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청년 시절 1889~1899 | |
1889년 5월 13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89년 5월 27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89년 9월 27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89년 12월 31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0년 1월 (날짜 불명),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0년 7월 20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0년 8월 9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1년 4월 20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1년 11월 7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2년 7월 19일,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2년 12월 14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4년 3월 9일, 도쿄 혼고구 | 기쿠치 겐지로에게 |
1894년 9월 4일, 도쿄 혼고구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5년 4월 16일,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 간다 나이부에게 |
1895년 5월 26일,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5년 12월 18일,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6년 6월 10일,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7년 1월 (날짜불명),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7년 4월 23일,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899년 12월 11일,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다카하마 교시에게 |
2부·영국 유학 시절 1900~1902 | |
1900년 9월 27일, 기선 프로이센호 | 나쓰메 교코에게 |
1900년 10월 23일, 파리 | 나쓰메 교코에게 |
1900년 11월 20일, 런던 웨스트햄스테드 | 후지시로 데이스케에게 |
1901년 1월 22일, 런던 캠버웰뉴로드 | 나쓰메 교코에게 |
1901년 2월 20일, 런던 캠버웰뉴로드 | 나쓰메 교코에게 |
1901년 4월 9일, 런던 캠버웰뉴로드 | 마사오카 시키・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1년 4월 20일, 런던 캠버웰뉴로드 | 마사오카 시키・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1년 4월 26일, 런던 투팅그래버니 | 마사오카 시키・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1년 6월 19일, 런던 투팅그래버니 | 후지시로 데이스케에게 |
1901년 9월 12일, 런던 클랩햄코먼 | 데라다 도라히코에게 |
1901년 12월 18일, 런던 클랩햄코먼 | 마사오카 시키에게 |
1902년 3월 10일, 런던 클랩햄코먼 | 나쓰메 교코에게 |
1902년 3월 15일, 런던 클랩햄코먼 | 나카네 시게카즈에게 |
1902년 4월 17일, 런던 클랩햄코먼 | 나쓰메 교코에게 |
1902년 12월 1일, 런던 클랩햄코먼 | 다카하마 교시에게 |
3부·도쿄대 교수 시절 1903~1906 | |
1903년 6월 14일, 도쿄 혼고구 | 스가 도라오에게 |
1903년 7월 2일, 도쿄 혼고구 | 스가 도라오에게 |
1904년 6월 18일, 도쿄 혼고구 | 노무라 덴시에게 |
1905년 1월 1일, 도쿄 혼고구 | 노마 마사쓰나에게 |
1905년 2월 13일, 도쿄 혼고구 | 미나가와 세이키에게 |
1905년 6월 27일, 도쿄 혼고구 | 노무라 덴시에게 |
1905년 7월 15일, 도쿄 혼고구 | 나카가와 요시타로에게 |
1905년 9월 11일, 도쿄 혼고구 | 나카가와 요시타로에게 |
1905년 9월 16일, 도쿄 혼고구 | 나카가와 요시타로에게 |
1905년 9월 17일, 도쿄 혼고구 | 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5년 11월 2일, 도쿄 혼고구 | 노무라 덴시에게 |
1905년 11월 9일, 도쿄 혼고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5년 12월 3일, 도쿄 혼고구 | 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5년 12월 31일, 도쿄 혼고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6년 1월 9일, 도쿄 혼고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6년 2월 6일, 도쿄 혼고구 | 노무라 덴시에게 |
1906년 2월 13일, 도쿄 혼고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6년 2월 17일, 도쿄 혼고구 | 아네사키 조후에게 |
1906년 4월 3일, 도쿄 혼고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6년 6월 6일, 도쿄 혼고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6년 7월 2일, 도쿄 혼고구 | 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6년 7월 24일, 도쿄 혼고구 | 나카가와 요시타로에게 |
1906년 9월 5일, 도쿄 혼고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6년 10월 10일, 도쿄 혼고구 | 와카스키 사부로에게 |
1906년 10월 20일, 도쿄 혼고구 | 미나가와 세이키에게 |
1906년 10월 21일, 도쿄 혼고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6년 10월 21일, 도쿄 혼고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6년 10월 23일, 도쿄 혼고구 | 가노 고키치에게 |
1906년 10월 23일, 도쿄 혼고구 | 가노 고키치에게 |
1906년 10월 26일, 도쿄 혼고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6년 10월 26일, 도쿄 혼고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6년 11월 9일, 도쿄 혼고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06년 11월 16일, 도쿄 혼고구 | 다키타 조인에게 |
1906년 12월 22일, 도쿄 혼고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4부·아사히신문사 시절 1907~1912 | |
1907년 1월 27일, 도쿄 혼고구 | 쇼노 소노스케에게 |
1907년 3월 11일, 도쿄 혼고구 | 사카모토 셋초에게 |
1907년 3월 23일, 도쿄 혼고구 | 노가미 도요이치로에게 |
1907년 7월 21일, 도쿄 혼고구 | 노가미 도요이치로에게 |
1907년 8월 5일, 도쿄 혼고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7년 8월 6일, 도쿄 혼고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07년 8월 15일, 도쿄 혼고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07년 9월 2일, 도쿄 혼고구 | 구로야나기 가이슈에게 |
1908년 7월 1일, 도쿄 우시고메구 | 다카하마 교시에게 |
1908년 8월 (날짜 불명), 도쿄 우시고메구 | 시부카와 겐지에게 |
1908년 10월 20일, 도쿄 우시고메구 | 가케 마사후미에게 |
1908년 12월 20일, 도쿄 우시고메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09년 2월 7일, 도쿄 우시고메구 | 모리타 소헤이에게 |
1909년 4월 24일, 도쿄 우시고메구 |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
1909년 7월 6일, 도쿄 우시고메구 | 구로야나기 가이슈에게 |
1909년 8월 1일, 도쿄 우시고메구 | 이이다 마사요시에게 |
1909년 11월 28일, 도쿄 우시고메구 | 데라다 도라히코에게 |
1910년 2월 3일, 도쿄 우시고메구 | 아베 요시시게에게 |
1910년 6월 23일, 도쿄 고지마치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0년 7월 3일, 도쿄 고지마치구 | 도가와 슈코쓰에게 |
1910년 9월 11일, 시즈오카현 슈젠지 | 나쓰메 후데코・쓰네코・에이코에게 |
1910년 10월 31일, 도쿄 고지마치구 | 나쓰메 교코에게 |
1910년 12월 13일, 도쿄 고지마치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0년 12월 14일, 도쿄 고지마치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1년 1월 6일, 도쿄 고지마치구 | 미야 히로시에게 |
1911년 2월 2일, 도쿄 고지마치구 | 나쓰메 교코에게 |
1911년 2월 10일, 도쿄 고지마치구 | 나쓰메 교코에게 |
1911년 2월 21일, 도쿄 고지마치구 | 후지하라 료지로에게 |
1911년 2월 24일, 도쿄 고지마치구 | 사카모토 셋초에게 |
1911년 4월 13일, 도쿄 고지마치구 | 후지하라 료지로에게 |
1911년 7월 31일, 도쿄 우시고메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1년 10월 4일, 도쿄 우시고메구 | 유게타 세이이치에게 |
1911년 10월 25일, 도쿄 우시고메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2년 5월 19일, 도쿄 우시고메구 | 하시구치 고요에게 |
1912년 6월 17일, 도쿄 우시고메구 | 하야시바라 고조에게 |
1912년 6월 18일, 도쿄 우시고메구 | 니시하라 구니코에게 |
1912년 8월 12일, 도쿄 우시고메구 | 모리나리 린조에게 |
1912년 10월 12일, 도쿄 우시고메구 | 아베 지로에게 |
1912년 12월 4일, 도쿄 우시고메구 | 쓰다 세이후에게 |
5부·만년 1913~1916 | |
1913년 1월 12일, 도쿄 우시고메구 | 모리나리 린조에게 |
1913년 10월 5일, 도쿄 우시고메구 | 와쓰지 데쓰로에게 |
1913년 11월 21일, 도쿄 우시고메구 | 다카하라 미사오에게 |
1913년 11월 25일, 도쿄 우시고메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3년 12월 8일, 도쿄 우시고메구 | 쓰다 세이후에게 |
1913년 12월 21일, 도쿄 우시고메구 |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에게 |
1914년 1월 5일, 도쿄 우시고메구 | 아카기 고헤이에게 |
1914년 1월 7일, 도쿄 우시고메구 | 고이즈미 마가네에게 |
1914년 1월 13일, 도쿄 우시고메구 | 구로야나기 가이슈에게 |
1914년 3월 29일, 도쿄 우시고메구 | 쓰다 세이후에게 |
1914년 4월 24일, 도쿄 우시고메구 | 마쓰오 간이치에게 |
1914년 5월 25일, 도쿄 우시고메구 | 요모타 요시오에게 |
1914년 6월 2일, 도쿄 우시고메구 | 기무라 겐조에게 |
1914년 6월 2일, 도쿄 우시고메구 | 요모타 요시오에게 |
1914년 7월 7일, 도쿄 우시고메구 | 기타지마 에이이치에게 |
1914년 8월 2일, 도쿄 우시고메구 | 야마모토 쇼게쓰에게 |
1914년 10월 27일, 도쿄 우시고메구 | 나카 간스케에게 |
1914년 11월 9일, 도쿄 우시고메구 | 요시나가 히데코에게 |
1914년 11월 14일, 도쿄 우시고메구 | 하야시바라 고조에게 |
1914년 12월 27일, 도쿄 우시고메구 | 요시나가 히데코에게 |
1915년 1월 25일, 도쿄 우시고메구 | 후지모리 히데오에게 |
1915년 2월 15일, 도쿄 우시고메구 | 구로야나기 가이슈에게 |
1915년 4월 22일, 도쿄 우시고메구 | 도미사와 게이도에게 |
1915년 5월 3일, 도쿄 우시고메구 | 이소다 다카에게 |
1915년 5월 16일, 도쿄 우시고메구 | 이소다 다카에게 |
1915년 6월 15일, 도쿄 우시고메구 |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에게 |
1915년 7월 2일, 도쿄 우시고메구 | 이다 요시코에게 |
1915년 8월 9일, 도쿄 우시고메구 | 도쿠다 슈세이에게 |
1916년 1월 13일, 도쿄 우시고메구 | 이다 요시코에게 |
1916년 2월 19일, 도쿄 우시고메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
1916년 7월 19일, 도쿄 우시고메구 | 오이시 다이조에게 |
1916년 8월 5일, 도쿄 우시고메구 | 와쓰지 데쓰로에게 |
1916년 8월 21일, 도쿄 우시고메구 | 구메 마사오・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
1916년 8월 24일, 도쿄 우시고메구 | 구메 마사오・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
1916년 9월 2일, 도쿄 우시고메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
1916년 11월 6일, 도쿄 우시고메구 | 고미야 도요타카에게 |
1916년 11월 10일, 도쿄 우시고메구 | 기무라 겐조에게 |
옮긴이의 말 | |
나쓰메 소세키 연보 |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89년 5월 13일
마사오카 대인
오늘은 우르르 병실에 몰려가서 실례가 많았네. 돌아가기 전에 야마자키 겐슈 선생을 뵙고 자네의 증상과 요양 방법에 대해 물으려 했는데, 댁에 있기는 하지만 다른 용무로 바쁘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네. 하는 수 없이 다른 이를 통해 물었더니 예상외로 가벼운 증상이라며 딱히 입원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감기가 백병을 일으키듯 각혈이 폐결핵이나 결핵 같은 중증으로 번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일 터, 최대한 요양에만 전념하는 게 좋을 듯하네. 소생의 생각으로는 야마자키처럼 부주의하고 불친절한 의사 말은 듣지 말고, 다행히 인근에 다이이치 의원도 있고 하니 일단 거기 가서 진단을 받아보고 입원 준비를 하면 어떨까 싶은데. 그러면 간호와 요양이 다 해결되어 열흘에 나을 병이 닷새면 완쾌하리라 보네만. 아주 조금이라도 폐병에 걸릴 ‘프라버빌리티’가 있는 이상 이수二竪가 고황病膏에 들기 전에2 현명히 결단하여 실행하는 게 좋을 듯싶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예로부터 정해진 법칙이라지만, 희생비사喜生悲死 또한 자연의 섭리일세. 사시사철의 순환을 다 알면서도 여름에는 더위를 느끼고 겨울에는 추위를 느끼는 것 또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작게는 어머니를 위해,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해 몸을 잘 돌보아야 하네. 비 오기 전에 덧문을 보수한다는 옛사람의 명언을 새기어 평소의 객기일랑 버리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기를 바라네.
toliveisthesoleendofman!
떠나간다며 울지 말고 웃어라 두견새3야
네가 울기를 바라는 이 없으니 두견새야
이삼일 내로 병문안 가도록 하지. 오늘 야마자키 선생을 뵈러 갈 때 요네야마와 다쓰구치도 함께해주었네. 우리 형도 오늘 각혈하여 병상에 누웠다네. 이리도 두견새가 많아서야 풍류가인 이 몸도 두 손 다 들 수밖에. 하하.
긴노스케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89년 5월 27일
조키4에게
어제는 쉬파리처럼 오래 눌러앉아 실례했네. 어제 형편없는 평을 덧붙여 돌려준 《나나쿠사슈》5는 내가 돌아간 후 다 읽었으리라 생각하네. 후에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보니 앞뒤 분별도 없이 무턱대고 어려운 한자만 나열했다 싶어 뻔뻔하기 그지없는 이 몸도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군. 그저 무례한 자라 여기고 참아주게. 사과를 하는 김에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비평 뒤에 덧붙여둔 28자 9절6에 관한 것이라네. 그건 어린아이의 유치한 습작 같은 글로, 그저 홍등녹주紅燈綠酒의 문자를 휘갈겨 쓴 것일 뿐이라 자네의 훌륭한 존서에 덧붙여두는 건 《나나쿠사슈》의 치욕일세. 그러니 사람들 눈을 겁내는 소생의 마음을 가엾이 여겨, 명복을 빌 것도 없이 일도양단에 잘라내어 휴지통 속 정토로 보내주게나. 선천적 불구아는 편작의 묘술로도 고치기 어려운 것이 당연지사, 살아서 사람들 앞에 나서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부모의 자비 아닐까 싶네. 그럼에도 딱한 범부는 혹 자네의 처방으로 선천적 불치병이 고쳐질 가능성은 없을지, 그것만 신경 쓰고 있다네. 불탄 들판의 꿩, 밤 두루미.7 아픈 자식일수록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역시 부모의 욕심이겠지. 절대, 절대로 범부라 경멸하지 말아주게. 총총.
《나나쿠사슈》에는 천하의 이 몸도 실명을 밝히기가 두려워 일단 적당히 소세키라고 유식한 척 적어두곤 우쭐대고 있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소세키漱石라고 써야 할 것을 소세키潄石라고 쓴 것 같더군. 이 점 유념하시어 고쳐주길 바라네. 어리석은 요네야마 선생이 옆에서 보며 말하길,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남의 글을 평가하다니 “정말 대단한 얼간이로군”. 탁탁탁탁.8
기쿠이 마을 소세키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89년 9월 27일
애첩에게
그대의 말대로 주머니 휑하고 지갑 빈곤한 내가 거금 2전이라는 돈을 써서 시코쿠 근처까지 친히 서신을 보내니, 이 친절함에 필시 감동의 눈물로 목이 멜 테지. 낭군의 대자대비에 감사하라는 뜻으로 한껏 생색을 내며 급보를 전하네. 얼마 전 편지로 부탁한 점수 건은 잘 알아들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 없네.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이 에돗코9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라, 하고 한가하던 차에 갑자기 할 일이 생겼음을 기뻐하며 곧장 비술을 발휘해 구메 선인仙人10을 생포, 일단은 한숨 돌렸지. 하지만 총포에 쓸린 굳은살로(쓸렸다기보다 허물을 벗은 것에 가깝지)손 가죽 두께가 한 자나 된다는 촌뜨기 병사와 담판을 짓는 건 세련되고 부드러운 남자로 이름 높은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그러니 손을 떼고 물러서야겠지만, 자네, 아니 애첩을 위한 일이니. 나는 목숨에 여벌이 있다면 두어 개쯤은 그대에게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라, 꿋꿋이 고금 미증유의 용기를 짜내어 두세 번 전쟁을 벌인 결과 무운이 따라 이 몸이 승리했다네. 그런즉 아가씨께서는 1부 2학년 3반 교실을 마음껏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소.11
“어머, 이렇게 든든할 수가. 어쩜 긴 씨는 생긴 것과 다르게 참으로 내실 있는 분이시로군요.” 그대가 분명 이렇게 말하리라 생각되어 이 몸의 업적을 대서특필하여 널리 퍼뜨리니, 대충 이와 같네.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엔 상경하는 중이겠군. 만일 또 꾸물꾸물 아직 고향에 들러붙어 있다면 이 편지를 보자마자 달려 나와 도쿄로 오도록.
낭군으로부터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89년 12월 31일
시키 앞
귀성 후에는 어찌 지내는가. 몸은 좀 어떤가. 독서는 하는가. 집필은 어떠한가. 이 길고 긴 날들을 어찌 견디며 보내고 있는가.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라 온 집이 시끌벅적한데, 이 가난한 서생은 고맙게도 할 일이 없어 낮에는 그저 책을 읽거나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이부자리 안으로 파고드는 게 일과의 전부라네. 점잖게 말하자면 한중한閑中閑, 정중정靜中靜, 속되게 말하자면 가난뱅이가 부득불 두 손 놓고 구접스레 누항에 틀어박힌 꼴이지. 이번 방학에는 칼라일의 논문을 한 권 읽었어. 이삼일 전부터는 아널드의 《문학과 도그마》라는 걸 읽고 있지. 그나저나 전부터 쓰겠다던 소설은 쓰기 시작했나? 이번에는 어떤 문체로 쓸 생각인가. 의견이나 비평은 작품을 본 후에 말하겠지만, 대형大兄의 문장은 너무 나긋나긋해서 부인풍의 습성을 벗지 못했네. 최근에는 아에바 고손12분의 1의 happiness를 탐하면서 그걸로 족하다 여기는가? 혹 이 Idea를 얻는 일보다 습작이 즐겁다 한다면 더는 한마디도 보탤 말이 없네. 다만 한 조각 진심을 토로하여 연말연시 인사를 대신해본 것일세. 그럼 이만 줄이겠네.
자네는 이 편지를 읽으며 냉소를 띠고 “멍청한 놈”이라고 하려나. 아무튼 자네의 coldness에는 항복이야.
소세키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90년 1월 (날짜 불명)
시코쿠 신선께
학업으로 바쁜 와중에 일부러 긴 답신 보내주어 고맙네. 이리 돈독한 자네를 어찌 냉담이니 냉소니 하며 비난하겠는가. 진지한 변론을 보고 송구스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네. 그저 한때 허튼소리라 여기고 흘려보내 주게. 괜히 쓸데없는 문장론을 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게 바로 인간의 천박한 부분이라 마지막에 괜한 말을 늘어놓아 자네에게 공격을 당하니 참으로 난처하군. 다 의미 없는 잡설이고 실언이니 용서하게나.
올해 설날은 늘 그렇듯 떡국을 먹고 누워 뒹굴며 보냈다네. 요세13는 대여섯 번 다녀오고, 가루타14를 두 번 했지. 하루는 간다의 오가와테이라는 곳에서 쓰루초라는 온나기다유15를 보았는데, 여성 중에 이런 보물이 있었나 하고 형과 함께 아주 감탄했다네. 형이 내게 “기예가 훌륭하면 얼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하던데, 옳고 그름은 자네가 판단해주길 바라네.
요네야마는 요즘 선禪에 몰두하여 이번 방학에도 가마쿠라로 수행을 떠났다네. 야마카와는 여전히 학교에 나오질 않는데, 며칠 전에 열 시쯤 찾아갔더니 아직 이부자리에 있더군.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그제야 일어나 월금16 연주를 한 곡 들려주었다네. 늘 태평천만이지만 마음은 우울증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지. 이 또한 자네의 판단을 부탁드리네. 아무튼 요즘엔 학교에 우리 동지들이 적어 왠지 쓸쓸하고 재미가 없어. 최대한 빨리 돌아오게. 이제 신선놀음도 싫증이 났을 테니 잠시 쉬었다가 올여름 다시 신선이 되는 걸로 하게나.
별지에 쓴 문장론을 한번 읽어봐 주길.
《나나쿠사슈》에 실린 <나흘간의 호화 여행기>와 <미토 기행> 및 그 외 잡문은 귀형의 글인가? 아니라면 무례를 용서 바라네.
도시 먼지 도인 드림
[별지]
문장에 대한 나 개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문장 isanideawhichisexpressedbymeansofwordsonpaper이므로, 생각건대 idea가 문장의 Essence이고 words를 arrange하는 것은 element임에는 틀림없지만, essence가 되는 idea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경제학으로 치면 wealth를 만들기 위해 rawmaterial과 labor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labor는 단순히 rawmaterial을 modify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rawmaterial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어떤 뛰어난 labor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idea가 없으면 words의 arrangement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로써 best 문장을 이해해보자면,
best 문장 isthebestideawhichisexpressedinthebestwaybymeansofwordsonpaper.
이 underline 부분은 idea를 그대로 지면에 표현해 독자로 하여금 내 idea를 Exact(nomorenoless)하게 느끼게 한다는 의미로, 이것만이 즉 Rhetoric이 treat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문장(내가 말하는)은 결코 Rhetoric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설명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한데 이 idea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Culture가 아주 중요하고 그다음이 스스로 경험하는 것인데, 경험의 영역만으로는 Idea를 얻을 수 있는 범위가 좁기 때문에 Culture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culture란 무엇인가 하면, knowingtheideaswhichhavebeensaidandknownintheworld라고 나는 정의한다. 따라서 culture를 얻을 방법이 책밖에 없다는 사실에 자네도 동의할 터, 그래서 독서를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Rhetoric을 폐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Essence를 앞에 두고 form을 뒤에 두어야 하며, Idea를 앞에 두고 Rhetoric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시간적 선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중을 달리해야 한다는 뜻).
이제 엄숙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analytically하게 이야기해보겠다.
(1)엄숙한 문장 = 엄숙한 ideaexpressedbymeansofwords.
(2)수려한 문장 = 수려한 ideaexpressedbymeansofwords.
따라서 엄숙하다거나 수려하다는 형용사가 붙을 만한 Idea라면 기행문이든 논설문이든 소설이든, 무엇이든 다 수려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단 idea중에는 이러한 형용사를 붙이기 힘든 것이 있는데, 이런 idea를 express하는 문장에는 이 같은 형용사를 붙이기 매우 어렵다. scientifictreatises가 그런 경우이며, 그 외pureliterarywork에는 종류를 불문하고 다 이러한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Idea와 Rhetoric의 combination으로 어떤 문장이 만들어지는지 mathematically하게 설명하겠다.
언어 장애인이 bestidea를 가졌어도 Rhetoric이 없어 anyspeech도 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 단, 이건 문장의 예가 아니다.
lasttwocase를 비교하면 Idea가 R보다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 case 중 1&2는 거의 extreme한 case라 실제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장 important한 것은 5&6이다. 원래 bestRhetoric 이란, 예컨대 △라면 △라는 idea를 Express하여 누가 읽어도 동일한 형태, 동일한 크기의 △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바꿔 말해 originalidea를 original 그대로 convey하는 것이 bestRhetoric이므로, 가령 R이 best라 할지라도 idea가 bad하다면 bad한 idea를 bad한 채로 convey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문장은 bad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R은 bad하더라도 Idea가 best라면 best한 Idea가 이 badRhetoric으로 인해 조금 modify되기 때문에 best인 채로 express되지 못하고 ordinary한 것에 그치게 된다.
내가 알기 쉽고 꾸밈없고 기교 없이 Idea를 express하는 것이 훌륭한 문장이라고 여기는 경우는 (3)의 case뿐이다. 즉, best한 Idea를 알기 쉽고 기교 없이 best인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whichisonlypossiblebymeansofthebestRhetoric). 문장의 사소한 부분에 얽매이는 건 제2와 같은 case다. R은 best지만 Idea가 0에 가까우면 거의 no 문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네가 말하는 세 가지 사항은 참으로 flimsy하기 그지없네.
(1)무얼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되지 않나.
(2)읽을 책이 없다면 사거나 빌리면 되지 않나.
(3)영문을 모른다면 공부를 해도 좋고, 안 되면 일서나 한서를 읽으면 되지 않나.
자네가 말하는 문학자의 두 가지 목적에 나는 크게 반대하지만, 자네 말대로 그 두 가지가 목적이라 한들 자네가 말하는 그 문장(Rhetoriconly)으로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Rhetoriconly)가 이 목적 달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가. 재차 숙고 바라네.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90년 7월 20일
시키 병상 앞
7월 보름이 지나 다소 때늦은 감은 있지만 불경 일색에 불당 냄새 물씬 나는 글 재미있게 잘 읽었네. 우선 병을 앓으며 나날이 승려를 닮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진귀하구먼. 요즘 더위는 마쓰야마 변두리뿐 아니라 번화한 에도도 예외 없어서, 낮에는 꼭 시루 속 문어 같은 신세라 염불 외고 불공을 드릴 처지는 아니라네. 그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위안 삼아 지내다 보니 애국심 투철한 소생도 이 더위를 조용히 견디며 민초를 위함이니, 백성을 위함이니 하면서 점잔 뺄 수가 없구먼(하긴 혈액이 적은 냉혈 동물에 가까운 귀공은 그렇지도 않겠지만). 거기다 무슨 업보인지, 여인의 저주인지, 최근에는 지병인 눈 상태가 좋지 않아 독서도 할 수 없는가 하면 집필은 더욱이 힘들어 정말이지 무료함과 한가함의 극치, 시험에 쫓기는 것보다 훨씬 괴롭구먼.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17이란 어떤 멍청이가 한 말인지,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이 거짓됨을 깨닫는다네. 실은 이번에 크게 분발하고 공부하여(옷가게 전단지가 아닐세)18 평소 축적해둔 포텐셜과 에너지를 화학적 작용으로 키네틱하게 바꾸어 9월 상순에는 귀공을 놀라게 할 생각으로 기대하고 기대했건만, 기대한 보람도 없이, 아아 슬프구나, 하늘이 이 몸의 재능을 시기하여 장차 대학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비겁하게도 병을 내려주어 내 재능을 좌절시키는구먼. 작게는 나라를 위해, 크게는 천하를 위해 실로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이 눈병 덕에 9월에 소생을 만나더라도 딱히 놀라거나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란은 겪지 않아도 될 테니 그 점은 안심해도 좋네.
(중략)자네 말대로 야마카와가 낙제할 정도면 낙제할 사람은 차고 넘치지. 무엇보다 귀공은 낙제 지망생이니 야마카와와 서로 바꾸면 좋을 텐데. 바로 그게 세상사의 여의치 않고 부득이한 부분일세.
낮잠의 장점을 이제야 깨닫다니 어리석구먼. 나는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24시간 중 총 세 번 잠을 잔다네. 낮잠 꿈결 속에서 미인과 해후하는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낮잠도 이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정점에 달했다 할 수 없지. 자네도 이제 낮잠의 대청마루에 들어섰으니 방 안에 들도록19 갈고 닦아야 할 걸세.
일전에 자네가 “사이교 스님20얼굴도 보이누나후지산 풍경”이라는 구를 자랑했는데, 이는 내가 얼마 전에 후지산을 보고 문득 읊조린 명구에는 미치지 못한다네. 이런 편지 끝자락에 쓰기는 아깝지만 워낙 각별한 사이고 하니 보여드리지.
그 명구라네.
사이교조차 삿갓 벗고서 보는 후지산 풍경
스스로 감복 또 감복. 이런 명구를 함부로 남에게 보이면 천기를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게나. 또 하찮은 수필 속에 써서도 안 되네. 이만 줄이겠네.
소세키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90년 8월 9일
시키 앞
그 후 눈병이 낫질 않아 서적도 문필도 다 내팽개친 터라 이 긴긴 여름나기가 무척 힘에 부치는구먼. 하는 수 없이 베개 하나를 동무 삼아 화서華胥 나라 흑첨黑甛 마을을 노닐며 지낸다네.21 연못가에는 아직 풀도 돋지 않고 배 위에 소나무도 자라지 않으니22 이렇다 할 대단한 소식도 없어. 요즘은 이런 시간 때우기에도 싫증이 났다네. 그렇다고 좌선 수행은 더욱 불가능하고 차를 끓여 입에 머금는 고아한 풍류를 즐길 마음도 들지 않는군. 별수 없이 그저 ‘잠이 전부인 사람도 있었거니 꿈속 세상에’ 따위의 말이나 읊조리며 멋을 부린다네. 오기에서 나온 풍류이니 가엾이 여겨 한번 웃어주게나. 소생의 병은 끝없이 질질 들러붙어 좋아지지도 않는가 하면 나빠지지도 않는다네. 이번 생에서 풍광을 보지 못하는 일은 면했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한가韓家 정원에 핀 꽃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할 일 또한 없지.23 안경 너머로 문발 밖 가련하게 핀 해당화를 바라보는 정도는 문제없이 가능하다네. 이따금 정원에 나가(요네야마 법사처럼 매미를 잡지는 않지만)이런저런 심심풀이를 한다네. 차나무 밑동에 빨갛게 물든 꽈리 열매가 나뒹굴기에 무심코 꺾어들고 생각해보니 딱히 줄 사람도 없더군. 어린 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패랭이꽃이 시든 사이 비 맞은 도라지꽃 한두 송이가 이끼를 베개 삼아 쓰러져 누웠는데, 작은 개미가 보라색 꽃잎을 타고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모습이 아픈 내 눈에도 선명히 보였지. 여랑화가 때 아니게 흩뿌린 작은 꽃잎을 참새 무리가 먹이로 착각하고 몰려들어 쪼아 먹는 모습을 보며, 조수鳥獸란 참 멍청하구나 생각하다가도, 그러는 인간 역시 참새와 오십보백보이니 험담은 못 하겠다 싶더군. 나팔꽃은 매달릴 가지를 찾아 여기저기 기어 다닌 끝에 간신히 소나무 밑동에 놓인 네모난 금색 등롱에 들러붙었는데, 홀로 핀 한 송이 꽃이 녹슬어 볼품없는 등롱의 체면을 살려주더군. 병약한 미인이 장사의 팔에 기댄 모습 같다고나 할까. 하하. 정원 풍경은 여기까지만 쓰도록 하지.
요즘 들어 왠지 이 덧없는 세상이 싫어졌다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끔찍하게 싫어 견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할 용기도 없다는 건 역시 인간다운 구석이 조금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파우스트’가 제 손으로 독약을 만들어 입 앞까지 가져갔다가 결국 마시지 못했다는 ‘괴테’의 작품을 떠올리며 혼자 쓴웃음을 짓는다네. 소생은 여태 딱히 고생을 하며 자란 것도 아니고, 큰 재난을 만나 남선북마南船北馬하며 지낸 적도 없어. 그저 칠팔 년 전부터 내 손으로 밥을 지으며 아궁이 불에 얼굴을 그을리고, 기숙사 밥을 먹고 위병이 나거나 하숙집 2층에서 음식 쟁취를 위해 결투를 벌인 게 전부지. 참 태평하게도 살았는데, 요즘은 그렇게 사는 것에도 신물이 나 집에 누워서만 지내는 복받은 처지일세. 그런 주제에 50년 인생의 여로를 아직 반도 지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차니 자네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스스로도 한심하다 싶지만, 이 또한 misanthropic 병이니 어쩔 도리가 없군. lifeisapointbetweentwoinfinities겠거니 하고 체념하려 해도 체념이 안 되니 이것참.
Wearesuchstuff
Asdreamsaremadeof; andourlittlelife
Isroundedbyasleep24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네. 살아서도 잠, 죽어서도 잠, 살아서 하는 행동은 꿈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게 한심스럽군. 알 수 없구나, 태어나고 죽어가는 인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또한 알 수 없구나, 잠시 머물렀다 가는 거처에서 누굴 위해 괴로워하고 무얼 보며 즐거워하는지.25 조메이의 이런 깨달음의 말은 기억하지만 깨달음의 열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군. 이 또한 마음이라는 정체 모를 놈이 내 다섯 척 몸뚱이에 칩거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밉살맞기 그지없어. 살가죽 사이에 숨었는지 골수 속에 숨었는지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번뇌의 불꽃만 새빨갛게 타오르고, 감로甘露의 법우法雨를 기다려보지만 도통 오질 않는군. 욕망의 바다에는 파도가 험해 언제 기슭에 가닿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 그만두자, 그만두자, 눈멀고, 귀먹고, 육체는 재가 되어버려라. 나는 무미, 무취의 기묘한 것이 되어,
Icanfly, orIcanrun,
Quicklytothegreenearth’send,
Wherethebowedwelkinslowdothbend;
Andfromthencecansoarassoon
Tothecornersofthemoon26
이렇게 홀가분한 몸이 되고 싶어. 아아, 마사오카 군. 살아 있기 때문에 근거 없는 훼방과 칭찬에 마음을 쓰고 실체 없는 평판에 가슴을 졸이며 대들보에서 쥐똥이라도 떨어질까 전전긍긍하여 선승의 비웃음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오후미>27 속 문구를 흉내 내려는 건 아니네만, 내 두 눈이 영원히 감기고 하나의 숨이 영원히 끊어질 때는 군신도 부자父子도 없이, 도덕이나 권리, 의무 같은 성가신 것들은 다 뒤죽박죽되어 참된 공공적적空空寂寂의 경지에 이르기를, 그것 하나만 기대하며 산다네. 관 뚜껑을 덮고 나면 만사 다 끝이 날 터, 내 백골이 괭이 끝에 차일 날이 오면 그 누가 나쓰메 소세키의 삶을 기억하겠는가. 그럼 이만.
소생 여태 한 번도 이런 푸념 편지를 자네에게 보낸 적이 없지. 실없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 얼굴 찌푸리지 말고 읽어주게.
소세키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91년 4월 20일
하나누스비토 님께28
광기로다, 광기로다, 광기에 들었도다. 자네 서신을 받고 처음에는 그 당돌함에 놀라고, 그다음에는 크게 웃느라 먹던 음식을 책상에 뿜어냈다네. 마지막에는 편지를 덮고 눈물을 흘렸지. 자네의 시문을 읽고 이처럼 수많은 감정이 끓어오른 건 이번이 처음일세. 자네의 마음속 작은 불평이 돌연 불타올라 머릿속 큰 화재로 번져서, 타다 남은 불꽃이 붓끝을 타고 세 척 반절 종이 위에 백만 개 불똥을 흩뿌리니 그 훌륭함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네. 평소 자네 문장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것도 아니고 꾸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나, 오로지 광기 그 하나가 결여되어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는 부족했지. 그런데 이 한 편은 광기가 충만하여 내 충정衷情을 온통 헤집어놓고 내 다섯 척 몸을 전율케 했다네. 《나나쿠사슈》는 말할 것도 없고 《가쿠레미노》도 재미있지 않아. 오로지 이 한 편만이…….
아아, 광기로다, 광기로다, 광기에 들었도다. 나는 애당초 미치지 못할 인간이니, 하는 수 없이 축음기가 되어 오는 20일 오전 9시에 문과대학 철학 교실에서 가부키 배우 흉내나 내며 진부하기 그지없는 허튼소리를 지껄일 예정이네. 축음기가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또 마지막도 아닐 테지만, 다섯 척이 넘는 대장부로서 한심하기 짝이 없군. 이 무슨 업보란 말인가. 자진해서 기계로 전락하다니. 앞날도 걱정스럽고 오랜 희망도 연기처럼 사라졌네. 가래나무 활처럼 팽팽하던 마음의 활시위도 끊어져 공명이라는 과녁을 맞힐 생각조차 사라졌으니, 이렇게 된 이상 바보, 천치 소리를 들으며 일생을 보내고 축음기가 되어 서양 선비들에게 희롱당하는 것 또한 재미라면 재미일 터.
그럼 안녕히.
20일 밤다이라노 데코보코29
우시고메구 기쿠이정 1번지
1891년 11월 7일
조키 님
자네가 《메이지 호걸 이야기》30에다 〈기절론気節論〉까지 덧붙여 보내주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놀랐다네. 아무튼 감사히 잘 받았네. 편지는 세 번을 읽고 호걸 이야기는 흥미에 이끌려 단숨에 읽어 내렸다네. 그때 약간 감기 기운이 돌아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었는데, 마침 반나절 시간 때울 거리를 줘서 고맙군.
호걸 이야기는 자네 말대로 얼마 전부터 《요미우리신문》에서 가끔 읽었다네. 그때부터 이게 과연 호걸이 할 만한 행동인지 의문스러운 부분이 적잖이 있었지. 흠모는 고사하고, 개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멀리 달아나고 싶게 만드는 부분도 있더군. 어제 흥미에 이끌려 끝까지 읽은 건 감탄하거나 경복敬服해서가 아니라네. 작중 인물의 과격하고 극단적인 행위가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수준이라, 어쩐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골계극을 보는 기분으로 쭉 훑은 것이지. 책을 덮은 후 이 인물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뒤흔들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았는데, 나를 고상함이나 우아함 같은 방향으로 이끈 부분은 전혀 없더군. 개중에는 너무 괴이한 나머지 토악질이 올라오는 대목까지 있었네. 그렇다고 해서 작중 인물 모두가 기절 없는 ‘나태한’ 치들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라네. 자네 말처럼 늠름한 풍채를 가진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한 점 기개도 찾아볼 수 없는 무리도 섞여 있지. 애당초 기절이라는 것이 스스로 하나의 식견을 갖추어 이를 조차전패造次顚沛의 상황에도 응용하면서 평생 동안 관철해나가는 것을 이른다고 하면, 기절의 있고 없음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하네. 그렇지 않고서는 전체적으로 그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의 주의主義와 일치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보네. 이 작품에 기록된 것은 그저 호걸(세속적 호걸)의 언행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니, 그 사람의 기절을 판단할 재료로 삼기 어렵지 않나 싶네만. 우선 작품 속 사건을 크게 분류해보니 첫째로 순간적인 기지, 둘째로 충동적인 격정이 많고, 그 외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나올법한 실수담이나 평범한 잡담뿐이더군. 우연히 그 인물이 후일 명성을 떨치게 되자 한심한 호사가들이 일일이 그 인생을 파헤쳐, 이 또한 호걸의 행위였노라, 하고 사람들에게 떠들어댄 듯한 부분까지 보일 정도였네. 그 실수담이 호걸의 전기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호걸의 명성이 이 실수담을 유명하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지. 나아가 더 파고들면 다른 종류도 있는데, 그중에는 흠모까진 아니어도 대단한 행동이라고 평가할 만한 부분이 드문드문 샛별처럼 보이기는 하더군. 그래도 우선은 위와 같이 세 종류로 크게 분류해보았네. 순간적 기지는 그 사람의 천성에 따른 것이라, 기지가 있으니 기절이 있다거나 기지가 없으니 기절이 없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을 걸세. 아니, 기절을 존중하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 일부러 기지를 억제하기도 하지. 그 사람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정해진 어떤 주의이고 기지란 순간적으로 아무렇게나 발휘하는, 즉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편의일세. 만일 기지가 자신의 주의와 상반한다면, 편의를 위해 그런 방편을 사용해서는 안 되네. 설령 기지가 자신의 기절을 관철하는 데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해도, 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이를 절대 사용할 수 없을 걸세. 둘째로 일시적으로 격양해서 감정적으로 행하는 일이 기절의 표출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군. 기절이란 앞서 말했듯(내 생각으로는) 일정하고 단호한 주의를 품고 신중히 행동하는 것이고,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이 기준을 모든 곳에 응용하고자 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네. 만일 일시적 감정이 이 기준과 부합한다면 갑작스러운 행위로 기절을 발휘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지만, 감정이란 것이 늘 지혜나 식견과 함께하지는 않을뿐더러 종종 엇갈려 서로 어그러지기도 한다는 건 자네도 잘 알 터, 그러니 이 점으로도 기절의 유무는 알기 힘든 걸세. 세 번째로 실수담(일화도 마찬가지)은 우리 삶 속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네. 소생은 남들의 배로 실수를 많이 하니, 만약 이걸로 기절이 표출된다면 아주 근사한 왕관을 받아야 할 걸세. 아무튼 실수담은 호걸에게만 많은 것이 아니고 또한 기절과도 관련이 없어. 이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러니 위의 세 가지 모두 작중 인물의 기개 유무를 판단할 재료로 삼기는 좀 힘들지 않겠는가? 한발 양보해서 몇몇 말이나 행동 속에 호걸의 기개와 도량이 선명히 드러난다손 치더라도, 작중 인물이 모두 똑같은 거푸집 속에서 단련된 것은 아니라네. 갑의 행동은 을의 행동과 충돌하고 병이 하는 말은 정이 하는 말과 다른 법. 어떤 이는 소금을 뒤집어써도 인내하고 어떤 이는 스승의 훈계를 견디지 못해 윗사람을 공격하지. 한쪽이 기절이 있다면 다른 한쪽은 기개가 없는 것이 되고, 한쪽이 풍골風骨을 지녔다면 다른 한쪽은 그저 시시한 놈일세. 자네는 어찌하여 능릉稜稜이라는 글자를 쓰고 그 속의 우열을 보지 못하는가. 자네의 뜻은 행위 뒷면의 정신을 보라는 것이겠지만, 정신을 본다 해도 두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같지 않다네. 한 사람은 인내를 중요시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 뜻대로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떳떳하다 여기지. 인내하는 쪽에게 기절이 있다고 하면 뜻대로 드러내는 쪽은 기절이 없는 게 되겠지. 만일 양쪽 다 기절을 갖췄다 해도, 고관이라는 자리에 올라앉아 주구장창 졸기만 하는 건 망령이 든 게지 기절이 아니야. 결투 도전을 받고도 응하지 않고 술집으로 꾀어내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지(옛 무사도 정신에 따르자면) 기절이 아닐세. 설령 기절이 사소한 언행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작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기절이 느껴진다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군. 자네가 만일 이러한 논의에 동의할 수 없다면, 방법을 바꾸어 이 기절이라는 게 무엇인지 총체적으로 설명해보겠네. 알다시피 인간의 능력은 지智, 정情, 의意,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기절 또한 인간 능력의 일부이니 이 세 가지 중 어딘가에 속하겠지. 먼저 기절이 정에 속하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네. 순간적 분노로 격앙하여 다른 사람에게 화를 퍼붓는 것이 기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그렇다면 오래 묵은 분노로 격앙하여 평소 사람들에게 화를 퍼붓는 것이 기절인가? 이 또한 기절은 아닐 걸세. 따라서 순간적 감정이든 오래 묵은 감정이든, 감정에 의한 행위는 기절이라고 할 수 없어. 기절이 감정에 속하지 않는다면 이를 의지의 작용으로 보아야 할까? 공격할 명분도, 공격하려는 마음도 없이 갑자기 주먹을 쥐고 사람을 친다면 이건 기절인가? 마찬가지로 공격할 명분도, 공격하려는 마음도 없이 일상적으로 주먹을 들어 사람을 친다면 이 또한 기절은 아닐세. 그러니 순간적 의지이든 오래 묵은 의지이든, 의지로 인한 것은 기절이라고 할 수 없어. 의지에도 속하지 않고 감정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기절은 지의 범위에 속해야 하지. 부모에게 효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효도를 하는 것, 이것은 기절일세. 주군에게 충성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충성을 바치는 것, 이것은 기절일세.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을 이유가 있어 퍼붓고, 공격할 이유가 있어 공격한다면 이것 또한 기절이지. 하지만 일시적 도리를 위한 행위는 일시적 기절을 보여줄 뿐이고, 작은 식견을 바탕으로 이를 행한다면 이는 작은 식견을 품은 기절에 지나지 않네. 일시적인 기절이나 작은 식견을 바탕으로 한 기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세.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적 식견을 품은,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기절이라네. 서적을 보아도 어느 한 면에는 그 면에 해당하는 주의와 글자가 있고, 한 편에는 그 한 편에 해당하는 주의와 글자가 있으며, 한 권에는 한 권을 관통하는 주의와 글자가 있네. 한 면 속 주의, 한 편 속 글자는 일시적 기절, 작은 식견일 뿐이라네. 50년 긴 인생의 크나큰 주의는 결코 한 장이나 한 편 속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말하는 기절은 정이나 의에 속하지 않고 지에 속하는 것이네. 그리고 크나큰 기절은 인생을 아우르는 크나큰 식견에 속하지. 자네가 만약 기절은 정이나 의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네. 다만 견해의 다름을 슬퍼할 뿐. 자네가 만약 기절은 작은 식견을 순간적으로 행하는 것이라 한다면 또한 할 말이 없어. 견해의 다름을 더더욱 슬퍼할 뿐.
소생은 대형이 다른 어떤 지인보다 더 뚜렷한 식견과 자기 주관을 가졌음을 믿고, 또 그에 따라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키를 잡는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네. 그렇게 믿는 지기가 이처럼 어린아이나 등쳐먹는 소책자를 기절의 본보기 삼으라며 굳이 보내주니 도무지 그 의중을 모르겠군. 소생 비록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인생에 관한 굳건한 주관 하나쯤은 있다네. 내가 이 나이에도 늘 시를 읊고 책을 읽는 것도 읽으면 읽을수록, 읊으면 읊을수록 이 주관이 자연스럽게 발달하여 장대해지기 때문이지. 쓸데없이 문장을 다듬는 하찮은 재주에 집착하여 한 글자, 한 구절 좋고 나쁨을 논하는 일도 유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결국 소생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하네. 그렇다고 해서 내 식견이 절대적이고 훌륭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세. 혹 나의 주의가 비천하지는 않은지 대형의 고견을 들어 어리석은 부분을 고칠 수도 있고 선현이 남긴 글로 이를 계발할 수도 있는데, 왜 구태여 힘들게 이 하찮고 속된 책을 쓰겠는가. 자네는 이 책을 읽고 일본 남성의 구역 밖으로 추방당해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오랑캐 무리에 속하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지. 하지만 자네가 오랑캐라 여기며 탐욕스럽기 그지없다 하는 무리가 내게는 인생의 대사상을 가르쳐준다네. 내게 만일 한 점 절조가 있다면, 그 절조의 절반은 격설鴃舌의 책 속에서 나와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네. 이 머릿속 저울로 이 책의 무게를 가늠해본 바, 추호와 같이 가볍더군. 도대체 왜 이 책을 내게 권한 것인가? 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