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이순영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성균관대 대학원 번역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가난한 마음 마더 데레사》 《6일간의 깨달음》《아름다운 부자 척피니》 《나는 너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A장조의 살인》등이 있다.
삶에서 가장 즐거운 것
지은이_존 러벅
옮긴이_이순영
펴낸이_전병석
펴낸곳_(주)문예출판사
신고일_2004. 2. 12. 제 312-2004-000005호
(등록일 1966. 12. 2. 제 1-134호)
주소_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84-4
대표전화_393-5681
팩시밀리_393-5685
E-mail_info@moonye.com
제1판 제1쇄 펴낸날_2009년 4월 30일
ISBN 978-89-310-0639-1 03840
전자책 제작_빌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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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EASURES OF LIFE
BY
SIR JOHN LUBBOCK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09 by Moonye Publishing Co., Ltd.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에게 상장과 졸업장을 수여하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영광이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서게 되면 졸업장을 나누어 주는 것 말고도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과 격려의 말도 으레 하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 걸핏하면 의기소침해하던 나였지만, 나 역시도 그런 자리에 참석해 우리가 누리는 특권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그때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연설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단, 특별한 상황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은 생략하기도 했고 기억나는 내용 일부를 임의로 바꾸거나 다른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픈 마음에 들려주었던 내 생각과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모두 다 언급할 수는 없었다거나 정말 중요한 즐거움과 은총 역시 일부는 빠졌다는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을 다시 읽다 보니 지나치게 독단적으로 보일 만한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연설을 하던 상황을 독자들이 고려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1887년 1월 켄트 주에서
존 러벅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 자신의 잘못이다.
신은 모든 인간을 행복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삶은 위대한 선물이며,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절대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능력이 닿는 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물론 자신의 행복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행복을 얻으려 해봐야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얼마든지 있겠지만, 그 즐거움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즐거움으로 인해 머지않아 슬픔을 맛볼 것이다. 로마의 철학가이자 정치가인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믿을 수 없고 잔혹한 두 지배자인 쾌락과 슬픔에 끊임없이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면 위험하고 비참한 노예 상태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선생님들이 ‘의무를 다하는 행복’뿐만 아니라 ‘행복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들려준다면 분명 세상은 더 행복하고 밝아질 거라 생각한다. 누구나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다른 사람 또한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쾌활한 친구는 사방을 밝히는 화창한 날과 같다는 생각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이 세상을 궁전으로 만들 수도 있고 감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매사를 우울하게 바라보며 슬픔에 잠기고 자신을 운명의 희생자라고 여기는 편이 오히려 편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 밝고 쾌활해지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을 행복하게 유지하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각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도 돌보고 관리해야 한다.
슬픔과 즐거움은 묘하게 한데 얽혀 있다. 영국의 시인 셸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앞뒤를 살펴보고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한다.
우리의 순수한 웃음에는
얼마쯤의 고통이 배어 있다.
우리가 부르는 달콤한 노래는
가장 슬픈 생각을 이야기한다.
살다 보면 사소한 일에서도 우울해지기 쉽다. 즐거워야 할 일에서조차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은 그의 4행시에서 인간의 삶을 더할 수 없이 암울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 뿐이지만,
우리가 얻는 것은 고뇌와 비통뿐이네.
그렇게 살다가, 인생의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한 채
후회만 가득 안고서 떠나야 한다네.
하지만 설령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전혀 다른 이상을, 더 건강하고 더 단단하며 더 고귀한 희망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생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살아야 한다. “아무 계획도 없이, 강 위의 지푸라기처럼 그저 떠내려가듯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려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오디세우스가 말한 것처럼 “멈춘다는 것, 끝을 낸다는 것, 윤을 내지 않아 녹슬어버리는 것, 사용하지 않아 빛을 잃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마치 숨 쉬는 것이 삶의 전부이듯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괴테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더는 어중간하게 살아가지 않을 것이며 인생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모두 누리기로” 결심했노라고 말한다.
인생은 시간이 아닌 생각과 행동으로 평가해야 한다. 삶은 유쾌하고 재미있고 행복해야 하며 분명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속담처럼 “모든 사람들이 광장에 살 수 없다고 해도 누구나 태양을 느낄 수는 있다.”
어떤 일에서든 최선을 다한다면, 사소한 어려움을 부풀리지 않는다면, 사물의 밝은 면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단호하게 본다면,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은총들을 놓치지 않는다면, 삶이란 정말로 멋진 유산임을 분명 느낄 것이다.
시중드는 사람이 많으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네.
그가 지나가는 삶의 길에 찾아와
친절을 베푸는 사람마다 짓밟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병들어 창백하고 파리해지고 마네.
아, 위대한 사랑이여! 인간은 하나의 세상밖에 모르나,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나니.
하지만 슬프게도 삶이 주는 경이로운 선물이나 은총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주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우리가 갖고자 한다면 우리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되고 싶은 어떤 존재든 될 수 있으며, 고통과 슬픔을 물리치고 행복을 쟁취할 힘을 얻을 수 있다.
단테는 기회를 흘려보내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인간은 그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은총을 모독하곤 한다.
그러다 나중에 가서야 소용도 없는 후회를 하며
죄를 뉘우친다.
스스로에게서 생명과 빛을 빼앗고
재능을 무모하게 낭비하는 사람은
즐거움 속에서 살아야 할 때 슬픔을 맛보리라.
토마스 브라운 경1605~1682. 영국의 의사·작가은 말했다. “삶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가 눈에 보이는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를 허깨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한다. “내게 해를 끼치는 존재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내가 입은 상처는 내가 만든 것이며, 내가 겪는 고통도 나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고대 로마의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인간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능력에 모든 것을 더해주셨다. 신이 인간을 나빠지도록 만들지 않았는데, 그의 삶이 어떻게 나빠질 수 있겠는가?”
에픽테토스55?~135? 그리스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 자신의 잘못이다. 신은 모든 인간을 행복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늘 만족한다. 신이 선택하는 일이 내가 선택하는 일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일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 그저 주어지는 대로에 만족하라. 그러면 삶이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다. …… 만일 다른 사람이 가진 뭔가를 탐낸다면, 당신의 것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성 베르나르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고통과 병과 고민으로, 상실과 몰인정과 실수와 심지어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냉담함으로 괴로워하곤 한다. 누군가 내뱉은 분노의 말 때문에 하루가 침울하고 어두워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성 베르나르도는 “악을 행하는 무리를 따르기보다는 폼페이의 기둥처럼 혼자서 굳건하게 우뚝 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고립은 그 자체로 굉장히 고통스럽다. 베이컨1561~1626. 영국의 철학자이 말했듯, 인간은 “육지와 동떨어져 있는 섬이 아니라 육지 가운데 있는 하나의 대륙”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주변의 고통에 냉담하게 반응하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행복 역시 느낄 수 없으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아진다. 이기심이라는 차가운 쇠사슬 갑옷으로 무장한다면 삶의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 없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면 그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도 박탈당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악이라고 하는 것이 진짜는 선의 다른 모습일 때가 많다. 그러니 토마스 브라운 경의 말대로, “역경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채 무분별하게 싸워서는 안 되며, 그 역경에 얽혀 있는 은총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플루타르크46?~120? 그리스의 철학자로 《영웅전》의 작가는 “기쁨과 고통은 육체와 정신을 한데 묶는 못”이라고 했다. 고통은 위험의 경고며 존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설령 삶이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긍정적인 쪽에 무게를 둘 수는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불행으로 보일 때라도 용감히 맞선다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운이 오히려 이익이 되는 때가 많다. 그리고 거대한 파괴가 더 큰 영광의 길을 열기도 한다”고 세네카는 말한다.
헬름홀츠가 과학자가 된 것은 병 때문이었다. 1841년에 장티푸스에 걸리면서 가을 방학을 병원에서 보낸 덕에 현미경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병원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퇴원할 무렵에는 얼마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삶의 불행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바르고 유용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릇되고 무익한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불행하게 살 것인가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바보는 시간만이 슬픔에서 구원해줄 수 있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성이 구원한다.” 삶이 철저하게 비참해진다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다. 우리가 만물의 창조주는 아닐지라도 자기 자신의 창조자라고는 할 수 있다.
삶의 빛을 가리는 것은 대단한 슬픔이나 질병, 죽음이 아니라 자잘한 ‘매일의 고통’이다. 우리가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 자체로는 사소하며 쉽게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말 그대로 어리석은 싸움이나 오해가 없다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해지겠는가? 뭔가가 불만스럽거나 불쾌하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나 불쾌함 때문에 자신까지 불행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비록 이런 일이 쉽지는 않다고 해도 말이다.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통 대부분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이는 과오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무지나 경솔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순간의 행복만을 생각하면서 인생의 행복을 희생하곤 한다.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다. 고통에게 다가가는 것은 바로 우리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조금씩 낭비한다. 라 브뤼예르1645~1696. 프랑스의 풍자적 도덕주의자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은 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한다.” 또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시대에나, 근심으로 지친 사람은 허영을 심고 절망을 수확했다.”
“노아는 홍수를 두려워하며 오랜 세월을 살았고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이 포위되기도 전에 그 멸망을 슬퍼한 것”처럼 사람들은 불행을 미리 걱정하며 고통스러워할 뿐 아니라, 절대 일어나지 않을 재난을 두려워하면서 스스로를 심하게 괴롭힌다.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다. 과도한 노동으로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 얘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사실 정작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열에 아홉은 걱정이나 불안이다.
상상 속의 걱정이나 사소한 문제에서 벗어나려다 진짜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에피쿠로스BC 341~BC 270. 그리스의 철학자는 말했다.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 애쓰지만, 그래 봐야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짐일 뿐이다. 쓸데없는 고민을 스스로에게 잔뜩 지우는 셈이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필요도 없는 짐을 지는 것이며, 베이컨의 말처럼 “꼬리는 길게 하고 날개는 짧게” 만드는 것이다. 유쾌한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Alice through the Looking-Glass》에서 보면, ‘백기사’가 여행을 떠나면서 밤에 쥐가 나타날지 모른다며 쥐덫을 준비하고 벌 떼를 만날 때에 대비해 벌통을 챙기는 등 온갖 잡동사니를 모으는 모습이 나온다.
사무엘 헌1745~1792. 영국의 선원·탐험가은 그의 저서 《코퍼마인 강으로 떠난 여행Journey to the Mouth of the Coppermine River》에서 여행을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인디언 도적 떼를 만나 짐 대부분을 빼앗긴 얘기를 들려준다. 헌은 이렇게 말한다. “짐이 훨씬 가벼워져서 다음날부터는 여행이 더 즐거워졌다.”
어려움이 다가올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로운 말을 떠올려보자. “역경에 처할 때마다 이 원칙을 기억하라. 역경을 당당하게 견뎌낸다면 불운이 아닌 행운이 된다.” 정작 우리를 해치는 것은 분노하게 만드는 일보다 분노 그 자체다. 우리는 우리를 분노하고 괴롭게 만드는 행동보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와 괴로움 때문에 더 크게 고통받는다. 다툼이나 가정불화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누구에게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 비난이 정당하다면 경고로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그리고 비난이 가치가 없다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또한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슬퍼해보았자 불행을 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나는 죽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슬퍼하며 죽어야 하겠는가? 나는 사슬에 묶여야 한다. 그렇다고 비탄에 젖어야 하는가? 나는 추방당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즐거워하고 만족스러워하면서 갈 수는 없는 것일까? 누군가 당신을 감옥에 가둔다고 할 때 당신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당신은 내 몸을 감옥에 가둘 수 있지만 나의 정신은 제우스라도 억압할 수 없다.”
행복하지 않다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다. 소크라테스는 30인의 참주 아래서 살았다. 에픽테토스는 가난한 노예였지만 우리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가진 것 하나 없고, 헐벗었으며, 집도 없고, 난로도 없고, 더럽고, 노예가 없고, 도시에 살 수 없는 사람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주님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인간을 보내셨다. 나를 보라. 도시에 살지 못하고, 집도 없으며, 재산도 없고, 노예도 없다. 나는 땅 위에서 잠을 잔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병사들도 없고, 단지 땅과 하늘과 싸구려 외투가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원할까? 내가 슬픔에 잠겨 살아갈까? 내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까? 내가 자유롭지 못할까? 누구라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혹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내가 신이나 인간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누군가를 비난했는가? 내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가? 그리고 당신들이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던가? 내가 그들을 노예처럼 대하지 않던가? 다른 이들이 나를 왕이나 주인을 보듯 하지 않던가?”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일상의 수많은 은총에 감사를 느끼지 않는다. 그 은총들을 하찮게 여긴다.
아이작 월턴1593~1683. 영국 전기작가·저술가은 말한다. “우리가 신에게서 받는 매일의 은총이 흔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찬양하지 않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매일 만나는 천진한 환희와 즐거움에 대해 언제나 신을 찬양해야 한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아름다운 강과 초원과 꽃을 볼 수만 있다면 무엇을 아까워하겠는가? 바로 그런 은총들을 우리는 매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만족은 부를 누리는 데 있지 않으며 욕망을 줄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행운의 나라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뭔가를 원할 수 있으며, 그 바라는 바가 지나치지만 않다면 맘껏 충족시킬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행복에 꼭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러스킨1819~1900. 영국의 평론가·사회사상가의 말대로, “옥수수가 자라거나 꽃이 피는 것을 보는 것, 보습이나 가래로 일을 하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것, 책을 읽는 것,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기도하는 것은 모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제레미 테일러1613~1667.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작가는 말한다. “내 집에 도둑이 들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도둑은 내게 해와 달, 불과 물, 사랑하는 아내와 나를 위로해줄 많은 친구들을 남겨놓았다. 나를 달래줄 사람들이 남아 있어 나는 여전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라도 내 즐거운 표정과 기쁨에 찬 영혼과 바른 양심을 가져갈 수 없다. ……즐거움을 누리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은 쉽게 슬픔에 빠진다. 그는 까다로움 때문에 모든 기쁨을 잃고 가시덤불 위에 앉으려는 사람이다.”
《삶의 수수께끼The Enigmas of Life》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뭔가를 생각하고, 태양과 달과 별을 볼 수 있으며, 땅과 바다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고독하지 않고 무력하지도 않다.”
루터는 말한다. “세상 어디든 천국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해 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늘 만족한다.
신이 선택하는 일이
내가 선택하는 일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오, 신이여!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여!
인간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믿듯이
당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이 땅은 축복받은 기쁨의 거처가 될 터인데.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누린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릴 텐데.
-보에티우스475?~525? 로마의 철학자·정치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가혹한 감독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