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BARACK OBAMA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2008년 11월에 당선하여 두 번의 임기를 지냈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담대한 희망』을 썼으며 200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현재 오바마 부부는 워싱턴 D.C.에서 살고 있다. 부부에게는 두 딸 말리아와 사샤가 있다.
옮긴이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공저)을 썼으며, 『통증 연대기』 『스토리텔링 애니멀』 『나무의 노래』 『자본가의 탄생』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말레이 제도』로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A PROMISED LAND
Copyright © 2020 by Barack Ob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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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1 by Woongjin Think Big Co.,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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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인생 동반자 미셸에게
그리고
찬란한 빛으로 모든 것을 더욱 환히 밝히는
말리아와 사샤에게
오, 날아라 지치지 말고
날아라 지치지 말고
날아라 지치지 말고
약속의 땅에서 성대한 천막 집회가 열리니.
—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가에서
우리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
우리가 날아오른 것은
무한의 위였으니까.
— 로버트 프로스트, 「키티호크」
일러두기
· 단행본은 『 』, 신문과 잡지는 《 》, 단편 및 논문은 「 」, 영화, TV 프로그램, 예술 작품 제목은 〈 〉로 표기했다.
·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의 대통령 임기가 끝난 직후이자 미셸과 함께 마지막으로 에어포스 원(대통령 전용기_옮긴이)을 타고 서부로 날아가 오래 미룬 휴가를 보낸 뒤였다. 기내의 분위기는 시원섭섭했다. 우리 둘 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기진맥진했다. 지난 8년간 쉼 없이 달려온 데다, 우리가 대변하는 모든 가치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인물이 후임으로 당선된 데 놀란 탓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주를 완주했고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만족했다. 내가 대통령으로서 많이 부족했더라도, 소망했으되 이루지 못한 과업들이 있더라도, 처음 취임했을 때보다는 이 나라가 더 나아졌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미셸과 나는 늦잠을 자고,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오랫동안 산책하고, 바다에서 수영하고, 관계를 점검하고, 우정을 보충하고, 사랑을 재발견하고, 덜 파란만장하겠지만 바라건대 덜 만족스럽지는 않을 인생 2막을 계획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펜과 노트를 가지고 앉은(나는 여전히 손으로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컴퓨터로 쓰면 어설픈 초고도 그럴듯하고 설익은 생각도 정리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책의 뚜렷한 얼개가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공직에 몸담은 기간의 일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재임 중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과 교류한 주요 인물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행정부가 맞닥뜨린 과제와 그에 대응해 우리 팀과 내가 내린 선택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흐름을 일부나마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미국 대통령에 대해 독자들이 감을 잡게 해주고 싶었다. 커튼을 살짝 들어올려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그 모든 권력과 위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 역시 그저 일자리이고 우리 연방정부도 여느 인적 조직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일반 시민들처럼 때로 만족하고, 실망하고, 사내 갈등을 겪고, 좌절하고, 작은 승리를 거두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마지막으로, 좀 더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가 공직 생활을 염두에 둔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고자 했고, 내가 물려받은 뒤섞인 혈통의 여러 가닥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것이 내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좇기로 마음먹고서야 비로소 삶의 목적과 내게 맞는 공동체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을 들려주고 싶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500쪽 안에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1년이면 쓸 거라 예상했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말은 집필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뿐. 의도는 좋았지만 책의 분량과 범위는 늘어만 갔다. 결국 책을 두 권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나보다 재능 있는 작가라면 같은 이야기를 더 간결하게 전달할 방법을 분명 찾아냈을 것이다. (아무렴. 백악관에서 내가 개인 집무실로 쓴 트리티 룸 바로 옆방인 링컨 객실에는 링컨이 서명한 272단어짜리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유리 액자에 모셔져 있다.) 선거운동 초창기 이야기든, 우리 행정부의 금융 위기 대처든, 러시아와 협상한 핵무기 감축이든, 아랍의 봄을 이끌어낸 시위에 관해서든, 쓰려고 앉을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단선적 서사를 거부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관해서도 맥락까지 들려줘야 한다고 느낄 때가 많았고, 그 배경 설명을 각주나 후주로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각주와 후주 둘 다 싫어한다). 방대한 경제 데이터를 언급하거나 백악관 오벌 오피스(미국의 대통령 집무실_옮긴이)의 세세한 브리핑을 인용하는 것으로는 동기를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사실 그 동기는 선거 유세를 하다 만난 시민과 나눈 대화, 군 병원을 방문해 만난 사람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얻은 교훈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녁에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 헤맸던 일이나 에어포스 원에서 보좌관들과 카드놀이 하면서 박장대소한 일처럼 언뜻 부수적인 듯한 일들이 거듭거듭 떠올랐는데, 그 덕에 백악관에서 보낸 8년간 경험한 일들을 공식 기록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글쓰기의 난관 말고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마지막 에어포스 원 비행 이후 3년 반 동안 사건들이 전개된 방향이었다. 지금 이 나라는 지구적 팬데믹과 그에 따른 경제 위기에 휘말려 사망자가 17만 8000명 이상 발생했고 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나라 전역에서 각계각층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비무장 흑인이 경찰 손에 목숨을 잃은 사건에 항의했다. 무엇보다 심란한 사실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리라. 이 위기의 뿌리에는 미국이 어떤 나라이고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에 대한 두 상반된 시각의 근본적 대립이 놓여 있다. 이로 인해 국가가 분열하여 사람들은 분노와 불신에 시달리고, 국제 규범과 절차적 안전 장치가 파기되고, 한때 공화당과 민주당 둘 다 당연시하던 기본적 사실들이 부정당하고 있다.
물론 이 대립은 새롭지 않다. 이 대립은 여러 면에서 미국인의 경험을 정의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하면서도 노예를 5분의 3짜리 인간으로 간주한 건국 문서들에도 이 대립이 담겨 있다. 이 나라 초기 법정 의견에도, 가령 정복자의 법정이 피정복자의 정당한 요구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는 핑계를 내세워 연방대법원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소유 이전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 매정한 판결에도 드러나 있다. 이 대립은 게티즈버그와 애퍼매턱스의 전장뿐 아니라 의사당에서, 셀마의 다리에서, 캘리포니아의 포도원에서, 뉴욕 길거리에서도 벌어졌다. 또한 군인들보다는 피켓과 팸플릿, 한 켤레 행군화뿐인 비무장 노조 조직가, 참정권 운동가, 풀먼 짐꾼(열차 침대칸에서 허드렛일을 한 노예 출신 흑인들_옮긴이), 학생 지도자, 이민자, LGBTQ 운동가가 벌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 지긋지긋한 전투의 핵심에 놓인 질문은 사실 단순하다. 우리는 미국의 현실을 미국의 이상에 부합시키고 싶어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치와 개인의 자유, 기회 균등과 법 앞에서의 평등 개념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정말로 믿는가? 아니면 법적으로 또는 사실상 이것들을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로 만들려 하는가?
이제 통념을 폐기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미국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심지어 오늘 자 헤드라인만 훑어봐도 이 나라의 이상이 언제나 정복과 예속, 인종적 카스트 제도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밀려 부차적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체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공평한 게임에 공모하는 셈이라고 말한다. 고백건대 나 역시 이 책을 쓰기 위해 재임기와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반추하며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링컨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부른 것에 호소함으로써 미국을 우리가 약속받은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내가 본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데 너무 주저하지 않았는지, 말이나 행동을 너무 조심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정답은 모르겠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내가 미국의 가능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 세대의 미국인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은 상호 연결된 세상을 향한 거스를 수 없는 행진에서 불거진 징후이자 한낱 일시 정지일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민족과 문화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국제적 공급사슬, 즉각적 자본 이전, 소셜 미디어, 초국적 테러 조직망, 기후변화, 대량 이주, 증가 일로의 복잡성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협력하고 상대방의 존엄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모든 인종과 신념과 문화적 풍습을 망라하는 역사상 유일한 강국인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일찍이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지, 실제로 우리 신조의 취지에 부합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평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이 책이 출간될 즈음이면 미국 대선이 치러질 것이다. 이번 선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믿지만, 선거 하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이유는 동료 시민, 특히 다음 세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확신을 제2의 천성처럼 지닌 듯한 그들은 부모와 교사가 입으로는 참이라고 말하면서도 어쩌면 온전히 믿은 적 없는 원칙들을 실현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은 누구보다 그 젊은이들을 위해 썼다. 세상을 다시 한번 새로 만들어보자고, 노고와 결단과 크나큰 상상력으로 우리 내면의 모든 최선인 것과 마침내 부합하는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그들에게 건네는 초대장이다.
2020년 8월
1부
내기
1장
백악관과 그 부지의 모든 방과 홀과 랜드마크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은 웨스트 콜로네이드(웨스트 윙과 중앙 관저를 연결하는 통행로로, 기둥이 늘어서 있어 이렇게 불린다_옮긴이)다.
8년간 그 통행로는 나의 하루를 규정했다. 집에서 일터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1분짜리 야외 출퇴근길이었다. 아침마다 매서운 첫 겨울바람과 무더운 여름 더위를 체감한 곳, 생각을 정리하고 예정된 면담 일정을 확인하고 냉소적인 의원들이나 불안해하는 유권자들에게 제시할 논거를 준비하고 이런저런 결정과 서서히 닥쳐오는 위기에 대비한 곳이다.
초기 백악관에는 대통령실 부서들과 관저가 한 지붕 아래에 있었고 웨스트 콜로네이드는 그저 마굿간 가는 통로였다. 하지만 대통령에 취임한 테디(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건물 하나로는 현대식 보좌진과 활기찬 여섯 자녀를 감당할 수 없고 자신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훗날 웨스트 윙과 오벌 오피스가 된 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수십 년간 여러 대통령을 거치며 로즈 가든의 북쪽과 서쪽을 둘러싼 현재의 콜로네이드 구조가 탄생했다.● 북쪽의 두꺼운 벽은 고요하며 높은 반달 모양 창문 말고는 장식이 없는 반면에 서쪽의 웅장한 흰색 기둥들은 안전한 통행을 지켜주는 의장대처럼 생겼다.
• 백악관은 대통령 가족 거주 공간인 중앙 관저를 중심으로 서쪽의 웨스트 윙, 동쪽의 이스트 윙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웨스트 윙은 대통령의 집무 공간으로 오벌 오피스, 루스벨트 룸, 국무회의실 등이 있다. 이스트 윙은 영부인실과 직원 사무실, 영상실 등이 있다_옮긴이.
나는 대체로 걸음이 느리다. 미셸은 하와이식 걸음이라고 즐겨 부르는데, 이따금 그녀의 음성에 짜증이 묻어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콜로네이드를 지날 때면 그곳에서 만들어진 역사와 나를 앞서간 사람들이 떠오르면서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보폭이 길어지고 발걸음이 좀 더 경쾌해졌으며 돌바닥에 내 발소리가 울리면 몇 미터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비밀경호국 요원들의 발소리가 화답했다. 콜로네이드 끝의 경사로(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와 그의 휠체어가 남긴 유산인 이곳에 서면, 미소 지으며 턱을 내민 그가 오르막을 오르느라 담배 물부리를 이로 꽉 문 모습이 떠오른다)에 이르면 유리문 바로 안쪽에 있는 제복 차림의 경비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경비원은 내 등장에 깜짝 놀란 방문객들을 제지해야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시간이 있으면 방문객들과 악수를 나누고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대개는 왼쪽으로 돌아 국무회의실 외벽을 따라 오벌 오피스 옆문으로 들어가서는, 비서관에게 인사하고 일정표와 뜨거운 차 한 잔을 챙겨 그날 업무를 시작했다.
콜로네이드에 들어서면 국립공원관리청 소속 관리인들이 로즈 가든에서 일하는 광경을 거의 매일 볼 수 있었다. 대체로 나이가 지긋하고 초록색과 카키색 제복 차림이었으며 햇볕을 가릴 헐렁한 모자나 추위를 막을 두툼한 코트를 받쳐 입기도 했다. 시간이 촉박하지 않으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새 페인트칠을 칭찬하거나 간밤 폭풍우 피해에 대해 물었고 그들은 조용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하는 일을 설명했다. 그들은 말수가 적었다. 자기네끼리도 몸짓이나 고갯짓으로 소통했으며, 각자 임무에 집중하면서도 전체의 움직임에는 일사불란한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최연장자 중 한 명인 에드 토머스는 키가 크고 억세고 뺨이 움푹 들어간 흑인으로, 백악관에서 일한 지 40년이 됐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와 악수하기 전에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흙을 닦았다. 핏줄과 마디가 나무 뿌리처럼 굵은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백악관에서 얼마나 더 있다가 은퇴할 거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대통령님. 저는 일하는 게 좋습니다. 관절이 조금 쑤시긴 합니다만 대통령님께서 여기 계신 동안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정원을 보기 좋게 가꿔야죠.”
아, 정원은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 구석마다 목련이 높이 솟아 그늘을 드리웠고 울타리는 두툼하고 풍성했으며 꽃사과나무는 딱 적당히 가지치기를 했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온실에서 재배된 꽃들은 끊임없이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자주색으로 만발했다. 봄에는 튤립이 흐드러지게 피어 태양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고, 여름에는 연보라색 향수초와 제라늄과 백합이 피었으며, 가을에는 국화와 데이지와 들꽃이 피었다. 그리고 언제나 장미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대부분 빨간색이었지만 이따금 노란색이나 흰색도 있었다. 모두 선명한 색을 한껏 뽐냈다.
콜로네이드를 걷거나 집무실 창문을 내다볼 때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 보였다. 그러면 벽에 걸린 작은 노먼 록웰 그림이 떠올랐다. 조지 워싱턴 초상화 옆,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 두상 위쪽에 놓인 이 그림에는 피부색이 다른 작업복 차림의 인부 다섯 명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밧줄에 몸을 묶은 채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을 닦고 있다. 이들도 정원의 관리인들도 모두 수호자요, 선하고 엄숙한 질서를 지키는 침묵의 사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자기 일을 하는 것만큼 나도 열심히 일하고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콜로네이드를 오가는 걸음걸음에 추억이 쌓였다. 물론 카메라 부대 앞에서 발표하거나 외국 지도자와 기자회견하는 등의 대규모 공개 행사도 있었다. 하지만 본 사람이 거의 없는 순간들도 있었다. 오후의 깜짝 방문 때 말리아와 사샤가 내게 먼저 인사하겠다며 경주하던 순간, 우리 개 보와 서니가 눈밭을 뛰어다니다 발이 깊이 빠져서 턱에 하얀 수염이 생긴 순간. 화창한 가을날 미식축구공을 주고받던 순간, 개인적 어려움을 겪은 보좌관을 위로하던 순간.
이런 영상들이 종종 머릿속에서 번득이며 내가 몰두하던 계산을 방해했다. 그러면 시간의 흐름이 실감되었으며, 이따금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새로 시작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침에 걸으면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때는 시간의 화살이 앞으로만 움직였다. 그날의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고, 앞으로의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밤은 달랐다. 저녁에 서류 가방 가득 문서를 채워 관저로 돌아가는 길에는 나를 늦추게 하려고, 때로는 멈추게 하려고 노력했다. 흙과 풀과 꽃가루 내음이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람 소리나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기둥에 비친 빛, 백악관의 웅장한 위용, 지붕 높이 펄럭이며 밝게 빛나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멀리 검은 하늘을 꿰뚫은 워싱턴 기념비를 보다가 그 위의 달과 별, 반짝거리며 지나가는 제트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순간이면 나를 이곳으로 이끈 신기한 행로―그리고 생각―에 경탄했다.
나는 정치인 가문 출신이 아니다. 외조부모는 주민의 대부분이 스코틀랜드·아일랜드 혈통인 중서부 출신이다. 두 분은 진보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당신들이 자란 대공황기 캔자스 타운의 기준에 따르면 더더욱 그랬으리라. 두 분은 뉴스를 탐독했다. 모두가 툿(하와이어로 할머니를 뜻하는 투투의 준말)이라고 부르는 외할머니가 조간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너머로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지성인이 되려면 뉴스를 열심히 봐야 해.” 하지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당신들이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선 이념적, 당파적 지향을 확고하게 품지는 않았다. 두 분의 관심사는 일(외할머니는 지방 은행의 에스크로 담당 부장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생명보험 모집인이었다)과 공과금 납부, 소소한 오락거리였다.
어쨌든 두 분이 살았던 하와이 오아후섬은 급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두 분은 오랫동안 오클라호마주, 텍사스주, 워싱턴주 등을 전전하다가 하와이가 주州로 편입된 이듬해인 1960년에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제 바다가 폭동, 시위, 그리고 다른 것들로부터 두 분을 갈라놓았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두 분이 유일하게 나눈 정치적 대화는 해변 술집에 대한 내용이었다. 호놀룰루 시장이 와이키키 해변 끝자락을 개발하려고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샘물(술집)을 폐쇄했다.
그 일로 외할아버지는 시장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내 어머니 앤 더넘은 이와 달리 확고한 의견으로 가득했다. 외할머니의 외동딸인 어머니는 고등학생 때 관습에 반기를 들어 비트족 시와 프랑스 실존주의 작품을 읽는가 하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친구와 함께 차를 훔쳐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며칠 동안 갔다 오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민권운동 행진에 대해, 베트남전쟁이 왜 판단 착오가 낳은 재난인지에 대해, 여성 운동(물론 평등 임금 쟁취에 관한 부분이었다. 어머니는 다리털 면도를 거부하는 것에는 심드렁했다)과 빈곤과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새아버지와 살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정부의 부패가 죄악이며 모두가 부패를 저지르더라도 죄악은 죄악이라고 잘라 말했다(“말 그대로 도둑질이란다, 배리”). 훗날 내가 열두 살에 접어든 여름에 한 달간 미국을 횡단하는 가족 여행을 갔을 때도 어머니는 밤마다 워터게이트 청문회를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직접 해설을 곁들였다(“매카시주의자에게서 뭘 바라겠니?”).
어머니는 굵직한 사건에만 주목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은 내가 학교에서 딴 아이들과 함께 한 아이를 괴롭히자 나를 자기 앞에 앉혔다. 실망감에 입을 앙다문 채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들어봐, 배리(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와 외조부모가 부르던 별명으로, 종종 줄여서 ‘베어’라고도 했다). 세상에는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차지할 수 있기만 하면 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신경 안 쓰지. 자기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려고 남을 깔아뭉갠단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들도 있어. 남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할 수 있고 남들에게 상처 입히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하지.”
어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자, 그렇다면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어머니의 의도대로 저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언제나 도덕적 가르침의 기회를 찾아냈다. 하지만 정치 운동에 몸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외조부모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강령, 신조, 절대적인 것에 의심을 품었고 자신의 가치를 더 작은 캔버스에 표현하고 싶어 했다. “세상은 복잡하단다, 베어. 그래서 흥미롭지.” 베트남전쟁에 좌절한 어머니는 동남아시아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언어와 문화를 흡수하고, 국제 개발 분야에서 마이크로크레디트가 유행하기 오래전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제공하는 사업을 벌였다. 인종주의에 경악했고, 인종이 다른 사람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결혼했으며, 갈색 자녀 둘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아부었다.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제약에 격분했고, 남편이 고압적이거나 실망스러운 것으로 드러나자 두 번 다 이혼해 자신이 선택한 삶의 길을 걸었으며, 자신의 예절 기준에 따라 자녀를 양육했고, 무엇이든 내키는 일을 했다.
어머니의 세상에서는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그 구호가 쓸모없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 야심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렸지만 어머니와 외조부모는 나를 하와이 최고의 사립 고등학교 푸나호우에 보냈다. 대학에도 당연히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내게 언젠가 공직에 진출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물으면 내가 포드재단 같은 자선 기관에 들어갈 줄 알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외조부모는 내가 판사가 되거나 페리 메이슨(소설 『기묘한 신부』의 주인공_옮긴이) 같은 훌륭한 법정 변호사가 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녀석의 똑똑한 입을 써먹는 것도 좋겠지.”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잘 몰랐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별로 없었다. 한동안 케냐 정부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았다. 내가 열 살 때 케냐에서 호놀룰루로 날아와 한 달간 우리와 함께 지냈는데, 이때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아버지 소식은 봉투 없이 접어 주소를 적게 되어 있는 얇은 파란색 항공 우편 용지에 쓴 편지로만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한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네 엄마가 그러는데 네가 건축을 공부하고 싶어 한다더구나. 건축은 매우 실용적인 직종이고 세계 어디서나 써먹을 수 있을 거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 너머의 세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글쎄, 사람들은 십 대 시절의 나를 될성부른 지도잣감보다는 게으른 학생, 열정만 있고 재능은 없는 농구 선수, 열성적으로 파티에 몰두한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학생회에는 한 번도 가입하지 않았고 이글 스카우트나 지역 하원의원 사무소 인턴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내내 친구들과의 토론 주제는 스포츠, 여자, 음악, 진탕 취할 계획뿐이었다.
당시 친구 중 보비 팃컴, 그레그 오엄, 마이크 라모스 세 명과는 지금도 가장 친하게 지낸다. 아직도 우리는 젊음을 탕진한 이야기만으로 몇 시간씩 웃고 떠든다. 훗날 나의 선거운동에 투신한 이 친구들은 MSNBC에 출연해 나의 과거를 변호하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해졌다. 나는 이들의 헌신에 늘 감사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대통령 임기 중의 내 모습에―이를테면 대규모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나 기지 순방 중에 젊은 해병대원들에게 힘찬 경례를 받는 장면을 보고―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양복과 넥타이 차림의 은발 사내가 자기들이 알던 알쏭달쏭한 애어른과 같은 사람임이 실감나지 않는 눈치였다.
틀림없이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 것이다. 저 친구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친구들이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라도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언제부턴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선택에 대한, 나처럼 생긴 사람이 드문 곳에 어떻게 해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많은 질문의 핵심에는 인종 문제가 있었다. 왜 흑인은 프로 농구 선수는 될 수 있지만 코치는 될 수 없을까? 고등학교 때 나를 흑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던 여자아이의 말뜻은 무엇이었을까? 왜 액션 영화에 나오는 흑인들은 점잖은 흑인 남자 한 명(물론 조연으로) 말고는 죄다 잭나이프를 휘두르는 미치광이인데다 매번 목숨을 잃을까?
인종이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계층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자라면서 부유한 엘리트의 삶과 빈곤한 대중의 삶 사이의 크나큰 간극을 보았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부족 갈등에도 눈뜨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조부모의 갑갑해 보이는 삶도 매일같이 목격했는데, 그들은 좌절감을 TV와 술, 때로는 새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로 달랬다. 어머니가 지적 자유의 대가로 늘상 돈에 쪼들리고 이따금 개인적 혼란을 겪는 광경도 지켜보았다. 사립학교의 노골적 서열에도 익숙해졌는데, 대부분 부모의 재산이 서열을 결정했다. 그러다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렸다. 어머니가 뭐라고 주장하든, 남을 괴롭히고 속이고 잘난 체하는 이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어머니가 보기에 선량하고 예의 바른 이들은 큰 곤욕을 치렀다.
이 모든 경험은 나를 제각각의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물려받은 혈통적 유산과 여러 세상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기묘한 처지 때문에 나는 모든 곳에서 왔으면서도 어디에서도 오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어디 속하는지 모르는 채 위태로운 서식처에 갇힌 오리너구리나 상상의 짐승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부품들로 이루어진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유나 방법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 삶을 이어 붙여 탄탄한 축에 고정하지 못한다면 본질적인 의미에서 홀로 살아가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친구나 가족에게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지금보다 더 별나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찾은 피난처는 책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독서 습관은 아주 어릴 적부터 배어 있었다. 내가 지루하다고 짜증 낼 때, 나를 인도네시아 국제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을 때, 애 봐줄 사람이 없어 나를 데리고 일하러 가야 할 때 어머니는 으레 책을 내밀었다. 가서 책을 읽으렴. 다 읽고 나서 뭘 배웠는지 말해줘.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을 계속하며 내 동생 마야를 키우느라 나를 하와이에 보내 외조부모와 몇 년간 살게 했다. 잔소리하는 어머니가 없어지자 예전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성적도 금방 표가 났다. 그러다 10학년 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 아파트 맞은편 센트럴 유니언 교회의 바자회에서 오래된 양장본이 담긴 통 앞에 서 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관심이 가거나 막연히 친숙해 보이는 책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랠프 엘리슨과 랭스턴 휴스, 로버트 펜 워런과 도스토옙스키, D. H. 로런스와 랠프 월도 에머슨의 책들이었다. 중고 골프채를 눈여겨보던 외할아버지는 책 담은 상자를 들고 가는 나를 보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 열 작정이냐?”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 조용히 하라며 문학에 대한 나의 느닷없는 관심을 대견해하면서도, 언제나 실용주의자였던 분답게 『죄와 벌』을 파고들기 전에 학교 숙제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나는 이 책들을 모두 읽었다. 때로는 친구들과 농구하고 맥주를 마신 뒤 집에 돌아와 밤늦게, 때로는 일요일 오후 보디서핑을 즐긴 후 외할아버지의 낡아빠진 포드 그라나다에 홀로 앉아 좌석이 젖을까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책을 읽었다. 바자회에서 산 책을 다 읽고는 다른 벼룩시장에 가서 더 읽을 것들을 찾아보았다. 그때 읽은 것들 대부분은 막연하게만 이해했다. 낯선 단어는 동그라미를 쳐뒀다가 사전에서 찾아봤지만, 발음은 깐깐히 따지지 않았다. 20대에 훌쩍 접어들고도 뜻은 아는데 발음하지 못하는 단어가 많았다. 나의 지식엔 체계가 없었다. 운율도 패턴도 없었다. 나는 집 차고에서 낡은 브라운관과 볼트와 남는 전선을 모으는 꼬마 기술자 같았다. 이걸로 뭘 할지는 몰랐지만, 내 소명의 성격을 알아내는 날엔 쓸모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1979년 옥시덴털 칼리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책에 대한 관심 덕분일 것이다. 대학생이 된 나는 정치 사안에 대한 얄팍하지만 어지간한 지식과 온갖 설익은 견해를 늦은 밤 기숙사 토론회에서 쏟아냈다.
돌이켜 보면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대학에서의 첫 2년간 나의 지적 호기심은 내가 사귀려고 시도한 여러 여자들의 관심사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마르크스와 마르쿠제 덕분에 기숙사의 다리 긴 사회주의자에게 말 붙일 거리가 있었고, 프란츠 파농과 궨덜린 브룩스는 내게 두 번은 눈길을 주지 않은 매끈한 살결의 사회학 전공생에게 써먹었으며, 푸코와 버지니아 울프는 검은색 일색으로 차려입은 신비로운 양성애자를 위해서 읽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꾸며낸 지성은 여자를 유혹하는 전략으로는 영 쓸모가 없었다. 다정했지만 동정童貞은 면치 못한 관계를 잇따라 겪고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어설픈 노력은 성과가 있었다. 세계관에 가까운 무언가가 내 머릿속에서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들쭉날쭉한 공부 습관과 청년 특유의 허세를 참아준 몇몇 교수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더 큰 도움이 된 사람은 도심 출신의 흑인 학생들, 소도시에서 혼자 힘으로 대학에 입학한 백인 학생들, 1세대 라틴계 학생들, 혼돈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파키스탄이나 인도나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온 외국 학생들을 비롯하여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소수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수업 시간에 그들이 발표하는 견해는 실제 공동체, 실제 투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예산 삭감이 저희 동네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에 불만을 제기하시기 전에 저희 학교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수정헌법 제1조는 위대한 법이지만, 저희 나라의 정치범들에 대해 미국 정부는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까?”
옥시덴털에서 2년을 보내며 나는 정치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치를 신봉하지는 않았다. 극소수 예외도 있었지만, 내 눈에 비친 정치인들의 모습은 전부 미심쩍었다. 헤어드라이어로 부풀린 머리, 음흉한 미소, TV에서는 고상한 얘기를 늘어놓고 자수성가를 강조하다가도 막후에서는 기업과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작태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짜고 치는 판의 배우들이라고 판단했고,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았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더 폭넓고 덜 인습적인 것, 정치 운동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뭉쳐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사회운동 분야였다. 나는 참정권 운동가들과 초창기 노조 조직가에 대해, 간디와 레흐 바웬사와 아프리카민족회의에 대해 공부했다. 무엇보다 킹 목사는 물론이고 존 루이스, 밥 모지스, 패니 루 헤이머, 다이앤 내시를 비롯한 젊은 민권운동 지도자들이 인상적이었다. 유권자 등록을 위한 가가호호 방문, 간이식당 연좌 농성, 자유의 노래를 부르며 걷는 행진 등을 망라하는 그들의 영웅적 시도에서 나는 어머니에게 배운 가치를 실현할 가능성을 보았다. 남을 내리누르는 게 아니라 떠받쳐 올림으로써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진정한 현실 민주주의였다. 높은 데서 내려주는 선물이나 이익집단 간의 전리품 분배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쟁취한 민주주의, 모두가 참여한 결실로서의 민주주의였다. 그 결과는 변화한 물질적 조건뿐 아니라 사람들과 공동체의 자존감, 한때 소원해 보이던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으로 나타났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할 만한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집중이었다. 나는 새출발을 했다. 2학년을 마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 편입했다. 뉴욕에서 지낸 3년간, 허물어져가는 연립주택들을 전전하며 나쁜 습관과 옛 친구들을 등진 채 수도승처럼 살았다. 읽고 쓰고 일기장을 채웠으며 대학생 파티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데운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 틀어박힌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몰두했다. 왜 어떤 운동은 성공하고 어떤 운동은 실패할까? 대의의 일부가 기성 정치에 흡수되는 것은 성공의 징표일까, 대의를 도둑질당했다는 표시일까? 무엇이 타협이고 무엇이 변절이며, 둘의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 그때의 나는 얼마나 진지했던가―얼마나 사납고 엄숙했던가! 이 시기의 일기를 읽으면 버락이라는 청년에게 크나큰 애정이 솟는다.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기를 갈망한 그는 원대한 이상의 일부가 되고 싶어 했다. 증거로 보건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봐야 1980년대 초의 미국 아니던가. 이전 10년의 사회운동은 활력을 잃었으며 신보수주의가 득세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경제는 불황이었고 냉전이 절정이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버락이라는 청년에게 책을 잠시 내려놓고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쐬라고 닦달할 것이다(당시는 내 흡연량이 최고조였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휴식을 취하라고, 사람들 좀 만나라고, 20대에게 삶이 베푸는 즐거움을 누리라고. 몇 안 되는 뉴욕 친구들도 비슷한 조언을 했다.
“인상 좀 펴고 살아, 버락.”
“여자라도 만나.”
“넌 너무 이상주의적이야. 대단한 일이지만, 네 말이 정말로 가능한지 모르겠어.”
나는 이런 목소리들에 저항했다. 그들이 옳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홀로 보낸 시간에 품은 생각이 무엇이었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그 어떤 전망이 내 젊은 정신의 온상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든, 간단한 대화 속의 검증조차 통과하기 힘들었다. 맨해튼 겨울의 잿빛 햇살 속에서 당시 지배적인 냉소주의에 맞서, 수업 시간에나 친구들과 커피 마시며 설파한 아이디어들은 공상이나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드러났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스물두 살이 되기 전에 구제 불능 고집불통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차원에서 나의 전망이 터무니없음을, 원대한 야심과 내가 현실에서 실제로 하는 일 사이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공상가 월터 미티의 청년 시절이요, 산초 판사 없는 돈키호테와 같았다.
이런 내용도 나의 모든 단점을 정확히 기록한 연대기인 당시 일기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행동보다 사변을 좋아했다. 내성적인 면, 심지어 수줍음은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자란 탓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깊은 자의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거절당하거나 한심해 보이는 것에 예민했다. 게으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심지어 나의 천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유약한 면을 자기계발 요법으로 떨쳐내려 애썼지만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미셸과 아이들은 내가 지금도 수영장이나 바다에 가면 헤엄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낀다고 꼬집는다. “발만 담그고 걸으면 안 돼?” 그들은 킥킥대며 이렇게 말한다. “재밌어. 여기 봐……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줄게.”) 나는 목록을 만들었다. 운동을 시작해 센트럴파크 저수지나 이스트강을 따라 달렸고 연료로 통조림 참치와 삶은 달걀을 먹었다. 여분의 소유물도 내다버렸다. 셔츠 다섯 벌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어떤 대단한 경주를 준비하고 있었을까? 무엇이든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 불확실성과 자기 불신 덕에 손쉬운 정답에 섣불리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습관을 들였고, 이 습관은 궁극적으로 쓸모가 있었다. 남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레이건 시절의 여명기에 많은 좌파가 받아들인 극단적 해법들에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에서만큼은 분명히 그랬다. 나는 인종적 멸시를 당할 만큼 당해봤으며 할렘이나 브롱크스를 걸을 때마다 노예제와 짐 크로법(공공장소에서 흑인을 백인과 분리하도록 규정한 인종차별법_옮긴이)의 끈질긴 유산을 똑똑히 목격했다. 하지만 삶을 경험하면서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너무 성급히 내세우지 않는 법을 배웠고, 백인들이 구제 불능의 인종주의자라는 일부 흑인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인종주의가 필연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에 나는 국가란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두고 미국의 이념을 옹호했다.
어머니와 외조부모는 한 번도 애국을 떠들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낭송하고 독립기념일에 작은 깃발을 흔드는 일은 신성한 의무가 아니라 신나는 의식으로 여겼다(부활절과 성탄절을 대하는 태도도 대동소이했다). 심지어 외할아버지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도 별것 아닌 일로 치부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조지 패튼의 부대에서 행군한 영예보다는 K–레이션 전투 식량 먹은 이야기에 더 열을 올렸다(“끔찍하더군!”).
그럼에도 내가 미국인이라는 자부심,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신념은 언제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젊을 때 나는 미국예외주의를 배격하는 책들에 분노했으며, 미국의 헤게모니가 전 세계 압제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친구들과 길고 지루한 논쟁을 벌였다. 외국에서 살아봤기에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한 번도 이상에 부합하지 못했음은 인정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예제를 미화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지워버리다시피 한 미국 역사도 두둔하지 않았다. 군사력을 무분별하게 행사하고 초국적 기업이 탐욕을 부린다는 지적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국의 이상과 미국의 약속만큼은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완강하게 고수했다. 독립선언문에서 말하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로 믿는 바,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의 미국이었다. 토크빌이 묘사한 미국, 휘트먼과 소로의 전원, 누구도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은 나라, 더 나은 삶을 찾아 서부로 향한 개척자들과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엘리스섬에 상륙한 이민자들의 땅이었다.
그것은 꿈을 하늘로 날리는 토머스 에디슨과 라이트 형제의 미국, 홈 스틸을 감행하는 재키 로빈슨의 미국이었다. 척 베리와 밥 딜런, 빌리지 뱅가드에 선 빌리 홀리데이와 폴섬 주립교도소에서 공연한 조니 캐시의 미국이었다. 이 모든 부적응자들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거나 내팽개친 부스러기를 가지고 세상에 없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게티즈버그에서의 링컨, 시카고 인보관에서 분투한 제인 애덤스, 노르망디에서 기진맥진한 보병, 내셔널 몰에서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킹 목사의 미국이었다.
그것은 탄탄하면서도 변화할 수 있는 체제를 논리적으로 구축한, 결함이 있었으되 명석한 사상가들이 만든 헌법과 권리장전이었다.
그것은 곧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미국이었다.
대학 친구들과의 논쟁은 대개 “계속 그렇게 꿈이나 꿔, 버락”이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어떤 왕재수들은 내 앞에 신문을 던져 놨는데,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이나 학교 점심 급식 예산 삭감 같은 실망스러운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게 네 미국이야.”
이것이 1983년 졸업했을 때 나의 처지였다. 원대한 포부를 품었지만 갈 곳 하나 없는 신세. 가담할 운동도, 믿고 따를 이타적 지도자도 없었다. 나의 구상에 가장 가까운 것은 지역의 관심 사안을 중심으로 일반인을 규합하는 풀뿌리 운동인 이른바 ‘지역사회 조직화’였다. 뉴욕에서 내게 맞지 않는 일자리를 두어 군데 전전하다가 시카고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철강 공장이 폐쇄되어 뒤숭숭한 지역사회를 교회 몇 곳과 함께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원대하지는 않았지만 출발점으로는 삼을 만했다.
시카고에서의 조직 사업은 다른 지면에도 묘사한 적이 있다. 나는 흑인 노동자 계층이 대부분인 동네에서 활동했는데, 그곳에서의 승리는 사소하고 일시적이었다. 제조업의 몰락, 백인 이탈, (지식 계층이 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긴 했지만) 이질적이고 단절된 하급 계층의 출현 등 시카고뿐 아니라 전국 도시들을 휩쓴 변화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카고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어도) 시카고는 내 삶의 궤적을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려면 이론을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귀 기울여야 했다. 공원을 보수하고 주택 건설 현장에서 석면을 퇴출하고 방과 후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현실 사업에 동참해달라고, 나와 함께하자고 서로 힘을 합치자고 낯선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했다. 처음에는 실패를 겪었지만 점차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그들을 북돋아 단결시키는 법을 배웠다. 거절과 모욕은 하도 당해서 더는 두렵지 않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나는 성장했다. 유머 감각도 돌아왔다.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황폐한 지역에 살면서 네 자녀를 대학까지 졸업시킨 홀어머니가 있었고, 매일 저녁 교회 문을 열어두어 아이들에게 갱단 아닌 다른 길을 열어준 아일랜드인 목사가 있었고, 해고된 뒤에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학교에 돌아간 철강 노동자가 있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소박한 성공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기본적 품위가 있음을 거듭거듭 확인했다. 그들을 통해, 혼잡한 모퉁이에 일단정지 표지판을 세우거나 경찰 순찰을 늘리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서라도, 시민들이 지도자와 제도권에 책임을 물릴 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있음을 인식하면 좀 더 똑바로 서고, 자신을 다르게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통해 나의 인종 정체성에 대한 해묵은 의문도 해소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흑인으로 살아가는 단 하나의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을 통해, 나는 믿음의 공동체를 발견했다. 의심하고 의문을 품어도 괜찮았다. 그러면서도 지금 여기를 넘어선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외조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가치인 정직, 노력, 공감이 교회 지하실에서, 방갈로 포치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서, 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끈을 신뢰하게 되었다.
내가 조직 사업 또는 비슷한 활동에 계속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이따금 궁금하다. 그동안 만난 수많은 지역의 영웅들처럼 나도 단체를 조직해 동네나 도시 일부를 재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고서, 세상이 아니라 어느 한 장소나 한 부류의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이웃과 친구들의 삶을 측정 가능하고 유용하게 변화시키는 사업에 돈과 상상력이 흘러들도록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머물지 않았다. 하버드를 향해 떠났다. 여기서부터 내 머릿속 이야기가 점점 모호해지고 내 동기에 대해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조직 사업을 떠나는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지지부진하고 제한적이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싶다). 지역 직업 훈련소는 공장 폐쇄로 사라진 수천 개의 철강 일자리를 감당하지 못했다. 방과 후 프로그램은 만성적 재원 부족에 시달리는 학교에도 (부모가 둘 다 복역하는 바람에) 조부모가 양육하는 아이들에게도 보탬이 되지 못했다. 정치인들, 관료들, 기업 경영자들…… 변화를 이끌어낼 힘이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는 사람들과 사안마다 끊임없이 부딪쳤다. 어쩌다 양보를 얻어낸들 대개는 너무 사소하고 때늦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산을 조정하고 정책을 조율하는 힘이었는데, 그 힘은 다른 곳에 있었다.
게다가 내가 오기 2년 전에 시카고에서 변화를 꾀하는 어떤 운동이 이미 벌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깊고 빠른 조류를 내가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그 운동이 내 이론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럴드 워싱턴을 시카고 최초의 흑인 시장으로 당선시키려는 운동이었다.
현대 정치 역사상 가장 풀뿌리적이었던 그 정치 운동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대도시의 만성적 편견과 불평등에 신물이 난 소수의 흑인 운동가와 재계 지도자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유권자를 등록시키겠노라 의기투합하고는, 재능은 엄청나지만 야심은 빈약한 투실투실한 하원의원을 발탁해 가망 없어 보이는 공직에 출마시킨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럴드 본인조차 회의적이었다. 선거운동은 근근이 진행되었고 운동원은 대부분 초보 자원봉사자였다. 하지만 봇물이 터졌다. 일종의 자연발화 같았다. 정치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들, 한 번도 투표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선거 열기에 휩쓸렸다. 노인과 어린 학생들이 선거 캠프의 파란색 배지를 달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당했던 온갖 차량 검문, 늘 헌책 교과서로 공부한 기억, 노스사이드 파크 지구를 지나치다 체육관이 자기 동네에 있는 것보다 얼마나 좋은지 알아차리는 모든 순간, 승진에서 탈락하거나 은행 대출을 거절당한 모든 경험―이렇게 꾸준히 쌓인 불공정과 모욕을 더는 참지 않겠다는 집단적 의지가 사이클론처럼 뭉쳐 시청을 뒤집어놓았다.
내가 시카고에 왔을 때 해럴드는 첫 임기의 절반을 마친 상태였다. 올드 맨 데일리(1955~1976년 시카고 시장을 역임한 리처드 J. 데일리_옮긴이)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시의회는 인종에 따라 두 패로 나뉘었으며, 과반수를 차지한 백인 의원들은 해럴드가 제안하는 개혁을 사사건건 막아섰다. 해럴드가 의원들을 설득하여 합의를 도출하려 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족적이고 원초적이라 볼거리로는 흥미진진했지만, 이 때문에 해럴드는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인종적 게리맨더링의 결과인 선거구 지도를 연방법원이 새로 그리고서야 해럴드는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약속한 여러 변화를 실천하기도 전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옛 질서의 계승자 리치(리처드) 데일리가 결국 아버지의 권좌를 탈환했다.
나는 정치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이 드라마가 전개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교훈을 흡수하려 애썼다. 구조, 조직, 통치 역량 없이는 운동의 거대한 에너지를 지탱할 수 없음을 배웠다. 인종적 보상에 기반한 정치 운동은, 아무리 합리적이더라도 공포와 반발을 자아내어 결국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배웠다. 해럴드 사후에 와르르 무너지는 그의 연합을 보면서 한 명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변화를 가져다주길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배웠다.
그럼에도 그 5년간 해럴드는 얼마나 위력적이었던가. 걸림돌이 있긴 했지만 시카고는 그의 주도하에 달라졌다. 가로수 가지치기에서 제설 작업, 도로 보수에 이르는 도시 서비스가 각 지역에 더 고르게 분배되었다. 빈곤층 지역에 학교가 새로 지어졌다. 시 일자리는 더는 논공행상 나눠 먹기가 아니었으며, 재계는 마침내 직원들의 다양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해럴드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당시의 그에 대한 흑인 시카고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 세대 전의 백인 진보파가 보비(로버트) 케네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듯했다. 즉,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느낌을 선사했느냐가 중요했다. 그것은 뭐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 세상을 우리 뜻대로 새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일이 내게 씨앗을 심은 셈이었다. 처음으로 언젠가 공직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이런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해럴드의 당선 직후에 제시 잭슨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이것이야말로 민권운동의 활력이 선거 정치로 파급한 사례 아니었을까? 존 루이스, 앤드루 영, 줄리언 본드―이들이 공직에 출마한 이유는 정치야말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무대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닐까? 타협, 끝없는 자금 쟁탈전, 이상의 상실, 가차 없는 승리 추구 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또 다른 길이 있는 것도 같았다. 같은 에너지를, 같은 목적의식을 불러일으키되 흑인 공동체나 인종 경계를 뛰어넘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한 준비, 정책 노하우, 관리 역량을 갖추면 해럴드의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직 사업의 원칙을 선거운동뿐 아니라 통치에도 동원하여, 소외된 사람들에게 참여와 적극적 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선출된 지도자를 신뢰할 뿐 아니라 서로를,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 자신의 야심이라는 더 개인적인 문제들과도 씨름하고 있었다. 조직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구체적 성과로 내세울 것은 많지 않았다. 언제나 주류와 다른 길을 걷는 반골인 어머니조차 나를 걱정했다.
어느 해 성탄절에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모르겠구나, 베어. 물론 평생 제도권 바깥에서 일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 기관들을 안에서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도 있잖니.”
어머니가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날 보면 알잖아. 가난하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란다.”
그리하여 1988년 가을, 나는 야심의 본고장에서 야심을 펼치기로 했다. 수석 졸업생, 학생회장, 라틴어 고수, 토론 챔피언 등 내가 하버드 로스쿨에서 만난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인상적인 젊은이들이었으며, 나와 달리 자신이 중요한 삶을 영위할 운명이라는 정당한 확신을 품고 자랐다. 내가 그럭저럭 잘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동급생들보다 몇 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이 학업량에 부담을 느꼈지만, 지역사회 모임을 조직하고 추운 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3년을 보낸 내게는 도서관에서 보내는 나날이 대단한 사치처럼 느껴졌다(캠퍼스 밖 자취방 소파에 앉아 TV 볼륨을 끈 채 야구 경기를 보는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내게 유리한 점은 또 있었다. 알고 보니 법학은 내가 공민권적 문제들을 홀로 숙고하던 시절의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떤 원리로 규율해야 하며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어디까지 확장되는가? 정부는 시장을 얼마나 규제해야 하는가? 사회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며 법률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발언권을 가지도록 보장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라면 얼마든지 곱씹을 수 있었다. 나는 보수적인 학생들과의 논쟁을 특히 즐겼는데, 그들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듯했다. 수업 토론에서 나는 끊임없이 손을 들었다. 다른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저글링이나 칼 삼키기 같은 괴벽을 지닌 채 몇 년간 외톨이로 살다가 서커스 학교에서 진짜 나를 찾은 심정이었다.
열정은 많은 결점을 메운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곤 하는데, 적어도 하버드 시절의 내게는 정말 그랬다. 나는 2학년 때 《하버드 로 리뷰》(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이 매달 발간하는 학술지_옮긴이) 최초의 흑인 편집장으로 선출되었다. 전국 언론이 조금 주목했고, 책 집필 계약도 맺었다. 전국에서 일자리 제안이 밀려들었다. 《하버드 로 리뷰》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탄탄대로가 펼쳐진 것 같았다. 연방대법원의 사법보조인으로 일할 수도 있고, 최고의 법률사무소나 검찰청에 갈 수도 있고, 때가 무르익고 원한다면 정치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 탄탄한 출세 가도에 의문을 제기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아직은 일렀다. 거액의 연봉과 관심은 덫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내게는 다음 행보를 고민할 시간이 있었다. 어쨌든 내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결정은 법과는 무관할 터였다.
2장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미셸 라본 로빈슨은 법률가로서 현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시카고에 본사가 있는 시들리 앤드 오스틴 법률회사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였다. 나는 로스쿨 첫 해를 보내고 여름 동안 그곳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미셸은 키가 크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활달하고 너그럽고 엄청나게 똑똑했고 나는 거의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그녀는 나를 보살피는 임무를 맡았는데, 사무실 복사기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으며 내가 겉돌지 않도록 챙겨주었다. 함께 나가서 점심을 먹는 것도 일에 포함되었고, 덕분에 우리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일 얘기만 나눴지만 결국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 뒤로 두어 해 동안 방학 때나 미셸이 시들리 채용팀 소속으로 하버드에 왔을 때 우리는 저녁을 먹고 찰스강을 따라 오래 걸으며 영화와 가족에 대해, 가보고 싶은 세계 곳곳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다발성 경화증 합병증으로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녀 곁으로 날아갔고, 나의 외할아버지가 진행성 전립선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녀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인이자 친구가 되었다. 로스쿨 졸업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함께하는 삶의 전망을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한번은 내가 주최하는 조직 사업 워크숍에 그녀를 데려갔다. 사우스사이드에서 커뮤니티 센터를 운영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진행한 프로그램이었다. 대부분 싱글맘인 참가자들 중 일부는 공적 부조를 받고 있었고, 변변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현재의 처지와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묘사해달라고 청했다. 내가 즐겨 사용하던 간단한 방법인데, 지역사회의 현실과 그들이 삶에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연결해보는 것이다. 워크숍이 끝나고 함께 차로 걸어가면서 미셸이 팔짱을 끼며 내가 그 여자들과 쉽게 교감하는 것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당신은 그들에게 희망을 줬어.”
“그들에겐 희망 이상의 것이 필요해.” 나는 그녀에게 마음속 갈등을 설명하려 애썼다.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체제를 밀어붙여야 하는 모순, 사람들을 이끌고도 싶지만 그들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힘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 정치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에 대해.
미셸이 나를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그대로의 세상과 마땅히 와야 할 세상. 그런 것 아닐까.”
미셸은 유일무이했다. 그녀 같은 사람은 없으리란 걸 알았다. 아직 마음을 굳히진 않았지만, 청혼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셸에게 결혼은 당연한 일이었고 우리 사이처럼 진지한 관계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굳이 유지하려 들지 않았던 어머니 아래서 자란 나는 관계를 공식화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연애 초창기에도 격렬한 논쟁을 벌일 때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확신에 차서 말해도 그녀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 크레이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농구 스타 출신으로 투자은행에서 일하다 농구 코치가 되었는데, 미셸(그들은 ‘미셰’라고 불렀다)이 너무 거칠어서 가족 모두가 그녀는 결혼 못 할 줄 알았다고 종종 농담했다. 어떤 남자도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묘하게도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이 좋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이의를 제기하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밀어붙였다.
미셸의 생각은 어땠을까? 우리가 만나기 직전의 그녀를 상상해본다. 젊고 어엿한 전문직 여성. 세련되고 단정한 옷차림에, 자기 일에 집중하고 무슨 일이든 똑바로 해내며, 허튼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 그런 그녀의 삶에 옷장이 꾀죄죄하고 정신 나간 꿈을 꾸는 하와이 출신의 이 괴상한 사내가 흘러든다. 그것이 내 매력의 일부였다고, 자신이 함께 자라거나 만나온 남자들과는 사뭇 달랐다고 그녀는 종종 말했다. 심지어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남자인 아버지와도 달랐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역 전문대학을 채 마치지 못했고 30대 초반에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지만,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으며 미셸의 무용 발표회와 크레이그의 농구 경기를 전부 관람했고, 진정한 자랑이자 기쁨인 가족의 곁을 평생 지켰다.
나와의 삶은 미셸에게 어릴 적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약속했다. 모험, 여행,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 마찬가지로 그녀가 시카고 토박이라는 사실, 시끌벅적한 대가족과 일가친척, 상식적 태도, 무엇보다 좋은 엄마가 되려는 욕구는 나의 어린 시절에서 결여된 닻을 약속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웃게 하고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한 것만이 아니었다. 서로 균형을 이루었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서로 기댈 수 있었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했다. 우리는 한 팀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우리의 경험과 기질이 매우 달랐다는 사실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미셸에게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은 좁고 위험으로 가득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었고, 큰 위험 앞에서는 무조건 몸을 사렸다. 번듯한 직장, 근사한 집 같은 외부적 성공을 거둔 뒤에는 주위에 실패와 빈곤이 가득하더라도―해고 한 번, 총격 한 번에 모든 것이 날아가니까―양가적인 감정을 느낀 적은 결코 없었다. 미셸은 공동체를 배신하게 될까 봐 걱정한 적이 없었다. 사우스사이드에서 자란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차원에서는 아웃사이더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녀의 마음속에는 성공의 장애물이 명확했다.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의심은 아무리 잘해내더라도 자신에게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데서 생겨났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입증해야 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미셸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연방대법원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시카고로 돌아가 지역사회 조직 사업에 몸담는 한편 공익 전문 소규모 법률회사에서 현업에도 종사할 작정이었다.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공직에 출마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 버락. 당신이 하려는 일은 정말로 힘들 것 같아. 내 말은, 내게도 당신의 낙관주의가 있으면 좋겠어. 물론 가끔은 나도 낙관적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무척 이기적이거나 너무나 무지해. 그냥 귀찮은 게 싫은 사람도 많을 거야. 게다가 정치판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들,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 같아. 시카고는 더더욱 그렇고. 당신이 그걸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노력은 해볼 수 있잖아. 안 그래? 이 정도 위험도 감수할 수 없다면 근사한 법학 학위가 무슨 소용이야? 실패해도 그건 실패일 뿐이지. 나는 괜찮을 거야. 우린 괜찮을 거라고.”
그녀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힘든 길과 수월한 길이 있을 때 당신이 매번 힘든 길을 선택하는 거 알아? 왜 그런다고 생각해?”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미셸은 자신이 뭔가 직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통찰은 훗날 우리 둘 다에게 영향을 미쳤다.
몇 년의 연애 끝에 미셸과 나는 1992년 10월 3일 트리니티 연합 그리스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00명이 넘는 친구, 동료,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신도석을 가득 메웠다. 예식은 트리니티 교회 담임 목사 제러마이아 A. 라이트 주니어가 주재했다. 지역사회 조직 운동을 하면서 알고 존경하게 된 분이었다. 미셸과 나는 기쁨으로 벅찼다. 함께 만들어갈 미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실무는 1년 미루고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앞서 ‘프로젝트 보트!Project Vote!’ 활동에 매진했다. 일리노이주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유권자 등록 활동 중 하나였다. 캘리포니아 연안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서 강의하고, 책을 탈고하고, 고용 차별 사건에 주력하는 소규모 공익 전문 법률회사 ‘데이비스, 마이너, 반힐 앤드 갤런드’에 공식 합류하여 적정가 주택affordable housing 관련 단체를 위해 부동산 업무도 진행했다. 미셸은 회사법 업무는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하고는 시카고 시청으로 자리를 옮겨 도시계획·개발과에서 1년 반 동안 일한 뒤 ‘퍼블릭 앨라이스Public Allies’라는 비영리 청년 리더십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었다.
우리 둘 다 일을 즐겼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다양한 시민단체와 자선단체의 사업에 관여했다. 더욱 폭넓어진 지인들과 야구 경기와 음악회를 관람하고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는 하이드파크에 있는 수수하지만 아늑한 빌라를 매입했다. 미시간 호수와 프로몬토리곶 바로 맞은편으로, 몇 집 건너에 크레이그 부부와 어린 아들이 살았다. 미셸의 어머니 메리언은 우리 집에서 15분도 걸리지 않는 사우스쇼어 옛집에서 살았다. 우리는 자주 가서 메리언의 치킨샐러드와 레드벨벳케이크, 미셸의 외삼촌 피트가 구워주는 바비큐를 잔뜩 먹었다. 배를 채운 뒤에는 모두가 부엌에 둘러앉아 외삼촌들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이 깊어갈수록 웃음소리도 커졌으며, 어린아이들은 마당으로 쫓겨날 때까지 소파 쿠션에서 뛰놀았다.
땅거미가 깔린 길을 운전해 돌아오면서 이따금 아이를 가지는 일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몇 명이나 낳을까, 개를 키우는 건 어때? 우리는 가족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온갖 일을 상상했다.
정상적인 삶.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 그것으로 충분해야 마땅했다.
1995년 여름, 사건들이 기묘하게 맞물리며 정치적 기회가 불쑥 찾아왔다. 일리노이주 제2선거구의 현직 연방하원의원 멜 레이놀즈가 열여섯 살의 자원봉사 선거운동원과의 성관계 혐의를 비롯한 여러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즉시 보궐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나는 그 선거구에 살고 있지 않았고 선거전에 뛰어들 지명도와 지지 기반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주상원의원 앨리스 파머는 출마할 여건을 갖추고 있었고, 레이놀즈가 8월에 유죄 판결을 받자 곧 출사표를 던졌다. 파머는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교육자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평범하지만 탄탄한 실적을 쌓았으며, 진보파와 해럴드 당선에 일조한 구세대 흑인 운동가 일부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공통의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프로젝트 보트! 활동을 했기에 갓 출범한 그녀의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몇 주가 지나자 몇 사람이 조만간 공석이 될 앨리스의 주상원의원 자리에 출마해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미셸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찬성 논리와 반대 논리에 관한 목록을 만들었다. 주상원의원은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었으며―대다수 사람들은 자기네 주상원의원이 누구인지도 몰랐다―주도州都인 스프링필드는 구시대적 선심성 정책, 결탁, 뇌물 같은 정치적 악습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어디에서든 일단 출발해야 했고 실력을 입증해야 했다. 또한 일리노이 주의회는 회기가 1년에 몇 주뿐이어서 강의와 법률회사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앨리스 파머가 나를 지지해주기로 했다. 문제는 레이놀즈 재판이 아직 계류 중이어서 타이밍이 맞아떨어질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론상으로 앨리스는 선거에서 지더라도 주의회 의석을 유지한다는 차선책을 손에 쥔 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었지만, 주상원의원은 할 만큼 했으니 더 큰 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잘라 말했다. 민주당 시의원으로 이 지역 최고의 조직력을 자랑하는 토니 프렉윙클이 지지 의사를 표명하자 나의 당선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나는 미셸을 설득했다. “이걸 시운전이라고 생각해봐.”
“흠.”
“물에 발만 담가보는 거지.”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 생각해?”
그녀가 내 뺨에 입맞추며 말했다. “이건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 같아. 그러니까 해야겠지. 다만 내가 스프링필드에 가야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해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확인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해 초 어머니가 편찮았는데, 검사 결과 자궁암이었다.
예후는 좋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죄어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자마자 하와이로 날아갔는데,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어머니는 겁이 났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최대한 공격적 치료를 받고 싶어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손주 데려올 때까진 아무 데도 안 간다.”
어머니는 내가 주상원의원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여느 때처럼 반색하며 진행 상황을 시시콜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할 일이 많으리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결코 고된 일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미셸에게 동의를 받으렴. 내가 결혼 전문가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내 핑계로 물러설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난 내 일만으로도 벅차. 나 때문에 모두가 제 삶을 유보한다는 느낌까지 감당할 여유가 없다고. 그건 끔찍해. 내 말 알겠니?”
“알겠어요.”
암 진단을 받고 7개월이 지났을 때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했다. 9월에 미셸과 나는 뉴욕으로 날아가 당시 뉴욕 대학교에 다니던 동생 마야와 어머니를 모시고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 병원 전문의에게 진료 상담을 받았다. 화학 요법은 어머니의 신체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길고 검던 머리카락은 간데없었고 눈은 움푹 팬 구멍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전문의의 판단에 따르면 어머니의 암은 4기여서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 침샘이 막혀 얼음 조각을 물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태연한 척하려 온갖 애를 썼다. 내 일에 얽힌 웃긴 에피소드며 얼마 전에 본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마야는 아홉 살 많은 내가 예전에 어지간히 오빠 행세를 하더라고 회상했고,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머니가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손을 잡아드렸다. 그러고는 호텔 방에 돌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어머니에게 시카고로 와서 우리와 함께 지내자는 말을 꺼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종일 돌보기엔 너무 나이가 드셨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설계하는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머니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친숙하고 포근한 곳에 있고 싶어.”
나는 무력감에 휩싸인 채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어머니가 삶에서 걸어온 기나긴 행로에 대해, 각각의 전환점이 얼마나 뜻밖이었고 얼마나 행복한 사건들로 가득했는지에 대해. 어머니가 실망을 곱씹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았다.
지금까지는.
어머니가 나직하게 말했다. “인생이란 신기해. 그렇지 않니?”
정말 그랬다.
어머니의 조언을 따라, 나는 첫 정치 캠페인에 몸을 던졌다. 당시의 선거운동이 얼마나 어설펐는지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온다. 학생회 선거보다도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다. 여론조사원도, 분석가도, TV 광고나 라디오 광고도 없었다. 1995년 9월 19일, 하이드파크 라마다 인 호텔에서 프레첼과 감자튀김, 지지자 100~200명을 앞에 두고 출마 선언을 했다. 참석자의 4분의 1은 미셸 때문에 왔을 것이다. 선거 홍보물은 여권 사진 같은 내 사진과 약력 몇 줄, 내 컴퓨터로 작성한 네댓 가지 쟁점을 담은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짜리 카드였다. 인쇄는 킨코스에서 했다.
나는 프로젝트 보트! 활동을 하다 만난 정치 베테랑 두 명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선거사무장을 맡은 캐럴 앤 하웰은 키가 크고 당찬 40대 초반의 여성으로, 웨스트사이드 구청 건물에 사무실을 임차했다. 그녀는 활력이 넘치면서도 시카고 정치판의 이전투구에 빠삭했다. 큰곰처럼 생긴 론 데이비스는 현장책임자 겸 추천서 담당을 맡았다. 아프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수염이 거뭇거뭇했으며 굵은 금속 테 안경을 꼈다. 매일 똑같은 검은색 셔츠를 입는 듯했고 덩치가 우람했다.
알고 보니 론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일리노이주의 엄격한 입후보 규정은 당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도전자에게 불리했다. 후보자 명부에 오르려면 해당 선거구에 거주하는 등록 유권자 7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했는데, 선거구에 거주하는 사람이 추천서를 돌리고 보증해야 했다. ‘양호한’ 서명의 조건은, 판독 가능하고 현지 주소가 정확하며 등록 유권자가 작성한 것이어야 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우리 집 식탁에 모였을 때 론이 추천서와 유권자 등록부, 지침서를 끼운 클립보드를 돌리면서 씩씩대던 광경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추천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후보자와 만나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그때 추천서 초안도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캐럴과 론은 서로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캐럴이 말했다. “보스, 내 한마디 할게요. 여성유권자연맹 어쩌고 하는 것들은 몽땅 선거 이후로 미뤄도 돼요.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추천서뿐이라고요. 당신이 상대할 사람들로 말하자면, 우리가 받은 서명이 유효한지 확인하려고 참빗으로 샅샅이 훑을 거예요. 서명이 무효가 되면 선거엔 나갈 수도 없어요. 장담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서명의 절반은 불량이 될 거라고요. 그러니 필요한 서명보다 두 배는 확보해야 해요.”
론이 클립보드를 내게 건네며 정정했다. “네 배는 받아야 합니다.”
혼쭐이 난 나는 론이 정해준 지역 중 한 곳으로 서명을 받으러 갔다. 조직가 활동을 시작하던 때 같았다. 집집마다 방문하는 동안 어떤 집은 사람이 없었고, 어떤 집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어떤 집은 머리에 컬을 만 여자들과 뛰어다니는 아이들, 정원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이따금 마주치는 티셔츠와 두건 차림의 젊은 남자들은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자기네 구역을 훑었다. 지역 학교의 문제나, 안정된 노동자 계층 동네에 스며든 총기 폭력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클립보드를 받아 서명하고는 바로 하던 일로 돌아갔다.
내게 문 두드리기는 일상이었지만 미셸에게는 낯설었다. 그래도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서명을 나보다 많이 받아낼 때가 많았지만―메가와트급 미소와 고작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자란 이야기를 내세워 받아냈다―두 시간 뒤 귀가하는 차 안에서는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번은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건 말이지, 토요일 오전을 이렇게 보내려면 자기를 정말로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우리는 7개월에 걸쳐 필요 건수의 네 배에 달하는 서명을 모았다. 나는 사무실이나 학교에 있지 않을 때면 자율 방범대, 교회 모임, 노인주택을 방문해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잘하진 못했다. 가두연설은 딱딱하고 정책 논의에 치우쳤으며 영감과 유머가 부족했다.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쑥스러웠다. 조직가 시절에 늘 뒷전에 물러나 있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여유로워졌으며 지지자 수도 늘었다. 나는 지역 공직자, 성직자, 몇몇 진보 단체의 지지를 확보했고 입장문도 몇 건 받아냈다. 나의 첫 선거운동은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말하고 싶다. 젊고 용감한 후보와 그의 유능하고 아름답고 끈기 있는 아내가 식탁에 모인 친구 몇 명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정치 브랜드로 사람들을 결집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1995년 8월, 우리의 불명예스러운 연방하원의원은 마침내 유죄 선고를 받고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보궐선거는 11월 말로 정해졌다. 의석이 비고, 일정이 공식화되자 앨리스 파머 외에도 여러 사람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그중에는 제시 잭슨 주니어도 있었다. 그는 198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감동적으로 소개하여 전국적 관심을 끌었다. 미셸과 나도 그를 알고 좋아했다. 그의 누나 샌티타는 미셸이 고등학생 때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으며 우리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서주었다. 인기 많은 제시 주니어가 출마 선언을 하자 경선 판도가 순식간에 달라져 앨리스는 엄청난 수세에 몰렸다.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가 치러지고 몇 주가 지나야 앨리스의 주상원의원 의석에 대한 후보 추천서를 접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팀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론이 말했다. “앨리스가 제시 주니어에게 패해도 당신을 엿 먹이지 않는다고 다시 한번 확답을 받아두는 게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출마하지 않겠다고 제게 약속했어요. 확언했다고요. 공개 발표도 했고요. 신문에도 실렸는걸요.”
“그렇다면 좋아요, 버락. 그래도 한 번만 더 확인해줄 수 있겠어요?”
나는 앨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주의회에서 물러날 작정임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
하지만 제시 주니어가 보궐선거에서 낙승하고 앨리스가 훌쩍 뒤처진 채 3위로 낙선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앨리스 파머를 선발하라’ 캠페인에 대한 기사가 지역 언론에 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랜 지지자 몇 명이 면담을 요구하더니 내게 선거에서 빠지라고 충고했다. 지역사회는 앨리스의 경륜을 잃을 수 없다고, 참고 기다리면 내게도 차례가 올 거라고 말했다. 나는 출마 방침을 고수했지만―우리 캠프의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은 이미 선거운동에 많은 것을 쏟아부었고, 어쨌거나 제시 주니어가 뛰어들었을 때에도 나는 앨리스 편에 서지 않았던가―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앨리스와 이야기할 즈음엔 사태의 향방이 분명해졌다. 다음 주 그녀는 스프링필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막판에 후보 추천서를 제출하고 의석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캐럴이 가느다란 담배 연기를 천장에 뿜으며 말했다. “내가 뭐랬어요.”
나는 낙심하고 서운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지난 몇 달간 조직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으며, 내게 지지를 표명한 선출직 공직자들은 대부분 계속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론과 캐럴은 나만큼 낙관하진 않았다.
캐럴이 말했다. “이런 말 하긴 싫지만요, 보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쳇, 그래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후보 이름으로는 ‘앨리스 파머’가 ‘버락 오바마’보다 훨씬 낫다고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지만, 나는 수많은 시카고 유명 인사들이 갑자기 출마를 포기하라고 종용해도 우리는 이겨낼 거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오후에 론과 캐럴이 숨을 헐떡이며 우리 집에 찾아왔다.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한 표정이었다.
론이 말했다. “앨리스의 추천서 말인데요. 처참해요. 이제껏 본 것 중에 최악이더군요. 당신을 협박해서 경선에서 밀어내려던 니그로들이 실제로 손에 흙을 묻히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추천서가 퇴짜맞을 수도 있겠어요.”
나는 론과 자원봉사 선거운동원들이 기록한 비공식 현황을 훑어보았다. 정말이었다. 앨리스가 제출한 추천서는 주소지가 선거구 밖인 사람들, 이름은 다르지만 필체가 같은 여러 개의 서명 등 무효 서명이 수두룩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잘 모르겠는데요, 여러분…….”
캐럴이 말했다. “뭘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제 말은, 그래요, 이번 일로 화가 나긴 했어요. 하지만 이 입후보 규정은 말이 안 돼요. 나는 정정당당하게 맞붙어서 이기고 싶어요.”
캐럴은 한발 물러서며 어금니를 앙다물더니 말했다. “이 여자는 당신에게 확언을 했다고요, 버락! 우리는 모두 그 약속을 믿고 전력투구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녀가 당신 뒤통수를 치려 하고 그조차도 똑바로 못 하는데, 보고만 있겠다는 거예요?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후보 등록부에서 단박에 지워버릴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녀가 고개를 내두르며 계속 말했다. “에휴, 버락. 당신은 선한 사람이에요. ……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거면 학교로 돌아가서 교수나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정치와는 맞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잘근잘근 물어뜯겨 누구에게 어떤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할 거라고요.”
내가 론을 쳐다보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캐럴 말이 맞아요.”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직감을 해독하려고 애쓰는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얼마나 이 자리를 원하는 걸까? 내가 공직에서 이룰 수 있으리라 믿은 것들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열심히 일할 각오였는지를 떠올렸다.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캐럴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론이 자료를 챙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절차가 진행되려면 두어 달이 걸릴 테지만, 그날 나의 결정으로 경선은 사실상 끝났다. 우리는 시카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이의 제기 서류를 접수했으며, 위원회가 우리 손을 들어줄 것이 확실해지자 앨리스는 사퇴했다. 이왕 시작한 김에 우리는 추천서가 불량한 민주당 후보 여럿을 더 탈락시켰다. 민주당 적수가 전멸하고 이름뿐인 공화당 경쟁자만 남게 되자 주상원의원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더 고귀한 정치를 위해 내가 품은 비전은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이 최초의 선거운동에서 유익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정치의 현실, 필요한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 당선과 낙선을 좌우하는 일상 업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페어플레이에 대한 소신이 어떻든, 나는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남은 가장 큰 교훈은 선거 역학이나 비정한 정치와는 무관했다. 선거의 향방이 뚜렷해지기 오래전인 11월 초 하와이에서 마야가 한 전화와 관계가 있었다.
마야가 말했다. “엄마가 안 좋아졌어, 베어.”
“얼마나 안 좋은데?”
“당장 와야 할 것 같아.”
어머니의 상태가 악화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새로운 차원의 고통과 체념을 감지하고서 다음 주 하와이행 항공편을 예약해둔 터였다.
내가 마야에게 물었다. “말은 하실 수 있어?”
“못 할 것 같아. 정신이 가물가물해.”
전화를 끊고 항공사에 연락해 항공편을 아침 첫 비행기로 변경했다. 캐럴에게 전화하여 몇몇 일정을 취소하고 내가 없을 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점검했다. 몇 시간 뒤 다시 마야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떡해, 오빠. 엄마가 가셨어.” 어머니는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동생은 말했다. 어머니가 영면에 드는 동안 마야는 병상 옆에 앉아 민담 책을 읽어드렸다.
우리는 그 주에 하와이 대학교 동서문화기술교류센터 뒤편 일본식 정원에서 추도식을 지냈다. 어릴 적 그곳에서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는 양지에 앉아 내가 풀밭에서 구르고 돌계단을 뛰어넘고 가장자리로 흐르는 개울에서 올챙이를 잡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추도식이 끝나고 마야와 나는 코코곶 인근 전망대에 가서 어머니의 재를 바다에 뿌렸다. 파도가 바위에 부서졌다. 그 병실에 어머니와 동생 둘만 있었다. 나는 원대한 포부를 이루느라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다. 그 순간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 슬픔과 더불어 지독한 부끄러움이 치밀었다.
시카고 남단에 살지 않는다면 스프링필드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은 55번 주간고속도로다. 러시아워에는 시내에서 나와 서부 교외를 통과하는 차량 흐름이 거북이걸음이지만, 졸리엣을 지나면 길이 뚫려서 곧고 매끈하게 펼쳐진 아스팔트가 블루밍턴(스테이트팜 보험회사와 비어너츠 스낵 회사의 본고장)과 링컨(변호사 시절 도시 통합에 일조한 링컨 대통령의 이름을 땄다)을 남서쪽으로 가로지르는데, 가도 가도 옥수수밭만 보인다.
나는 8년 가까이 이 길을 달렸다. 대개는 혼자였고 세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일리노이 주의회가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하는 가을 몇 주 동안과 겨우내, 그리고 이른 봄에 스프링필드까지 왔다 갔다 했다. 화요일이면 저녁 먹고 밤에 내려갔다가 목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다. 시카고를 벗어나 외곽으로 한 시간가량 나오면 휴대전화 서비스가 끊겼으며 그 뒤로 신호가 잡히는 라디오 방송은 토크 라디오(방송 진행자가 전화로 청취자와 대화하는 쌍방향 라디오_옮긴이)와 기독교 음악 방송뿐이었다. 나는 졸음을 쫓으려고 오디오북을 들었는데, 길면 길수록 좋았다. 대부분 소설이었지만(존 르 카레와 토니 모리슨을 즐겨 들었다) 남북전쟁, 영국 빅토리아 시대, 로마제국의 몰락을 다룬 역사책도 들었다.
냉소적인 친구들이 질문을 하면 나는 스프링필드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말해준다. 적어도 처음 몇 년간은 정말로 그랬다. 북적거리는 대도시, 팽창하는 교외, 농촌, 공장 타운, 북부보다는 남부 축에 드는 다운스테이트(일리노이주의 시카고 남쪽 지역을 일컫는다_옮긴이) 지역까지, 일리노이주는 50개 주를 통틀어 미국의 인구 구성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한다. 어느 날에든 의사당의 높은 돔 아래로 미국의 단면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칼 샌드버그의 시詩를 현실로 보는 것 같았다. 현장 학습 나온 시내 학생들이 서로 밀치락달치락했고, 말쑥한 은행가들이 플립폰으로 업무를 보고, 종자 회사 모자를 쓴 농부들은 화물용 바지선이 자기네 작물을 시장으로 나를 수 있도록 갑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라틴계 엄마들이 주간 탁아소 신설 자금을 요구하고, 구레나룻을 기르고 가죽 재킷을 차려입은 중년 오토바이족들이 헬멧 착용 의무화 법안을 저지하려 시위하는 광경도 보였다.
그 최초의 몇 달간 나는 몸을 한껏 낮췄다. 일부 동료 의원은 내 특이한 이름과 하버드 학력을 미심쩍어했지만, 나는 주어진 일을 하고 다른 주상원의원들의 선거 자금 모금을 도왔다. 동료 의원과 보좌관들을 사귀려고 상원 회의실뿐 아니라 농구장과 골프 대회를 쫓아다녔고 초당파적 주간 포커 게임을 주최하기도 했다(판돈 2달러에 추가 베팅은 세 번까지만 가능했고, 방은 연기와 시시껄렁한 잡담, 캔맥주 거품 올라오는 소리로 가득했다).
주상원 소수당 대표 에밀 존스를 미리 알고 있던 것도 보탬이 되었다. 거구의 60대 흑인인 그는 데일리 시니어 시장 밑에서 주하원을 거쳐 이 자리에 올랐는데, 내가 한때 조직한 선거구가 그의 지역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사연은 이렇다. 나는 한 무리의 부모를 그의 사무실에 데리고 가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대입 준비 프로그램에 자금 지원을 해달라며 면담을 요구했다. 그는 우리를 내치지 않고 맞아들였다.
그가 말했다. “모르셨겠지만, 저는 여러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연을 들려준 그는 외면받는 흑인 지역에 주 예산이 더 배분되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가 의원실을 나설 때 그가 내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는 것은 당신에게 맡기겠소. 그러니 정치는 내게 맡겨요.”
아니나 다를까 에밀은 자금 지원을 성사시켰으며 우리의 우정은 주상원까지 이어졌다. 나를 유난히 자랑스러워한 그는 나의 개혁주의적 방식을 앞장서서 지켜주다시피 했다. 자신이 추진하던 계획에 한 표가 아쉬울 때에도―선상 카지노 허가는 시카고의 숙원이었다―내가 못 하겠다고 말하자 닦달하지 않았다(다른 사람을 포섭하려고 나가면서 걸쭉한 욕설을 몇 마디 내뱉긴 했지만). 그는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버락은 달라. 뭐라도 될 인물이야.”
하지만 나의 성실함과 에밀의 선의로도 바꿀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소수당이라는 것이었다. 일리노이 주상원의 공화당은 뉴트 깅그리치가 연방하원의 민주당을 무력화하려고 동원하던 강경 노선을 그대로 채택했다. 공화당은 어떤 법안이 소위를 통과하고 어떤 수정안이 받아들여지는지를 사사건건 통제했다. 스프링필드에는 나 같은 소수당 초선 의원들을 부르는 ‘버섯’이라는 특별 명칭이 있었다. ‘똥을 먹고 어둠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의미 있는 입법에 한몫할 수도 있었다. 빌 클린턴이 서명한 국민복지개혁법안의 일리노이주 버전을 통과시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지원이 돌아가도록 했다. 스프링필드의 만성적 추문 중 하나가 터지자 에밀은 윤리법 개정 소위에서 코커스●를 대변하는 임무를 내게 맡겼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지만, 공화당 측 상대역 커크 딜러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덕에 우리는 불미스러운 관행 몇 가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젠 선거 자금을 주택 확장이나 모피 코트 구입 같은 개인 용무에 쓸 수 없게 되었다(상원의원들 중 몇몇은 그 뒤로 몇 주 동안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코커스caucus는 ‘회동하다’를 뜻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알곤킨 부족의 말에서 유래했다. 이 책에서 코커스는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양원에서 각 정당의 현직 의원 전원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일컫는다. 상원/하원 민주당 코커스, 상원/하원 공화당 코커스가 있다. 정기적으로 모여 정책을 개발하고 입법 우선순위, 위원회 배정, 주요 인사 등을 결정한다. (2) 정당 코커스와 별개로 수많은 의회 내 코커스(모임)가 있다. 의원들이 공통의 입법 목표를 추구하는 비공식 조직으로, 지역이나 종교, 이념, 경제 등 다양한 관심사를 기반으로 모인다. (3) 예비선거의 한 가지 방식. 정식 당원만 참석해 대의원을 선출한다_옮긴이.
더 상징적인 사건은 첫 회기 막바지에 일어났다. 주정부가 빈곤층 서비스는 삭감하면서 자신들이 편애하는 일부 산업에 노골적 세제 혜택을 주려고 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나는 법정 변호사답게 철저히 준비했다. 사실들을 정리하고 그런 부당한 감세 조치가 공화당이 신봉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적 시장 원칙에 왜 어긋나는지 지적했다. 자리에 앉자 상원 의장 페이트(제임스) 필립―뚱뚱하고 머리가 희었으며 해병대 출신으로, 여성과 유색인을 시도 때도 없이 모욕하여 악명이 자자했다―이 내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가 불 붙이지 않은 시가를 씹으며 말했다. “끝내주는 연설이었소. 핵심을 잘 짚었더군.”
“고맙습니다.”
“여러 사람의 생각을 바꿨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표는 하나도 못 바꿨을 거요.” 그는 이 말과 함께 투표 감독관에게 손짓하고는 찬성을 나타내는 초록색이 전광판을 수놓는 것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것이 스프링필드에서의 정치였다. 대다수의 눈길을 피해 일련의 거래가 이루어졌고, 의원들은 여러 이익집단의 압력을 시장통 장사꾼처럼 열심히 저울질했으며, 그러는 동안에도 자기네 텃밭을 뜨겁게 달굴 수 있는 몇몇 첨예한 이념적 쟁점―총기, 낙태, 세금―에는 눈을 부릅떴다.
좋은 정책과 나쁜 정책의 차이를 사람들이 몰랐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지역구 유권자들이 선거 때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스프링필드에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복잡하지만 가치 있는 타협을 하거나 당론을 거스르고 혁신적 아이디어를 지지했다가는 핵심 지지층, 거물 후원자, 지도부 자리를 잃거나 심지어 낙선할 수도 있었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 나는 시도했다. 지역구에 돌아가서는 초대란 초대는 죄다 수락했다. 구독자가 5000명도 안 되는 지역 주간지 《하이드파크 헤럴드》에 고정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주민 간담회를 주최하여 다과를 차리고 입법 현황 자료를 쌓아두었다. 대개는 보좌관과 외로이 앉아 시계를 보며 오지 않을 청중을 기다렸다.
오지 않은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바쁘고 가족이 있는 그들에게는 스프링필드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딴 세상 얘기였을 것이다. 한편, 몇몇 주요 사안에 실제로 관심이 있다면 이미 내게 동의했을 터였다. 우리 선거구의 경계선은 일리노이주의 거의 모든 선거구와 마찬가지로 일당 지배가 보장되도록 정밀하게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빈곤층 지역 학교에 자금이 더 돌아가도록 하거나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1차 의료나 재교육을 확충하고 싶을 때 나는 지역구민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포섭하고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은 딴 곳에 살고 있었다.
두 번째 회기가 끝날 무렵에는 소수당의 한계에, 훈장처럼 닳아버린 수많은 동료의 냉소주의 같은 의사당 분위기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느 날 내가 발의한 법안이 불쏘시개로 버려지고 나서 의사당 홀에 서 있는데, 사람 좋은 로비스트 하나가 다가와 내게 팔을 둘렀다.
그가 말했다. “벽에 머리 찧는 짓은 그만둬요, 버락. 여기서 살아남는 열쇠는 이것이 비즈니스라는 걸 이해하는 거예요. 차를 파는 것처럼요. 길가 세탁소일 수도 있고요. 그 이상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미쳐버릴 거예요.”
일부 정치학자는 스프링필드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원주의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익집단 간의 주고받기가 영감을 주진 못하더라도 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장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나의 의정 활동은 가정생활을 희생한 대가였다.
의회에서의 첫 2년 동안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미셸은 일에 바빴고 취임 선서 때 말고는 스프링필드에 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긴 했지만 내가 집에 없을 때 우리는 밤마다 전화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1997년 가을 어느 날 그녀가 내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드디어.”
“드디어 뭐?”
“당신이 아빠가 된다고.”
내가 아빠가 된다는 거였다. 그 뒤로 몇 달간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예비 아빠의 모든 지침을 준수했다. 라마즈 호흡법 수업을 들었고 아기 침대 조립법을 익혔고 『첫 임신 출산에 관한 모든 것』을 읽으며 핵심 구절에 밑줄을 쳤다. 7월 4일 오전 6시경 미셸이 나를 쿡쿡 찌르며 병원 갈 때가 됐다고 말했다. 나는 더듬더듬 문간에 둔 가방을 챙겼고, 일곱 시간 뒤에 말리아 앤 오바마가 4킬로그램의 완벽한 몸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갓난 딸은 수많은 재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타이밍을 잘 맞췄다. 회기도 없었고 수업도 없었고 처리해야 할 대형 사건도 없었기에 나는 여름 나머지 기간을 통째로 뺄 수 있었다. 천생 올빼미인 나는 미셸이 잘 수 있도록 밤교대 근무를 섰다. 내 허벅지에 올려놓고 책을 읽어주면 말리아는 호기심 가득한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으며, 가슴에 올려놓고 잠이 들면 트림하면서 똥을 시원하게 눴는데 무척 따스하고 평온했다. 이런 순간들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남자들이 떠올랐다. 아버지 생각도 났다. 그의 부재는 함께 지낸 짧은 시간보다 더 큰 영향을 내게 미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기 말고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젊은 부모들이 겪게 마련인 압박감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행복에 겨운 몇 달을 보내고서 미셸은 직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세 가지 직업을 저글링하는 나날로 돌아갔다. 다행히 낮 동안 말리아를 봐줄 근사한 보모를 찾았지만, 전업 고용인을 두자니 가계 예산이 빠듯했다.
미셸은 이 모든 시련을 감당하며 육아와 일을 병행했지만, 어느 쪽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지 못했다. 매일 밤 그녀는 아이 밥 먹이기, 목욕시키기, 책 읽어주기, 집 청소하기, 세탁물 찾았는지 확인하기, 할 일 목록에 소아과 예약 적어두기 따위를 모두 마치고 텅 빈 침대에 쓰러지면서, 몇 시간 뒤면 이 모든 과정이 되풀이될 텐데 그동안 남편은 ‘중요한 일’을 하느라 딴 데 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툼이 잦아졌다. 대개 둘 다 녹초가 된 늦은 밤에 싸웠다. 한번은 미셸이 말했다. “이건 말이 다르잖아, 버락. 나 혼자 다 하는 것 같아.”
그런 말을 들으니 서운했다. 나는 일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었으며, 집에 있으면서 저녁 설거지를 깜박한 이유는 밤 늦게까지 시험 채점을 하거나 보고서를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내가 미흡했음을 알고 있었다. 미셸의 분노 속에는 더 버거운 진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저마다 다른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의 짐이 더 가볍고 개인적 책무가 덜 꼬였을 때 그녀가 예언한 그대로 나는 힘든 길을 걷고 있었다. 말리아가 태어난 다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다시 떠올렸다. 아이들이 나를 알게 하겠노라는, 내가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자신들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놓는다는 사실을 느끼며 자라게 하겠노라는 약속이었다.
어둑한 거실에 앉은 미셸은 더는 화나 보이지 않았다. 슬퍼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이럴 가치가 있어?”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더는 확신하지 못한다는 걸 그녀에게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돌이켜봐도 자신이 왜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는 법이다. 차 안에서 수프를 먹다가 아끼는 넥타이를 더럽히거나 추수감사절에 미식축구를 하자는 꾐에 빠져 허리가 나가는 사소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사숙고 뒤에 멍청한 선택을 내리는 것. 인생의 진짜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한 다음 더없는 확신을 품고서 더없이 잘못된 답을 내놓는 것 말이다.
연방하원의원 출마가 그랬다. 수많은 대화 끝에, 내가 스프링필드에서 만들어내는 변화가 희생을 정당화할 만큼 큰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미셸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부담을 줄이기는커녕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가속 페달을 밟고 더 영향력 있는 공직을 확보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이즈음 흑표범당 출신의 고참 연방하원의원 보비 러시가 1999년 선거에서 데일리 시장에게 도전했다가 자기 지역구에서조차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완패했다.
내가 보기에 러시의 선거운동에는 감동이 없었다. 해럴드 워싱턴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막연한 약속 말고는 명분도 없었다. 그가 하원에서도 이런 식으로 해왔다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의 미더운 조언자들과 숙의한 나는 보좌관을 시켜 러시와의 경쟁에 승산이 있는지를 두고 내부 여론조사를 했다. 비공식 표본 집단은 긍정적이었다. 나는 조사 결과를 가지고서 가장 가까운 친구 여러 명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설득할 수 있었다. 더 노련한 정계 인사들은 러시가 보기보다 강인하다고 경고했다. 미셸은 내가 스프링필드보다 워싱턴에 있는 것을 그녀가 더 좋아할 거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핑계로 삼을까 봐 우려했지만, 결국 나는 연방하원의원 제1선거구에서 출마를 선언했다.
경선은 출발부터 재앙이었다. 몇 주 지나자 러시 진영에서 이렇게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오바마는 외부인이야. 백인들이 뒷배를 봐준다고. 그는 하버드 엘리트주의자야. 게다가 그 이름 말이야. 흑인 맞아?
자금을 확보하여 정식 여론조사를 의뢰했더니 보비는 지역구 내 인지도가 90퍼센트이고 지지율이 70퍼센트인 반면에 나의 경우 내가 누구인지 아는 유권자조차 11퍼센트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즈음 보비의 장성한 아들이 비극적인 총기 사고로 사망하여 동정 여론마저 쏠렸다. 나는 한 달간 선거운동을 사실상 중단한 채 우리 교회에서 제러마이아 라이트 목사가 주재하는 장례식을 TV로 지켜보았다. 집은 이미 살얼음판이었기에 짧게나마 성탄절 휴가를 보내려고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갔지만, 내가 지지해온 총기 규제 조치를 표결하기 위해 주지사가 갑작스럽게 임시회를 소집했다. 18개월째이던 말리아가 아파서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바람에 나는 표결에 불참했으며 시카고 언론에 호되게 두드려 맞았다.
나는 30퍼센트포인트 차이로 떨어졌다.
젊은이들에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는 이따금 하지 말아야할 일의 반면교사로 이 일화를 들려준다. 여담으로 곁들이는 이야기도 하나 있다. 낙선하고 몇 달 뒤에 내가 의기소침해할까 봐 걱정한 친구 하나가 2000년 로스앤젤레스 민주당 전당대회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그가 말했다. “다시 말에 올라타야지.”) 웬걸.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착륙해 차를 렌트하려는데 내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가 한도 초과로 승인이 거절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테이플스 센터에 도착했지만, 친구가 발급받아준 출입증으로는 대회장에 입장할 수 없었다. 하릴없이 주변을 맴돌며 밖에 설치된 모니터로 축제를 관람해야 했다. 끝으로, 그날 저녁 늦게 친구가 어떤 난처한 소동에 휘말리는 바람에 자신이 참석하는 파티에 나를 데려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 그의 스위트룸 소파에서 잠을 청했고, 앨 고어가 후보 지명을 수락한 그 순간 시카고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스운 사연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하면 더 우습다. 내가 청중에게 말하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정치에 예측 불가능한 성격이 있으며 회복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느낀 울적한 기분이다. 나는 마흔이 다 됐고 빈털터리였고 굴욕적 패배를 당했고 결혼 생활은 삐걱거렸다. 난생 처음으로 내가 잘못된 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활력과 낙관주의, 잠재력이 허무하게 소진되어버린 듯했다. 더 암담한 자각은 따로 있었다. 이번 출마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타적 희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아집을 만족시키려는, 아니면 내가 못 이룬 것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을 달래려던 것임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나는 더 젊은 시절에 그렇게는 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질도 별로 없었다.
3장
보비 러시에게 완패하고 몇 달간 우울하게 상처를 핥다가 우선순위를 재조정하여 꼬인 매듭을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셸에게는 더 잘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아기를 새로 가졌고, 미셸은 내가 여전히 그녀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이 집을 비우지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주었다. 집에서 저녁을 더 자주 먹을 수 있도록 스프링필드 회의 일정을 조정했다. 시간을 더 정확히 지키고 미셸 곁에 더 많이 있으려고 노력했다. 2001년 6월 10일, 말리아가 태어난 지 3년이 되어갈 무렵, 그때와 똑같은 기쁨의 환호성―똑같은 순수한 놀라움―과 함께 사샤가 태어났다. 언니처럼 통통하고 사랑스러웠으며 굵고 검은 곱슬머리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뒤로 2년간은 작은 행복으로 가득한 채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며 좀 더 조용한 삶을 이어갔다. 말리아에게 첫 발레 타이츠를 꾸역꾸역 입히거나 손을 잡고 공원을 걷던 순간, 내가 발을 물면 아기 사샤가 웃고 또 웃던 순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옛 영화를 보다가 잠든 미셸의 느릿한 숨소리를 듣던 순간. 이 모두가 내게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주상원 일에 다시 몰두했으며 학생들에게도 시간을 더 할애했다. 재무 상황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채무 변제 계획을 짰다. 느려진 일의 리듬과 아빠 노릇의 즐거움 속에서, 정치 이후의 삶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강의와 집필을 전업으로 하거나, 현업에 복귀하거나, 어머니가 한때 상상한 것처럼 지역 자선 재단에서 일하는 것을 고민했다.
말하자면 연방하원의원 출마에 실패한 뒤로 일종의 내려놓음을 경험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진 않았지만, 적어도 더 큰 무대에서 그래야 한다는 고집은 버렸다. 운명이 내 삶에 부과한 한계가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체념으로 시작된 감정은 운명이 베풀어준 선물에 대한 감사로 바뀌었다.
하지만 정치에서 깨끗이 손 뗄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일리노이주 민주당은 2000년 인구 총조사의 새 데이터를 반영한 주 선거구 지도 개편을 감독할 권한을 얻었다. 독특하게도 일리노이주 헌법에서는 민주당이 지배하는 하원과 공화당이 지배하는 상원의 논란을 해결해야 할 때 에이브러햄 링컨의 낡은 스토브파이프해트(원통형 검정 실크 모자_옮긴이)로 제비뽑기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힘을 손에 넣은 민주당은 지난 10년간의 공화당 게리맨더링을 뒤집어 2002년 선거에서 상원 다수당이 될 가능성을 부쩍 높일 수 있었다. 내가 한 번 더 연임하면 마침내 몇몇 법안을 통과시키고, 대변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룰 기회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큰물에서 정치 인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요인은 사건이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나는 주상원의원으로 선출된 뒤로 해마다 여름 며칠 동안 일리노이주 전역을 돌면서 여러 동료의 지역구를 순방했다. 대개는 수석 상원 보좌관 댄 쇼먼을 데리고 갔다. UPI 기자 출신인 그는 두꺼운 안경, 한없는 정력, 뱃고동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골프채, 지도, 옷가지 한두 벌을 나의 지프 뒤쪽에 던져 넣고는 남쪽이나 서쪽으로 출발하여 록아일랜드나 핑크니빌, 올턴이나 카본데일을 찾아갔다.
댄은 핵심 정치 자문이자 좋은 친구이자 이상적인 여행 파트너였다. 편안한 이야기 상대였고 침묵해도 어색하지 않았으며 나처럼 차 안에서 담배 피우는 습관이 있었다. 게다가 주 정치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자랑했다. 처음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시카고 출신에 이름이 아랍식인 흑인 변호사를 다운스테이트 주민들이 어떻게 대할지 몰라서 약간 초조했던 것 같다.
출발 전에 그가 당부했다. “화려한 셔츠는 안 돼요.”
내가 말했다. “화려한 셔츠는 없어요.”
“좋아요. 폴로셔츠와 카키 바지만 입어야 해요.”
“알았어요.”
튀어 보일 거라던 댄의 우려와 달리, 내게는 여행 내내 모든 것이 너무도 친숙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채로웠다. 농업 박람회장이나 조합 회관에서든, 누군가의 농장 포치에서든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하는 일을 소개하는 방식, 겸손과 환대, 고교 농구에 대한 열정, 프라이드치킨과 삶은 콩과 젤로 푸딩 등 대접받은 음식에서 우리 외조부모와 어머니, 미셸의 부모님이 보였다. 그들도 똑같은 가치, 똑같은 희망과 꿈을 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여행은 뜸해졌지만 그때 얻은 단순하고도 거듭되는 통찰은 계속 내 곁에 남았다. 시카고 선거구의 주민들과 다운스테이트 선거구의 주민들이 서로에게 낯선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우리 정치가 결코 진정으로 달라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흑인과 백인을 대립시키고 이민자와 토박이를 대립시키고 농촌의 이해관계와 도시의 이해관계를 대립시키는 고정관념에 호소하는 손쉬운 유혹에 빠졌다.
이에 반해 분열을 강조하는 미국의 지배적 정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운동을 벌일 수 있다면 시민들이 새로운 서약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내부자들이 더는 한 집단을 편들고 다른 집단을 적대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의원들은 지역구민들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그토록 편협하게 규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언론은 어느 편이 이겼느냐 졌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공동 목표가 달성되었느냐를 바탕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분석하게 될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내 삶의 여러 가닥 같은 미국의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간극에 가교를 놓는 일이야말로 내가 추구해온 바가 아닐까? 내가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그 간극이 너무 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달리 생각해봐도 가장 깊은 신념을 포기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 정치 인생이 끝났다고 혹은 끝나간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봤지만, 아직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가슴으로 알고 있었다.
미래를 생각할수록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구상한 다리 짓기의 정치는 의원 선거전에 맞지 않았다. 구조적인 문제였다. 선거구가 어떻게 정해지는가가 선거를 좌우했다. 내가 사는 곳처럼 흑인이 압도적으로 많고 오랫동안 차별과 무시에 시달린 선거구에서는, 인종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정치인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지역이 낙후했다고 느끼는 백인이 많은 농촌 선거구도 마찬가지였다. 유권자들은 이런 것들을 궁금해했다. 우리와 같지 않은 자들, 우리를 이용한 자들, 우리를 깔보는 자들에게 얼마나 잘 맞설 거요?
물론 정치적 기반이 협소해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있었다. 경력이 쌓이면 지역구민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봉사하고, 지역구에 대형 사업을 한두 개 안겨주고, 자기편과 손잡고 전국적 논의에 영향을 미쳐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건 의료를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하거나 가난한 아이들에게 더 좋은 학교를 지어주거나 실업이 만연한 곳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가로막는 정치적 제약을 없애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었다. 보비 러시 역시 매일같이 그 제약으로 고통받았다.
정말로 판을 흔들고 싶다면 최대한 폭넓은 청중에게, 그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전국 단위 공직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연방상원 같은.
선거에서 참패한 지가 엊그제인 주제에 연방상원 경쟁에 뛰어드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후안무치한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알코올 중독자가 마지막으로 딱 한 잔을 합리화하듯 내가 또 한 번의 기회를 갈망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이 발상을 머릿속에서 굴리자 생각이 무척 명료해졌다. 당선이 확실하지는 않아도 가능성은 있으며, 승리한다면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스크러미지 라인의 빈틈을 포착한 미식축구 러닝백처럼 빠르게 돌진해 그 틈새를 뚫을 수만 있다면 나와 엔드 존 사이는 무주공산일 것이다. 이 명료함과 나란히 깨달음도 찾아왔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정계를 떠나야 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2002년을 보내면서 이 방안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일리노이주의 정치 지형을 살펴봤더니 무명의 흑인 주의회 의원이 연방상원에 진출하겠다는 계획이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캐럴 모즐리 브론을 비롯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주 단위 공직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가 있었다. 유능하지만 괴팍한 전직 연방상원의원 브론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한때 전국을 뒤흔들었지만 재정 윤리와 관련된 잇따른 실책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그녀를 누르고 연방상원에 진출한 공화당 의원 피터 피츠제럴드는 부유한 은행가였는데, 보수주의적 견해가 뚜렷해서 민주당 세력이 커지던 우리 주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나는 주상원의 포커 패거리 삼인방―민주당 의원인 테리 링크, 데니 제이컵스, 래리 월시―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지역구인 백인 노동자 계층 지역과 농촌 지역에서 승산이 있을지 타진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기네 지역구를 방문하여 활동하는 모습을 본 이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출마하면 지지하겠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시카고 도심의 여러 백인 진보파 선출직 공직자들과 소수의 무당파 라틴계 의원들도 지지를 약속했다. 나는 제시 주니어에게 출마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계획이 없으며 나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일리노이 주의회 역사상 세 번째 흑인 하원의원인 대니 데이비스도 지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미적지근한 보비 러시를 탓할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제 곧 주의회 의장이 되어 일리노이주에서 가장 막강한 정치인 셋 중 하나가 될 에밀 존스였다. 그의 사무실에서 면담하며 나는 현재 연방상원의원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한 명도 없으며, 워싱턴에 옹호자가 있으면 우리가 스프링필드에서 함께 싸워온 정책들을 추진하는 데 유리할 거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의원이 연방상원에 진출하는 데 일조한다면 그를 늘 과소평가하는 듯한 스프링필드의 노장 백인 공화당 의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내 생각에 그에겐 유난히 솔깃할 논리였다).
데이비드 액설로드에게는 다른 수법을 썼다. 기자 출신 언론 컨설턴트 액스는 영리하고 강인하고 능숙한 광고 제작자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해럴드 워싱턴, 전 연방상원의원 폴 사이먼, 리처드 M. 데일리 시장 등이 고객이었다. 이러한 성과에 경탄한 나는 그가 합류하면 선거운동에 주 전체를 아우르는 신뢰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전국적 후원자와 전문가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알았다.
액스가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리버노스 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먹다가 그가 말했다. “꿈이 야무지네요.” 그는 내게 보비 러시와 맞붙지 말라고 경고한 여러 사람 중 하나였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던 그는 내가 두 번째 패배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오사마’와 운이 맞는 이름의 후보가 다운스테이트에서 표를 얻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적어도 두 명의 상원의원 후보 희망자들―주 감사관 댄 하인스와 백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 블레어 헐―이 그에게 접근한 터였다. 두 사람 다 당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기에 나를 고객으로 받아들였다가는 그의 회사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가 수염에서 겨자를 닦으며 말했다. “리치 데일리가 은퇴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장에 도전하세요. 그래야 내기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요.”
물론 그 말이 옳았다. 하지만 나는 판에 박힌 내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액스에게서―그의 작업 도구인 온갖 여론조사 데이터와 전략 메모, 논점들의 이면에서―스스로를 단순한 용병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 동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선거 공학을 들먹이기보다는 가슴에 호소하기로 했다.
내가 물었다.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서 고결함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나요? 린든 존슨이 투표권법을 통과시키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사회보장법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하여 당신이 수백만의 삶을 더 낫게 만들었다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요? 정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 필요는 없어요.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요.”
액스가 두툼한 눈썹을 치켜들고는 내 얼굴을 탐색했다. 내가 그를 설득하려는 게 아님이 얼굴에 뚜렷이 드러났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몇 주 뒤에 그가 전화를 걸어, 파트너들과 아내 수전과 의논한 끝에 나를 고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내가 고맙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
“당신의 이상주의는 감동적이에요, 버락. …… 하지만 그걸 TV에 내보내서 사람들이 듣게 하려면 500만 달러가 필요하고, 그 돈을 모으지 못하면 기회는 없어요.”
이걸로 마침내 미셸의 의사를 타진할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지역사회 업무 담당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었다. 업무의 유연성이 커졌지만 그래도 고위급 전문가로서 책임을 다하면서 아이들 놀이 약속과 등하교 픽업 스케줄도 관리해야 했다. 그래서 “죽어도 안 돼, 버락!”이라고 일축하지 않고 가장 친한 친구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살짝 놀랐다. 그 친구들에는 마티 네스빗과 밸러리 재럿도 있었다. 마티는 성공한 기업인이고, 그의 아내 어니타 블랜처드 박사는 우리 두 딸을 받아준 산부인과 의사였다. 밸러리는 명석하고 발 넓은 변호사로, 도시계획과에서 미셸의 상사였고 우리에게는 언니와 누나 같은 존재였다. 당시에 내가 몰랐던 사실은 미셸이 이미 둘에게 내가 바보짓 못 하게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밸러리의 하이드파크 집에 모였다. 긴 브런치를 먹으며 나는 생각의 과정을 설명하고, 우리를 민주당 후보 지명으로 데려다줄 시나리오를 그려 보이고, 이 선거가 지난번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답했다. 미셸에게는 내가 집을 비워야 하는 시간을 입에 발린 소리로 얼버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되거나 그만두거나 둘 중 하나라고, 이번에 낙선하면 정치와는 영영 작별이라고 약속했다.
내가 말을 마쳤을 즈음 밸러리와 마티는 이미 설득당한 뒤였다. 미셸은 분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녀에게 선거는 전략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또 치르는 선거운동은 치근단 절제술 못지않게 괴로울 터였다. 그녀가 가장 우려한 것은 지난 선거 이후 아직까지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가계에 미칠 영향이었다. 그녀는 학자금 대출, 모기지 대출, 신용카드 대출이 남아 있다고 상기시켰다. 두 딸의 대학 학자금 저축도 아직 시작하지 못했는데, 무엇보다 내가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하여 이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법률 실무를 그만두면 수입이 더 줄어들 터였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지면 우리는 구렁텅이로 더 깊이 빠져들 거야. 그리고 당신이 이기면 어떻게 될까? 한 가정도 간신히 꾸려가고 있는데, 워싱턴과 시카고에서 두 가정을 어떻게 유지할 거야?”
예상한 질문이었다. “내가 이기면 자기, 전국적 관심이 쏠릴 거야. 상원에서 유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는 거라고. 지명도가 높아지면 책을 하나 더 쓸 수 있고, 그 책은 많이 팔릴 거고, 그 돈으로 추가 비용을 충당하는 거지.”
미셸은 신랄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첫 책으로 돈을 좀 벌긴 했지만, 지금 언급하는 비용을 대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아내가 간파했듯―대다수 사람들도 그렇게 보겠지만―쓰지 않은 책은 재무 계획으로 자격 미달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말하자면 주머니에 마법 콩이 있다는 거네. 지금 하는 말이 그렇잖아. 당신한테 마법 콩이 있는데 그걸 심으면 밤새 커다란 콩 줄기가 하늘까지 자라. 당신은 콩 줄기를 타고 올라가 구름 속에 사는 거인을 해치우고 황금알 낳는 거위를 가지고 집에 오겠다는 거지, 아냐?”
내가 말했다. “그 비슷한 거 맞아.”
미셸은 고개를 내두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허락을 구하는 게 무엇인지는 둘 다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분란. 또 다른 도박. 나는 원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원치 않는 것을 향한 또 다른 걸음.
미셸이 말했다. “내 생각을 말할게, 버락.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지만 내게 선거운동을 기대하진 마. 솔직히 내가 당신을 찍을지조차 확실치 않으니까.”
어릴 적 나는 생명보험 판매원이었던 외할아버지가 전화로 상품을 권유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저녁 무렵 호놀룰루 고층 아파트 10층의 집에서 판촉 전화를 돌리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2003년 초 몇 달간 새로 시작한 선거운동 캠프의 초라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자니 종종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는 소니 리스턴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포즈를 취한 무하마드 알리의 포스터 밑에서 다시 한번 후원 요청 전화를 걸라며 스스로를 독려하고 있었다.
댄 쇼먼과 선거사무장으로 영입한 켄터키 출신 짐 콜리를 제외하면 팀원 대부분은 20대였으며, 그중 절반만 급여를 받고 있었고 심지어 두 명은 학부생이었다. 무엇보다 후원 요청 전화를 걸라고 나를 닦달해야 했던 외로운 상근 모금 담당자에게 미안했다.
내가 정치인 노릇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2003년 2월, 첫 후보자 토론회에서 나는 경직되고 무능했으며, 토론회에 맞는 간결한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내겐 일전에 보비 러시에게 패배하면서 얻은 분명한 청사진이 있었다. 승산을 높이려면 언론과 더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생각을 간단명료한 촌철살인의 어구로 전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정책 자료보다는 유권자들과의 일대일 소통에 치중하는 선거운동을 계획해야 했다. 그리고 자금을 끌어모아야 했다. 아주 많이. 우리가 여러 차례 실시한 여론조사는 나의 승리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하지만 값비싼 TV 광고로 인지도를 높이지 못하면 어림도 없었다.
그럼에도, 연방하원의원 선거가 불운의 연속이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4월에 피터 피츠제럴드가 재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캐럴 모즐리 브론이 옛 의석을 되찾겠다고 나섰다면 민주당 후보 지명은 따놓은 당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뜬금없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며 경선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민주당 소속 여섯 명과 맞붙는 예비선거에 뛰어든 나는 여러 노조와 인기 있는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다운스테이트와 진보 진영에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에밀을 비롯해 민주당이 장악한 주상원의 지원을 등에 업고 사형 사건 심문 시 동영상 촬영을 요구하는 법에서 근로 장려 세제 확대에 이르는 다양한 법안이 통과되는 데 앞장서서 유능한 입법가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국적 정치 지형도 내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내가 출마 선언을 하기도 전인 2002년 10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시카고 도심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조만간 상원의원 선거에 나설 예비 후보자였고, 정치란 진흙탕을 걷는 일이었다. 액스와 댄은 분명하고 확고하게 전쟁 반대 입장을 취해야 민주당 경선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9.11 이후의 나라 분위기(당시 전국 여론조사에서는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에 찬성하는 미국인이 67퍼센트에 달했다)나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군사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 가뜩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사고 있던 내 이름과 혈통을 감안할 때, 전쟁 반대 입장을 취했다가는 정작 본선거에서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악당 혼내주는 걸 좋아한다고.”
하루 이틀 곰곰이 생각한 나는 이것이 첫 시금석이라고 결론 내렸다. 과연 나 자신에게 약속한 대로 선거운동을 치러낼 것인가? 나는 5~6분 길이의 짧은 연설문을 작성하고는, 솔직한 신념을 표현한 것에 뿌듯해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팀에 검토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집회 당일 제시 잭슨을 위시한 1000여 명의 군중이 페더럴 플라자 광장에 운집했다. 춥고 바람이 거셌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장갑 때문에 먹먹한 박수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마이크 앞에 섰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가 반전 집회를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여러분 앞에 선 저는 모든 상황에서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합중국을 지키고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이끈 이들이 흘린 피와, 진주만 공격이 벌어지자 자원 참전한 외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며 9.11과 같은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총을 들겠다는 결심을 설파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멍청한 전쟁에 반대합니다.” 이어서, 사담 후세인이 미국이나 주변 국가들에 임박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심지어 이라크 전쟁에 성공하더라도 미국의 점령 기간이 얼마나 될지, 비용이 얼마나 들지, 어떤 결과가 생길지는 미지수”라고 주장했다. 나는 부시 대통령에게 정 싸우고 싶다면 알카에다를 진압하고 압제 정권 비호를 중단하고 중동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청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광장을 떠나면서 내 발언이 기껏해야 각주에 머물 거라 예상했다. 나의 집회 참석은 뉴스 보도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바그다드에 폭격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고서야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 반대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사상자와 혼란이 증가하자 언론은 애초에 제기했어야 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풀뿌리 행동주의가 힘을 발휘하면서 무명의 버몬트 주지사 하워드 딘이 전쟁에 찬성표를 던진 존 케리 같은 후보들에 맞서 2004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반전 집회에서 내가 한 짧은 연설이 갑자기 선견지명으로 비쳐지면서 인터넷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새 자원봉사자와 풀뿌리 선거 자금이 느닷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젊은 선거운동원들은 ‘블로그’니 ‘마이스페이스’니 하는 것들이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내게 설명해줬다.
후보로서의 나날은 즐거웠다. 토요일마다 시카고에서 멕시코인, 이탈리아인, 인도인, 폴란드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민족과 어울려 먹고 춤추고 시가행진하고 아기에게 입 맞추고 할머니와 포옹했다. 일요일에는 흑인 교회를 찾아갔는데, 네일숍과 패스트푸드점 사이에 낀 수수한 상가 교회가 있는가 하면 주차장이 축구장만 한 대형 교회도 있었다. 나는 나무가 우거지고 맨션으로 가득한 노스쇼어에서, 빈곤과 버려진 건물들 때문에 일부는 시카고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들과 비슷한 시 남부와 서부까지 교외를 누비고 다녔다. 두 주일에 한 번씩 다운스테이트로 향했는데, 혼자서 차를 몰고 갈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곳에서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유능한 운동원 제러마이아 포스덜이나 어니타 데커를 데리고 갔다.
선거운동 초기에 유권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면, 공장을 해외로 옮기는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을 중단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홍보하고 아이들의 대학 학자금 부담을 줄이는 등 내가 추진 중인 사안들을 주로 언급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는 우리 병사들이 훌륭하게 복무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을 아직 끝내지 못했고 오사마 빈라덴도 건재한데 왜 새로 전쟁을 벌였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듣는 쪽에 더 초점을 맞췄다. 귀를 기울일수록 사람들이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평생직장에서 해고된 심정을, 집이 압류되거나 가족 농장을 팔아야 하는 게 어떤 일인지를 들려주었다. 건강보험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을, 약이 떨어질까 봐 처방받은 알약을 반으로 쪼개야 하는 처지를 이야기했다. 지역에는 괜찮은 일자리가 없어서 외지로 나가는 청년들, 학비를 댈 수 없어서 졸업을 앞두고 중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선거 유세는 주장의 나열에서 이질적 목소리들의 연대기로, 주 방방곡곡에서 들려오는 미국인의 합창으로 변해갔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출신지가 어디이건, 어떻게 생겼건 대다수 사람은 같은 것을 추구합니다. 추잡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해줄 거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가족을 먹여살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파산하지는 않길 기대합니다. 자녀들이 새로운 경제를 준비할 수 있도록 좋은 교육을 받고 노력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길 기대합니다. 범죄자나 테러범으로부터 안전하고 싶어 합니다. 평생직장에서 존엄과 존중 속에서 은퇴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대단한 요구가 아닙니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리라 기대하지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정부가 우선순위를 조금만 바꾸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면 방 안이 고요해졌고, 나는 질문을 몇 개 받았다. 면담이 끝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나와 악수하고 선거 홍보물을 챙기고 제러마이아나 어니타에게 참여 방법을 문의했다.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동안 내가 들려준 이야기가 진실이고, 이 선거운동이 더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며, 나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의 가치와 소중함을 인식하고 서로 나누게끔 돕는 수도관에 불과하다는 확신이 점차 커졌다.
스포츠에서든 정치에서든 탄력의 정확한 성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2004년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탄력을 받았다. 액스는 TV 광고를 두 편 제작했다. 첫 번째 광고에서는 내가 카메라를 직접 보면서 연설했고 “우린 할 수 있어”라는 구호로 마무리했다. (나는 진부하다고 생각했지만, 액스는 대뜸 고위급의 의견을 들어보자며 미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반응은 “하나도 안 진부한데요”였다.) 두 번째 광고의 출연자는 일리노이주가 사랑하는 전직 상원의원이자 나를 공개 지지하기로 한 날을 며칠 앞두고 심장 수술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폴 사이먼의 딸 실라 사이먼이었다.
우리는 예비선거를 고작 4주 남겨놓고 광고를 내보냈다. 순식간에 내 지지율이 두 배 가까이로 급등했다. 일리노이주의 5대 신문이 나를 지지하자 액스는 이 사실이 강조되도록 광고를 새로 편집하면서, 이런 공적 승인의 효과는 백인 후보보다 흑인 후보에게서 더 크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즈음 나와 가장 치열하게 경합하던 상대 후보는 전처가 그에게 가정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비공개 소송 자료가 보도되면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민주당 예비선거일인 2004년 3월 16일, 우리는 일곱 명이 맞붙은 전장에서 53퍼센트 가까운 득표율로 승리했다. 나머지 민주당 후보들의 득표율을 합친 것보다 많았을 뿐 아니라 공화당 예비선거의 총 투표수에 맞먹었다.
그날 밤 기억나는 순간은 둘뿐이다. 승리 축하 파티에서 색종이 폭죽이 터지자 두 딸이 신나서 꺅 소리를 지르던 순간(두 살배기 사샤의 탄성에는 두려움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카고에서 백인이 주민 과반을 차지하는 지역구들—해럴드 워싱턴에 대항해 인종적 저항의 본거지 역할을 하던 곳들—중 한 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승리했다고 액설로드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순간. (그가 말했다. “해럴드가 오늘 밤 우릴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을 거예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이튿날 아침 중앙역에 가서 출근하는 시민들과 악수하던 일도 기억난다.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꽃잎만큼 두꺼웠다. 나를 알아보고 악수하는 사람들은 마치 우리 모두 함께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듯 똑같이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대포알에 맞은 것 같다’로 액스는 이후의 몇 달을 묘사했는데, 우리 심정이 꼭 그랬다. 우리의 선거운동은 하룻밤 새 전국 뉴스가 되었으며 방송사들이 인터뷰를 요청했고 전국의 선출직 공직자들이 축하 전화를 했다. 단순히 우리가 승리했다거나 뜻밖에 대승을 거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긴 방식을 흥미로워했다. 우리는 남부와 농촌 백인 카운티를 비롯한 모든 인구 집단에서 표를 얻었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선거운동에서 미국 인종 문제의 현황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또 이라크 전쟁에 일찌감치 반대한 내가 민주당의 방향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 논평했다.
우리 선거 본부는 자축할 여유도 없이 부랴부랴 본선을 준비해야 했다. 우리는 더 숙련된 선거운동원들을 추가로 영입했다. 홍보부장 로버트 깁스는 강인하고 명민한 앨라배마 사람으로, 존 케리 선거 본부에서 일했다. 여론조사에서는 내가 공화당 후보 잭 라이언보다 20퍼센트포인트 가까이 앞섰지만, 그의 이력을 감안하면 당선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골드만삭스 은행가 일을 그만두고 불우한 아동들이 다니는 교구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 그는 고루한 공화당 정강을 내세웠지만 영화배우 같은 외모 덕에 참신해 보였다.
우리에게는 다행하게도 이 중에서 선거 유세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 라이언은 씀씀이가 헤프고 세금을 도둑질하는 진보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내게 붙이려고 각종 차트를 동원했는데, 숫자들이 터무니없고도 명백하게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젊은 운동원을 파견하여 휴대용 캠코더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게 한 일로 훗날 비판을 사기도 했다. 그 운동원은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왔고 말실수를 포착하려고 내가 미셸과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주변에서까지 얼쩡거렸다. 마지막 한 방은 라이언의 비공개 이혼 서류를 언론이 입수한 것이었다. 서류에서 그의 전처는 그가 자신을 섹스 클럽에 끌고 가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려 들었다고 주장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라이언은 후보에서 사퇴했다.
본 선거까지 딱 다섯 달이 남은 상황에서 경쟁자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깁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 일이 끝나면 라스베이거스에나 가자고요.”
그래도 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스프링필드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 종종 차를 몰고 인근 타운에 가서 선거 유세를 했는데,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존 케리의 보좌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7월 보스턴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 연설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상상도 못 할 일을 숱하게 겪었기에 들뜨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액설로드는 연설문을 작성할 팀을 짜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내게 맡겨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까요.”
그 뒤로 며칠간 연설문을 썼다. 대개 저녁에, 스프링필드 르네상스 호텔에서 야구 경기를 틀어놓은 채 침대에 엎드려 노란색 노트에 생각을 채워넣었다. 문구들이 속속 떠올랐다. 대학에 다니던 초창기 시절 이후로 내가 찾아 헤매던 정치와 지금 이곳으로의 여정을 촉발한 내적 투쟁을 정리했다. 우리 어머니, 외조부모, 아버지, 그리고 내가 조직한 사람들과 선거 유세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신랄하고 냉소적으로 돌아설 이유가 얼마든지 있지만 그러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더 숭고한 것을 추구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 교회 제러마이아 라이트 목사의 설교 중에 들었던 표현이 떠올랐다. 이런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 구절이었다.
‘담대한 희망.’
훗날 액스와 깁스는 내가 대회에서 연설한 날 밤까지 이어지는 우여곡절에 대해 종종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게 배정된 시간을 늘리려고 협상한 일(원래 8분이었지만 17분으로 늘렸다). 액스와 그의 유능한 파트너 존 쿠퍼가 나의 초고를 잘라낸 쓰라린 기억(덕분에 연설문이 더 나아졌다). 스프링필드에서 회의가 밤까지 늘어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탑승한 보스턴행 비행기. 난생처음 텔레프롬프터 앞에서 연습하는데 나의 코치 마이클 시핸이 마이크에 이상이 없다며 외친 말, “소리 안 지르셔도 돼요!” 존 케리가 자기 연설에 써먹겠다며 젊은 직원을 시켜 연설의 한 구절(내가 좋아한 구절이었다)을 삭제하라고 요구했을 때 느낀 분노. (액스는 이렇게 상기시키며 나를 달랬다. “그들은 주상원의원인 당신에게 전국 무대에 설 기회를 줬어요. …… 지나친 요구는 아닌 것 같군요.”) 흰옷으로 차려입은 아름다운 미셸이 무대 뒤에서 내 손을 꼭 쥐고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망치지만 말게, 자네!” 하던 장면. 우리의 사랑이 최고조일 때면 언제나 그러듯 바보처럼 함께 깔깔대고 있는데, 일리노이주 고참 상원의원 딕 더빈의 소개말이 들렸다. “제가 소개할 연사는 버락 오바마……”
2004년 전당대회 연설 테이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은 한 번뿐이다. 선거가 끝난 뒤에 그날 밤 대회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고 싶어서 혼자 시청했다. 무대 분장을 한 나는 말도 안 되게 젊어 보이며, 처음부터 비치는 긴장한 기색,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린 부분, 약간 어색한 몸짓에서 미숙함이 드러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리듬을 찾는다. 객석에서는 환호성 대신 침묵이 흐른다. 그 뒤로도 마법이 일어나는 밤이면 으레 그런 순간을 맞닥뜨렸다. 여기에는 신체적 느낌도 동반된다. 나와 청중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흐름 때문이다.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이 영화 필름처럼 갑자기 이어져 앞으로 뒤로 투사되며 나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겹친다. 그것들을 한 순간에 깊숙이 느끼고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알고 바라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차이를 뛰어넘어 어마어마한 가능성의 파도로 대체하는 연결의 감각―에 접속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모든 것들이 다 그렇듯 이 순간은 찰나이고 마법은 금세 풀려버린다.
그날 밤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미디어의 위력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액설로드의 광고가 나를 예비선거에서 선두로 띄워 올리고,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리며 차에서 손을 흔들고,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달려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아저씨 TV에서 봤어요”라고 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의 연설이 여과되지 않은 채 실시간으로 수백만 명에게 전달되고 케이블 뉴스와 인터넷으로 또 다른 수백만 명에게 유포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노출이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올 때 연설이 잘 끝났다는 것을 알았고, 이튿날 각종 전당대회 관련 행사에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하려고 밀치락달치락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보스턴에서 받은 주목은 만족스러웠지만 나는 이것이 우연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이런 행사를 따라다니는 정치 중독자들 같았다.
전당대회 직후에 미셸과 나와 두 딸은 운동원들과 함께 일리노이주 다운스테이트로 일주일간 승합차 유세를 떠났다. 내가 여전히 일리노이주에 집중하고 있으며 거만해지지 않았음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정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를 몇 분 앞두고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왔을 때 다운스테이트 담당자 제러마이아가 선발대의 전화를 받았다.
“알았어……, 알았어요……. 운전 기사에게 말할게요.”
수면 부족과 정신없는 일정에 벌써부터 조금 지친 내가 물었다. “뭐 잘못됐어요?”
“공원에 100명쯤 모여 있을 거로 예상했는데, 지금 최소 500명을 헤아린다네요. 인파를 정리할 수 있도록 좀 천천히 오라는군요.”
20분 뒤 도착해서 보니 타운 전체를 공원에 욱여넣은 것 같았다. 아이를 목말 태운 부모들, 야외용 의자에 앉아 작은 깃발을 흔드는 노인들, 격자무늬 셔츠에 종자 회사 모자를 쓴 남자들이 있었다. 상당수는 그저 호기심에 무슨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려고 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용한 기대감으로 끈기 있게 서 있었다. 말리아는 사샤가 밀어내려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말리아가 물었다. “사람들이 공원에서 뭐 하는 거야?”
미셸이 말했다. “아빠를 보러 왔단다.”
“왜?”
내가 깁스를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만 말했다. “퀸트 선장, 지원을 더 요청해야겠어요(영화 〈조스〉의 유명한 대사_옮긴이).”
그 뒤로 들르는 곳마다 전보다 네다섯 배 많은 군중이 우리를 맞이했다. 관심이 사그라들고 거품이 꺼질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자만심을 경계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선거는 사실상 끝나 있었다. 8월이 되자, 현지에서 출마 희망자를 찾지 못한 공화당은―전 시카고 베어스 코치 마이크 딧카가 공개적으로 출마를 타진하긴 했지만―보수파 논객 앨런 키스를 마지못해 영입했다. (깁스가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이거 봐요. 공화당도 흑인을 데려왔네요!”) 키스가 메릴랜드 주민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그의 가혹한 단죄는 일리노이 정서와 어울리지 않았다.
키스는 내 이름을 매번 일부러 틀리게 발음하며 이렇게 사자후를 토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배럭 오바마에게 투표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는 그에게 40퍼센트포인트 차로 승리했다. 일리노이주 상원 선거 역사상 최다 표차였다.
선거일 밤 우리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는 선거 결과가 일찌감치 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전국 선거 투표 결과 때문이었다. 케리는 부시에게 패배했고 공화당이 상하원을 다시 장악했으며 민주당 소속의 상원 소수당 대표인 사우스다코타의 톰 대슐마저도 충격적으로 낙선했다. 조지 부시의 정치적 배후 칼 로브가 공화당 영구 집권의 꿈을 떠벌렸다.
한편 미셸과 나는 기진맥진했다. 직원들 계산에 따르면 나는 지난 18개월을 통틀어 딱 이레를 쉬었다. 우리는 취임 선서까지 남은 6주를 이용해 그동안 소홀했던 집안 대소사를 처리했다. 나는 워싱턴으로 날아가 곧 동료가 될 당선자들을 만나고 보좌진 예정자들을 면접하고 가장 값싼 주택을 물색했다. 미셸은 아이들과 함께 시카고에 남기로 결정했다. 든든한 가족과 친구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 1년 내내 일주일에 사흘씩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했지만 그녀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달라진 상황에 지나치게 노심초사하진 않았다. 우리는 하와이에서 마야와 툿과 함께 성탄절을 보냈다. 캐롤을 부르고 모래성을 쌓고 아이들이 선물 끄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는 동생과 함께 바다로 나가 어머니의 재를 뿌린 지점에 레이(하와이 화환)를 던졌고, 외할아버지가 묻힌 태평양국립기념묘지에도 하나 놓아두었다. 새해가 되자 온 가족이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취임 선서 전날 밤 호텔 스위트룸 침실에서 미셸이 초선 상원의원들을 위한 환영 만찬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출판사 편집자가 전화를 했다. 몇 년째 절판되었던 내 책이 전당대회 연설 덕분에 재출간되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편집자가 전화한 이유는 이 책의 성공과 새 책 계약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선인세를 받았다.
편집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미셸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침실에서 나왔다.
사샤가 말했다. “정말 예뻐, 엄마.” 미셸이 아이들을 위해 한 바퀴 돌아 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좋았어, 너희들 얌전하게 굴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입 맞추고는 그날 밤 아이들을 봐주기로 한 장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홀을 내려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데, 미셸이 갑자기 멈췄다.
“뭐 잊은 거 있어?”
그녀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을 정말로 해냈다는 게 안 믿겨져. 선거 하며 책 하며 이 모든 것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맞췄다. “마법 콩이야, 자기. 마법 콩 덕분이라고.”
워싱턴에 입성한 초선 상원의원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문제는 정반대였다. 초선 상원의원이라는 현실 지위에 비추어 볼 때 나를 둘러싼 소동은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기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계획이 뭐냐고 다그쳤는데, 가장 자주 들은 질문은 대통령에 출마할 의향이 있느냐였다. 선서일에 한 기자가 물었다. “역사에서 당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웃으면서 이제 막 워싱턴에 입성했고 서열 99위이고 아직 한 번도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고 의사당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내숭 떠는 게 아니었다. 상원의원 출마만 해도 내게는 꿈 같은 얘기였다. 나는 상원의원이 되어 뿌듯했으며 얼른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부풀려진 기대들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팀은 힐러리 클린턴을 본보기로 삼았다. 4년 전 우렁찬 팡파르와 함께 상원에 들어선 그녀는 성실, 실속, 지역구민들에 대한 관심으로 명성을 쌓았다. 박람회 출품마가 아니라 역마가 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이런 전략을 실행하는 데 기질적으로 가장 알맞은 사람은 새 수석보좌관 피트 라우스였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몸집이 판다 같은 피트는 30년 가까이 의회에서 일했다. 많은 경험과―가장 최근에는 톰 대슐의 수석보좌관을 지냈다―다방면에 걸친 인맥 때문에 사람들은 애정을 담아 그를 101번째 상원의원으로 불렀다(미국 연방상원의원은 100명이다_옮긴이). 워싱턴 정치 실무자들에 대한 통념과 반대로 피트는 스포트라이트를 질색했고, 익살맞고 무뚝뚝한 겉모습과 달리 뒤에는 수줍어하는 사내가 숨어 있었다. 그가 고양이들을 애지중지하며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새내기 의원실을 꾸리는 임무를 맡아달라고 피트를 설득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급격한 신분 하락보다는 대슐이 낙선하여 실업자 신세가 된 초급 보좌관들의 일자리를 알아봐줄 시간이 부족할까 봐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지식 못지않게 한결같은 관대함과 올곧음을 갖춘 피트의 합류는 내게 그야말로 횡재였다. 그의 명성을 발판 삼아 일류 보좌관들을 영입하여 사무실을 채울 수 있었다. 홍보담당관 로버트 깁스와 더불어, 보좌관으로 잔뼈가 굵은 크리스 루를 입법담당관으로, 젊고 영리한 해군 예비역 마크 리퍼트를 외교담당관으로, 앳된 얼굴과 달리 케리 대통령 선거 본부의 이인자였고 분쟁 조정과 행사 조직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진 얼리사 매스트로모나코를 일정담당관으로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려 깊고 잘생긴 스물세 살의 존 패브로를 발탁했다. 나중에 영화감독 패브스로 유명해진 패브로도 케리 선거 본부에서 일했는데 깁스와 피트는 그를 연설문 작성자로 첫손에 꼽았다.
면접이 끝나고 내가 깁스에게 물었다. “내가 전에 패브로를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실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케리가 전당대회에서 당신의 구절을 훔칠 거라고 통보한 친구예요.”
그래도 채용했다.
피트의 감독하에 우리 팀은 워싱턴과 시카고, 다운스테이트의 여러 지역에 사무소를 열었다.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집중한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얼리사는 일리노이주에서 야심 찬 주민 간담회 일정을 짰다. 첫 해에만 서른아홉 건이었다. 우리는 전국지와 일요일 아침 방송을 피하고 일리노이주의 신문과 지역 TV 방송국에 주력한다는 엄격한 방침을 세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트가 편지와 유권자 민원을 처리할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연락 사무소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 및 인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답장을 꼼꼼히 교정했고, 분실한 사회 보장 수표나 중단된 제대군인 혜택, 중소기업청 대출을 어느 연방기관에서 처리하는지 숙지하도록 했다.
피트가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의 표결을 좋아하지 않을 순 있지만, 답장을 못 받았다고 비난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무실이 인재로 채워지자 나는 현안들을 연구하고 동료 상원의원들과 친분을 쌓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주 고참 상원의원 딕 더빈의 너그러움 덕분에 나는 많은 짐을 덜 수 있었다. 폴 사이먼의 친구이자 제자인 그는 상원에서 가장 유능한 논쟁가 중 하나였다. 자아도취 문화가 팽배한 이곳에서 상원의원들은 신참 파트너가 언론의 주목을 자신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을 고깝게 여겼지만 딕은 내게 한결같은 도움을 베풀었다. 상원 회의장 곳곳을 소개해주었고,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여러 일리노이주 사업에 대한 공로를 우리와도 나누라고 당부했으며, 함께 주최한 목요일 아침 유권자 조찬에서 방문객들이 내게 사진과 사인을 청하느라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도 인내심과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신임 민주당 대표가 된 해리 리드도 마찬가지였다. 해리가 상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나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네바다주의 작은 타운 서치라이트에서 광부와 빨래꾼 부부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수도와 전화도 없는 판잣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입학하고 조지워싱턴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여, 수업이 없는 때에는 국회 경비대에서 제복을 입고 근무하며 학비를 벌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거 알아요, 버락? 난 어릴 때 권투를 했어요. 그런데 웬걸,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어요.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세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내겐 두 가지 장점이 있었어요. 맷집이 좋았고 포기를 몰랐죠.”
나이와 경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리와 내가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은 열세를 극복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고, 실은 대화나 특히 전화 통화 중에 일반적인 예절을 무시하는 당혹스러운 버릇이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리기가 예사였다. 하지만 에밀 존스가 주의회에서 그랬듯이 해리는 상임위 배정에서 나를 배려하려고 애썼으며 신출내기인 내게 상원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주었다.
실은 그런 협력 관계야말로 정상으로 보였다. 테드(에드워드) 케네디와 오린 해치, 존 워너와 로버트 버드, 댄(대니얼) 이노우에와 테드(시어도어) 스티븐스 같은 왕년의 상원의원들은 모두 당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눴으며 ‘가장 위대한 세대’(1900년과 1924년 사이에 태어나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성장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이후 미국의 전후 부흥을 이끌어낸 세대_옮긴이)의 전형적 특징인 수더분한 친밀감을 발휘했다. 반면에 그보다 젊은 상원의원들은 서로 덜 어울렸으며 깅그리치 시대 이후의 하원에서 보는 것처럼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나는 가장 보수적인 의원들에게서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오클라호마의 톰(토머스) 코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정부 지출을 혹독히 비판했지만, 내게 진실하고 사려 깊은 친구가 되었고 그와 나의 보좌관들은 정부 계약의 투명성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조치들을 함께 추진했다.
여러 면에서 상원 첫해는 일리노이 주의회 초년 시절과 비슷했지만, 여기는 스케일이 더 컸고 스포트라이트가 더 밝았고 로비스트들이 고객의 이익을 고상한 원칙으로 포장하는 솜씨가 더 훌륭했다. 주의회에는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채 죽은 듯 지내는 것에 만족하는 의원이 많았으나 상원의 새 동료들은 사안에 정통했고 의견을 내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상임위 회의가 한없이 늘어졌다. 로스쿨과 스프링필드에서 나의 장광설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수당 신세인 동료 민주당 의원들과 나는 상임위에서 통과되어 표결에 회부되는 법안에 대해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공화당이 교육 예산을 삭감하거나 환경 안전 조치를 물타기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휑한 회의장에서 의회방송 C–SPAN의 깜박이지 않는 눈을 들여다보며 열변을 토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데 무력감을 느꼈다. 정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민주당을 깎아내리고 다가올 선거에 대비하려는 표결 결과는 번번이 우리를 번뇌에 빠뜨렸다. 나는 일리노이에서처럼 변방에서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유행병 창궐에 대비한 안전 조치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일리노이 제대 군인들이 박탈당한 혜택을 돌려받도록 하는 등 온건한 초당파적 조치를 밀어붙였다.
상원의 몇몇 측면들에 무척 실망했지만 지지부진한 속도에는 개의치 않았다. 일리노이주 최연소 의원 중 하나로 70퍼센트의 지지율을 얻었기에 참고 기다릴 여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주지사, 솔직히 말하자면 대통령에 출마할 생각도 했었다. 행정부에 들어가면 의제를 설정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흔셋의 나이로 전국 무대에 갓 진출한 지금은 세상의 모든 시간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생활이 호전되면서 나의 기분은 한결 들떴다. 악천후만 없으면 워싱턴 D.C.에서 시카고로 출근하는 시간은 스프링필드를 오가는 것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거운동을 하거나 세 가지 일을 병행할 때와 달리 집에 와도 바쁘거나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기에, 사샤를 토요일 무용 수업에 데려다주고 말리아를 침대에 누이기 전에 『해리 포터』를 읽어줄 시간을 더 많이 낼 수 있었다.
재무 상황이 개선되면서 부담감도 부쩍 줄었다. 우리는 새 집을 샀다. 켄우드에서 시나고그(유대교 회당_옮긴이) 맞은편에 있는 크고 번듯한 조지 왕조풍 주택이었다. 우리 가족의 젊은 친구이자 촉망받는 요리사 샘(새뮤얼) 캐스는 적당한 금액에 장보기와 일주일 내내 먹을 수 있는 건강식 요리를 해주기로 했다. 선거운동 때 자원봉사자로 일한 마이크 시그네이터는 은퇴한 코먼웰스 에디슨 전력회사 직원이었는데 시간제 운전 기사를 계속 해주기로 했고 결국 가족처럼 친해졌다.
우리가 금전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게 되면서 장모 메리언도 직장 일을 줄이고 손녀들의 양육을 도와주기로 했다. 슬기롭고 재미있고 네 살배기와 일곱 살배기를 쫓아다닐 만큼 여전히 젊은 그녀 덕에 모두의 삶이 한결 수월해졌다. 게다가 우연찮게도 사위를 사랑하는 장모인지라, 내가 늦거나 방을 어지르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도 분연히 내 편을 들어주었다.
이런 추가적 도움을 받게 되자 나와 미셸은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던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많이 웃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임을 새삼 깨달았다. 정작 놀라웠던 사실은 이처럼 새로운 상황에서 우리가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집에 처박혀 있기를 좋아했고, 화려한 파티와 인맥 쌓기용 연회를 멀리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저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너무 자주 차려입는 것을 한심하게 여겼고 한결같은 아침형 인간인 미셸이 밤 열 시면 졸려 했기 때문이다. 주말은 늘 하던 대로 보냈는데, 나는 농구를 하거나 말리아와 사샤를 근처 수영장에 데려갔고 미셸은 타깃에서 쇼핑을 하거나 아이들의 놀이 약속 일정을 짰다. 저녁이나 오후에 절친한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를 먹을 때도 있었다. 특히 밸러리, 마티, 어니타, 에릭 휘터커와 세릴 휘터커(자녀가 우리 아이들과 동갑인 의사 부부), 거기다 우리가 애정을 담아 ‘마마 케이’와 ‘파파 웰링턴’으로 부르는 케이 윌슨과 웰링턴 윌슨도 있었다. 웰링턴은 지역전문대학 행정 직원으로 은퇴했으며 케이는 지역 재단의 프로그램 담당 직원으로 요리 솜씨가 훌륭했다. 이 노부부는 내가 조직 운동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나를 양아들처럼 생각해주었다.
미셸과 내가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도 우리를 알아보았는데, 대체로 우호적이었지만 갑자기 익명성을 누리지 못하게 되자 당황스럽기도 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어느 날 저녁 미셸과 함께 제이미 폭스 주연의 전기 영화 〈레이〉를 보러 갔는데, 영화관에 들어서자 관객들이 박수 갈채를 보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이따금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옆 테이블 사람들이 우리와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거나, 입을 닫은 채 우리 얘기를 엿들으려 하기도 했다.
아이들도 알았다. 상원의원으로 첫 여름을 맞이한 어느 날, 나는 말리아와 사샤를 링컨 공원 동물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마이크 시그네이터는 화창한 일요일 오후의 군중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선글라스와 야구 모자면 모든 시선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 자신하곤 나들이를 강행했다. 반 시간 정도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다. 대형 고양잇과 사육관에 가서 사자들이 유리 뒤로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고 대형 유인원 앞에서 웃긴 표정을 지어 보일 때만 해도 누구 하나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바다사자가 어디 있는지 방문객 안내 책자를 보려고 멈췄을 때 한 남자가 외쳤다.
“오바마다! 헤이, 저기 봐. …… 오바마야! 헤이, 오바마,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많은 가족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악수나 사인을 청하며 손을 내밀었고 부모들은 자녀를 내 옆에 세워 사진을 찍었다. 나는 마이크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사자를 보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로 15분간 지역구민들에게 나를 내맡긴 채 그들의 격려에 감사하며 이 또한 감당해야 할 몫임을 상기했지만, 아이들이 아빠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궁금해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이들과 합류하자 마이크는 동물원 밖으로 나가 조용한 데서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제안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이크는 고맙게도 침묵을 지켰지만, 아이들은 어림도 없었다.
말리아가 뒷좌석에서 잘라 말했다. “아빠에겐 가명이 필요해.”
사샤가 물었다. “가명이 뭐야?”
말리아가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을 때 쓰는 가짜 이름이야. ‘조니 맥존 존’처럼 말이지.”
사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 아빠…… 조니 맥존 존으로 해!”
말리아가 덧붙였다. “목소리도 변조해야 해. 사람들이 목소리를 알아들을 테니까. 목소리 톤을 높여야 해. 더 빨리 말하고.”
사샤가 말했다. “아빠는 말이 너무 느려.”
말리아가 말했다. “응? 아빠. 한번 해봐.” 그러고는 목소리 톤과 빠르기를 한껏 높이며 말했다. “안녕! 나는 조니 맥존 존이야!”
마이크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돌아오자 말리아는 자신의 계획을 자랑스럽게 미셸에게 설명했고 미셸은 말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근사한 아이디어네, 말리아. 하지만 아빠가 딴 사람으로 변장하려면 귀를 뒤로 당기는 수술을 받아야겠다.”
상원의 권한 중에서 기대되는 것 한 가지는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주의회에서는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핵 문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취임 선서를 하기도 전에 외교위원회 위원장 딕(리처드) 루거에게 편지를 써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외교위원회의 대표 사안은 핵무기 확산 저지였다).
딕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디애나주 공화당 의원으로 상원 경력 28년의 베테랑인 그는 세금과 낙태 같은 국내 사안에는 단호하게 보수적이었으나, 대외 정책에서는 조지 H. W. 부시 같은 주류 공화당 인사들이 오랫동안 견지한 신중하고 국제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소련이 해체된 직후인 1991년 딕은 민주당의 샘 넌과 손잡고 러시아와 구소련 국가들이 대량살상무기를 안정화하고 불능화하는 일에 미국이 자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켰다. 넌·루거법으로 알려진 이 법은 대담하고 탄탄한 성취임이 입증되었으며―20년에 걸쳐 7500여 개의 핵탄두가 제거되었다―이 법의 시행으로 핵무기 해체라는 위험한 과제를 관리하는 데 필수적인 미·러 국가 안보 관료들의 관계도 증진했다.
2005년으로 돌아와서, 정보 보고서들에 따르면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집단들은 구소련 블록 전역에서 경계가 허술한 전초 기지를 뒤지며 남은 핵물질, 화학물질, 생물학 물질을 찾고 있었다. 딕과 나는 넌·루거법의 기존 틀을 바탕으로 이런 위협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그해 8월 나와 딕은 군용 제트기를 타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을 일주일간 방문했다. 딕은 전부터 넌·루거법의 이행을 점검하기 위해 이 나라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했지만 내게는 첫 공식 외국 방문이었다. 의원들이 세금으로 외유를 떠나 한가로운 일정에 호화 만찬과 흥청망청 쇼핑을 즐긴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게 관행이었을진 몰라도 딕은 그 부류에 속하지 않았으며 70대에도 노익장을 과시했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관료들과 하루 종일 회의하고 난 뒤에 우리는 두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사라토프에 갔다가 또 한 시간가량 차를 타고 미국의 자금으로 러시아 미사일의 안전을 보강한 비밀 핵 보관 시설을 방문했다. (식사로는 보르시와 어묵을 대접받았는데, 딕이 용감하게 먹는 동안 나는 여섯 살짜리처럼 접시에 음식을 늘어놓고는 못 먹는 것을 골라냈다.)
우랄산맥 인근의 도시 페름을 방문해서는 한때 유럽을 겨냥한 전술 핵탄두의 마지막 잔재인 SS–24 및 SS–25 미사일 덮개들이 폐기된 현장을 둘러보았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 가서는 탄약, 고성능 폭탄, 지대공 미사일, 심지어 장난감에 숨겨진 소형 폭탄 등 전국에서 취합된 재래식 무기가 폐기되기 위해 쌓여 있는 시설을 탐방했다. 키예프에서는 허름하고 경비원도 없는 도심의 3층짜리 건물 단지로 안내받았는데, 넌·루거법의 자금 지원을 받아 탄저병균과 가래톳페스트균을 비롯한 냉전 시대 생물학 연구 시료를 새로 보관하는 시설이 건설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창의성이 광기 추구에 동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한편 이번 방문은 오랫동안 국내 문제에 집중하던 내게 새로운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세상이 얼마나 넓으며 워싱턴에서 내리는 결정이 인류에게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실감했다.
딕의 활약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산신령 같은 얼굴에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띤 그는 지치지도 않고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외국 관료들과 면담할 때마다 그가 보여준 관심과 정확성, 지식에 탄복했다. 그는 일정 지연에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와 보드카 낮술도 참아냈다. 그는 그런 사소한 예의가 문화를 뛰어넘어 전달되고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익 증진에 이바지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게는 외교에 대한 요긴한 가르침이자 상원의원이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그때 폭풍우가 몰아닥쳐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내가 딕과 여행하던 그 주에 바하마 제도에서 형성된 열대성 저기압이 플로리다를 건너 멕시코만에 머물면서 온난한 바닷물로부터 에너지를 빨아들이며 미국 남해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상원 대표단이 토니 블레어 총리와 면담하려고 런던에 도착했을 즈음 흉포하고 전면적인 재앙이 시작되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초속 56미터의 바람과 함께 상륙하면서 멕시코만 해안을 따라 민가가 초토화되고 제방이 무너졌으며 뉴올리언스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나는 잠 못 들고 뉴스를 시청하면서 TV 화면을 뒤덮은 흙빛의 원초적 악몽에 경악했다. 물에 뜬 시체가 있었고 병원에 갇힌 노인 환자, 총격과 약탈, 희망을 잃고 웅크린 이재민들이 있었다. 그런 고통을 목격하는 것만도 힘겨웠지만, 정부의 늑장 대응, 수많은 빈곤층 및 노동자 계층의 열악한 처지를 보면서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며칠 뒤 나는 조지 H. W. 부시와 바버라 부시,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휴스턴을 방문했다. 허리케인 이재민 수천 명이 거대한 애스트로돔 경기장에 설치된 임시 주거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휴스턴시는 적십자 및 연방재난관리청과 협력하여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분초를 다투며 노력했지만, 임시 주거 시설을 둘러보면서 나는 많은 사람이―대부분 흑인이었다―허리케인 훨씬 이전부터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저축이나 보험도 없이 변두리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집과 사랑하는 사람을 홍수에 잃은 사람이 있었고, 승용차가 없거나 노쇠한 부모를 옮길 수 없어 대피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내가 시카고에서 조직하려고 노력한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 미셸의 이모나 사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든 그들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미국의 정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잊힌 사람들과 잊힌 목소리는 어디에나 있었다. 정부는 그들의 필요에 눈감거나 무관심한 채 외면했다.
그들의 고난은 내게 꾸지람으로 느껴졌다. 상원 유일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나는 전국 단위 언론 매체 출연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끝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전국 방송사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카트리나 재난에 미흡하게 대처한 원인이 인종주의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집권당과 미국 전체가 이 나라에 만연한 고립, 가난의 대물림, 기회 박탈을 해결하기 위한 투자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고 역설했다.
워싱턴에 돌아온 뒤 동료들과 함께 국토안보·정무위원회에서 멕시코만 지역 재건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상원에서의 삶은 전과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회의장에서 몇 년을 보내야 휴스턴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상임위 청문회, 실패한 법률 개정, 고집불통 의장과의 예산 협상 따위를 몇 번이나 거쳐야 연방재난관리청 부장 한 명, 환경보호청 공무원 한 명, 노동부 직원 한 명의 판단 착오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 조바심은 몇 달 뒤 소규모 의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더 커졌다.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이 벌어진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정부는 전쟁이 재난을 낳았음을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이라크군을 해산하고 주류 시아파가 수니파 무슬림을 정부 요직에서 공공연히 제거하도록 방치함으로써 미국 관료들은 혼란스럽고 점점 위험해지는 상황을 자초했다. 피비린내 나는 종파 갈등 때문에 자살 공격, 노변 폭파, 혼잡한 시장에서의 차량 폭탄 테러가 급증했다.
우리 대표단은 바그다드, 팔루자, 키르쿠크의 미군 기지를 방문했는데, 우리가 탑승한 블랙호크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이라크는 어디나 만신창이였다. 도시는 박격포 포격으로 곳곳이 패어 있었고 도로는 오싹할 만큼 고요했고 땅은 흙먼지로 덮여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휘관과 부대원들은 명석하고 용감했다. 적절한 군사 지원과 기술 훈련을 받고 땀을 흘리면 이라크가 언젠가는 고비를 넘길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고, 이를 원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본 기자들과 소수의 고위급 이라크 관료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사악한 영이 풀려났다고 그들은 말했다.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살해와 보복 때문에 화해의 전망은 까마득하거나 아예 무망하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를 하나로 지탱하는 유일한 힘은 우리가 파병한 젊은 군인과 해병 수천 명뿐인 듯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병사도 많았다. 이미 그중 2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천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리 군대가 (종종 보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적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딕 체니와 도널드 럼즈펠드 같은 자들이 부린 오만의 대가를 저 젊은이들이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우리를 섣불리 전쟁에 몰아넣은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 결과를 철저히 들여다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한편 민주당 동료 중 절반 이상이 이 참사를 승인했다는 사실은 나를 다른 종류의 근심으로 가득 채웠다. 워싱턴에 오래 머물수록, 더 뿌리 내리고 편해질수록, 내가 어떻게 변해갈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감이 잡혔다. 점진주의와 격식, 차기 선거를 위한 끝없는 자리 싸움, 케이블 TV 뉴스 패널들의 집단 사고―이 모두가 공모하여 판단력을 흐리고 독립성을 깎아내려 한때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올바른 자리에 올라 올바른 일을 합당한 속도로 해낸다며 만족감을 느끼려던 찰나, 카트리나와 이라크 방문이 그 모든 것에 제동을 걸었다. 변화는 더 빨리 찾아와야 했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내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4장
처음 나를 만난 순간 또는 TV 연설을 들은 순간부터 내가 대통령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을―친구나 지지자, 지인,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막론하고―일주일이면 한 번 이상 마주친다. 그들의 말에는 애정과 확신, 그리고 자신의 정치 감각과 재능을 포착하는 능력과 예지력에 대한 약간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종교적 색채를 입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놓으셨어요, 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면 나는 미소를 지으며, 출마를 고민할 때 이 말을 해주시지 그랬느냐고 대답한다. 그러면 엄청난 부담감과 자기 불신을 겪지 않았도 됐을 거라고.
솔직히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믿어본 적이 없다. 운명론은 힘 없는 자들에게 체념을, 힘 있는 자들에게 자기만족을 부추긴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이든 우리의 유한한 고민거리에 관심을 두시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으시다. 한 번의 생에서 사건과 우연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결정하는 듯하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느끼기에 옳은 편에 서서 혼돈으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내고 매 순간 품위와 용기를 발휘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2006년 봄이 되자 내가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발상은 (여전히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했지만) 더는 가능성의 영역 너머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우리 상원의원실에 언론의 취재 요청이 밀려들었다. 우리가 받는 편지는 다른 상원의원의 두 배에 달했다. 11월 중간선거(미 대통령 집권 2년 차에 실시되는 상·하 양원의원 및 공직자 선거로, 대통령 국정 운영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띤다_옮긴이)에 나가는 모든 주의 정당과 후보는 내가 자기네 행사를 주요하게 언급해주길 바랐다. 출마 계획을 기계적으로 부인해봐야 추측만 무성해질 뿐이었다.
어느 날 오후 피트 라우스가 내 사무실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지역구민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물어봐요.”
“2008년 계획이 달라졌어요?”
“모르겠어요. 그래야 하나요?”
피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목을 피해 일리노이에 초점을 맞춘다는 원래 계획은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의원님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 기미가 없어요. 고려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선택지를 열어두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개요를 작성하고 싶은데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응시했다. 내 대답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고 있었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네요.”
피트가 물었다. “좋아요?”
“좋아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서류 작업으로 돌아갔다.
‘문서 장인’은 몇몇 보좌관이 피트를 부르는 말이다. 그의 손을 거치면 조잡한 보고서가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모든 문서가 효율적이면서도 묘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며칠 뒤에 그는 남은 기간에 대한 로드맵 개정판을 우리 팀 간부급들에게 참고용으로 배포했다. 로드맵에는 중간선거에서 더 많은 민주당 후보들을 돕기 위한 지원 유세 확대, 유력 당직자 및 후원자들과의 면담, 가두연설 수정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었다.
그 뒤로 몇 달간 나는 이 계획에 따라 나 자신과 나의 생각을 새로운 청중 앞에 선보이고 경합주와 경합 선거구에서 민주당을 지원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들을 방문했다. 웨스트버지니아 제퍼슨–잭슨 만찬(아이오와주에서 열리는 민주당 기금 모금 행사_옮긴이)에서 네브래스카 모리슨 엑슨 만찬까지, 모든 모금 행사를 다니며 청중을 동원하고 사기를 북돋웠다. 하지만 대통령에 출마할 거냐고 누가 물으면 여전히 꽁무니를 뺐다. “지금은 벤(벤저민) 넬슨을 상원에 다시 데려오는 데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상원에 그가 필요하니까요.”
나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던 걸까?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걸까?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나는 시험하고, 타진하고, 전국을 돌며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전국 단위 캠페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가늠하려 했던 것 같다. 당선 가능성 있는 대통령 후보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지극히 전략적인 행보를 오랫동안 느리고 조용하게 밟으며 정도正道를 가야 했다. 그러려면 확신과 자신감뿐 아니라 자금을 확보하고 2년 내내 50개 주를 돌며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를 치르기에 충분한 헌신과 선의를 사람들에게서 얻어내야 했다.
• 미국에서 각 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대의원을 선출하는 예비선거(경선)의 두 가지 방식. 프라이머리는 비당원까지 투표할 수 있는 반면에 코커스는 일종의 당원 대회로서 정식 당원만 참석한다_옮긴이.
이미 조 바이든, 크리스 도드, 에번 바이, 물론 힐러리 클린턴까지 여러 동료 민주당 상원의원이 출마를 위해 터를 닦았다. 몇몇은 출마 경험이 있었으며 모두가 수년간 준비했고 노련한 보좌진, 후원자, 지역 공직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나와 달리 대부분 내세울 만한 혁혁한 입법 성과가 있었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나를 잘 대해주었고, 여러 사안들에 대한 견해가 대체로 비슷했으며, 선거운동을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을 뿐 아니라 백악관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역량을 갖췄다. 그들이 못 하는 방식으로 유권자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커지긴 했지만―그들보다 조금 더 폭넓은 연대 전선을 구축하고 그들과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면 워싱턴을 뒤흔들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나의 이러한 호감 이미지는 신기루요, 우호적인 언론 보도와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선호하는 맹목적 기호의 결과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열광은 일순간 뒤집힐 수 있음을 알았다. 떠오르는 별은 첫 임기가 절반도 지나지 않은 주제에 자신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는 건방진 애송이로 언제든 전락할 수 있었다.
뒤로 미루는 게 상책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노력하고 성과를 쌓고 차례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었다.
화창한 어느 봄날 오후, 해리 리드가 자기 사무실에 들르라고 청했다. 상원 회의장에서 2층까지 넓은 대리석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동안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근엄한 표정과 검은 눈의 초상화가 걸음마다 나를 내려다보았다. 해리는 안내대 앞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사무실로 안내했다. 크고 천장이 높은 방은 여느 고참 상원의원들의 방처럼 세련된 장식과 타일이 있었고 전망이 근사했지만 다른 의원실들을 장식한 기념품과 유명인과의 악수 사진은 별로 없었다.
해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우리 코커스에서 대통령 출마를 계획하는 사람이 많아요.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죠.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버락. 그래서 내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편을 들 순…….”
“이봐요, 해리, 아시다시피 저는 그럴 계획이…….”
그가 내 말꼬리를 자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번 선거에 출마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알아요.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내 한마디 하죠. 상원에서 10년을 더 보낸다고 해서 더 나은 대통령이 되지는 않아요. 당신은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이, 소수자, 심지어 중도층 백인들에게까지 감명을 줘요. 그게 당신의 남다른 점이에요.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힘들 거라는 건 분명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슈머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는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가 면담이 끝났음을 알렸다. “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예요. 그러니 생각해봐요, 알겠죠?”
얼떨떨한 채로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해리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긴 했지만, 나는 그가 정치인 중에서 가장 현실적임을 알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의 말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 그가 벌이는 교묘한 게임을 내가 너무 무뎌서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나중에 척 슈머와, 그다음에 딕 더빈과 이야기해보니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이 나라가 새로운 목소리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 지금보다 나은 출마 여건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젊은 유권자, 소수자, 무당파들이 내게 느끼는 친밀감을 활용하면 저변을 넓혀 다른 민주당 후보들의 득표를 도울 수도 있었다.
나는 이 대화를 수석 보좌진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전했다. 지뢰밭에 발을 들인 바람에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될 듯한 기분이었다. 피트와 이 문제를 깊이 상의했는데, 그는 대선 출마를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전에 한 번 더 대화를 나눠보라고 제안했다.
그가 말했다. “케네디와 이야기해보셔야 해요. 그는 선수들을 전부 알아요. 본인이 뛰기도 했고요. 그라면 균형 잡힌 견해를 들려줄 거예요. 적어도, 딴 사람을 지지할 계획이라면 당신에게 얘기하겠죠.”
미국 정치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의 계승자인 테드 케네디는 당시 워싱턴 정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