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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애완견 한 마리가 광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가을, 신도시의 지하철 역사 앞에 위치한 그곳에는 평일에도 많은 소년들이 뛰어놀았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는 앞사람 허리를 붙잡고 바닥에 길게 늘어놓은 플라스틱 컵을 빠져나가는 묘기를 뽐냈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소년들은 자취를 감췄다. 검은 비닐봉지 하나만 바람에 휩쓸려 허공에 떠올랐다 천천히 내려앉는다.
나는 롯데리아 2층 창가에 앉아 두 시간째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쪽 모서리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노랑머리 여가수의 뮤직비디오가 세 번째 흘러나왔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가는 허리를 비틀며 춤을 춘다.
반년 전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댄스음악은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를 틀어도, 거리를 걸어도, 심지어 헬스클럽 샤워장 안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익숙함은 사람의 취향마저 변화시키지. 그래서 반복학습이 무서운 거야.”
뉴욕에 있을 때 명은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명의 얘기는 사실이다. 나도 어느새 그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으니. 인기가 얼마나 더 지탱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 대한민국은 그녀 세상이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드디어 기다리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공이 커지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광장 건너편에는 편의점과 부동산중개소, 개척교회와 약국, 성인 게임방 따위가 빼곡히 들어찬 상가건물 세 동이 나란히 서 있다. 사내는 가운데 빌딩의 1층 서점에서 나와 광장 한복판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가 간직한 사진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땅딸막한 체구에 팔자걸음, 앞머리가 반쯤 벗겨졌고 유행이 지난 굵고 검은 뿔테 안경을 꼈다.
나는 손등으로 햇빛을 가린 채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걸음이 의외로 빨랐다. 이쪽으로 걸어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롯데리아 안으로 쑥 들어왔다.
5분쯤 지났을까. 광장을 되걸어가는 뿔테 안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른손에 갈색 봉투를 들고 급한 걸음으로 영화관이 입주해 있는 왼쪽 빌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안주머니를 다시 확인한 뒤 서둘러 광장으로 나왔다. 걸으면서 크게 두 번 호흡했다. 지난 두 달 간 사내를 주시해 왔다. 오늘 이후,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빌딩 4층과 5층에 들어선 극장은 좀 어중간한 형태였다. 시설은 깨끗했으나 최신 멀티플렉스도, 그렇다고 철지난 에로물을 틀어주는 동시상영관도 아니다.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 명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 예를 들자면 삐삐나 공중전화, 혹은 버스 토큰 같은…….
매표소 앞에서 상영시간표를 살폈다. 극장은 네 개의 개봉관을 갖추고 있었지만, 사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2시 25분. 장동건 주연의 영화가 막 시작했다.
아파트로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저녁뉴스를 보며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였다. 문 앞에 키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앞머리에 희끗희끗 새치가 보였고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은테 안경과 검은 벨벳 재킷과 자주색 넥타이가 약간의 위압감을 주었다. 나이는 내 또래, 마흔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황재복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만.”
약간 쉰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정확한 발음에 은근히 지성미가 배어나는 말투였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가 사내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주>휴보텍 대표이사 민영수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그의 명함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내가 물었다.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집 안을 훑어봤다. 아내와 별거하면서 이사 온 열세 평짜리 달동네 임대아파트라 손님이 들이닥치면 곤혹스럽다. 군내가 밴 이불이 방바닥에 깔려 있고 포마이카 상 위에는 빈 컵라면 용기와 담배꽁초가 수북이 들어찬 소주병이 보였다. 개수대에는 물때를 뒤집어쓴 그릇이 며칠째 방치돼 있었다. 낯선 사람을 이 집구석으로 끌어들이긴 싫었다.
맨발에 운동화를 꿰신고 아파트 단지 앞 커피숍으로 갔다. 창가 쪽 소파에 앉자마자 용건부터 물었다.
“대체 뭔 일이쇼?”
스스로 생각해 봐도 퉁명스럽다. 하지만 적당한 감정의 노출은 분위기를 제압하는 무기. 나는 형사였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의뢰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고 없이 찾아와 폐가 됐다면 부디 용서하십시오.”
민 사장이란 작자는 부루퉁한 내 표정에 긴장했는지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교양도 지나치면 부담스러운 법. 왠지 모를 거부감이 치밀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찍 은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선배이신 조태구 경감님이 추천해 주셔서 왔습니다.”
순간, 설거지물을 삼킨 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왔다. 조 경감은 자기 보신에 철저한 개새끼다. 상사든 부하든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는 악질 쓰레기. 그런 조 경감이 보냈다면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긴장한 채 낯선 의뢰인의 외모를 다시 훑었다.
“연쇄살인사건입니다. 몇 달 전에 시작된…….”
민 사장은 모호한 말을 내뱉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퇴근길 사람들이 아파트 단지로 이어지는 언덕을 부지런히 오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민 사장이 다시 고개를 틀었다.
“혹시 어제 낮에 총 맞아 죽은 사내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조금 전 뉴스에서 봤소만. 아직 목격자도 없다더군요.”
“제 의뢰는 바로 그 사건입니다.”
민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근심 어린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다. 괜스레 눈빛 마주치기가 거북해 이번에는 내가 창밖을 내다봤다.
빨간 추리닝의 뚱보여자가 흰 털북숭이 개를 안고 지나갔다. 같은 층 908호에 혼자 사는 이혼녀. 투포환 선수의 외모를 지닌 그녀는 석 달 전 이사 왔다. 밤낮으로 짖어대는 개를 키우는데 주민들 항의가 빗발쳐도 꿈적 안 했다.
“다른 집도 개 키우면 될 것 아냐.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지랄이!”
이웃의 불만을 전하는 늙수그레한 경비원에게 그녀는 남자처럼 걸걸한 목소리로 쌍욕을 해댔다. 그 소란 이후 아무도 그녀의 개 사육에 토를 달지 못했다.
커피숍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구석 스피커에서는 잡음 섞인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카운터의 여자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주말연속극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새 담배를 빼 물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영화는 이미 시작됐다.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목요일 낮, 극장에 들어앉은 인간은 대체 어떤 족속들일까. 관객은 기껏 다섯. 뿔테 안경은 측면 구석 자리에 처박혀 있다. 나는 그 뒷좌석에 앉았다. 분명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사내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햄버거만 우적우적 씹어댔다. 달짝지근한 소스 냄새가 코끝에 전해져 왔다.
스크린을 올려다봤다. 미국 국기를 단 화물선이 타이완 해역을 항해 중이다. 잠시 후, 무장 해적 한 무리가 갈고리 로프를 이용해 갑판에 침투한다.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22구경 피스톨을 꺼냈다. 소음기를 꽂기 위해 손목을 비틀자 혈관이 두둑 일어섰다. 손바닥을 적시는 금속성의 감촉. 긴장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해적들이 조타실에 들이닥쳤다. 두두두둥 커지는 음향효과. 거기에 맞춰 일제히 기관총을 난사한다. 피가 튀고, 선창이 박살 나고, 생사의 비명이 스피커를 타고 와 바로 곁의 일인 양 귓전을 때렸다.
나는 소음기 끝을 앞자리 사내 뒤통수에 겨눴다.
기관총 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타르르릉! 선실에 몰려 포커를 치던 선원들이 대적 한번 못 해보고 쓰러진다.
나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를 빠져나온 납덩이가 뿔테 안경의 뇌 속에 박혔다. 큭!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햄버거가 바닥에 떨어져 흐트러졌다. 덩치 큰 몸뚱이는 몇 번 버둥대더니 그대로 의자 위에 굳어버렸다.
대체 이 대범함은 누구한테서 물려받은 걸까. 떨림도 없고 담담했다. 어둠 속에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킬러의 손. 믿기지 않는다. 이것도 명의 말처럼 반복학습의 효과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늘 정확한 사람이니까.
객석은 여전히 캄캄하고, 음향은 시끄럽고, 관객들은 영화관람 외의 일에는 무관심하다. 나는 다시 스크린을 올려다봤다. 갑판에 쌓인 시체가 하나씩 바다에 버려진다. 핵 위성유도장치를 탈취한 두목은 소형 보트로 갈아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앞좌석의 사내는 미동도 없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튼 채 영원한 잠에 빠졌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나는 뒤쪽 출입구로 나왔다. 검표원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매점 안의 여자가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다시 손거울을 바라봤다. 그녀는 곧 눈썹 다듬는 일에 열중했다.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다. 거울 앞에서 허리를 쭉 펴고 아이보리색 바바리를 살폈다. 피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물을 잠그고 화장지로 물기를 닦아냈다. 축축한 건 뭐든 질색이다. 비상계단이 있지만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힘껏 눌렀다. 뉴욕의 명은 말했다.
“조급증이 늘 실수를 낳지. 일의 성패는 태연함이야.”
다시 광장을 가로질러 롯데리아로 돌아왔다. 새 커피를 들고 2층에 올라가 30분 전 그 자리에 앉았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냅킨으로 꼭꼭 눌렀다. 익숙한 음악이 또 귀를 후벼 파고 검은 액체가 목젖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 컷 한 컷 되짚어봐도 실수한 기억은 없다. 쿵. 쿵. 쿵. 쿵. 규칙적으로 심장을 때리는 박동. 그 리듬에 맞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영화는 한 시간이 더 지나야 끝난다. 초조함과 공존하는 지겨움은 질색이다. 가방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줌을 최대한 당겨 광장에 떠다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찍었다. 역광. 피사체가 흐릿하다. 플래시 기능을 없애고 셔터를 눌러보았다. 비닐봉지와 광장은 본래의 검고 흰색을 깨끗하게 드러낸다. 이것도 반복학습의 효과일까.
커피가 차게 식었을 무렵 손목시계를 봤다. 지금쯤은 분명 누군가 시체를 발견했을 터. 청소하는 여자가 가장 확률이 높지 않을까. 빗자루를 떨어뜨리며 어둠 속에서 비명을 질러댈 그녀에게 잠시 미안한 맘이 일었다.
“이걸 좀 봐주세요. 형님 유품에서 나온 겁니다.”
민 사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에는 네 명의 남자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표정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화질이 선명했다.
“살인사건과 연관이 있나 보군요?”
나는 사진을 들어 천장의 불빛에 비춰보았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표정이 묘했다. 사우나에서 막 나와 긴장감이 풀린 것 같기도 했고, 긴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설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올 초, 뉴욕 JFK공항에서 찍은 겁니다. 제일 왼쪽에 있는 사람이 제 형님이죠. 올 여름 설악산에 갔다가 호텔방에서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의심스러운 건 사인이 심장마비였다는 겁니다. 평소 건강했거든요. 부검을 했지만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경찰은 단순 사고사로 처리했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진 속 두 번째 사람이 죽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어제 극장에서 총 맞아 죽은 사내가 세 번째 남잡니다.”
“다 아는 사람들인가요?”
“아뇨, 형님 외엔 낯선 얼굴들입니다. 그러니 의혹이 더 커질 수밖에요.”
“극장 피해자가 세 번째 남자라는 건 어떻게 아셨소?”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까요. 신문과 방송에도 크게 나왔잖습니까.”
나는 다시 사진 속 얼굴들과 민 사장을 번갈아 보았다.
“왜 경찰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민 사장은 으음 하고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건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경찰을 못 믿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 선에서 처리하고 싶단 뜻입니다. 그래서 황 선생님을 찾아온 거고요.”
“그 말뜻은…….”
“신고를 하면 경찰에 많은 얘기를 해야 되겠죠. 그런데 회사에는 약간의 도덕적 문제와 새 나가면 곤란한 기밀들이 많습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남 모를 비밀을 많이 품고 있단 뜻입니다. 회사는 코스닥 등록심사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낯선 형사들 앞에서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까발리고 싶지 않아요.”
민 사장은 팔짱을 낀 채 또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돈깨나 있는 새끼들은 늘 저딴 식이다. 선해 보이던 얼굴이 불현듯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근데 말이오, 이런 큰 살인사건을 나 같은 퇴물 형사가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약간 비딱하게 쏘아붙이자 민 사장 콧등이 꿈틀했다. 그것은 못 봤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짧은 순간. 이내 얼굴을 환하게 펴고 더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황 선생님께 살인범 잡아달라고 안 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사건의 진실입니다. 형님과 그들과의 관계, 그리고 살인동기. 제 추측이 맞다면 사진 속 네 번째 남자도 어디서 곧 시체로 발견되겠죠. 행여 그런 일들이 나중에라도 큰 화로 돌아올까 두렵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나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민 사장은 첫인상과는 달리 도전적으로 나왔다.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돈 한 푼이 절실한 데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걸 물어봤다. 그렇다고 즉석에서 확답을 줄 사안은 아니다. 성급한 결정은 후회를 낳는 법. 게다가 조 경감까지 얽혀 있다. 나는 배짱 퉁기듯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쇼.”
민 사장은 숨을 길게 내쉬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운전기사가 딸린 회색 벤츠는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차 넘버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저장된다. 희한하게도 그런 작업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이뤄진다. 반년을 넘게 쉬어도 속일 수 없는 직업 근성. 니미럴.
언덕길을 오르며 생각했다. 민 사장의 얘기는 진실일까. 말 못할 사연은 뭘까. 여자? 탈세? 사기? 게다가 약간의 도덕적 문제라……. 참 묘한 뉘앙스를 품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범죄 냄새가 풍겼다. 난 사건 냄새를 잘 맡는 형사였다.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얼굴들을 찬찬히 뜯어봤다. 첫 번째 사내, 두 번째 사내, 어제 극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세 번째 사내. 그리고 앞으로 뒈질지도 모를 네 번째 사내도.
경광등을 번쩍이며 순찰차 한 대가 급정거했다.
예상시간은 어김없었다. 제복경찰 둘이 차에서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극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통유리창 너머로 그 광경을 확인했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롯데리아를 나와 천천히 광장을 걸었다. 한줄기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허공을 떠돌던 검은 비닐봉지가 달려와 발등에 달라붙었다.
12월 초순치고는 의외로 공기가 따뜻하다. 내 나이 열여덟 때, 그 해 12월의 바람은 몹시도 찼다. 엄마의 유골이 든 항아리를 들고 화장터를 나오는데 어찌나 춥던지 얼굴이 뻣뻣하게 얼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온수처럼 뜨뜻했다.
장의차를 타고 구비진 시골길을 내려오다 기와지붕 너머로 감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떨어지지 않은 홍시가 몇 개 남아 있었는데, 그 빛깔이 너무 선명해 눈을 뗄 수 없었다.
“까치를 위해서 일부러 남겨두는 거야.”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옆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감나무에 고정했다. 까치밥, 얼어붙은 볼, 유골함을 싼 흰색 보자기. 그런 것들은 레이저로도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12월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잊고 싶어도 꼭 이맘때면 뇌와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 뒤돌아서서 다시 광장을 봤다. 이제 여기에 올 일은 없겠지.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변하는 동안 참 많이도 왔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사실은 동네 주민보다 더 잘 안다. 롯데리아 커피는 컵 보증금을 포함해 1100원이고, 지난달에 아이스크림 체인점 하나가 문을 닫았다. 부동산중개소 노총각 사장은 틈만 나면 행복약국의 관리약사에게 집적댔다. 그리고 서점의 뿔테 안경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목요일, 혹은 금요일 영화관을 찾는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앰뷸런스가 극장 앞에 멈춰 섰다. 시간이 한순간 멈춘 듯,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내가 처리한 일이 얼마나 큰일이었나 그제야 실감한다.
지하철 역사는 더러웠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눌러 붙은 껌과 휴지통을 빗겨나 뒹구는 쓰레기들. 냉난방 공사를 위해 뜯어놓은 천장은 은색 배관이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 SF영화에서 본 미래의 폐허도시를 닮았다.
플랫폼 나무의자에 부녀가 나란히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부녀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둘 다 족제비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부모의 결점을 자식이 물려받는 건 슬픈 일. 닮은 얼굴처럼 자식의 운명도 부모를 닮아 흘러가면 어떡하나.
엄마가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윤곽조차 희미해진 얼굴. 엉겁결에 엄마를 빼닮았다는 콧등과 볼을 만져보았다. 나는 무엇을 물려받았나. 알 수 없었다. 우리는 17년을 같이 살았지만 그것을 깨치기엔 시간이 짧았다.
벨소리가 들리고 한쪽 어둠 속에서 거대한 전동차가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승강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종로까지 한 시간. 낡은 지하철의 갑갑함과 어수선함이 고역스럽지만 오늘은 참을 수 있다.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사진 속 세 번째 남자를 해치웠다. 이제 하나 남았다.
민 사장과 헤어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 9시가 넘었다. 습관처럼 전화기의 메시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새 두 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임마! 휴대폰 다시 살려라. 아님 집구석에 틀어박혀 꼬박꼬박 전화를 받든지.
하나는 바람난 중년부부 뒷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흥신소 박 실장이었다. 일거리가 생겼으니 모레쯤 사무실로 들르란다. 그는 가끔 잔일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관리비라도 제때 내려면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아니긴 했다. 그러나 몸도, 맘도 쉬이 동하지 않는다. 언제 술 한잔 하자는 이야기가 덧붙어 흘러나왔다.
박 실장은 형사 시절 파트너였다. 대학을 다니지 못했으나 박식했고, 용의자를 물고 늘어지는 근성을 지녔다. 눈빛과 말투는 약아 보이지만 배운 척 재는 놈들의 교활함과는 달랐다. 실력과 근성을 갖춘 강력계 형사. 그의 캐릭터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초짜 형사들은 그를 우상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조직은 한순간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았다. 올 봄,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금전 거래가 있었고 석간 사회면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났다. 다음 날 아침뉴스에서 다시 조졌다. 서장은 분노했고 조직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박 형사 하나로 사건을 덮기에는 불길이 너무 커져 있었다. 표적은 나였다. 파트너로서 그의 비리를 방조했다는 게 이유였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뜻밖에도 박 형사는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그리고 권총을 반납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사 고발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감봉이나 정직 정도면 충분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총대를 메는 상관은 아무도 없었다.
“운이 나쁜 게지. 운이 나쁜 게야.”
똥 묻은 돈 나눠 처먹은 김 반장은 곁에서 혀만 끌끌 차댔다. 행여 불똥이 튈까 오줌 지린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
얼마 뒤, 형사계장 조 경감이 고향 후배인 출입기자에게 찔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바른말 잘하고 사사건건 대드는 박 형사를 불편해 했더랬다. 하지만 풍문일 뿐. 경찰은 증거로 말해야 한다. 증거 없는 수사는 수사가 아니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증거! 니기미 씨팔, 증거!
박 형사는 두 달 뒤 조회시간에 다시 나타났다. 옛 동료 책상을 일일이 돌며 명함을 돌렸다. 반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흥신소를 차렸노라 했다.
경찰이 손을 못 대는 사건은 의외로 많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 같아요, 가출한 딸년 찾아주세요, 집 앞에 스토커가 진치고 있어요. 소소하지만 시간을 요하는 작업들.
미안함 때문일까. 살아남은 공범들은 부지런히 일감을 던져주었다. 박 실장은 비굴하게도 먹이를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기름만 넣어주면 돌아가는 기계처럼 일했다. 역시 남다른 수완가답게 사업은 금방 번창했다.
사라진 두 달 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깊은 산사에 들어가 뇌를 짜개고 감정선을 제거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의 변신이 타이머 없는 시한폭탄처럼 불안하고 무서웠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경찰서 후문 앞에서 우연히 박 형사와 마주쳤다.
“형님은 배알도 없수?”
나는 목구멍에서 누런 가래를 긁어 올리며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배알이 밥 안 먹여준다.”
그는 무덤덤하게 받아쳤다.
아! 나는 분노를 삭일 수 없는데, 윗대가리들을 용서할 수 없는데, 동료들의 냉랭한 시선을 견딜 수 없는데, 어째서 그는 저토록 관대한가.
인사위원회에서 징계가 결정 나던 날, 나는 만취한 채 형사과를 찾아갔다. 밤에 그곳은 취객과 잡범들의 소란으로 공사판보다 험악하다. 몇몇 당직 동료들은 눈 맞추기를 거부했다.
“이 새끼들, 아가리를 다 찢어버릴 거야!”
나는 목이 터져라 발악했다. 출구 앞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반장 책상 위로 날아올라 전화기를 짓밟고 서류더미를 허공에 날렸다. 컴퓨터 모니터를 들어 바닥에 내리찍었다. 뒤에서 여럿이 달려들어 내 팔을 꺾었다. 우두둑. 뼈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마가 우툴두툴한 바닥에 긁히며 길게 찢어졌다. 피를 흘리며 컴컴한 복도로 끌려 나왔다. 4개월 전의 일이다. 불과 4개월 전. 그때까지 나는 형사였다.
다른 메시지는 아내의 건조한 목소리. 나도 모르게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나미 학원비 입금이 안 됐군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 달랑 두 마디 후 녹음이 끊어졌다. 나의 실직에는 아랑곳없이 양육비가 하루라도 늦으면 전화질이다. 그것도 꼭 어린 딸자식 핑계를 댄다. 가끔은 여덟 해를 같이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혼 대신 별거는 현명한 선택. 하지만 딸아이를 딸려 보낸 것은 실수였다. 나미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에 다녀왔다는데 진찰 결과를 몰라 찜찜했다.
파카를 벗어 방구석에 던지고 탈진한 사람처럼 드러누웠다. 한숨도 푸념도 지쳤다. 등이 뜨뜻해지며 노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불면증.
냉장고를 뒤졌지만 남은 술이 없었다. 어디서 개가 심하게 짖어댔다. 그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908호 이혼녀 얼굴이 겹쳐졌다.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켰다.
“씨팔년!”
서울로 가는 도중 끔찍한 사고가 터졌다.
지상에 위치한 낯선 이름의 역에 급정차한 전동차가 몇 분째 꼼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질 쯤에야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선로에 사람이 실족해 지금 처리 중입니다.
기관사 목소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족이라는 말을 썼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처리에 20분 정도 걸리니 급한 승객은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십시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람 목숨 참 허망하군.”
등산복 차림의 영감 하나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옆자리의 다른 영감이 혀를 끌끌 찼다. 가까운 산에 다녀오는지 둘은 같은 마크가 박힌 붉은 조끼를 입었다. 객차 안은 금세 어수선해졌다.
예전 뉴욕에서 똑같은 사고를 경험했다. 개통한 지 80년이 넘은 지하철은 정말 지옥이다. 새끼 고양이만 한 쥐가 태연히 돌아다니고, 시설 관리가 허술해 사고가 없는 날이 없었다. 그때도 발음조차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역에서 사람이 선로에 몸을 던졌고 옆좌석의 나이 든 흑인이 탄식하듯 말했다.
“Life is cheap.” (사람 목숨 참 허망하군.)
하릴없이 전동차 문에 기대 창밖을 내다봤다. 불쑥 뉴욕의 초겨울 풍경이 떠올랐다. 한국인이 몰려 사는 플러싱의 세탁소, 미용실, 만두집과 목욕탕. 그리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작년 가을, 명과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빌딩숲을 검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구경했다. 붉은 벽돌집이 많은 첼시의 굽은 골목을 손잡고 거닐었다. 달콤하고 씁쓸한 조각난 기억들…….
기관사의 안내방송이 다시 흘러나왔다. 사고 처리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갈등! 지금 결정을 해야만 한다. 내려서 택시를 탈까, 전철 안에서 기다릴까. 하나를 고르는 일은 늘 어렵다. 다급한 일이 없어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내 후회할 선택임을 깨달았다.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났다. 기다림에 짜증난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꺼내 피운 모양이다. 한번 통제력을 잃은 공간은 순식간에 난장판. 영감 둘은 팩소주를 꺼내 종이컵을 주고받았다. 여기저기 휴대전화를 꺼내 지껄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족제비 아빠는 졸고 있고 족제비 딸은 꺅꺅 괴성을 지르며 통로를 뛰어다녔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스팀이 너무 과해 찜통처럼 후끈거렸다. 한쪽 머리가 혈관이 막힌 듯 띵했다.
그때였다. 객차 연결 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티나 터너처럼 머리를 튀긴 중년여자가 들어섰다. 가슴에 대각으로 붉은 띠를 두르고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예수를 믿으시오! 교회로 나오시오!”
맙소사, 이 상황에서 예수라니. 아까 지체 없이 내렸어야 했다. 내 판단은 왜 늘 이 모양일까.
갇힌 공기가 너무 탁했다. 찬바람이 쐬고 싶었다. 갑갑증을 참지 못하고 객차 문을 쾅쾅 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순간 거짓말처럼 꿈적도 않을 것 같던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늦었다고 포기하면 모든 걸 잃지. 아마 목숨도 그럴 거야.”
명의 가르침은 늘 정확하다.
한밤중에 두통이 잠을 깨웠다.
언제부턴가 불면의 밤이 늘었다. 스트레스 탓입니다. 회사일 대충하세요. 한 달 전에 찾아간 동네 정신과 애송이 닥터는 그딴 걸 처방이라 내놓고 무조건 쉬란다. 가소로운 새끼. 그의 주둥이를 향해 반년째 놀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칠 전 말라붙은 가래떡을 씹다 앞니 뒤끝이 살짝 깨졌다. 혀가 닿을 때마다 사포 표면처럼 까끌까끌한 감촉이 신경을 더 날카롭게 했다.
어둠 속에서 야광시계를 봤다. 새벽 3시 47분.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의식은 더 또렷해졌다. 개 짖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스탠드를 켜고 서랍을 뒤져 타이레놀을 두 알 삼켰다. 케이블 채널에서 백인과 흑인이 맞붙은 K-1경기를 보다가 지난 신문을 뒤적였다. 구로구에 사는 한 중학생이 엄마 시신과 반년 간 동거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녀석은 진짜로 엄마가 불사신처럼 환생하리라 믿었던 걸까 아니면 겁에 질려 현실감을 상실했던 걸까.
두통은 가라앉지 않고 대신 한쪽 뇌로 쏠렸다. 할 수 없이 거실등 스위치를 올리고 집 안을 혼령처럼 어슬렁거리다 화장실에서 빨래가 수북한 플라스틱 통을 발견했다. 옷을 세탁기에 쏟아 붓고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탈수통이 따로 달린 구형 세탁기는 한밤중엔 소음을 두 배로 끌어올렸다. 배수관을 빠져나가는 물소리가 폭포수처럼 격렬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분명 무엇에 홀렸어. 타인이 내 의식을 조종하고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복 소매를 걷은 다음 세제를 풀어 개수대에 쌓아둔 그릇을 문질렀다. 탈수가 끝난 옷을 건조대에 널고 나니 시계바늘이 5시 30분을 가리켰다.
창밖은 아직도 어둠. 작정하고 이번에는 방을 치웠다. 문갑 안에서 종이상자를 발견했다. 형사수첩, 동료들과 찍은 사진, 서장의 표창장, 《월간수사》 2권, 경장 계급장, 38구경 권총 케이스……. 그 물건들을 빤히 쳐다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다 부질없는 흔적들. 무덤덤하게 그것들을 찢고 구겨 쓰레기봉투를 채워 나갔다.
싱크대에서 손을 헹구는데 눈길이 선반 위 제라늄 화분에 머물렀다. 여태껏 주의 깊게 보지 않았는데 잎이 새파랬다. 이 개소굴 같은 집에서 유일하게 숨쉬는 생물이었다. 밥사발에 수돗물을 받아 조금씩 부어주었다. 얼마나 더 생명을 지탱할지 모르겠지만.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돋았다. 좁아터진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제멋대로 자란 수염이 텁수룩하다. 뜨뜻한 물로 몸을 적시고 비누로 몸 구석구석을 박박 닦았다. 거품을 만들어 입가에 바른 후 면도기를 문질렀다. 날이 녹슬어 서걱거렸다. 내 살아온 인생처럼 부드럽지가 않았다.
마침내 주위가 환해졌다. 아침 8시가 지났고 두통은 사라졌다. 좀 이른 감이 있었지만 심호흡을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민 사장 목소리는 아침이라 더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 일 맡겠습니다. 대신 수고비는 넉넉하게 쳐주십쇼.”
어제와 달리 공손한 말투. 내 귀에도 지독히 낯설고 간사해 한순간 쪽팔렸다.
팬티 바람으로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들숨을 쉬자 알싸한 바람이 폐를 돌아 나왔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통증이 바늘로 콕콕 쑤시듯 가슴을 찔러댔다. 내면에 잠복했던 무기력증이 드디어 몸의 각질을 뚫고 빠져나가려 했다. 몇 달을 품었던 분노는 폭발 직전에 멈추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밤새 깨달았다.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다시 심호흡을 하고 문제의 사진 속 배경인 뉴욕을 떠올렸다. 가본 적 없는, 앞으로도 갈 기회가 없을 것 같은 거대도시, 뉴욕.
뉴욕의 여름은 서울보다 더 끈적거린다.
두 도시의 사계절은 닮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서울의 눈이 함박눈이라면 뉴욕의 눈은 천둥번개를 동반하고 비처럼 쏟아진다.
남편이 귀가하지 않는 밤이면 엄마는 내 방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슬픈 눈으로 말하곤 했다.
“동생 집에 가보고 싶어. 이담에 우리 현수가 크면 같이 갈까?”
엄마가 그토록 그리던 뉴욕을 너무 쉽게, 그리고 혼자서 올 줄은 몰랐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탔다. 큰 걸음으로 김포공항 로비를 앞서 걷는 외삼촌은 낯선 사람이었다. 어릴 적 딱 한 번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봤을 뿐이다. 국제선 출구를 빠져나가면서 수없이 뒤돌아봤지만 환송객 속에 그 사람은 없었다. 그때 왜 그가 그리웠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남자. 그는 가업을 물려받아 비단 도매업을 했다. 잘생겼고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술 먹고 아내를 때리지도, 주식이나 도박으로 돈을 날리지도 않았다. 단지 엄마에게 관심이 없었고 첫사랑 여자를 다시 사랑했다. 장담하건데 엄마의 자살은 충동적이었다. 자살을 안 했더라도 분명 다른 형태의 분노가 나타났으리라. 남편을 죽이던지, 남편의 정부를 죽이던지. 그러나 엄마는 자신이 희생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뉴욕행을 받아들였다. 열여덟 살이었다. 외삼촌의 일방적 결정에 내 주관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뉴욕 퀸스 플러싱 32번가. 흔히 코리아타운이라 불리는 곳에서 정확히 3년을 보냈다. 첫해 겨울은 집유령처럼 틀어박혀 살았다. 텅 빈 집의 2층 창가에서 눈물만 찔끔댔다. 말도 안 통하거니와 엄마의 죽음이 지구 반대편에 와서야 실감 났기 때문이다.
“외삼촌, 한국으로 돌아갈래요. 아빠가 보고 싶어.”
어느 날 저녁, 내가 식탁 앞에서 울먹이자 외삼촌이 숟가락을 놓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밥알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딴 놈은 잊어! 딴 여자한테 미쳐 가족도 버린 놈이야. 네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니? 응, 으응?”
외삼촌의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봄이 왔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고 처음 집 밖으로 나왔다. 느릿느릿 코리아타운 초입의 청동 조각상까지 걸어가 보았다. 다행히도 한국인이 몰려 사는 거리는 문화적 충격을 줄여주었다. 한글 메뉴판이 걸린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먹고 부산 사투리가 심한 여사장의 목욕탕에서 때를 밀었다. 한인교회에도 가보았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외삼촌 부부는 일 중독자처럼 살았다. 새벽 일찍 가게를 열고 밤늦게 마쳤다. 난 당연히 방치된 식구가 됐는데 차라리 그게 마음 편했다.
제니라는, 두 살 어린 이종사촌이 있었다. 학교에서 자주 사고를 쳤는데 어떤 날은 화장 짙은 얼굴로 새벽에 들어왔다. 옷 깊숙이 밴 술과 담배 냄새. 허벅지까지 올라간 청 미니스커트. 귓불에는 이어링 구멍을 다섯 개나 뚫었다. 그러나 그 정도 일탈로는 미국이란 땅에서 성장하는 동양계 소녀의 불안을 커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더 과감한 일탈을 꿈꿨다.
“나 혓바닥에 피어싱할 거야. 그럼 아빠가 열 받아서라도 봐주겠지?”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지만 외삼촌은 돈 버느라 자식 돌볼 겨를이 없었다.
오전에 랭귀지스쿨을 다녔다. 백인은 거의 없고 일본인과 중국인이 득실대는 학교였다. 그들도 영어를 못했다. 게다가 동일한 피부색이 주는 심적인 편안함. 수업은 만족스러웠다.
같은 클래스 애들과 이따금 맥도널드에 몰려갔는데 그들도 나에게서 위안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름이 유키에라는, 동갑내기 일본 여자애랑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는 지하철을 타고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번화가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유행하는 소품을 골랐다. 피부가 너무 하얘서 백반증 환자 같은 아일랜드인을 만났다. 차도르로 온몸을 감싼 이슬람 여자도 만났다. 단골서점 여주인은 자신이 아프리카 보츠와나 출신이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나라였다. 흑인들은 피부색이 황인종에 가까운 애들도 있고 진짜 연탄처럼 새까만 애들도 있었다. 아무도 날 이방인 대하듯 흘겨보지 않았다.
어쩌면 새로운 기회인지도 몰라. 차라리 잘됐어, 잘됐어, 잘됐어.
고층빌딩 사잇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직접 그걸 깨닫자 새 에너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뉴욕의 공기가 처음으로 푸근하게 느껴졌다. 짧게나마 행복했다.
이듬해 여름, 끔찍한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하다.
오후에 아파트를 나섰다. 근 한 달 만의 외출. 큰길가 우리은행을 찾아 잔고부터 확인했다. 민 사장은 의외로 통이 컸다. 통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꽂혀 있었다. 우선 300을 마누라 계좌로 이체했다. 청원경찰 책상 옆 공중전화에 동전을 쑤셔 넣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계속 울렸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 할 수 없이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나미 학원비 몇 달치 한꺼번에 넣었소. 확인해.”
은행 회전문을 밀고 나오다 눈썹을 찡그렸다. 초겨울의 눈부신 햇살 때문이 아니었다. 손바닥으로도 못 가릴 강력한 생명력의 파장이 퍼져왔다. 빨간 풍선 하나가 수분이 빠져버린 가로수 가지에 매달려 요동쳤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도로 저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풍경이 도무지 낯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렸다.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SK텔레콤 대리점에 들러 정지시켜 놓았던 휴대폰부터 살렸다. 아직 세상과 소통할 준비는 안 됐지만 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시내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무작정 도심으로 향했다. 세운상가에서 작고 날이 번들거리는 나이프를 하나 골랐다. 이젠 예측 못 할 위험과 맞닥뜨려도 38구경 리볼버를 허리에 찰 수 없다. 형사가 아니면 그건 불법이니까.
리어카에서 중국산 운동화를 한 켤레 사 들고 청계천을 따라 그냥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덕수궁. 시간은 기껏 40분 흘렀다.
석조전이 보이는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콧구멍으로 흙냄새가 실린 바람이 빨려 들어왔다. 아내는 여길 좋아했다. 결혼 전, 인근 증권사에 근무하던 그녀를 비번인 날 점심시간에 만나곤 했다. 왜 이쪽으로 발길이 닿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다시 전화를 넣었다. 신호음만 오래 울렸다.
대한문을 나와 광화문 지하보도를 건너 다시 종로로 향했다. 퇴근시간이라 거리에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금방 불어났다. 그들은 짝을 지어 술집이 밀집한 골목 이쪽저쪽으로 사라졌다.
“부럽다, 씨팔.”
나는 비아냥거리듯 내뱉었다. 누군가와 생맥주 한잔이 간절했지만 딱히 불러낼 사람이 없었다. 입 안이 씁쓸했다.
그때였다. 어디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날카로운 비명. 1톤 트럭 한 대가 중앙선을 밟고 섰다. 횡단보도 위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잠자듯 누워 있었다. 즉사였다.
시체라면 지긋지긋할 만큼 봐서일까, 아무런 느낌이 안 들었다. 교통사고든 살인사건이든, 미스코리아든 칠순 할망구든, 시체는 다 똑같다. 시간이 지나면 시반이 생기고 부패하고 구더기가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호기심이란 참 묘하다. 얼굴은 뻣뻣하게 쳐들고 눈동자만 굴려 바닥을 훔쳐보는 시선들. 긴 생머리 여자 하나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현장을 찍었다.
어리석은 년. 무슨 생각으로 타인의 사고에 개입하려는 걸까. 세상일, 특히 교통사고 따위에 얽히면 피곤해진다는 걸 모르나. 어설픈 정의감 따윈 집어쳐. 그녀가 가까이 있다면 충고해 주련만. 쯧쯧.
버스 정류장에서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신호음만 지겹게 울려댔다. 참으려, 참으려 했는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다시 시내버스 뒷좌석에 앉아 졸다가 우리은행 앞에서 내렸다. 그새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빨간 풍선은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한 채 요동쳤다. 나는 고개를 들어 잠시 감탄했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아파트 앞 언덕을 걷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저예요. 고객 때문에 지방 갔었어요. 돈은 확인했어요.”
아내였다. 지독히 사무적인 목소리. 그녀는 지금 외국계 보험사 영업을 한다. 얼마나 돈벌이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방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지만 그게 전화 통화랑 무슨 관련이 있겠나.
“휴대폰 다시 살렸소.”
“알고 있어요.”
“나미는 좀 어때?”
“걱정할 정도는 아니래요. 막 잠들었어요. 그럼…….”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전화는 툭 끊어졌다. 아직 8시도 안 됐다. 잠들었다는 말은 분명 거짓말. 아내는 날 두려워하는 걸까, 무시하는 걸까, 아님 무관심한 걸까. 아픈 딸 목소리 한번 들려주는 게 선심을 써야 할 만큼 힘든 일인가.
요즘 낌새가 영 수상쩍다. 형사의 눈은 못 속인다. 그녀가 어딜 가서 뭘 하던 그건 자유. 그러나 딸아이와 나를 의도적으로 떼놓으려 한다면 용서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9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에 들어서는데 어둠 속에서 시커먼 물체가 움직였다. 현관문 옆에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물어뜯고 있었다. 도둑고양이인가 싶어 바짝 긴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