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金豊起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시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글쓰기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어디 장쾌한 일 좀 없을까: 김풍기 교수의 옛 시 읽기의 즐거움』 『고전 산문 교육론』 『한시의 품격』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선가귀감, 조선 불교의 탄생』 『옛 시에 매혹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독서광 허균』 등이 있다. 역서로 『완역 옥루몽』(전5권)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전2권, 공역) 등이 있다.
1. 이 책은 『증정주해 오언당음(增訂註解五言唐音)』(조선도서, 1923)에 수록된 작품을 대본으로 번역하였다.
2. 『전당시(全唐詩)』 및 일부 작가들의 문집 등을 비교하여 원문의 오탈자, 작자, 제목 등을 바로잡았으며, 이본에 따른 차이를 각주에 반영하였다.
3. 배율(排律)의 일부를 절구처럼 수록하였거나 연작시 중의 일부를 수록한 경우, 전체 작품을 밝히거나 연작시의 전체 내용 혹은 제목을 평설 및 주석에 밝혔다.
해제
정조의 아들 자랑
정조가 약원(藥院)의 제조(提調)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도제조(都提調) 홍낙성(洪樂性)이 항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밖에 떠도는 소문을 들으면 원자(元子)가 요즘 열심히 공부하면서 문자에 재미를 붙이고 계신다고 하니 정말 흠앙(欽仰)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의 자랑을 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날마다 『당음(唐音)』을 외우고 있는데 어느 시(詩)의 어느 글자고 간에 한 번 보기만 하면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초중종(初中終)놀이처럼 전구(全句)를 암송해내곤 하네. 이것을 가지고 보면 문자에 관한 일은 별로 힘쓰지 않아도 잘할 것도 같아.” 자식 자랑은 팔불출 중의 하나라고들 하지만, 천하의 정조도 팔불출을 마다않고 너스레를 떨면서 마구 자랑을 했던 것이다. 1795년 4월 30일자 왕조실록의 기사 내용이다.
원래 정조에게는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있었다. 그에게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첫아들이었지만 다섯 살의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이 바로 문효세자의 무덤 터다. 너무도 애통한 마음으로 아들을 생각하던 차에, 1790년 수빈박씨(綏嬪朴氏)와의 사이에서 또다른 아들이 태어난다. 훗날 순조로 등극하는 분이다. 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맏아들을 ‘원자’라고 부르니, 정조가 마구 자랑하는 원자는 바로 여섯 살 난 어린 아들이었다. 자신의 건강 때문에 불렀을 법한 약원의 제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들 이야기가 나오니 자신도 모르게 근황을 자랑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문맥 속에서 활짝 웃는 정조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정조가 ‘초중종놀이’를 언급하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초중장놀이’라고도 하는 이 놀이는 옛날 양반들의 사랑방에서 자주 행해졌다. 주로 한문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학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20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시행되었다. 한문 공부가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의 미래를 결정하던 조선시대에는 학동들의 한문 실력을 높이기 위해 심력을 모두 기울였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에게 한시를 배우는 일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이런 공부는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학습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초중종놀이다.
한시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한시 작품을 암송하는 일이다. 암송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시의 표현법을 배우고 자구의 운용을 익힌다. 좋은 글귀에서 한두 글자만 바꾸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부터 한시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고, 이러한 이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한시로 삶을 표현하는 실력이 늘어난다. 이처럼 한시 암송을 격려하면서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바로 초중종놀이였다.
서당에서 여러 학동들을 모아놓고 선생님이 글자 하나를 제시한다. 그러면 그 글자로 시작되는 한시 한 편을 먼저 외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이것이 초중종놀이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馬(마)’를 제시했다고 치자. 그 말을 듣는 순간 학동 중의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馬上逢寒食, 途中屬暮春”으로 시작되는 송지문(宋之問)의 「도중한식(途中寒食)」을 암송하면 이기는, 일종의 게임이다. 그렇게 이긴 학동에게 적절한 보상과 함께 선생님의 칭찬이 주어지면 그 아이의 마음은 날아갈 듯 기쁠 것이다. 서당에서 많이 하던 놀이기도 하지만, 명절 때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였을 때에도 자주 행해지던 놀이였다. 집안의 여러 어른들과 친척 아이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 게임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학동이 있다면, 그 학동은 물론이거니와 학동의 부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하던 이 놀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시골의 여러 곳에서 자주 행해졌다. 어떤 것이 먼저 행해졌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시조(時調)를 외우는 놀이에도 이와 같은 방식이 활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 정조의 입을 통해 궁궐에서 왕자들에게 한시를 가르칠 때에도 활용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당음』이라는 책
『당음』은 말 그대로 당나라의 시를 뜻한다. 중국 문학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시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갈래가 있다. 예컨대 한나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라서 ‘한문(漢文)’이라고 하고, 송나라는 사(詞)가 대표적이라서 ‘송사(宋詞)’, 원나라는 희곡이 발달해서 ‘원곡(元曲)’이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시가 번성했던 시대라서 당시(唐詩)로 통칭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나라 시는 한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우리 문학사에서 늘 당나라 시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는 당나라 후기 즉 만당(晩唐) 시기의 시가 유행했고,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송나라 시풍이 유행하다가 조선 중기가 되면 다시 당나라 시풍이 유행하게 된다. 흔히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지칭되던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을 필두로 조선 후기의 시풍은 당시풍으로 전환한다. 『당음』이라는 책의 성행도 이러한 문학사적 흐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당음(唐音)』이란 어떤 책인가? 여기서 말하는 『당음』은 앞서 예로 들었던 송지문의 「도중한식」을 시작으로 편집되어 있는 당시 선집을 말한다. 집에 아직도 필사본 고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널리 읽혔던, 정말 흔한 책이다. 필사된 작품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책은 대체로 당시 중에서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를 모아 작가별로 편집했다.
당시(唐詩)를 편집한 책인 『당음』을 출판한 기록은 1505년(연산군 11년) 5월 19일자 왕조실록 기사에 보인다. 연산군은 당시 책을 출판하는 부서인 교서관(校書館)에 여러 종의 책을 인쇄해서 올리도록 명한다. 그 책은 『당시고취(唐詩鼓吹)』, 『속고취(續鼓吹)』, 『삼체시(三體詩)』, 『당음시(唐音詩)』, 『시림광기(詩林廣記)』, 『당현시(唐賢詩)』, 『송현시(宋賢詩)』, 『영규율수(瀛奎律髓)』, 『원시체요(元詩體要)』 등이다. 그중에서 『당음시』는 이후 많은 관료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당시를 공부하는 중요한 책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언급된 『당음시』는 원래 『시음(始音)』 1권, 정음(正音) 6권, 유향(遺響) 7권으로 이루어진 『당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금지아, 「조선시대 당시선집의 편찬양상 연구」, 〈중국어문학논집〉 제84집, 중국어문학연구회, 2014년 2월호) 당나라 초기부터 후기까지 시대순으로 편집된 이 책은 조선 후기 사대부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한시, 특히 당시를 기반으로 하는 한시 창작의 교과서처럼 읽혔다. 앞서 예시한 송지문의 작품은 『정음』(권5)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언당음(五言唐音)』은 이 부분을 중심으로 오언절구만을 뽑아서 편집한 책이다.
원래 『당음』은 원나라의 양사굉(楊士宏)이 1335년부터 1344년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서 편집한 당시 선집이다. 『시음』은 당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시인들,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병칭되는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등의 작품을 수록했고, 『정음』은 당초성당(唐初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 세 시기로 당나라 문학사를 시대구분해서 주요 작가들의 대표작들을 수록했다. 『유향』은 대가의 작품 중에서 『정음』에 수록되지 못한 것과 속세 밖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던 방외인(方外人)들의 작품을 수록했다. 그렇게 보면 『정음』이야말로 『당음』의 본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오언당음』을 편집하면서 주로 『정음』에 수록된 작품을 뽑은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한시 공부는 왜 중요했을까
사실 양사굉의 『당음』은 다양한 시체(詩體)의 작품을 뽑아놓은 것이라서 분량도 많고 읽기도 번다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책 중에서 좋은 작품들을 뽑아서 간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자신들만의 새로운 『당음』을 만들어냈다. 조선 후기에 서당의 학동들을 중심으로 널리 읽혔던 『당음』이라는 책은 양사굉이 편집한 『당음』(시음, 정음, 유향을 모두 포함한 것) 중에서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만을 뽑아서 엮은 책이다. 두 종류를 묶어서 『당음』(혹은 『오칠당음五七唐音』)이라고 표제한 책도 많고, 각각을 따로 편집해서 『오언당음』, 『칠언당음』으로 묶은 책도 많이 전한다.
정조가 여섯 살 난 아들이 『당음』 읽는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자랑한 데에서 볼 수 있듯이, 18세기 말이 되면 이 책은 조선의 학동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이 된다. 조선 후기의 이름난 문인 위백규(魏伯珪, 1727~1798)의 연보에 보면, 그는 어른에게 글을 배우면서 세 살 때 『천자문』을 배우고, 다섯 살에 『당음』을 배웠으며, 여섯 살에 『소학언해(小學諺解)』로 『소학』을 배웠다고 했다. 또한 윤기(尹愭, 1741~1826) 역시 아이들에게 글을 읽는 순서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천자문』을 가르친 뒤 글자를 달아 읽을 줄 알게 되면 『사략(史略)』과 『통감(通鑑)』 제1권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맹자(孟子)』와 『시경(詩經)』의 앞부분을 읽도록 하는 한편, 여름에는 『당음』의 절구부터 읽도록 가르치라고 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당음』은 적어도 18세기 후반에는 왕족부터 시골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어린 학동들을 위한 한시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들은 왜 이렇게 일찍부터 한시를 가르쳤던 것일까? 한시를 모르면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전기 이래 이 땅의 지식인들은 관직으로 진출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러야 했다. 물론 음서(蔭敍)를 통해서 부친의 덕을 본 사람도 많았지만, 조선시대로 내려올수록 과거시험은 지식인들이 관직으로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시험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한시를 짓는 능력이었다.
한시는 복잡한 규칙을 가진 문학 갈래다. 한자의 여러 특성 중 하나인 사성(四聲)을 둘로 나누어 평성(平聲)과 측성(仄聲)으로 구분하고, 평측을 맞추어 글자를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짝수 행의 마지막 글자에는 같은 계열의 소리로 운(韻)을 맞추어야 한다. 게다가 구절끼리 대구(對句)를 맞추어서 표현해야 한다. 이와 같은 대략적인 규칙 외에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정말 복잡한 규칙들이 많이 적용된다. 어찌 보면 아주 복잡한 글자 맞추기 게임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어려운 규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생각과 감정을 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시 작품 한 편을 지으려면 시간이 수월찮게 든다. 한시를 순식간에 짓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가 천재에 가까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향촌사회에서 지식인으로 대접받으며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했다. 그중에서 가장 고상한 능력이 바로 한시를 짓는 능력이었다. 사교를 위해 어울릴 때에도 한시를 지었고,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 조문을 할 때에도 한시를 지었으며,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어도 그를 위해 시를 지어서 선물했다. 그러니 한시를 짓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전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한시를 짓는다는 것은 중세 지식인에게는 필수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능력이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는 첫걸음이었다. 어쩌면 한시가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우리말도 아닌 한자를 배우면서 그 어려운 규칙을 익히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은, 아이의 어깨에 개인의 영달(榮達)과 가문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한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시는 몇 글자 안에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문학 양식이다. 게다가 하나의 글자가 여러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한자의 특성상 한시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상징적 혹은 비유적 활용에 큰 도움이 된다.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詩)라고는 하지만, 한시의 경우는 현대시보다 훨씬 넓은 범주를 가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문학 전통 속에서 한시가 가지는 영향력은 깊고 넓다. 한시의 전통 속에서 동아시아 중세 문화가 만들어지고 발전해왔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문화적 디엔에이(DNA)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딛고 선 이 자리를 만든 문화적 원형 속에 한시가 만들어온 문화 토양이 두텁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한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료 해독’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을 수반한다. 1차적인 독해가 되어야 비로소 2차 해석의 단계로 들어가고, 그것이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만날 때 새로운 감상 행위가 일어난다. 문제는 1차 독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생기는 끊임없는 미끄러짐, 즉 번역 과정에서 생기는 미묘한 어긋남은 언제나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음』을 번역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 나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한시를 번역하면서 느끼는 ‘미묘한 어긋남’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문득 평설(評說)의 방식을 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번역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내 생각과는 다른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다보니, 한시의 맥락과 내용을 풀어서 쓰면 내가 수행한 1차 독해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여러 단계의 작업을 거치면서 우리는 왜 한시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알게 모르게 우리 시대가 구성하고 있는 방식에 깊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세상을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는 작품을 읽으면 독자들은 익숙한 느낌으로 편안하게 내용을 이해하고 의미를 해석한다. 사람들에게 대중적 인기가 있는 작품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대중의 뇌리에서 잊힌다. 깊은 감동을 주면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는 작품은 자신의 시대가 구성한 일반적인 문학적 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패턴을 과감하게 탈피함으로써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그 익숙함을 깨는 듯한 작품이야말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당나라(618~907)는 지금 우리 시대와 천 년 이상 거리가 있다. 게다가 사용하는 언어 역시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당시를 읽다보면 그들의 섬세한 감수성과 언어의 아름다운 사용, 세상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짧은 글귀 속에 스며 있는 깊은 철학적 사유 등에 매료된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방대하다. 사랑, 만남과 이별, 역사, 철학, 은거, 배신, 탐욕 등 인간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모두 소재로 사용한다. 그러나 천 년 전을 살았던 당나라 사람들과 오늘날 우리와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자연 환경도 바뀌었을 뿐 아니라 생활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도 완전히 바뀌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의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며 우리 주변의 자연을 한가로운 마음으로 찬찬히 둘러볼 여유도 가지지 못한다. 심지어 자연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거의 사라지고, 자본으로 치장된 욕망의 불꽃만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다. 눈길을 잠깐이라도 돌릴 틈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언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
자본에 점령되어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당시(唐詩)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준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는 세상에서,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늘 보던 풍경과 늘 만나던 사람, 기계처럼 마주하던 수많은 일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짧은 한시를 읽는 시간은 나의 힘든 일상에 잠깐의 휴식을 던져준다. 그 짧은 시간을 계기로 우리는 비로소 내가 선 자리를 살필 수 있고, 내 옆에 선 사람을 바라보면서 순간의 미소를 던질 수 있으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내쉴 수 있다. 우리와는 다른 시선으로 지어진 한시를 읽으면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견주어본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표현과 감성을 느끼면서 당시를 읽는다. 그 차이가 내 삶을 새롭게 만든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문학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는 순간은 범상하게 바라보던 사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낼 때일 것이다. 작은 표현 하나에서도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던 당나라 시인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와 상상력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보편적이고 익숙한 테두리 속에서 문득 만나는 낯선 표현과 감성들이 우리를 감동하게 만든다. 그것이 천 년의 세월을 지내오면서 만들었던 우리 문화의 두터운 토대가 아니겠는가. 그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이기 때문에 한시, 특히 당시를 읽으면서 익숙함과 낯섦과 신선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한시라는 낡은 형식 속에서 오히려 우리 삶의 미래를 발견한다. 자본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살아가지 말고, ‘나’라고 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 만나는 자연과 사물들이 얼마나 새롭고 멋진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시를 읽으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차례
해제: 『당음(唐音)』, 과거의 형식에서 미래를 꿈꾸게 하는 책
5~9_ 동방규(東方虯), 왕소군의 원망〔昭君怨〕 5수
10_ 하지장(賀知章), 원씨의 별장에 쓰다〔題袁氏別業〕
15_ 양사도(楊師道), 중서성에서 숙직하다가 비를 읊다〔中書寓直詠雨〕
16~17_ 왕발(王勃), 강가 정자에서 달밤에 사람을 전송하며〔江亭月夜送別〕
21_ 왕발, 보안현 건음에서 벽에 쓰다〔普安建陰題壁〕
25_ 낙빈왕(駱賓王), 군중에서 성루에 올라〔在軍登城樓〕
32_ 위승경(韋承慶), 남쪽으로 떠나가며 아우와 이별하다〔南行別弟〕
35_ 강총(江總), 9일 강령이 장안에서 양주로 돌아가는 날에 짓다〔江令於長安歸揚州九日賦〕
39_ 설직(薛稷), 가을 아침에 거울을 보며〔秋朝覽鏡〕
43_ 무평일(武平一), 정월 초하루 여러 신하들에게 백엽주를 하사한 것에 받들어 화답하다〔奉和元日賜群臣栢葉〕
44_ 최식(崔湜), 장안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며〔喜入長安〕
46_ 장열(張說), 촉도에서 약속을 놓치고〔蜀道後期〕
48_ 장구령(張九齡), 그대가 나간 때부터〔自君之出矣〕
50_ 손적(孫逖), 낙양의 이소부와 함께 영락공주가 번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다〔同洛陽李少府觀永樂公主入蕃〕
62_ 이백, 중양절 용산에서 술을 마시며〔九日龍山飮〕
64_ 이백, 눈을 마주하여 우성 현감을 지내는 종형께 바침〔對雪獻從兄虞城宰〕
74_ 왕유, 남산으로 가는 최구 아우를 보내며〔送崔九弟往南山〕
75_ 왕유, 아우 목씨 집 열여덟째에게 주다〔贈弟穆十八〕
91_ 맹호연, 진으로 들어가는 주대를 전송하며〔送朱大入秦〕
93_ 맹호연, 저십이와 함께 낙양으로 가는 길에 짓다〔同儲十二洛陽道中作〕
95_ 맹호연, 원습유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訪袁拾遺不遇〕
97~98_ 저광희(儲光羲), 낙양으로 가는 길〔洛陽道〕
111_ 고적(高適), 시골 집에서의 봄 풍경〔田家春望〕
112_ 고적, 장처사의 채마밭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시를 짓다〔同群公題張處士菜園〕
113_ 잠삼(岑參), 행군하는 도중 중양절을 맞아 장안 고향집을 생각하다〔行軍九日思長安故園〕
114_ 잠삼, 위수를 보면서 진천을 생각하다〔見渭水思秦川〕
117_ 조영(祖詠), 종남산의 잔설을 바라보며〔終南望餘雪〕
118_ 이적지(李適之), 재상에서 파직되고 짓다〔罷相作〕
119_ 이기(李頎), 서울로 들어가는 다섯째 숙부를 삼가 전송하며 기무삼에게 부치는 시〔奉送五叔入京寄綦毋三〕
121_ 최서(崔曙), 비를 마주하여 그대를 보내다〔對雨送人〕
122_ 왕진(王縉), 망천 별장을 떠나며〔別輞川別業〕
125_ 이백(李白), 시랑을 지내는 아저씨를 모시고 동정호에서 노닐다가 술에 취하여 짓다〔陪侍郞叔遊洞庭醉後作〕
126_ 원결(元結), 소를 끌고 어디로 가는가〔將牛何處去〕
129_ 유장경, 눈을 만나 부용산에서 묵다〔逢雪宿芙蓉山〕
130_ 유장경, 동려로 돌아가는 장십팔을 전송하다〔送張十八歸桐廬〕
136~137_ 전기, 배를 타고 강 위를 가며〔江行 第五, 其九〕
138_ 위응물(韋應物), 가을밤 구십이 원외랑에게 보내는 시〔秋夜寄丘十二員外〕
139_ 위응물, 서쪽 교외에서 척, 무와 약속했는데 오지 않아 이 시를 써서 보여주다〔西郊期滌武不至書示〕
143_ 위응물, 포자와 함께 추재에서 홀로 묵다〔同褒子秋齋獨宿〕
148_ 황보염, 여러 공자와 회포를 노래하다〔同諸公子有懷〕
149_ 황보염, 섬중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는 왕옹신을 전송하며〔送王翁信還剡中舊居〕
150_ 황보염, 왕급사의 배꽃 시에 화답하다〔和王給事梨花詠〕
156_ 이가우(李嘉祐), 봄날 집으로 돌아오다〔春日歸家〕
165_ 이단, 과거시험에 떨어진 사람을 전송하며〔送人下第〕
167_ 사공서(司空曙), 금릉에서 옛일을 생각하다〔金陵懷古〕
168_ 사공서, 위중과 꽃놀이를 하며 함께 취하다〔玩花與衛衆同醉〕
170_ 고황(顧況), 파양에서의 옛 유람을 추억하며〔憶番陽舊遊〕
180_ 유우석(劉禹錫), 술을 마시며 모란을 보다〔飮酒看牧丹〕
188_ 최로(崔魯), 삼월 그믐날 손님을 전송하며〔三月晦日送客〕
191_ 태상은자(太上隱者), 사람들에게 답하다〔答人〕
192~194_ 한악(韓偓), 최국보의 체를 본받아서 쓰다〔效崔國輔體三首〕
길에서 한식을 맞다〔途中寒食〕1
馬上逢寒食
途中屬2暮春
可憐江浦望
不見洛橋3人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길에서 늦봄 만났다.
가련하여라, 강가에서 바라보니
낙교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705년 정월, 장간지(張柬之), 왕동교(王同皎) 등이 무후(武后)를 퇴위시키고 중종(中宗)을 옹립한다. 얼마 뒤 송지문은 농주참군(瀧州參軍, 농주는 지금의 광동성 나정현)으로 폄직된다. 이때 지어진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그가 향하는 곳은 머나먼 남쪽이다. 말이 좋아 좌천이지 실제로는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가족들이 모여서 멋진 봄을 즐기는 한식이로되 자신은 홀로 기약 없는 먼길을 떠난다. 강가에서 보이는 낙교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봄날과 쓸쓸한 송지문의 처지가 대비되고, 문득 그의 처지가 가련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원래 송지문의 오언율시 「황매 임강역에 막 도착해서〔初到黃梅臨江驛〕」 중에서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을 떼어놓은 것이다. 앞의 4구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마치 절구처럼 알려진 것이다. 이 작품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北極懷明主 | 북쪽 끝에 계시는 영명한 임금을 그리워하지만 |
南溟作逐臣 | 남쪽 바다에서 지내는 쫓겨난 신하로다. |
故園腸斷處 | 고향의 가슴 아픈 이별 하던 곳에는 |
日夜柳條新 | 밤낮으로 버드나무 가지 새로이 푸르러지겠지. |
1_『전당시』(권52)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이 「途中寒食題黃梅臨江驛寄崔融(도중한식 제황매임강역 기최융)」으로 되어 있으며, 「初到黃梅臨江驛(초도황매임강역)」으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고 하였음.
2_屬(속): 이 글자를 ‘촉’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음. 그럴 경우 ‘때마침’이라는 뜻이 되므로, 이 구절의 번역은 ‘가는 도중에 때마침 늦봄’ 정도가 됨. 다만 전통적으로 이 글자를 ‘속’으로 읽어왔고, 늦봄 가까이 되었다는 뜻으로 번역해도 작품 번역에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속’이든 ‘촉’이든 모두 입성(入聲)에 속하여 평측으로 보면 측(仄)에 속하는 글자임. 따라서 여기서는 ‘속’으로 읽었음.
3_洛橋: 낙양 동쪽에 있는 파교(灞橋)를 가리키는데, 사람들이 전별하는 곳으로 이름난 장소임.
두심언과 이별하며〔別杜審言〕1
臥病人事絶
嗟君萬里行
河橋不相送
江樹遠含情
병으로 누웠으니 오가는 사람 끊겼는데
아, 그대는 만리 밖으로 떠나는구려.
하교에서 전송하지 못하나니
강가의 나무도 아스라이 이별의 정을 머금은 듯.
두심언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할아버지다. 송지문과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698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길주사호참군(吉州司戶參軍, 길주는 지금의 강서성 길안)으로 좌천되어 낙양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송지문이 지어준 작품이다. 원래는 「송두심언(送杜審言)」이라는 제목의 오언율시인데, 앞의 네 구절만 따로 떼어서 절구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병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고적한 시간을 보내는 때, 불현듯 들려오는 벗의 좌천 소식에 가슴이 아프다. 낙양을 떠나 만리 밖 궁벽한 곳으로 떠나는 벗을 생각하면 병으로 누워 있는 그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으리라. 그러한 심정이 ‘차(嗟)’라는 감탄사 속에 오롯이 들어 있다. 그 깊은 탄식을 담은 이 글자를 볼 때마다 그의 안타까움과 절망과 슬픔과 가슴 철렁함 등이 한순간에 몰려오는 걸 느낀다.
하교(河橋)는 아마도 낙수(洛水)의 파교일 것이다. 멀리 떠나는 벗을 위하여 당연히 파교까지 나가서 전송해야 마땅하다. 버드나무 가지라도 꺾어서 벗의 무사를 빌어주고 마음이나마 함께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이별의 정을 머금고 늘어서 있는 낙수 가의 나무들이 보이는 듯했으리라.
세월이 흐르고 몸이 쇠약해질수록, 시대가 어려울수록,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의 존재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가. 마음속의 큰 버팀목 하나가 없어진 듯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나머지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別路追孫楚2 | 이별 길은 손초를 따르고 |
維舟弔屈平3 | 배 멈추고 굴평을 조문한다. |
可惜龍泉劍 | 애석하여라, 용천검이 |
流落在豐城 | 풍성에 떨어지다니.4 |
1_ 『전당시』(권52)에는 이 작품의 제목이 「送杜審言」으로 되어 있음.
2_ 손초는 진나라 문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주를 가졌음. 이 때문에 주변의 시기를 받아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으며 끝내 파직당한 사람임. 여기서 두심언은 자신의 재주가 뛰어나 벼슬길이 어렵다는 점을 손초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임.
3_ 굴평은 초나라 굴원(屈原)을 지칭함. 굴원도 주변의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음. 두심언이 자신의 신세를 굴원에 비유한 것임.
4_ 『진서(晉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고사.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늘 자줏빛 기운이 비치는 것을 두고 뇌환(雷煥)이 보검의 기운이라고 함. 장화가 어느 곳에서 빛이 비치는 것이냐고 묻자 뇌환은 예장(豫章) 풍성(豐城)이라고 답함. 이에 뇌환을 풍성령(豐城令)으로 발령을 내었고, 그가 풍성으로 가서 쌍검을 발굴함. 그것이 용천검과 태아검(太阿劍)임. 이 검을 땅에서 파내자 그날부터 자줏빛 기운이 사라졌다고 함.
아침 일찍 소주를 떠나며〔早發韶州〕
綠樹秦京1道
靑雲洛水橋
故園長在目
魂去不須招
진경으로 가는 길엔 푸른 나무들
푸른 구름 흐르는 낙수의 다리.
고향 오래도록 눈에 아련해
혼이 갔으니 불러올 건 없으리.2
고향을 떠나본 적이 있는 사람은 떠날 때 눈에 담아놓았던 고향이 평생토록 잊히지 않는 법이다. 여행을 떠나든, 귀양을 가든, 피난을 가든, 혹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고향을 떠나든,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오리라는 희망 섞인 마음과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