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한지원
시민사회가 주목하는 정치경제학자
1977년 태어나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를 졸업했고, 15년간 사회단체에서 일하며 경제 및 노동 문제를 연구해왔다. 삶의 구체적 문제와 마주하는 사회 운동을 하다 보면 민주주의와 경제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매일매일 경험하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 속에는 항상 민주주의를 둘러싼 첨예한 쟁점이 있다. 저자의 강점은 오랜 사회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치, 경제 이론을 생생한 역사적 사례로 쉽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지은 책으로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노동, 운동, 미래, 전략》(공저)이 있고, 매년 다수의 보고서와 칼럼을 언론에 게재하고 있다.
들어가며
한국 대통령들은 5년간 롤러코스터를 탄다. 당선만 되면 국민적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제왕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지만, 임기 중반을 지나면 레임덕에 빠져 정책을 집행하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심지어 퇴임 후에는 권력 남용과 가족·측근 비리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대통령은 취임 전에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국민은 그런 대통령에게 반복해서 실망한다.
지난 문재인 정부 역시 불행한 운명에서 비켜나지 못했다. 취임 직후 80%가 넘었던 지지율은 퇴임 직전 50%의 부정률로 뒤집어졌다. 경제 성장, 빈부격차 완화, 사회갈등 관리 등에서도 부정적 평가가 많다. 심지어 ‘촛불정부’를 자처했음에도 민주주의에서조차 이전 정부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시기 시민 자유 점수는 8.1로 이전 두 정부 평균 8.5보다 낮다.) 왜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집권했음에도 한국 사회는 이전보다 나아지지 못했을까? 그저 대통령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새 정부의 숙제는
문재인 정부 평가에 그 답이 있다
이 책은 한국 민주주의가 왜,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여러 민주주의 이론을 근거로, 특히 문재인 정부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해결책을 찾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새로 집권하는 이 시기에, 굳이 지난 정부를 애써 돌아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을 응축해서 드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민주주의 담론은 민주화 세력 또는 진보 세력이 주도했다. 특히 1960~1970년대 재야 세력의 후계자라 할 86세대 지식인(정치인, 시민단체, 교수 등)이 담론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들이 권력의 핵심을 온전하게 장악했던 첫 정부다.
둘째, 경제 사정 때문이다. 2020년대 우리는 심상치 않은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사실 내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매디슨 프로젝트Maddison Project로 불리는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 장기 시계열 자료를 본 것이 계기였다. 주요 7개국G7을 추려서 1인당 GDP를 살펴보는데, 두 가지가 눈에 확 띄었다. 하나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경제력이 우리나라보다 낮아졌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두 나라가 우리나라가 2010년대에 달성한 경제 수준(1인당 GDP 3만 달러)에서부터 상승을 멈추고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두 나라는 (심각한 경제 침체 전후) 부패, 기존 주류의 몰락, 포퓰리즘 확산 등을 겪었고, 민주주의가 고장 난 상황에서 경제 개혁의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이 점이 문재인 대통령 시기 한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에 관한 성찰이며, 동시에 그 민주주의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해 보는 분석이다.
민주주의는
경제를 담는 그릇이다
충분히 민주화된 사회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천착하기 바쁜 마당에, 한가하게 웬 민주주의 타령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긴급하게 토론해야 할 주제이다. 먹고사는 문제와 죽고 사는 문제에서 민주주의가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흐르는 물이라면 민주주의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경제’는 주어진 조건에서 생산을 최대화할 때 성장한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제도를 만듦으로써 국민과 자원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끌어낸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따라 비슷한 인구와 자연조건을 가진 나라 사이에서도 경제적 성과가 크게 달라진다.1 민주주의라는 그릇이 커야 국민과 자원이라는 잠재적 경제 역량을 실제 생산에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다. 민주주의 발전이 그릇의 크기를 키운다면, 민주주의 타락은 그릇에 금이 가게 만든다. 일본과 이탈리아 사례는 아무리 경제적 초강대국이라도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끝을 알 수 없는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민주주의를 진단할 때 ‘타락’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할 것이다. 독자들이 이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줬으면 한다. 타락은 사전적으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라는 의미다. 그리고 영어 단어로 보면 generation에 de- 접두사를 붙인 의미, 즉 퇴보의 뜻으로도 쓰인다. 민주주의가 타락한다는 것은 국민이 주권을 오남용해 민주주의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21세기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변화는 쿠데타 같은 급격한 ‘파괴’가 아니라 국민의 선택으로 시나브로 이뤄지는 ‘타락’이다. (언론에서는 타락한 민주주의를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경제 제도가 발전한 선진국에서 시스템이 갑자기 붕괴하는 일은 드물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말 그대로 ‘시나브로’ 제도가 기능을 잃는다. 이렇게 소리 없이 진행되는 위기의 배후에는 시민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민주주의 타락이 있다. 이런 변화는 당대에는 개혁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한참 후에 과거를 돌아볼 때야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5년 내내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를 제대로 비판해야 10년, 20년 후에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오랜 기간 겹겹이 쌓인 민주주의 문제를 압축해 드러냈고, 그런 만큼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명확하게 보여줬다.
민주주의의 타락을
멈춰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오스Polybios는 민주정이 타락해 폭민정이 되면, 곧이어 군주정(장기 독재)이 도래한다고 주장했다. 폭민정은 폭민暴民이 주권을 가진다는 의미다. ‘통치받는 국민’을 수탈하는 ‘통치하는 국민’을 폭민이라 부른다. 즉 국민이 양극화된 진영으로 나뉘어, 50.1%로 승리한 국민을 위해 49.9%로 패배한 국민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핍박하는 정부가 폭민정이다.
이런 정부에서 경제와 안보가 온전할 리 없다. 나라가 극도로 불안정해진다. 혼란에 지친 국민은 현재 상황을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게 된다. 이때 메시아를 자처한 지도자가 등장해 국민의 지지를 얻으면, 그는 민주주의를 없애든지, 아니면 형식으로만 남겨둔 채 무력으로 질서를 재건한다. 그리고 군주로 국민 위에 군림한다. 국민은 군주로 인해 신민으로 강등되지만, 그럼에도 폭민의 지배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근대 이후 역사를 보면 실제로 이런 상황이 종종 나타났다. 185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1930~1940년대 독일의 히틀러, 2000년대의 베네수엘라 차베스 그리고 2010년대의 필리핀 두테르테가 다 비슷한 사례였다. 민주주의 타락은 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내몰고, 심각한 위기는 국민이 독재자를 소환하도록 만든다.
저런 세계사적인 비극에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빗대는 게 비약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 미국에서조차 트럼프라는 잠재적 독재자가 출현하는 형국이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는데, 퇴임 후에도 지지율이 현직 대통령과 맞먹는다. 이탈리아에서는 껍데기만 바꾼 네오 파시스트 정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좌파, 우파, 중도파가 결선에서 뭉쳐야 가까스로 극우파 후보들을 막는 상황이 십수 년째 이어진다. 폴리비오스가 말한, 민주정의 타락과 독재자의 등장이 먼 나라 이야기, 후진국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문재인 정부 5년을 분석하며, 새로운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는 지금의 한국에도 폭민정의 위험이 눈앞에 닥쳤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이후 진보에 대해 어떤 막연한 불만과 의심을 두게 된 사람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환상이 깨어질 때 느끼는 괴롭고 속절없는 마음이 커질수록,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 망상에서 벗어나는 데는 환멸만큼 좋은 약이 없다. 오랫동안 진보적 사회운동을 해왔던 나 역시 그러했다.
대통령제, 그것도 강한 행정부와 약한 입법부라는 조건의 대통령제에서는 새 대통령이 앞장서서 개혁을 진행해야 죽이든 밥이든 만들어진다. 나는 새 대통령이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통제받게 할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했으면 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제왕적 권력을 의욕에 넘쳐 사용하다가 불행해졌다. 민주주의 타락도 대통령의 과욕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분석과 대안이 대한민국의 불행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22년 3월 청주에서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 대통령 탄핵도 마찬가지다. 탄핵의 일상화를 경계하려면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와 ‘촛불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를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촛불이 내세웠던 국민 주권에 관한 생각들이 이 시대에 적합한 민주주의 원리였을까? 더욱 심화한 정치적 양극화와 전혀 개선되지 않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 곰곰이 생각하면 모호할 때가 있다. 예로 “나중에 술 한잔하자.”라는 말을 보자. 나중은 언제인지, 주종은 무엇인지, 한잔은 몇 밀리리터인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런 모호함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꼬치꼬치 캐물으면 실례다. 지금 바쁘니 나중에 보자는 의미로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서로에게 좋다.
그러나 권력이나 손익에 관련된 언어는 모호해서는 안 된다. 스마트폰을 개통할 때 서명하는 각종 약관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수백만의 사용자가 제기할 수 있는 여러 문제의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정해 놓다 보니, 통신사 약관에는 별별 소소한 내용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어이없는 사례도 있다. 외국의 한 다리미 회사가 소비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소비자가 바지를 입은 채 다리미질을 해서 화상을 입었는데, 사용설명서에 이와 관련한 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배상해 달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의 에피소드이지만, 이 사건 이후 그 다리미 설명서에는 “바지를 입고 다림질하지 마시오!”라는 주의 표시가 들어갔다.
민주주의는 어떨까? 민주주의는 정부government의 구성 원리다. 여기서 정부란 행정부administration에 국한되지 않고 입법과 사법까지 포함하는 의미다. 민주주의는 군대와 경찰 같은 절대적 폭력부터, 소유권과 시장 거래 같은 경제 규칙까지, 국가 내에서 가장 넓은 범위의 권력과 손익을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통신사 약관이나 다리미 사용설명서보다 훨씬 명확한 언어로 정의되어야 마땅하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면, 민사 소송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비용을 치러야 하니 말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수많은 혁명, 쿠데타, 내전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걸고 발발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규범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약관 또는 사용설명서에 해당하는 것은 아마도 헌법일 것이다. 모든 국가는 헌법에서 정부의 성격을 정의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조문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당연해서 하나 마나 한 말이기도 하다. 근대 이전부터 모든 권력 또는 최고 권력을 주권이라 불렀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정부를 민주주의라 불렀기 때문이다. 헌법은 모든 권력이 무엇인지, 그 권력을 국민이 가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헌법을 스마트폰 통신사 약관처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접근법도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그 유명한 인권선언을 전문으로 한 헌법을 가지고도 19세기 내내 혁명과 반혁명의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헌법을 만들었다 평가받는 독일에서도 20세기 최악의 비극 중 하나였던 나치 독재가 나타났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했다.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은 지금 봐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 40여 년의 독재를 막지는 못했다. 미국의 한 정치학자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미국의 헌법 속에는 민주주의 붕괴를 막아낼 특별한 장치가 없다.”라며 개탄했다고 한다. 헌법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그것만으로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만든 최상위 규칙인 헌법조차 한계가 있다면, 대체 무엇이 더 필요할까?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무엇이 바람직한 행동인지 이해해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전문가들은 100가지 법을 만들어도 200가지 편법 수단을 찾아낼 수 있다.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이 스스로 자제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또한 국민이 민주주의의 취지를 잘 이해하여 편법을 일삼는 정치인들을 심판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지키는 법은 부지불식간에 힘을 잃는다. 민주주의는 법을 초과하는 규범이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입헌 정부가 단절 없이 이어진 나라인 영국의 사례를 보자. 우선 영국에는 정리된 헌법이 없다. 영국 헌법은 13세기 초 의회 설치를 정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시작으로, 17세기 말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정리한 권리장전Bill of Rights, 수백 년에 걸쳐 내려진 중요한 역사적 판례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정부에 관한 상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헌법전憲法典이 없어 대법원이 위헌 여부를 판결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영국에서는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혁명이 발발하거나, 편법을 사용해 독재를 자행한 지도자가 없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헌법의 글자 수가 아니라, 시민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 온 규범으로 작동된다.
규범은 상호 신뢰에 기초해 자발적으로 지켜지는 규칙이다. 위반하면 처벌과 배상이 부과되는 강제 규칙, 즉 법과는 다르다. 예로 자동차 운전을 생각해보자. 빨간불에는 서고, 반대편 차선은 침범하지 않고, 최고 속도 이하로 액셀을 밟고 등등…. 이런 법규를 어기면 과태료를 문다. 그런데 법규만 지킨다고 사고를 피하는 건 아니다. 현재 교통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속도로 갈지, 전후좌우 차들의 위치를 고려해 언제 차선을 바꿀지 등을 잘 판단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주변 차들도 나와 비슷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운전 규범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운전자가 옆 차선에서 내 차를 고려하지 않고 깜빡이등만 켜고 느릿느릿 차선을 바꾸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운전 규범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될 것이다. 민주주의 규범도 이와 다르지 않다.
2019년 한국의 선거법 개정은 규범 없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여당은 제1야당의 동의도 받지 않고 완력을 사용해 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누구나 지켰던 국회의 규범은, 선거법만은 반드시 여야 동의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선거법 개정은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여부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선거가 훼손되면 민주주의도 존립할 수 없다. 2019년의 선거법 개정은 위헌은 아니었지만, 대의 민주주의를 정한 헌법의 정신은 위반한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 헌법이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그 헌법을 장식裝飾 헌법이라 부른다. 장식은 멋져 보이면 그만이지, 실제 어떤 기능을 할 필요가 없다. 규범 없는 민주주의는 헌법을 장식으로 만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민주주의로 전국이 들썩였던 가장 최근의 사례로부터 답을 찾아보자.
사실은 특별하지 않았던
국정농단
2017년 3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 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유는 “법 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는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라는 것이었다. 파면 이후 박근혜는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유죄의 이유를 “헌법상 부여된 책무를 방기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와 권한을 사인에게 나누어 준(박근혜)” 점과, “이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 사익을 추구한(최순실)” 점으로 들었다.
그런데 따져보면, 대통령 측근이 권력을 멋대로 사용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형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이 뇌물을 받고 구속됐다. 이들은 대통령의 권한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나누어 받아 사익 추구에 썼다. 군부 독재 시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사돈에 팔촌까지 대통령과 한 가닥 연줄만 있어도 떵떵거리며 이권을 챙겼다. 이렇게 볼 때 박근혜와 최순실의 사례가 대단히 특별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박 전 대통령만 유독 파면이라는 처벌을 받았을까?
박근혜의 경우 과거의 권력 남용 사례보다 대중의 분노를 더욱 세게 자극했던 점이 있었다. 바로 그의 친구 최순실이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람들’로 공개되어 있던 이전 대통령들의 가족과 달리,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던 사람이다. 시쳇말로 ‘듣보잡’이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대통령 지지층마저 등을 돌렸다. 대통령 지지율은 국회 탄핵 소추 직전 5% 남짓까지 추락했다. 이 정도로 지지율이 낮아지면 탄핵당하지 않더라도 행정부를 운영할 수 없다. 탄핵은 대통령의 권력 남용이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 극악무도해서가 아니라,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대통령을 법적으로 처리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대통령의 권력 남용이 고질병인 이유에 관해서다. 대통령 측근과 가족이 청탁을 받고 이권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 권력이 주변에서도 나누어 가질 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왜 문민화 이후 30년이 지났는데도 이 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을까? 둘째, 대중의 분노에 관해서다. 다수의 분노가 항상 정당한 건 아니다. 인종청소 같은 극단적 폭력도 대중의 민족적 분노가 응집했을 때 나타난다. 대중의 분노는 그것이 자유나 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를 높였을 때만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면, 박근혜 탄핵 전후의 분노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저항권의 정당성은
결과로 평가받는다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는 1987년 이후 최대 규모였다. 2016년 10월 29일 집회를 시작으로 헌법재판소 결정 다음 날인 2017년 3월 10일까지 연인원 1,700만 명이 참가했다(‘박근혜퇴진비상시국행동’ 추산). “헌법 제1조” 노래가 울려 퍼지며, “주권자가 명령한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외쳐졌다. 집회는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이 목표였다.
근대 민주주의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인 존 로크John Locke는 《정부론》에서 인민이 저항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정부는 인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정부가 이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정부는 사실상 내부로부터 해체된 것과 다름없다. 이때 인민은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갖는다.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 〔인민은〕 전과 다른 새로운 입법부를 창립하는 것으로 스스로 대비할 자유가 있다. 사회가 다른 사람의 과오로 인해 그 자체로 보호되어야 할 권리를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오직 확립된 입법부에 의해 그리고 입법부가 제정한 법의 공정하고 치우치지 않는 집행에 의해서만 보호될 수 있다.”2
로크의 저항권은 헌법이나 법률을 넘어선다. 정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인민은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정부를 새로 구성할 수 있다. 자유가 자연법의 영역이니, 저항권도 자연법의 영역이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쟁점이 있다. 정부가 해체됐다는 걸 누가 판단할 수 있느냐다. 만약 폭압적 독재가 유지되면 인민은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 집단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로크는 이 딜레마를 오직 신만이 진실을 안다고 얼버무렸다. 왕과 신이 건재했던 17세기 말의 한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시민은 왕이나 신에게서 독립해 있다. 우리는 저항권에 관한 로크의 숨겨진 의도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우선 정부가 해체됐다는 판단은 인민이 기존 정부를 해체한 뒤에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항권은 결과적으로 성공해야만 평가의 대상이 된다. 만약 정부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다음 평가 기준은 자연법이다. 즉, 새로 구성된 정부가 이전보다 인민의 자유를 얼마나 더 제대로 보호하는지로 저항권의 정당성을 판단한다는 의미다.
요컨대 저항권의 정당성은 새 정부가 얼마나 더 민주주의에 부합하는지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인민의 분노나 여론의 지지는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탄핵 전 박근혜 지지율이 5%였다는 이유로, 혹은 집권 직후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80%였다는 이유로,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의 정당성 여부를 따질 수는 없다. 로크의 기준에 따르면, 자유를 보장하는 더 나은 정부를 건설했는가로 정당성을 평가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2016년의 촛불 집회는 과연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탄핵 이후,
일 보 전진 이 보 후퇴
탄핵 이후 새 정부는 촛불정부를 자처했다. 실제로 촛불 시위를 이끌었던 시민단체 간부들이 대거 정부 고위직에 발탁됐다. 일부 언론이 ‘촛불 청구서’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촛불 집회에서 나온 요구가 정부 정책에 다수 반영되었다.
촛불 집회는 광화문에 100만 명 가까이 모였던 2016년 11월 12일부터 본격적으로 정세의 핵심 변수가 되었다. 당시 요구는 간단했다. ‘즉각’ 퇴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경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은 상당히 성난 상태였다. 이런 국면은 국회가 탄핵 소추를 의결한 12월 9일까지 이어졌다. 12월 중순부터 집회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개혁 과제를 요구했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과 고위 관료 모두가 오랫동안 쌓인 폐단이니, 이를 제대로 청산해야 진정한 박근혜 퇴진이 이뤄진다는 취지였다.
11월 초에 결성되어 집회를 주관했던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약칭 퇴진행동)은 인적 청산의 핵심으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황교안 총리를 지목했다. 또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세월호 진상 규명, 백남기 농민 살해 책임자 처벌, 국정교과서 중단, 언론 독립, 성과퇴출제 중단, 사드배치 중단 등을 요구했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파면 결정이 난 후에는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 도입을 통한 직접 민주주의 강화, 선거 연령 하향, 연동형 비례대표제, 결선 투표제 등의 선거 제도 변화도 요구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 따르면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 용도로 남용했기 때문이다. 퇴진행동이 강조한 적폐는 권한 남용의 결과일 수는 있겠지만, 원인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헌법재판소 안창호 재판관은 보충 의견을 통해 권한 남용의 배경을 상세히 소개했다. 일부를 인용해 보겠다.
“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로 비판되는 우리 헌법의 권력구조가 이러한 헌법과 법률 위반 행위를 가능하게 한 필요조건이라고 본다.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개헌이 있었다. 4·19혁명 직후 의원내각제 도입과 3·15 부정선거관련자 처벌을 위한 헌법개정을 제외한 나머지 헌법개정은 주로 대통령의 선출방식·임기·지위·권한 등과 관련해 이루어졌다. 그동안 우리 헌법이 채택한 대통령제는 대통령에게 정치권력을 집중시켰음에도 그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미흡한 제왕적 대통령제로 평가된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여야 합의로 개정된 것으로서 … 대통령직선제를 규정하여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을 강화하였으며,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로 하고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등을 폐지하여 장기독재의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 그러나 이 사건 심판은 현행 헌법 아래에서도 정경유착과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상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1987년 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으로 대통령 ‘권력형성’의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대통령 ‘권력행사’의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는 과거 권위주의적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법률안제출권과 예산편성·제출권, 광범위한 행정입법권 등 그 권한이 집중되어 있지만, 이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장치가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 제왕적 대통령의 지시나 말 한마디는 국가기관의 인적 구성이나 국가정책의 결정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 따라서 현행 헌법의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 될 수 있다.”3
판결문에 따르면 긴급행동의 요구는 핵심에서 한참 비켜난 것이었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한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기름이 흥건한 방에서 불이 났는데 기름이 새는 구멍은 찾지 않고, 누가 불씨를 방에 가져왔는지만 추궁하는 꼴이었다. 퇴진행동이 작성해 집회에서 외쳐진 적폐청산은 사람이든 정책이든 철저하게 박근혜 개인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심지어 적폐 청산의 목록에는 박근혜에게 호의적이었던 언론과 당시 여당(새누리당)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론과 정당의 자유는 견해에 상관없이 보장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언론과 정당은 적폐로 청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공론장이나 선거에서 경쟁을 통해 영향력이 축소될 수 있을 뿐이다. 퇴진행동의 요구는 국정농단의 필요조건이었던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이 아니라, 국정농단을 일으킨 정치 세력을 일소해보겠다는 ‘진영’논리에 가까웠다.
대통령 권력 남용의 원인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 한계는 다음 정부에서 나타났다. 대통령 권력의 범위와 강도를 평가한 박상훈은 《청와대 정부》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가 “예산과 인력의 규모는 물론, 영향력 등 눈에 보이는 측면에서 분명 전보다 더 강한 청와대”였다고 평가했다. 2018년 1월 기준으로 청와대 예산은 박근혜 시기보다 6% 늘었고, 주무 장관이 휴가인 상태에서 대통령 비서실 주도로 정책을 발표하는 사례도 있었다. 장관이 청와대 수석의 비서냐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4 국정농단의 원인이 된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이 축소되기는커녕 도리어 커진 것이다.
더군다나 진영 청산론으로 편향된 적폐청산 사업은 극단적 진영 갈등으로 번졌다. “적폐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어느 순간부터 “적폐가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이 바뀌자 촛불 집회에 참여했던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들은 왜 적폐를 청산하려 했는지는 잊어버리고, 적폐를 발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판사가 적폐로 찍힌 사람의 구속영장을 내주지 않으면 그 판사까지 적폐로 공격했다. 적폐청산에 앞장선 청와대의 힘은 당연히 더 강해졌다. 국민일보가 2020년 12월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 70%가 지난 3년간 사회 갈등이 커졌다고 답했고 50% 가까이가 정치 양극화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5 2019년 가을에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과 관련하여 사상 초유의 개혁/보수 간 집회 동원 경쟁까지 펼쳐질 정도였다.
저항권의 정당성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