법』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책의 부제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었으며, 사이먼 캔더 부인이 편집한 623면짜리 두툼한 책에는 〈밀워키 공립 학교 급식실, 여자 상업 고등학교, 그리고 권위 있는 식단 전문가와 경험 많은 주부 들의 검증을 받은 요리법〉이 담겨 있었다. 초반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앙들이 있었지만, 뭐든 빨리 배웠던 로즈는 이내 무슨 요리든 일단 마음먹고 시작하면 꽤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게 되었는데, 고기가 타거나, 채소가 숨이 죽었거나, 파이가 끈적끈적하거나, 으깬 감자가 떡이 되는 등, 시행착오가 반복되던 초기에도 스탠리는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놓은 식사가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그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차분하게 입 안에 떠 넣고, 즐겁게 씹고, 매일 밤, 정말 매일 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말했다. 로즈는 가끔 스탠리가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지, 혹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음식을 먹는지도 모르는 게 아닌지 궁금했던 적도 있지만, 그녀의 요리 실력처럼, 함께 사는 것에 관한 그 모든 걱정도 서서히 안정되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러니까 둘 사이에 뭔가가 어긋날 수도 있었을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니, 그녀는 놀랄 만한, 상상도 못 했던 결론에 도달했다. 스탠리는단한번도그녀를비판하지않았다. 그에게 그녀는 완벽한 존재, 완벽한 여인, 완벽한 아내였고, 그런 까닭에, 마치 하느님의 존재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적 명제처럼, 그녀가 하는 말이나 생각 역시 필연적으로 완벽했고, 필연적으로 완벽해야만 했다. 평생 밀드러드와 침실을 함께 썼던 그녀였다. 동생이 자기 옷을 꺼내 입지 못하게 옷장에 자물쇠를 채웠던 밀드러드,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다고 그녀에게 머리가비었다고 했던 밀드러드가 아니라, 이제 로즈는 그녀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와 침실을 함께 쓰고 있었고, 더구나 그 남자는 바로 그 침실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몸을 만져 주는 법을 빠르게 익혀 가고 있었다.
뉴어크는 따분했지만, 아파트는 강 건너 부모님의 집보다 널찍하고 밝았으며 가구도 모두 새것이었다(삼 형제 홈 월드에서 가장 좋은 가구들이었는데, 최고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충분했다). 그리고 일단 슈나이더먼 사진관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자, 여전히 도심은 로즈의 삶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사랑하는, 지저분한, 게걸스러운 뉴욕, 사람들의 얼굴이 있는 도시, 온갖 사람들의 말이 뒤섞이는 바벨 같은 도시였다. 출근을 하려면 매일 느릿느릿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뉴어크펜실베이니아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12분쯤 이동해 또 다른 펜실베이니아역에 내린 후 슈나이더먼 사진관까지 걸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 여정이 힘들지 않았다. 사람들 구경을 할 수 있어서 그랬고, 그녀는 특히 열차가 뉴욕에 도착해 멈춰 선 순간을 좋아했는데, 그 순간에는 말없이 뭔가를 기대할 때처럼 온 세상이 숨을 참는 듯한 짧은 정지 상태가 언제나 뒤따랐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면 모든 이들이 쏟아져 나갔다. 객차에서 내린 승객들로 승차장은 순식간에 붐비고, 그녀는 같은 생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뒤섞이고,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녀도 그런 군중 한가운데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터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독립된 존재임을 느꼈다. 스탠리와 함께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이기도 한 그 느낌은 새로운 느낌이었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역 계단을 올라 바깥 공기 속에 모여 있는 또 다른 군중에 합류하고 나면, 그녀는 웨스트 27번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날 사진관을 찾을 다양한 사람들을 상상했다. 새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온 엄마 아빠, 야구 유니폼을 입은 꼬마, 결혼 40주년 혹은 50주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앉은 노부부, 졸업 가운과 학사모 차림으로 미소 짓는 여학생, 여학생 친목회의 여학생들, 남학생 친목회의 남학생들, 파란 제복 차림의 신참 경관, 그리고 당연히 군인들, 군인들이 점점 늘고 있었다. 아내나 여자 친구, 혹은 부모와 오는 군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 휴가를 받아 뉴욕에 나왔거나 전선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뉴욕을 거치는 군인들, 혹은 누군가를 죽이러 가거나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군인들이었고, 그녀는 그 모든 군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모두 팔다리가 멀쩡하고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매일 아침 펜실베이니아역에서 웨스트 27번가로 걸어가며, 곧 전쟁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스탠리의 청혼을 받아들인 데 대해 심각하게 후회하거나 고통스럽게 재고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결혼 자체에는 분명 단점들이 있었고, 그중 어느 것도 직접적으로 스탠리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와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그의 가족과도 결혼한 셈이어서, 술에 취한 듯한 부적응자 삼총사와 어울릴 때면 어떻게 스탠리가 미쳐 버리지 않고 소년기를 지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먼저 그의 어머니, 여전히 정력적인 패니 퍼거슨, 당시 60대 중반에서 후반을 지나던 그녀는 157~159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찌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백발 마녀 같았는데, 가족 중 누구라도 곁에 가기를 꺼렸기 때문에 모임이 있을 때면 혼자 안락의자에 앉아 중얼거리곤 했다. 특히 다섯 명의 손주들, 여섯 살에서 열한 살 사이의 그 아이들은 패니를 죽을 만큼 무서워했는데, 그녀는 아이들이 선 넘는 행동을 할 때마다(크게 웃기, 소리 지르기, 쿵쿵 뛰기, 가구에 부딪치며 장난치기, 트림 크게 하기 등이 선 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사정없이 머리를 쥐어박았고, 직접 손찌검을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을 때면 전등갓이 흔들리도록 큰 소리로 야단쳤다. 로즈가 처음 인사드리던 날 패니는 로즈의 볼을 꼬집으며(아플 만큼 세게 꼬집었다) 〈봐줄 만한 처녀〉라고 판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다음에는 로즈가 머무르는 내내 그녀를 무시했고, 이후에도 찾아갈 때마다 형식적인 인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통이 없었는데, 패니는 다른 두 며느리 밀리와 조앤도 똑같이 대했기 때문에 로즈는 그런 상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패니의 관심사는 오직 아들들, 매주 금요일 저녁 식사에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아들들이었고, 아들과 결혼한 여자는 그림자 같은 존재에 불과해서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패니는 아주 가끔씩, 비정기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로즈에게 특별히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스탠리의 형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 둘은 스탠리의 가게에서 일하는, 스탠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녀가 본 남자들 중 가장 잘생긴 두 사람이라는 사실, 에럴 플린(루)과 케리 그랜트(아널드)를 닮은 신적인 외모를 지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부터 그녀는 그 둘이 너무도 싫어졌다. 그녀는 두 사람이 천박하고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맏이 루는 아주 바보는 아니었지만 미식축구 도박, 야구 도박에 빠져 온전한 생활을 못 했고, 둘째 아널드는 반쯤 천치였는데, 술을 너무 마셔서 눈빛이 탁했고, 틈만 나면 그녀의 팔이나 어깨에 손을 대거나 팔이나 어깨를 세게 쥐고는 인형, 아기, 미인 등등으로 불렀고, 그때마다 그녀의 혐오감은 깊어졌다. 그녀는 스탠리가 형들에게 상점 일자리를 준 것도 싫었고, 두 사람이 스탠리가 없는 곳에서, 심지어 때로는 면전에서도 그를 놀리는 게 싫었다. 착한 스탠리, 그 둘보다 백배쯤 훌륭한 스탠리였지만 형들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지 않았고, 그들의 비열함과 게으름, 그리고 모욕에 한 번도 맞서지 않고 견디며 상당한 자제심을 보였는데, 로즈는 자신이 생각지도 않게 성인(聖人)과, 다른 사람에 대해 절대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 보기 드문 영혼과 결혼한 게 아닌가 의심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스탠리가 그저 만만한 사람일 뿐이라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싸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형들의 도움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못한 상태에서 스탠리는 삼 형제 홈 월드를 잘나가는 상점으로, 안락의자와 라디오, 식탁, 아이스박스, 침실 가구, 믹서 등이 가득한 크고 환한 전시장으로 키워 냈는데, 수입이 많지 않은 중산층을 위해 중간급 품질의 상품을 대량으로 들여와 판매하는, 그 자체로 20세기를 대표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놀라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신혼여행 이후 몇 주 동안 몇 번 가게를 방문했던 로즈는 이제 그곳을 다시 찾지 않았는데, 단지 다시 일을 시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 가면 불편했기 때문이고, 스탠리의 형들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 않고,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실망은 그 형들의 아내와 아이, 퍼거슨 집안 사람이지만 진짜 퍼거슨은 아닌 사람들, 이케와 패니, 그리고 둘의 자식들이 지나온 참사를 함께 겪지 않은 그 사람들 덕에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고, 로즈는 새로운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밀리, 조앤과 빠르게 친해졌다. 두 여성 모두 그녀보다 꽤 나이가 많았지만(서른넷, 서른둘이었다) 그녀를 퍼거슨 집안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환영해 줬고, 결혼식 이후 로즈에게 진짜 자격을 부여했는데, 그 자격이란 다른 무엇보다 그녀도 동서들끼리의 비밀을 공유할 권리를 얻었다는 의미였다. 로즈는 특히 말이 빠르고 줄담배를 피우는 밀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너무 말라서 몸 안에 뼈가 아니라 철사가 있는 것 같은 밀리는, 영리하고 자기주장이 강했으며 자신이 결혼한 루가 어떤 남자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활하고 방탕한 남편에게 쭉 충실했던 것과는 별도로 그에 대한 모순 섞인 조롱을 끊임없이 쏟아 냈는데, 그런 현명하면서도 신랄한 모습에 로즈는 종종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아야 했다. 다음으로 조앤은 어딘가 단순한 사람이었는데,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러워서 자신이 머저리와 결혼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았다. 로즈는 그녀가 너무나 좋은 엄마라고, 무척 온화하고, 인내심 있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하면 입담이 매서웠던 밀리는, 역시 조앤의 아이들만큼 행동이 바르지는 않았던 자신의 아이들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밀리의 두 아이는 열한 살 앤드루와 아홉 살 앨리스였고, 조앤의 세 아이는 열 살 잭과 여덟 살 프랜시, 그리고 여섯 살 루스였다. 모두 나름대로 매력적인 아이들이었지만 앤드루는 예외였는데, 그 아이는 거칠고 공격적인 면이 있어서 동생을 때린 일로 밀리에게 자주 야단맞았다. 로즈가 가장 좋아했던 아이는 프랜시, 이론의 여지 없이 프랜시였는데, 그건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너무 아름답고, 너무 눈에 띄게 생기가 넘쳤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나던 날 서로 첫눈에 반한 것만 같았는데, 키가 크고 머리가 적갈색인 프랜시는 로즈 품에 달려들며 로즈 숙모, 우리 새 로즈 숙모, 너무 예뻐요, 너무 예뻐요, 진짜 너무 예뻐요, 이제 우리 영원히 친구 하는 거예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이후로도 이어졌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완전히 빠져들어서, 로즈는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때 프랜시가 무릎 위로 올라와 학교 이야기,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 혹은 자기에게 못된 말을 한 친구 이야기, 엄마가 생일에 사주기로 한 선물 이야기 등등을 하는 상황보다 더 좋은 건 세상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아이는 부드러운 로즈의 몸에 폭 묻혀 편안해했고, 그렇게 아이가 이야기하는 동안 로즈는 머리나 볼, 등을 쓰다듬어 줬고, 그러다 보면 로즈는 자신의 몸이 떠 있는 듯한 기분이, 자신과 프랜시가 둘이서만 그 방과 집과 거리를 벗어나 하늘 위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다, 그런 가족 모임은 소름 돋을 만큼 싫었지만 거기에는 또한 보상도,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순간에 벌어지는, 기대치 않은 작은 기적들도 있었고, 로즈는 신들은 원래 비이성적이라고, 자기들이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선물을 하사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로즈는 본인도 어머니가 되기를, 아이를 낳고, 자기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고, 자기 몸 안에 또 하나의 심장이 뛰기를 바랐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슈나이더먼 사진관 일도, 언젠가 사진가로서 독립하겠다는, 간판에 본인 이름을 내건 사진관을 열겠다는 먼 훗날의 명확하지 않은 계획도 그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야망도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일보다, 아들이든 딸이든 아이를 낳고 남은 인생 동안 그 사람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스탠리도 자기 몫을 하면서 피임 없이 그녀와 사랑을 나눴고, 신혼 초기 18개월 동안 로즈는 세 번 임신했다. 하지만 세 번 모두 유산했고, 세 번 모두 임신 3개월 단계에서 그렇게 되었고, 그래서 1946년 4월, 결혼 2주년을 맞이하기까지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몸에 이상은 전혀 없다고, 건강 상태도 좋고 언젠가는 열 달을 다 채우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유산에 따른 상실은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고,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이어질수록, 하나의 실패가 다른 실패로 이어질수록 여성성 자체가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유산할 때마다 며칠을 울었고, 데이비드의 죽음으로 몇 달을 운 이후로 처음 그렇게 울었지만, 그다음엔 평소의 긍정적인 로즈, 언제나 회복하는 현실적인 로즈가 되어 낙심에 따른 자기 연민과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나곤 했다. 스탠리가 없었더라면 낙담한 그녀가 어디까지 추락했을지 장담할 수 없었는데, 그는 확고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고, 그녀의 눈물에 당황하지도 않았으며, 유산할 때마다 그건 일시적인 후퇴일 뿐 결국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확신을 줬다. 그가 그렇게 이야기해 줄 때마다 그녀는 스탠리와 가까이 있다고 느꼈고, 그 다정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아주 제대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건 당연했지만 ─ 다른 모든 증거가 그의 말이 틀렸음을 알려 주는데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 그래도 그런 위안이 되는 거짓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풀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스탠리가 매번 유산 소식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그녀의 몸에서 핏덩어리가 되어 나왔다는 사실에도 괴로워하지 않는 모습이 혼란스러웠다. 스탠리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공유하지 않는 걸까? 그녀는 궁금했다. 어쩌면 스스로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그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녀를 독차지하기를 은밀히 원하는 거라면? 충실한 마음을 가르지 않아도 되는 아내,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서 애정을 쪼개 주지 않아도 되는 아내를 원하는 거라면? 그녀는 그런 생각을 스탠리에게 말하지 않았고, 그런 근거 없는 의심으로 그를 모욕하는 일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고, 만약 스탠리가 아들로서, 동생으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너무 훌륭히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아버지 역할까지 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은 게 아닐까 자문해 보기도 했다.
1945년 5월 5일,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기 사흘 전에 아치 삼촌이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마흔아홉, 그 누구라고 해도 죽기에는 끔찍이 이른 나이였고, 상황을 더욱 어색하게 만든 건 장례식이 유럽 전승 기념일에 열렸다는 사실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애들러 가족이 묘지를 떠나 브루클린 플랫부시 애비뉴에 있는 아치의 아파트로 돌아오는 동안 사람들은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세상의 한쪽 절반에서 전쟁이 끝난 걸 흥겹고 요란하게 축하하고 있었다. 소음은 몇 시간이나 이어졌고, 아치의 아내 펄과 열아홉 살 난 쌍둥이 딸 베티와 샬럿, 로즈의 부모님과 언니, 로즈와 스탠리, 다운타운 퀸텟의 나머지 단원 네 명, 열 명 남짓한 친구와 친척, 이웃 들은 창문 차양을 내린 채 고요한 아파트 안에 앉거나 서 있어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좋은 소식이, 아치의 죽음이 불러온 무거운 분위기를 조롱하는 것 같았고, 집 밖에서 들려오는 환희에 찬 노랫소리는 무심한 신성 모독의 목소리처럼 들렸고, 브루클린 전체가 아치의 무덤 위에서 춤추는 것 같았다. 로즈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을 오후였다. 본인의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그 슬픔 역시 오래 기억할 만큼 큰 것이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밀드러드가 정신을 놓고 위스키를 일곱 잔이나 마신 뒤 소파에 쓰러졌고, 아버지가 상심해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오후에, 로즈는 운이 좋아 아이를 낳게 되면 이름을 아치로 짓겠다고 다짐했다.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 세상의 다른 쪽 절반에서도 전쟁이 끝났고, 이듬해인 1946년 중반, 로즈의 결혼 2주년 기념일이 지나고 두 달쯤 후에 슈나이더먼은 자신이 곧 은퇴할 예정이며 사진관을 매입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함께 일하면서 그녀가 발전했음을 감안할 때, 이제 능숙하고 경쟁력 있는 사진가가 되었음을 감안할 때, 로즈 본인이 사진관을 물려받을 의향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그는 물었다. 그건 슈나이더먼 씨가 그때까지 한 칭찬 중 최고였다. 로즈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와 스탠리는 교외에 집을 사기 위해, 뒷마당과 나무들, 차 두 대가 들어가는 차고가 있는 주택을 사기 위해 지난 2년간 저축하고 있었고, 집과 사진관 둘 다를 살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슈나이더먼 씨에게 남편과 상의해 보겠다고 했고, 그날 저녁 식사 후에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스탠리가 고려할 것도 없다고 대답하리라 예상했는데, 그는 그녀더러 직접 선택하라고, 주택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가격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사진관을 물려받아도 괜찮겠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했다. 로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탠리가 주택을 무척이나 사고 싶어 한다는 건 그녀도 잘 아는 사실이었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아파트로 충분하다고, 거기서 몇 년 더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다니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스탠리가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그녀를 흠모하고 그녀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그날 저녁 로즈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달라졌고, 그녀는 자신이 스탠리를 사랑하기 시작했음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만약 삶이 그런 식으로 좀 더 이어진다면 그녀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일도, 불가능해 보였던 두 번째 〈대단한 사랑〉에 빠져 휘청거리는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급하게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주택을 사고 싶으니까. 그리고 조수에서 사장이 되는 건 너무 큰 변화잖아요. 내가 그럴 준비가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될까?
스탠리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는 말에 동의했다. 다음 날 아침 사진관에서 만난 슈나이더먼 씨 역시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열흘 후, 그녀는 자신이 다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새로운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시모어 제이컵스라는 남자는 믿을 수 있는, 착하고 똑똑한 의사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녀 말에 정성껏 귀 기울이고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과거에 세 번이나 유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는 매일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생활은 그만두라고, 임신 기간에는 사진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지내라고 독촉했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구식 처방처럼 들린다는 걸 의사도 알았지만, 그는 그녀를 걱정했고 로즈에게는 이번이 아이를 가질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기회, 그녀는 코가 크고 갈색 눈동자에 동정 어린 빛을 띤 마흔두 살의 의사가 전하는, 성공적으로 엄마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에 귀를 기울이며 그렇게 되뇌었다. 이제 담배와 술도 안 됩니다, 그가 덧붙였다. 고단백 식단을 엄격히 유지하고, 매일 비타민 보충제를 드시고, 규칙적으로 특별 운동도 해야 합니다. 제가 2주에 한 번씩 왕진을 가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통증이 느껴지면 곧장 병원에 전화하셔야 합니다. 잘 아시겠습니까?
그랬다. 모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로 집을 살지 사진관을 살지 하는 딜레마도 끝이었다. 슈나이더먼과 함께했던 날들은 끝이 났고, 사진가로서 그녀의 일에 지장이 생기고 삶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로즈는 기분이 들뜨면서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자신에게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아서 들떴고, 일곱 달 동안 가택 연금 생활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혼란스러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조정해야 할 텐데, 그녀뿐 아니라 스탠리도 그래야 했다. 이제 그가 장을 보고 요리도 대부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스탠리,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일에 매달리고 있는데, 이제 일주일에 한두 번 아파트를 청소하고 빨래해 줄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추가로 돈을 써야 했다. 일상의 거의 모든 면이 달라질 것이고 그녀가 깨어 있는 시간에는 수많은 금지와 제약이 따를 텐데,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도 안 되고,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서도 안 되고, 무더운 여름에 닫힌 창문을 열려고 애써서도 안 되었다. 자신을 엄격히 지켜봐야 했고, 그동안 무의식중에 해온 수천 가지의 크고 작은 일을 신경 써야 했고, 당연히, 테니스(이제 그녀는 테니스를 좋아하게 되었다)나 수영(어릴 때부터 좋아했다)도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활력이 넘치고 운동을 좋아했던 그녀가, 늘 몸을 움직이고, 뭔가 속도를 느끼고, 전력을 다하는 활동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기분을 느꼈던 그녀가, 이제는 가만히 있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런 막막한 지루함에서 로즈를 구원해 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밀드러드였는데, 로즈가 훗날 아들에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밀드러드는 자주 집에 들르며 로즈가 꼼짝달싹 못 하고 지내야 했던 그 몇 달을 대모험의 시간으로 바꿔 줬다.
종일 집 안에서 라디오를 듣거나 그 바보 같은 텔레비전만 보면서 지낼 수는 없잖아, 밀드러드는 말했다. 한 번쯤은 머리를 쓰면서 진도를 따라잡아 보는 게 어때?
진도를 따라잡는다고? 밀드러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로즈가 물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의사 선생님이 특별한 선물을 주신 거야, 언니가 말했다. 선생님이 너를 죄수로 만들어 준 거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고 죄수에게만 있는 건 바로 시간이야. 한없이 많은 시간. 책을 읽어, 로즈. 독학을 시작하라고. 이건 기회야,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줄게.
밀드러드의 도움은 독서 목록의 형태로 전해졌다. 이어진 몇 달 동안 몇 개의 독서 목록이 만들어졌고, 당분간 영화관에 갈 수 없게 된 로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소설로 채워 나갔다. 좋은 소설들, 본인이 직접 골랐다면 끌렸을 범죄 소설이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밀드러드가 추천한 소설들, 분명 고전이면서도 로즈를 염두에 두고 고른, 로즈가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밀드러드가 생각한 책들이었는데, 그 말은 『모비 딕』, 『율리시스』, 『마의 산』은 절대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책들은 훈련이 안 된 로즈가 읽기에는 너무 벅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밖에도 고를 수 있는 책은 많았고, 한 달 한 달 지나며 몸 안에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그녀는 책 속을 헤엄치듯 돌아다녔는데, 그녀가 읽은 열 권 남짓한 책들 중에는 실망스러운 작품도 있었지만(예를 들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얄팍한 가짜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사로잡았다. 『밤은 부드러워라』, 『오만과 편견』, 『환락의 집』, 『몰 플랜더스』, 『허영의 시장』, 『폭풍의 언덕』, 『마담 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첫사랑』, 『더블린 사람들』, 『8월의 빛』, 『데이비드 코퍼필드』, 『미들마치』, 『워싱턴 스퀘어』, 『주홍 글자』, 『메인 스트리트』, 『제인 에어』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갇혀 지내는 동안 발견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큰 울림을 준 이는 톨스토이였는데, 악마 같은 톨스토이는 삶의 모든 면을 이해하는 듯했고, 그녀가 보기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정신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그 감정이나 정신의 주인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했다. 남성인 톨스토이가 여성에 관해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건지 그녀는 궁금했고, 한 사람이 그처럼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대부분 섭렵했는데,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부활』 같은 대작들뿐 아니라 짧은 작품, 그러니까 중편소설, 단편소설까지 읽었고, 그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약 1백 면짜리 소설 『가정의 행복』이었다. 젊은 신부가 품었던 환상이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깨져 가는 과정을 묘사한 작품이었는데, 너무 가슴에 와닿아 결말 부분에서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스탠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설을 다 읽은 건 오후 3시였지만 그녀의 눈은 저녁까지도 눈물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아기의 출생 예정일은 1947년 3월 16일이었지만, 3월 2일 오전 10시, 스탠리가 일하러 나가고 두 시간쯤 후에, 아직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배에 『두 도시 이야기』를 올려놓고 읽던 로즈는 갑자기 방광이 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소변을 보려고 침대 시트와 담요를 걷은 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커다란 몸뚱이를 침대 가장자리로 천천히 옮기고, 바닥에 발을 내려놓은 후 일어섰다. 화장실로 한 발 내딛기도 전에 따뜻한 액체가 허벅지 안쪽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로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창문을 마주하고 있었고, 창밖으로 안개처럼 작고 가벼운 눈발이 휘날리는 광경이 보였다. 그 순간 모든 게 멈춘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상에서 그 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앉아 삼 형제 홈 월드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직원은 스탠리가 외부에 일을 보러 나가서 점심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제이컵스가 일하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지만, 비서는 그가 막 외출했다고 알려 줬다. 이제 두려움에 빠진 로즈는, 자신이 병원에 갈 거라고 제이컵스 선생님에게 전해 달라고 한 다음 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서는 벨이 세 번 울리고 전화를 받았고, 그리하여 그날 그녀를 데리러 온 건 밀리였다. 차를 타고 베스 이즈리얼 병원의 임산부 병동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로즈는 스탠리와 자신이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미리 정해 놓았다고 이야기했다. 딸이라면 에스터 앤 퍼거슨으로 할 생각이었다. 아들이라면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밀리는 룸 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은 로즈의 상태를 살폈다. 아치볼드라, 밀리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지을 거야?
네, 그럴 거예요, 로즈가 대답했다. 아치 삼촌 때문이에요. 아이작은 아버님 이름에서 가져온 거예요.
씩씩한 아이가 되기를 바라야지, 밀리가 말했다.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들은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밀리가 가족들을 불렀고, 다음 날 새벽 2시 7분 아기가 태어나던 순간에는 모두 병원에 와 있었다. 스탠리, 로즈의 부모님, 밀드러드와 조앤, 심지어 스탠리의 어머니까지 도착했다. 그렇게 퍼거슨이 태어났고, 어머니의 몸에서 나온 후 몇 초 동안 그는 지상에서 가장 어린 인간 생명체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로즈이고, 그는 나중에 신발 끈을 직접 매고 침대에 오줌을 싸지 않을 만큼 자라면 어머니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퍼거슨은 로즈가 이미 자기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나이 든 사람이고 머지않아 죽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면 퍼거슨은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고, 그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스탠리가 아니라 아치일 것이었다. 아버지가 죽는 건 슬픈 일이지만 너무 슬픈 일은 아니었고,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픈 일은 아니었다. 눈물은 아기들이나 흘리는 것이고, 그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었다. 여전히 눈물이 나오는 순간은 있었는데, 그건 당연하지만, 넘어지거나 다쳤을 때뿐이었고, 다쳤을 때는 예외였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 바닐라아이스크림과 부모님 침대에서 뛰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건 복통과 열이었다.
그는 이제 사워볼 사탕이 위험하다는 걸 안다. 그 사탕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더 이상 입에 넣어서는 안 된다. 너무 미끄러워서 삼키지 않을 수가 없는데, 사탕이 너무 커서 배 속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기도에 걸릴 수 있고, 그러면 숨쉬기가 곤란할 것이다. 사탕을 먹다 캑캑거렸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달려와 그를 들어 올려서는 뒤집어서 한 손으로 발목을 쥐고, 그의 입에서 사워볼이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다른 손으로 등을 두드렸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사워볼은안되겠다,아치.너무위험해. 그 사건 이후로 어머니는 그와 함께 사워볼이 든 그릇을 주방으로 가져가서,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사탕을 하나씩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디오스,사워볼.그렇게 재미있는 단어가 있었다. 아디오스.
그 일이 벌어진 건 뉴어크의 아파트 3층에 살던 아주 오래전이었다. 이제 그들은 몬트클레어라는 동네에 있는 주택에 살았다. 주택은 이전의 아파트보다 컸는데, 사실 이제 그 아파트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워볼 사건, 그의 방에 있던 베니션 블라인드, 어머니가 유아용 침대를 접어서 넣고 그가 처음으로 침대에서 혼자 잠든 날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종종 퍼거슨이 깨기 전에 나가기도 했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퍼거슨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일을 했다. 그게 남자 어른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 집을 나서서 일했고, 그렇게 일했기 때문에 돈을 벌었고, 돈을 벌었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사줄 수 있었다. 그게 어느 날 아침 아버지의 파란색 자동차가 집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그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괜찮은 합의인 것 같다고 퍼거슨은 생각했지만, 돈과 관련한 부분은 좀 혼란스러웠다. 돈은 아주 작고 더러운데, 그 작고 더러운 종잇조각이 어떻게 자동차나 집처럼 커다란 것들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걸까?
부모님은 차가 두 대 있었는데, 아버지의 파란색 디소토와 어머니의 녹색 셰보레였다. 퍼거슨은 차가 서른여섯 대 있었고, 비가 와서 밖에 나갈 수 없는 우울한 날이면 그것들을 상자에서 꺼내 거실 바닥에 미니어처 행렬을 만들곤 했다. 문이 두 개 달린 차와 네 개 달린 차, 컨버터블과 덤프트럭, 경찰차와 구급차, 택시와 버스, 소방차와 시멘트 믹서, 배달 트럭과 스테이션왜건, 포드와 크라이슬러, 폰티액과 스튜드베이커, 뷰익과 내시 램블러, 한 대 한 대가 모두 달랐고, 조금이라도 비슷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으며, 그중 하나를 거실 바닥에서 밀며 놀 때면 퍼거슨은 허리를 굽혀 텅 빈 운전석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운전사가 필요하니까, 그는 자신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상상을 했다. 아주 작은 사람, 엄지손가락 맨 위 마디만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담배를 피웠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피우지 않았는데, 파이프 담배나 시가도 피우지 않았다. 올드 골드. 참 듣기 좋은 이름이라고 퍼거슨은 생각했고, 어머니가 담배 연기로 고리를 만들어 줄 때마다 큰 웃음을 터뜨렸다. 종종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로즈,당신담배너무많이피우는것같아라고 했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지만, 여전히 이전만큼 많이 피웠다. 그와 어머니는 녹색 차를 타고 일을 보러 나갈 때마다 앨스 다이너라는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가 초코우유와 그릴드치즈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면 어머니는 25센트짜리 동전을 주며 담배 자판기에서 올드 골드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동전을 받을 때마다 그는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그 기분을 만끽하며 화장실 사이 벽면에 담배 자판기가 세워져 있는 식당 뒤쪽으로 씩씩하게 달려갔다. 자판기 앞에 도착하면 뒤꿈치를 들고 팔을 뻗어 투입구에 동전을 넣고, 잔뜩 쌓여 있는 올드 골드 아래쪽의 손잡이를 당기고, 커다란 기계 안에 있던 담뱃갑이 손잡이 아래 은색 홈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담뱃값은 25센트가 아니라 23센트였고, 한 갑이 나올 때마다 새로 주조된 1센트짜리 동전 두 개가 셀로판 포장지 안에 함께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 2센트는 퍼거슨이 갖게 했고, 어머니가 식후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저 마시는 동안 그는 손바닥 위에 동전 두 개를 놓고 거기 새겨진 남자의 옆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혹은 어머니가 종종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정직한에이브였다.
퍼거슨과 부모님만 있는 작은 가족 외에 생각해야 할 두 가족이 더 있었다. 아버지의 가족과 어머니의 가족, 즉 뉴저지의 퍼거슨 집안과 뉴욕의 애들러 집안이었다. 한쪽은 삼촌 두 명과 숙모 두 명, 사촌 다섯 명이 있는 대가족이었고, 다른 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밀드러드 이모만 있는 소가족이었는데, 종종 펄 종조할머니와 쌍둥이 어른 사촌인 베티와 샬럿이 포함될 때도 있었다. 루 삼촌은 날렵한 콧수염을 기르고 철테 안경을 썼으며, 아널드 삼촌은 캐멀 담배를 피우고 머리가 붉은색이었다. 조앤 숙모는 키가 작고 통통했으며, 밀리 숙모는 키가 조금 더 크고 아주 말랐다. 사촌들은 자기들보다 많이 어리다는 이유로 대부분은 퍼거슨을 무시했는데, 프랜시만은 예외여서 퍼거슨의 부모님이 영화를 보러 가거나 다른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갈 때면 그녀가 와서 그를 봐주곤 했다. 프랜시는 뉴저지 가족 중에서 그가 압도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름답고 복잡한 성이나 말을 탄 기사들을 그려 줬고, 바닐라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게 해줬고, 재미있는 농담을 해줬고, 언제 봐도 예뻤으며, 갈색과 붉은색이 섞인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밀드러드 이모도 예뻤지만 머리카락이 어머니처럼 짙은 갈색이 아니라 금발이었고, 어머니는 밀드러드 이모가 자기 언니가 맞다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두 사람이 너무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그는 종종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파파라고 부르고 할머니는 나나라고 불렀다. 파파는 체스터필드 담배를 피웠고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지고 없었다. 나나는 조금 통통한 편이었고 마치 목 안에 새가 갇혀 있는 것처럼 재미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유니언과 메이플우드에 있는 퍼거슨 가족의 주택보다는 뉴욕에 있는 애들러 가족의 아파트에 가는 게 더 좋았는데, 특히 홀랜드 터널을 지날 때면 수백만 개의 똑같은 정사각형 타일이 붙은 해저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신기한 느낌이 들었고, 그 해저 여행을 할 때마다 타일들이 그토록 깔끔하게 맞아 들어가 있는 모습에 놀랐고, 그토록 엄청난 작업을 하려면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했을지 궁금했다. 뉴욕의 아파트는 뉴저지의 집보다 작았지만 고층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아파트는 6층이었고, 거실 창밖으로 콜럼버스 서클 주위를 지나는 차들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 질리지 않았는데, 특히 추수 감사절이면 창문 바로 앞을 지나가는 연례 퍼레이드를 구경할 수 있었고, 커다란 미키 마우스 풍선이 얼굴을 스치는 것만 같았다. 뉴욕에 가는 일이 또 좋았던 건, 아파트에 도착하면 늘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주는 사탕 상자, 밀드러드 이모가 주는 책과 음반, 그리고 발사나무로 만든 모형 비행기, 파치지(이 또한 멋진 단어였다)라는 보드게임, 여러 종류의 놀이 카드, 마술 도구, 빨간색 카우보이모자, 진짜 가죽 총집에 든 6연발 장난감 총 세트 등, 할아버지가 주는 온갖 특별한 선물들이 있었다. 뉴저지 집에는 그런 풍성함이 없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바로 뉴욕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왜 우리는 뉴욕에 계속 살 수 없냐고 묻자, 어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한테물어봐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는 엄마한테물어봐라고 했다. 그가 보기에 어떤 질문에는 대답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남자 형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건 이제 불가능하니까 남동생이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만약 남자 형제가 아니라면 여자 형제, 심지어 여동생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놀거나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는 건 종종 외로웠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남자 형제나 여자 형제가 있고, 몇 명씩 되는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으며, 적어도 그가 아는 한 세상 어디를 봐도 자신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프랜시에게는 잭과 루스가 있었고, 앤드루와 앨리스에게도 서로가 있었고, 길 아래쪽에 사는 친구 보비에게는 남자 형제 하나와 여자 형제 둘이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도 어릴 때는 형제자매와 함께 지냈는데, 아버지에게는 형이 둘 있었고 어머니에게는 언니가 있었다. 수십억 명의 세상 사람들 중 자신만 평생 홀로 지내야 한다는 건 불공평해 보였다. 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아기는 엄마 배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렇다면 엄마가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 정도는 배웠고, 그 말은 자신의 지위를 독자(獨子)에서 누군가의 형제로 바꾸려면 우선은 어머니와 대화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아침 퍼거슨은 그 문제를 꺼냈고, 자기를 위해 새 아기를 만드는 일을 서둘러 주지 않겠냐고 어머니에게 갑자기 부탁했다. 어머니는 몇 초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눈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이상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혀 기대하던 상황이 아니었는데, 1~2초 동안 어머니는 슬퍼 보였고, 너무 슬퍼 보여서 퍼거슨은 순간 그런 부탁을 한 걸 후회했다. 이런, 아치, 어머니가 말했다. 당연히 동생이 있으면 좋겠지, 나도 네가 동생을 갖게 해주고 싶단다. 그런데 엄마는 아기 낳는 일을 끝마쳤고 더는 못 할 것 같아. 의사 선생님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네가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도 같아. 왠지 아니? (아치는고개를저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꼬마 아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 안에 있는 사랑은 모두 너를 위한 것뿐인데 어떻게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있겠니?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는 깨달았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형제자매는 앞으로도 없을 테고, 그건 퍼거슨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상상의 동생을 만드는 우회로를 택했다. 절박한 행동이었을지언정 분명 아무것도 없는 상황보다는 나았고, 그 존재를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을 수 없다고 해도 그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새로 태어난 남자 형제를 존이라고 불렀다. 현실 법칙 따위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네 살이 많았는데, 그 말은 존이 퍼거슨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며 똑똑하다는 뜻이었고, 길 아래쪽에 사는 보비 조지, 늘 축축한 녹색 콧물로 코가 막혀 있어서 입으로 숨을 쉬는 보비 조지와 달리 존은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며, 야구와 미식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의미였다. 퍼거슨은 다른 사람들이 방 안에 함께 있을 때는 절대 소리 내어 존에게 말을 걸지 않았는데, 존은 그만의 비밀이었고, 다른 사람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도 그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 한 번 실수한 적이 있지만 마침 프랜시와 함께 있을 때 벌어진 일이라 문제는 없었다. 그날 저녁 프랜시가 그를 봐주러 와 있었는데, 다음 생일에 말을 선물로 받고 싶다고 그가 존에게 말하는 걸 뒷마당에 나가다가 듣고는 누구와 대화하는 거냐고 물었다. 퍼거슨은 프랜시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가 자신을 비웃을 줄 알았는데, 프랜시는 마치 상상 속 형제를 만드는 일에 동의한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그래서 그는 프랜시도 존에게 말을 걸 수 있게 허락해 줬다. 이어진 몇 달 동안 그가 프랜시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먼저 평소 목소리로 퍼거슨에게 인사한 다음,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는 안녕, 존, 하고 속삭였다. 퍼거슨은 아직 다섯 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이미 세상에는 두 개의 영역이 있음을, 눈에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고, 가끔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보다 훨씬 더 생생할 수 있음을 이해했다.
제일 좋은 곳은 뉴욕에 있는 할아버지의 사무실과 뉴어크에 있는 아버지의 상점이었다. 할아버지 사무실은 두 분이 사는 아파트에서 한 블록 떨어진 웨스트 57번가에 있었는데, 우선 마음에 드는 점은, 아파트보다 높은 11층에 있었기 때문에 웨스트 58번가에서 창밖을 내다볼 때보다 훨씬 재미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변의 훨씬 먼 곳까지 시선이 가닿았기 때문에 센트럴 파크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건물을 구경할 수 있었고, 아래쪽 거리의 자가용과 택시 들도 더 작아 보여서 마치 집에서 갖고 노는 장난감 자동차 같았다. 다음으로 좋은 점은 사무실에 타자기와 계산기가 놓인 커다란 책상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타자기 소리는 종종, 특히 줄이 바뀌면서 벨이 울릴 때면 음악 같았고, 몬트클레어 집의 지붕을 때리는 세찬 빗소리나 창문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할아버지의 비서는 도리스라는 깡마른 여성이었는데, 팔뚝에 검은색 털이 나 있고 숨을 쉴 때면 민트 향이 났다. 그는 도리스가 자신을 〈퍼거슨 님〉이라고 불러 주고, 도리스 본인이 〈언더우드 씨〉라고 부르는 타자기를 쓸 수 있게 해줘서 좋았는데, 그는 이제 막 알파벳을 깨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 육중한 기계의 자판에 손가락을 얹고 a 자나 y 자를 길게 쳐보면 기분이 좋았고, 혹은 도리스가 바쁘지 않을 때면 그녀에게 자기 이름을 쳐볼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뉴어크의 상점은 뉴욕의 사무실보다 훨씬 컸고 물건이 아주 많았다. 뒤편 사무실에 타자기 한 대와 계산기 세 대가 있었을 뿐 아니라 매장에는 수많은 소형 도구와 대형 가전제품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2층 전체에는 수많은 침대와 탁자, 의자가 진열되어 있었다. 퍼거슨은 그 물건들을 만지면 안 되었는데, 아버지와 삼촌들이 없을 때면, 혹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면 종종 냉장고 문을 슬쩍 열고 특유의 냄새를 맡아 보거나, 침대에 몸을 던져 스프링을 시험해 봤다. 그런 짓을 하다 들켜도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널드 삼촌만은 가끔씩 예외였는데, 삼촌은 종종 그를 붙잡고 물건 만지면 안 돼, 아가, 하고 무서운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는 그런 투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어느 토요일 오후 삼촌이 뒤통수를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아파서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특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아널드 삼촌은 얼간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하는 걸 엿들은 후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텔레비전 구경을 시작하고부터 침대와 냉장고는 더 이상 그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필코사와 에머슨사의 신제품 텔레비전은 다른 모든 진열 상품을 압도했다. 열두 개 혹은 열다섯 개의 모델이 출입구 왼편의 벽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고, 모두 소리를 죽인 채 켜놓은 상태였는데, 퍼거슨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각 텔레비전에서 서로 다른 일곱 개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나오게 하는 걸 무엇보다 좋아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화면들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건 정신이 나갈 만큼 즐거운 일이었다. 첫 번째 화면에는 만화, 두 번째 화면에는 서부극, 세 번째 화면에는 드라마, 네 번째 화면에는 교회 예배 장면, 다섯 번째 화면에는 광고, 여섯 번째 화면에는 뉴스 진행자, 일곱 번째 화면에는 미식축구 시합이었다. 퍼거슨은 이 화면 앞에서 저 화면 앞으로 뛰어다니고,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까지 원을 그리며 돌았는데, 점점 화면에서 멀어지며 돌았고, 덕분에 동작을 멈추면 일곱 개의 화면을 모두 동시에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면 늘 웃음이 났다. 정말, 정말 재미있었고, 아버지 역시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놀이를 하게 내버려 뒀다.
아버지는 대체로 재미있지 않았다. 일주일에 6일은 아주 오래 일했는데, 가장 길게 일하는 날은 수요일과 금요일, 상점을 밤 9시까지 여는 날이었고, 일요일에는 오전 10시나 10시 30분까지 늦잠을 자고 오후에 테니스를 쳤다. 아버지가 제일 자주 하는 말은 엄마말잘듣고였고, 제일 자주 하는 질문은 착하게지냈지?였다. 퍼거슨은 착하게 지내며 엄마 말을 잘 들으려 애썼고, 가끔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착하게 지내거나 엄마 말을 듣는 걸 까먹을 때도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아버지는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너무 바빠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고, 퍼거슨은 그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착하게 굴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어머니는 좀처럼 그를 야단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밀리 숙모가 아이들에게 그러듯이 그에게 고함을 치지도 않고, 아널드 삼촌이 잭에게 그러듯이 그를 때린 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퍼거슨 집안에서 자기 가족이, 비록 너무 작기는 하지만 최고의 가족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버지가 그를 웃게 만들 때도 종종 있었는데, 그런 순간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아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더라면 그렇게 크게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재미있는 일들 중 하나는 아버지가 그를 높이 던져 주는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아주 힘이 센 데다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근육 덩어리였기 때문에, 그 놀이를 실내에서 할 때면 퍼거슨은 거의 천장까지 올라갔고 뒷마당에서 할 때면 더 높이 올라갔다. 아버지가 자신을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고, 그 말은, 그가 자신이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상태로 있는 힘껏 입을 벌리고 배 속에 있는 공기를 내뱉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는 뜻이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은 아버지가 주방에서 오렌지로 저글링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로 재미있는 일은 아버지의 방귀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방귀 자체로도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있는 자리에서 방귀를 뀔 때마다 아버지가 저런, 호피가 간다,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호피는 퍼거슨이 아주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카우보이 호펄롱 캐시디였다. 아버지가 방귀를 뀐 후에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였지만, 아무튼 퍼거슨은 그게 좋았고 아버지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방귀를 호펄롱 캐시디라는 카우보이로 변신시키는 건 정말 이상하고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퍼거슨의 다섯 번째 생일 직후에 밀드러드 이모가 헨리 로스와 결혼했다. 키가 크고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남자였는데, 밀드러드 이모와 마찬가지로 대학교수라고 했다. 이모는 4년 전 영문학 공부를 마치고 배서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새로 생긴 이모부는 팰 맬 담배를 피웠고(탁월한선택인데다가순한편이었다) 아주 예민한 것 같았는데, 오후 동안에만 어머니가 온종일 피우는 양보다 훨씬 많은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퍼거슨이 보기에 밀드러드 이모의 남편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말을 너무 빨리, 그것도 아주 길고 복잡한 단어들을 섞어서 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처럼 보였고, 웃을 때면 유쾌한 울림이 있었고, 눈빛도 환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어머니가 밀드러드 이모의 선택에 기뻐하는 게 분명했다. 어머니는 헨리 이모부 이야기를 할 때마다 훌륭하다라는 단어를 썼고, 볼 때마다 렉스 해리슨이라는 사람이 생각난다고 했다. 퍼거슨은 이모와 이모부가 아기와 관련한 일에 착수해서 얼른 그를 위해 꼬마 사촌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상상 속 형제는 결국 한계가 있었고, 어쩌면 애들러 집안의 사촌은 〈거의-남동생〉, 혹은 아쉬운 대로 〈거의-여동생〉 비슷한 뭔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그는 그런 발표를 기다렸고, 매일 아침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밀드러드 이모가 아기를 낳을 거라고 이야기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때 무슨 일이 생겼고, 예상치 못한 그 불행 때문에 퍼거슨이 조심스럽게 세운 계획은 모두 엎어지고 말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살면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고, 그 말은 두 사람이 그를 위해 사촌을 한 명 만들어 준대도 그 사촌이 〈거의-남동생〉이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남동생이나 〈거의-남동생〉이라면 반드시 근처에, 이상적으로는 같은 집에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미국 지도를 꺼내 캘리포니아주의 위치를 알려 줬을 때, 그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오하이오주, 캔자스주, 유타주를 비롯해 뉴저지주와 태평양 사이에 있는 모든 주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약 4천8백 킬로미터. 불가능한 거리였고, 너무 멀어서 거의 다른 나라, 다른 세계 같았다.
밀드러드 이모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던 날, 녹색 셰보레를 타고 어머니와 이모와 함께 공항으로 갔던 일은 그의 유년 시절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것이었다. 헨리 이모부는 2주 전에 먼저 떠났기 때문에, 8월 중순의 뜨겁고 습했던 그날 함께 갔던 건 이모뿐이었다. 반바지 차림으로 뒷좌석에 타고 있던 퍼거슨은 머리에 땀이 나고, 인조 가죽 시트에 맨다리가 쩍쩍 붙었다. 처음 공항에 가본 날이었고, 비행기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기계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 수도 있었지만, 그날 아침의 기억이 그에게 남은 이유는 두 여성, 즉 어머니와 이모, 한 명은 짙은 갈색 머리이고 한 명은 금발인, 한 명은 긴 머리이고 한 명은 짧은 머리인, 너무 달라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걸 알려면 얼굴을 한참 들여다봐야 하는 두 여성, 다정하고 따뜻한, 늘 쓰다듬고 안아 주는 어머니와 늘 방어적이고 한 발 물러나는, 좀처럼 사람과 몸을 접촉하는 일이 없는 이모가, 샌프란시스코행 팬 앰 항공기의 탑승구 앞에 함께 있었고,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작별할 시간이 되자 갑자기, 그게 마치 미리 정해져 있던 비밀 신호라도 되는 듯 흐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며 바닥에 떨어졌고,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았고, 그렇게 흐느끼면서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의 앞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고, 이모의 경우에는 그렇게 직접 자기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이모가 울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거기 두 사람이 그의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며 흐느끼고 있었고, 둘 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것임을 알고 있었고, 퍼거슨은 다섯 살의 몸으로 엄마와 이모를 올려다보며 두 사람이 쏟아 내는 넘치는 감정에 놀랐고, 그 광경이 너무 인상이 강해서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이듬해 11월, 퍼거슨이 1학년에 입학하고 두 달 후 어머니는 몬트클레어 시내에 사진관을 열었다. 출입구 위의 간판에는 로즐랜드 사진관이라고 적혀 있었고, 갑자기 퍼거슨 가족의 삶은 새롭고 더 빠른 리듬으로 흘러갔다. 아침마다 허둥대며 한 명이 제시간에 학교에 가고 나면 다른 두 명은 각자 차를 타고 일터로 향했는데, 이제 그의 어머니가 일주일에 5일 동안(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집을 비웠기 때문에, 집안일을 해주는 캐시라는 여성이 와서 청소, 잠자리 정리, 식료품 구입 등등의 일을 했고, 가끔 부모님이 늦게까지 일하는 날에는 퍼거슨에게 저녁까지 차려 줬다. 이제 그는 어머니를 보는 일이 줄었지만 실상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일도 줄었다. 어차피 이제 신발 끈도 혼자 맬 수 있었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할 때면 그는 두 후보를 두고 망설였다. 캐시 골드는 키가 작고 파란 눈에 긴 금발을 묶고 다니는 아이였고, 마지 피츠패트릭은 키가 아주 크고 머리칼이 붉으며 힘이 무척 세고 겁이 없어서 남자아이 둘을 한 번에 들어 올릴 수도 있는 아이였다.
로즐랜드 사진관에서 맨 먼저 사진을 찍은 손님은 사진관 주인의 아들이었다. 퍼거슨의 어머니는 그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래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찍었는데, 그건 모두 스냅 사진이었고 사용한 카메라도 작고 가벼운, 갖고 다닐 수 있는 카메라였다. 반면 사진관에서 쓰는 카메라는 훨씬 컸기 때문에 다리가 셋 달린 트라이포드tripod라는 기구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는 트라이포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말은 같은콩깍지에든콩두알3이라는 표현처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인 콩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그는 어머니가 사진을 찍기 전에 조명을 아주 정교하게 조정하는 걸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자신이 하는 일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듯 보였고, 그렇게 기술과 확신을 갖추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퍼거슨은 어머니에 대해 좋은 느낌이 들었고, 갑자기 어머니는 그저 어머니일뿐 아니라 세상에 나가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에게 좋은 옷을 입게 했는데, 그 말은 트위드 스포츠 재킷에 맨 위 단추가 없고 깃이 넓은 흰색 셔츠를 입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퍼거슨은 가만히 앉아서 어머니가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과정을 즐겼기 때문에, 어머니가 웃으라고 할 때마다 어렵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날은 브루클린에서 온 어머니의 친구 낸시 솔로몬도 함께 있었는데, 결혼 전 이름은 낸시 페인이었던 그녀는 당시 웨스트오렌지에 살고 있었다. 두 아들과 함께 온 뻐드렁니의 낸시는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그로서는 평생 알고 지내 온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필름을 현상한 후에 그중 사진 한 장을 확대해서 캔버스에 옮기고, 그다음 낸시가 덧칠을 해서 사진을 유화 초상화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그건 로즐랜드 사진관이 고객에게 제공하게 될 특별 서비스였는데, 말하자면 흑백 초상 사진뿐 아니라 컬러 유화도 주는 것이었다. 퍼거슨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변신을 만들어 내는 낸시는 대단히 좋은 화가가 틀림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2주 후 토요일, 그와 어머니는 아침 8시에 차를 몰고 몬트클레어 시내로 나갔다. 거리는 거의 텅 비어 있었고, 그 말은 로즐랜드 사진관 바로 앞에 주차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는데, 상점을 20~30미터 앞둔 시점부터 어머니는 퍼거슨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막 입을 열고 말을 하려는 순간 어머니가 〈질문은 안 돼, 아치〉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고, 어머니는 사진관 앞에 차를 세운 후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릴 수 있게 도와준 다음 자신이 원하는 위치로 그를 데려갔다. 됐어, 이제 눈 떠도 돼. 어머니가 말했다. 눈을 뜬 퍼거슨은 어머니 사진관의 새 진열장 앞에 서 있음을 깨달았고, 그 진열장에는 자신의 커다란 이미지가 두 장 전시되어 있었는데, 각각 가로 60센티미터, 세로 90센티미터 정도였고, 첫 번째 건 흑백 사진, 두 번째 건 첫 번째 사진을 정확히 복제한 컬러 유화로, 후자는 모래색 머리칼이나 녹회색 눈, 그리고 빨간색 무늬가 있는 갈색 재킷까지 실제와 똑같았다. 낸시의 붓놀림은 아주 정교하고 묘사가 정확해서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게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몇 주가 지났고, 그동안 그 이미지들이 계속 진열되어 있었으므로 낯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길에서 불러 세우고는 로즐랜드 사진관 진열장 속 꼬마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몬트클레어에서 가장 유명한 여섯 살 소년, 어머니의 사진관에 걸린 포스터 소년,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1954년 9월 29일, 퍼거슨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열이 38.7도 가까이 올라갔고, 전날 밤에는 어머니가 침대 옆에 놔둔 알루미늄 스튜 냄비에 먹은 걸 다 토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출근하며 그에게 잠옷 차림 그대로 집에 있으면서 가능한 한 잠을 많이 자라고 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 누워서 만화책을 봐도 된다고 했고, 화장실에 갈 때는 슬리퍼를 꼭 신어야 한다고도 했다. 1시가 되자 열은 37.2도로 떨어졌고 아래층에 내려가 캐시에게 뭐 좀 먹을 수 있겠냐고 물어볼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캐시는 스크램블드에그와 토스트를 만들어 줬고, 음식을 먹은 후에도 속이 불편하지 않자 그는 주방 옆에 있는 작은 방, 부모님이 굴이라고 부르는 작은 거실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켰다. 캐시도 따라 들어와 함께 소파에 앉으며 몇 분 후면 월드 시리즈 1차전이 열릴 거라고 했다. 월드 시리즈. 그게 뭔지는 그도 알았지만, 정규 시즌 경기만 한두 번 봤지 월드 시리즈 경기를 본 적은 없었다. 야구를 싫어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야구 경기 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단지 낮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는 대부분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었고, 밤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주요 선수 몇 명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윌리엄스, 뮤지얼, 펠러, 로빈슨, 베라. 하지만 특정 팀을 응원하지는 않았고, 『뉴어크 스타레저』나 『뉴어크 이브닝 뉴스』의 스포츠면을 읽지도 않았으며, 팬이 된다는 게 어떤 뜻인지도 몰랐다. 그와 대조적으로 서른여덟 살의 캐시 버튼은 브루클린 다저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재키 로빈슨이 그 팀에서 뛰고 있기 때문이었다. 등 번호 42번의 그 2루수를 그녀는 늘 나의재키라고 불렀는데,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최초의 흑인이었다. 퍼거슨은 그 사실을 어머니와 캐시, 둘 다에게 들었는데, 본인이 흑인이던 캐시가 그 주제에 관해서는 할 말이 더 많았다. 열여덟 살 때까지 조지아에 살았던 캐시는 강한 남부 억양으로 말했고, 퍼거슨은 그 억양이 이상하면서도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특유의 나른한 음악성 때문에 캐시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절대 지루하지 않았다. 올해는 다저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고 캐시는 말했다. 자이언츠에게 졌는데, 자이언츠도 지역 팀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 팀에도 훌륭한 유색 인종 선수들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그녀는 유색인종이라는 단어를 썼다. 퍼거슨의 어머니는 피부가 검은색이나 갈색인 사람을 가리킬 때면 니그로라는 표현을 쓰라고 알려 줬기 때문에, 그는 니그로가 니그로라는 단어 대신 유색인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보여 주는 ─ 또 다른 ─ 예였다). 자이언츠에도 윌리 메이스나 행크 톰프슨, 몬티 어빈 같은 선수들이 있지만, 아메리칸 리그 최다승 기록을 세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한번 보자고, 캐시는 도박사들이 계산한 승률에 기죽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그녀와 퍼거슨은 자리를 잡고 앉아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리는 시합을 시청했다. 클리블랜드가 1회 초에 두 점을 내면서 불길하게 시작했지만, 자이언츠가 3회 말에 동점을 만들었고 그다음부터는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졌는데(매글리 대 레먼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딱히 할 일이 없이 타석에서 안타 하나만 바라고 있었고, 덕분에 시합이 진행될수록 공 하나하나가 점점 더 극적이고 중요해졌다. 4회 연속으로 양 팀의 어느 선수도 1루를 밟지 못하다가 갑자기 8회 초에 인디언스 주자 두 명이 출루하고 타석에는 빅 워츠가 들어섰다. 왼손 강타자가 자이언츠의 구원 투수 돈 리들이 던진 직구를 받아쳤고 공은 중견수 쪽으로 깊이 날아갔다. 너무 멀리 날아가서 퍼거슨은 홈런이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야구와 관련해서는 아직 신참이었기 때문에 폴로 그라운즈가 아주 이상하게 지어진 구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홈 플레이트에서 중견수 쪽 펜스까지 거리가 모든 야구장들 중에서 제일 긴 147미터쯤이었고, 그 말은 워츠가 날린 뜬공이, 다른 구장이었다면 홈런이 되었을 그 타구가 외야석에 떨어질 일은 없었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워츠가 친 공은 벼락 같은 타구였고, 중견수 머리 위로 넘어가 펜스까지 굴러가서 적어도 3루타, 어쩌면 장내 홈런이 되어 인디언스가 2점 혹은 3점을 낼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퍼거슨은 모든 가능성을 엎어 버리는,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에서 목격한 모든 인간적 성취를 능가하는 운동선수의 위력을 봤는데, 거기 젊은 선수 윌리 메이스가 있었던 것이다. 메이스는 등을 내야 쪽으로 돌린 채 공을 쫓아 달렸는데, 퍼거슨은 사람이 그렇게 달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공이 워츠의 배트를 떠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러니까 마치 공이 나무 배트에 맞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 공이 어디에 떨어질지 정확히 알았다는 듯이, 윌리 메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공을 향해 질주했다. 공을 보지 않아도 전체 궤적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달렸고, 포물선의 정점에 도달한 타구는 홈 플레이트에서 134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낙하했고, 그 자리에는 윌리 메이스가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있었고, 공은 왼쪽 어깨를 지나 그가 내민 글러브에 정확히 들어갔다. 메이스가 공을 잡은 순간 캐시는 소파 위로 뛰어오르며 쉰 목소리로 좋았어!좋았어!좋았어! 소리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