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E TO JOY
Copyright © 2016 by A-Nai (阿耐)
All rights reserved.
Published in agreement with Sichuan Literature & Art Publishing House
c/o The Grayhawk Agency Ltd., through Danny Hong Agency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0 by Sam & Parkers Co.,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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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앤디(安迪): 뉴욕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인재. 투자회사에서 CFO(최고재무책임자)를 맡고 있다. 젊은 나이에 기업의 임원이 된 똑똑한 골드미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외모가 늘씬하고 아름답지만 성격이 차갑고 경계심이 많아 종종 오해를 받곤 한다. 고학력의 우수한 인재로 일에서는 완벽하고 결단력이 있지만 사람과의 감정 교류에 있어서는 서툰 면을 보인다. 출생의 비밀 때문에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닫고 산다.
관쥐얼(關雎爾): 조용한 성격이다.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사원이지만 자기 자리에 만족하며 열심히 일한다. 올해 서른이 되면서 결혼에도 조급해한다. 결혼에 급한 것과는 별개로, 차와 집을 자가로 소유하고 있는 잘생긴 남자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이시에서 글로벌투자기업의 인턴으로 들어가 정직원이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추잉잉(邱瑩瑩): 성격이 단순하고, 결과를 생각하기에 앞서 행동이 먼저 나가는 행동파라 종종 스스로 곤경에 빠지기도 하고, 주변을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의 부모님은 농촌에서 작은 도시로 넘어와 고생하며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자신의 딸만큼은 큰 도시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져 성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랑에 흠뻑 빠지는 스타일이다.
판성메이(樊勝美): 하이시 글로벌투자기업 인사팀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왔다.
집안 사정이 빈곤하고, 남자를 중시하는 가정 분위기 탓에 인정받지 못했던 데 상처를 많이 받았다. 매번 오빠가 사고 치는 일들에 연루되고, 그 일들을 해결하느라 번 돈을 다 쓰는 바람에 모아둔 돈이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숨기고,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에게 얕보일까 봐 전전긍긍한다. 의리가 있고,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선량한 면이 있는 반면 허영심도 크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이 고통을 끝내는 것이 목표였지만 여러 일들을 겪으며 스스로 강해지고, 인생의 변화를 겪게 된다.
취샤오샤오(曲筱綃): 재벌가 상속녀. 제멋대로인 성격에 툭하면 남을 무시한다. 좋은 일을 자주 하지만 항상 선한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좋아서 늘 자신감에 차 있다. 공부에 소질은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걱정 없이 돈을 펑펑 쓰고 미국에서 놀다가 배다른 두 오빠가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싫어 다시 중국으로 들어와 직접 회사 경영에 나선다. 매력이 출중하고, 흡사 여우같은 느낌이다. 놀기 좋아하고, 재미있으며, 상대에게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업뿐만 아니라 원하는 남자는 무조건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충만한 캐릭터다.
33
앤디는 바오이판이 있는 도시로 가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업무 자료로 가득 채운 여행 가방을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주말 동안 바오이판 및 다른 동종업계 사람들과 회의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 출발 시각이 30분 지연되어 있었다. 그사이에 식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오늘 저녁에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 호텔의 맛있는 디저트나 맛보며 낯선 도시에서 홀로 자유로운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녀는 요 며칠 일상이 어수선했던 탓에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앤디의 바람은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 게이트를 나가자마자 바오이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그가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온 걸까. 대충 상황을 따져 보니 짐작이 갔다.
앤디는 바오이판에게 일정표를 보낼 때 일부러 오늘 비행기 시간을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업무 일정이 아침 8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비행기 시간의 힌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그녀가 오늘 저녁에 도착할 것으로 짐작하고도 남을 만했다. 그러니 바오이판이라면 비행 스케줄 정보도 쉽게 알아냈을 것이다. 앤디는 체념한 채로 바오이판을 보다가 그의 옷차림 때문에 또 한 번 놀랐다. 바오이판도 앤디처럼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약속하고 커플룩으로 맞춰 입은 듯 보였다. 바오이판과 함께 마중 나온 남자의 반응만 봐도 남들 눈에는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오이판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영역에 왔으면서 나한테서 도망갈 생각을 했어요? 혹시나 해서 당신이 지난번에 묵었던 호텔에 알아봤더니 역시나 거기로 예약했더군요. 그래서 스위트룸으로 바꿨어요. 드나들면서 방해하기 편하게. 그렇게 쏘아보지 말아요. 요금의 반은 내가 낼 테니까. 됐죠?”
앤디는 호의적이면서도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바오이판의 친구만 쳐다봤다. 그녀는 도저히 바오이판처럼 뻔뻔스럽게 대꾸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요즘 한동안 꽤 심란해서 오늘 밤만큼은 편하게 쉬고 싶어요….”
“나와 같이 있는 것도 휴식이에요.”
바오이판은 앤디의 캐리어를 받아 들고 친구에게 인사한 뒤 자신의 팔에 앤디의 팔을 걸고 걷기 시작했다. 앤디는 몸이 닿을까 봐 조금 거리를 두었다.
바오이판이 타고 온 차는 무광의 검은색 포르쉐였다. 바오이판이 가방을 싣는 사이 앤디는 차를 한 바퀴 빙 돌며 훑어봤다. 과연 예상대로 자랑삼아 몰고 나온 것이다. 그는 강철 괴물 같은 파워풀한 차의 성능을 과시하기보다는 포르쉐 터보S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을 뽐내며 무심한 듯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것을 즐겼다.
바오이판은 앤디가 차를 구경하고 그의 앞에 올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렸다가 말했다.
“특별히 준비한 거예요. 일단 바비큐 먹으러 갑시다. 먹고 나서 호텔에 데려다줄게요. 내일부터 이틀간은 내가 전담 기사예요. 일이 끝나면 하이시에 같이 가고요. 월요일에 하이시에서 회의가 2건이나 잡혀 있거든요.”
“바오이판, 알다시피 요즘 힘든 일이 끊이지 않았어요. 부탁이에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미안해요.”
“이해해요. 난 그렇게 솔직한 당신이 좋아요. 배짱도 있고. 우리 푸켓에 있을 때처럼 지내보는 건 어때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미안해요.”
“에이, 당신은 자신이 미녀라고 생각하지 않나 봐요? 미녀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전설적으로 우리 남자들은 모두 미녀한테 학대당하길 간절하게 원하거든요.”
앤디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바오이판의 얼굴만 보면 조금 전 그의 말이 생각나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자동차들로 꽉 막혔던 도로는 조금씩 흐름이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바오이판은 인테리어가 화려한 바비큐 식당으로 앤디를 안내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리를 안내하는 종업원부터 식당 안의 손님들까지 그를 알은체했다. 앤디는 이번에도 주문은 바오이판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화장실에 매무새를 다듬으러 갔다.
테이블로 돌아온 앤디는 자기 자리에 웬 중년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중년 부인 옆에 놓인 에르메스 핸드백이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것 말고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부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비둘기 알 만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시선을 확 끌었다. 바오이판은 성가셔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가오는 앤디를 보더니 인상을 평소처럼 확 바꾸며 일어서서 소개했다.
“저희 어머니예요. 마침 여기에 식사하러 오셨다가….”
앤디는 상투적인 드라마 같은 상황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앤디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바오 부인에게도 뜻밖의 만남이었기에 앤디와 악수하면서 잠시 말문이 막히고 목이 메었다.
“앤디 씨였군요. 푸켓 사진에서 봤어요. 궁금했는데 쟤가 자꾸 말을 돌리지 뭐예요.”
앤디는 순간 난처했다. 더욱이 바오 부인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아서 당혹스러운 나머지 바오이판을 쳐다봤다. 바오이판은 고개를 숙여 두 여자 사이로 가로지른 두 손을 난감하게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직접 두 손을 떼어 놓았다.
“어머니, 집에 가서 얘기해요. 우리 밥 좀 먹게요. 배고파 죽겠다고요.”
“얘는, 또 날 속이려는 거니? 방에 온통 아가씨 사진으로 도배해 놓고는 방금 나더러 합작 파트너 만나러 왔다고 둘러대는데….”
바오 부인은 말하면서 자신이 실수했음을 금방 깨달았다. 아들을 몹시 난처하게 하고 만 것이다.
바오이판이 급히 해명했다.
“사진을 인화해서 찾아왔는데 습기가 있길래 방에 걸어 놨던 거예요. 다 마르면 보내 줄게요.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왔다가 보시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미안해요.”
바오 부인은 바오이판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진을 말리려고 걸어 둔 게 아니라 앤디의 모습이 담긴 사진 여러 장을 액자에 끼워서 침실에 잘 모셔 두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뒤이어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는 아들 일기장도 곧잘 훔쳐보곤 했는데 크더니 도둑놈처럼 뭐든 다 컴퓨터 안에 숨겨 버리잖아요. 이번에 간신히 뭐 하나 발견했다 싶었는데 또 시치미를 뚝 떼니까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죠. 엄마 노릇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져요.”
바오 부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아들을 끌어당겨서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앤디와 나란히 앉았다. 모름지기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단연 엄마다. 아들이 눈앞에 있는 미녀한테 설설 기는 처지임을 엄마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바오 부인도 앤디가 마음에 들었다. 예쁘장하지만 너무 요염하지 않아서 좋았다. 요즘 아가씨들은 화장을 짙게 하고 머리를 색색으로 물들여서 검은 머리색을 보기 드문 데 반해 앤디는 그런 여자들과 달라보였다. 또 앤디가 자신처럼 능력 있는 여성이라는 점도 호감이 갔다. 부인은 의자에 몸을 바짝 붙이고 앉으며 자신의 두 손으로 앤디의 손을 받쳐 들듯이 꽉 잡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진보다 훨씬 예쁘네요. 지성미가 넘쳐 보여요. 혹시 오늘 밤엔 어디서 묵어요?”
앤디는 남에게 이렇게 손을 잡히는 게 어색해서 일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 불편한 느낌은 순식간에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더니 급기야 목과 팔뚝에 닭살마저 돋았다.
“호텔 예약해 뒀어요. 아직 체크인은 못했지만 식사하고 들어갈 거예요.”
바오 부인은 앤디의 몸에 닭살이 돋은 것을 보고는 미소가 더 깊어졌다. 좋은 아가씨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나이대의 아가씨는 좀 예쁘게 생기면 더러 뻔뻔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까지 스킨십을 어색해할 줄은 예상 밖이었다.
“그럼 체크인 안 했으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요. 1주일 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이것 봐, 피곤해서 얼굴이 상했네. 아무렴 집만큼 편한 곳이 있겠어요? 내일 아침에는 내가 맛있는 밥 해줄게요.”
맞은편에서는 셰프가 갓 구운 스테이크를 3조각으로 잘라서 건네주었다. 바오 부인은 그중에서 가장 큰 조각을 골라서 앤디 앞에 놓은 뒤에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앤디 씨, 많이 먹어요. 평소에는 회사일로 힘들어서 주말이나 돼야 겨우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이 나죠? 다이어트는 절대 하지 말아요. 여자는 너무 말라도 건강에 안 좋아요. 아휴, 내 팔자에는 딸이 없는데 이렇게 좋은 아가씨를 만나다니 정말 기뻐요.”
바오이판이 어머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머니는 며느리 말고 딸이 필요해요? 이러지 좀 마세요, 애도 아닌데. 팔자에 없는 딸이 생겨서 좋으시겠어요.”
바오 부인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흘겼다.
“얘 좀 봐, 엄마는 눈치도 없는 줄 아니?”
앤디는 바오 부인이 ‘딸’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심장이 요동쳤다.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엄마가 자식들을 이처럼 살갑게 대하지 않는 걸까? 앤디는 바오 부인에게서 색다른 감정이 들었다. 그녀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서 입에 넣고 막 삼키려다가 바오 부인에게 말했다.
“맛있네요. 드셔 보세요.”
바오 부인은 배가 불렀지만 작은 조각을 한 입 먹었다. 그리고 흡족하다는 의미로 테이블 밑에서 아들의 다리를 툭 찼다. 바오이판은 다소 차가운 성격인 앤디가 오늘은 어쩐 일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고분고분한지 의아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던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예전에 앤디가 자신은 고아 출신이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끼어들려고 시도했지만 녹록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또 귀엣말을 건넸다.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아니면 제가 나갈까요?”
그 와중에 앤디는 또 바오 부인이 주는 푸아그라를 건네받다가 바오이판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한테 그러지 마세요.”
“봤어요?”
바오 부인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앤디 씨, 내일 있을 프레젠테이션에 우리 측 담당자는 그쪽에서 요청한 대로 배정했는데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얘기해요. 나도 내일 참석할 거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도 돼요.”
“네, 그렇게 할게요. 구운 아스파라거스가 맛있네요.”
바오이판은 어머니와 앤디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조연 신세로 전락해서, 어머니의 꼬임에 넘어가 부모님 집에서 머물기로 약속하는 앤디의 대답을 옆에서 듣고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가 몰랐던 앤디의 과거 이야기도 꽤 많이 들었다. 이를테면 언제 유학생으로 추천되어 대학에 들어갔는지, 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미성년자로서 학교에서 위탁한 후견인 집에서 생활하게 된 과정 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당신 손가락에 낀 비둘기 알 같은 반지처럼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아마 미래에 천재 손자를 보는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천재로 키우려고 사력을 다했던 분은 아니었다.
앤디는 따뜻하게 챙겨 주는 바오 부인 앞에서 꿋꿋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은 문제는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고향이나 중국에서 사용하던 이름 등은 철저히 숨겼다. 한마디로 그녀의 과거는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의 기억만 존재했다. 중국에 있을 때의 기억은 당시 너무 어렸던 탓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바오이판의 부모님 집에 가기 위해 각자 차를 타고 출발했다. 하지만 바오이판은 어머니의 뜻을 어길 마음을 먹고 있었다. 건널목에 거의 다다랐을 때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신호등에 노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는 포르쉐의 폭발적인 가속력을 이용해서 쏜살같이 건널목을 건넜다. 뒤따라오던 어머니의 차는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는 바람에 꼼짝없이 건널목에 멈춰 섰다.
앤디는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동차가 호텔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뒤에야 이상해서 물었다.
“부모님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안 가요. 여동생한테 딴맘 품은 놈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바오이판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차를 대고 바로 휴대폰을 껐다.
“당신도 휴대폰 꺼요. 빨리. 어머니가 금방 눈치챌 거예요. 집에 가 봐야 재미없어요.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에 온 동네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앤디 씨 보려고 기다리고 있을걸요.”
“설마요.”
“못 믿겠으면 한번 가보든가.”
앤디는 급히 휴대폰을 껐다. 바오이판 어머니의 일방적인 친절이 부담스러웠지만 내심 그런 따뜻한 정이 절절하게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거실을 가득 채울 아주머니들은 감당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건 너무 가혹한 모험이 될 것 같았다.
바오이판은 앤디가 휴대폰을 끄자 안심하고 짐과 술 2병을 차에서 꺼냈다. 앤디는 술병을 받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1병은 페리에 주에(Perrier Jouet)였다. 어슴푸레한 주차장 불빛 아래에서도 술병의 독특한 외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1병은 시바스 리갈(Chivas Regal) 25년산, 이 역시 병 외관의 특징으로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푸켓에 다녀온 이후로 술 끊었는데. 미끼 던지는 거예요?”
“그래서 페리에 주에 가져왔잖아요. 이건 술도 아니에요. 맞은편에 괜찮은 바가 있던데 이따가 갈래요? 망설이지 말고 같이 가요. 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지금 바로 잘 수나 있겠어요?”
“밥 먹을 때 너무 무식해 보이지 않았어요?”
앤디는 배가 불룩 튀어나올 만큼 많이 먹어서 차에서 똑바로 앉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머니 조심해요. 양의 탈을 쓴 늑대니까. 그런데도 당신한테는 참 잘하시더군요. 어렸을 때는 절 제압하려고 아버지와 합심해서 몽둥이를 휘두르셨던 분이에요.”
“아들이 어머니를 그렇게 말해도 돼요?”
“우리끼리니까.”
앤디가 눈을 돌리니 바오이판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앤디는 그의 눈길을 피해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바오이판이 미리 체크인을 해 두어서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상당히 멋진 방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화려한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오이판은 집적거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앤디는 계속 그의 팔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바에서 그녀는 난생처음 남자와 춤을 췄다. 알코올 덕분에 용기가 났고 다행히 주변도 어두웠다. 바오이판은 디제이를 따라서 뻣뻣한 몸을 가볍게 흔드는 그녀를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리드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약속? 남녀 사이의 약속은 원래 지키지 못할 헛소리다. 앤디는 눈을 감았다. 눈만 감으면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춤을 추는 동안 머릿속은 깨끗이 비워지고 기분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이상하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같이 방으로 올라가려는 바오이판을 끝내 거절했다. 그녀는 호텔 침실에 딸린 화장실의 밝은 거울 앞에 홀로 섰다. 부풀어 오른 앵두 빛깔 입술과 발그스름한 양 볼을 본 순간 몽둥이로 거울을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기억 속 그녀의 엄마는 찢어진 붉은 색 대자보에 물을 묻혀서 입술과 뺨에 벌겋게 발랐다. 동네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욕을 했고 남자들은 끈적끈적한 눈길을 마구 던졌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화장이 필요 없는 미치광이 창녀 같았다. 끔찍해서 차마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냉장고에서 음료수 캔을 꺼내어 얼굴에 댔다. 뺨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워진 뒤에야 붉은빛이 가셨다. 이놈의 술,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또 다짐했다. 어느덧 앤디의 두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아예 샤워 물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기억이 눈물과 함께 깨끗이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하지만 지우려고 할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해졌다. 놀란 가슴을 미처 진정시키지도 못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바오이판이었다. 앤디는 깜짝 놀라 안전장치를 걸고 문을 열어, 열린 문틈으로 눈만 빼꼼 내밀고 물었다.
“왜요?”
바오이판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휴대폰의 화면을 앤디에게 보여 주었다. 화면 상단에 그의 어머니가 저녁 10시경에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내 며느리 어디다 감췄니? 어서 집으로 데려와라.’
앤디가 메시지를 읽자 그가 말했다.
“봐요. 집에 못 가요. 들여보내 줘요.”
바오이판 손에는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내려가서 방 하나 달라고 해요.”
바오이판이 피식 웃었다.
“문 열어봐요. 푸켓에서처럼 거실에서 잘게요. 지금 나 혼자 지내는 집에서 오는 길인데 어머니가 하도 전화를 하는 통에 도망 나왔어요. 밤새 잠도 못 자게 전화할 게 뻔하거든요. 이게 바로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앤디는 뭔가에 홀린 듯이 안전장치를 풀어 문을 열고 밤손님 같은 그를 방에 들였다. 흥분한 바오이판이 잽싸게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그녀는 또 후회가 밀려왔다.
“나한테서 1미터 이상 떨어져요. 멋대로 굴면 안 돼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재빨리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바오이판은 침실 문을 쳐다보며 허허 웃었다. 마음이 움직이면 몸도 멋대로 움직일 것이다. 과연 누가 몸을 멋대로 움직이게 될까.
앤디는 겁이 나서 지체 없이 침대로 가서 잠을 청했다. 문밖에서는 인기척이 수시로 났고 거실의 불빛이 침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한참 만에 불빛이 모두 꺼지자 그녀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니 뜻밖에도 웨이웨이가 와 있었다. 웨이웨이는 질시의 눈빛으로 앤디를 쳐다보며 곧장 침실로 들어가 바오이판을 끌어냈다. 바오이판은 대체 언제부터 침대 위에 있었던 걸까. 앤디는 놀라서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불을 안고 꽤 오랫동안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주말을 함께 보내자고 했다. 두 사람은 하얼빈에 놀러 갔을 때 이미 주말마다 만나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에 특별한 제안은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히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니 미꾸라지 같은 그 남자의 얼굴이 아득히 그려졌다. 일을 팽개치고 좁은 사장실에서 혼자 틀어박혀서 눈동자를 굴리며 방법을 생각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금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오치핑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 후에 병원 주차장에서 만날까?’
자오치핑은 정오에야 겨우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
‘미안, 오전에 진료가 있었어. 오케이, 이따 봐.’
취샤오샤오는 휴대폰을 마구 흔들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종일 마음이 들썩대고 안절부절못했다. 시간이 되면 잽싸게 출발하려고 해가 산 아래로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느라 하마터면 류신화를 새까맣게 잊을 뻔했다. 취샤오샤오는 퇴근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하려고 미리 나서지는 않았다. 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고 휴대폰의 사진첩을 연 다음 류신화의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류신화의 애인이다, 난 류신화의 애인이다….”
주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운 뒤에야 세련된 디자인의 털모자를 쓰고 사무실을 나섰다.
병원 퇴근 시간이 이미 지난 때라 주차장에 빈자리가 많았다. 취샤오샤오는 주차장으로 들어서면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서 전조등을 깜빡이고 있는 차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핸들을 그쪽으로 돌려 자오치핑의 자동차 바로 옆에 차를 세웠다. 하지만 내리지는 않고 창문만 열어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어? 어쨌든 반가워.”
자오치핑은 취샤오샤오의 애정 어린 눈빛을 받으며 그녀의 차에 탔다. 그녀의 눈동자는 달을 쫓는 유성처럼 자오치핑의 그림자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며 차에 타는 자오치핑을 응시했다.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외모에 아쉬움의 탄식이 절로 났고 면 소재의 두툼한 패딩을 입은 모습조차도 멋이 흘러 넘쳤다.
그런가 하면 자오치핑의 눈에 비친 취샤오샤오는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요염한 자태로 어린아이 같은 발랄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이 모순된 두 감정이 혼재된 눈빛으로 작고 갸름한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가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남자의 로망과도 같은 이 여우와의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꿈이 절로 피어올랐다.
아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때 취샤오샤오가 퇴근 전에 외웠던 주문의 효과가 나타났다. 그녀는 장갑을 낀 작은 손을 재빨리 뻗어서 키스하러 다가오는 자오치핑의 입술을 정확하게 막았다. 이태리산 어린 양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두 남녀의 접촉을 완벽히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자오치핑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었다. 취샤오샤오는 미친 듯이 웃고 싶은 마음을 단단히 억누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안 돼. 부모님이 소개해 준 공인된 남자 친구가 있어. 그래도 오늘 만나서 정말 기뻐.”
자오치핑은 황당했지만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다.
“오늘 저녁엔….”
“미안, 진짜 미안한데, 내릴래? 지금 남자 친구 만나러 가야 해. 다음에 또 봐. 이제 마음이 놓여.”
자오치핑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취샤오샤오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취샤오샤오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고개를 숙이고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밤 가장 빛나는 별은 바로 너의 눈동자’
취샤오샤오는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깔깔 웃기 시작했다. 고소했다. 멍청한 여자는 싫다더니 오늘은 대체 누가 멍청한 건지. 그는 자신이 깜빡 속은 줄도 모르는 바보였다. 바보 중에서도 이런 바보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오늘 일을 계기로 그간의 설움을 갚고 공평해진 셈이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자오치핑의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취샤오샤오는 류신화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나중에 열어 보기로 했다. 식당 앞에 차를 대고 나서야 휴대폰에 시선이 갔다. 뜻밖에도 자오치핑의 러브레터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사랑을 전하는 편지, 메일, 메시지를 워낙 많이 받아서 별 감흥이 없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자기도 모르게 또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오늘 가장 반짝거리는 컬러 렌즈를 꼈는데.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여자들이 컬러 렌즈를 비장의 무기로 사용하는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그녀는 휴대폰을 백에 넣기 전까지 자꾸 피식피식 웃다가 갑자기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영혼 없이 멍하게 계속 차에 앉아 있었다. 마치 자오치핑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시지를 읽어 주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보았다. 이번에는 류신화였다. 콧물도 나고 김도 새서 약속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은 책임져야 하는 법, 이미 정한 약속이니 나가야만 했다.
자오치핑의 혼을 쏙 빼놓았던 취샤오샤오에게 류신화도 여지없이 빠져들었다. 류신화는 취샤오샤오가 자리에 앉도록 부축하고 외투를 벗게 도와주었다. 매너도 좋고 자상했지만 취샤오샤오의 기분은 들뜨지 않았다. 메뉴판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류신화를 보며 말했다.
“주문해.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난 다 좋아.”
취샤오샤오는 매사에 평범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류신화는 그런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주문하면서 가끔씩 눈을 들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취샤오샤오를 쳐다봤다. 주문을 마친 그는 취샤오샤오의 얼굴 앞으로 손을 뻗어 휙휙 흔들었다.
“왜 그래? 오늘도 출하 작업했어?”
그녀는 류신화의 손을 탁 쳤다.
“머리가 복잡해서. 전 남친을 우연히 만났거든.”
“옛말에 똑똑한 말은 자기가 밟고 지나온 풀은 먹지 않는다고 했어.”
“난 여태까지 사고뭉치 말이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남자 문제로 똑똑한 말이 되라고?”
“그럼 다시 만나게?”
“나 죽일 거야?”
류신화는 가만히 취샤오샤오를 보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어머니한테 말씀드릴 거야.”
그러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방금 나온 냉채 접시에 담긴 두부를 이등분해서 한 쪽을 자기 접시에 놓고 말없이 먹기만 했다. 취샤오샤오도 접시를 자기 앞으로 가져가서 들고 묵묵히 먹었다.
류신화가 다 먹고 나서 말했다.
“사랑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때 네 방이 엉망진창이고 네가 잔뜩 풀이 죽어 있었지만 너에게 사랑에 빠졌어. 이제 네가 선택해. 어떤 선택이든지 받아들일 테니까. 강요하진 않을게. 만약 거절한다면 내가 아무리 널 사랑해도 단념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 남자한테는 돌아가지 마. 사흘 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취샤오샤오는 몹시 놀랐다. 류신화를 지금껏 온순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박력이 넘치는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잠시 우두커니 그를 쳐다보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서 자오치핑과 관련된 흔적을 모두 과감하게 삭제했다. 자오치핑의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우고 또 지우며 정리했다.
류신화는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많은 사람 앞에서 입을 맞추었다.
“오늘 밤은 너희 집으로 가자.”
“강아지처럼 영역 표시라도 하려는 거야?”
“내 여자니까. 넌 이제부터 한정치산자야, 난 후견인이고.”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의 말을 잠시 되새기다가 한정치산자라면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눈썹을 추켜세우며 류신화의 가슴 쪽으로 다가가서 멱살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팍팍 치고 팔을 꼬집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몸은 못살게 괴롭혀야지 그냥 두기엔 아쉬워.”
취샤오샤오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웃겨서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류신화도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좀 얼떨떨했다. 이렇게 류신화로 마음을 정한 것인지, 이게 사랑인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그녀는 식당에서 나오다가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판성메이를 발견했다. 왜 자신은 하필이면 판성메이가 외간 남자와 만나는 현장을 공교롭게도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일까. 자세히 보니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왕바이촨이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손을 맞잡고 있었다. 류신화는 취샤오샤오를 따라서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을 보았다.
“굉장한 미인이네.”
“이웃집 언니야. 원래 저러고 있는 거 좋아해. 뭘 하든 죽을 때까지 폼생폼사야.”
“평생 저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지. 그런데 힘들지 않을까?”
취샤오샤오는 히죽거리며 물었다.
“나 업었을 때 힘들었어? 저 언니 진짜 대단해. 우리가 얘기한지 한참 됐는데 두 사람 아직도 저 자세로 있어. 너는 성메이 언니 같은 사람을 세컨드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노련해져 봐. 내가 응원할게.”
“그게 내 맘대로 돼? 일단 너부터 날 덮쳐 봐.”
취샤오샤오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류신화의 등에 올라타려고 깡충깡충 뛰었지만 그러기엔 안타깝게도 그녀는 키가 작았다. 류신화는 취샤오샤오가 등에 엎드릴 수 있게 살짝 쪼그리고 앉았다가 그녀를 업고 걸음을 뗐다.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의 얼굴에 자기 뺨을 붙이고 가볍게 비비며 그와 오래오래 서로 의지하며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주말 내내 2203호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찬 겨울이었지만 은근히 따뜻했다. 그들은 당분간 양쪽 부모님께 두 사람의 관계를 말씀드리지 않기로 했다. 가족의 관심을 벗어나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두 집안의 부모님은 이미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샤오샤오가 집에 안 갔다고요? 네, 우리 신화도 주말에 안 왔어요. 두 아이 다 휴대폰이 꺼져 있네요.’ 하는 대화를 서로 주고받으며 좋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부모님들은 두 사람의 연애 소식에 흥분되고 설렜지만 짐짓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젊은 커플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앤디는 목이 말라서 일어났다. 몽롱한 상태로 더듬더듬 거실로 가서 물을 마셨다. 거실 한가운데에 서니 그제야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과연 바오이판이 소파에 누워서 코를 드르렁 골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잠이 반쯤 깬 것 같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앤디는 회색 민소매 상의와 실크 파자마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는 안도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서 물을 따르는데 이내 등 뒤로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나도 물 좀 줘요.”
앤디가 뒤돌아보니, 바오이판이 소파에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앤디는 살짝 당황했다. 그녀 앞에 있는 그 남자는 자기가 알던 바오이판 같지 않아 보였다. 앤디가 멀찍이 서서 물 잔을 건넸다. 그런데 바오이판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자기 입 쪽으로 가져가서 앤디 손에 든 물을 마셨다. 두 사람은 서로 밀고 당기며 실랑이했다. 그런 와중에 앤디는 자신의 민소매 상의를 음흉하게 훑어보는 바오이판의 눈빛을 발견하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오이판은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담요를 펼쳐서 두 사람의 몸을 한데 덮어 감쌌다. 앤디는 또다시 펄펄 끓는 듯한 바오이판의 체온을 느꼈고 코끝에서는 바오이판의 체취가 진동을 했다. 그의 뜨거운 두 손은 헤엄치듯 그녀의 온몸을 쓰다듬으며 불을 지폈다. 앤디의 머릿속에서는 ‘어서 도망쳐, 위험해.’ 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두 팔은 이미 꼼짝없이 제압당한 뒤였기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담요 밖으로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바오이판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앤디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바오이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당황하고 놀라서 무심코 그를 안는 바람에 결국 못 이기는 척 어색하게 바오이판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다시 눈을 뜨니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바오이판의 얼굴이 보였다. 앤디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도망가려고 몸을 살짝 움직여 봤지만 바오이판이 꽉 껴안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가지 마요.”
앤디는 감정이 끓어오르는 가운데서도 이성을 놓지 않고 간신히 머릿속에서 할 말을 찾았다.
“8시예요. 회의 있잖아요.”
“응, 내가 알아서 할게요.”
바오이판은 티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입력한 뒤에 앤디에게 보여주었다.
‘어머니, 앤디하고 같이 있는데 차가 막혀서 1시간쯤 늦어요. 회의는 늦춰 주세요.’
앤디에게 확인시킨 뒤에 전송 버튼을 눌러 보냈다. 앤디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바오이판이 다시 품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바오이판의 품은 황홀했다.
30년 동안 금기했던 일을 하룻밤 만에 빗장을 푼 그녀는 잠시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바오이판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으니 행복했다. 심지어 온몸을 겹겹이 둘러쌌던 두려움도 사르르 녹아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이성을 되찾은 앤디는 불안해하며 물었다.
“너무 형편없지는 않았나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천사처럼 아름다웠어요. 허니, 당신은 내 천사예요.”
“솔직히 말해봐요.”
“수줍어했어요, 아이처럼. 미친 사람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바오이판은 또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너무 너무 너무. 이제 매일 이렇게 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아니 당신은…, 왜 늘 이런 생각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끼리 뭐가 어때서요. 당신 일정표는 다 찢어 버립시다. 오늘, 내일 전부 다 취소해요. 사과는 내가 모레 가서 일일이 할 테니까.”
“안 돼요. 미쳤나 봐.”
“그렇게 해요, 하자고요.”
바오이판은 생떼를 부렸지만 그도 일을 취소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앤디가 씻고 나오니 바오이판은 이미 양복과 구두를 갖춰 입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고 점잖은 사람으로 변신한 그는 젊은 엘리트의 분위기를 풍겼다. 다만 앤디를 보며 활짝 웃을 때는 온몸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섹시함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서 차에 탔다. 앤디가 주뼛거리며 말했다.
“가다가 근처에 약국이 보이면 좀 세워 줘요.”
바오이판은 놀란 듯이 앤디를 보다가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안 돼요. 저녁에 얘기해요.”
앤디는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켜 복잡했지만 바오이판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닫았다. 바오이판은 앤디를 슬쩍 한번 보고 나서야 마음을 놓고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정말로 딱 1시간 늦은 시간이었다.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앤디는 한 번도 약속에 늦은 적이 없었다. 앤디는 너무 무안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고 미칠 것만 같았다. 바오이판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 앤디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앤디는 목소리를 낮춰 부탁했다.
“날 쳐다보지 말아요. 웃지도 말고요. 안 그러면 진짜 큰일 날 거예요.”
바오이판은 말없이 몇 초간 웃다가 대답했다.
“참아 볼게요. 걱정 말고 들어갑시다.”
바오이판은 약속대로 웃지 않았지만 바오 부인이 도리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앤디는 오해를 사기 딱 좋을 그 메시지를 생각하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머리도 복잡하고 지력도 떨어진 것 같았지만 실력을 발휘해서 바오 회사 측 담당자를 당황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바오 집안의 3명의 담당자와 주요 재무 인사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앤디는 그사이 혼자서 생수를 5병이나 마셨다. 질의와 응답 시간이 끝나고 앤디는 다른 회의실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했다. 바오 회사의 담당자들은 모두 의견을 나누느라 바빴다.
그러나 바오성(包生)은 서슴거리며 아내 곁에 있다가 아들에게 슬쩍 물었다.
“요즘은 좀 예쁘다 싶으면 다들 미인계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던데….”
바오이판은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받아쳤다.
“그만 가세요. 저 장님 아닙니다. 사람 볼 줄 알아요.”
바오이판이 덧붙여 말했다.
“따지고 보면 얼굴만 믿고 여자 고생시키는 남자도 많아요.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세요? 앤디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참나.”
바오성은 반신반의했다.
앤디는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를 단단히 여민 채로 편안히 쉬고 있었다. 이 건물의 스탠딩 냉난방 기기는 중앙 냉난방 장치보다 성능이 떨어지는지 두 발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그럼에도 앤디는 편안하게 안정을 취하다가 긴장이 풀렸는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바오이판이 앤디를 흔들어 깨우자 그녀는 1분 정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끔벅거리고 있었다. 바오이판이 참지 못하고 키스를 하자 앤디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몸을 움츠렸다.
“아, 회의 끝났어요?”
“부모님이 당신하고 같이 점심 드시고 싶은가 봐요. 회의 결과는 언급할 필요도 없어요. 완벽했으니까.”
앤디는 갑자기 마음이 복잡했다.
“저… 우리… 안 가면….”
“걱정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싫어요. 난 아직 그럴 생각이…, 아무튼 싫어요.”
바오이판의 눈에는 앤디의 이런 태도가 의아해 보였다.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의문이 풀렸다. 온몸으로 섹시함을 어필하며 갖은 궁리를 다 짜내어 앤디를 품에 안긴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지낸 시간은 지금까지 100시간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회의실을 나가서 어렵사리 부모님을 먼저 보냈다. 특히 어머니가 매우 아쉬워했다. 마치 애지중지하는 딸을 두고 가는 어미처럼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아버지에게 억지로 끌려 나갔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앤디는 약국을 발견했다. 고개를 돌려서 약국 간판을 한참 쳐다봤다. 피임약을 사야 할까? 하지만 마음에서는 두려움보다 강렬한 기대감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판성메이는 토요일에 왕바이촨과 교외로 농가 음식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왕바이촨과의 약속 외에 다른 일은 없는 토요일이어서 그녀는 축 늘어진 채로 누워서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일어났다. 2202호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관쥐얼이 주말에 출근하는지 몰랐다. 추잉잉은 쫓아다니는 남자가 생겨서 주말에도 이벤트가 있다고 했다. 판성메이는 최근 22층의 분위기가 전과 달리 이상하다고 느꼈다. 모두가 자기한테 안 좋은 감정을 품어서 주말인데도 2202호에 혼자 남겨진 거라고 생각했다.
왕바이촨의 전화가 왔을 때 판성메이는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바이촨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에 평소처럼 꼼꼼히 화장을 마치고 매력을 뽐내며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왕바이촨은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판성메이의 입술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속을 내비쳤다.
“키스하고 싶어.”
왕바이촨은 긍정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판성메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얼마나 오랫동안 공들여 한 화장인데. 예뻐? 오늘은 종일 봐야 하니까 번지면 안 돼.”
그는 판성메이가 뾰족하게 내민 보드라운 입술을 보며 괴로운 듯이 말했다.
“이렇게 예쁜데 보고만 있으라고? 고문이 따로 없네.”
판성메이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운전하는 왕바이촨 앞으로 일부러 바싹 다가가서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늘 향수는 어때? 맘에 들어?”
“네가 오늘 날 죽일 작정이구나. 차례차례 맛만 보여주는 거야? 제발 이러지 마. 살려 달라고.”
판성메이는 흡족해하며 웃었다. 왕바이촨 앞에서 그녀는 뭘 하든지 다 사랑스럽기만 했다. 하필이면 이런 달콤한 순간에 판성메이의 직속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메이 씨,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어요. 뭐부터 들을래요?”
판성메이는 이렇게 진부한 방식으로 뜸 들이는 게 무척 짜증 났지만 상사에게는 방긋 웃으며 궁금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말했다.
“당연히 좋은 소식부터 들어야죠. 뭐예요? 빨리 말해주세요.”
말을 마치고는 왕바이촨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좋은 소식은, 월요일에 연말 상여금을 지급한대요. 하하.”
판성메이는 순간 이 우울한 겨울이 하나도 춥지 않은 듯했다.
“와, 정말 잘됐네요.”
당연히 기뻤다. 마침내 시내 중심가로 진출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럼 나쁜 소식은요?”
“나쁜 소식은, 주말에 출근해서 나하고 같이 일해야 한다는 거예요. 일단 관리자들이 지급 목록 작성하는 걸 도와야 하고, 또 월요일에 상여금을 지급하고 나면 대규모 사직 러시가 예상되니까 미리 대비해야 해요. 올 수 있죠? 하하, 점심은 구내식당에 부탁해 놨어요.”
판성메이는 두말없이 가겠다고 하고 통화를 끝낸 뒤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드디어 연말 상여금이 나온대. 이제 회사 옮길 수 있겠다. 그런데 오늘 출근해야 해.”
“뭐? 농가에 안 가고? 벌써 예약 다 해 놨잖아. 간신히 구한 자리인데. 네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딸기도 먹을 수 있는데….”
“어쩔 수가 없어. 상여금을 받기 전 이틀이 아주 중요하단 말이야. 조금이라도 불성실해 보이면 상여금에서 0하나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거든. 일단 상여금을 받고 나면 회사에서 뭐라고 해도 당장 사직서 낼 거야. 회사로 가자. 휴, 일하러 가야 해.”
판성메이는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서 입술 화장을 다시 정돈했다. 부드럽고 섹시한 입술은 출근용으로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바이촨은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돌려서 판성메이의 회사로 향했다. 그는 판성메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입술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고 더욱 우울해졌다. 이 때문에 그는 토라져서 판성메이의 회사 앞에서 헤어질 때 입맞춤 없이 인사했다. 하지만 그는 딱 이 시기에 나오는 딸기를 무척 좋아하는 판성메이를 위해서 다른 친구와 같이 농가에 가기로 다시 약속했다. 딸기를 넉넉히 사 와서 판성메이에게 실컷 먹이고 싶었다.
판성메이는 회사에서 직속 상사와 함께 업무를 처리했다. 겉으로는 전과 다름없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근무 태도는 아무래도 전처럼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 퇴사를 앞두고 열정을 바쳐 일하는 건 좀 모자란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앤디는 오후 내내 동종업자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바오이판은 혼자 다른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봤다. 사실 바오이판도 그 동종업자들과 아는 사이였지만 앤디가 합석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앤디의 뜻을 따랐다. 또 앤디가 장소를 이동해서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앤디를 그곳까지 데려다주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다리거나 볼일을 보고 돌아오곤 했다. 그가 앤디를 귀찮게 한 일은 메시지 1통을 보낸 것뿐이었다.
‘저 사람들하고 저녁 약속하면 안 돼요.’
앤디도 바오이판이 방해하지 않은 덕분에 대화에 집중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미팅을 마치고 나오니 바오이판이 차에서 한잠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앤디와 미팅한 사람은 마침 공교롭게도 바오이판과 같은 자동차 동호회 멤버였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페 앞 VIP 주차장에 세워진 바오이판의 고급 승용차를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차창을 두드렸다. 바오이판은 놀라서 금방 밖으로 튀어나왔다. 바오이판의 지인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곧바로 앤디와의 거리를 조정하더니 다시 50미터쯤 떨어져서 섰다. 바오 도련님이 임시 기사 노릇을 한 적은 자주 있었지만 이처럼 장시간 차에서 끈기 있게 기다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던 터라 앤디와 특별한 사이임을 짐작한 것이다. 바오이판은 친구의 짓궂은 농담을 다 받아 주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바오이판은 차에 타서 서서히 출발했다.
“부모님이 당신하고 같이 저녁 식사하고 싶다고 또 말씀하시던데.”
앤디는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 부모님은 이런 제안을 1년에 몇 번이나 하세요?”
“날 이런 이미지로 만든 사람이 대체 누구예요? 이제 당신밖에 없어요. 보면 알잖아요.”
앤디는 취샤오샤오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취샤오샤오를 확실히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못 가요. 아니, 안 간다고 말씀드려요.”
“벌써 말씀드렸어요. 그래도 부모님 뜻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하는 거예요. 나도 갈등이 심했어요. 당장이라도 부모님께 당신을 데리고 가고 싶고 외가와 친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친구와 동창들한테도 소개하고 싶고. 내 절친들한테 당신이 내 여자라고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고요. 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당신하고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아서 1분 1초도 다른 사람한테 내주기 아까워요. 내가 독차지할 거예요.”
“누가 당신 여자예요? 누구 맘대로 독차지를….”
앤디는 차를 멈추게 하고는 바오이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가 봐.”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바오이판은 박장대소하며 아침에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앤디가 자신이 미친 것 같지 않았냐고 걱정스럽게 묻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정말 헛똑똑이 이과생이었다. 그는 차의 시동을 걸고 길모퉁이를 돌며 말했다.
“그 정도를 미친 거라고 하면, 그럼 난 뭐예요?”
신호등이 이내 빨간불로 바뀌었다. 바오이판이 속삭이며 말했다.
“갑시다. 미친 게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앤디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저질렀던 미친 짓을 생각하니 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호텔로 돌아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앤디는 거울 같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꼭 짐승 같아요.”
바오이판은 기가 막혔지만 마침 1층에서 한 사람이 타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서 외투를 벗으며 모른 척하고 물었다.
“이제 옷만 벗으면 짐승이 되는 건가?”
“아뇨. 방해하지 마요. 자료 만들어야 해요.”
앤디는 바삐 전원을 연결하고 노트북을 켰다. 부팅이 완료되기를 앉아서 기다리며 바오이판이 자기 짐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바오이판이 그녀의 침실을 차지해 버렸다. 앤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오이판이 시야에서 사라진 틈을 타서 서둘러 코트와 정장을 벗었다. 바오이판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소파에 앉아서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바오이판은 먼저 자기 휴대폰을 끄더니 티 테이블에 놓인 앤디의 휴대폰도 제멋대로 꺼 버렸다. 그러고는 앤디가 앉은 소파 위로 몸을 훌쩍 날렸다. 문서 작성이라니, 앤디는 방금 전 미팅에 관한 내용을 한 글자도 입력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온몸의 감각은 이미 바오이판의 몸짓에 따라 반응하고 있었다. 그나마 기록해 두었던 것도 순식간에 바오이판에 의해 삭제되고 말았다.
뜨거운 키스가 폭풍처럼 지나간 뒤에 바오이판이 물었다.
“저녁은 뭘로 할래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식당 알아볼게요.”
아직 몽롱한 앤디는 눈동자만 굴릴 뿐 말이 없었다.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 보니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그녀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으며 타조처럼 누군가의 품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안 갈래요. 아무 데도 안 가요.”
바오이판은 기뻐서 소리를 지르며 방에 설치된 인터폰으로 레스토랑에 연락해서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앤디는 바오이판이 통화를 하는 동안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거리낌 없이 자세하게 그를 뜯어봤다. 피부의 모공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그의 얼굴 근육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그녀는 바오이판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저 보고 또 보기만 했다. 앤디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느낀 바오이판도 앤디 쪽으로 얼굴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바오이판은 통화를 끝내고 앤디를 품에 바싹 끌어당겨서 꽉 껴안으면서도 여전히 앤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야 당신 마음을 알았어요.”
그는 앤디의 손을 잡고 자기 얼굴로 가져가서 뺨에 댔다. 그러나 앤디는 주먹을 꼭 쥔 채로 주저하다가 한참 만에 손을 살며시 펼쳤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은 두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퍼지며 강렬한 아르페지오 연주처럼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앤디는 벗어나고 싶기도 했지만 바오이판이 힘껏 안아 놓아주지 않았다. 바오이판은 자신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는 앤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당신 남자라는 걸 잊지 말아요.”
“욕망이 아닐까요?”
“우리처럼 잘난 사람들이 사랑 없이 어떻게 욕망에 빠지겠어요.”
앤디는 자기도 모르게 바오이판의 눈부셨던 과거에 관한 소문이 또다시 생각나서 무심중에 이렇게 말했다.
“Where Beauty cannot keep her lustrous eyes, Or new Love pine at them beyond tomorrow. (내일이 지나면 아름다운 여인의 맑은 눈동자는 빛을 잃고 새로운 사랑은 끝이 나네.)”
“상반된 내용 중에서 가장 담백한 구절로는 이런 게 있죠. But on the viewless wings of Poesy, Though the dull brain perplexes and retards (시의 상상의 날개를 타고서 머리는 둔하고 혼란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당신에게 흠뻑 빠지고 말았소. 내 여인이여, 키스해 주오.”
“싫어요.”
앤디는 조건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그와 키스를 몇 번이나 했는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만큼 키스가 싫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은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키스를 리드할 용기가 없었다. 바오이판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며 눈빛으로 그녀를 다정히 보듬고 달랬다. 앤디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보였다. 그녀는 스스로 바오이판에게 키스했다. 처음 시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다음부터는 순조로웠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입을 맞췄다. 이 순간 이성이란 게 있었던가? 앤디는 자신과 바오이판의 모습이 분명 사람이지만 짐승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그녀는 빽빽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척이나 미웠다. 그럼에도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늘 그랬듯이 완벽하게 일을 마쳤다.
34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와 이틀 밤낮을 정신이 아찔하도록 침대에서 뒹굴었다. 류신화가 저녁 식사로 피자헛에서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나간 사이 혼자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취샤오샤오는 문득 지루해졌다. 마치 이틀 동안 자신을 복제한 남자와 사랑을 나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류신화가 뭘 할 줄 알고 뭘 못 하는지 이제는 손바닥을 보듯 훤히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류신화에게 바라는 점을 지적했을 때 그가 그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받아들이고는 도전하지 않는 모습이 매력 없어 보였다.
“샤오샤오, 깨끗한 나이프와 포크가 없으니까 어서 손 씻고 와, 피자 먹게.”
취샤오샤오는 속으로 나이프와 포크가 없으면 당연히 손으로 먹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손을 씻고 나왔다. 류신화는 이미 양손으로 피자를 번갈아 쥐며 먹고 있었다. 취샤오샤오는 곧장 류신화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에 든 피자를 낚아채고는 가장자리의 치즈 크러스트를 뜯어서 자기 입에 넣었다. 그녀는 피자에서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호랑이 입에 든 것이라도 빼앗아 먹을 만큼 좋아했기 때문에 사실 피자의 치즈 크러스트 부분은 그녀 혼자 다 먹은 셈이었다. 그러나 류신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의 이런 태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말 이틀이 벌써 다 지나갔어. 너무 빨라.”
류신화는 취샤오샤오의 표정이 시무룩해진 이유가 주말이 다 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마루코는 아홉 살> 틀어 줄까?”
취샤오샤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신화가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켰다. 그는 좋아하지 않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옆에서 같이 봤다. 취샤오샤오는 이런 류신화의 태도에 더 짜증이 났다.
“저녁 먹었으니까 이제 집에 가. 내일 출근하려면 준비도 해야지.”
“하하, 벌써 마누라 노릇하는 거야? 음, 짐 챙겨서 우리 집에 같이 갈래? 내일 회사에 데려다 줄게.”
“안 가.”
“그럼 나도 안 가. 샤오샤오, 있잖아, 너 전생에 구미호였지?”
“맞아, 사람의 양기를 빨아먹는 귀신이었어. 이제 가 봐. 빨리 안 가면 신경질 낼 거야. 네 몸의 기를 쪽 빨아먹고 껍데기만 남길 거라고.”
류신화는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취샤오샤오의 표정이 상당히 진지해서 놀랐다.
“내가 귀찮아? 왜?”
“몰라. 잘 모르겠어.”
취샤오샤오는 정말로 자신의 기분이 왜 이렇게 가라앉는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설령 류신화가 아닌 다른 소개팅 남을 만났다고 해도 그녀의 기분은 똑같았을 것 같았다. 또 그 남자가 취샤오샤오에게 특별히 잘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집안에서 소개해서 수준이 엇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파로 풀썩 올라가서 웅크리고 앉더니 얼굴을 무릎을 사이에 파묻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말 이상했다. 왜 별안간 류신화가 마음에 차지 않는지 혼란스러웠다.
“잘 모르는 거야, 아니면 말을 못 하는 거야?”
취샤오샤오가 머리를 냅다 쳐들었다.
“말 못 할 게 뭐가 있어? 네가 걱정이 많은 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와 봤니? 네 생각이 구린 거 같은데?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어서 가. 안 가면 싸울지도 몰라. 난 너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
“알았어, 미안해. 내가 실언했어.”
류신화는 취샤오샤오가 불같이 화를 내자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소파로 가서 그녀를 안아 달랬다. 그러나 취샤오샤오는 그가 마냥 귀찮기만 해서 매정하게 벌떡 일어나서 소파를 벗어났다. 류신화는 기분이 상했지만 꾹꾹 누르고 참았다.
“하나만 약속해줘. 갑자기 우울해진 이유를 알게 되면 나한테도 알려 주겠다고. 안 그러면 나 너무 불안할 거 같아, 안 좋은 생각만 들 거야.”
취샤오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있어. 내가 돈 버는 일 말고 다른 일에는 금세 싫증을 내는 성격이라는 거. 가자. 주차장까지 바래다줄게.”
“쫓아내면 가야지 뭐.”
류신화는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실망스러웠다. 취샤오샤오가 느닷없이 안면을 바꾼 이유가 전 남자 친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물어보면 정말로 싸우게 될 것 같아서 그냥 집에 가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취샤오샤오는 약속대로 주차장까지 류신화를 따라 나섰다. 류신화는 계속 입맞춤으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했지만 취샤오샤오는 철벽을 쳤다.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무시하는 투로 쏘아보며 거절의 신호를 보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앤디의 구역에 주차된 그녀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밝은 취샤오샤오는 주차장의 희미한 전등불에 의지해서 차안에 사람이 있는지 자세히 살폈다. 마침 격렬한 키스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취샤오샤오는 경악했다.
“와우, 저 야수가 대체 누구야?”
류신화도 같이 보다가 놀라서 짐 가방을 손에서 놓쳐 버렸다. 그러고는 핑계 김에 은근슬쩍 취샤오샤오를 끌어당겨 안았다. 하지만 취샤오샤오는 5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의 품을 힘껏 밀어내고 차에 바짝 엎드려서 고개를 쭉 빼고 안을 들여다봤다. 잘 보이지 않자 그녀는 힘을 주어 차를 쾅쾅 두드렸다. 차안에서 누군가 놀라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취샤오샤오는 그 야수가 바오이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웃음이 터져서 큰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짓누르던 근심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일찌감치 바오이판을 앤디의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던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 차 밖에서 기다렸다. 두 사람이 얼마나 난처한 표정으로 차에서 나올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바오이판이 먼저 운전석에서 밖으로 나오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이제 와요? 같이 올라갑시다.”
앤디도 뒤따라 차에서 내리면서 취샤오샤오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어쩜 여기서 만났네.”
취샤오샤오는 응원하는 치어리더처럼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하듯이 시끄럽게 말했다.
“헤헤, 인사해, 인사해,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해. 이렇게까지 진전됐으면 나한테 가장 먼저 보고했어야지. 이제 비밀로 해도 소용없어. 키스하는 거 다 봤으니까. 울라라, 울라라… 어머나! 둘이 잤어?”
취샤오샤오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오이판이 차 트렁크에서 여행 가방 2개를 꺼내서 같이 들고 올라가려고 정리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중 하나는 바오이판의 가방이 분명했다.
“네, 이틀 동안 쭉 같이 있었어요. 아주 좋았어요.”
앤디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유독 바오이판 앞에서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취샤오샤오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오.” 하는 소리를 내며 놀란 시늉을 했다. 옆에 있던 류신화가 끼어들었다.
“우리도 이틀 내내 같이 있었는데 샤오샤오가 이제 귀찮다고 쫓아내서 집에 가려던 참이에요. 두 분은 지겹지 않으셨어요?”
“너무 좋았죠, 지겨울 리가 있나요?”
바오이판이 앞질러 대답했다.
“힘내요, 아우님! 먼저 올라갈게요, 저흰 너무 추워서, 이만.”
앤디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살갑게 챙기며 자리를 떠나는 바오이판을 지켜보던 취샤오샤오는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이렇게 빨리 진도가 나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류신화는 말없이 취샤오샤오의 가녀린 허리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거 봐, 귀찮을 이유가 없다고 하잖아. 우리도 올라가자.”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에게 등을 떠밀려서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에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렸다.
“이제 알았어. 신화,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야.”
“그런 말 하지 마. 이틀 더 생각해 보고 수요일에 연락해.”
취샤오샤오는 이미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신화에게 다가가서 포옹하고 얼굴을 가볍게 톡톡 쳤다.
“네가 너무 잘나서 같이 있으면 내가 영 형편없게 느껴져.”
류신화는 사색이 되었다. 줄곧 품었던 의심이 결국은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취샤오샤오를 힘없이 밀어내면서 몸을 돌려 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취샤오샤오는 류신화의 뒤를 따라 갔지만 차에 타는 그를 멀뚱히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신화는 차에 타더니 창문을 열고 물었다.
“할 말 있어?”
“응. 첫째, 수요일에 연락 안 할 거야. 둘째, 미안해. 셋째, 고의는 아니었어. 끝.”
“키스.”
취샤오샤오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가가 창문 너머로 류신화와 입을 맞췄다. 류신화의 입맞춤에는 아쉬움이 짙게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뗀 뒤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차를 후진해서 그대로 출발했다. 취샤오샤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류신화를 입을 꾹 다문 채로 멍하니 바라봤다. 류신화의 차가 주차장 출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그렇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취샤오샤오는 자오치핑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오치핑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상관없었다. 그가 취샤오샤오를 아끼든지 무시하든지, 어쨌거나 밤낮으로 그녀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오직 자오치핑뿐이었다. 취샤오샤오는 뒤늦게 이런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는 화가 나서 자기 차의 뒤꽁무니를 세게 발로 찼다. 왜 자기한테 핀잔만 주는 남자에게 마음이 더 끌리는지 묘하면서도 화가 났다.
22층으로 올라온 앤디는 2202호의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 관쥐얼에게 그녀가 말했다.
“새로 소개할게. 내 남자 친구 바오이판 씨야.”
관쥐얼은 취샤오샤오보다 훨씬 놀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응, 고마워.”
앤디는 관쥐얼의 엉뚱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내일부터 전처럼 같이 출근하자. 이 사람 먼저 데려다줘야 하니까 10분만 일찍 나와. 괜찮지?”
관쥐얼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또 얼떨결에 대답했다.
“응, 고마워.”
관쥐얼은 앤디와 바오이판이 자신을 등지고 돌아서 간 뒤에야 겨우 웅얼거리듯이 한마디 했다.
“정말 잘 됐다.”
관쥐얼은 앤디가 새로운 사랑을 찾은 것이 정말로 기뻤다. 앤디가 설날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뉴욕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더욱 좋았다.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가던 취샤오샤오는 2202호의 열린 문을 통해 관쥐얼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2201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봤어?”
관쥐얼은 앤디의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
“응. 근데 넌 왜 그래?”
“괴로워 미치겠어. 내가 자오치핑 그 망할 자식을 이렇게 깊이 사랑하는지 정말 몰랐어. 나 완전 바보 됐나 봐. 그 남자 말고는 아무한테도 흥미가 안 생겨.”
“자오치핑… 의사 선생?”
“응, 왜? 뭐야? 말해 봐.”
“그런 남자라면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엄청 많을 텐데. 너한테 눈길 한 번 준 것만도 고마워할 일이지.”
“눈길 한 번이라고? 그 남자가 뭔데?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쥐얼, 너도 그 사람 봤지? 네 마음에도 들었어?”
“전혀.”
관쥐얼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제 잘난 맛에 멋대로 행동하는 취샤오샤오한테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첫눈에 반할 타입은 아니라니까. 오늘은 귀찮아서 나중에 만나러 가야겠다. 그때까진 살아 있겠지. 아, 피곤해 죽겠어.”
관쥐얼은 할 말이 없어서 2203호로 들어가는 취샤오샤오를 그냥 보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취샤오샤오가 부러웠다. 취샤오샤오는 저렇게 용기를 내는데 자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지, 앤디도 마침내 사랑을 시작했는데 자신만 왜 이러고 있는지 답답했다. 하지만 리자오성은 정말로 이상형이 아니었다. 관쥐얼은 우울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아직 젊고 특히 22층에서는 막내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또 서른 살에 연애해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22층에는 지금 연애의 기운이 한창 퍼져 있는 듯했다. 추잉잉은 쇼핑백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관쥐얼은 책을 읽고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추잉잉이 과일을 한아름 사 들고 온 것이었다.
“우와, 이렇게나 많이 사 왔어? 다 어떻게 들고 왔어?”
추잉잉은 “쉿.” 하고 소리를 내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더니 재빨리 문밖에 있던 쇼핑백들을 모두 안으로 들였다. 그러고는 누가 볼 새라 후다닥 문을 닫았다. 관쥐얼이 웃으며 말했다.
“누구한테 감추려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굴어?”
관쥐얼은 추잉잉의 새빨간 볼과 눈가에 비치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이 익숙하다고 느낀 찰나,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아, 샤오샤오한테 들킬까 봐? 그나저나 요 며칠 그림자도 안 보인다 했더니 데이트하러 다닌 거였네. 누구야? 나도 아는 사람이야? 이 과일도 그 사람이 사준 거고?”
추잉잉은 여전히 가슴이 조마조마한지 과일 더미를 깡충 뛰어넘으며 관쥐얼을 밀어서 자기 방으로 데려간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같은 고향 사람인데… 저번에 앤디 언니랑 같이 밤에 라러우 덮밥 갖다 줬던 그 사람이야. 기억나? 그냥 같이 수다 떨고 밥 먹고 설날에 고향에 어떻게 갈 건지 상의하고 뭐 그랬어. 아직 연애라고 할 단계는 아냐. 월요일에 월급 받으면 그 사람한테 밥 한 끼 사려고. 맨날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하잖아. 샤오샤오한테는 비밀이야. 절대로,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성메이 언니한테는 내가 말할게. 앤디 언니한테는 네가 대신 얘기해. 앤디 언니한테 말할 때도 샤오샤오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꼭 당부하고.”
“알았어. 헤헤….”
관쥐얼은 손가락 2개를 내밀며 말했다.
“이틀 동안 같이 있었으면 연애하는 거 아니야? 네 자신을 속이지 마. 지금 네 볼 좀 보라고.”
관쥐얼은 추잉잉의 책상에 놓인 거울을 들어서 추잉잉 얼굴 앞에 갖다 댔다.
“이미 들켰어. 가서 과일이나 챙겨.”
추잉잉은 과일을 정리하지 않은채 발갛게 열이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매만지며 관쥐얼에게 물었다.
“월급 받으면 머리 염색이나 할까? 길거리에 나가면 전부 다 염색한 머리야. 나 같은 흑발은 아주 드물어. 샤오샤오 머리 색깔 예쁘던데 무슨 색인지 내일 물어봐야겠다. 너도 할래? 다음 달부터 돈 많이 생기잖아.”
“다른 계획이 많아. 댄스 학원에 등록하고 헬스장에도 등록하려고. 염색은 나중에 잘 생각해 보고 해야지. 앤디 언니랑 샤오샤오가 어디서 했는지도 물어보고.”
“와, 그거 다 하려면 돈 많이 들겠다. 나한테는 턱도 없는 일이네. 일단 염색부터 해야지. 넌 무슨 춤 배우게?”
관쥐얼은 발개진 얼굴로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벨리댄스나 폴 댄스. 워낙 보수적인 성격이라 자극을 좀 줄까 해서.”
추잉잉은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크게 웃으며 2201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앤디 언니랑 같이 가. 언니도 자극적인 게 필요해.”
“아참, 방금 앤디 언니가 일부러 와서 선포하고 갔어. 지난번 성메이 언니네 고향에서 본 바오 사장님하고 사귄대. 너보다 진도가 훨씬 빨라. 지금 언니 집에 같이 있어.”
“뭐? 설마 그럴 리가. 네가 직접 봤어?”
“언니랑 바오 사장님이 바로 여기 문 앞에 서서 나한테 직접 말하고 갔어. 못 믿겠으면 샤오샤오한테 가서 물어봐.”
“아니, 오늘은 걔 건드리기 싫어. 그런데 앤디 언니… 웨이 사장님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며칠 전만 해도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이었는데. 이건… 너무 빠르잖아. 나는 실연당했을 때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었거든.”
집으로 막 들어오던 판성메이가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왜 그래? 뭐 하러 다 지난 일을 갑자기 들추고 있어. 그냥 덮어 둬. 얘기하지 말자고.”
추잉잉은 벌떡 일어나서 문 뒤에 두었던 과일을 얼른 챙기며 판성메이에게 앤디의 근황을 알렸다. 판성메이는 며칠 전 앤디 때문에 괴로워하던 웨이웨이를 만났던 일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하지만 그 일로 앤디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여러 말하지 않고 한마디만 했다.
“웨이 사장님이 상심이 커.”
“그러게 말이야. 앤디 언니가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을 만난 걸 보면 웨이 사장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확실해. 웨이 사장님 불쌍해서 어떡해.”
관쥐얼은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추잉잉은 쇼핑백을 들고 관쥐얼 방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녀의 책상 위에 과일 몇 가지를 놓으며 나눠 먹자고 했다. 그러고는 못다한 말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 일은 앤디 언니가 좀 성급했어. 진도가 너무 빨라도 언니한테 안 좋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를 거 아냐. 내가 얼마 전에 피눈물 나는 교훈을 얻어서 누구보다 잘 알아. 쥐얼, 내일 네가 언니한테 잘 얘기해 봐.”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언니가 바오 사장님하고 같이 있으면 행복해 보여.”
“나도 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아무래도 조심하는 편이 나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잖아.”
관쥐얼이 차분하게 얘기했다.
“있잖아, 네 앞에서 망나니 짓 하는 사람도 의외로 샤오샤오 앞에 가면 꼼짝없이 당할 수 있어.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다 자기가 하기 나름이야. 그래서 난 앤디 언니 걱정은 전혀 안 해. 친구로서 언니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좋아.”
“그렇긴 해. 그런데… 웨이 사장님은 어떡하지.”
“언니는 샤오샤오와 달라. 일부러 상처를 주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이상 억지로 거부할 필요도 없었겠지. 남녀 간의 일은 당사자만 알아. 우리는 제3자니까 관심 끄자고.”
관쥐얼은 이 말을 시작하기 전에 일부러 마른기침을 하며 판성메이에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히히, 쥐얼, 꽤 그럴 듯한 논리인데? 구구절절 맞는 말이야. 쥐얼, 근데 무슨 책 보고 있었어? 설마 《사랑학개론》 같은 건 아니지?”
추잉잉은 킥킥거리며 관쥐얼의 책을 낚아채 제목을 보았다. 과연 짐작대로 표지에는 《애정론(情愛論)》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쩐지 앤디 일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더라니 책에서 배운 것이었다며 큰 소리로 웃었다.
“나도 좀 보여줘. 지금 보충 수업이 절실히 필요하거든. 오예!”
관쥐얼은 책을 뺏어 들고 도망가는 추잉잉을 향해 돌려 달라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판성메이는 관쥐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화장을 지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추잉잉은 책을 들고 판성메이의 방으로 갔다. 잠시 쭈뼛거리던 추잉잉은 자신의 연애 문제를 솔직히 고백했다. 판성메이는 듣자마자 기뻐하며 말했다.
“잘됐네. 고향 친구면 말도 잘 통할 거 아냐. IT 기술자니까 잔머리를 쓸 것 같지도 않고 성실할 테고. 축하해, 잉잉.”
“축하한다는 말은 아직 일러.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 친구가 나한테 너무 잘 해주는데 난 어떡하지? 나도 뭐든 보답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 코치 좀 해주라. 축하한다는 말보다는 연애 노하우가 필요해.
판성메이가 말했다.
“잉잉, 너 같이 착실한 애가 연애하는 목적은 결국 결혼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그 친구가 널 존중하도록 하려면 너도 신중해야 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꾸준하게 관계를 지속하는 게 좋아. 평소에 그 친구한테 신경도 많이 써 주고. 어쨌든 여자는 세심해야 해. 게다가 너희는 객지 생활하는 고향 친구니까 살뜰하게 챙겨 주기가 더 수월하지. 그런데 말이야, 혹시 상처 받을까 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경제적인 조건은 절대 무시하면 안 돼.”
추잉잉은 또 큰 소리로 하하 웃었다.
“그게 있잖아, 나도 뜻밖이었다니까. 처음에는 걔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진짜야. 딱 봐도 평범한 대학생 같은 외모거든. 돈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웬일이니, 차가 있다는 거야. 대출로 사긴 했지만 방 2칸짜리 집도 있대. 얘기를 듣고 보니 좀 겸연쩍어서 내가 난 너한테 뭘 바라고 만나는 게 아니라고 그랬더니 괜찮대, 다 이해한대. 다행이지 뭐야. 하지만 나한테 맛있는 걸 너무 많이 사주는데 그걸 다 받아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어. 쥐얼, 자꾸 웃지 마. 난 조언이 필요해. 이번엔 꼭 잘됐으면 좋겠거든.”
관쥐얼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언제 시간되면 우리한테도 소개해 줘. 더치페이로 같이 밥 한번 먹어. 벗겨 먹진 않을게. 샤오샤오는 빼자.”
판성메이는 속이 뒤집혔다. 하이시에서 집을 산 것도 모자라 차도 있다고? 테이블 위에는 마침 왕바이촨이 전날 보내온 크고 토실토실한 딸기가 놓여 있었다. 제아무리 고급 딸기라고 해도 집 한 채에 비할까. 그렇잖아도 그녀는 요즘 날마다 집, 집, 집 노래를 부르고 다녔었다. 대출을 70프로 이상 받아야 하는 형편인데도 말이다.
판성메이는 놀란 표정을 거두고 웃으며 말했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 관계를 자연스럽게 진전시키는 게 먼저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친구가 네 남편이 되더라도 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게 하는 게 좋아. 이건 남녀 관계에서 일종의 금기 사항 같은 거야.”
관쥐얼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추잉잉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판성메이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지금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왕바이촨은 서른살이 되도록 집 한 채 없는데 이러다가 가족을 먹여 살릴 수나 있을는지, 얼굴 반반한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답답하기만 했다.
판성메이는 다음 날 출근할 때까지도 왕바이촨이 원망스러웠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아침마다 자신을 데리러 오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상여금 받으면 바로 사직서 낼 거야. 근데 오래 다닌 직장을 막상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좀 서운하긴 해.”
“서운할 거 없어. 성메이, 너는 힘들지 않다고 했지만 난 매일 그 먼 길을 출퇴근하는 네가 안쓰러웠거든.”
“그랬지. 이제 나 데리러 안 와도 되니까 1시간은 더 잘 수 있겠다. 푹 쉬어야 일도 잘하지. 어제 22층에 겹경사가 있었어. 잉잉이 연애를 시작했거든. 남자는 같은 고향 사람이고 IT 기술자래.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내가 다 기쁘더라. 앤디도 새 남자 친구가 생겼어. 바오 사장님 기억나? 우리 집안 일 도와주셨던 그 분이야. 오늘 아침에도 만났는데 고맙다고 인사했어.”
“아, 바오 사장님 언제 돌아가신대? 감사의 뜻으로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다른 목적도 있겠지. 이번 기회에 친분을 쌓아 보게? 아쉽지만 오늘 저녁에 가신대. 굉장히 바쁜 분이거든. 그럼 잉잉 남자 친구라도 초대할까?”
왕바이촨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약속 잡아 봐. 내가 대접할게.”
“더치페이하면 돼. 사람들이 IT 노동자라고 부르길래 돈도 얼마 못 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 잉잉 남자 친구는 실력이 있어서 하이시에서 집도 샀대. 겉보기엔 꼭 대학생 같다는데 잉잉 말로는 재밌는 친구래.”
판성메이는 이렇게 얘기하고는 무심코 머리를 끄덕였다. 왕바이촨은 얼굴부터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판성메이가 말한 의도를 금방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판성메이는 자신의 뜻이 전달되었다고 느꼈는지 다정한 말투로 왕바이촨을 달랬다.
“걱정 마. 넌 잘하고 있어. 하이시에 좀 더 일찍 진출했다면 지금쯤 아마 성공했을 거고 못해도 부동산 재벌은 됐을 거야.”
왕바이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뒷심이 좋아. 하하.”
앤디가 욕실에서 나오니 바오이판이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앤디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냉동식품하고 사흘 전에 사다 둔 빵밖에 없는데. 냉동 국수가 먹을 만할 거예요.”
“당신은 커피 내리고 우유만 데워줘요. 요리는 내가 할게요. 뭘 그렇게 놀라요? 말했잖아요, 나 고생 많이 해봤다고. 모진 우리 부모님이 나 미국 갈 때 주머니에 1,000달러 밖에 안 넣어 줬다니까요. 그나마 학비는 전액 대주셨지만 생활비는 내가 벌어서 썼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요리 실력이 절로 늘더군요.”
“그래도 미국에서는 빵이랑 우유로 세 끼를 때우는 게 직접 만들어 먹는 거보다 쌌을 텐데요.”
“난 앤디랑 식성이 달라요. 어려서부터 편식도 했지만 음식을 푸짐하게 먹는 습관이 있거든요. 게다가 토종 중국인 입맛이라 빵으로 때우는 건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귀국하고 나서는 요리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실력이 녹슬었을 텐데 이해하고 먹어요.”
“나 같은 초짜보다 못한 실력이면 하지 마요. 내가 할게요.”
바오이판은 앤디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내가 할게요. 사랑하는 여인이 먹을 아침인데 당연히 내가 해야죠. 긴장되니까 쳐다보진 말고.”
앤디는 동작이 굼뜬 바오이판을 보니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리는 동안 옆에 텔레비전이 있는데도 켜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소리가 끼어드는 게 불편했다.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던 그녀는 조리대 옆에 엎드려서 바오이판을 바라봤다. 요리하는 남자가 의외로 꽤 섹시해 보였다. 그런데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도 거의 없는 휑한 집안에서 열정적으로 요리하는 바오이판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잠시 뒤, 환풍기 속으로 채 빨려 들어가지 않은 맛있는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앤디가 궁금해서 다가가 보니, 그가 마늘 소스와 다진 베이컨을 넣어 섞은 달걀물을 빵에 입혀서 식용유로 굽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바오이판은 새로운 스타일의 프렌치토스트라고 했다. 앤디의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음식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바오이판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괜찮네. 솜씨가 아직 쓸 만해요. 내 정성을 생각해서 일단 맛 좀 봐요.”
앤디가 크게 웃으며 한쪽에 서서 맛을 봤다. 정말로 맛있었다. 그녀가 매일 아침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