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두기 ●
조선 후기의 나비는 ‘흰나비, 노랑나비, 범나비’로 뭉뚱그려 불렸으나 작품의 회화성을 위해 현재의 나비 이름을 빌려 와 썼습니다.
어렸을 적 섬에서 자란 나는
바다가 보이는 벼랑에 자주 서곤 했습니다.
벼랑에는 노을빛 원추리가 피어 있었죠.
홀로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원추리는
바람 한 줄기를 낚싯줄로 삼아 꽃대를 하늘하늘 흔들어 댔죠.
그때마다 바닷물은 오르락내리락 입질을 했고
어느 순간 공작무늬를 한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올라 원추리 꽃잎에 앉았습니다.
열 살밖에 안 됐던 나는
그 나비를 원추리가 낚아 올린 물고기라고 여겼습니다.
그날 밤부터 나는 푸른 나비를 낚는 꿈을 자주 꿨습니다.
신기하게도 나비는 내 머리 위에 내려앉거나
내가 곧 나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비가 된 나는 나풀나풀 어디든 날아갔고
꿈 너머의 세상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꿈 너머의 세상은 바로 상상의 세계였죠.
뭐든 만들어 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
결국은 꿈속의 팔랑이는 나비 날갯짓이 파장을 키워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해 준 것이었죠.
언젠가는 꿈속에서 봤던 푸른 나비를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하필 그림이 젬병이었던 나는 그림보다 더 섬세하다고 믿고 있었던 문장으로 그릴 수밖에요.
바로 『나비 부자』입니다.
이렇듯 내 꿈속의 나비 날갯짓에서 시작된 파동은
조선의 나비 화가 남계우의 붓 끝으로 옮겨 갔습니다.
남계우의 붓끝으로 살아난 나비들이
주인공 주원의 꿈을 키워 가게 해 주는 힘이 됐고
조선의 화풍을 지켜 주는 자존심이 됐던 것입니다.
비로소 나는 바다가 보이는 벼랑 위에 다시 서서
바람 낚싯줄을 드리우고 가만히 앉아 있게 됐습니다.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 올 때까지…….
하루하루 나비로 살던 김해등
사랑채 안으로 햇살이 들기 시작했다.
문살의 격자무늬가 방바닥에 그려졌다. 나는 살금살금 기어오는 듯한 햇살을 눈으로 좇았다. 햇살은 방 안쪽의 아버지가 그린 병풍 네 폭에 와 닿았다. 바로 150마리의 나비를 담고 있는 군접도•이다. 저마다 날갯짓이 다르고 암컷 수컷마저 구별되는 나비들이다. 나비 하나하나의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군접도 나비 무리의 그림.
“아, 난 언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열한 살이 되자마자 나도 화접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알면 “알량한 재주만 믿고 함부로 붓을 놀렸다간 나중에는 그림을 국밥과 맞바꿔 먹고사는 환쟁이가 되고 말 거다!”라고 혼쭐을 낼 게 빤했다.
●화접도 꽃과 나비의 그림.
그럼에도 아버지 몰래 화접도를 그린 지 꼬박 석 달째! 겨우 원추리꽃 하나를 그리고는 나비의 점 하나조차도 찍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린 나비를 따라가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자꾸 붓에 힘이 들어간 탓이다. 그러던 중 어제야 호랑나비 한 마리를 힘들게 마쳤다. 하지만 호랑나비 무늬의 검은색과 노란 빛깔이 어우러지지 못해 날갯짓이 둔하게만 느껴졌다. 치자에서 짜낸 황색이 빛깔을 제대로 뽐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오늘은 기어코 제대로 된 호랑나비를 그려 보기로 작정했다. 오기가 아니라 따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제 청나라에서 들여온 값비싼 물감을 사 왔는데 그걸 슬쩍 훔쳐 왔다.
자세를 가다듬고 벼루에 송연묵•을 갈았다. 소나무 향이 온 방을 휩싸고 돌았다. 벼루 위에 고여 가는 먹물이 검은빛으로 반짝였다. 재빨리 먹을 놓고, 사발 속에 붓을 넣어 물을 적셨다. 붓털이 생기가 돌면서 부풀어 올랐다. 사발 테에 붓을 살짝 눌러 물기를 뺀 뒤 검은 먹을 막 찍으려 들 때였다.
●송연묵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에 아교를 섞어 만든 먹.
“주원아!”
밖에서 아버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나머지 붓을 든 손도 멈춰 버렸다. 그렇지만 이내 훔쳐 온 등황• 물감으로 눈길이 돌아갔다. 샛노란 이 물감만 있으면 호랑나비를 아버지만큼 그릴 수 있을 테니까.
●등황 중국에서 자생하는 등자나무 수액을 채취하여 만든 물감.
“게 없느냐?”
대답을 다그치는 듯 아버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아버지인데 오늘따라 별났다. 난 하는 수 없이 사랑방 문을 열고 누마루로 나갔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정원 쪽으로 눈길이 저절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아침나절이면 운동 삼아 종종 가꾸던 정원이다.
막 연초록 잎을 달기 시작한 감나무와 뾰족한 가시 옆에 새순을 내밀고 있는 대추나무가 보였다. 그 앞으로는 듬성듬성 서 있는 바위를 에둘러 모란이 심겨 있는 화단이 있다. 모란은 아직 잎만 무성할 뿐 꽃망울은 달지 않고 있었다.
난 담장 밖을 향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오냐, 여기…….”
말꼬리가 가늘어진 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골똘히 무언가 관찰할 때는 어김없이 말꼬리가 희미해진다. 나비 아니면 풀꽃을 관찰하고 있을 거다. 나도 아버지를 쏙 빼닮아 나비와 꽃을 친구들이 밤을 꼴딱 새며 읽는다는 이야기책보다도 훨씬 좋아했다.
신발을 꿰차고 대문 밖으로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꽃담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마른 풀들 사이로 난 초록의 이파리를 보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에 노란 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꽃다지였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아버지는 나비와 꽃 앞에서는 양반의 체면 따윈 차리지 않았다. 희귀한 나비를 만나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쫓아갈 정도였다. 아버지가 어렸을 적 나비 한 마리를 십 리나 되는 동대문 밖까지 쫓아가 잡아 온 이야기는 남송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남송현 소공동 부근 소나무가 매우 울창하여 솔고개라 부른 고개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아버지가 붙잡은 나비를 내밀었다.
“이놈 좀 봐라.”
“어? 남방노랑나비다!”
“비슷하지만 아니다. 이놈은 각시멧노랑나비이란다.”
난 처음 들어 본 나비라 고개를 갸웃했다. 연노란 나뭇잎처럼 생긴 날개에 갈색 반점이 하나씩 찍혀 있는 예쁜 나비였다. 아버지도 몹시 의아한 듯 나비를 이리저리 살폈다.
두런두런 아버지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계곡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노는 각시멧노랑나비가 마을에 나타나다니……. 그리고 저 녀석은 진달래나 엉겅퀴꽃의 꿀을 좋아하는데 꽃다지에 붙어 있는 것도 참 희한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각시멧노랑나비는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나비이다. 언뜻 어른들이 하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한 해 처음 본 나비로 운세를 점치기도 하는데, 호랑나비나 노랑나비를 보면 운수가 좋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올해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구나.”
“정말로요?”
“그럼, 나비야말로 훌륭한 점쟁이가 아니더냐. 허허허!”
아버지는 한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어 놓고 나비를 놓아줬다. 바람을 일으켜 나비의 날갯짓을 돕는 거였다. 아래로 떨어지던 각시멧노랑나비가 재빨리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노란 빛깔이 햇살에 묻어 찔끔찔끔 눈이 부셨다. 나비는 이내 솔고개 쪽으로 스미듯 사라졌다.
아버지는 오래도록 솔고개 쪽에 둔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아마 아버지도 날개만 있었다면 각시멧노랑나비를 따라 그곳으로 날아갔을 거다. 그만큼 나비가 아버지의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당연했다.
아버지는 줄곧 나비만 그려 왔다. 나비라면 조선에서 아버지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아버지를 ‘남나비’라고 불러 댈까.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나아가 아버지처럼 나비를 잘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물감 사발과 붓을 들고 사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글공부를 하여 벼슬길에 올라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벼슬을 할 인물은 따로 있으니 날 가만 내버려 두라며 감싸 줬다. 바로 동생 주은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주은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생각이 깊고 차분했다. 그렇지만 워낙 약골인 탓에 늘 병을 달고 살기에 염려가 컸다.
봄이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큰아버지 댁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인은 급한 전갈이라며 아버지를 찾았다.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힐 정도인 걸로 봐 큰댁에 큰일이 생긴 모양이다. 아버지는 하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는 나에게 말했다.
“주원아, 지금 곧 큰댁에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네!”
난 환한 얼굴로 그림 도구들을 챙겼다. 큰댁에 갈 때마다 어른들 앞에서 그림을 그려 보이곤 했다. 큰아버지는 집안에 신동이 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떨 때는 큰아버지의 과한 마음이 되레 부담이 되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넌지시 슬하에 아들이 없어 그런다고 귀띔해 준 뒤부터야 마음을 놓았다.
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오늘은 그리 챙길 필요 없다.”
“왜요?”
난 의아해 되물었다.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고 밖을 향해 눈짓을 했다. 어서 서두르지 않고 웬 말이 많으냐는 핀잔 같았다. 난 풀이 죽어 대문을 나섰다.
큰댁은 명례방•에 있다. 대대로 물려받은 집이라 우리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기만 해도 책 냄새와 먹 냄새가 번져 왔다. 문과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큰아버지가 책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시를 짓고 있는 까닭이었다.
●명례방 지금의 명동.
하인이 대문을 열어 줬다.
“오라버니이!”
인혜가 기다렸다는 듯이 강아지처럼 뽀르르 달려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와락 안겼다. 큰아버지의 외동딸인 인혜는 나를 친오라버니처럼 잘 따랐다.
아버지가 말했다.
“넌 인혜랑 좀 놀아 주어라. 부르기 전까진 사랑채엔 얼씬도 하지 말고.”
“네, 아버지.”
난 쉬이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모로 눕혔다. 큰댁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자랑스레 나를 사랑채로 데려가곤 했었는데 이상했다. 아버지 발꿈치를 좇아 사랑채 쪽을 바라봤다. 댓돌에 신발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아, 집안 어른들도 죄다 오셨나 보구나…….”
난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인혜가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히히, 나한테도 사랑채 곁엔 얼씬하지 말랬어요.”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은 히히, 오라버니 일이지…….”
“내 일이라니?”
“아, 아니에요. 아이 참, 내 정신 좀 봐. 아버지가 오라버니 오면 서고 구경시켜 주라고 했는데.”
인혜가 서고 열쇠를 코앞에서 찰랑거렸다.
“정말?”
난 깜짝 놀라 열쇠를 쥔 인혜 손을 붙들었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서고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안 어른들도 큰아버지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지라, 나 같은 애들은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 바람에 인혜가 한 알쏭달쏭한 말은 깜박 잊고 말았다. 어쩌면 큰아버지가 나를 어른 대접해 주는 것 같아 기쁜 마음이 앞섰는지도 모른다.
인혜가 내 손을 다시 이끌며 보챘다.
“어서 서고 구경 가요.”
“그래.”
“아, 신나라. 호호.”
인혜도 서고 구경이 처음인 듯 얼굴이 달떠 보였다. 인혜는 여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 어깨너머로 글을 깨쳤다. 방에 들어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더니,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인혜가 여자애로 태어난 게 아깝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여자애들은 글공부보다는 길쌈이나 바느질을 더 배워야 하는 세상이니 그랬다.
사랑채 뒤쪽에 자리 잡은 서고는 웬만한 집 안채처럼 컸다. 위는 작고 아래는 큰 창문이 여럿 달려 있다는 게 안채와는 달랐다. 난 자물쇠를 열고 서고 문을 열었다. 빛이 먼저 서고 안으로 길게 뻗어 갔다. 빛 속에서 먼지가 살아 움직이는 듯 나풀거렸다. 여러 개의 창문으로 바람이 들고 나는 듯 조금은 서늘했다.
“아!”
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저잣거리의 책방들보다 몇 배나 더 커 보였다.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돌돌 말린 족자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림이나 글씨인 듯 했다.
난 신기한 나머지 족자부터 어루만졌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먼지가 콧속으로 훅 파고들었다.
“에, 에취!”
재채기를 하고 코를 틀어쥐었다. 장난기 많은 인혜도 빛 속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킁킁거렸다.
“오라버니, 전 책 냄새가 너무 좋아요.”
“하긴…….”
일부러 고개를 끄덕여 줬다. 나도 물감 냄새가 좋아 일부러 코를 킁킁거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