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사례들은 실제 사건과 실제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세부적인 내용들은 변경했음을 밝힌다.
A Sense of Belonging Copyright © 2022 Holan L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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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language edition © 2022 by saungongg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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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발행일 2022년 12월 23일
지은이 | 호란 량
옮긴이 | 박은영
발행인 | 장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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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ISBN: 979-11-980088-3-1(15180)
전자책 가격: 12,600원
발행형태: EPU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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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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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 및 지명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했으며, 규정에 없는 경우는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했습니다.
• 단행본·전집·음반물·공연물에는 겹화살괄호(《 》)를, 논문·기고문·드라마·영화 등에는 홑화살괄호(〈 〉)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왜 소속되어야 할까?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잠깐 ‘멈춤’ 불이 켜졌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영국의 해리 왕자, 영화배우이자 코미디언 스티븐 프라이,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빌리 아일리시, 심지어 영국의 총리 알렉산더 보리스 디 페펄 존슨까지 이 주제를 다루면서 오랫동안 정신 건강을 둘러싸고 있던 금기를 깨고 있다. 이것은 바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팬데믹이 불러온 변화다.
팬데믹 동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정신 건강에 장애를 겪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게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전파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격리, 고용 불안정, 지긋지긋한 홈스쿨링, 부부가 매일 붙어 있다시피 생활하면서 생기는 마찰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비극 등의 여러 두려움 때문이다.
정신 건강에 관한 전문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정신적인 황폐함이 우리에게 긴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렇듯 정신 건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우리가 ‘정신 건강’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20년 전, 정신과 의사가 되는 여정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렸는데, 아마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정신 질환에 대해 생각할 때 문학이나 영화, 예술에서 수 세기 동안 묘사해 온 정형화된 ‘미친 사람’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가 없어서일까?
예전 영화 〈베들럼 Bedlam 〉에 등장하는, 이가 다 빠진 채로 후줄근한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거지들을 떠올려 보라. 광기에 사로잡혀 다락을 불태우는 빅토리아 시대의 광인들 또는 차가운 와인에 사람의 장기를 곁들여 먹는 지적인 사이코패스의 비뚤어진 폭력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이런 인식은 다르지 않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폭력적이고, 감당이 안 되는 살인자로 묘사되거나 혹은 불쌍하고 미성숙하며 보호 시설에서 생활해야 하는 취약한 존재로 치부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에 내재한 가장 큰 공포를 대변하면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다.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솎아 내는 것은, 명분이 무엇이든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불안 요소와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보호를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신 건강에 관해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역시 언제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신 이상’을 겪을 수 있는 똑같은 인간 조건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정신 건강과 정신 의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있지만, 그다지 순조로운 출발은 아니었다. 원래는 정신과 의사, 심지어 의사가 될 생각조차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정신 건강이 나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다양한 방면에서 말이다.
내 여정은 40여 년 전 무더운 여름, 타이완 臺灣 에서 시작되었다.
타이중 臺中 의 여름은 끈적끈적한 열기로 가득해 가만히 서 있어도 견디기 힘든데, 걸어서 여권 사무소에 도착해 몇 시간씩 줄을 서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 오후, 나는 새로 산 플라스틱 샌들에 계속 발뒤꿈치가 쓸렸고, 머리카락은 땀범벅이 되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얼음과자 먹고 싶어!”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듯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어머니에게 칭얼거렸다. 한참 동안 내가 있는 대로 씩씩대며 불편한 콧소리를 내고 난 후에야 어머니는 화난 기색을 누그러뜨렸다.
“알았어! 다음 가게에 들르자.”
나는 속으로 놀랐다. 어머니는 워낙 검소해서 웬만해서는 주전부리를 사 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관공서의 지나치게 까다로운 절차에 맞추느라 힘든 아침을 보냈으니, 이 정도는 보상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또 영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나를 보낼 때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은 것을 자축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사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 되겠지!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생에서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처럼 환상적인 모험이 될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자 얼음과자를 파는 가게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고, 내 다리는 근육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달아나기라도 하듯이, 있는 힘을 다해 가게 앞으로 뛰어갔다. 가게에 막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가게 왼쪽의 포장도로에 놓인 우리 안에서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순간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멈춰 섰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바싹 말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뒷걸음질을 치다 어머니의 손길이 어깨에 닿는 것을 느낄 때까지는 고작 일 분 정도였지만, 지금까지도 그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내가 두려움에 그 남자를 쳐다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내 얼굴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눈이 고통스러울 만큼 따가웠고, 눈물과 땀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그 남자에게 그토록 공포심을 느꼈던 것은 내가 나약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증오와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어린 마음에 그는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내게 으르렁대는 굶주린 짐승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우리에 갇힌 채 창살을 덜거덕거리며 흔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머리카락은 들러붙었고, 누가 봐도 씻지 않아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등을 구부린 채 웅크리고 앉은 남자의 눈은 흰자위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몇 개 남지 않은 치아도 같은 색이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속에는 그가 허리에 천 하나만 두르고 뼈다귀를 씹는 원시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눈동자를 마구 굴리면서 어딘가 다친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정신 건강 문제로 고통을 받는 사람과의 첫 대면이었다.
다행히 자라면서 나의 집단 의지가 정신 건강을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정신 질환의 오래된 오명과 부정적 묘사도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잦아들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 A Beautiful Mind 〉, 〈블랙 스완 Black Swan 〉,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 등과 같은 현대의 영화에서는 과거 영화들과는 다르게 정신 질환에 대해 풀어내면서 삶의 모습을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은 빈곤한 정신 건강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든,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말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이런 사실이 통계적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처음으로 직접 정신 건강 문제와 부딪혔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많은 의사 중 특히 정신과 의사는 본인들의 정신 건강이 자신들이 치료하는 환자 못지않게 취약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기에 나 역시 자살자 통계에 포함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친한 동료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경험한 일들의 동기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정신 건강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면을 지울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한때는 활기찬 10대였고, 성실한 수련의였으며, 아이들을 예뻐하는 엄마였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어떻게 내가 3층 창문 난간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그건 내가 소속감을 간절히 원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분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이웃이나 동료, 부모 또는 형제나 자매에게 소속되길 원했다. 그리고 감히 말하지만, 아마도 누구나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으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평소에 하던 식단과 운동을 재평가하는 가장 빠른 길이 가슴 통증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완벽한 정신적 웰빙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정신 건강 문제의 원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고민하게 되었다.
디너파티 같은 곳에서 정신과 의사라고 소개하면 항상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 혹시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분석하시는 거예요?”
그다음으로 많이 받는 질문은 ‘정신 건강 문제는 왜 생기는 건가요?’였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기 매우 곤란하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답할 만한 답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암이나 심장 질환과 같은 신체적 건강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신 건강 문제 역시 복합적인 원인이 있고,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본성과 양육, 즉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 두 가지 다 큰 역할을 한다.
그동안 의학자로서 접해 온 행동 유전 연구에 따르면, 정신 건강 문제의 발달에서 유전적 취약성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나는 뇌 스캔, 유전자 표지, 염증 표지, 환자와 약물 투여자 모두 임상이 끝날 때까지 시험약과 대조약 중 어떤 약을 투여했는지 모르게 진행하는 이중맹검 二重盲檢 약물 실험에 관한 논문을 읽고, 쓰고, 발표하기를 반복하면서 생물학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매번 확인했다.
그러나 임상의이자 한 인간으로서 매일, 매달, 매년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 드러난 공통된 환경에 관한 주제였다. 그들은 가족 안에서나 학교나 직장에서 또는 사회에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었다. 많은 환자가 내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치스러운 생각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들 중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가 그 수치스러움이 부모가 화가 나서 내뱉은 말, 형제자매의 빈정거림, 놀이터에서 들은 조롱 등 단 한마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지금 그들을 밤낮으로 괴롭히는 내면의 목소리로 탈바꿈한 것이다.
‘넌 미련해’, ‘넌 괴짜야’, ‘넌 뚱뚱하고 못생겼어’,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등. 이런 말들은 바로 ‘넌 여기 속하지 않아’와 같은 의미이다.
환자들의 경험을 통해 나는 정신적 웰빙을 지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전적 취약성보다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하는 정체성에 대한 감각과 소속감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속한다는 것’은 어떤 집단이나 상황 속에서 행복감 또는 편안함을 느낀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정의하면 소속감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소속감은 누구의 마음속에 속하든, 또는 어느 장소나 공동체에 속하든 우리 내부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으며,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가족 안에서 처음으로 소속감을 경험한다. 그러다 자라면서 친구, 동료, 파트너, 사회 전반에서 더 넓은 유대감을 추구하게 된다. 유대감은 누군가에,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이 느낌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햄 해럴드 매슬로 Abraham Harold Maslow 는 그 유명한 ‘욕구의 단계’에서 ‘유대감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먹을 것, 물, 온기 그리고 신체의 안전과 같은 생리적 욕구 다음으로 중요한 세 번째 욕구’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 욕구는 어느 문화에서나 공통으로 발견된다.
미국의 심리학 교수 로이 바우마이스터 Roy Baumeister 와 마크 리처드 리리 Mark Richard Leary 는 ‘사랑, 우정, 권력, 성취 등을 비롯한 인간 행위의 많은 부분에서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가 원동력으로 작용한다’1고 했다.
사람들은 더 큰 집단에 속해서 적응하게 되면, 자기 자신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무언가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즉, 자신이 그 집단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집단 안에 삶의 목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속감은 가족, 집단, 사회의 소중한 일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소속된 곳에 기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본질적으로 소속감이란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시키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확실한 것은 소속감이 ‘진화’라는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활이 시작된 초창기에도 부족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호와 보살핌을 받으려 했다는 것은, 연대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자연 선택에서 더 유리했다는 의미다. 그런 식으로 수천 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소속되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을 내재화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수 세기 동안 사회는 사람들을 응집시키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속되기’를 장려해 왔다. 그 결과, 대다수는 소속감을 추구하는 데 아주 잘 적응했다.
솔직히 우리 일상은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승인을 받거나 위치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욕망에 부응하는 행위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소속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반대로 소속감의 부재는 외로움, 거부됨, 소외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감정들이 인간의 정서 중 가장 해롭다고 하는 수치심과 굴욕감과 강하게 결부된다. 이를 이해하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 문제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성인 정신 의학을 수련한 후 아동 정신 의학 전문의 자격을 땄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 고유의 특성을 이해하고 아이의 선택을 지지해 줌으로써 아이 스스로 회복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육아 전문 서적을 출간2했다. 수십 년의 임상을 거치면서 얻은 결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해 받는 느낌, 무조건적 지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 장단점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감정이다. 또한 이런 감정은 어느 시기에 한정되지 않고 인생 전반에서 요구된다.
몇 년 전,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내가 환자들과 똑같은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마치 소속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영국으로 옮겨 간 어린이 이민자였던 내가 놀이터에서 ‘네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는 야유를 듣는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런 일을 겪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제일 먼저 학교에서 생물 시간에 배운 내용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인종 차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기분 나쁜 것보다는 너무 이상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나중에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자, 그제야 수치심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그때부터 흑인 또는 소수 민족을 의미하는 영국인 BME Black and Minority Ethnic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수치심은 튼튼한 갑옷으로도 보호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나 더럽고 작은 비밀이 되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들에게 나는 이름이 괴상할 뿐만 아니라 눈이 가늘게 찢어졌고 박쥐를 잡아먹으며, 새조개를 주우러 다니는 이민자였다.
사람들은 내가 아이들에게 하루에 여섯 시간씩 피아노를 연습시키며, 학교에서 A+ 점수를 받아 오지 않으면 두들겨 팬다고들 했다. 또, 아이들과 함께 외출하면 나를 보모로 오해하기 일쑤였고, 집에 누가 찾아와서 문을 열어 주면 청소부로 여겼다. 그러니 젊은 시절에 백인 남편과 타이 Thailand 에 휴가차 여행을 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겼을지 상상에 맡기겠다.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할 뿐 절대로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내게 ‘너무 굽실거린다’라고 했고 반대로 ‘너무 드세다’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적당하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오해 덕분에 나는 정신 건강 문제를 지닌 환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의사지만 환자들이 얼마나 소속에 목말라하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사회,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유에 대해 탐구하려고 한다. 또한 문제의 뿌리를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자기 수용감을 가질 만한 방법을 찾고자 한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연결감을 확보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우선 앞부분의 몇몇 장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연결이 어떤 식으로 손상될 수 있는지 다양하게 다룰 것이다. 가족이 소속감을 부여해 주거나 연결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지 않을 때 정신 건강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공유하지 않으면 어떤 반응일까? 흐름에 맞서 거꾸로 헤엄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친구나 가족 또는 직장을 잃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럴 때 우리의 소속감은 어떤 난관에 부딪힐까? 등을 다룰 것이다.
2부에서는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연결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에 더 취약한지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뇌 회로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뇌 회로와 다른 것인지, 아니면 불운하고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환경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서 소속감이 파괴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소외당하면서 정신 건강이 쇠약해지고 그 상태가 영구화된 것인지 등을 이야기하겠다.
사실 이런 상황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흔하다. 나는 실제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례들을 공유하고, 소속감의 결핍이 정신 건강 문제에 왜,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개인과 사회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그 예로, 최근 세계에서 일어난 여러 주요 사건들, 분열을 조장하는 수사적 표현, 그리고 반(反)이민을 부추기는 프로파간다 propaganda 는 소속되는 것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팬데믹을 억제하기 위한 전략은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물리적 연결을 단절하고 소외와 고독을 유행병처럼 퍼뜨림으로써, 전 지구적으로 정신 건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뿐 아니라, 위조지폐를 사용했다는 용의자로 지목 받아 경찰이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목을 눌러 질식사 당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 의 죽음, 이슬람 혐오주의의 팽배, 동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의 증가 등으로 우리 사회의 수많은 구성원이 오랫동안 받아 온 소외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지고 있다. 또한 귀갓길에 코로나바이러스 방역 수칙 위반을 이유로 경찰에게 납치되어 강간 후 살해당한 사라 에버라드 Sarah Everard 의 사건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게 했다.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정신 건강 서비스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나름대로 최선의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부분에서 수십 년 일해 온 내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같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에게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물론,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찾을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한다. 사회의 균열을 발견하면 메울 생각부터 하지 말고 정신 건강에 나타나는 균열을 시작 지점에서 막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속에 갇힌 채 도로에 나와 있던 남자처럼 정신 건강은 물론 모든 형태의 분리와 단절을 드러내놓고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함께 논의해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정신 건강에 대한 담론은 주로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행위에 중점을 두었다. 물론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애초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방지할 수 있다면 그 편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굴욕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감정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는 것보다 직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거나 존중받는 것이 나으며, 외로운 아이에게는 상담사보다 친구나 부모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더 낫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제대로 작동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영국 노동당 소속 정치인이었던 헬렌 조앤 콕스 Helen Joanne Cox 의 말대로 하나가 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들보다 훨씬 더 결속되어 있으며, 서로 닮은 부분이 훨씬 더 많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 주위에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등 어느 공동체든 보편적인 소속감을 창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는 당연히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돕는 방법도 있다. 이 책에서는 개개인이 자신의 소속감을 증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려 한다.
신체 건강이 그렇듯이 정신 건강도 잘 유지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더러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 있지만, 우리 마음은 치유와 회복이라는 놀라운 능력도 있다. 따라서 건강한 식생활과 운동으로 신체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것처럼 정신 건강을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잘 실천하면 이를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방법은 요가와 명상 같은 것들에 한정한 것은 아니다. 물론 요가나 명상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좋은 방법이 될 순 있지만, 더 나은 방법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다.
나는 소속감이 정체성 또는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문제는 정체성이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는 시각에 자주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할 때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일부 왜곡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그들에게 맞춰 어울리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더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심지어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즉,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상실에서 회복하려면 철저한 자기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개인으로서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독자 여러분의 출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정한 나 자신에게 만족하게 되기까지 겪은 개인적인 여정을 이 책을 통해 공유하려 한다.
‘우리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 가장 중요한 발견을 독자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다.
이 책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웰빙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피부색, 계층, 나이에 따라 모든 이들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이해’에 다다르기 위한 나의 여정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안전함 속에 움츠려 있기보다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선택했을 때였다. 그 선택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그 출발선에 좋은 롤 모델인 어머니가 계셨던 것은 행운이었다.
지금 타이완은 선진국이다. 그러나 40년 전에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불리기는 했어도 모든 국민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이렇다 할 정신 건강 케어 정책 역시 없었다. 우리 안에 갇힌 소년을, 이전까지 남자라고 했지만 그건 당시 내 눈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고 불결함에 감추어져서 그렇지, 그는 10대 정도의 나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나를 달래느라 사 주셨던 얼음과자를 파는 가게 주인의 아들이었다. 얼음과자를 넉넉하게 건네주던 가게 주인은 우리 어머니에게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아들은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로 태어나서 사회적 상호 작용 능력이 부족하고 행동이 불규칙적이며 예측할 수 없었다. 툭하면 차량이 붐비는 차로로 뛰어들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곤 했기 때문에 24시간 감시해야 했다. 지금 같으면 중증 지적 장애와 자폐증 진단을 받았을 증상이었다.
소년의 가족은 생계를 꾸리느라 소년을 계속 감시할 수 없으니 안전한 곳에 두고 지켜볼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런데 소년은 차들이 지나다니는 광경을 좋아했다. 그럴 때만 진정되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을 가두어 놓은 우리를 가게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내다 놓은 것이다. 소년의 가족은 ‘어린 숙녀’가 겁을 먹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가게를 나서면서 어머니는 우리 속으로 손을 넣어 소년에게 얼음과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소년이 빙그레 웃었고, 순간 내 두려움이 사라졌다.
내가 정신 질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일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였다. 그러나 내 마음을 여는 열쇠가 살짝 작동했던 것은 과거의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 열쇠 덕분에 나는 우리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 누구나 어딘가에 속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헝거 게임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따뜻하고 치유가 되는 느낌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와 수용 그리고 관심을 주고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동기에 충분한 사랑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아동기의 사랑과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헝거 게임 The Hunger Games 〉을 살펴보기 바란다.
당신이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이 되어 첫 번째 헝거 게임에서 단상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당연히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이 이 순간을 대비하여 훈련해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12구역의 멘토인 헤이미치 애버내시가 당신에게 물을 찾고, 음식을 구하고, 동맹을 맺고, 후원자를 모집하며, 싸우는 법, 특히 생존법 등을 가르쳐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신은 알다시피 헤이미치가 스크린을 통해 당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며,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주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에 맞닥뜨렸다고 해도 결코 혼자인 것은 아니며, 누군가는 당신 편에서 서서 지켜보고 있으며, 매 순간 당신의 성공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현실의 삶과 가벼운 오락용 서바이벌 TV 쇼를 동일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쇼를 예로 드는 것은 친부모이든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든 양육이 우리의 정신적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캣니스 에버딘의 놀라운 재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헤이미치와 12구역 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 초반에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캣니스는 가장 힘든 시간이 닥쳤을 때도 헤이미치를 신뢰하며,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헤이미치는 그녀에게 의약을 보냄으로써 그녀를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치유했다.
나를 포함해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듯, 헤이미치 역시 결점이 많은 인간에 불과하지만, 캣니스가 헝거 게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도움이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만약 캣니스가 12구역 팀의 지원 없이 헝거 게임 경기장에 들어갔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 자신이 그런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상황이 되면 누구나 두려움과 고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기장의 다른 모든 사람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 앞에서 당신은 불신감에 빠지고 공격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아무런 도움이나 안전망이 없다면 당신은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앞으로 닥칠 사건들을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느끼면서 감당하기 벅찬 엄청난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당신은 어떻게 게임의 전략을 짜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확실히 이끌어 줄 사람이 없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경쟁자들에게는 도와주는 팀이 있어서 조언과 자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시기심과 분개, 그리고 쓰라린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조공인들에 비해서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거나 왜 자신은 남들처럼 지원을 받지 못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혹시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거나 자격 미달이기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당신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에 더욱 빠져들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끌어 주며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많은 아이들이 이와 똑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대한 잘 지내보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친척이나 선생님 또는 청소년 문제를 담당하는 카운슬러 등 성인 멘토가 이 역할을 해 주지 않았던 경우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스스로 자신은 ‘불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가치가 없고’ ‘좋은 사람이 되기에 불충분’하다고 믿게 된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공허감이다. 바로 이러한 감정 때문에 어떤 이들은 평생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만족감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많은 이들이 엄청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가족 간의 첫 유대감
우리 대부분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가족 간의 관계를 통해서 처음 경험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가족 집단은 거기에 속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인생에서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의 첫 탐구를 생물학이 도와주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부모나 형제자매와 비슷한 신체적·생리적·심리적 특성을 갖고 태어나며, 이는 가족으로부터 소속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가족이라는 전속 클럽의 회원권은 18년 이상의 긴 유효 기간을 인정해 준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평생 지속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더욱 심한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 즉,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 구성원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를 지지해 주지 못할 때 그렇다. 특히 유아기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을 베푸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애착 이론’의 기본 토대로, 1950년대에 정신과 의사 에드워드 존 모스틴 보울비 Edward John Mostyn Bowlby 가 주창했다.
애착 이론에서는 상호 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를 영위할 수 있는 유대감이 안정감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소속감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이 상호간 보살핌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보울비는 이런 애착 관계는 어머니에 의해서 제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정신과 의사들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도 반드시 부모여야 할 필요는 없다. 어린이는 조부모, 숙모나 이모 또는 고모, 삼촌, 위탁 양육자나 양부모의 손에서 자라기도 한다. 생물학적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필요할 때 항상 함께 할 수 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편의상 이 사람들 또는 이들과의 유대 관계를 부모 또는 부모 관계라고 부른다. 사실 이러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사람은 ‘부모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을 의식주나 장난감, 책, 음악 수업, 학교 교육 등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라는 존재는 단지 신용카드와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빈곤층 어린이들에게는 음식과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수 있다.
부모의 기본적인 역할은 정서적 따뜻함과 지원을 제공하며, 도덕적 나침반이 되어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역할을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부른다. 안정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 같은 존재를 갖지 못한 아이들은 아동기에 정서적 및 행동상의 문제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정신 질환의 전조로 나타난다. 헤일리가 그런 예다.
일곱 살 헤일리는 법적 보호자인 리사의 손에 이끌려 상담소를 방문했다. 첫 방문 때 리사는 최근에 친구의 아기를 돌봐 주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느라 흔히 친구들이 그렇게 하듯이 아기가 아주 예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헤일리가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애를 나보다 더 사랑해요?”
리사는 별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 헤일리.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러나 헤일리는 리사가 다른 아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굉장한 배신이라고 여겼다. 마음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꿈틀거렸지만, 헤일리는 그것이 어디서 비롯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오로지 몸과 마음이 분노에 휩싸여 아프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헤일리는 이 감정이 ‘질투’라고 불린다는 것이나 리사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혼자 남겨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미 경험한 아이였지만, 리사를 자기 곁에 묶어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헤일리는 이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이것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해로운 방법으로만 분노를 표출했다.
헤일리는 리사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싶었다.
‘나 바보 아냐. 당신은 내 엄마잖아. 그 애 엄마가 아니라고!’
그러나 그 순간에 헤일리는 리사를 미워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헤일리가 생각할 때 자기가 버림받을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리사가 아니라 리사가 돌봐 주는 아기였다. 그러니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도 아기였다. 그러면 버림받지 않을 것 같았다.
헤일리는 어른들이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요 위에서 잠든 아기를 흘끗 보고는 다리를 힘껏 꼬집었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자 헤일리는 아기가 ‘고자질쟁이’라고 생각했다.
헤일리의 친모 나타샤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고 임신 기간 내내 술과 불법 약물을 달고 살다 헤일리를 조산했다. 나타샤가 헤일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것은 출산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친척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기관에 맡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 때문에 헤일리는 태어나서 일 년 동안 여러 가족 구성원들의 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그 뒤 사회 복지사가 나타샤의 사촌과 그의 아내인 리사를 법적 보호자로 승인했으나, 일 년 후에 리사는 남편과 헤어졌다. 헤일리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어머니인 리사를 따라갔다.
리사의 말에 따르면, 헤일리는 모르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놀잇감을 빼앗곤 했다. 또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아이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헤일리는 두 살 때부터 이미 떼를 쓰기 시작했고,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자기 몸을 때리거나 꼬집고 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공격의 대상이 리사로 바뀌었다. 리사의 이름을 부르거나 소리 지르고, 때리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리사에게 이제 네 살이 된 친딸 마리아가 생긴 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리사는 헤일리가 마리아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 실제로 헤일리가 마리아를 방에 가두는 일도 생겼다.
헤일리는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고 한번 폭발하면 두 시간 내내 악다구니를 쓰는 아이였다. 리사는 자기 집에서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6개월 전에 약물과 알코올 중독 재활 치료를 마쳤다면서 나타샤가 나타났다. 헤일리는 친모인 나타샤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복한 얼굴로 나타샤에게 걸어갔다. 마치 몇 년 동안 리사가 힘들게 양육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리사는 헤일리가 보란 듯이, 나타샤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서운했다. 그러나 사회 복지사와 상담하면서 헤일리와 친모의 유대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리사가 헤일리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 매주 헤일리를 두 살 난 이복형제가 있는 친모 나타샤의 집에 다니게 해 주고 있다.
그런데 헤일리가 최근 자신의 처지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였다.
‘왜 나만 이래? 난 엄마가 둘인 걸 원하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선생님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아동 정신 건강 전문가를 만나기로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들어 보니 헤일리의 상황은 명확했다.
헤일리는 친모와 더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리사에 대한 애정을 느끼면서 무의식의 분열이 일어난 상태였다. 헤일리는 양쪽으로 나눠진 애정에 대해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걸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으며, 그 결과 자신의 가족 형태가 이상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기분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헤일리의 이력을 들어 보면 이 아이의 행동과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난 첫해 동안 헤일리에게는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주는 존재가 없었다. 그러다 리사와 함께 살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지만, 곧 리사가 이혼하면서 아버지 역할을 하던 존재가 사라졌고 헤일리는 이런 일을 겪으며 한층 더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거기다 리사가 딸 마리아를 낳으면서 다시 가족 구성에 변화가 생기자 아이는 더 힘들어했다.
이런 식으로 가족 상황이 달라져 부모의 사랑을 다른 아이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면, 어떤 아이라도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애착 문제를 겪은 아이라면 훨씬 더 압도적으로 느낄 수 있다.
리사는 다정하고 든든한 보호자였지만, 처음 헤일리를 맡기로 했을 때는 남편과 함께 양육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다 지금은 혼자 아이를 떠맡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헤일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겠다고 다짐했으며, 무엇보다도 아이가 그 모든 일을 겪은 후에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어린 소녀에게만 헌신할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아이를 정식으로 입양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는데, 특히 마리아를 낳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게 뭐였을까? 리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헤일리가 키우기 힘든 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나타샤가 어린 아들과 함께 이들의 인생에 다시 등장하자 리사에게는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왜 지금이라도 헤일리를 데려가지 않을까?’, ‘왜 아직도 내가 당신 아이를 돌보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이런 생각들을 떨쳐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어서였다.
헤일리는 리사와 나타샤 사이에 고조되는 긴장을 감지했다. 그리고 자기 미래의 안정이 그 어느 때보다 험한 지경에 내몰렸다고 생각했다. 또, 자기는 거절당했는데 동생 제임스는 나타샤와 함께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이렇게 된 이유는 자기가 ‘다루기 힘든 아이’라서 그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리사는 헤일리가 듣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때 종종 친구에게 전화로 헤일리를 키우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헤일리는 슬펐다. 리사와 친엄마인 나타샤에게는 그들에게 ‘속한’ 것처럼 보이는 친자식이 있지만, 자신은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소속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뱃속 어딘가를 갉아 먹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어찌할 수 없고, 사회 복지사와 소곤거리며 전화하는 이 여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며, 결국 자기가 또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으로 보내질 때마다 아이의 심장은 조각조각 찢겨 나갔다. 이리저리 옮겨진 꾸러미를 풀었을 때처럼 헤일리에게는 공허만 남았다.
자아감이 부족해서 생긴 불안
우리는 헤일리를 영유아기에 안전하고 따뜻한 애정을 받지 못해 생긴 애착 장애로 진단했다. 헤일리처럼 어린 시절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 정신 건강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졌다.
애착 장애가 있는 어린이 중에 심각한 학대와 방치의 대상이 되어 온 경우가 더러 있지만, (다행히 헤일리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불안정한 애착3’으로 더 경미하고 뚜렷한 증상 없이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이 훨씬 많다. 이들은 누군가와 부모 자식의 관계를 맺고 있어도 아주 다양한 이유로 인해 관계에 온기가 없다. 미적지근하거나 냉탕과 온탕을 오갈 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유대 관계가 결핍된 어린이들은 이것 때문에 곧바로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여지도 있지만, 유전적 요인이나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얽히면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특히 걱정되는 것은 이 경우에 아이의 기본적인 신체와 안전의 필요성이 적절히 충족되어서 부모 자식 관계의 약점들이 전문가의 눈에 띄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취약성을 ‘내재적 불안’이라고 하는데, 정신 분석 전문의들은 이것을 ‘자아감의 부족’이라고 말한다 이 내재적 불안은 자주 ‘낮은 자존감’의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이 스스로 자기가 자존감이 낮다고 선언하고 나서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아동 신경 정신과 의사들은 어린아이의 행동에서 자존감이 투사된 것들을 식별해 내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 단서는 이를테면 지나치게 운다거나, 음료를 흘리는 등의 사소한 실수에도 공격성을 보이는 행동들에서 찾을 수 있다.
자존감이 높은 어린이들은 사소한 실수를 자신들의 능력이나 핵심 가치 또는 존재의 의미 등과 무관한 ‘일회성 사고’ 내지 ‘단순한 불운’으로 여긴다. 근본적으로 이 어린이들은 실수해도 계속 사랑받을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존감이 낮은 어린이들은 불운한 상황이 벌어지면 자신에게 벌이 내린 것으로 여기거나 ‘착하게 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거나 부모의 애정이 거기에 달려 있다고 믿어 버린다. 이런 어린이들 일부는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비난함으로써 해로운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왜 절망적인 자기 연민이나 공격성을 보이는지 또는 이것들을 동원해서 좌절을 표출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행동은 어른들에게 ‘이런 일로 울지 마!’, ‘남 탓 그만하고 네 방으로 가!’라는 식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단순히 노여움 때문에 드러낸 거절의 반응이 아이의 눈에는 자신의 가장 나쁜 부분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비친다.
여섯 살 레아가 이런 유형의 가벼운 행동 문제 때문에 가정과 학교에서 말썽거리가 된 경우였다. 선생님들은 레아의 가족 관계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혹시 자폐성 스펙트럼 장애 autism spectrum disorder, ASD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클리닉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의 기록에 따르면, 레아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때 ‘지나칠 정도로’ 친구들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했다.
자연히 다른 아이들은 레아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또 과제를 내주면 직접 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면서 학업을 거부했으며, 작은 실수라도 하면 엉엉 울면서 일부러 다 망가뜨려 버리고는 그걸 ‘쓰레기’라고 했다.
내가 레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특이했던 것은, 이 아이가 자기 어머니를 ‘닥터 포레스터’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레아가 자기 어머니를 이렇게 직업에 관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잦아서 나는 시작부터 혼란스러웠다. 레아를 클리닉에 데려온 것은 아버지였지만, 식습관에서부터 버릇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일에 이르기까지 레아의 일상에 일일이 관여하는 것은 닥터 포레스터였고, 레아의 아버지도 끊임없이 닥터 포레스터가 어쨌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잠깐 이 가족이 의료 기반 시설이 대단히 잘 갖춰져 있는 지역에서 살아서, 이들이 받는 국민 보건 서비스인 NHS National Health Service 가 주치의를 둔 정도의 수준인가 하고 착각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레아에게 누구와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연히 아빠랑 닥터 포레스터랑 살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를 통해 알아낸 것은 방사선 전문의인 레아의 어머니가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정도로 힘들게 레아를 낳고 심각한 산후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은 레아의 남동생 마이클을 임신했을 때 그녀를 돌보러 온 조산사들에 의해 뒤늦게 밝혀졌다. 이후 우울증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온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항우울증 약물을 장기 복용하고 있으며, 그녀의 기분은 만성적인 신체 건강 문제와 업무 관련 스트레스에 계속해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나는 닥터 포레스터를 만났다. 그녀는 레아가 태어난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해에 그녀는 주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 위주로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유아 건강 검진과 백신 접종은 꼼꼼히 챙겼지만, 아이들과 옹알이를 주고받는 것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보다는 늘 경력 문제를 신경 썼고, 배앓이하는 아기 곁을 지키는 것보다는 어두운 방에 앉아 뇌 사진을 분석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닥터 포레스터는 자기가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고 있어, 레아가 편두통을 일으킬 정도로 쉬지 않고 재잘대거나 계속 방안을 뛰어다니고, 관절염 통증을 유발할 정도로 무릎 위로 풀쩍 뛰어올라 꽉 껴안고 매달리는 것을 받아주기가 힘들다는 말도 했다.
닥터 포레스터는 그런 레아보다는 옆에 앉혀 놓으면 가만히 있는 레아의 남동생 마이클이 더 자기와 잘 맞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클에게 책 읽어주기를 좋아하지만, 이런 모자의 시간은 침대 위로 온몸을 내던지는 레아 때문에 자주 방해를 받는다고 했다. 닥터 포레스터는 덧붙여 왜 레아는 태어날 때부터 사랑스러웠던 마이클처럼 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레아에게서는 자폐 스펙트럼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회성이나 소통의 핵심적인 기술도 온전했다. 단 하나 주의할 점은, 사회적 능력이 다소 서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아가 정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