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LENCE OF THE LAMBS
by Thomas Harris
Copyright © 1988 by Yazoo Fabrications, Inc.
All rights reserved including the rights of reproduction in whole or in part in any form.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9 by Tornado Media Group
This transla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Janklow & Nesbit Associates through Imprima Korea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Imprima Korean Agency를 통한 Janklow & Nesbit Associates와의 독점 계약으로 토네이도미디어그룹(주)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일러두기
1.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 지명, 기관명 등은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지만 일부 단어에 대해서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했다.
2. 괄호 안 설명은 모두 옮긴이 주이다.
3. 단행본은 《 》, 연속간행물, 시, 영화, 방송, 음악 등은 〈 〉로 표기했다.
4. 본문 속 성경 인용구는 개신교 새번역을 따랐다.
아버지를 추모하며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5장 32절
내가 반지에 새겨진 죽음의 머리를 굳이 보아야 할까?
내 얼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을.
- 존 던의 시집 《뜻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묵상》 중
연쇄 살인을 다루는 FBI 내 행동과학부는 콴티코 기지 연수원 건물의 반지하식 일 층에 있었다. 사격 훈련장에 있다가 호건 로路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온 클라리스 스탈링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상태였다. 범인을 체포할 때의 사격 요령을 배우느라 바닥에 엎드리고 뒹구는 바람에 머리카락에 풀잎이 붙었고 FBI 연수원 마크가 찍힌 방풍 재킷에도 잔디 얼룩이 묻었다. 외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탈링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깐 살폈다. 이제 와서 몸단장할 필요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튀어오라는 잭 크로포드 부장의 호출을 받은 터라 손에서 화약 냄새가 났지만 씻을 시간이 없었다.
어수선한 사무실로 들어가자 남의 책상 앞에 홀로 서서 통화하는 잭 크로포드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스탈링은 충격을 받았다. 스탈링이 아는 크로포드는 본인 직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중년의 수완가였다. 그 나이에도 홈플레이트 뒤에서 거칠고 솜씨 좋은 포수로 활약하는 걸 보면, 대학 시절 야구 쪽 재능으로 학비를 해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셔츠 옷깃이 헐거워질 정도로 깡말랐고 핏발 선 눈 밑은 다크서클이 선명한 채로 부어 있었다. 신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행동과학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탈링은 크로포드가 술에 취해 있지 않으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크로포드는 날카롭게 ‘아뇨’라고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러고는 겨드랑이 밑에 끼우고 있던 서류철을 꺼내 펼쳤다.
“클라리스 M. 스탈링. 좋은 아침이야.”
“네, 안녕하세요.”
스탈링은 예의상 미소를 약간 지어 보였다.
“그래. 안녕해. 전화받고 놀란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다지요.”
‘당연히 놀랐지…….’ 스탈링은 생각했다.
“자네에 대한 교관들의 평가가 좋던데. 상위 15퍼센트 안에 든다고.”
“저도 바라던 바이긴 합니다만 교관님들이 성적을 공개 게시하진 않았습니다.”
“내가 가끔 그쪽에 연수생들 성적을 요청하거든.”
그 말에 스탈링은 깜짝 놀랐다. 스탈링은 크로포드 부장이 겉과 속이 다른 개 같은 모병담당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스탈링이 특수 요원 잭 크로포드를 처음 만난 건 그가 버지니아 대학교에 초빙강사로 왔을 때였다. 스탈링은 그가 진행한 범죄학 세미나 수업을 듣고 감동해 FBI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FBI 연수원에 들어간 후에는 그에게 행동과학부로 가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만 그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스탈링이 콴티코에서 연수받는 석 달 동안 그는 철저히 그녀를 무시했다. 스탈링은 타인의 호의나 우정을 애걸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크로포드의 냉담한 반응에 당황해 연락한 것 자체를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마주하고 보니 예전의 호감이 되살아나서, 괜히 그를 비난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크로포드는 본래 지적이고 특유의 기민함이 있는 인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다른 FBI 요원들과 똑같아 보이는 복장이지만 옷의 색감과 질감이 미묘하게 달랐다. 지금 그의 복장은 여전히 깔끔하긴 했지만 마치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생기 없이 칙칙했다.
“일거리가 생겼는데 자네 생각이 났어. 일거리라기보다는 재미난 심부름이라고 해두는 편이 맞겠지. 그 의자 위에 있는 베리 요원의 물건들을 치우고 앉아. 자네가 연수를 마치면 바로 행동과학부로 오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법의학 공부는 많이 했지만 실무 경험은 없군. 6년 차 이상은 되길 바랐는데.”
“보안관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그쪽 일은 어느 정도 압니다.”
크로포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심리학과 범죄학을 복수 전공했군. 여름에는 정신병원에서 일을 했다고. 얼마나 했지? 두 해 여름인가?”
“그렇습니다.”
“상담사 자격증은 아직 유효한가?”
“2년 더 유효합니다. 부장님이 버지니아대에서 강의를 하시기 전에 따둔 겁니다. 여기서 일하기로 결심하기 전에요.”
“용케 고용 동결 직전에 들어왔군.”
스탈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시기적절하게 법의학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덕분에 연수원에서 사람을 뽑기 전에 실험실에서 일할 수 있었죠.”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전에 나한테 편지를 보냈었지? 내가 답장을 안 했던 건 기억하고 있네. 그때 답장을 썼어야 했는데.”
“일이 많이 바쁘셨겠죠.”
“VI-CAP이라고 들어봤나?”
“강력범죄 예방 프로그램Violent Criminal Apprehension Program의 약자로 알고 있습니다. 〈법 집행 공보〉를 보니 부장님께서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맡으셨다더군요. 아직 시작은 안 하신 것으로 압니다.”
크로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설문지 양식을 하나 만들었어.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는 연쇄 살인범들에게 돌릴 거야.” 그는 엉성하게 묶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수사관용 설문과 생존 피해자용 설문도 같이 들어 있어. 파란색은 살인범용 설문지인데 살인범이 본인 의지로 답하려고 할 경우에만 적용이 가능해. 분홍색은 조사관이 살인범을 상대로 물을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로 구성했어. 이 질문들로 살인범의 반응과 답변을 수집하는 거지. 필요한 서류 작업이 상당히 많아.”
서류 작업이라…… 클라리스 스탈링은 이번 건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아닐지를 영민한 비글처럼 가늠해봤다. 어떤 일거리가 될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됐다. 미가공 데이터를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에 입력하는 고되고 단조로운 작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직무로든 행동과학부에 들어가 근무하는 건 구미가 당겼지만 비서 업무에 한정된 일을 맡게 된 여성 요원이 결국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뻔했다. 퇴직하는 날까지 그런 일만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잘 선택하고 싶었다. 크로포드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은연중에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스탈링은 재빨리 그 질문을 간파해야 했다.
“자네 연구 과제가 뭐였더라?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MMPI. 미국의 심리학자 S. 헤더웨이가 이끄는 미네소타 대학교 연구팀이 개발한 인성 검사법)였나? 아니면 로르샤흐 검사(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헤르만 로르샤흐가 1921년에 개발한 성격 검사 방법. 인간의 노이로제, 정신신경증, 구조적 뇌 장애의 증상을 밝히는 투사적인 검사 중 가장 대표적인 심리 진단 방법)였던가?”
“로르샤흐는 아니고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였습니다. 주제 통각 검사(1935년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연구소에서 머레이와 모건이 발표한 것으로 로르샤흐 검사와 쌍벽을 이루는 투사적 방식의 검사)를 연구했고 아동용 벤더-게슈탈트 검사(1938년 벤더가 발표한 방법으로, 시각과 운동 협응 능력과 관계있는 뇌 기능 장애를 판정해 개인의 정서나 성격에 대한 단서를 찾는 투사적 방법)를 과제로 제출했습니다.”
“쉽게 겁을 먹는 편인가, 스탈링?”
“아직 그럴 일이 없었습니다.”
“흠, 우리는 현재 구금된 유명한 연쇄 살인범 서른두 명을 대상으로 면담과 검사를 진행하고 있어. 미제 사건 해결을 위한 심리적 프로파일링용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목적이야. 대부분 잘 따라주고 있기는 한데 아마도 자기 과시를 하고 싶어서겠지. 스물일곱 명이 적극 협조 중이고, 항소 중인 사형수 네 명은 예상대로 응하지 않고 있어. 우리가 가장 간절히 면담과 검사를 원하는 자가 있는데 아직 가타부타 말이 없거든. 내일 자네가 수감소로 가서 그를 만났으면 하는데.”
스탈링은 반가움과 우려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면담 대상자가 누굽니까?”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 박사.”
문명인이 모인 자리라면 언제나 그렇듯 그 이름 뒤에 짧은 침묵이 뒤따랐다. 스탈링은 크로포드를 차분히 바라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식인종 한니발 말씀이군요.”
“그래.”
“좋습니다. 제가 하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접니까?”
“주된 이유는 자네 손이 비니까. 그가 호락호락하게 협조해줄 것 같지는 않아. 이미 우리측 요청을 거절했어. 직접은 아니고 중재자인 수감소 소장을 통해서지만. 이번에는 자격 있는 조사관을 보내서 개인적으로 면담 요청을 해볼 생각이야. 그밖에 다른 이유를 자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어. 지금 우리 부서에는 그 일을 할 만한 인원이 남아 있지 않아.”
“부장님은 버팔로 빌 사건과 네바다 주에서 일어난 일들로 정신이 없으시겠네요.”
“맞아. 늘 그렇지 뭐. 여기저기 시체투성이야.”
“내일이라고 하셨는데…… 서둘러야겠네요. 현재 진행 중인 사건과의 연관성은요?”
“없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 사람이 입을 열지 않아도 심리적 평가를 써서 제출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렉터 박사가 쓴, 접근하기 어려운 환자에 관한 심리적 평가 자료만 해도 양이 차고 넘쳐. 내용이 전부 다르거든.”
크로포드는 비타민 C 알약 두 개를 손바닥에 톡톡 털었다. 그는 음료수 냉각기 앞에서 알카셀처(발포형 소화제)를 물에 섞은 뒤 그 물로 알약을 꿀꺽 삼켰다.
“웃기는 얘기지. 한니발 렉터는 아직도 정신과 의사자격으로 정신의학 저널에 글을 기고해. 내용이야 물론 대단하지. 하지만 그는 본인의 비정상적 상태에 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어. 한번은 렉터가 수감소장 칠턴 박사의 장단을 맞춰주는 척한 적이 있어. 성기에 혈압측정 띠를 두르고 앉아 칠턴이 보여주는 파괴된 물건들의 사진을 보면서 검사에 응한 척한 거야. 그러고는 칠턴의 정신을 분석한 글을 저널에 실어 칠턴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요즘도 렉터는 소일거리 삼아 본인의 사건과 무관한, 외부의 정신의학과 학생들과 진지하게 서신을 교환하고 있어. 만약 그가 자네 질문에 응하지 않아도 곧장 내게 보고하도록 해. 그의 모습은 어떤지, 감방 풍경은 어떤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을 말해주면 돼. 그러니까, 대체로 어떤 분위기인지를 알려달라는 뜻이야. 그 안을 드나드는 기자들을 조심해. 진짜 기자들 말고 싸구려 잡지 기자들. 그놈들은 앤드루 왕자(엘리자베스 2세의 차남)보다도 렉터한테 더 관심이 많거든.”
“제 기억으로는 어떤 저속한 잡지사가 렉터에게 원고료로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던 거로 아는데요?”
크로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셔널 태틀러〉가 수감소의 누군가를 매수해서 그런 짓을 벌였을 걸. 자네에 대해서는 내가 수감소에 통보해뒀어. 그쪽에서 자네가 가는 걸 알고 있을 거야.”
크로포드는 스탈링과 불과 60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앞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스탈링은 그의 반테 안경에 가려진 눈 밑 쳐진 살을 바라봤다. 그는 조금 전에 리스테린(구강청결제 상표명)으로 입을 헹군 듯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스탈링. 집중하고 있지?”
“네, 부장님.”
“한니발 렉터는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해. 수감소장 칠턴 박사는 자네가 렉터를 상대하면서 취하게 될 실질적 절차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려 할 거야. 그러니 정도를 벗어나지 마. 어떤 이유로든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돼. 렉터가 자네에게 말을 건다면 그건 그가 자네에 대해 알아내려고 한다는 뜻이야. 뱀이 새 둥지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호기심이지. 그자와 면담하면서 약간씩은 정보를 주고받겠지만 그자에게 자네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주지 마. 자네에 관한 개인적인 사실들을 그가 머릿속에 담아두지 못하게 해야 해. 그자가 윌 그레이엄 요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자네도 잘 알 거야.”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신문에서 봤습니다.”
“렉터는 윌에게 체포되자 리놀륨 칼로 윌의 복부를 찔렀어. 윌은 그때 죽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어. 레드 드래곤 기억하지? 렉터는 ‘레드 드래곤’ 프랜시스 달러하이드를 시켜 윌과 그의 가족을 습격하게 했어. 렉터 덕분에 윌의 얼굴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엉망이 됐지. 게다가 렉터는 수감소에서 간호사를 공격하기도 했어. 그러니까 자네는 일에 집중하고, 렉터의 정체를 잊어서는 안 돼.”
“그자의 정체가 뭐죠? 부장님은 아세요?”
“괴물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 이상은 아무도 확실하게 말 못 해. 어쩌면 자네가 알아낼 수도 있겠지.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자네를 뽑은 게 아니야, 스탈링. 내가 버지니아에서 강의할 때 자네가 흥미로운 질문을 두어 개 했던 게 기억나는군. 자네 서명이 들어간 보고서가 명확하고 알차고 체계적으로 작성돼 있다면 국장님도 읽으실 거야. 내가 보증해. 일요일 아침 9시까지 보고서를 올려. 좋아, 스탈링. 이제부터 규정된 방식대로 실행해.”
크로포드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에 생기라곤 없었다.
볼티모어 주립 정신질환 범죄자 수감소 소장인 쉰여덟 살의 프레드릭 칠턴 박사는 길고 널찍한 책상 위에 딱딱하거나 날카로운 물건을 놓아두지 않았다. 어떤 직원들은 그 책상을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라고 불렀고, 어떤 직원들은 해자라는 단어의 뜻조차 알지 못했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사무실로 들어가서 보니 칠턴 박사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여긴 수사관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긴 한데, 그쪽처럼 매력적인 수사관은 처음이군요.”
칠턴은 일어나지도 않고 말했다. 그가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이 반짝거렸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을 때 라놀린 헤어크림이 묻어난 듯했다. 스탈링은 그와 악수하고 나서 먼저 손을 놨다.
“스털링 양 맞죠?”
“스탈링입니다, 박사님. ‘털’이 아니라 ‘탈’이에요.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은 연방수사국에서 여자들이 일을 많이 하나봅니다, 하하.”
그는 담배에 찌든 치아를 드러내며 말끝마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방수사국도 점점 개선되고 있거든요, 칠턴 박사님. 분명히 그렇습니다.”
“볼티모어에 며칠 머무를 거죠? 여기도 알고 보면 워싱턴이나 뉴욕 못잖게 좋은 곳이에요.”
스탈링은 그의 부담스러운 미소를 피해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칠턴은 스탈링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고, 스탈링도 분위기를 감지했다.
“좋은 곳이겠죠. 하지만 저는 렉터 박사를 면담하고 오늘 오후까지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아서요.”
“나중에 후속 조치에 관해 알려드릴 일이 생기면 워싱턴으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것까지 미리 생각해주시다니 친절하시네요.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특수 요원 잭 크로포드 부장이니 그분을 통해 언제든 제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러죠.” 군데군데 불그스름한 칠턴의 뺨은 그의 별난 적갈색 머리 때문에 더 두드러져 보였다. “신분증 좀 봅시다.” 그는 스탈링의 신분증을 받아 느긋하게 확인하면서 그녀를 줄곧 세워뒀다. 그러고는 신분증을 돌려주며 일어섰다. “오래 걸리지 않겠군요. 따라오세요.”
“렉터를 만나기 전에 간단하게 설명부터 해주실 줄 알았는데요, 칠턴 박사님.”
“걸어가면서 합시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책상을 빙 돌아 나왔다. “30분 내로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해서요.”
제기랄, 그녀는 이 남자에 대해 더 자세히, 더 빨리 간파했어야 했다. 칠턴은 아주 멍청이는 아닌 듯했다. 어쩌면 유용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잘하지는 못했지만 초반에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해서 크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칠턴 박사님, 저는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박사님께서 편한 시간에 맞춰, 시간을 내줄 수 있다고 하신 때에 찾아뵀어요. 렉터와 면담 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면담을 마치고 대상자의 답변 일부에 관해 박사님과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글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아, 가기 전에 전화 한 통 해야겠어요. 외부 사무실에 먼저 가 있어요.”
“제 외투와 우산은 여기 두겠습니다.”
“외부 사무실에 둬요. 나가서 앨런한테 주면 알아서 치워줄 겁니다.”
수감자들에게 지급되는 잠옷 비슷한 옷을 입은 앨런은 셔츠 끝자락으로 재떨이를 문질러 닦는 중이었다. 앨런은 스탈링의 외투를 받아들면서 뺨 안쪽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렸다. 스탈링이 앨런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언제든 환영이에요. 하루에 똥은 몇 번 누죠?”
“그게 무슨 말인지?”
“똥줄기가 기이이일게 나오나요?”
“그건 나 혼자만의 비밀로 할게요.”
“본인이 얼마든지 확인할 수가 있거든요. 똥을 싸면서 허리를 굽히고 밑을 보면 똥이 나오는 게 보여요. 똥이 공기에 닿을 때 색깔이 변하는지 확인할 수도 있고요. 당신도 그렇게 하고 있죠? 큼직한 갈색 꼬리가 달린 것처럼 보이나요?”
앨런은 스탈링의 외투를 손에 꼭 움켜쥐었다. 스탈링이 그에게 말했다.
“칠턴 박사님이 그쪽한테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전하랬어요.”
그때 칠턴이 나오며 말했다.
“아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 외투를 옷장에 갖다 걸어, 앨런. 그리고 우리가 여기 없는 동안에는 그 외투를 꺼내지 마. 지시한 대로 해. 전에는 상근 여사무원이 있었는데 예산이 삭감되면서 없어졌어요. 지금은 아까 그쪽을 내 사무실로 들여보내준, 하루에 세 시간씩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하는 여직원과 앨런뿐이죠. 다른 여사무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스탈링 양?” 스탈링을 돌아보는 그의 안경이 번뜩였다. “무기를 소지하고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지갑과 서류가방을 봐도 될까요?”
“제 신임장 보셨잖아요.”
“거기에는 그쪽이 연수생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자, 어서 봅시다.”
묵직하게 생긴 첫 번째 금속 대문이 등 뒤에서 쾅 닫히고 빠르게 빗장이 걸렸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움찔했다. 칠턴은 초록색 수감소 복도를 따라 약간 앞서서 걸어갔다. 공기 중에 라이솔(소독제 상품명) 냄새가 배어 있었고 멀리서 쿵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탈링은 칠턴이 멋대로 지갑과 서류가방을 뒤지게 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러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스탈링은 급류 기저에 깔린 묵직한 자갈처럼 충분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렉터는 꽤나 골칫거립니다.” 칠턴이 어깨 너머로 말했다. “저희 보호사는 렉터가 우편으로 받는 출판물에서 스테이플러 철심을 빼는 일에만 하루에 10분 이상씩 쓰고 있어요. 우리는 렉터가 신문 잡지 구독을 아예 못하게 만들거나 가짓수라도 줄여보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그때마다 렉터가 법원에 편지를 쓰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죠. 예전에는 렉터 앞으로 오는 우편물의 양도 어마어마했는데, 요즘은 뉴스에 나오는 다른 괴물들에게 밀려 양이 꽤 줄었어요. 한동안은 심리학 석사 논문을 쓰는 학생들이 죄다 렉터한테서 뭐든 얻어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의학 저널들은 아직도 그의 글을 출판하고 있고 말이죠. 필자로 그의 이름이 들어가면 일단 눈에 띄니까요.”
“렉터가 〈임상 정신의학 저널〉에 수술 중독에 관한 괜찮은 글을 기고한 거로 아는데요.”
“그렇게 알고 있단 말이죠? 어쨌든 우리는 렉터를 연구해보려고 했습니다. ‘이 수감자를 우리의 기념비적인 연구 기회로 삼아보자’고 생각하면서요. 이런 표본을 산 채로 확보하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거든요.”
“무슨 표본이요?”
“순수한 소시오패스요. 하지만 렉터는 속내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고 표준검사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를 싫어합니다. 나를 적으로 취급해요. 그러고 보면 크로포드는 참 영리합니다. 그쪽을 렉터에게 접근시키는 걸 보면 말이죠.”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죠, 칠턴 박사님?”
“젊은 여자를 이용해 그를 ‘자극’하려는 거잖습니까. 미인계를 쓰겠다는 거죠. 렉터는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여자 구경을 못 했습니다. 세탁부 정도는 흘끗 볼 수도 있었겠지만요. 우리는 그곳에 여자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죠. 여자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요.”
‘엿이나 먹어, 칠턴.’
“저는 버지니아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박사님. 참 스쿨(미용, 예법, 교양 등을 가르치는 여성학교)이 아니라요.”
“그렇다면 이 규칙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세요. 쇠창살 너머로 손을 넣지 말 것. 쇠창살을 아예 건드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렉터에게는 부드러운 종이만 건넬 수 있어요. 펜이나 연필은 안 됩니다. 우리는 가끔 그가 글을 쓰겠다고 하면 펠트 펜을 쓰게 해요. 그에게 건네주는 종이에는 스테이플러 철심이나 클립, 핀이 꽂혀 있으면 절대 안 됩니다. 그에게 건네는 물건들은 전부 음식 반입구를 통해야 하고 예외는 없습니다. 그가 쇠창살 너머로 무언가를 건네주려고 해도 절대 받으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문 두 개를 더 통과하자 자연광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수감자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병동을 뒤로 한 채, 창문도 없고 환자들이 따로따로 수감된 구역으로 들어갔다. 복도의 조명등들은 마치 선박의 기관실 조명등처럼 굵은 철사로 둘러싸여 있었다. 칠턴 박사는 그중 한 조명등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스탈링도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벽 너머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고함을 질러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렉터는 구속복과 마우스피스까지 전부 장착하지 않고서는 감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해드리죠. 이곳에 들어온 첫 해에 그는 상당히 협조적이었어요. 그래서 그에 대한 안전 조치가 약간 느슨해졌죠. 제가 여기 오기 전의 일이었다는 걸 감안하고 들어주기 바랍니다. 1976년 7월 8일, 가슴 통증을 호소한 렉터는 진료소로 옮겨졌습니다. 심전도 검사를 위해 구속복을 벗겨야 했죠. 간호사가 가까이 몸을 기울이자 그는 그 간호사에게 이런 짓을 했습니다.”
칠턴은 모서리가 접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의사들이 간신히 한쪽 안구는 살렸습니다. 진료소 직원들이 줄곧 지켜보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렉터는 간호사의 턱을 부수고 혀를 잘라냈습니다. 그 혀를 먹는 동안 그의 혈압은 85를 넘지 않았죠.”
스탈링은 자신의 얼굴을 탐욕스럽게 훑는 칠턴의 시선이 그 간호사의 사진만큼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을 쪼아 먹으려는 목마른 닭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이었다.
“렉터는 이곳에 있습니다.”
칠턴은 이렇게 말하며 보안 유리로 된 묵직한 이중문 옆의 버튼을 눌렀다. 몸집 큰 보호사가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문으로 들어간 스탈링은 힘든 결정을 내리며 걸음을 멈췄다.
“칠턴 박사님, 저희는 이번 검사 결과가 꼭 필요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렉터가 박사님을 적으로 간주해 노리고 있다면 저 혼자 그를 만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칠턴의 뺨이 씰룩거렸다.
“나야 좋죠. 아까 사무실에서 진즉에 그렇게 말하지. 그랬으면 내가 괜히 시간 버려가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고 보호사를 딸려 보냈을 텐데요.”
“박사님이 사무실에서 미리 간략하게 설명해주셨으면 저도 진즉에 이 말씀을 드렸겠죠.”
“다시 볼 일 없길 바랍니다, 스타알링 양. 어이 바니, 이분이 렉터와 면담을 마치면 다른 보호사를 호출해서 밖으로 꺼내드려.”
칠턴은 스탈링에게 한 번의 눈길도 더 주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이제 그 자리에는 덩치 크고 무표정한 보호사, 그의 등 뒤에 걸린 조용한 벽시계, 그리고 최루탄 스프레이와 구속복, 마우스피스, 마취 총이 담긴 철망 수납장만 남았다. 벽 선반에는 난폭하게 구는 수감자를 벽으로 밀어붙일 때 쓰는, 끝이 U자형인 기다란 파이프가 걸려 있었다. 보호사는 스탈링을 쳐다보며 말했다.
“칠턴 박사님이 쇠창살에 손대면 안 된다고 말씀해주셨죠?”
그의 목소리는 배우 알도 레이처럼 높고 거칠었다.
“네,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있는 방들을 지나 오른쪽 맨 끝 방입니다. 복도 한가운데로만 가면 문제없을 겁니다. 가는 길에 그에게 우편물을 전해주시면, 그와의 관계를 순조롭게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보호사는 속으로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우편물을 쟁반에 담아 음식 반입구로 밀어 넣으면 됩니다. 쟁반이 안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에 줄을 당겨 도로 빼내세요. 아니면 그가 쟁반을 밖으로 밀어낼 겁니다. 쟁반에 막혀서 그는 요원님한테 손을 댈 수 없을 거고요.”
그는 스테이플러 철심을 모두 제거해 각 페이지가 따로 노는 잡지 두 권, 신문 세 부, 개봉한 편지 몇 통을 스탈링에게 건넸다. 길이 27미터쯤 되는 복도 양옆에 감방들이 배치돼 있었다. 그중 일부 감방의 안쪽 벽면에는 패드가 덧대어 있고 문 중앙에는 길고 좁은 관찰용 창문이 설치돼 있었다. 마치 궁수들이 활을 쏠 때 쓰는 것 같은 창문이었다. 나머지는 복도 쪽으로 쇠창살이 나 있는 평범한 감방이었다.
감방마다 수감자가 들어 있는 것을 감지했지만 스탈링은 그들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복도를 절반 넘게 걸어갔을 때 누군가 스탈링에게 “보지 냄새가 나네”라고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스탈링은 못 들은 척하고 계속 걸어갔다. 마지막 감방에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스탈링은 복도 왼쪽으로 붙으며 감방 안을 들여다봤다. 그 안의 수감자는 이미 그녀의 발소리를 들은 듯했다.
렉터 박사의 감방은 다른 감방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른 감방들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식이었지만, 렉터 박사의 감방 맞은편에는 벽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밖에도 여러모로 독특했는데, 감방 앞면은 쇠창살로 돼 있고 그 안쪽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두 번째 장벽이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꽉 채우는 튼튼한 나일론 그물로 된 장벽이었다. 그물 너머에는 바닥에 볼트로 고정된 탁자 하나, 잔뜩 쌓인 페이퍼백과 신문들이 보였다. 등받이가 높고 수직인 딱딱한 의자는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한니발 렉터 박사는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이탈리아판 〈보그〉를 정독하고 있었다. 그는 스테이플러 철심을 뺀 잡지를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는 다 읽은 페이지를 옆에 한 장 한 장 쌓았다. 그의 왼손 손가락은 여섯 개였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쇠창살과 약간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좁은 현관 입구 정도의 거리였다.
“렉터 박사님.”
목소리가 크게 떨리지 않고 멀쩡하게 나왔다. 잡지를 읽고 있던 그가 눈을 들었다. 순간 스탈링은 그의 시선에서 웅웅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혈류의 소리였다.
“제 이름은 클라리스 스탈링이라고 합니다. 잠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스탈링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정중하게 물었다. 렉터는 오므린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나 앞으로 유유히 걸어왔다. 그는 굳이 쳐다보지 않고도 거리를 아는 듯 나일론 그물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키가 작고 날렵한 편이었다. 두 손과 팔은 스탈링처럼 강단 있어 보였다.
“좋은 아침이야.”
마치 현관문 앞에 서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듯한 말투였다. 교양 있는 목소리였지만 오랫동안 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약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렉터 박사의 고동색 눈동자가 조명을 받아 붉게 빛났다. 가끔 조명의 각도에 따라 눈동자 안에 붉은 불꽃이 날아다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의 눈빛에 사로잡힌 스탈링은 꼼짝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리를 계산하면서 쇠창살로 조금 더 다가갔다. 팔뚝의 털이 곤두서면서 블라우스 소매에 닿았다.
“박사님, 우리는 심리학적 프로파일링 작업을 하면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님께 도움을 청하려 합니다.”
“‘우리’라는 것은 콴티코의 행동과학부를 말하는 것이겠군. 당신은 잭 크로포드의 사람일 테고.”
“네, 그렇습니다.”
“신분증을 봐도 될까?”
뜻밖의 반응이었다.
“들어오면서 사무실에…… 보여줬는데요.”
“프레드릭 칠턴 박사에게 보여줬다는 뜻이군.”
“예.”
“그 사람의 신분증을 확인했나?”
“아뇨.”
“학구파들은 꼭 필요한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읽으려고 하질 않아. 앨런은 만나봤나? 재미있는 친구지? 둘 중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 게 더 편했지?”
“대체로 앨런 쪽이 편했습니다.”
“당신은 칠턴이 돈을 받고 들여보내준 기자일 수도 있어. 그러니 난 당신의 신분증을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알겠습니다.”
스탈링은 매끈한 신분증 카드를 꺼내 보여줬다.
“이 거리에서는 볼 수 없으니 음식 반입구로 넣어줘.”
“그렇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렵다 이거군.”
“예.”
“바니한테 물어봐.”
바니라는 이름의 보호사가 다가와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렉터 박사님, 이걸 안으로 넣어는 드리겠지만, 내가 돌려달라고 하면 바로 돌려주셔야 합니다. 이걸 돌려받기 위해 성가시게 다른 사람들까지 불러들이게 만들면, 나는 무척 화가 날 거예요. 그럼 내 화가 풀릴 때까지 박사님에게 구속복을 입히겠습니다. 그럼 식사도 튜브로 해야 하고 변기도 사용할 수 없고 하루에 두 번 용변용 팬티를 갈아입는 것으로 만족하셔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우편물도 못 받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좋아, 바니.”
바니는 스탈링의 신분증 카드를 쟁반에 담아 음식 반입구로 넣어줬다. 렉터 박사는 그 카드를 손에 들고 조명에 비춰봤다.
“연수생? 여기 ‘연수생’이라고 적혀 있네. 잭 크로포드가 연수생을 보내 나를 면담하게 했단 말인가?”
렉터 박사는 스탈링의 신분증으로 자신의 작고 하얀 치아를 톡톡 두드리며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바니가 주의를 줬다.
“렉터 박사님!”
“알았어.”
렉터 박사가 신분증을 도로 쟁반에 담자 바니는 쟁반을 밖으로 빼냈다. 스탈링이 말했다.
“저는 아직 연수원에서 연수를 받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박사님을 찾아온 이유는 FBI 관련 건 때문이 아니라 심리학에 관련된 문제 때문입니다. 제게 심리학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할 자격이 있다면 면담에 응해주시겠어요?”
“으으음. 꽤…… 잘 빠져나가는군. 바니, 스탈링 수사관에게 의자를 가져다줄 수 있겠나?”
“칠턴 박사님에게 의자에 관한 지시는 따로 받은 게 없습니다.”
“아니 무슨 매너가 그런가, 바니?”
바니가 스탈링에게 물었다.
“의자 갖다드릴까요? 하나 있긴 한데. 의자가 필요할 정도로 오래 렉터 박사와 얘기했던 사람은 없거든요.”
“가져다주시면 고맙겠어요.”
바니는 복도 저쪽에 있는 보관장의 자물쇠를 열고 접이식 의자 하나를 꺼내 스탈링 옆에 놓은 뒤 그 자리를 떠났다. 렉터 박사는 탁자 앞에 앉아 스탈링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래, 믹스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지?”
“누구요?”
“저쪽 감방에 사는 멀티플 믹스 말이야. 아까 당신한테 뭐라고 지껄이던데. 뭐라고 한 건가?”
“‘보지 냄새가 나네’라고 했어요.”
“그렇군. 난 모르겠는데. 당신은 에비앙 스킨 크림을 사용하고 가끔 레르 뒤 탕 향수를 뿌리지만 오늘은 아니야. 믹스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해?”
“그는 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적대적으로 굴었어요. 안 된 일이죠. 그가 사람들을 적대시하니 사람들도 그를 적대시하겠죠. 악순환이에요.”
“당신도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나?”
“그분의 일상을 방해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 말고는 별 감정이 없네요. 제가 그 향수를 뿌리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신분증을 꺼낼 때 핸드백에서 얼핏 맡았어. 핸드백이 예쁘네.”
“고맙습니다.”
“가진 핸드백 중 제일 좋은 걸 들고 왔군, 그렇지?”
“예.”
사실이었다. 고전적이면서 편하게 들 수 있는 그 핸드백은 스탈링이 가진 물건 중 제일 좋은 것이라 그동안 아껴뒀던 것이었다.
“신발보다는 훨씬 낫네.”
“언젠가는 이 핸드백에 어울리는 신발을 신을 수 있겠죠.”
“그렇겠지.”
“벽의 그림은 직접 그린 건가요, 박사님?”
“그럼 실내 장식가를 불러 그리게 했을까 봐?”
“세면대 위의 그림은 유럽에 있는 도시죠?”
“이탈리아의 피렌체 시야. 벨베데레 궁전에서 바라본 베키오 궁전과 두오모 성당의 풍경이지.”
“세밀한 부분까지 전부 기억에만 의존해서 그리신 건가요?”
“나는 밖으로 나가 직접 볼 수 없으니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스탈링 수사관.”
“십자가형에 관한 그림도 있네요. 가운데 십자가가 비어 있어요.”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린 후 골고다 언덕의 풍경을 상상한 그림이야. 고기 포장지에 크레용과 매직으로 그렸어. 유월절의 어린양이 희생당한 날, 천국을 약속받은 도둑이 무엇을 얻었는지에 관한 내용이지.”
“도둑은 무엇을 얻었는데요?”
“로마 병사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한 또 다른 도둑과 마찬가지로 그 도둑의 다리도 부러뜨렸어. 요한복음의 내용을 전혀 모르나? 그럼 두치오의 그림이라도 보도록 해. 그 화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주제로 고증에 입각해 그림을 그렸으니까. 윌 그레이엄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생김은 어때?”
“전 윌 그레이엄을 모르는데요.”
“누군지는 알잖아. 잭 크로포드의 제자이자 당신 전임자. 그 사람 얼굴은 어때?”
“본 적이 없어요.”
“옛정으로 물어봤을 뿐이야, 스탈링 수사관. 괜찮지?”
잠시 정적이 흐르고 스탈링이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예전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죠. 제가 가져온……”
“아니. 그건 어리석고 잘못된 짓이야. 자연스럽게 윌 그레이엄 얘기로 넘어가고 있는데 거기서 재치를 부리면 어떻게 해. 내 말 잘 들어. 재치를 잘 이해하고 적절히 사용해야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신속하게 본인이 원하는 화젯거리로 넘어갈 수 있는 거야. 우리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해.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었어. 당신은 예의 바르게 나를 대했고 내가 당신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지. 믹스가 했던 낯 뜨거운 말도 가감 없이 내게 털어놓음으로써 나와 신뢰 관계를 구축한 거야. 이런 분위기에서 바로 설문지 얘기를 꺼내다니.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렉터 박사님. 박사님은 숙련된 임상 심리학자시잖아요. 저를 멋대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다가 상대를 속이려 드는 멍청이로 여기시는 건 아니죠? 저를 좀 믿어주세요. 저는 박사님께 설문지에 응답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박사님은 응답을 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설문지 한 번 들여다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요?”
“스탈링 수사관, 최근에 행동과학부에서 나온 보고서를 읽어본 적 있나?”
“예.”
“나도 읽었어. FBI가 〈법 집행 공보〉를 내게 보내주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런 결정은 하나마나야. 난 중고 서점을 통해서 구해보고 있으니까. 존 제이를 통해 〈뉴스〉를 받고 있고 그 외에 여러 정신의학 연구 저널들도 입수했지. FBI는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 체계적 범죄자와 비체계적 범죄자. 그런 분류 방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건…… 그냥 기본적인 분류 방식인데요—”
“단순한 분류 방식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사실, 심리학은 대체로 유치해, 스탈링 수사관. 행동과학부에서 실행하는 심리학이라는 것은 골상학(프랑스의 해부학자인 프란츠 조셉 갈이 창시한 것으로, 두개골의 형상으로 인간의 성격과 심리적 특성 및 운명 등을 추정하는 학문)이나 다름없어. 심리학은 입문서부터가 별로야. 대학의 심리학과에 가서 학생들과 교수들이 어떤 식으로 그 학문을 대하고 있는지 한번 봐. 그들은 아마추어 무선기사처럼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려 들거나 인격이 파탄 난 것들이 대부분이야. 도무지 최고의 두뇌들이라고는 볼 수 없어. 체계적 범죄자와 비체계적 범죄자라니…… 학문적으로 밑바닥으로 떨어져도 분수가 있지.”
“그럼 박사님이라면 어떤 식으로 분류하시겠어요?”
“난 분류하지 않아.”
“출판물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박사님의 수술 중독증, 좌횡면 및 우횡면 과시욕에 관한 논문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일급 논문들이지.”
“제 생각에도 그랬습니다. 잭 크로포드 부장님도 그리 생각하셨는지 저더러 그 논문들을 읽어보라고 하셨죠. 박사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크로포드처럼 냉정한 사람이 우려를 했다고? 연수생한테 도움을 구할 정도면 어지간히 바쁜가보군.”
“맞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버팔로 빌 사건 때문에 바쁘겠군.”
“아마도요.”
“아니. ‘아마도요’ 정도가 아닐걸. 스탈링 수사관, 그게 버팔로 빌 때문인 걸 정확히 알고 있잖아. 잭 크로포드는 나한테 그 사건에 관한 조언을 얻어오라고 당신을 여기로 보냈을 거야.”
“그건 아닙니다.”
“곁다리나 두드리자고 여기 오진 않았을 텐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박사님의—”
“버팔로 빌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그 사건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없어요.”
“모든 게 서류에 기록돼 있나?”
“그럴 겁니다. 렉터 박사님, 저는 그 사건에 관한 기밀 서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버팔로 빌이 여자들을 몇 명이나 사용했지?”
“경찰들이 알아낸 바로는 다섯 명입니다.”
“그 여자들의 가죽을 전부 벗겼나?”
“부분적으로 벗겼다고 들었습니다.”
“신문에서는 그자에게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설명한 적이 없어. 그자가 왜 버팔로 빌이라고 불리는지 아나?”
“예.”
“말해봐.”
“제가 가져온 설문지를 봐주시면 말씀드릴게요.”
“설문지는 볼 테니까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캔자스시티 살인 사건의 범인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피해자들의 피부를 벗겨내서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스탈링은 자신이 두려움 때문에 박사 앞에서 지나치게 저자세로 굴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두려움을 내비치는 편이 나았을 듯했다.
“설문지 안으로 넣어.”
스탈링은 쟁반에 설문지를 담아 안으로 들여보냈다. 렉터 박사가 페이지를 훌훌 넘기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설문지를 도로 쟁반에 내려놨다.
“아, 스탈링 수사관, 이런 어설픈 도구로 내 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뇨. 박사님의 통찰력 덕분에 이번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걸 해줘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호기심이요.”
“무엇에 대한 호기심?”
“박사님이 왜 여기 들어와 있는지, 박사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호기심이죠.”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야, 스탈링 수사관. 내가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든 거지. 나를 외부 조건에 이런저런 영향을 받은 존재로 평가 절하할 생각 마. 당신은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을 포기하고 행동주의자들의 학설을 따르기로 한 것 같군, 스탈링 수사관. 당신은 도덕적 존엄성이라는 잣대로 모든 이를 평가하지만,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도덕적 존엄성의 결여 때문만은 아니야. 날 봐, 스탈링 수사관. 나를 악하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악한가, 스탈링 수사관?”
“파괴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악함과 파괴성을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악이 파괴적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본다면, 폭풍은 악한 것이겠군. 불도 그렇고 우박도 악하겠네. 손해사정사들은 그런 것들을 모두 뭉뚱그려서 ‘자연재해’라고 불러.”
“그건 신중하게—”
“나는 재미 삼아 성당 붕괴 사례를 수집하고 있어. 최근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성당 붕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나? 굉장했어! 성당 정면이 무너지면서 특별 미사에 참석했던 할머니 예순다섯 명을 덮쳤지. 그 사건은 악한가? 만약 악하다면 누가 그 악한 짓을 했을까? 저 위에 하느님이 계신다면 아마 그 사건을 반겼겠지. 장티푸스와 백조…… 이 둘은 모두 하느님한테서 비롯된 거야.”
“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설명할 수 있는 분을 알고 있어요.”
그는 손을 들어 스탈링의 말을 막았다. 스탈링은 그의 손이 곱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길이와 모양의 중지가 두 개였다. 희귀한 다지증이었다. 그는 조금 더 부드럽고 유쾌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이리저리 재서 수량화하고 싶어 하는군, 스탈링 수사관. 당신은 야망이 무척 큰 사람이야, 그렇지? 고급스러운 핸드백에 싸구려 구두 차림으로 찾아온 당신이 내 눈에 어떻게 보일 것 같나? 촌뜨기티가 팍팍 나. 도시 생활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쓰느라 취미도 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시골뜨기. 당신 눈은 싸구려 탄생석 같아. 대꾸할 때마다 표면이 온통 반들거려. 당신은 나름 똑똑한 인재야.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영양 섭취를 잘한 덕분에 뼈대는 그럭저럭 잘 자랐지만 기성세대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해, 스탈링 수사관. 웨스트버지니아 주나 오클라호마 주 출신인가? 대학에 남을지, 여군에 입대할지 고민하다가 그 일을 하게 된 것 같은데, 아닌가? 당신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해줄 테니 잘 들어, 스탈링 학생. 당신 방에는 금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가 있을 거야. 그 목걸이가 얼마나 조잡한 싸구려인지 알게 된 순간부터 그 목걸이가 보기 싫어지거든. 한번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만사가 다 지겨워져. 처음에는 고맙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지겨워지면서 손대기도 싫어지고 먼지가 쌓여 끈적끈적해지는 거야. 지겹다. 지겨워. 아주 지겨워. 사람이 똑똑하면 많은 것들을 망칠 수가 있어. 취향이라는 것도 늘 똑같지 않지. 이 대화를 상기할 때마다 당신은 얼굴에 상처 입은 멍청한 짐승을 떠올리게 될 거야. 목걸이의 구슬이 끈적해지면 목에 뭘 걸고 다닐 건가? 밤에 그런 고민을 하게 되지 않겠어?”
렉터는 무척이나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스탈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를 보면서 꽤 많은 것을 알아내셨네요, 렉터 박사님. 박사님이 하신 말씀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우선 제가 가져온 설문지에 답변해주세요. 박사님은 그 대단한 통찰력으로 자기 자신을 겨냥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분인가요?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죠. 지난 몇 분 동안 박사님과 대화하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어떠신가요? 본인을 직시하면서 설문지에 진실하게 답변을 해보세요. 이보다 더 적당하고 복잡한 설문 주제를 찾아내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혹시 자신을 대면하기가 두려운 건가요?”
“꽤 거칠게 밀어붙이는군, 스탈링 수사관?”
“그런 편이긴 하죠.”
“당신은 자신을 평범한 여자로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군. 이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나? 맙소사! 정말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네, 스탈링 수사관. 당신은 평범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당신 집에 있는 그 목걸이의 구슬 지름이 얼마나 되지? 7밀리미터?”
“7밀리미터 맞습니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호안석으로 된 구슬들을 사서 금 구슬과 번갈아 끼워 느슨한 목걸이를 만들도록 해. 호안석 구슬 두 개에 금 구슬 세 개나 호안석 구슬 한 개에 금 구슬 두 개 정도를 끼우면 당신한테 잘 어울릴 거야. 호안석은 당신의 눈 색깔과 잘 어울리고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해줄 거야. 누가 당신에게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보낸 적이 있나?”
“네.”
“이미 사순절(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고행을 기리는, 성회 수요일부터 부활절 일요일 전날까지의 40일간)에 접어들었으니 밸런타인데이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군. 흐으으음. 누가 당신에게 선물을 보낼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알 수가 없겠지……. 요즘 나는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르네. 생각이 난 김에 밸런타인데이 기념으로 당신을 아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클라리스 스탈링 수사관.”
“어떻게요, 렉터 박사님?”
“멋진 밸런타인 선물을 줘야겠어. 어떤 선물을 줄지는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군. 자, 그럼 이만 실례. 잘 가, 스탈링 수사관.”
“설문지는요?”
“예전에 인구 조사원이 나를 수량화하려고 찾아온 적이 있어. 나는 그 남자의 간에 파바민과 큰 아마로네를 섞어서 먹었어. 그만 연수원으로 돌아가, 스탈링 양.”
한니발 렉터는 끝까지 정중했지만 스탈링에게 절대 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일론 그물 장벽을 앞에 두고 뒷걸음질로 물러나서는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그리고 무덤 위에 누운 십자군 석상처럼 차갑게 거리를 뒀다. 스탈링은 헌혈이라도 한 것처럼 헛헛해진 기분이었다. 다리가 떨릴까 봐 괜히 뜸을 들이면서 천천히 설문지를 서류가방에 집어넣었다. 실패를 질색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생각이었다.
스탈링은 의자를 접어서 보관장 문에 기대어놨다. 이제 다시 믹스의 감방 앞을 지나가야 했다. 바니는 저쪽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바니를 불러 그 앞을 같이 지나갈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믹스. 도시에서 매일 건설 현장 인부들이나 배달부들 옆으로 지나갈 때보다도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스탈링은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스탈링이 가까이 오자 믹스가 주절거렸다.
“주우우우우욱으려고 손목을 물어뜯었어. 여기 피 나는데 볼래?”
스탈링은 놀라 바니를 부르려다가 믹스의 감방 안을 들여다봤다. 그 순간 믹스는 손가락을 튕겼고 스탈링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뺨과 어깨에 뜨끈한 액체를 맞았다. 몸을 돌리고 보니 그것은 피가 아니라 정액이었다. 렉터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마치 줄로 표면을 다듬는 듯 거칠게 쉬어 있었다.
“스탈링 수사관.”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선 렉터는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를 뒤에서 불렀다. 스탈링은 화장지를 찾으려고 핸드백 안을 뒤적였다.
“스탈링 수사관.”
스탈링은 냉정함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문을 향해 나아갔다.
“스탈링 수사관.”
렉터의 목소리에 무언가 새로운 느낌이 담겨 있어 스탈링은 걸음을 멈췄다.
‘왜 나는 이따위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때 믹스가 무어라 지껄였지만 스탈링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렉터의 감방 앞으로 돌아간 스탈링은 렉터가 보기 드물게 초조해한다는 걸 알아챘다. 어쩌면 그녀의 몸에 뿌려진 정액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거의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듯했다.
“방금 일어난 그 일은 나와는 무관해. 나는 무례를 대단히 추하게 여기는 사람이야.”
살인보다 무례를 더 질색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그녀가 봉변당한 것을 보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의 두 눈이 마치 동굴 속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같았다.
‘뭐가 됐든 기회로 이용하자!’
스탈링은 서류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설문지를 작성해주세요.”
아무래도 시기를 놓친 듯했다. 그는 다시 아까처럼 차분해져 있었다.
“싫어. 그래도 여기까지 와줬으니 기분 좋게 해주는 게 도리겠지. 설문지 대신 다른 걸 내줄게. 아마 무척 마음에 들 거야, 클라리스 스탈링.”
“그게 뭔데요, 렉터 박사님.”
“승진의 기회. 잘 풀어보도록 해. 오늘 기분이 참 좋군. 밸런타인데이 덕분에 그 생각이 났어.”
그는 어째서인지 자잘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스탈링은 귀를 바짝 기울였다.
“라스페일의 자동차 안을 들여다봐. 그게 당신에게 주는 내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야. 내 말 똑똑히 들었지? 라스페일의 자동차를 들여다보라고. 그만 가봐. 믹스가 미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또 정액을 손에 모을 수 있지 않겠어?”
클라리스 스탈링은 렉터와의 면담에 대해 거듭 생각하느라 흥분되면서도 기운이 소진된 상태였다. 렉터가 스탈링에 대해 말한 내용 중 일부는 사실이었고, 일부는 사실에 가까웠다. 몇 초 동안이지만 스탈링은 완전히 낯선 의식이 머릿속에 들어앉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의식은 캠핑용 자동차 안에 들어간 곰처럼 선반들을 다 때려 부수고 싶어 했다. 어머니에 관한 렉터 박사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이건 일일 뿐이었다.
병원 건너편 도로변에 세워둔 낡은 핀토 자동차로 돌아간 스탈링은 운전석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창에 수증기가 서려 있어서 보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라스페일. 스탈링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 그는 렉터의 환자였고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스탈링은 하루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지만 렉터의 배경에 관한 자료를 훑어봤다. 파일 양은 많았고 라스페일은 수많은 희생자 중 한 명일뿐이라 세부 사항을 좀 더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스탈링은 바로 자료를 읽어보고 싶었지만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라스페일 사건은 수년 전에 종결됐고 당장 위험에 처한 사람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고 조언도 들은 뒤 일을 진행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었다. 뭉그적대다가는 크로포드 부장이 그녀에게 줬던 사건을 빼앗아 다른 요원에게 넘길 수도 있었다. 스탈링 입장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스탈링은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크로포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는 예산 책정 문제로 상원 소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법무부에 예산을 요청하러 갔다고 했다. 볼티모어 경찰서 강력계에 전화해 사건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요청할 수도 있지만 살인은 연방범죄가 아니라서 괜히 그쪽에 자료를 요청했다가 사건을 뺏길 수도 있었다.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스탈링은 다시 콴티코의 행동과학부로 차를 몰았다. 갈색 체크무늬 커튼과 회색 서류들로 가득한 행동과학부가 오늘따라 아늑한 보금자리로 느껴졌다. 사무실에 앉아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비서가 퇴근한 후 렉터에 관한 마이크로필름을 돌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낡은 모니터가 잭오랜턴(큰 호박의 속을 파내 눈, 코, 입을 만든 랜턴으로 할로윈데이에 주로 사용됨)처럼 깜박거렸다. 자막과 네거티브 필름 화면이 스탈링의 집중한 얼굴 위를 기어가듯 지나갔다.
46세 백인 남성 벤저민 르네 라스페일은 볼티모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플루트 연주자였다. 한니발 렉터 박사에게 심리 치료를 받던 환자이기도 했다. 1975년 3월 22일 그는 볼티모어의 연주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5월 25일 버지니아 주 폴스 처치 부근에 있는 어느 작은 시골 교회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의 시신은 하얀 넥타이와 연미복만 입은 채 신도석에 앉아 있었다. 부검 결과 라스페일의 심장에 구멍이 나 있고 흉선과 췌장이 없어졌다는 게 밝혀졌다.
클라리스 스탈링은 어린 시절부터 육가공에 관해 본인이 알고 싶은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살아온 터라 사라진 장기가 스위트브레드(송아지, 양, 돼지 등의 췌장 또는 흉선을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미식가들에게 인기 있는 식자재 중 하나)임을 알아봤다.
볼티모어 경찰서의 살인과 담당자들은 사라진 라스페일의 장기가 라스페일이 실종된 다음날 저녁 렉터가 볼티모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과 지휘자에게 대접한 저녁 만찬 메뉴에 올라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한니발 렉터 박사는 그 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과 지휘자도 렉터 박사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고 미식 관련 잡지에 여러 번 기고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날 저녁 만찬 요리에서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 후 오케스트라 단장은 신경성 식욕부진증과 알코올 의존증 진단을 받고 스위스 바젤에 있는 전인적 정신 건강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볼티모어 경찰서측에 따르면 라스페일은 세상에 알려진 렉터의 희생자 중 아홉 번째 인물이었다.
라스페일이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채 사망했고 친척들은 그의 부동산을 둘러싸고 법적 소송을 벌였다. 그의 이름은 수개월 동안 신문에 오르내리며 대중의 흥미를 끌었다. 라스페일의 친척들은 렉터 박사에게 심리 치료를 받은 다른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만나, 이 엽기적인 정신과 의사가 저지른 사건 관련 파일 및 테이프를 파기하도록 하는 소송을 진행했다. 그것으로 렉터 박사가 떠벌릴지 모를 환자들과 관련된 당황스러운 비밀들과 추론, 관련 파일들의 문서화를 막을 수 있었다.
법원은 라스페일의 변호사인 에버릿 요우를 라스페일의 유산 관리인으로 지명했다. 라스페일의 자동차에 접근하려면 그 변호사에게 연락해야 했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라스페일의 유산에 관해 방어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스탈링이 방문하겠다는 뜻을 미리 알릴 경우 변호사가 사망한 고객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증거를 파괴할 우려도 있었다. 스탈링은 기습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려면 상부의 조언과 허가가 필요했다. 행동과학부에 남아 있는 직원이 아무도 없어서 스탈링은 여기저기 편하게 뒤진 끝에 롤로덱스 명함 정리기에서 크로포드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신호가 가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잭 크로포드입니다.”
“클라리스 스탈링입니다. 저녁 식사 중이신 게 아니어야 할 텐데요……” 상대가 말이 없자 스탈링은 다시 말을 이었다. “…… 렉터가 오늘 라스페일 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지금 저는 사무실에서 관련 자료를 보고 있습니다. 그가 라스페일의 자동차에 단서가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 자동차에 접근하려면 라스페일의 변호사를 통해야 해서요. 내일은 토요일이고…… 연수원 수업도 없으니…… 부장님께 허락을 구해서—”
“스탈링, 내가 렉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크로포드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일요일 아침 9시까지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스탈링. 시간 엄수해.”
“알겠습니다, 부장님.”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찌르는 듯한 그 소리가 얼굴로 퍼지면서 열이 확 올랐다.
“그래, 씨발. 징그러운 늙은이야. 소름 끼치는 개새끼. 믹스가 너한테 정액을 뿌려도 좋아할지 두고 보자.”
깨끗이 씻고 나온 스탈링이 FBI 연수원 로고가 박힌 잠옷을 입고 앉아 보고서의 두 번째 초안을 작성하고 있을 때, 기숙사 룸메이트인 아델리아 맵이 도서관에서 돌아왔다. 제정신임이 분명한 아델리아의 웃음 띤 갈색 얼굴이 그날따라 무척 반가웠다. 아델리아는 스탈링의 얼굴에 가득한 피로를 감지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맵은 늘 어떤 대답을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정신 나간 남자와 어울렸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나도 사회생활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어. 네가 어떻게 사회생활과 연수원 수업을 병행하는지 정말 놀라울 지경이야.”
스탈링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소소한 농담이지만 아델리아도 스탈링과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스탈링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 느껴졌다. 스탈링은 눈가에 고인 눈물 너머로 아델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 늙어 보이고 미소에 슬픔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53세의 잭 크로포드는 자신의 집 침실 윙 체어에 앉아 야트막한 램프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다. 그는 두 개의 더블베드를 바라본다. 둘 다 병원 침대처럼 높여놓았다. 하나는 그의 침대고 다른 하나는 아내 벨라의 침대다. 크로포드는 벨라가 입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몸을 움직이고 그에게 말을 한 지 이틀이 지났다.
문득 아내의 숨소리가 멎는다. 크로포드는 책에서 시선을 떼고 반달형의 독서용 안경 너머로 아내를 살핀다. 책을 내려놓고 아내에게 다가간다. 벨라는 곧 다시 숨을 쉰다.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온전하게 숨을 쉬고 있다. 그는 아내의 몸에 손을 대고 혈압과 맥박을 잰다. 지난 수개월 사이에 그는 혈압 체크의 달인이 됐다.
밤에 아내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그녀의 침대 옆에 자기 침대를 가져다놨다. 어둠 속에서도 아내에게 팔을 뻗어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에 침대 높이도 나란히 맞춰놨다. 침대 높이뿐 아니라 벨라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소소하게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이 방이 병실처럼 보이지 않게 꾸몄다. 꽃도 적당히 들여놨다. 알약병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그는 아내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 복도의 리넨 보관장을 비우고 그곳에 약과 의료 기기를 넣어뒀다. 그날 그는 결혼식 이후 두 번째로 아내를 품에 안고 집 문턱을 넘었다. 그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운이 쭉 빠지는 듯했다.
집의 정면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든다. 창문을 모두 열자 버지니아 주의 부드럽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조그만 개구리들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카펫은 보풀이 나기 시작했다. 크로포드는 시끄러운 진공청소기 대신 수동 카펫 청소기를 쓰는데, 성능이 진공청소기만 못해서 보풀까지는 청소가 되지 않았다. 그는 리넨 보관장으로 걸어가 내부의 전등을 켠다. 문 안쪽에 클립보드 두 개가 매달려 있다. 그는 그중 하나에 벨라의 맥박과 혈압을 기록한다. 두툼한 노란 종이에 그어진 칸마다 밤낮으로 그와 간호사가 번갈아가며 기록한 수치들이 적혀 있다. 또 다른 클립보드에는 주간팀 간호사가 벨라에게 투약한 약물을 정리해놨다.
크로포드는 필요하면 벨라에게 밤에라도 약을 주사할 수 있다. 간호사의 가르침에 따라 레몬과 자신의 허벅지에 주사 놓는 연습을 한 뒤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크로포드는 3분 정도 서서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사랑스러운 비단 스카프가 그녀의 머리를 터번처럼 감싸고 있다. 아내는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그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있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이제 크로포드는 아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 스카프를 둘러준다. 아내의 건조해진 입술에 글리세린을 발라주고 굵은 엄지로 그녀의 눈가에 붙은 눈곱을 떼어준다.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직 그녀를 돌려 눕힐 시간은 되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크로포드는 자신을 다독인다. 나는 아프지 않다, 아직 아내와 함께 땅에 묻힐 때는 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괜찮다. 그는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
의자로 돌아와 앉은 그는 조금 전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옆에 놓인 책 중 온기가 남아 있는 책을 무작정 집어 든다.
일요일 아침, 클라리스 스탈링은 우편함에 들어 있는 크로포드의 메시지를 찾아 읽었다.
CS에게,
라스페일 자동차 조사를 진행하되 자네의 개인 시간에 하도록. 내 사무실에서 자네에게 장거리 전화용 신용 카드 번호를 제공할 것임. 부동산 관련해서 누군가에게 연락하거나 어딘가로 가게 되면 사전에 내게 연락할 것. 수요일 16시까지 보고하기 바람.
국장님이 자네의 서명이 들어간 렉터 보고서를 받으셨음.
잘했어.
JC
SAIC/제8과
스탈링은 기분이 좋았다. 크로포드가 라스페일 관련 조사를 허락한 것은, 사냥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지친 쥐를 내준 것에 불과함을 스탈링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가르치고 싶어 했고 그녀가 잘해내기를 바랐다. 스탈링은 매번 이런 식으로 격려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라스페일은 8년 전에 사망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자동차에 무슨 증거가 남아 있을까? 자동차는 가치 하락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상고 법원은 유족들이 공증 전에 차를 팔아 에스크로 사업자에게 대금을 치를 수 있게 허락해준다. 스탈링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경험해본 덕분에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스페일의 재산처럼 복잡하고 말이 많은 물건을 관리하는 변호사가 지금까지 그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점심시간까지 합해도 근무 중에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15분에 불과했다. 수요일 오후까지는 크로포드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러니 앞으로 사흘 동안 자동차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는 시간은 총 3시간 45분이었다. 그나마도 공부 시간까지 할애해야 가능한 일이라 연수원 수업 관련 공부는 밤으로 미뤄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수사절차 과목 성적이 괜찮은 편이어서 교관들에게 수사와 관련해 이런저런 조사 방법을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월요일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볼티모어 카운티 지방법원으로 전화했다. 직원은 스탈링에게 회신을 준다고 하더니 세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결국 스탈링은 수업 시간에 법원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고 한 친절한 직원 덕분에 라스페일의 유산에 관한 공증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직원은 법원이 매각을 허락한 지 꽤 됐다면서 스탈링에게 그 자동차의 제조사와 일련번호, 소유권 이전을 통해 그 차를 넘겨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려줬다.
화요일, 스탈링은 다음 소유자의 연락처를 확보하는 데 점심시간의 절반을 투자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나머지 점심시간을 다 쓰고 나서야 메릴랜드 주 차량관리국측으로부터 일련번호로는 차적 조회를 할 수 없으며 차량 등록 번호와 현 차량 번호를 알아야 한다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화요일 오후에는 비가 쏟아붓는 가운데 다른 연수생들과 사격장에서 훈련을 받았다. 옷에 스며든 습기와 땀 때문에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해병대 출신 사격 교관 존 브리검이 스탈링을 불러내 다른 학생들 앞에서 손아귀 힘을 테스트했다. 모델 19 스미스 앤 웨슨 권총의 방아쇠를 60초 동안 몇 번 당길 수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였다.
스탈링은 오른손으로 74발을 쏜 뒤 눈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다른 학생이 큰소리로 횟수를 세는 동안 오른손으로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안정적으로 위버 사격 자세(1950년 LA에 근무했던 ‘잭 위버’라는 보안관이 만든 사격 자세)를 취하고 격발을 했다. 가까운 곳은 또렷하게 잘 보였지만, 먼 곳은 임시 표적도 흐릿하게만 보였다. 30초까지도 스탈링은 딴 생각을 하느라 손가락이 아픈 줄도 몰랐다. 저 끝 벽에 있던 표적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또렷해졌다.
존 브리검 교관은 주간통상집행국 출신으로 이 부서에서 감사장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스탈링은 다른 학생들이 격발 횟수를 세는 동안 브리검에게 격발 중간중간 질문을 던졌다.
“차량 일련번호밖에 모를 때……”
“…… 65, 66. 67, 68……”
“…… 자동차의 현재 위치를 추적하려면……”
“…… 78, 79, 80, 81……”
“…… 제조 회사도 알고 있다면요? 현 차량 번호는 모르고요.”
“…… 89, 90. 60초 완료.”
교관이 말했다.
“자, 여러분. 다들 잘 봤길 바란다. 안정적인 전투 사격을 위해서는 손아귀 힘이 가장 중요하다. 남자 연수생들은 내가 다음 차례로 지목할까 봐 걱정이 될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클라리스 스탈링의 양손 격발 능력은 평균치 이상이다.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스탈링은 손으로 약간 쥐어짜듯이 방아쇠를 당기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그 정도 힘은 여러분도 모두 갖고 있다. 남자 연수생 대부분은 에, 그러니까…… 여드름 말고는 무언가를 쥐어짜는 데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교관은 해병대 용어를 써서 확실하게 설명한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스탈링, 자네도 아직 완벽하진 않아. 연수원 졸업 전에 왼손으로도 80발 이상 쏠 수 있도록 연습하기 바란다. 나머지는 두 명이 한 팀을 이뤄서 연습하도록. 자, 시작! 스탈링 자네는 이쪽으로 와봐. 아까 차에 관해 물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아는 건 차량 일련번호와 제조사뿐입니다. 5년 전에 그 차를 소유했던 사람의 이름도 알아냈고요.”
“좋아, 잘 들어. 사람들은 차적 조회를 하면서 한 소유자에서 다음 소유자로 넘어갈 때 보통 실수를 저질러. 주마다 자동차 관련법이 다르다는 걸 잊어버리기 일쑤거든. 가끔은 경찰들도 그런 실수를 해. 컴퓨터에는 차량 등록 번호와 번호판 번호가 입력돼 있어. 그런데 우리는 일련번호가 아니라 번호판 번호나 등록 번호를 이용한 조회에 익숙하지.”
파란 손잡이가 달린 연습용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가 사격장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스탈링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쉽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어. R. L. 포크 앤 컴퍼니라는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가 각 도시의 전화번호부를 출판하거든. 그 회사 전화번호부에는 제조사와 일련번호별로 정리된 차량 등록 번호도 기재돼 있어. 쉽게 차적 조회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자동차 판매업자들이 그 전화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