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보
제목과 작가, 출판사를 기본으로 적되, 출판 형태가 시리즈인지 전집인지 표기했습니다. 별도의 표기가 없다면 단행본이라는 뜻이며, 단행본은 『 』, 시리즈와 전집은 《 》, 일간지와 잡지는 「 」, 영상물은 < > 기호를 사용해 구분했습니다. 특히 시리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번역서의 경우, 영어 제목만 최초 1회 더불어 적었습니다.
(예) 『달 샤베트』 | 백희나 | 책읽는곰
『엘 데포El Deafo』 | 시시 벨 | 밝은미래
《고양이 해결사 깜냥》 | 홍민정 글·김재희 그림 | 창비 | 시리즈
《내 친구 수학공룡》 | 그레이트북스 | 전집
교과서 참고 내용
2015년 개정된 국정 교과서를 기본으로 합니다. 다만, 2022년부터 초등 3,4학년의 수학, 사회, 과학 교과서가 검정으로 바뀌어 책의 예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해당 학년에 배워야 할 기본 교과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국정 교과서와 내용은 비슷합니다.
참고 자료
미주(331쪽)에 표기했습니다.
들어가며
아들을 위해 책을 펼치는 엄마들에게
“선생님, 아이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나요?”
부정적 반응에 대비하듯, 아들 키우는 엄마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갈 때면 세상 겸손한 자세로 물어본다. 선생님이나 주변 엄마들이 내 아이의 행동에 빨간 줄을 긋고 ‘당신은 아이를 잘 못 키우고 있어요’라고 실격 판정을 내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엄마들이 생각한 육아 시나리오는 이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각종 육아 서적과 유튜브, SNS를 섭렵한 우리는 이미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이대별로 아이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 어떤 책을 읽어줄지, 아이가 생떼를 부리면 다리로 감싸서 제압하는 기술까지 알아둔 바다. 수많은 정답지를 비축하고 있으니 육아를 ‘못’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다. 당연히 내 아들은 씩씩하고 긍정적인 동시에 똑똑하며 차분한 모범생이어야 했다.
상황이 어그러진 것은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다. 슬슬 아이의 기질이 드러나고 친구들과 학습 능력이 비교되면서, 내 아이의 부족하거나 튀는 지점이 꺾은선 그래프처럼 도드라졌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친구를 밀친 거죠. 상대방 아이가 울며 집에 가니까, 괜히 제 아이가 문제아가 된 것 같았어요.”
(얌전히 놀면 좋으련만 남자아이들은 무리로 몰려다니며 위험한 놀이를 즐긴다. 긴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거나 밀치면서 놀다가, 마지막에는 꼭 한 명이 울어버린다.)
“공부 좀 했으면 좋겠는데 매일 놀이터에서 놀려고만 해요.”
(옆집 아이는 한글을 깨우쳤다는데 우리 아들은 노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온종일 놀았는데 자신은 못 놀았단다. 한글이나 연산 따위는 관심도 없다.)
“수업 시간에 꼭 말썽을 부리는 남자아이들이 있다니까요. 벌써 엄마들 사이에 이름이 쫙 퍼졌어요.”
(초등부터는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들 중 몇몇 이름이 엄마들 사이에서 대명사로 불린다. 모임 수다에서 “걔 말이야?” 혹은 “그 아이?”라고 시작되는데, 불행하게도 ‘걔’가 ‘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아이가 수업 시간에 산만하다며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죠. ADHD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요.”
(에너지 가득한 남자아이가 ‘얌전히’ 수업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갑작스럽게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엄마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아들 엄마들의 전언과 고백을 근거로 한다면, 남자아이는 온종일 놀이터에서 놀기를 원하고 친구들과 모험을 즐기며 종종 위험하게 행동한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어하며 산만하게 행동해서 눈에 띈다. 엄마들이 상상하던 이상형과 저울질하면 딱 정반대에 내 아이가 존재한다. (상대적 단점만 나열한다면 말입니다.)
‘야무지지 못한’ 아이의 모습도 눈엣가시다. 자기 할 일 딱딱 해내는 모범적인 모습은 언제나 이웃집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 집’ 아들은 간단하고 단순한 것들도 잘 챙기지 못해 눈 밖에 난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해내야 할 기본적인 덕목조차 힘겨워한다.
• 등교 시간에 학교 가기(8시 50분까지 가는데 49분에 나가요.)
• 종이 울리면 책상에 앉아 교과서 펴기(선생님이 참다못해 큰소리 내면 그때 의자에 앉아요.)
• 수업 시간에 가만히 앉아서 설명 듣기(창밖을 보거나 다리를 떨거나 지우개를 굴려요.)
• 수학 시험에서 계산한 답 쓰기(뺄셈 문제를 열심히 덧셈으로 풀어요.)
• 숙제 제출하기(깜짝 놀라며 “숙제가 있었어?”라고 되물어요.)
• 물건 챙기기(아침에 신상 잠바 입고 나갔는데, 집에 티셔츠만 입고 돌아옵니다.)
새 학기가 되면 종교가 없는 엄마들도 기도한다. “제발 아들 셋인 선생님이 담임이 되게 해주세요.” 아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 말씀 열심히 듣고 제 할 일 잘하는 여자아이에 비해 남자아이가 단체 생활에 약한 것은 사실이다. 가령 선생님이 만들기 과제를 내주면 여자아이는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남자아이는 그 과제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쓴다. 저녁 시간이면 과제를 파악하려는 엄마와 아무 생각 없는 아들의 속 터지는 대화가 거듭 오간다.
“알림장에 만들기 숙제 있던데?”
“맞다. 그게 뭐였지? 선생님이 말씀하시긴 했는데.”
“얼른 생각해봐.”
“아, 몰라. 다른 엄마한테 물어보면 안 될까?”
아들 엄마가 딸 엄마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거나 따뜻한 커피를 사면서 번호를 저장하는 이유는 타고난 성격이 사교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아이가 학교생활에서 겪게 될 불확실한 순간, 꼭 내야 할 서류나 과제, 준비물, 시험 일정 등에 마침표를 찍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들 키우는 엄마는 심신이 금세 피로해진다. “아이가 똘똘하고 야무지네요”라는 칭찬을 받아도 피곤한 것이 육아인데, 내 맘대로 척척 돌아가는 구석이 전혀 없으니 당연하다. 답답한 마음에 선배 엄마를 찾아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면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애매한 대답이 돌아온다.
“아들이잖아.”
다섯 글자를 해석하면 ‘원래 아들은 딸보다 성장이 더디고 야무지지 못하지만, 장점도 꽤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복이 올지도 모르겠다’ 정도가 되겠다. 측은지심에서 꺼낸 희망적인 메시지도 들려준다. ‘그래도’로 시작되는 위안의 이야기다.
“그래도 운동은 잘하잖아.”
(네, 하지만 아이가 손흥민처럼 될 건 아니잖아요.)
“말은 엉성해도 수학 머리는 여자애들보다 낫더라고.”
(다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기다려봐. 아들은 초등 고학년부터 머리가 열린다니까.”
(정말 그런 거죠? 맞죠?)
“그래도 생각이 단순하니까 난 오히려 좋던데. 딸 엄마처럼 아이와 감정싸움을 할 필요는 없잖아.”
(그건 맞습니다.)
아들 엄마끼리 수다를 떨면 어느새 묘한 연대감이 감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우리만의 공통된 애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걱정스러운 문제를 앞다퉈 쏟아내다가, 내 집 네 집 다 비슷하다는 동조를 얻은 후에는 “아들이니까”, “나아지겠지” 말하며 마무리하는 모습도 똑같다.
엄마들이 느끼는 과도한 피로는 단지 아들이 단체 생활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거나 수행 능력이 떨어져서만은 아니다. (여자로 자란) 엄마의 어린 시절 경험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에 부딪히거나, 예상 범위를 훌쩍 벗어나 행동하는 아이가 너무나 낯선 탓이다. 뒤늦게나마 아들 엄마들은 자신이 무엇인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참, 우리 아이가 남자였지!’
나 역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자아이를 키운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 세계명작소설에나 나올 법한 ‘차분하고 똑똑하며 사려 깊은’ 아이를 목표로 삼았을 뿐, 내 아들이 본디 어떤 세상에 속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성 구분 없이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책육아에 있어서도 ‘아들’이란 주어가 쏙 빠져 있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르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책장을 채웠다. 아이가 대여섯 살 무렵, 나는 토미 드파올라의 『오른발, 왼발Now One Foot, Now the Other』을 잠자리에서 자주 읽어주었다. 어린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걸음마를 가르쳐준 것처럼, 할아버지가 뇌졸중을 앓고 난 뒤에는 손자가 할아버지의 걷기를 도와준다는 감동적인 내용이다. 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마다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지만, 아들은 ‘엄마는 대체 왜 우는 거야?’ 싶은 얼굴로 빤히 쳐다봤다. 감정적 공감이 약한 아들의 특성을 묻어두더라도 나이에 따라 수용 가능한 감정선이 다르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이 그림 멋지네’, ‘책의 내용이 알차군’, ‘교육적이라서 좋아’라며 아이에게 열심히 읽어주었던 그림책들이 과연 ‘어린 아들’에게 얼마나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열심히 책장에 채웠던 것은 부모로서의 불안이나 교육적 열망, 여자로서의 취향이 아니었을까.
초등 과정까지 13년 책육아를 겪어보니 아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떤지, 아들에게 책이 무슨 존재이며 어떤 영향을 주는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책육아는 아들의 단점을 보완해주면서 장점에 불을 켜줄 튼튼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거나 한글을 빨리 떼주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의 정서적인 면과 학습적인 면, 언어 능력과 문해력을 포괄적으로 키워준다.
쉽게 말해 언어 발달이 늦고 주도성이 강한 아들에게 책읽기는 가장 ‘공부 같지 않은 공부’다. 단지 재미있게 책을 읽었을 뿐인데 아이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다. 아들 엄마들이 흔히 하는 하소연, “아이가 책상에 앉지를 않아요”, “선생님 말씀에 집중을 못 해요”, “이해력이 부족해요”, “글쓰기가 안 돼요”, “사람을 졸라맨으로 그려요” 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준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관찰하는 습관은, 예비 초등생 엄마들이 서둘러 걱정하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태도’를 길러준다.
아들의 책읽기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5세에서 10세까지다. 유치원(5~7세)이 그림책을 풍성히 즐기다 한글을 배우는 시기라면, 초등 저학년(8~10세)은 읽기 독립을 하고 글줄이 가득한 읽기책에 익숙해지는 시기다. 차이가 있다면 아이가 소화하는 글의 양이다. 유치원 시기에는 그림과 글로 이야기를 흡수한다면, 초등 저학년 시기에는 글을 통해 이야기를 이해한다. 다시 말해 6년간의 책읽기를 거치며 아들의 읽기가 비로소 시작되고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순간 솟아오른다.
특히 초등 저학년은 아들의 평생 책읽기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부모와 선생님의 지지가 강한 데다 아이의 읽기 수준이 폭발하면서 남자아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는다. 아들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다음이 아들에게 맞는 환경을 제공하면서 취향 저격의 책으로 읽기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엄마의 책이 아니라 아들이 좋아하는 책을 풍성하게 접해야 한다. 그래야 고학년이 되어서도 글줄 가득한 책을 읽을 수 있다. 아들에게 책육아는 ‘하면 좋아요’가 아니라 ‘꼭 해야 합니다’ 쪽에 가깝다.
이 책은 ‘아들 키우기’를 고민하는 엄마부터 ‘아들이 책과 친해지기’를 원하는 엄마들을 위한 참고서다. 아들 육아의 솔루션으로 책육아를 제안하되, 아들이 무엇을 열망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나이대별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꼼꼼하게 적었다. 동시에 아들을 키우는 ‘같은’ 엄마로서 과거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착각하여 실수했던 내용까지 담으려 애썼다. 말하자면 아들 키우는 엄마들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육아 로드맵’이다.
당신의 아들은 이제 책읽기의 시작점에 서 있다. 그림책 읽을 시간은 아직 넉넉하고 세상에 재미있는 이야기는 끝없이 많다. 아들은 신통하게도 머릿속에 거대한 상상발전소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 몇 가지 조건이 맞으면 언제든 이야기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 책읽기에 늦은 시기란 없다. 오늘, 책을 펼치면 충분하다.
‘아들은 A다’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100명의 아이가 각기 100가지 얼굴과 성격을 가지듯 아들 100명을 모아놓아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내향적인 아이와 외향적인 아이가 있으며, 다시 외향적인 아이만 모아놓아도 활동 지수 1부터 10까지 세세히 나뉜다. 아들이라고 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수학 머리를 타고난 것도 아니다. 어떤 아이는 자동차 번호판으로 덧셈 놀이를 하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초등 저학년까지 손가락을 셈의 도구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을 거듭 보노라면 적어도 이런 생각은 든다. ‘아들은 AA AB AC AD다.’ 개인별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A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남자아이는 크고 강하며 움직이는 것들, 그러니까 공룡이나 자동차나 기차를 좋아하지, 아름답고 예쁜 공주책에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 에너지를 발산하며 몸으로 놀기를 좋아하지, 가만히 앉아서 수다 떨기에는 익숙하지 않다. 엄마와 손잡고 쇼핑을 하기보다 친구와 경쟁하듯 운동을 하거나 게임을 즐긴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무엇인가 맞아떨어지는 교집합이 없다.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
라틴어 testis(고환)와 sterol(스테로이드)의 합성어. 남성을 남성답게 하는 성호르몬으로, 주로 생식선에서 분비된다. 정자를 생성하고 성욕을 증진시키며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에 기여한다.1
여성에게 에스트로겐이 강하다면 남성에게는 테스토스테론이 많으며 인간은 모두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 테스토스테론이 아들의 공격성이나 무모한 행동이나 독립적인 욕구 등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다. 물론 남자아이라도 호르몬의 양에 따라 남성적 특징이 강하거나 혹은 약하게 나타난다.
돌이켜 보면 엄마들이 당혹스러운 순간이란 아들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과하게 행동할 때가 아니던가. 산책하다 긴 나뭇가지를 주워서 싸움 놀이를 하거나 친구들과 목숨 건듯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몸을 밀치면서 대장 놀이를 하겠다고 나설 때 말이다. 위험하게 놀면서 환하게 웃을 때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는 걸까?
“베이블레이드 팽이가 한창 유행했을 때 아이마다 팽이 몇 개씩 들고 다니면서 1:1로 맞붙곤 했죠. 이기고 지는 것에 목숨 걸고 집착해서 놀랐어요. 한번은 쇼핑몰 장난감 코너에서 배틀판을 설치하자 아이들이 긴 줄을 서서 승자를 가리더군요. 대부분 남자아이였죠.”
“아들을 키워보니 호날두가 어떻게 거액의 연봉을 받는지 이해가 갔어요. 전 세계 남자아이들이 축구 경기를 좋아하고 각자 응원하는 축구팀 유니폼을 입고 축구를 하잖아요. 프리미어 리그나 챔피언스 리그가 있을 때면 잠이 많던 아이가 새벽에 일어나서 생중계를 보더라고요. 어디가 이기는지 꼭 봐야 한다면서요.”
공룡이든 로봇이든 팽이든 스포츠 경기든 남자아이는 서로 싸워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구도를 즐긴다. 유치원 시절에 로봇과 팽이에 열광했던 남자아이가 초등에 올라가면 게임과 축구, 농구에 빠지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쭉 스포츠와 게임을 사랑하지 않던가. 엄마 눈에는 공놀이의 확장판처럼 보이지만, 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재미있는 승패 싸움이다.
어디 이뿐일까. 남자아이는 가만히 앉아서 언어로 놀기를 즐기지 않는다. 온몸을 이용해 세상을 체험한다. 아파트 단지 곳곳을 돌아다닌다든지, 그넷줄을 한껏 꼬아서 빙글빙글 돌리며 탄다든지,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 칼싸움을 한다든지, 잡기 놀이를 하면서 마구 뛰어다닌다. 놀이터에서 놀더라도 몸을 움직여 에너지를 한껏 발산해야 ‘잘 놀았다’, ‘참 재밌다’라고 느낀다.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어른들은 ‘산만하다’고 평가합니다.)
몸으로 놀되 승패에 연연하니 자연히 또래끼리 싸움도 잦다. 장난처럼 몸을 밀치다 ‘어쭈, 좀 세게 차는데?’ 싶은 순간 놀이가 싸움이 된다. 놀이와 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놀다가 싸우다가, 다시 놀다가 다투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아들이 다소 과격하게 굴거나 경쟁에 목을 맬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군.’
고백하자면 우리에게는 이미 ‘좋은 아이’의 표본이 정해져 있다. 남을 배려하고 차분하게 행동하며 생각이 깊은 아이는 모범생, 반대로 산만하고 공격적인 아이는 문제아라고 여긴다. 엄마들은 잔인하거나 경쟁적이거나 공격적인 행위에 심리적 거부감이 있어 아이가 그러한 행동을 보이면 얼른 그것을 희석하려 애쓴다. 아이의 행동을 심하게 훈계하거나 놀이에 과하게 개입한다. “안 돼. 그건 나쁜 거야.”, “여기서 가만히 앉아서 놀자.”, “차분하게 행동해봐.”
‘어른이자 여성’인 엄마의 시선은, 그래서 왜곡되기 쉽다. ‘공격적이고 산만한 에너자이저 탐구자’인 남자아이의 존재는 엄마에게 너무 낯설고 불편하다. 우리가 평화주의자이거나 성격이 차분해서가 아니라, 가만히 있는 것이 편하고 싸우는 것이 싫으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기엔 힘든 나이 든 여성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키운다면 아이의 기질을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육아를 시작해야 한다. 상상 속 모범생 아들을 생각하거나 조용히 책 읽는 옆집 여자아이에게 집중하면, 정작 남자아이의 특성을 무시하거나 아이의 기본 성향을 외면한 채 ‘나만의’ 육아에 빠지기 쉽다.
『안 돼, 데이비드!No, David!』가 나온 해는 1998년 가을로, 아슬아슬 위험하게 쿠키 상자를 꺼내고, 진흙을 묻힌 채 거실을 걸어가고, 욕조의 물이 넘치게 노는 말썽꾸러기가 주인공이다. ‘무슨 이런 아이가 있어?’ 싶었던 이야기가 남자아이들의 공감을 사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제야 엄마 아빠도 ‘어린아이는 그럴 수 있어’, ‘남자아이는 저런 모습이 있지’ 인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루에 몇 번이고 “안 돼”라고 소리치는 부모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이 책의 작가 데이비드 섀넌은 어디에서 이야기의 영감을 얻었을까? 한때 ‘남자아이’였던 그는 어렸을 때 엄마의 잔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가 바로 데이비드였다.
“오리지널은 제가 어렸을 때 만든 거예요. 나중에 엄마가 그걸 보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거 좋은 그림책이 되겠는걸’ 생각했죠. (생략) 엄마들이 ‘안 돼’라고 말하는 것들은 어느 시대에나 똑같이 나타나죠.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이 항상 하는 말이죠.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와 같은 잔소리죠.”2
아들이 차분하기를 원한다면 아이의 성향을 인정하면서 ‘차분해질’ 시간을 꾸준히 주어야 한다. 책읽기는 아이가 하루 중 가장 조용하게 보내는 시간이다. 아이는 책 속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부모 곁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나.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몸으로 뛰어노는 것만큼 재미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머릿속 상상 세계에서 뛰어논다는 것이다.
아들이 차분하게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보통 저녁이다. 마음껏 놀이터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밥까지 먹으면 아이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이때 부모가 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집중한다. 하루하루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쌓이면 가만히 앉아서 책읽기가 가능해진다. 나중에 학교에 가면 놀 땐 신나게 놀더라도 책상에 차분히 앉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훈계보다 효과적이다.
운동은 규칙을 지키면서 승패를 가르고, 온몸을 움직여 에너지를 발산하며, 또래와 무리로 어울릴 수 있어서 남자아이에게 좋다.
유치원 시기, 태권도
운동, 훈계, 픽업 서비스가 결합된 태권도가 1등이다. 유아 시기의 태권도는 놀이와 품새 배우기가 더해진 체육 활동이다. 초등 1,2학년까지 아이들은 색깔별 ‘품띠’를 따려고 열심히 태권도장에 다닌다. 슬슬 말썽을 피우기 시작할 때쯤에는 사범님이 엄마 대신 훈계 서비스까지 해준다.
초등 저학년, 축구
저학년 아이들의 운동 실력은 ‘누가 더 빨리 뛰나’에 있다. 축구는 빨리 뛰어서 골을 넣는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공 하나에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방과 후 체육 종목에서도 축구가 인기다.
초등 고학년, 농구
초등 5,6학년부터 인기 종목이 축구에서 농구로 바뀐다. 고학년이 되면 얼추 골을 넣을 만큼 키가 커서 진입 장벽이 낮아진다. 엄마들은 ‘농구를 하면 키가 큰다’, ‘중고등에 올라가면 친구끼리 농구를 한다’는 말에 서둘러 농구 수업을 신청한다.
남자아이의 언어 발달은 놀이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언어가 늦어서 이렇게 노는 건지, 이렇게 놀다 보니 언어가 덜 발달한 건지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명확하지 않지만, 성별에 따라 놀이 속 ‘언어 비중’이 다른 것만은 확실하다.
유치원 시기의 여자아이는 셋만 모여도 역할극을 한다. 엄마들이 과거에 소꿉놀이를 했다면, 요즘 아이들은 드레스를 입고 장난감 하이힐을 신은 채 주방 놀이 기구로 요리를 한다. 공주가 나오는 시대극부터 선생님이 나오는 학교극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역할극의 핵심은 언어다. 누가 공주를 하고 시녀를 할지 정하는 것부터가 치열한 논쟁거리이며, 막상 역할극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온통 대사로 진행된다. (공주가 공주답지 못하다며 제대로 된 표현을 요구합니다. 아니면 바꿔야 한다고 말이죠.) 여자아이의 놀이는 역할극이나 인형 놀이를 거쳐 초등 저학년에는 단짝이랑 수다 떨기, 연예인 흉내 내기, 카톡 등으로 넘어간다. 모두 언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남자아이는 어떻게 놀까.
유치원 술래잡기, 숨바꼭질, 나뭇가지 칼싸움, 땅 파기, 땅바닥에서 비비탄 줍기.
초등 저학년 잡기 놀이, 축구, 보드게임, 게임.
초등 고학년 게임, 게임, 게임. 가끔 운동과 보드게임.
가만 보자, 말발은 언제 필요할까? 어디에 숨거나 뛰어가거나 혹은 공을 발로 차면서 숨을 헐떡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껏 말을 얹어봤자 “가위바위보, 네가 술래다!”, “야, 공을 그렇게 차면 어떡해?”, “아웃이야, 네가 반칙했어!” 수준이다. 입 짧은 아이들은 종일 별말 없이 끼어 놀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웬걸, 초등 고학년이 되면 언어 소통이 뭐지, 싶은 순간이 온다. 놀이와 게임이 동의어가 되어 가끔 신기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4명의 또래가 자전거를 타고 편의점에서 만나 사발면을 먹고는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같은’ 게임을 한다. 만나면 다행이게, 대부분 각자의 집에서 카톡이나 문자 한 통 보내기가 전부다.
‘(게임에) 들어와.’
남자아이의 언어 발달이 여자아이보다 느린 것은 뜬구름 같은 소문이 아니라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제1부 남과 여>에서는 유아기 언어 발달에는 성별에 따른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이 3가지다.
① 남자아이는 두뇌에서 언어 담당 부위와 감정을 담당하는 부위가 더 멀어서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② 여자는 양쪽 뇌의 연결이 더욱 긴밀하고 대뇌 피질의 특정 부위에 11%나 더 많은 뉴런이 있어 언어 능력이 탁월하다.
③ 5세 남자아이의 경우 뇌의 언어 관련 부위를 살펴보면 3세 반 여자아이와 비슷하다.3
맞다, 우리 아들이 유달리 부족하거나 말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다르게 태어나 언어 발달이 좀 늦을 뿐이다. 문제는 수다스러운 엄마들이 아들의 늦된 언어 발달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가령 말하기 좋아하는 엄마와 말 짧은 아들이 대화하면 종종 ‘58:5의 마술’이 펼쳐진다.
엄마 오늘 날씨가 너무 좋더라. 마치 여름 날씨 같았어. 참, 오늘 봄 소풍 어땠어? 가서 재미있는 거 많이 했니? 뭐 하면서 지냈어? 궁금해. 엄마에게 좀 얘기해줘. (58자)
아들 어, 재밌었어. (5자)
돌아보면 아들 엄마들이 가장 답답한 순간은 아이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다.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아이들 사이에 꼭 다툼이 벌어져 한쪽이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아이들의 이야기를 번갈아 반복 청취해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이가 있으니 (같이 놀던 아이도 아니고)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다.
“제가 봤는데요, 얘가 먼저 쟤를 놀려서 쟤가 그러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래도 얘가 놀리면서 장난을 쳤고 쟤가 참지 못해 공을 던져서 머리에 맞은 거예요.” 여자아이의 증언을 통해 엄마들은 그제야 얘와 쟤 사이의 일련의 상황을 파악하고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목격자가 아니었다면 분명 미제 사건으로 남을 분쟁이다.
불행히도 초등학교에 가면 남자아이는 그렇게 야무지게 ‘증언’했던 여자아이와 종종 부딪힌다. 말싸움이 나서 선생님에게 불려가면 여자아이는 사건의 정황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상처 난 감정까지 곁들여 상대를 설득하지만, 남자아이는 억울한 표정을 하고는 “그게 아니라고요”, “우이 씨”를 반복할 뿐이다. 아니, “씨”라고 해서 더 혼난다.
남자아이의 말은 대체로 늦고 짧고 불분명하다. 엄마가 무엇인지 물으면 1, 2, 3초 뒤에 말이 나온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또래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언어적 특징을 보인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내용을 부풀리거나 과장한다. 수업 시간이나 친구들에게서 배운 유행어를 대화에 끼워 넣거나, 갓 배운 아동 학대나 112 신고 등의 전문 용어도 사용한다. 몇 단계의 언어 등급을 마구 넘나든다. 언어의 격변기인 셈이다.
기본 문장(친구랑 이야기하다) 나 집에 베이블레이드 10개 있다!
아들 문장 나 집에 베이블레이드 엄청 많아! 아마 30개는 될걸!
(아뇨, 30개 없어요. 그냥 밀리기 싫어서 저러는 거예요.)
기본 문장(보드게임하다) 너 방금 속였지? 왜 그런 거야?
아들 문장 너 방금 사기 쳤지? 이 사기꾼아!
(초등 1,2학년이 되면 어린이와 어른 말투 사이를 마구 오간다. ‘속이다’와 ‘사기 치다’의 중간이 없다. 통통한 엄마를 ‘돼지’라고 말하고 나이가 많은 선생님을 ‘할머니’라고 칭한다.)
기본 문장(숙제 안 해서 혼났을 때) 엄마, 왜 등을 때려요? 기분 나빠요!
아들 문장(휴대폰을 찾으며) 이건 아동 학대야! 나 112에 전화할 거야!
(학교에서 아동 학대나 112 신고를 배우면 아들은 그것을 꼭 부모에게 써먹는다. 반은 장난, 반은 진심이다.)
과장만 할까, 남자아이들은 또래 무리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짧고 강력한’ 욕을 일찌감치 습득한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는 데다 자기감정을 간단하게 표현하니 꽤 효율적이다. ‘나 약하지 않아’, ‘내가 더 세거든’ 강조하는 셈이다. 특히 형이 있는 아이들은 빠르게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본토 억양으로 감칠맛 나게 욕을 내뱉어 주변의 시선을 끈다. ‘씨발’, ‘존나’, ‘빡친다’ 이런 말이 접두사나 접미어처럼 붙는다. (더 심한 욕도 많습니다만…)
유아 시기 언어 발달은 유전적 성향에 따라 차이가 난다. 보통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낫고, 다시 남자아이만 줄 세우면 언어적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머리가 똘똘하고 평소에 말하기를 좋아하며 나서기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언어 수준이 높다. 즉, 아이의 말발에는 타고난 성향이나 언어 능력, 보호자와의 상호 작용이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다.
부모가 그림책을 열심히 읽어주면 어떨까? 그림책 읽기 역시 언어적 자극이기에, 언어 재능이 높은 아이들은 책을 통해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낸다. 5살에 “우리 아이가 스스로 한글을 읽어요”, “2개 국어를 합니다”와 같은 증언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부모의 감탄사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언어적 재능이 부족하거나 비사교적인 남자아이라면 유아 시기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성과가 있어도 다른 아이를 따라가는 수준이니 부모가 체감하기 어렵다. 열심히 그림책을 읽어주었는데 별 차이가 없네, 싶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다. 책읽기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들의 머릿속에 계속 축적되는 중이다. 아들은 그림책을 접하면서 자신이 겪은 상황이나 주변 사물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인지한다. 어제 먹은 귤이 그림책에 나왔다면 동그랗고 노란 귤에 대해 생각한다. 또래와 장난감을 가지고 싸우고 나서 친구책을 본다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이해한다. 생각의 축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아들의 성장 과정에 도움이 된다. 매일 수치로 인쇄되어 부모에게 보고되지 않을 뿐이다.
그림책 함께 읽기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일이다. 뻔한 일상 대화에서 벗어나 환상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마치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효과가 있다.
엄마가 먼저 말하기
아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아이가 어제 친구랑 싸웠다면? 엄마가 친구랑 말다툼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감정적 표현을 덧붙여 “친구가 엄마에게 ○○라고 말해서 섭섭했어” 말하면 아이가 집중해서 듣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질문하기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엄마들이 매일 하는 질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지가 난감하다. 반면에 아이가 좋아하는 수업 시간을 콕 지목해서 물으면 아이는 금방 대답한다. 말이 짧은 아이도 장난감이나 게임에 대해서는 몇 분이고 신나서 말하지 않던가.
혼내듯 말하지 않기
“오늘 단원 평가 봤지? 몇 점 맞았어?”, “학교에 늦게 가서 혼났어?”, “숙제 다 했어?”, “학습지 다 끝냈니?”, “진짜 다 했어? 엄마가 검사할 거야!” 대답이 정해진 질문을 채근하듯 말하면 언어가 발달하기는커녕 아이는 입을 닫는다.
아이들은 5살부터 또래와 ‘진짜’ 어울려 논다. 이전에는 같이 있어도 따로 놀았다면 이 시점부터는 서로에게 맞춰가며 같이 놀기가 가능하다. 유치원이나 학교가 끝나면 다들 정해진 일과처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 일상을 반복한다. 이때부터 초등 저학년까지가 친구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성을 키우는 ‘놀이터 전성기’다. 유치원 시기에는 짧은 막대기로 땅을 파고 긴 막대기로 칼싸움을 하며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잡기 놀이를 한다. “술래잡기할 사람, 여기 모여라!” 누군가 엄지손가락을 쭉 내밀면 낯선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손가락을 건다. 친한 아이건 덜 친한 아이건, 크게 상관이 없다.
남자아이들은 놀 때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① 무리 지어 놀고, ② 관계보다 놀이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③ 이기고 지는 놀이를 즐기다, ④ 무리 안에서 나름 서열을 만든다. 엄마나 아빠가 아무리 열성을 다해 놀아줘도 주변에 또래가 있으면 눈이 돌아가고 시선이 고정된다. 눈망울에 큰 글자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도 같이 놀고 싶어.’
단짝과 인형 놀이를 즐기던 엄마들 눈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투성이다. 친구 사이에 다툼이 생겨 “너랑 다신 안 놀아” 말하고 헤어진대도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울린다. 순한 친구와 평화롭게 놀면 좋으련만 정작 아들은 말썽꾸러기 친구들 사이에 끼고 싶어서 주변을 맴돈다. 심지어 엄마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장 놀이(한 명이 대장이고 나머지가 부하 역할을 하는 놀이)에도 매번 부하로 열심히 참여한다. 엄마 입에서는 이런 말이 쏟아진다. “왜 넌 계속 부하야? 꼭 쟤랑 놀아야 해? 넌 자존심도 없니?”
그건 남자아이에게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니까 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오로지 ‘놀기’ 위해서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고 학습지를 한다. 어제 친구랑 싸웠어도 오늘 재미있게 노는 게 자존심보다 중요하고, 순한 친구랑 재미없게 노느니 놀이를 주도하는 친구의 부하가 되는 편이 낫다. 집에서 동생이랑 놀기보다 밖에서 또래나 형과 놀고 싶다. 왜? 더 재미있으니까!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시기는 초등 2학년 겨울 방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