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의 아버지 루카 파치올리가 나타나다
나: 시키는 일도 많은데 월급은 왜 이렇게 짜냐.
나는 옆에 앉은 P 대리에게 한탄했다.
오늘은 내가 소속한 영업 2팀의 회식이다. 나는 주로 기업을 상대로 영업 지원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판매하고 있다.
올해로 입사 5년 차, 나와 동기 P 대리는 반년 전에 나란히 대리로 승진했다. 말만 승진이지 연봉이 조금 올랐을 뿐인데 내 일하랴, 후배들 챙기랴 책임만 늘었다. 더구나 업무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야근을 금지하는 바람에 잔업은 고스란히 퇴근 후의 몫이 되었다. 최저 수준은 아니라지만 노동시간을 따져 보자니 불만이 터져 나왔다.
K 과장: 어머, 회계 리터러시1)가 있으면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1) 리터러시(literacy)란 원래 ‘읽고 쓰는 능력’을 말하는데, 적절하게 이해, 해석, 분석, 표현하는 활용 능력이나 응용력을 뜻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K 과장님이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다른 테이블에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오신 거지?
K 과장: 경영학과 나왔고 회계 자격증도 있다며. 그런 걸 두고 무용지물이라고 하나?
직속 상사인 K 과장님은 최연소로 영업 2팀 과장이 된 능력자다. 솔직하고 시원시원해서 상사의 신임이 두터운데다 부하직원에게도 인기가 있다. 술만 들어가면 입이 험해진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랄까. 존경스럽지만 표적이 되면 골치 아픈 상대이기도 하다.
나: 회계 리터러시가 뭔데요?
K 과장: 회계 지식을 활용하거나 응용하는 능력이야. 일하는 데 회계 자격증이니 계정과목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회계 지식을 활용할 줄 알아야지.
나: 회계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이라…….
과장님 말대로 나는 경영학부를 졸업했고 회계학 수업도 들었다.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회계 자격증2)도 땄지만, 딱히 흥미가 없던 터라 영업부에 지원했고 희망했던 대로 영업부에 배치되었다.
2) 대표적인 회계 관련 자격증에는 전산회계, 회계관리, FAT 등이 있다.
지금껏 영업하면서 회계나 부기 지식이 필요한 적도 없었기에 전공이며 자격증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 영업에서 회계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죠?
K 과장: 대리까지 달았으니 그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야지.
도대체 회계를 어떻게 활용하라는 걸까? 애초에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니 처음부터 다시 공부라도 해야 하나?
K 과장: 아무튼, 회계 리터러시가 있으면 ‘월급이 짜다’라는 말이 쉽게 안 나올 걸?
회계 리터러시, 회계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이 대체 무슨 말이지? 몰래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 봤지만 정확한 뜻은 찾지 못했다. 과장님의 독자적인 이론인 걸까?
과장님의 말이 신경 쓰이면서도 나는 2차로 노래방까지 갔다가 잔뜩 취해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한 나는 취직하고 나서도 줄곧 수도권에서 살고 있다. 반년 전, 대리로 승진하면서 대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와 함께 살 생각에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평소 직장과 집을 왕복하기만 할 뿐이니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딱히 재미있는 일도 없다. 회사 일에는 열정이 식었고 이렇다 할 취미도 없다. 적은 월급이 아닌데도 매달 빠듯하다. 막 서른 줄에 접어들었는데 인생 다 산 기분이 든다.
나: 회계 리터러시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회계학 교과서를 꺼냈다. 대학 부교재로 샀다가 내용이 어려워서 몇 장 넘긴 게 고작이지만, 꽤 비쌌던 기억이 떠올라 이사할 때도 결국 버리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팔랑팔랑 책장을 넘겨보니 ‘회계의 역사’라는 첫 번째 장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 회계의 근간인 복식부기3)는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했다고 한다. 당시 상인들이 쓰던 복식부기의 원리를 1494년 『산술집성』이라는 책으로 정리한 사람이 ‘회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루카 파치올리4)다.
3) 원인과 결과라는 거래의 두 가지 측면을 각각 기록하는 방법.
4) 회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카 파치올리(Fra Luca Bartolomeo de Pacioli, 1445~1517)는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수도사다.
나: 루카 파치올리는 시험에 나온다기에 벼락치기로 외웠지. 다시 봐도 참 웃긴 이름이라니까.
예전 일을 떠올리면서 몇 장 읽어 봤지만 ‘회계 책은 왜 이렇게 재미없을까?’, ‘이런 지식이 정말 업무에 필요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 이봐, 방금 뭐라고 했나?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나: 뭐지, 꿈인가?
?: 누구더러 웃기다고 했느냔 말일세.
틀림없이 누군가가 있다.
나: 헉! 당신 누구야?
누워 있던 침대 바로 옆,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새까만 천을 두른 키가 큰 남자가 서서, 험상궂은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설마 강도가 들었나?
나: 이봐, 이, 이 집에 돈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 당황하지 말게. 자네가 내 험담을 하기에 나와 봤을 뿐이야.
험담? 내가? 아니, 그보다도 신고가 먼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스마트폰은 공교롭게도 이 수상한 남자의 바로 뒤에서 충전 중이다.
?: 자네, 방금 내 이름이 우습다면서 비웃지 않았는가.
대체 누구지? 말투는 또 왜 이래? 시대극이라도 찍나? 방 안에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단둘인,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상황인데 묘한 말투 때문인지 긴장이 서서히 풀어졌다. 찬찬히 살펴보니 험상궂어 보이지만 어딘지 친숙하다. 나이는 쉰쯤 되었을까.
?: 이래 보여도 나는 수학자이자 수도사라네.
나: 수학자이자 수도사라면 서, 설마 루카 파치올리는 아니죠?
?: 그래. 내가 바로 파치올리일세.
회계 리터러시요? 저 영업부인데요
설마 농담이겠지. 웃긴 이름이라고 했던 말을 들었다면 내가 자기 전부터 이 방에 있었다는 뜻인데, 애초에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나: 루카 파치올리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인데 아직도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파치올리: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말게나. 그보다 자네, 회계 리터러시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지?
나: 네? 그걸 어떻게 아셨죠?
이제 알겠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아무래도 K 과장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파치올리: 자네 상사 말이 맞네. 자네의 일이며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건 회계 리터러시가 없기 때문일세.
나: 도대체 회계 리터러시가 무슨 뜻이죠?
파치올리: K 과장이 말하지 않았는가. 회계 지식을 활용하거나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벌써 잊은 건 아닐 테지?
나: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 두 분 아는 사이신가요?
파치올리: 아는 사이는 아니라네. 단지 내가 뭐든 꿰뚫어 보고 있을 뿐이야.
꿈 치고는 너무 생생하다. 이참에 깨기 전까지 궁금한 걸 모두 물어봐야겠다.
나: 저는 영업부 소속인데요. 어째서 회계가 필요하다는 거죠?
파치올리가 목을 움츠리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파치올리: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영업직뿐만 아니라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회계 리터러시를 알아야 한다네.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회계 리터러시를 알아야 한다니, 정말일까?
취업 준비할 때 어학 성적, 컴퓨터 활용 능력, 회계 자격증이 필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회계 자격증 역시 순전히 취업을 노리고 땄을 뿐이지만, 입사 후로 부기나 회계에 관한 지식을 사용할 기회는 없었고 공부한 내용도 서서히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파치올리: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회계 리터러시가 꼭 필요하지.
나: 일을 하지 않아도 회계 리터러시가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파치올리: 당연하지. 돈 없이 살 수는 없으니까. 회계 리터러시가 없으면 평생 돈에 휘둘리면서 살게 된다네.
나: 평생 돈에 휘둘린다고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안 그래도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니. 하지만 대학 때 배운 회계 지식이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삶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가계부를 쓰는 것도 지식을 활용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 방금 하신 말씀은 가계부를 써서 돈을 관리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파치올리: 아니, 가계부도 좋은 습관이지만 일부러 ‘회계 리터러시’라는 말을 쓸 정도는 아니지.
듣고 보니 그렇다. K 과장님도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테지.
파치올리: 한마디로 자네의 실적이나 인생이 시원찮은 이유가 다 회계 리터러시가 없어서라는 말일세.
나: 잠깐만요. 그래도 전 경영학 전공에다 나름 자격증도 땄다고요!
파치올리: 다 쓸모없다네. 회계 리터러시가 있다면 지금과는 정반대일 테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은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파치올리: 회계 자격증 1급을 따고도 회계 리터러시가 없는 경우야 수두룩하니까. 자네도 이해하기 어렵겠지.
나: 회계 자격증 1급을 땄는데 회계 리터러시가 없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파치올리: 자격시험에서 묻는 지식은 회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네. 왜, 부기에 빠삭한데도 인생이 영 신통치 않은 녀석들이 있지 않은가.
경리부 소속인 동기 T 대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웬만한 세무회계 자격증을 섭렵한 그도 만사 순탄치만은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나: 회계 리터러시가 어떻게 쓸모가 있다는 말씀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파치올리: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을 테지.
나: 그럼 저에게도 회계 리터러시를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꿈이든 현실이든 아무래도 좋다. 어쩌면 내 인생을 좋은 쪽으로 바꾸어 줄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파치올리: 흠. 자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이름을 우스개 거리 삼지 않았나.
나: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파치올리: 게다가 수업료가 꽤 비싸다네.
나: 네? 돈이 드나요?
파치올리: 그야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얼마가 든다는 걸까? 몇 십만 원? 아니면 몇 백만 원?
나: 파치올리 선생님은 회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이시니 그야 비싸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다지 돈에 여유가 없지만요.
파치올리: 뭐라고, 회계의 아버지? 자네 지금 회계의 아버지라고 했나?
그 말을 듣자마자 파치올리의 눈빛이 변했다. 입꼬리가 씩 하고 올라가는 게 입이 귀에 걸릴 듯하다.
나: 맞습니다. 회계학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거든요.
파치올리: 회계의 아버지라. 흠, 그거 듣기 좋군.
파치올리는 딱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파치올리: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 수 가르쳐 주겠네.
나: 정말이시죠? 감사합니다!
참 단순하고 알기 쉬운 스승을 만나 다행이지만, 결국 꿈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기뻐해도 될지 망설여진다.
파치올리: 회계 리터러시를 모르는 사람이 자네뿐만은 아닐세. 회계 또는 부기와 혼동하기 쉽고 말이야. 비즈니스에 회계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서둘러 부기 공부를 시작하지. 그런 식으로 부기를 공부하니까 회계 역시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걸세.
파치올리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치올리: 부기를 공부해서 재무상태표(B/S)5)나 손익계산서(P/L)6)를 읽을 줄 알아도 관련 부서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얼마나 쓸모 있겠느냔 말일세.
5) Balance Sheet를 줄여 B/S라고 한다. 재무제표의 하나로 회사의 재정 상태를 나타낸다.
6) Profit and Loss Statement를 줄여 P/L이라고 한다. 재무제표의 하나로 회사의 경영 성적을 나타낸다.
나: 맞습니다. 그래서 K 과장님이 굳이 회계 리터러시라는 표현을 쓰신 이유가 궁금했어요.
파치올리: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회계 리터러시라는 말에 엄밀한 정의가 없다네.
나: 그런가요?
파치올리: 구글 선생이 뭐라던가?
르네상스 시대 사람이 어떻게 구글을 알고 있는지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나: 기사를 몇 개 찾아서 읽어 봤는데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더라고요.
파치올리: 그렇겠지. 그럼 자네는 회계 리터러시가 구체적으로 뭐라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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