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미셸 앙리Michel Henry, 1922~2002
프랑스 현상학자 중 가장 근본적이라고 불리는 미셸 앙리의 현상학은 ‘물질 현상학’ 혹은 ‘삶의 현상학’이라 불린다. 그의 현상학은 프랑스 내 현상학의 흐름 안에서 사르트르와 특히 메를로-퐁티의 ‘세계의 현상학’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면서 레비나스, 데리다와 함께 ‘세계 밖의 현상학’으로 구분된다. 그는 또한 소설 세 권을 발표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는 『현시의 본질』(1963),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1965), 『마르크스』(1976), 『정 신 분석의 계보학: 읽어버린 기원』(1985), 『야만』(1987),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 칸딘스키에 대하여』(1988), 『물질 현상학』(1990),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재난의 이론』(1990), 『내가 진리다: 기독철학을 위하여』(1996), 『육화, 살의 철학』(2000), 『그리스도의 말』(2002) 등이 있고, 유고집으로는 네 권으로 된 『삶의 철학』(2003~2004)이 있으며, 그의 대담들과 강연들을 모은 『자기-증여. 대담과 강연들』(2004), 『대담 들』(2005)이 있다. 대표적인 소설로는 『사랑, 감은 눈』(1976)이 있으며, 이 소설은 그해에 르노도상을 받았다.
옮긴이
박영옥
연세대학교 철학과 학사, 석사(1992), 박사학위 (1995)를 취득했다.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개인 블로그 ‘모네의 정원- 하양 위에 하양’에서 프랑스 현상학자 레비나스, 데리다, 미셸 앙리, 블랑쇼를 중심으로 프랑스 ‘물질 현상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에 전념하고 있다.
Incarna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 by Michel Henry
Copyright : ⓒ Éditions du Seuil, 2000.
Korean translations copyrights ⓒ Jaeum&Moeu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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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Éditions du Seuil through Shinwon Agency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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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이 책의 저본은 Michel Henry, Incarna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 Paris: Éditions du Seuil, 2000이다.
• 진한 글씨로 강조한 부분은 모두 지은이의 것이다.
육화는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련의 문제들의 중심에 자리한다. 육화는 그 말의 첫 번째 의미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관계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육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아주 일반적인 고찰은 이미 우리를 아주 어려운 문제 앞에 놓는다. 육화된 존재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이 신체1를 가진다는 것이다. 다만 우주 전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철학자에 의해, 아니 거의 모든 학자에 의해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견해에 의하면 물체들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생명체에 속한 이 신체는 화학과 생물학의 기반으로 사용되는 양자물리학에서의 물체와 동일한가? 우리 시대, 정확히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에도,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어떤 심연에 의해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우주를 덮고 있는 물체들과 인간처럼 ‘육화된’ 존재로서의 신체가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심연을 밝히기 위해 우선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들을 우리의 탐구의 장에서 제외하자. 이런 결정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선택하기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을 말하기로 결정하는 방법론적인 선택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각 그 남자, 그 여자는 자기 실존의 매 순간 자신의 고유한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서 고통을 느끼거나 여름에 시원한 음료수에서 쾌감을 느끼거나 얼굴을 스치는 가벼운 바람에 쾌적함을 느낀다. 반면에 단세포 생물, 새우, 곤충 등이 자신의 동물적 신체와 가지는 관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질서에 속한다. 몇몇 사상가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인간과 다른 이 생명체들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일종의 컴퓨터처럼 간주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신체를 좀 더 정교화되고 발전된 ‘신세대’의 컴퓨터 정도로 파악하는 사유는 지상에 점점 널리 퍼지고 있으나, 이런 사유는 심대한 반대에 직면한다.
심연이 파이는 곳은 바로 여기다. 우리가 물질적 우주 안에서 발견하는 것들과 유사한 타성적인 신체—혹은 우리가 이 물체에서 뽑아낸 물질적 과정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조직하고 조합해서 구성할 수 있는 신체—이런 신체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며 아무것도 겪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를 느끼지도 자기를 겪지도 자기를 사랑하지도 자기를 욕망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을 느끼지도 겪지도 사랑하지도 욕망하지도 않는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의하면 책상은 그것이 접하고 있는 벽을 ‘만지지’ 않는다. 우리 신체의 고유성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옆에 있는 대상들 하나하나를 느낀다. 우리의 신체는 대상들의 성질을 지각하고, 그 색깔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바닥의 단단함을 발로 느끼고, 천의 부드러움을 손으로 감지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성질을 느끼고, 우리의 신체를 사방에서 짓누르는 세계를 몸으로 겪는 것은 우리의 신체가 우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서 쏟는 노력과 고통 안에서, 또 물과 바람의 신선함 안에서 느끼는 쾌감의 인상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느끼고 견디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가 방금 구분한 두 신체—한편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 다른 한편으로는 길가의 돌멩이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미소한 원자들 사이의 차이가 문제인 우주의 타성적 물체와 같은 신체—의 차이를 고유한 용어로 확정한다. 우리는 첫 번째 의미로 신체를 살chair이라고 부를 것이며, 신체corps라는 단어의 사용은 두 번째 의미에 한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살은 그것 밖에 존재하는 다른 신체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만져질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물질적 우주의 타성적 신체에게는 원리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살의 명시화는 우리 탐구의 최우선적인 주제를 형성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인간의, 우리만의 독특한 조건인 ‘육화된 존재들’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조건, 즉 ‘신체를 가진다’는 사실은 육화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육화는 어떤 신체를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으며, 자신을 일종의 ‘신체적 존재’로서 발견하고, 우주의 부분을 이루고 그것과 같은 성질을 부여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의 이름으로 자신을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육화는 ‘살을 가진다’는 사실에, 더 나아가 ‘살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육화된 존재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겪지 못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도 다른 사물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타성적인 신체가 아니다. 육화된 존재들은 욕망과 두려움을 거쳐서 고통을 겪는 존재이며, 우리의 살과 연결된 그것의 실체의 구성 요소들인 모든 인상을 느낀다. 따라서 인상적인 실체는 그가 느끼고 견디는 것과 더불어시작하고 끝난다.
타성적 신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의해 정의되는 살은 따라서 이런 신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신체에 정확히 반대된다. 살과 타성적 신체는 느낄 수 있는 것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대립된다. 하나는 자기에 대한 향유로, 다른 하나는 맹목적이고 불투명하고 타성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차이는 아주 근본적이고 표면상 아주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차이를 진정으로 사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어렵고, 다시 말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두 항 사이에서 세워지고, 그중 하나는 전적으로 우리의 파악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만약 살이 우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며 고통과 기쁨처럼 쉼 없이 우리를 촉발하는 이 다양한 인상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밀착되어 있는 한에서 우리의 살이 아주 쉽게 인식될 수 있다면, 그래서 각자는 자신의 살이 무엇인지 절대적이고 쉼 없는 앎에 의해서 잘 안다면—비록 각자가 이 앎을 개념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물질적인 자연의 타성적인 신체들에 대한 인식은 전적으로 전자와 다른 것으로, 이런 인식은 전적인 무지 안에서 길을 잃고 그 안에서 완수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양자물리학이 만난 기술적인 어려움이 아니다. 다시 말해 ‘측정’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놓인 장소 그 자체에서 매 측정이 불러일으키는 교란이거나 이 목적을 위해 선택한 기준의 비규정에 의해 생겨난 난점이 아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은 형이상학적인 최후의 아포리아2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물리학의 요소는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도달해야 하며, 이 궁극적인 줌이 없이는 전자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자의 충격으로 해석되는 영사막 위에서의 섬광과 우리의 살 안에 도래하는 빛의 감각은 이 살이 각인되는s’impressionne3 거기와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산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필수불가결한 참조 없이는, 물리학이 말하는 사물 혹은 ‘사물 그 자체’ 또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와 같은 것은 알려지지도 인식되지도 않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분석이 우리의 살의 분석과그 설명의 원리가 되는 것과 달리 어느 날 그것과정반대되는 것이 진실로 밝혀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살만이 이피할 수 없는 전제에 의해 규정된 한계들에서 우리에게 ‘신체’와 같은 것을 인식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앞에 그 전례가 없는 전복이 그려진다. 자신의 상처투성이의 살 안에서 모든 고통의 시련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불쌍한 ‘아주 작은’ 인간이 어쩌면 과학의 이상적인 전개에 의해 전지한 자리를 차지한 어떤 정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지도 모른다. 이런 과학의 전개를 위해 지난 세기에 우리에게 널리 퍼진 하나의 환상에 의하면 “과거처럼 미래는 우리 눈앞에 현재할 것이다.”
살과 신체에 대한, 그들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명시화는 우리에게 탐구의 두 번째 주제인,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육화’4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이것의 토대는 요한의 “말씀이 살이 되었다leVerbes’estfaitchair”(요한복음, 1:14)5라는 놀라운 진술에서 발견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놀라운 말은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의 창발 이후에 그것을 사유하고자 했던 모든 이들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바울의 첫 번째 반성, 복음주의자들의 반성, 전도사들과 그들의 전언, 교부들,6 이단자들, 반대자들, 공의회 등등 인류의 역사 안에서 아마도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 없는 이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전개 전체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 말이다. 철학과 신학의 얽힘이라는 이 결정적인 국면에서 발생한 수많은 지적 산물들이 고대의 많은 텍스트들처럼 상실되거나 파괴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말의 중요성은 숨길 수 없다. 그 중요성은 육화가 언급되는 이 말이 한편으로 이 말에 접근할 방법이 없음에도 이 말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 철학과 다르지 않은 자신들의 철학이 이 말과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기인한다.
개종자들, 유대인들, 그리스인들 등등 모든 종류의 이교도들을 포함해서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그들의 모든 지성을 바치고자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이 그리스인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리스적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요한의 이 신비한 말을 사유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한편으로 그리스적 로고스는 자신의 본질을 감각적인 세계와 그것이 속한 모든 것—동물성, 타성적인 물질—밖에서 전개하며, 이 본질을 지적 세계의 비시간적인 명상 안에서 모두 소진한다. 순수하게 지적인 세계에 대한 명상은 사물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원형을 제공하며, 서양의 사유를 지배하게 될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대립의 기원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그리스적 로고스의 개념과 그것이 가능적으로 가질 수 있는 육화의 이념과의 근본적인 양립 불가능성은 기독교 안에서 이 육화가 그리스인들이 구원에 부여했던 의미를 입자마자 그 절정에 이른다. 이 양립 불가능성은 사실 우리가 기독교의 교리dogma—기독교의 ‘경제’ 원리—에서 ‘핵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테제이다.
그리스적 사유는 그럴듯한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앞에 가능한 구원의 왕도를 열었다. 이 사유에 의하면 인간은 로고스를 갖춘 동물이다. 동물성에 의해, 즉 그의 자연적인 신체에 의해 인간은 감각적인 것에 속하며, 그 자체 변화에 종속된 것으로 소멸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런데 로고스를 갖추고 사물들의 지적인 원형과 이 원형을 통해 사물들을 밝히는 절대의 빛을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은 또한 영혼을 가지며, 아니 차라리 “그는 자신의 영혼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Platon, Alcibiade, 38c) 존재이다. 영원한 지성noûs과 결합하기 위해 그리고 지성과 함께 지적인 것에 대한 명상 안으로 침잠하기 위해 영혼은 감각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이로부터 영혼은 이 지성처럼 영원해질 것이다. 플라톤적인 기원에 대한 이 도식은 영지주의gnose의 도식으로 모든 그리스인에게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구원을 신체 안에 놓는 기독교가 있다.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변화의 희생물이며 죄의 자리이며 감각적 성향을 지닌 기관이며 모든 유혹과 모든 우상의 희생물인 물질적이고 부패하는 이 신체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 폭소를 유발했던 이 이상한 구원의 경제에 대한 분석을 그것에 대한 방법들을 획득하는 정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산출할 것이다.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바울이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의 불멸이 신체의 부활에 의존한다고 설명하고자 했을 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관중들은 “훗날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겠다!”(사도행전, 17:32)라고 말하면서 그를 비웃으며 자리를 떠난다.
그의 주장만큼 놀라운 것은 바울에게 즉각적이고 남김 없는 동의를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들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 그의 주장에서 기독교의 운명을 시험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역설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한 ‘기독교인’이었던 유대인들은 유대적 문명을 가진 다른 모든 이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과 신체의 그리스적 이원론에 공감하지 않는다. 유대교 안에서 인간은 두 실체로 구분되지 않으며 인간이 그것들의 합의 결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그런 것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어떤 위계질서도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속성들을 가진, 하지만 같은 조건을 규정하는 통합된 실재이다. 이것은 어떤 믿을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법의 엄격한 명령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살로부터 나오는 것, 예를 들어 부성과 모성은 유대적 인간에게 인간의 가장 지고한 욕망을 완성하는 것이다.
유대교와 새로운 종교(아직 비밀스런 이교 집단이었던 시절) 사이에 존재하는 살에 대한 개념화의 상대적인 동일성은 새로운 종교의 나타남과 더불어 단절된다. 비극적인 투쟁의 모습을 가진 이 결별의 동기는 두 가지다. 우선 유대교는 신과 그의 창조로 이뤄진다. 신이 자기 밖에 세계를 창조했음에도 신은 이 세계로부터 그리고 이 세계의 물질로부터 끌어낸 인간과 분리된다. 헬레니즘의 침투 이전에 유대교는 지상의 신체라는 이념과 연관해서 비참하고 죽음에 이르는 인간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신의 무상의 행위, 그의 전능한 의지만이 그를 섬기는 자들을 죽음의 세계로부터 구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허락한다. 따라서 한 그리스인이 신체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한 유대인이 부활을 믿는 것(많은 이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은 어려웠다. 지상의 진흙으로 빚어진 지상의 피조물은 그의 원죄에 의한 것만큼 그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네가 먼지라는 것을 기억하라.”
유대교와 초기 교회의 결별의 두 번째 동기는 육화와 연관된다. 이스라엘의 저 보이지 않고 한없이 먼 신, 항상 구름 뒤에 혹은 잡목 숲 뒤에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우리가 그의 목소리만(누구의 목소리인가? 또 그것은 목소리인가?)을 듣는 신, 영원이 이제 세계 안에 와서 죄인과 노예들에게만 속했던 치욕스런 죽음의 고통을 따르기 위해 지상의 신체를 짊어진다. 여기에 결국 고대 이교의 사제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가 존재한다. 가장 미천한 인간이 어떻게 신이라고 주장하는가! 바로 여기에 죽음을 선고 받을 만한 신성모독이 있다.
유대인의 거부—성전의 사제들의 거부, 사제들, 사두가이인들, 바리사이인들의 거부—가 (그중 몇몇의 은밀한 개종이 있는데도,살을 인간의 유기적인 전체성으로 간주하는 그들의 사유가 있는데도) 결국 이원론으로부터 나온 그리스인의 부인만큼 강렬하다면 이때 우리는 우리가 획득한 최초의 명백한 사실, 즉 모든 개종자, 유대인, 그리스인 그리고 이교도들이 말씀의 육화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놓았던 무조건적인 믿음의 놀라운 성격caractère으로 다시 보내진다.
성찬을 둘러싸고 모인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삶의 실체를 구성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육화가 특수한 지적인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비록 ‘인간들 사이의 전쟁’—특히 ‘유대인들’과 이어서 로마인들에 의해 가해진 끔찍한 박해의 연속—이 ‘정신적 투쟁’을 동반하기를 그치지 않았음에도 성찬을 둘러싸고 모인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삶의 실체를 구성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육화가 특수한 지적인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특히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던 교부들이 이 반성에 전념했다. 우리는 이미 교부들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구원의 조건으로서 신이 인간의 필멸의 신체 안에 도래하는 기독교의 역설을 감당하면서 두 전선에서, 즉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 대항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인들에 대항해서 싸워야 했는지를 이해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에 대항한 저스틴과 랍비 트리폰과의 대담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인간”7 안에 자신들의 희망을 놓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신의 초월성은 궁극적으로 신의 육화를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야훼는 질투의 신이다. “나는 존재하는 바의 것이다”라고 하듯이 그 신의 신적 본질은 질투이고 존재하고자 하는 질투의 힘으로 그 안에서만 존재하며 누구하고도 존재를 나누지 않는다. 이때 인간이 신이 된다는 주장은 부조리하다. 유대인의 유일신론에는 여지가 없다. 인간에 대한 또 그들의 우상에 대한, 예를 들어 여자·돈·권력·이교의 신에 대한—결국 숭배의 대상으로서 야훼를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이스라엘의 신의 질투는 바로 이 최초의 존재론적인 질투, 즉 절대 질투의 결과일 뿐이다. 사실 여러 신 중의 하나unDieuaupluriel—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라는 표현은 이런 존재의 사유 안에서는 생각될 수 없다. 유대적 사유 안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존재의 힘forced’être을 자신 안에서만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부터만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어떻게 (13세기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도래 이전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몇몇 중요한 공의회들이 모든 종류의 존재론—특히 그리스에서 만개한 존재론—을 다만 그 언어만을 보전하면서 은밀히 포기하는지를 볼 것이다. 이것은 육화라는 근본적인 직관을 수호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혹은 그것을 위한 결정적인 진보였다. 따라서 헬레니즘은 기독교 철학이 점점 자신의 고유한 대상에 적합해짐에 따라서 사라지거나, 다만 이차적인 자리만을 차지하게 된다. 베르나르 세스보우에의 니케아 공의회에 대한 언급에 따르면, 언어의 헬레니즘화는 신앙8과, 하지만 우선 사유 그 자체의 탈-헬레니즘화와 짝을 이룬다.
이것은 교부들과 중요한 공의회들의 한 국면으로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유일하고 이상적인 국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의 내용은 대립된 전제들의 내적 전개로부터 나온다. 기독교가 히브리적 기원과 환경을 벗어나자마자 기독교적 보편주의의 욕망은 문화적으로 지적으로 그리스적 문화와 대립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반대되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 신의 동일화의 조건으로서 육화 안에서그리스도의 신체의 실재를 그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 가장 비-그리스적인 진리의 지성이 그리스적 개념들에 요구된다. 이것은 바로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한 번 이상 겪은 모순이다.
초대교회에서 포교는 이런 모순을 이해시키려는 동기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자신의 지고한 진리를 위해 일관된 개념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진정한 철학들—그리스의 철학들—옆에서 사상가로서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세운 지적인 질서의 빈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는 사유의 질서가 아니라는것이다. 초대교회의 천재성—그것이 그리스적이든 아니든—은 기독교의 진리, 가장 당혹스런 진리인 육화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직관을 통해 조금씩 진리의 길을 열었던 놀라운 사상적인 국면의 성격이다. 진정으로 말해서 그것은 긍정—사유의 긍정 혹은 판단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모든 사유를 회피하는 것 안에서, 신체와 살 안에서의 긍정이다.
1세기 말부터 수세기를 거쳐서 또 연속된 공의회를 거쳐서 교부들이 악착같이 시도하고 계속 추진한 투쟁은 놀랍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그런데 또한 놀라운 혹은 갑작스럽게 서광처럼 떠오른 직관의 도움으로—그들이 이끈 투쟁은 그리스도는 우리와 유사한 실재적 신체, 실재적 살을 가졌으며 그 안에서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지하고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적 사유에 대한 투쟁,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과 신체에 대한 사유의 평가 절하에 대항한 것이었다.9
그런데 이 비판은 과거로 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적 문화의 유산과 그것의 재출현, 그것의 교묘한 대체들을 갑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신의 말씀의 지상 도래를 받아들이면서도 진정한 육화의 이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 혐오감을 가지고 알아차리기 전에 그것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었다. 살을 취함이 없이는 신체 안에—그것이 어떤 형식이든지 간에—도래함이 없이는, 육화라는 것이 생각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살은 어쨌든 허울뿐인 살일 것이다. 이런 살의 물질은 인간이 만들어졌던 그 물질이 아니라 하늘의 혹은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물질이다. 그리스도의 살은 차라리 영혼, 살/영혼 혹은 영혼/살이다.
그리스적 사유의 이 모든 잔해—혹은 더 오래된 편견—는 다양한 영지주의로 기울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은 한순간 다시 단단한 집체集體로, 즉 이교로 재구성된다. 이교는 그것이 쓰고 있는 가면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출로부터 온 것이며 거짓된 구성을 통해서 진리, 즉 육화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중심 주장을 거부하는 한에서 그것은 이교이다. 이레네오10의 『이단들에 반대해서 거짓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박』, 또 터툴리안11의 『그리스도의 살, 살의 부활』 그리고 아타나시우스12의 『말씀의 육화, 아리우스파에 반대해서』 등에서 보듯이 영지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말씀이 살이 되었다”는 육화의 정언명법 안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의 발언이 어떻게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는 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살로 왔다고 선포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들은 신에 속할 것입니다”(요한 1서, 4:1~2)13라고 말한다.
신의 말씀이 살이 되는 무조건적인 긍정이 지니고 있는 의미만을 불러내야 한다. 요한 1서에서만이 아니라 신약 전체와 경전으로 평가되는 모든 글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근거 짓는 의미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은 가능한가? 왜, 어떻게 죽음의 살로 옴이 영원성의 저당일 수 있는가?
이 역설에도 여러 이유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함축들이 여기에, 기독교의 ‘핵’인 본질적인 이 지점에 모인다. 뒤에서 더 자세히 그것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기 전에 여기서 아주 간단히 그 이유들을 열거해보자.
말씀의 육화는 기독교 안에서 말씀이 인간이 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말해진다. 이것은 분명 최초의 조건, 교부들에 의해 확인되는 것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것과 닮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주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리스도의 살의 실재와 그와 우리의 동일성을 지우고 최소화하고 왜곡하고자 하는 모든 이단에 대한 온갖 종류의 비판의 지반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살을 가지지 않거나 가진다고 해도 우리의 것과 다른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마르키온14과 발렌티누스15와 아펠Apelle의 후계자들을 버리고, 반대로 터툴리안은 “살을 가짐이 없이는 그리스도는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그의 살은 우리의 것과 닮은 살”16이며 그 살은 인간의 살과 다른 것으로 구성되어질 수 없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다만 말씀의 육화, 우리와 같은 살 안에서 말씀이 살이 된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인간의 조건 안으로 도래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말씀이 인간의 조건을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살로서의 인간의 정의에 대한 요한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확언으로부터 다른 주장들이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의 말은 말씀이 인간의 조건을 취하고 그리고 결국 말씀은 인간의 여러 다른 속성들 중에서 살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한의 말은 말씀이 “살이 되었다”고 그리고 진실로 살이 되기 위해 이 살 안에서, 이 살에 의해 말씀은 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정의는 그리스적 관점에 대립된다는 것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살은 그리스에서 동물성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동물과의 종적 차이 안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 그러한 한에서 이 살에 의미를 형성하고 말을 할 수 있고 이념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요약하면 동물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지 않은 로고스가 첨가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적 개념화와 대결을 가져오는 것은 다만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인간의 조건이 살 안에서 그리고 살에 의해서만 도래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전망—때문이 아니다. 또한 로고스에 대한 두 해석은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처음부터 서로 대립한다. 그리스의 로고스가 살이 되는 것은 스스로 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파괴하고 인간의 조건인 동물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사유의 세계가 전적으로 전복되는 이 중요한 지점은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살로서 인간의 정의와 더불어 새로운 함축이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된다. 말씀의 육화가 인간의 조건 위에 도래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말씀이 신의 말씀인 한에서 즉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정신적인 면plan에서 세워지는 한에서, 즉 그 관계가 ‘영혼’, ‘심리’, ‘의식’에서 또 그 자체 이성이고 정신인 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이성 혹은 정신에서 전개되는 한에서 그와 같은 관계는 생각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살 안에서 끌어낸다면 그것은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신이 명백히 로고스와 동일한 것일 때 이 살을 가진 인간과 신 사이의 내적 관계의 가능성은 어디에 자리하는가? 요한의 말 한가운데에서 신과 인간(혹은 인간과 신)사이의 관계의 정의로서 정립된 이 이중적인 정의는 헬레니즘 안에서 설립된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 사이의 분리와 만나지 않는가?
우리가 이 요한의 말을 더 주의해서 검토한다면 그 어려움은 현기증 날 정도로 점점 커지고, 우리는 신과 인간의 일반적인 관계가 전적으로 새로운 형식 아래에서 말씀과 살 사이의 관계로 제시될 뿐 아니라 이 역설적인 관계는 하나이며 동일한 인물, 즉그리스도 안에 자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 말씀과 살의 관계가 되는 이 내면화는 바로 그리스도의 존재 그 자체로, 이 관계를 구성하는 두 항의 대면과 그들의 극단적인 대립적 정립을 가지고 그 내적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이 살이 되는 말씀의 형식에서, 그것도 하나이며 동일한 인물 안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질적인 두 실체가 결합하는 하나의 실존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가?
이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전념해야 할 사유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주요한 모든 공의회의 주제였을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신적이며 인간적인 서로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본성을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실존 안에 결합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심대하게 반성했을 것이다. ‘인물personne’이라는 말 자체는 그 당시 교부들이 그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실재적인 실존, 즉 자기 안에 두 본성을 결합한 인간이면서 신으로 ‘하나이며 동일한’ 자로 머무는 실재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단독적이고 현실적인 실존을 긍정하기 위해 유지한 용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리스적 용어(‘인물personne’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prosopon’에서 온 말로 라틴어에서 ‘persona’, 즉 우리가 잘 알듯이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지시한다)를 불러오는 것은 이 말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적 개념화에 대한 의존과 그것을 거쳐서 그리스적 존재론에 대한 의존은 그리스도의 본성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됨에 따라서 증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부들에게 문제가 됐던 단어인 ‘인물’ 아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본성이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실적 실존과 그에 대한 교의적인 긍정을 넘어서 공의회가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은 바로 이 실존의 내적 가능성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그리스 문화의 지평 안에서 그 목적에 이를 수 있는가?
어쨌든 문제는 점점 더 명확한 방식으로 정립되었다. 두 본성의 결합은 그 둘의 속성들의 결합,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각각에 속한 일련의 속성들의 결합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신에 속하는 것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 속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니케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속성들의 자기화의 문제였으며 이 속성들이 그리스어로 말해지는 한에서 그리스어의 관용어들의 자기화의 문제였다. 어떻게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속성들을 자기화할 수 있는가? 또 인간으로서 신적인 속성들을 자기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두 계열의 속성들의 통일 혹은 단일성을 파악하는 것, 즉 그들의 평행론을 파악하는 것은 그의 신비로운 실존에 대한 설명에서 그 가치를 가진다. 예를 들어 신으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미래를 예견할 수 없다. 따라서 매번 신적 속성의 현전과 인간으로서 그것의 부재 혹은 그것의 한계를 짓는 것으로부터 일련의 선험적인 반명제가 정립된다. 신의 무한한 오성 그리고 “우리의 유한한 오성 그 자체”라고 칸트는 말할 것이다. 한편에는 비시간적인 신의 ‘고통을 느낄 수 없음l’impassibilité’, 즉 역사의 고뇌와 생멸에 접근할 수 없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음lapassibilité’, 허약함, 상처받을 수 있음, 배고픔, 갈증, 고통, 그리스도의 끔찍한 수난과 그의 죽음이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육화와 우리의 사유의 길이 교차한다. 인간이 그리스의 신들처럼 이성에 의해 정의되는 한에서 인간이 신의 속성을 자기화하는 능력,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가장 탁월한 부분’에 의해 신에 참여하는 능력은 그 원리 자체 안에서 정립된다. 어쨌든 그 속성 가운데 몇몇 속성 간의 소통은 잠재적인 선험성을 가진다. 그것은 인간적 노력을 통해 신을 자기화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런데 살을 가진 인간의 정의를 가지고서는 이 계열의 속성들은 서로 환원 불가능하게 되며 그 거리는 넘을 수 없이 멀어진다. 우리는 원형archétype에 대한 명상 안에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침잠하던 지성이 그 빛에 의해 순수한 수정같이 빛나던 이 지성이 갑자기 피곤해질 수도, 그래서 베개를 청할 수도 또 한 친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수도 또 잠시 하던 요리를 여동생에게 맡기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옆에 앉은 한 여자의 빛나는 통찰력에 감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더 극단적으로 우리는 최초의-원형인archi-archétypal 이자 이 본질 너머l’au-delàdel’essence인 신이 산파와 의사들이 다루는 저 물컹물컹한 내장 안에서 ‘더러운 핏덩어리’ 안에서 태어났다고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영지주의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입맛을 전혀 돋우지 못하는 이런 표상들이다. 터툴리안이 분개하면서 마르키온에게 행한 반박 안에서 그들을 대립시킨 것은 바로 이 표상들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이다. 터툴리안은 앞서 인용한 그의 책에서 “서론에서부터 탄생에 대한 너의 증오를 드러내더니, 지금은 뱃속의 생식기관들이 가지는 그 망측한 냄새와 핏덩어리와 양수에 대해서 떠벌리는구나. (…) 이 뱃속에 대해서 나날이 더더욱 괴물 같아지는 이 뱃속을 우리에게 계속 떠벌려라. (…) 애를 낳고 있는 여자의 정숙하지 않은 이 기관에 대해서 (…) 계속 떠벌려라”17라고 그의 분노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리스적 빛의 지평을 간직하는 한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 관계는 말씀과 천박하고 죽음이 선고된 탄생으로부터 나온 살의 관계가 된다!
사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교부처럼 터툴리안도 인간의 실재를 다만 인간의 살에 제한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의 살』의 앞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살에 대해서만 말할 것을 선언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적인 실체가 문제인 경우 모든 이들이 다 동의하기 때문이다.”18 여기서 터툴리안은 여전히 ‘그리스적’으로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체뿐 아니라 영혼을 가지며 우리는 여기서 인간을 이 두 실체의 결합으로 생각하는 데에 대한 어떤 비판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그의 『그리스도의 살』의 저변에 놓여 있는 전제일 뿐 아니라 명시적으로 여러 번 다시 다뤄지는 것이고 그의 사유 안에 지속하는 것이다.
다만 요한의 말에는 그런 것이 없다. 말씀이 ‘살이 되어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 현기증 나는 선언은 살로서 인간에 대한 정의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이 진술은 어떤 ‘정신적인 실체’, 그리스도의 ‘영혼’과 같은 것에 대한 어떤 암시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이어지는 진술들은 “그는 우리 가운데 계셨다”라는 이 정의를 반복하는 데에 한정된다. 말씀이 인간이 되고 우리의 살적 조건을 감당하면서 말씀이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공통의 존재를 설립하고 우리 안에 ‘거주’하는 것은 스스로 살이 되면서이다. 그런데 이 말의 살적 실존과 함께 신과 인간의 속성들 사이의 대립이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면 이때 이 대립은 그 안에 견딜 수 없는 긴장을 간직하지 않는가?
그런데 신적 속성들과 인간적 속성들의 결합의 가능성은 절대로 이론적인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모든 교부와 공의회는 이 구원에 대해서 그것의 구조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신의 인간-됨ledevenir-hommedeDieu은 인간의 신-됨ledevenir-Dieudel’homme을 근거 짓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특수하고 아주 탁월한 은총의 분배에 자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신격화déification에 자리한다. 인간이 자신 안에 영원한 삶인 신적인 삶을 지닐 때에만, 인간이 이 삶과 동일화될 때에만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있다. 신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에 의하면 말씀의 육화 안에 자리한다. 기독교적 인간이 신과 동일화될 수 있는 것은 말씀의 살과—그리스도의 신체copusChristi와—동일화되면서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가능성은 사유의 사변적인 면에서 긍정될 수 없으며, 실재의 면에서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살과 그리스도 살의 결합으로서 이것은앞서서, 말씀과 살의 단일성은 말씀이 우선 살이 되는 곳에서, 다시말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고 실현된다.
그리스도의 실존의 문제는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역사적인 실존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이 역사적 실존은 예수하고 관계한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진정으로 실존했는지 그가 말했다고 하는 것들을 그가 진정으로 말했는지 그가 단지 예언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우리가 기다린 메시아였는지를 아는 것이다. 누구도—무지한 자들이나 이단을 제외하고—그의 실존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실존의 문제는 예수라고 불리던 한 인간이 진정으로 실존했는지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자칭했는지(바로 이것때문에 그는 죽음을 선고받았다)를 아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엄격하게 철학적 관점에만 한정해서 제기하는 우리의 질문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즉 신의 인간-됨, 말씀의살-됨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누군가는 가능하며 최소한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여전히 철학적 관점에 머무는 한에서 말씀의 육화의 가능성으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실존이 단순한 가능성 이상인지를 묻는 것, 즉 그의 실존에 대한 질문은 이차적으로만 제기된다. 그런데 사유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가능성은 사실 절대로 실존이 아니다. 나는 나의 바지 주머니에 1탈레르가 있다고 상상하거나 가정하거나 말하거나 긍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의 실존은 나의 사유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육화된 말씀의 실존으로서 그리스도의 실존은 무한히 내가 그것에 대해서 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행하는 개념화를 초월한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의 실존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떻게 말씀으로서 그리고 살로서 하나이며 동일한 그리스도의 실존은 우리에게 이를 수 있으며 실재적으로 주어질 수 있으며 우리에게 드러날수 있는가?
구원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육화의 궁극적인 동기—말씀의 육화는말씀의 계시이며, 우리 가운데 말씀의 도래—는 우리 안에서 재발견된다. 따라서 우리가 신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신과의 접촉 안에서 구원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이 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 안에서 계시하는 것은 여기서 정확히 살의 사실이며, 살 그 자체가 계시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전적으로 새로우며 예기치 않았던 두 개의 질문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우선 살이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어야하는가? 그리고 계시가 자신을 살로서 완성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자신의 계시의 작업을 살 안에서 살에 의해서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어야하는가?
그런데 위의 질문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것은 다음의 것이다. 신학에 의하면 또한 통찰력 있는 철학적인 반성의 경우에 신의 말씀은 신의 계시와 엄격하게 말해서 신의 자기-계시l’auto-révélation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경우 말씀의 본질은 그 자체로 그자체 안에서 계시로서 파악된 살에 전혀 대립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같은 힘unmêmepouvoir19, 즉 하나의 같은 현시의 힘이 그 둘에 거주하는 한에서 비밀스런 친밀성이 그 둘을 결합할 것이다. 이 경우 요한의 말 안에서 진술된 이 핵심적인 진술은 덜 역설적으로 보일 것이다. 말씀의 작업œuvre, 즉 신의 계시를 완수하는 작업은 불투명하고 낯선 것으로서 살에 충돌하기보다는 살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 질문을 반성해보면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의미작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는 말씀이 인간에게 드러나기 위해 살을 취하는 것이다. 이때 계시, 즉 나타남은 살의 작업이며 계시는 살에서 맡겨진다. 다른 하나는 말씀 안에서 신의 계시는 말씀 그 자체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때 말씀이 자신에 고유하게 속한 힘을, 즉 말씀이 이미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완성한 계시를 살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세 번째 가설이 남는다. 살이 말씀의 계시가 되는 것은 말씀에서, 즉 살이 자신 안에서 가지는 말씀에서이다. 왜냐하면 이 계시 안에서 살을 취한 말씀은 살 안에서 그 자신의 것인 계시의 작업을 완성할 것이며 살은 그 자체 계시의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가설은 사제들에게서 여러 번 드러난다. 터툴리안, 아타나시우스, 오리겐20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게 나타나지만 이레네오에서도 말씀이 살 안에 도래하는 것은 신의 비가시적인 말씀이 인간에게 그들과 같은 객관적인 신체로 보이는 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해석된다. 가시적 신체 안에서 말씀이 가시적이 되는 것 그 자체는 그들에게 말씀의 계시의 원리일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화는 결국 아주 이상한 구성에 이른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가 비가시적인 말씀에 대한 직관의 토대를 그것의 신체적·외적 출현 위에 놓으려고 했는지를 볼 것이다.
어떻게 말씀이 가시적 신체에서 가시적이 되는 이런 주장—기독교의 주장—이 크게 두 가지의 어려움을 가진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첫 번째의 것은 만일 신의 말씀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과 같은 외양을 가진 신체를 취한다면,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신체와 같은 것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그 신체가 평범한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말씀의 신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말씀이 인간 사이에 그와 같은 신체의 모습으로 도래한다면, 그의 지상에서의 여행은 극복할 수 없는 은밀성incognito 안에서 전개될 것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어려움은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될 수 있지만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난점과 마찬가지로 필멸의 육체와의 결합 안에 자리하는 구원의 난점과 관계한다. 어떻게 이 필멸의 육체와의 결합은 불멸을 약속하는가? 어떻게 신체의 부활이 마치 남녀의 신체 결합과 같은 이런 종류의 결합으로부터 도래할 수 있는가? 아타나시우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도래하는 그리스도의 일상화를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실들과 행위들을 강조하기 위한 반대급부로 사용하면서 이러한 일상화를 극복하고자 한다. 인간 예수가 평범하면 할수록 비참하면 할수록 익명적으로 나타나면 날수록 이 외양은 어떤 사회적 차별도 없는 모든 ‘인간적 영광’에 더더욱 낯설 것이며, 어떤 인간도 한 번도 발음해본 적이 없는 그의 말들과 어떤 인간도 한 번도 완수해본 적이 없는 그의 행위들은 더더욱 명백하게 다른 인간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자로서 신에 의해서 보내진 메시아로 드러날 것이다.
두 번째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요한의 말 그 자체로부터 솟아난다. 왜냐하면 요한은 말씀이 신체를 취했다고, 말씀이 인간의 모습을 입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는 말씀이 “살이 되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이지 신체가 아니며 만약 살과 신체의 차이가 본질적인 접근으로부터 나타난다면 신체가 아니라 살이 기독교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육화된, 즉 신체를 가진 존재에서 육화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지성을 이끄는 인도의 끈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요한은 말씀이 이 살의 ‘모습’을 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이 “살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형상이나 모습을 띨 수 있는 것은 신체에 의해서일 뿐이다. 반면에 살에 관한 한, 더 엄격하게 말해서 육화인 살 안에 도래에 관한 한 요한의 ‘살이 되다’의 의미에서 ‘됨sefaire’만이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됨은 더 이상 ‘형상’, ‘모습’, ‘외양’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살이 되는 것은 그 자체 안에서 말씀의 본질과 실재 안에서이다.
기원 이래로 사물의 핵심에 감춰진 비밀이 문제일 때 이제 그 비밀의 일부분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 그런데 인간의 신체를 말씀에 의해 책임지는 것으로서 말씀의 육화가 비가시적이고 영원한 말씀의 존재에 이것의 이질적인 요소, 즉 분해가 이미 정해진 우리의 물질적인 신체를 덧붙이는 것으로 제시되는 한에서 우리는 어둠, 불가능성, 더 나아가 부조리 앞에 놓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살』의 첫 문장에서부터 터툴리안은 어떤 종류의 살이 그리스도의 살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특히 “그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우리와 같은 살이 문제인 경우 그는 이 살을 이 지상의 진흙으로 형성된살로 이해한다. 살은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신의 말씀에 첨가되는 것으로 말해지며 이런 사실은 결국 일련의 수수께끼로 남는다.
여기서 요한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말씀의 살은 지상의 진흙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말씀 그 자체로부터 온다. 말씀이 살이 되는 것은 그 말씀에 의해서이고 그 안에서이고 그에 의해서이다. 이제 우리는 요한의 주장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그의 주장을 우리의 것으로 할 것이다. 땅의 진흙에서는 신체만이 있지 어떤 살도 없다. 살과 같은어떤 것은 말씀으로부터만 도래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만 우리에게 도래한다.단지 그것에 의해서만 살의 모든 특질이 도래하고 설명된다.이 살은 항상 누군가의 것이며, 예를 들어 나의 것이라는이 소소한 사실, 그래서 살은 자신 안에그 안에 ‘자아’를 간직하며 자아는 절대로 그것과 분리되지않으며 자아는 자기 자신과 분리될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않는다.왜냐하면 살은 분자나 원자의 결합이 아니라 쾌와 고통으로 배고픔과갈증으로 욕망과 피로로 힘과 기쁨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분리될 수도분할될 수도 없다. 이 체험된 인상들의 어떤 것도 우리는 지금까지땅을 파서 발견한 적이 없으며 진흙 속을 파헤쳐서 발견한적도 없다.
우리는 이것들 하나하나는 각자 자신의 실체를 말씀으로부터만 끌어내며 그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의미, 개념, 표상 혹은 이미지 등이 형성되고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고 추론하는 그리스적 로고스에서가 아니라 더 오래된 말씀 안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세계 이전에, 그리고 어떤 세계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거기에서 요한이 “삶/생명의 말씀leVerbedeVie”21(요한 1서, 1)이라고 이해한 말씀은 각자에게 나의 것인 이 살 안에서 존재함의 취기醉氣 안에서처럼 고통 안에서 말한다.
요한복음의 독자는—그가 진술들이 흘러가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결합하도록 내버려두는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비록 역사상 처음으로 이곳에서 정식화되었음에도 각각의 놀라운 진술들은 다른 것들과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한순간도 장애물을 건너뛰고 부조리의 심연을 건너고, 아포리아의 벽에 부딪쳐서 으깨지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지성체l’intelligibilité22, 즉 세계와 우리 자신을 지각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일련의 추론’ 방식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지성체는 사유로부터 끌어내지는 것이며 보이는, 즉 시선 앞에서 전개되는 우주의 구성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로, 우리가 실질적으로 사물들을 볼 수 있는 한에서 그리고 ‘진정한’, ‘이성적인’, ‘명백한’이라고 말해지는 그 사물들의 총합을 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1장에서부터 사유의 방식들을 전복하는 새로운 종류의 지성체, 최초의-지성체Archi-intelligibilité가 솟아난다. 최초의-지성체는 세계가 가시적이 되는 계시와 다른 계시의 양태가 사유의 장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시하는 것은 이 세계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재들로 구성된다. 1장에서 나열되는 것들은 다음의 것들이다. 삶 안에 최초의-지성체가 자리하며 삶의 말씀 안에 삶 최초의-지성체가 완성되며 살 안에서 삶의 말씀은 살아 있는 우리 인간들 하나하나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와 근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것으로 전적으로 새롭게 진술된다. 즉 비가시적인인간이면서 동시에 살을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 더 정확히살로서 비가시적인 인간이다.
요한의 최초의-지성체는 또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필연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연결된 사유의 대상들의 연속적인 나열이 아니라 그것은 실재와 관계한다. 더 정확히 철학적인 용어를 따르면 절대적인 실재와, 종교적인 용어를 따르면 신과, 그리고 요한에 의하면 삶인 신과 관계한다.
산다는 것vivre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것s’éprouversoi-même이다. 삶의 본질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이 순수한 사실 안에 자리하며 반대로 ‘세계’의 물질23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이 삶의 본질을 결핍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순수한 ‘자기 시련l’épreuvedesoi’으로서 삶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로부터 신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가장 어려운것은 종종 가장 단순하다. 이것은 또한 가장 단순한 것이가장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처음부터 우리의 탐구, 정확히 우리가 말하는 최초의-지성체에 대한 직관을 우리가 가지는 것을 허락한다.
최초의-지성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 절대적인 삶laVieabsolue의 내적 운동에 속하며 자기-생성auto-engendrement의 과정이 완성되는 방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삶lavie은 자신의 것이며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삶이라는 조건에서 자기 안에 도래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낳는다. 그런데 어떤 자기에 대한 느낌도 삶과 동시에 그것의 조건으로서 그것에 공실체적인 자기성Ipséité이 그 느낌 안에 도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자기성은 자기 자신임의 사실, 즉 하나의 자기unSoi임의 사실을 지시한다. 실재의 삶이 산출되는 한에서(단순한 ‘이념’이나 단순한 삶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자기의 느낌 그 자체가 실질적으로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단독적인 방식으로 느껴지고 체험된 실재적인 느낌인 한에서 자기성 안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도래하며 실질적으로 체험된 자기성으로, 단독적인 자기성으로 도래한다. 이것은 하나의 단독적이고 실재적인 자기이며 삶에 의해서 생성된 최초의 살아 있는 자기lePremierSoiVivant이다. 마치 삶이 이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자기를 계시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 자기는 삶의 자기-계시, 삶의 말씀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일어난다. 이와 같은 것이 요한의 최초의-지성체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삶의 본질 그 자체이며 삶의 말씀 안에서 삶의 자기-계시로서 삶의 자기-생성auto-génération24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 말씀은 이 운동이 완성되는 양태로서 이 운동에 내재한, 이 운동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의 최초의-지성체로부터 최초의 삶의 법이 흘러나온다. 즉 어떤 삶laVie도 삶laVie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삶vie이 되는 이 최초의 살아 있는 자기를 자신 안에 지니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 최초의 살아 있는 자기 안에서 삶laVie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삶vie이 된다. 어떤 삶vie도 살아 있는 자unvivant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어떤 살아 있는 자도 삶laVie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면서 자기 안에 도래하는 이 운동 밖에서는, 즉 삶lavie25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삶의 본질 위에서 해독된 이 법은 가능한 모든 삶과, 따라서 우리의 삶과 관계한다. 우리는 또한 가장 단순한 삶의 가장 단순한 양태들 중의 하나인 고통에서 이 법을 만난다. 어떤 고통도 누군가의 고통이 아닌 것이 없다면 그것과의 최초의 접촉에서 우리는 모든 고통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즉각적으로 그것은 시련을 겪는 ‘자아’를 동반하며 그 자아가 없이는 어떤 고통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삶은 근대 사유에서 특히 쇼펜하우어의 살고자 하는 의지levouloir-vivre 혹은 프로이트의 충동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익명적이고 맹목적인 보편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우리의 탐구를 촉진했던 질문은 다시 우리 앞에 놓인다. 육화가 말해지는 유명한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솟아나는 요한의 말 또한 요한의 최초의-지성체로부터 나오는가? 그리스인들의 눈에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적어도 우리에게 아주 이상하게 보이는 것과 달리 이 말은 각자의 고유한 삶에서처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또한 모든 생각 가능한 삶에서처럼 요한 1서 1장 1절과 관계하며, 말씀 안에서 절대적인 삶의 자기-계시를 선언하는 삶laVie을 알려온다. 반드시 같은 방식일 필요도 같은 의미일 필요도 없이 이 말은 계시와 같은 본질에 속하며 절대적인 삶과 다르지 않은 최초의-지성체에 속한다.
이때 살—우선 살 안에 도래lavenuedansunechair, 즉 육화Incarnation26 —이 초대 기독교의 사상가들에 의해 신의 말씀의 현시manifestation의 양태로서 파악되었다면, 그리고 현재 이 살과 말씀의 현시의 양태가 삶Vie의 현시와 계시의 양태들로서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든다면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이 계시에 대한 명시화와 그것에 대한 어떤 학문이다.
이런 학문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상학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탐구에 적절한 접근 방법을 현상학에 요청한다. 우리 세기의 초반에 후설에 의해 창설된 현상학은 우리 시대의, 아니 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유의 운동 중 하나를 촉진했다. 이 간략한 서문은 적어도 우리에게 어떤 조건에서 이 철학이 한편으로 살과, 다른 한편으로 이 살 안에 말씀의 도래, 즉 육화—특히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육화—의 실재들에 대한 앎에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스적 사유가 아니라는 조건에서 현상학은 이 최초의 조건에 대답하는가? 어떤 경우에도 그렇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이제부터 현상학의 의존은 그것이 현상학의 ‘전복’을 실행할 수 있을 때에만, 그리고 그것의 가장 일반적인 전제들을 비판하고 세계 혹은 존재의 현상학을 삶의 현상학으로 대체할 때에만 현상학은 생산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 적어도 현상학에 대한 이런 요청이 필요한가? 반명제에서 시작하는 것에 어떤 유용함이 있는가? 그것은 현대 현상학이 전제하는 그리스적 전제 뒤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이 감춰져 있으며27 이것은 결국 기존의 모든 철학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만일 비가시적인 삶이 우리의 사유의 파악을 회피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삶과 관계 맺을 수 있으며, 또 우리가 그것과 관계한다고 주장할 때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앞서 말한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우리의 모든 고려는 사유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가? 어떻게 사유는 이 사유와 ‘전적으로 다른 것toutautre’과 일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회피할 수 있는가? 현상학의 전복은 이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우리를 기독교의 직관들의 핵심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이끌 분석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I. 현상학의 전복
II. 살의 현상학
III. 육화의 현상학-기독교적 의미에서 구원
이때 하나의 의심이 독자들 사이에서 솟아날 것이다. 이 책에서 정확히 문제가 되는 것과 이 책이 관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철학인가, 현상학인가, 아니면 신학인가?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이 영역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정립하기 전에, (또 철학과 현상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쉬지 않고 우리를 살아 있는 자들로 만들면서 우리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는 ‘말Parole’과—비록 이 상실된 세계 안에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다른 말인지 아는 문제를 정립하기 전에, 우선 우리는 매 분석의 끝에서 이 각각의 영역들로부터 끌어낸 것들을 구분할 것이다.
1. 현상학의 대상: ‘나타남’에 대한 질문
‘현상학phénoménologie’이란 이름은 ‘phainomenon’과 ‘Logos’라는 두 개의 그리스어로부터 이해된다. 글자 그대로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이다. 아주 단순한 이 정의를 반성해보면 ‘현상’은 이 학의 대상을 지시하며 학은 이 대상을 다루는 적절한 방식, 다시 말해 정합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이 대상에 적용하는 방법을 지시한다. 이로써 우리는 현상학이란 이름으로부터 현상학의 대상과 방법에 이른다.
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에서 다 말해졌다고 할지라도 이것에 대한 명시화가 여전히 필요하다. 그 유명한 『존재와 시간』 7절에서28 하이데거는 그 말의 명시화를 시도한다. 드러나다semontrer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동사 ‘phainesthai’로부터 유래한 현상phénomène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그것, 자기를 보여주는 것, 드러내는 것daswassichzeigt,dasSichzeigendedasOffenbare”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동사에서 명사로의 아주 예사로운 이행 안에는 현상학을 결정하는 숨겨진 대체가 작동한다. 이 감춰진 것을 고려할 때에만 우리는 현상학의 진정한 대상에 이를 수 있다. 고려해야 할 것은 현상, 즉 나타나는 것cequiapparaît/daswassichzeigt이 아니라 나타남의 행위l’acted’apparaître/phainesthai이다. 이 현상학의 고유한 대상이 현상학을 즉각적으로 다른 학으로부터 구별한다. 현상학과 구별되는 학들은 매번 특수한 내용을 고려하는 다양한 현상들—화학적・생물적・역사적・법적… 현상들—을 다루며, 이에 각각 화학, 생물학, 역사학, 법학… 등이 대응한다. 반면에 현상학은 이 다양한 학들이 다루지 않는 것을 연구한다. 즉 다양한 현상들의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 즉 각각의 현상을 현상으로 만드는 것을 다룬다. 나타남 그 자체로서의 나타남 안에서 비로소 다양한 현상들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확실히 현상에는 한편으로는 그것의 내용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나타남의 사실이 함께하며 그 둘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일반적이고 과학적인 사유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다. 탁자 위에 찻잔은 나에게 나타난다. 그런데 탁자도 찻잔도 자신들의 현상의 조건에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상 한가운데에서 원리상 서로 다른 그것의 내용과 그것의 나타남의 사실을 구분하는 것을 아무도,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다.
현상학이 의존하는 이런 본질적인 구분을 도입한 사람은 후설이다. 우리 안에서 시간적으로 흐르는 체험들의 흐름을 연구하면서, 후설은 그것들을 단순한 대상들이 아니라 “어떻게 안에 대상들GegenständeimWie”29로 고려한다. “어떻게 안에 대상들”은 대상들을 특수한 내용들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방식 안에서 고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상들의 증여의 ‘어떻게’ 안에서 그것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후설의 이 진술이 출현하는 맥락에 대한 분석은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교향곡 연주에서 어떤 소리 혹은 이 소리의 국면은 나에게 기다린 국면으로—즉 미래의 국면으로—혹은 현재의 국면으로 혹은 지나간 국면으로 주어진다. 사실 하나의 동일한 소리의 국면은 나에게 올 것으로, 현재로서, 지나간 것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후설에 의해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내용들과 시간의 흐름 안에서 변형되는 나타남의 양태 사이의 구분이 완벽하게 세워진다.
현상의 내용과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의 구분은 현상학의 진정한 대상을 명백하게 파악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로부터 새롭고 무한한 탐구의 장이 열린다. 만일 우리가 이 현상학의 탐구의 거대함을 측정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이 글의 처음에서부터 사용한 같은 의미를 가진 용어들이 사실 하나의 동일한 대상, 즉 현상학의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다시 한 번 열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용어들의 동사적인 형태들은 다음과 같다: 주어지다, 드러나다, 현상의 조건 안에서 도래하다, 탈은폐되다, 발견되다, 나타나다, 현시되다, 계시되다. 그리고 명사적인 형태들은 다음과 같다— 증여, 드러남, 현상화, 탈은폐, 발견, 나타남, 현시, 계시—.
그런데 이 현상학의 중심 개념은 또한 종교 혹은 신학의 중심 개념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또 다른 개념은 그리스 이래로 철학을 이끌었던 말인 ‘진리’도 현상학의 진정한 대상과 관계한다. 사실 진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전-철학적이고 전-현상학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순진한 진리’의 개념이다. 이 진리는 참인 것을 지시한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어 곧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참이다. 또 2+3=5도 참이다. 이런 진리들—하늘의 상태 혹은 수학적 진술—은 다만 그리고 우선 나에게 드러나는 한에서 진리이다. 이차적인 의미에서 이런 진리들은 본래적인 진리, 즉 최초의 그리고 순수한 현시를 전제한다. 탈은폐하는 어떤 힘unpouvoirdévoilant 없이는 어떤 탈은폐도 산출될 수 없으며 이것 없이는 결국 이차적인 의미에서 참인 어떤 것도 탈은폐된 것의 어떤 진리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이데거의 철학사적인 기여로 전통적인 철학의 진리 개념에 명시적으로 현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보통 우리가 참인 것으로 간주하는 진리의 개념을 이것을 참이도록 하는 것, 즉 현상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드러나는 것과 구분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진리의 가장 본래적인 현상dasurspünglichstePhänomenderWahrheit”30이라고 부른 나타남의 순수한 행위이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저 놀라운 분석들을 거쳐서 현상학이 이른 진리의 가장 본래적인 현상이 현상학에서 아주 결정적이라고 할지라도, 이 진리의 개념은 여전히 우리를 어떤 문제 앞으로 인도한다. 순수한 나타남, 순수한 현시, 순수한 현상성이 모든 가능한 현상의 조건이라는 사실, 현상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한에서, 그리고 그것 밖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날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현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나타남을 현상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대상으로 현상학적인 반성의 핵심에 놓는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이 순수한 나타남이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 44절에서 하이데거의 분석은 우리를 이차적 진리—참인 것, 탈은폐된 것—에서 본래적인 진리—탈은폐하는 것, 탈은폐—로 이끌었다. 어쨌든 본래의 진리는 여전히 사변적인 방식으로 이차적 진리의 조건—탈은폐된 것의 조건으로서 탈은폐—으로서 제시될 뿐 아니라 나타남은 나타나는 모든 것의 조건으로서 제시된다. 본래적인 진리는 현상으로서, 즉 ‘진리의 가장 본래적인 현상’으로서 명시적으로 말해진다. 이 진술에 함축된 것은 본래적인 진리 그 자체가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진리 이상의 것은 결국 ‘가장 본래적인’ 것인 진리의 현상이다.
이것은 나타남은 그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나타나게 하는 것에 전혀 제한되지 않으며 그 자체 순수한 나타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일 나타남—나타남의 순수한 사실, 순수한 나타남—이 그 자체 그리고 우선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탁자나 탁자 위의 찻잔은 맹목적인 물질로서 그들의 본성 혹은 그들의 고유한 실체로 말미암아 자신의 고유한 사실을 자신의 고유한 힘force으로 나타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것들과 다른 힘이 그것들을 나타나게 한다. 그것들이 ‘현상’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나타날 때에도 그들의 본래적으로 타고난 이 무능은 아무것도 변화지 않는다. 모든 현상에서 빛나는 나타남은 나타남의 사실, 나타남 혼자의 사실이다. 그것은 나타나는 이 순수한 나타남이며 이 나타남 그 자체의 나타남, 즉 나타남의 자기-나타남auto-apparaître이다.
만일 우리가 역사적인 현상학에게 이 순수한 나타남에 대해, 진리의 가장 본래적인 현상의 현상성에 대해(순수한 나타남을 나타남 그자체로 만드는 것에 대해) 이 순수한 나타남 안에서 정확히 그것의 고유한 출현과 그것의 순수한 현상학적인 실체와 그것의 작열하는 물질l’incandescentematière, 말하자면 그 물질이 작열한다는 점에서 그 물질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석의 텍스트들에서 두 계기31를 구별할 수 있다. 최초의 계기 안에서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 없다. 나타남, 진리 혹은 진리의 본래적 현상, 현시, 계시, 현상성은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말해짐이 없이 문제가 됨이 없이 긍정된다. 현상학의 전제들은 이때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2. 현상학의 현상학적인 전제들의 애초의 비규정성: ‘현상학의 원리들’
모든 탐구에서처럼 현상학도 전제들을 함축한다. 그런데 현상학에 고유한 전제들은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어떤 특징을 가진다. 일반적인 탐구에서 추론을 이끄는 전제들은 사유에 의해서 선택되고 그전제들은 그 자체가 변형될 수 있다. 그래서 수학자는 이론을 구성하는 일련의 함축들이 나오는 공리들을 자유롭게 정립한다. 탐구 과정에서 수학자는 공리의 체계를 강화하거나 혹은 약화하는 어떤 진술들을 덧붙이거나 제거하거나 변경한다. 이렇게 수학에서 이론은 사유에 의존한다. 다른 과학들에서 예를 들어 경험과학에서 전제들은 어떤 사실들에 속하고 이 사실들을 특징짓는 속성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유로 한 현상이 법적이라고 사회적이라고 혹은 역사적이라고 말해지는지를 묻는다.
현상학의 전제들의 고유성은 전제들 그 자체가 근본적인 의미에서 현상학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앞서 말한 나타남, 즉 순수한 현상성이다. 이 현상성이 현상학적 의미의 현상들, 즉 나타남의 ‘어떻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 ‘어떻게’가 그것의 나타남의 힘pouvoir 안에서 이해되지 않고 질문되지 않는 동안에는 현상학이 의존하는 이 현상학적 전제들은 현상학적으로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을 것이다. 이 현상학적 전제들의 현상학적인 비규정성은 그 전제들로부터 나오는 현상학적 탐구의 과정에서 그것을 불확실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지점에서 다시 솟아날 것이다.
만일 모든 역사적인 현상에 그것의 ‘역사성’을 부여하면서 그것의 나타남의 선험적 양태를 규정하는 시간성의 나타남의 양태가 그 자체로 물어지지 않는다면 가장 일상적인—혹은 가장 결정적인—역사적인 현상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만일 세계의 나타남의 양태가 앞서서 알려지지 않고 엄격하게 기술되지 않는다면 말씀의 이 세계 안에 도래, 즉 말씀의 세계 안에 나타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이 말씀의 세계 안에 도래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신체 안에 도래인지 아니면 요한이 생각한 것처럼 살 안에 도래인지를 알 수 있는가? 또 신체의 현시 안에서 이 현시를 현시하는 것으로—이 현시의 현상학적 물질로—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 신체의 고유한 현시의 양태와 살의 고유한 양태가 체계적인 명시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으로서 신체를 현시하는 이 현상학적 물질이 이 신체 그 자체의 물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같은 질문을 우리는 살에 제기할 수 있다. 즉 살의 계시는 살 그 자체와 다른가, 아니면 반대로 살의 계시는 마치 자신의 실체로서 자신의 고유한 살로서 자신의 살의 살로서 살과 동일한가? 이 경우, 신체의 현시와 살의 계시가 전적으로 다르며 나타남의 두 질서는 전적으로 이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면 말씀 그 자체에서 신체가 완성하는 계시의 현상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말씀이 신의 계시라면, 다른 한편 그것이 우리와 유사한 살을 가졌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살 안에서 신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 아닌가? 말씀 안에서 신의 계시, 살 안에서 말씀의 계시, 요한의 최초의-지성체 안에서 말해진 이 현시들épiphanies은 우리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우리안에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을 취하지 않는가?
일단 역사적인 현상학의 현상학적인 전제들의 비규정성을 명확히 하자. 역사적인 현상학은 자신을 드러내는 원리들에서 알려진다. 우리는 이 현상학을 세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원리는 후설이 마르부르크학파에서 빌려온 것으로 “현상이 있는 만큼 존재가 있다Autantd’apparence,autantd’être”32는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진술 안의 ‘현상apparence’이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로 인해 이 진술의 애매성 안에 얽힌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말을 나타나는 것의 내용으로 이해하거나 그것의 나타남 그 자체로 이해한다. 앞선 우리의 분석에 의존해서 이 진술이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애매성을 제거하기 위해 “나타나는 만큼 존재가 있다Autantd’apparaîtreautantd’être”라고 고쳐 사용한다.
이 원리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철학이 상식처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철학의 근본적인 두 개념 사이의 상관관계를 세우기 때문이다. 상식의 입장에서 상관관계는 두 번째 개념에서 첫 번째 개념으로 가는 것으로 읽힌다. 즉 존재에서 나타남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사물들이 우선 존재하고 나서 나에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집 옆에 담배 가게에서 담배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면, 우선 나는 길에서 담배 가게를 발견하고 거기서 담배를 살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담배 가게, 담배, 시가, 거리 등은 나의 행보에 앞서서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세계 안에 앞선 존재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존재는 원초적인 나타남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가? 이 원초적인 나타남 없이는 어떤 인간도 동물도 신도 이 존재—이 세계—와 조금의 접촉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현상학은 우선 이 상관관계의 잠재력puissance33에 주의한다. 이런 이유로 현상학은 철학적 상식과 다른 방향에서 이 상관관계를 읽는다. 무엇인가가—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나에게 나타나며, 동시에 존재로 발견된다. 나타남,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이다. 예를 들어 그것이 나의 정신에 스쳐가는 어떤 이미지이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개에 대한 공허한 의미작용이든 혹은 순수한 환상이든 문제가 될 경우, 내가 내 안에서 이 나타남을 유지하는 동안 그것이 나타나는 한에서 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이미지의 출현은—그것이 실재와 일치하든 안 하든—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다만 이 확실성, 이 이미지의 나타남이 이 이미지의 특수한 내용에서가 아니라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이미지를 유지하는 한 그러하다. 결국 모든 가능한 존재는 나타남에 의존한다. 나타남이 나타나는 한에서 존재는 ‘존재한다’. 존재가 자신의 지배를 전개하는 것은 나타남이 자신의 지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타남과 존재는 하나이며 같은 지배와 같은 본질을 가진 듯이 보인다. “나타나는 만큼 존재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본질에서 전제된 이 동일성에도 나타남과 존재는 절대로 같은 면 위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같은 위엄을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타남은 전부이며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혹은 존재는 나타남이 나타나기 때문에 나타남이 나타나는 한에서 존재한다. 나타남과 존재의 동일성은 전자가 후자에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본질적인 동일성은 여기서 유일하고 동일한 힘pouvoir만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힘은 나타남의 힘이다. 이 나타남과 독립적으로 나타남이 나타나지 않는 동안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는 자신의 본질—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을 나타남 안에서만 끌어낼 수 있으며 나타남은 존재에 앞서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전개한다. 나타남의 본질은 자신의 실질적인 나타남 안에, 자신의 자기-나타남l’auto-apparaître 안에 자리한다.
우리가 현재 검토하고 있는 현상학의 원리에 대해서 질문하면 우리는 보다 명확하게 그것의 중요성과 한계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중요성은 현상학을 우선 존재론에 앞선 것으로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후자를 전자에 종속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존재론, 특히 고전적인 존재론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에 확실한 토대를 정해주기 위해서다. 존재하는 것 혹은 우리가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반박의 여지없이 나타나는 한에서 모든 반박을 회피한다. 나타남에 의존하는 질문만이, 그것의 나타남의 방식에 의존하는 질문만이 이 나타남이 반박 불가능한지 아닌지에 따라 나타남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의심을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최초의 원리는 이 질문에 전혀 대답할 수 없다. 이 원리의 심각한 허약성은 바로 이 현상학적인 비규정성이다. 이 허약성은 나타남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타남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말함이 없이, 나타남을 나타나게 하는 심급으로 거슬러 올라감이 없이, 나타남이 그 자체 안에서 우선 나타나는 한에서 모든 나타남이 일어나야 하는 순수 현상학적인 물질을 인정함이 없이, 또 ‘빛’이 혹은 다른 모든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 나타남의 빛의 광채 혹은 반짝임의 본성을 말함이 없이 나타남을 명명하는 것이다.
나타남이 그 자체 규정되지 않은 채 머무는 한에서 나타남에 의한 존재의 규정은 그 자체 규정되지 않은 채 머물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왜 이런 비규정성이 생겨나는지를 알 수조차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상학은 사변적인 존재론을 대체하고자 했다. 존재론의 구성이 원리적으로 개념의 놀이 안에 존재한다면, 현상학적 존재론의 각각의 주장은 반박 불가능한 소여, 진정한 현상에 의존한다. 현상학자들이 말하듯 ‘환원된’ 현상, 다시 말해 명석 판명한 봄vue에 ‘몸소enpersonne’, ‘살과 피를 가지고’ 주어지지 않는 모든 것을 제외한 현상에 의존한다. 이 충만한 현전을 따라서 모든 것이 물러섬도 감춤도 없이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가 나타남의 작열하는 실체를 탐구하는 대신에 외재성으로부터 그것을 지시하고 이 주제에 대해 여전히 형식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나타남은 이런 기술記述에 응답할 수 있는가? 존재의 형식적 개념은 나타남의 형식적 개념에 대응한다. 존재의 형식적 개념은 우리가 존재인 바의 것—존재의 잠재력puissanced’être—도, 존재하는 것—존재자—도, 그리고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이 차이의 본성을 아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존재의 형식적 개념은 또한 이 차이가 일반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는지 아니면 이런 차이가 보편성의 주장이 박탈된 특수한 나타남의 양태에 의존하는지, 또 이 차이는 다만 존재의 영역에만 제한되는지 우리가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현상학의 두 번째 원리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 현상학을 인도하는 명령어로 아주 중요한 원리인 ‘사물들 자체로ZudenSachenselbst’도 같은 운명에 떨어진다. ‘사물들 자체’는 실질적인 현상학적인 내용, 즉 나타나는 것, 나타나는 것 그 자체로 환원된 현상들이다. ‘사물들 그 자체로 곧장 가라’는 것은 즉각적인 소여를, 그것을 가리거나 그것과 우리 사이에 놓일 위험이 있는 모든 해석과 일련의 지식을 제거하고 그것의 직접성 안에서 고려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상학의 진정한 대상에 대해서 말해진 것에 의하면 현상학의 ‘사물 자체’, 현상학이 다루는 것은 우선 현상의 내용이 아니라 이 내용을 현상으로 만드는 것, 즉 현상의 순수한 현상성, 나타남이다. 만일 이 후자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이 우리를 사물 그 자체로 이끄는지, 어떤 길이 나타남 그 자체로 인도하는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나타남 그 자체! 이외에 다른 대답은 없다. 순수한 나타남 그 자체,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 자신 안에서 그것은 나타난다. 나타남은 자기-나타남 안에서 우리를 사물 그 자체로 이끈다.
여기서 이 진술들은 아주 중요한 내기를 함축한다. 우리가 이 책의 처음에서 그리스어 현상-학이란 말을 분석하면서 현상학의 대상—현상—과 그것의 방법—로고스—, 즉 이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학을 구분했다. 현상학의 명령어는 지금 우리를 같은 구분 앞에 놓는다. 한편으로 ‘사물 자체’, 즉 현상학의 진정한 대상과 다른 한편으로 ‘…로zu’, 즉 사물 자체로 이끄는 ‘길’ 앞에 놓는다. 나타남이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나타남 안에서 나타나는 한에서 나타남 그 자체만이 우리를 사물 자체로 이끈다면 이것은 현상학의 사물 자체가 사물 자체로 향하는 길을 연다는 것, 다시 말하면 현상학의 대상과 방법이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하나라면 그것은 대상과 방법이 같은 면 위에 놓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상이 방법을 구성한다는 정확한 의미에서이다. 마치 빛이 밤에 균열을 만들듯이 자신의 고유한 빛이 그것을 보게 한다. 현상학의 방법을 대상 안에 흡수하는 것은 방법의 단순 명백한 제거를 의미하지 않는가? 이것은 방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는가? 나타남 그 자체가 우리에게 오고 스스로 알려진다면 나타남으로 가기 위해 그것을 알기 위해 방법이 필요한가?
사실 우리는 익숙한 개념화로 반대에 부딪친다. 우리는 인식과 그것이 인식해야 할 것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인식을 그것이 파악하고자 하는 대상의 본성과 분리한다. 이로부터 인식은 일단의 절차와 방법론을 필요로 하고, 이것을 위해 인식은 사유의 절차와 방법론을 발명한다. 현상학에서 방법은 점진적으로 충만한 빛 안에서 사유의 시선 앞에서 ‘명증성의 빛’ 안에서 확실하게 알려질 것을 지향하는 명시화의 절차이다. 이 방법은 더 나아가 함축적으로 ‘과학적인’, 다시 말해 근거 지어진 인식을 산출하고자 하는 모든 지식의 방법이다. 그래서 명증성에 근거한다는 것은 ‘이성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인식의 지적인 원형 혹은 이상적인 대상—기하학적, 수학적 대상, 언어의 의미, 논리적 관계—에 대한 지적 직관일 때 인식 혹은 직관의 예비적인 가능성은 이 알려질 수 있는 것에 접근의 조건으로서 항상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또한 감성적인 것에도 적용되지 않는가? 모든 인식, 더 나아가 모든 형태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선험적인 인식의 가능성으로서 칸트가 자신의 철학의 주제로 삼았던 모든 가능한 경험의 선험적인 조건과 관계하지 않는가?
어떤 알려질 수 있는 것unIntelligible이 모든 예비적인 조건을 회피한다는 것—그것에의 접근, 지성체가 사유에 종속되지 않으며 명시화의 과정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절차도 없이, 가차 없이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하자면 목적만이 있고 어떤 길도 그것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말인가? 마치 카프카가 “하나의 목적이 있으나 길이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목적과 유사한가? 목적 자체가 길이고 방법이고 예비적이기 때문에 어떤 길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목적을 말하는가? 처음에 놓인 지성체, 생각 가능한 모든 지성체의 조건을 의미하는가? 최초의-지성체,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은 이것은 요한이 말한 그것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이 질문들에 대해서 현재 우리는 대답을 제시할 수 없다. 역사적인 현상학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현상학은 자신이 의존하는 현상학적인 전제를 규정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타남은 역사적인 현상학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