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도전이 있었다
┃Prologue┃
성공이란 땀 흘린 만큼 거두는 결실이다. 이는 결코, 변치 않는 원칙이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이들이 바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10인의 성공한 CEO들이다.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비결은 단 한 가지다.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에도 좌절보다는 재도전을 통해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는 끈기, 포기를 모르는 우직함이다. 10인의 CEO들은 한결같이 실패의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그러나 성실함만으로 일어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항상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기회를 잡는다. 차별화된 혁신의 아이디어를 얻어 내고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이러한 실패의 교훈 속에서 자신만의 성공 법칙을 만들어 내고 성공의 선순환을 만들며 성장해 간다. 작은 점포는 대박의 점포로 성장하고 점포는 기업으로 성장한다. 영업망은 동네에서 전국으로, 세계시장으로 뻗어 나간다. 다른 이들의 롤모델이 되어 성공을 전파한다.
바로 그런 성공의 노하우를 전하기 위해 10인의 성공 스토리를 썼다. 성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정직하게 성공하는 비결을 전하고자 한다. 레드오션의 치열한 시장에서도 자신만의 차별화를 만들어 내는 방법, 성공의 시너지를 확대하는 방법, 모두의 반대 속에서도 뚝심 있게 시장을 열어 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8평 작은 분식집에서 기업형 프랜차이즈를 일군 오투스페이스 이경수 대표, 1,000억 원대의 기업을 꿈꾸는 누리플랜 이상우 회장, 토종 커피전문점으로 세계시장 장악을 꿈꾸는 카페베네 김선권 대표, 4전 5기를 마다하지 않은 도전으로 200억 원대의 알짜 기업을 일군 와토스코리아 송공석 사장, 우리나라 미술계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강한 기업 알파색채의 남궁요숙 대표, 작은 분식집에서 프랜차이즈를 일군 스쿨푸드의 이상윤 대표, 작은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글로벌 브랜드 사업화까지 일군 싸카의 오정석 대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를 꿈꾸는 본아이에프의 김철호 대표, 영업의 달인에서 프랜차이즈의 고수로 성장한 오니규 이명훈 대표, 휴게소 호두과자 사업을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성숙시킨 샤마 권기택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모두 평범했던 직장인에서 사업가로, 맨손의 영업사원에서 기업가로 우뚝 섰다. 이들 또한 처음에는 작은 씨앗에 불과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은 도전, 고집과 외길, 정보, 시스템, 주인, 불굴의 의지 등 그들이 전하는 성공의 법칙이 오늘의 성공인을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만나는 10인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은 벅찬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강한 기업 CEO 10인. 이들의 성공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에, 도전이 있었다.
2013년 2월
정완진
┃Prologue┃작지만 강한 기업 CEO들의 도전과 성공
■ 8평 작은 분식집이 1,6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다
‘아딸 떡볶이’ 오투스페이스 이경수 대표의 진심 경영
목회를 꿈꾸던 남자
┃분식집 장사를 시작하다
하루 매출 120만 원의 분식점
┃누구나 아는 진리 · 밥그릇 두 개의 비밀 · 튀김, 웰빙을 입다
프랜차이즈의 꿈
┃동업 제의를 받다 ·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 · 버티고 또 버텼지만……
초심으로 돌아가라
┃5년 만의 깨달음 · 우연히 찾아온 행운 · ‘진심의 힘’이 통하다
창업가를 만드는 일
┃예비 창업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다 · 발로 뛰어 얻는 것 · 탄탄한 본사 시스템 · 중국을 넘다
■ 토종 커피전문점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하라
‘토종 커피전문점’ 카페베네 김선권 대표의 도전 경영
시골 청년, 프랜차이즈 사업가가 되다
┃결핍에서 피어난 꿈 · 프랜차이즈 사업에 도전 · 소통과 상생을 통한 시너지 효과
실패의 쓴맛
┃질적인 혁신의 중요성 · 실패를 딛고 일어서다
감자탕에서 커피전문점으로
┃새로운 출사표 ·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 짓는 6개월
경쟁력을 갖춰라
┃틈새시장 발견 · 차별화된 메뉴 전략 · 인지도의 열쇠, 스타 마케팅 · 외형에 걸맞 은 내실 만들기 · 창의적 도전과 고객 중심 경영 ·“우리는 1등입니다.”
세계시장으로 가는 지름길
┃해외 진출의 첫 타깃, 뉴욕 · 글로벌 브랜드화 · 새로운 비전을 향한 도전
■ 세 번의 실패를 딛고 200억 원의 기업을 세우다
‘코스닥 상장 기업’ 와토스코리아 송공석 대표의 4전 5기 경영
가난, 설움의 어린 시절
┃험난한 날들의 연속
서울, 고생 끝에 창업
┃일의 의미를 깨닫다 · 5만 원의 창업
첫 실패, 무리한 운영의 끝
┃사업의 묘미 · 첫 번째 실패
두 번째 실패, 뜻하지 않은 사고
┃비운의 등촌동 공장 · 두 번째 실패
세 번째 실패, 욕심은 화를 부르고
┃다시 시작하다 · 마지막 교훈
오뚝이, 운명을 개척하다
┃정책을 기회로 만들어라 · 하루 수입 4,375만 원
업그레이드, 개발력을 키우다
┃연구 개발에 돌입하다 · 발명 특허 기업으로
효율화, 생산 현장의 놀라운 변화
┃생산량을 늘려라 · 판매 중단 선언을 하다
대학생이 되다
┃못 배운 한(恨) 을 풀다
이상향을 열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다
■ 물감으로 연 매출 70억 원을 벌어들이다
‘미술 도구의 대명사’ 알파색채(주) 남궁요숙 대표의 외길 경영
사업가의 씨앗
┃열린 교육 · 결혼, 새로운 운명의 시작
부부약방으로 시작한 사업의 길
┃8년간의 약방 사업
물감 사업을 시작하다
┃일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다 · 물감 개발의 여정
위기 속에서 성공을 배우다
┃위기에 빠지다 · 부부의 합동작전
평창동 시대, 전성기를 열다
┃조직의 성장, 규모의 확대 · 다시 찾아온 위기
새로운 돌파구, 세계화의 시도
┃좋은 색의 꿈 · 멈추지 않는 꿈
■ 분식도 큰돈이 된다
‘프리미엄 분식 프랜차이즈’ 스쿨푸드 이상윤 대표의 사람 경영
사업의 배경
┃돈은 없어도 열정은 넘쳤다 ·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
외식산업으로의 진출
┃우연한 창업의 아이디어 · 단일 메뉴, ‘노다지 김밥’의 시작 · 반지하에서 패션의 거리로 진입하다
혁신적 경영 기법
┃이야기가 있는 ‘스쿨푸드’가 되다 · 보기 좋은 ‘마리’가 먹기도 좋다 · 생각을 바꿔 주세요
위기를 이기고 성공을 배우다
┃성공의 의미를 깨닫다 · 사람 경영
성공과 또 다른 도전
┃길거리 음식을 넘어서 · 분식 혁명 · 받은 만큼 돌려주기 · 세계 속에 피운 꽃
■ 스포츠용품으로 연 매출 390억 원을 벌어들이다
‘축구 용품 유통업 1위’ 싸카 오정석 대표의 시스템 경영
기울어져 가는 집안에서 키운 사업가의 꿈
꿈┃남부럽지 않던 어린 시절 · 시스템의 중요성을 깨닫다
창업을 결심하다
┃35살 되기 전에 사장이 되자 · 직장 생활을 마감하다
점원에서 사장으로!
┃우윳값만 받겠습니다! · 3평짜리 지하상가
쓰라린 배신의 아픔
┃소박한 성공 · 배신감에 치를 떨다
밀리오레에 입성하다
┃시스템을 고민하다 · 천재일우의 기회 · 룰을 깨다
꿈은 이루어진다
┃로드숍을 열다 · 소매에서 도매로 · 특수를 잡아라
전산화로 업계를 평정하다
┃ERP 시스템의 도입 · 시장의 판을 바꾸다
축구로 꿈을 나누다
┃제2의 나이키를 꿈꾸며 · 시장을 고민하다 · 축구와 함께 나눔을
■ 영업의 달인에서 프랜차이즈의 고수가 되다
‘오니기리와 이규동’ (주)오니규 이명훈 대표의 도전 경영
야반도주를 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영업왕으로 우뚝 서다
┃브리태니커 세일즈맨이 되다 · 최고가 되다
정상에서 바닥까지
┃영업왕이 되다 ·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다 · 자살? 아니 살자!
될 때까지 한다
┃2전 3기, 하면 된다 · 피부관리숍의 초대박 성공
새로운 도전
┃새로운 프랜차이즈에 도전장을 내다 · 쪽방에서의 메뉴 개발
1호점, 대박 나다
┃또 한 번의 대박 · 철저한 가맹 관리
선택과 집중
┃고객의 트렌드를 따라가다 · 한 곳에 집중하다 · 가맹점 1,000개를 목표로
■ 호두과자 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코코호도’ (주)샤마 권기택 대표의 불굴 경영
가난의 굴레에서
┃덕지덕지 눌어붙은 가난 · 서울, 홀로서기 · 꿈이 좌절되다
찰나의 성공, 그리고 암흑의 세월
┃새로운 시작 · 실패, 그리고 암흑의 세월
호두과자 사업을 시작하다
┃패잔병의 재기 · 호두과자의 재발견 · 맛있는 호두과자
코코호도의 닻을 올리다
┃휴게소 명물, 도심 속으로 ·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다 · 동에 번쩍 서에 번쩍 · 수성(守成)의 어려움
위기를 경영하다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다 · 조직을 체계화하다 · 교육만이 살 길이다 · 상생 경영으로 화합하다
이제는 세계시장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 미국시장에 진출하다
CEO, 권기택이 꿈꾸는 이상향
┃새로운 문화 창조 · 나누며 살다
■ 본으로 성공을 돕는다
‘본죽·본비빔밥’ 본아이에프 김철호 대표의 홍익인간 경영
‘정성’은 통한다
┃남다른 죽집 창업을 꿈꾸다 · 3개월 만에 하루 100그릇 목표 달성 · 정성, 사랑, 건강이 기본이다
本 브랜드화, 전문화의 발판을 마련하라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다 · 경영을 시스템화하다 · 세계시장을 넘보다 · 사회적 나눔을 시작하다
本 브랜드의 성공 가도를 유지하라
┃새로운 성장의 구심점 · 성장에 동기를 부여하라 · 해외 진출을 전략화하다
성공의 열매를 나눠라
┃본사랑을 설립하다 · 네트워크 외부효과
홍익인간 경영, 업그레이드 경영을 선보이다
┃나눔은 나눌수록 커진다 ·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배움’· 사랑 속에서 찾은 새로운 기회
지속가능한 성장, 기업 문화에 답이 있다
┃정성, 사랑, 건강을 파는 CEO
■ 스스로 혁신하는 기업을 일군다
‘경관조명 기업’ 누리플랜 이상우 회장의 지속가능 경영
기업가의 떡잎을 키우다
┃1억 5,000만 원보다 값진 1만 5,000원 · 허드렛일을 해도 주인공처럼 · 일등 영업맨의 탄생
기업가의 첫걸음을 내딛다
┃컨테이너 박스에 설립된 회사 · 발로 뛰는 영업 · 위기에서 배운 교훈 · 일본에서 찾은 기회
위기를 넘으면 기회가 보인다
┃EGI펜스의 국산화와 시장 개척 · 가설방음벽에 도전 · 장기적인 생존 열쇠, 특허 경영
더 넓은 세상으로 가자!
┃신뢰의 조직을 만들다 · 태풍에도, 위기에도 끄떡없는 기업 · 경영 시스템의 개선
경관조명 기업으로의 변신
┃경관조명 시장의 발견 · 불안, 그러나 확신에 찬 출발 · 위기는 또 다른 기회 · 핵심 역량을 키운다 · 수익형 조직으로의 변신 · LED, 또 한 번의 도전
지속가능한 기업을 만들어라
┃‘솔선수범’의 실천 · 또 다른 시련과 전화위복
매출 1조 원의 기업을 향한다
┃U시티, 신시장을 향해 · 미래를 향한 또 하나의 도전 · 생각은 행동을 좌우한다
‘아딸 떡볶이’ 오투스페이스 이경수 대표의 진심 경영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01
이경수 대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개척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의 수입은 넉넉하지도 일정하지도 않았다. 쌀을 살 돈이 없어 열흘 가까이 누룽지만 먹었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가난은 그에게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이경수 대표가 목회자의 꿈을 꾸었던 것도 익숙한 가난처럼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는 우석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침례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3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1997년에 졸업한 이경수 대표는 곧바로 아버지의 교회에서 전임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회자가 천직인 줄 알고 지내던 그가 사업을 생각하게 된 것은 교회 사정이 나빠진 2000년이었다. 교회 이전을 위해 월세까지 빼고 이사를 했지만, 분양 사무소의 실수로 융자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돈 문제가 얽히니 많지 않던 교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개척 교회라는 것이 원래도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 일로 당장 먹고살기도 빠듯해졌다. 그러니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였다. 직장을 다니려 해도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고, 전임전도사로서의 생활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떠오른 것이 장사였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장사밖에 없었다.
목회자를 천직으로 알던 그가 장사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예상 밖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대학 시절 안 해 본 장사가 없는 장사꾼이었다.
1989년, 그가 21살 때였다. 당시 이경수 대표의 사촌 형은 교회 한 편에 칸막이를 치고 건어물 납품 일을 하고 있었다. 5살 차이의 사촌 형을 도우며 장사를 접하게 된 이경수 대표가 맡은 일은 특산품 할인 행사장에서 마른오징어를 파는 일이었다.
“백화점에 납품되는 것으로 주세요.”
물건을 떼러 가락시장에 간 이경수 대표는 또박또박 말했다.
“어느 백화점에서 왔어?”
젊은 청년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건어물 가게 사장이 물었다.
백화점 직원이 아니라 할인행사를 할 거라는 그의 말에 건어물 가게 사장이 손을 홰홰 내두르며 만류했다. 며칠만 장사할 거라면 치고 빠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경수 대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판다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싸게 내놓고, 그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제품이 좋고 싸다고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마른오징어는 어느새 동이 났다. 그날 그가 번 돈은 무려 1,000만 원이었다.
사업 수완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를 하는 지인들의 부탁이 이어졌다. 과일 가게, 수영장, 중국집의 매출을 올리는 일부터 미용실 인테리어까지 종류도 다양하였다. 한 번도 경영에 대해 공부한 적 없는 그였지만 손대는 일마다 대박이 터졌다. 좋은 물건을 싸게, 소리 질러 판매하는 그만의 원칙이 바로 성공의 열쇠였다.
그에게 장사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이경수 대표는 대학 시절 내내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가끔은 학교도 빼먹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에게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분식집 장사를 시작하다
장사를 결심했지만 그에겐 자본금이 없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업종을 찾아야 했다. 고민하던 중 떠오른 것은 장인어른의 튀김 가게였다. 1972년 경기도 문산 극장 앞에서 시작해 30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파 온 튀김의 달인이 바로 그의 장인어른이었다. 그런 장인어른의 튀김은 지방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니 맛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장인어른의 튀김에 떡볶이를 함께 파는 분식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장인어른은 오래된 튀김 가게를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니 가게를 정리해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장인어른을 찾아갔다.
“아버님, 노하우를 전수해 주세요.”
서울에서 분식집을 차리겠다는 그의 얘기를 장인어른은 달갑지 않아 했다. 장사의 어려움과 고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장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경수 대표는 진심을 다해 설득했고 그 모습에 장인어른은 마음을 돌렸다.
이경수 대표는 그 길로 가게 자리를 물색했고 친지에게 빌린 2,500만 원으로 신금호역 3번 출구 앞에 8평짜리 가게를 얻었다. 그리고 중앙시장에서 떡볶이판 등 장사에 필요한 기계들을 구입했다. 그러고 나니 인테리어에 투자할 돈이 없었다. 그는 아내와 직접 벽지를 붙이고 가게를 꾸몄다. 하지만 간판은 직접 만들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 걸려 있던 ‘자유시간 호프’ 간판에서 호프를 떼어 내고 분식을 붙여 넣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메뉴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장인어른의 튀김과 분식집의 1등 메뉴 떡볶이를 기본으로 순대, 어묵, 탕수육을 더해 총 5가지의 메뉴를 확정했다.
사실 그는 다양한 메뉴를 하고 싶었지만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김밥집 주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게에서 파는 것은 절대로 팔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기에 약속까지 했던 터였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메뉴를 정한 이경수 대표는 2000년 11월, ‘자유시간 분식’의 문을 열었다.
■누구나 아는 진리
가게를 오픈한 지 며칠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었다. 원래 있던 간판에 ‘분식’만 바꾸어 놓았더니 분식집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의 원칙도 작은 분식집에서는 큰 효과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떡볶이에 들어가는 재료가 좋다고 하더라도 떡볶이를 해 놓으면 크게 차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또 1,000원, 2,000원 하는 떡볶이값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30년 노하우의 장인어른표 튀김이 그에겐 차별화 전략이었지만, 먹어 보기 전엔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일단 사람들이 먹어 보도록 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고민하던 그가 생각해 낸 것은 평범한 진리였다. 요식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맛과 청결, 서비스라는 세 가지 전략이 그것이었다.
그는 먼저 청결함을 강조하기 위해 장인어른과 아내에게 유니폼을 입게 했다. 이는 길거리 포장마차의 막돼먹은 떡볶이가 아닌 제대로 만들어 낸 요리라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유니폼의 효과는 생각 외로 좋았다. 특히 오색머플러를 목에 묶는 아내의 유니폼은 스튜어디스를 연상시켜 ‘스튜어디스 아줌마가 만드는 떡볶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작은 불씨에 바람을 넣은 것은 어묵이었다. 당시에는 가격별 색깔이 다른 어묵꼬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경수 대표는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가게 앞에 대형 어묵통을 만들어 놓고 빨강, 노랑, 파랑 3가지 색깔의 어묵꼬치를 몇백 개씩 넣고 끓였다. 이는 사람들의 눈길, 발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도 한몫 거들었다.
이경수 대표는 늘 가게 밖에서 어묵꼬치를 관리했다. 늘 몇백 개의 어묵이 삶아지고 있으니 제때 팔리지 않는 것들도 생겼다. 그는 퍼지기 직전의 어묵을 근처 초등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팔지 못하는 것들을 홍보에 이용한 것이었다.
“얘들아~ 이리와 봐. 아저씨가 어묵 공짜로 줄게~”
“왜 공짜로 줘요?”
“오늘이 아저씨 생일이거든~”
생일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의심 없이 어묵을 받아들었다. 다음 날은 아내의 생일, 그다음 날은 장인어른의 생일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런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니 그다음은 아이들의 부모였다. 집에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부모들은 아이와 같이 분식집을 찾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이경수 대표였지만, 그의 노력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청결을 위해 종지를 두고 간장을 덜어 먹을 수 있도록 한다든가, 어묵을 먹으면 떡볶이나 튀김을 맛볼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하는 등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썼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고객의 발길은 물론 마음까지 잡아 단골손님을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밥그릇 두 개의 비밀
가게 문을 닫은 저녁, 그는 장인어른의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주방에 섰다. 30년의 노하우를 알게 된다는 기대감에 살짝 들떠 있는 그에게 장인어른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밥그릇 두 개였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본 이경수 대표는 의아했다. 그러나 장인어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걸 잃어버리면 노하우를 잃어버리는 거야!”
당부에 당부를 한 장인어른은 중대 발표라도 하듯이 ‘두 번 반’의 노하우를 알려 주었다. 밀가루와 전분을 섞을 때 밥그릇으로 ‘두 번 반’씩 섞으라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 계량컵도 저울도 흔치 않았던 그 시절부터 늘 똑같은 맛을 유지했던 비결이었다. 장인어른의 손때 묻은 밥그릇 두 개는 그에게 감동과 함께 깨달음을 주었다. 아무리 길거리 음식이라도 늘 같은 맛을 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재료를 정량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그는 계량컵과 계량스푼, 저울을 구입해 ‘두 번 반’의 정확한 양을 기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손맛이 있는 아내의 레시피대로 만들어지고 있던 떡볶이에도 이를 적용했다. 그는 물엿, 고추장, 고춧가루, 마늘 등의 비율을 조금씩 다르게 하면서 최적의 맛을 찾아갔다. 그리고 모든 기록을 정리해 매뉴얼화해 나갔다.
■튀김, 웰빙을 입다
그즈음, TV에서는 동물성 기름에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동맥경화증을 유발하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높인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튀김을 만들 때 사용하는 쇼트닝(Shortening)이 문제였다. 쇼트닝은 돼지기름의 대용품으로 미국에서 발명된 반고체 상태의 기름으로 튀김이나 빈대떡 등에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경수 대표는 시장의 흐름을 파악했다. 동물성 기름뿐만이 아니라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웰빙을 콘셉트로 하는 튀김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지만 튀김에 웰빙을 접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고민하던 이경수 대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허브였다. 당시 웰빙 열풍으로 허브 공원이 생기는 등 허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초록색의 허브 잎은 의외로 튀김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렇게 국내 최초 허브 튀김이 만들어졌다.
허브 튀김의 반응은 좋았다. 이제 남은 것은 동물성 기름을 식물성 기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식물성 기름을 구입했다. 콩기름, 옥수수기름, 채종유, 포도씨유 등 그 종류도 무지 많았다. 그는 먼저 콩기름에 튀김을 튀겨 보았다. 바삭한 맛이 덜했다. 두 번째는 가장 비싼 채종유였다. 비싸니 맛있을 거란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채종유는 끓는점이 높아 기름을 빼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기름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 수분까지 빠지게 했다. 그렇게 모든 종류의 식물성 기름으로 튀김을 만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맛은 나오지 않았다. 쇼트닝의 주된 역할인 바삭하고 고소한 느낌이 부족했다.
동물성 기름을 식물성 기름으로 바꾸기 위해 시작한 일은 식물성 기름으로도 바삭하고 고소한 튀김을 만들어 내는 일로 번졌다. 그는 서로 다른 식물성 기름을 조금씩 배합해 튀김을 만들어 보았다. 이처럼 바삭거리는 튀김을 만들기 위한 연구는 밤낮으로 계속됐다. 연구원이 따로 없었다. 기름도 섞어 보고, 재료를 저울에 달아 가면서 반죽해 튀겨 보고 기록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콩기름, 옥수수기름, 채종유를 비율에 맞게 섞은 혼합유를 사용한 바삭한 튀김이 완성됐다.
허브잎이 가미된 웰빙 튀김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기름진 음식을 꺼리는 젊은 여성들의 호응까지 이끌어 냈으니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이경수 대표의 작은 분식집은 날로 유명해졌고, 하루 매출 120만 원의 대박 분식점이 되었다.
■동업 제의를 받다
2002년 1월의 어느 날, 분식집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전화를 건 곳은 방송국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튀김을 만들고 딸이 떡볶이를 개발하여 ‘2대째 이어져 오는 분식집’이라는 소재로 방송을 하고 싶은데요.”
벌써 가게에 와서 떡볶이를 먹고 내부 회의도 끝난 상황이라니 이경수 대표는 깜짝 놀랐다. 그는 흔쾌히 촬영을 허락했다. 그리고 2월 1일, 그의 분식집 이야기가 방영됐다.
방송의 힘은 컸다. 동네에서야 맛으로, 서비스로 이미 유명했지만 방송이 나가고 난 후에는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크게 늘었다. 방송에 소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5촌 당고모였다. 고모는 신촌에 있는 자신의 가게로 그를 불렀다. 마주 앉은 고모는 이경수 대표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방송을 통해 분식집을 보았고, 자신의 가게에서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고민이 되었다. 상권이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35평쯤 되는 넓은 공간이긴 했지만 반지하였고, 신촌이긴 했지만 인근 대학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더구나 근처에 오래된 떡볶이집도 두 곳이나 있었다.
고모의 제안을 받은 지 일주일 뒤, 그는 고민 끝에 동업을 결심했다. 그가 동업을 결심한 것은 프랜차이즈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 분식점을 창업할 때부터 그는 프랜차이즈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오랫동안 맛에 대한 연구를 하고 매뉴얼 작업을 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은 분식집만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큰 가게를 얻을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고모의 제안은 그에게 기회와 같았다.
매출은 반반씩 나누고 고모는 보증금을, 자신은 임대료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동업계약서를 쓴 이경수 대표는 금호동의 가게를 정리했다.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
가게를 정리하자 3,500만 원이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35평의 가게를 꾸미기엔 한참 모자랐다. 이경수 대표는 또다시 친지들을 찾아가 2,000만 원을 빌렸다. 겨우겨우 6,000만 원을 맞췄다. 그것은 인테리어 비용이었다. 그는 새 가게를 패스트푸드점처럼 꾸미기로 결정했다. 카운터는 테이블을 바라볼 수 있게 놓고, 주방은 카운터 바로 뒤에 만들었다. 이는 떡볶이는 길거리 음식이라는 인식을 지우고, 주문하는 동시에 오픈된 주방을 보여 줌으로써 청결함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경수 대표는 건물 밖으로 플래카드를 걸어 두었다. 플래카드에는 방송의 소재가 된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라고 크게 적었다. 그리고 1972년부터 2002년 현재까지의 간략한 스토리도 더했다.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는 가게 이름으론 과하다 싶은 길이였지만, 4개의 단어 모두 친근하고 스토리가 있으니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뭐가 생긴답니까?”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근방의 부동산 사장들이 찾아와 물었다. 이경수 대표는 모르는 척하고 대답했다.
“뭐…… 떡볶이 가게를 할 모양이에요.”
“정신 나간 사람이구먼. 이렇게 크게 차려 가지고 월세나 내겠어? 쯧쯧…….”
부동산 사장들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이게 정말 심각한 일이구나.’ 그제야 그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걱정되긴 해도 이왕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두 달 동안 공사에 매진했다.
공사가 마무리되고 오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카운터에 서서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 많은 테이블을 다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이경수 대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감격과 불안이 뒤섞인 울음이었다.
2002년 4월 3일, 드디어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가 오픈했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가게 앞에는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섰다. 공사 중 걸어 두었던 플래카드의 활약 덕분이었다. 오다가다 플래카드를 본 사람들이 은근히 오픈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또한 이경수 대표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상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게 아래쪽에 위치한 영화관을 가려면 꼭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었고, 근처 옷 가게들도 장사가 잘 되고 있어 유동 인구가 많았던 것이다.
한 번 찾아온 손님들은 꾸준히 그의 가게를 찾아왔다. 맛과 청결, 서비스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떡볶이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손님들은 가게 스토리를 이야깃거리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는 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퍼진 소문은 대단히 좋은 홍보 효과를 가져왔다. 한 명만 잡으면 그 반은 다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자 거리가 좀 있던 대학교 학생들도 일부러 그의 가게까지 찾아왔고, 학교 홈페이지에 맛집으로 등록되는 등 유명세를 이어 갔다.
■버티고 또 버텼지만……
2003년, 일 평균 매출이 180만 원일 정도로 장사가 잘 되자 이경수 대표는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랜차이즈를 하려고 보니 장사가 너무 잘 되는 것이 오히려 단점이었다. 너무 북적거려 가맹점주가 온다고 해도 교육시킬 여유가 없고, 주방도 작아 3명 이상은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는 체인점을 위한 본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촌으로 가게를 옮긴 지 1년이 조금 넘은 때였다.
신촌의 가게는 그 대신 고모의 지인분이 동업자로 나섰다. 가게에 투자했던 6,000만 원을 동업자에게 받아든 이경수 대표는 가게 자리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러던 중 그는 둔촌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70평짜리 월세였다. 2층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그 정도 평수의 1층 자리를 얻기엔 가진 돈이 너무 적었다. 그리고 반지하에서도 성공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보증금에 인테리어까지 총 1억 원 정도가 가게로 들어갔다.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것이었다.
70평 중 20평은 예비 점주들의 교육을 위한 주방으로 꾸며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가족들이 머물 곳은 주방 뒤쪽 한 평짜리 방 하나였다. 한 평짜리 공간은 그와 아내가 눕기에도 부족했다. 이경수 대표는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스티로폼으로 막아 아이들의 방을 만들었다. 아버지로서 못할 짓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돈을 버는 것이 방법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장사는 생각과 다르게 지지부진했다. 2층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메뉴의 단가가 낮은 분식은 포장 손님이 많아야 이익인데 2층까지 올라와 포장을 해 가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또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니 눈에 띄지 않아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오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경수 대표의 자신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메뉴를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김밥, 우동부터 시작해 직접 고기를 두들겨 만드는 돈가스까지 금호동에서 할 수 없었던 메뉴들을 맘껏 늘려 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뉴가 60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메뉴의 다양화도 매출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이경수 대표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가게를 살리기 위해 배달에까지 나섰지만, 장사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교육을 위한 넓은 주방에는 늘 아내만이 있었다. 70평의 매장에서 하루 수입은 80만 원 정도였다. 월세 350만 원에 생활비, 인건비, 각종 세금까지 내고 나면 그의 손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 생활비에 교회 운영 자금까지 보태야 하는 그였으니 부담은 점점 커졌다.
그와는 반대로 신촌에 남아 있던 이대점은 꾸준히 장사가 잘 되고 있었다. 그쯤 처남과 지인의 요청에 가맹점을 내주었고, 그 외에도 가맹점에 대한 문의는 곧잘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매번 거절했다. 이유는 그만의 철칙 때문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가맹점의 조건으로 대학가나 로데오거리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를 원했고, 매장 크기도 30평 이상을 요구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성공 법칙이었다. 분식은 기존의 포장마차가 아닌 패스트푸드점의 깔끔한 음식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작고 후미진 곳에 위치한 매장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떡볶이 장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 중에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떻게든 먹고살아 보려는 사람들에게 번화가의 30평 매장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가게 운영도 힘들던 그때, 가맹점을 통해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때문에 가맹점은 친인척들이 하는 매장 3개가 전부였다.
그는 버티고 또 버텼지만, 실패했다. 2005년 5월, 결국 그의 가게는 3년 만에 폐업했다.
■5년 만의 깨달음
프랜차이즈의 꿈을 안고 시작한 가게는 2억 5,000만 원을 삼키고 빚만을 남겼다. 처음 맡아 보는 실패의 씁쓸한 향이 그를 감쌌다. 이경수 대표는 매일 눈물의 기도를 했다. 일주일, 열흘, 한 달.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실패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2층에 가게를 얻은 것도, 예비 가맹점들을 뿌리친 것도 모두 그의 자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기도를 통해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홀로 교회에 남아 기도를 드리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여기 상일동인데요.”
여자는 분식의 재료를 납품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경수 대표는 먼저 가게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여자는 8년 동안 그릇 가게를 했었다고 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요식업으로 업종을 바꾸려던 차에 우연히 이대점에서 떡볶이를 먹어 보고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혹시, 가게가 몇 평이세요?”
이경수 대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가게의 평수를 물었다. 여자의 가게는 30평에 훨씬 못 미치는 8평이었다. 예전의 그라면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모든 것이 박살난 후 5개월 동안의 암흑 같은 시절을 보내고 나니 그것은 마지막 지푸라기이자 어둠 속 작은 빛 하나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그는 직접 여자의 가게를 찾아갔다. 여자의 가게는 작은 시장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가서 보니 생각보다 힘든 상황이었다. 여자는 인테리어를 할 돈이 없으니 재료만 납품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경수 대표는 이것이 진짜 기회일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금호동의 첫 가게가 떠올랐다. 8평의 작은 공간, 동네로 들어가는 길, 주 타깃은 어른, 메뉴는 다섯 가지.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공 요인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아……! 그게 바로 내가 성공한 이유였구나.’
5년 만에 알게 된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자의 가게를 시작으로 재기를 다짐했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
‘해 보자!’는 마음으로 두 팔을 걷어붙인 이경수 대표는 직접 여자의 가게에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 시절 미용실 인테리어를 해 봤던 경험으로 페인트칠, 수도 연결, 하수도 연결까지 척척 해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못할 것이 없었다. 매장의 구조는 금호동에서처럼 주방이 앞쪽, 테이블이 뒤쪽이 되도록 했다.
어느 정도 인테리어가 완성된 후, 이경수 대표는 여자와 함께 떡볶이 판을 사러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중앙시장에 들어선 그는 낯익은 간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당시 꽤 유명했던 외식업 광고 디자인 전문 업체 RTM이었다. 이경수 대표도 몇 해 전 잡지에 소개된 것을 보고 로고 디자인을 문의했었지만 꽤나 비싼 비용에 다음을 기약했던 터였다. 온 김에 구경이나 해 볼까 하고 들렀던 그곳에서 그는 간판보다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저…… 최 이사님 아니세요?”
“저를 어떻게 아시죠?”
이경수 대표의 물음에 남자가 깜짝 놀라 되레 물었다.
“잡지에 실린 사진을 봤습니다.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최 이사님을 만나기만 하면 나는 정말 잘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잡지에 실린 최 이사의 사진을 몇 번이나 보고 ‘한 번쯤 만나봤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의 대답에 최 이사는 감동한 듯 잠깐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이경수 대표는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가맹점 1,000개를 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진지하게 그의 얘길 듣고 있던 최 이사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모든 디자인을 도맡아 할 테니 자신과 계속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경수 대표는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렇게 이경수 대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로고며 사진, 문구, 홈페이지까지를 최고의 퀄리티로 제작할 수 있었다.
■‘진심의 힘’이 통하다
그릇 가게였던 상일점 오픈 날은 ‘아딸’의 탄생일이기도 했다. ‘아딸’은 그동안 사용하던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라는 이름의 첫 자를 딴 새 이름으로, 최 이사의 아이디어였다. 간판에는 아버지와 딸이 투박하지만 재밌게 그려져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가게를 바라보던 이경수 대표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오픈 첫날부터 가게는 북적였고 가맹점주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첫날에 이어 둘째 날, 셋째 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분명 반짝하고 마는 오픈 특수는 아니었다. 상일점 여사장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상일점이 오픈한 지 몇 개월 지나자 여기저기서 가맹점을 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전에도 가끔 가맹점을 내달라는 연락은 왔었지만, 이렇게 많은 연락이 한꺼번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조금 의아했다. 가맹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낸 것도 아니고 본점은 이미 문을 닫았을 때였으니 말이다. 알고 보니 연락을 해 온 사람들은 모두 상일점 점주의 소개를 받은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니 믿을 만하다는 점주의 이야기는 광고보다 10배 이상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가맹점은 두 개가 네 개가 되고, 네 개가 다시 여덟 개가 되었다. 순식간에 10호점을 넘어서더니 가맹점을 하겠다는 연락은 더욱 많아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맹점을 낸 점주들의 추천으로 그들의 가족, 친척, 친구 등 지인들이 연락을 해 오는 것이었다.
가맹 계약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문득 이 모든 것이 ‘진심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상일점은 그에게도 재기의 발판이었고 때문에 자신의 일처럼 진심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그 진심이 점주에게 믿음을 준 것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때, 프랜차이즈 사업의 기본인 본사와 가맹점의 관계 속에는 진심이 담겨야 함을 깨달았다.
■예비 창업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다
가맹점이 빠르게 늘어가면서 그는 사무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가맹 문의로 인해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휴대전화도 버거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맹점 관리였다.
성내동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2006년, 가맹점이 70개가 넘어서였다. 사무실을 마련한 그는 우선 예비 창업자들을 위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창업 설명회부터 상권 분석, 교육, 실전 창업까지 단계별로 나누어 시스템을 갖췄다. 그리고 문의 전화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오는 전화는 받되 절대 먼저 걸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 번 문의 전화를 하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계약을 이끌어 내는 대부분의 프랜차이즈와는 확연히 다른 원칙이었다. 그것은 창업에 열정이 있는 사람만 받겠다는 그 나름의 기준이었다.
창업 설명회도 열정을 보이는 예비 창업자들에 한해서 매주 50명씩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경수 대표가 직접 주도하는 창업 설명회는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8시간이나 진행됐다.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도 따로 주지 않았다.
“나가고 싶은 분들은 나가셔도 됩니다.”
창업 설명회를 시작한 지 3시간 정도가 지났을 쯤, 몸을 배배 꼬는 사람들을 보며 그가 말했다. 이미 집중력이 떨어졌을 시간. 하지만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렵습니다. 힘들어요. 정말 작정하셔도 망할 수 있습니다.”
설명회 내내 이경수 대표는 이런 식이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화이팅!”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안고 온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어떻게 성공하느냐보다 왜 실패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용기를 주기보단 잣대를 제시했다. 그렇게 8시간이 흐른 뒤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다음 날,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근심이 가장 많아 보였던 이들이었다.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찾아온 그들에게 열정은 더 커져 있었다. 바로 이것이 이경수 대표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는 프랜차이즈의 본사에게 중요한 것은 계약을 많이 성사시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가맹점의 성공을 돕고 진정한 창업자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경수 대표는 매주 토요일, 예비 창업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발로 뛰어 얻는 것
얼음장 같은 물을 맞고서도 계약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는 두꺼운 교재를 건네준다. 재료를 다듬고 써는 방법부터 냉장고 속의 재료 보관법까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교재는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이를 숙지시켜 시험을 보는데, 90점을 넘지 못하면 계약을 할 수 없다. 숙제는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가게를 얻을 장소를 찾아오라는 것이다. 다른 프랜차이즈 업체처럼 상권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 찾아오라는 것이다.
“제가 직접 찾으라고요? 찾아 주시는 거 아닙니까?”
“직접 발로 뛰셔야 됩니다. 사장님 가게이지 않습니까.”
단호하게 대답한 이경수 대표는 이어 3가지 팁(tip)을 알려 주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아파트나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 두 번째는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편 가게들을 보게 되는 횡단보도 앞, 그리고 마지막은 파리바게뜨 옆이었다. 두 번째 팁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적던 예비 창업자는 파리바게뜨 옆이라는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파리바게뜨의 매장이 전국에 2,000개가 넘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죠. 또 하나는 대부분이 포장 매출이라는 겁니다. 저희의 목표도 같습니다.”
예비 창업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세 번째 팁도 받아 적었다. 이렇게 예비 창업자에게 직접 발 벗고 뛰게 하는 것은 창업자가 갖춰야 할 기본사항인 상권을 보는 안목을 높여 주기 위한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발로 뛰어 얻은 것에는 애정이 생기고 그 애정은 열정과 함께 성공에 다가서는 힘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탄탄한 본사 시스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연장 교육을 계속 받겠습니다.’
계약하기 전, 예비 창업자들은 이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 여기서 교육이란 본사 직영점에서 받는 실전 교육을 의미하는데, 이론 시험에 이은 두 번째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실전 교육은 1주일간 진행되는데 합격하지 못하면 끝없는 연장 교육이 이어진다.
이렇게 까다로운 가맹 원칙에도 불구하고 2007년 100호점 돌파 이후 2008년 200호점, 2009년에 500호점을 넘어선 데에는 본사의 탄탄한 시스템이 바탕이 되었다.
전 매장의 맛을 동일하게 하기 위한 이경수 대표의 노력은 2009년, 물류센터 증축과 자체 공장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전국 3곳에 물류센터 거점을 두고, 하남의 자체 공장은 전자동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자체공장에서 전자동으로 만들어지는 튀김가루, 떡볶이 소스 등의 식재료는 철통 보안 속에 이틀에 한 번씩 가맹점으로 납품된다. 식재료에 대한 비밀은 그야말로 며느리도 모른다. 공장 직원도 배합되어 나오는 재료를 포장하는 정도이고, 생산되는 공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위생과 직원이나 식약청 직원이 전부이다.
또 이경수 대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재료의 가격이다. 그는 ‘가락시장보다 싼 값으로 가맹점에 납품한다’는 철칙을 고수한다. 본사가 납품하는 재료의 가격이 시중가보다 저렴하지 않으면 재료를 아끼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재료를 섞어 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물류비와 인건비를 절약하는 방법으로 원재료비를 축소하고 있다. 액체 형태의 떡볶이 소스를 가루 형태로 만든 것도 물류비를 아끼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밖에도 슈퍼바이저 시스템을 도입해 각 매장의 위생과 재료 보관 상태 등을 점검해 소비자에게 믿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탄탄한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