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시인이자 소설가. 1992년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 우수상을 받고 1997년에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시를 추천받았다.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 『지는 싸움』,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청소년 시집 『학교는 입이 크다』를 냈다. 최근에는 오래도록 밀어 두었던 소설 작업을 시작해 『바다로 간 별들』이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말에 관한 관심이 커져 『국어 선생님, 잠든 우리말을 깨우다』, 『미주알고주알 우리말 속담』, 『미친 국어사전』 등 우리말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냈다. 30년 동안 국어 교사 생활을 했으며,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 산문집 『나는 바보 선생입니다』와 교육 시집 『덮지 못한 출석부』를 낸 다음 지금은 퇴직 후 집필 노동자의 길을 가고 있다.
© 박일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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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며 }
국어 교사 생활을 오래하는 동안 국어책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표지가 화려해지고 종이 질이 좋아지는 등 겉모습뿐 아니라 내용도 많이 달라져서 예전에는 줄곧 실리던 글이 사라졌는가 하면 빈 자리를 새로운 글이 채웠다. 여러 변화 가운데 하나로 본문 옆에 낱말 풀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어려운 낱말이 나왔을 때 일일이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한 배려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학생이 모두 국어 공부를 하다 모르는 낱말이 나오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런 수고를 들이기보다는 국어 참고서부터 들추어 보는 게 보통이었다. 참고서에 자세한 낱말 풀이가 실려 있었으니, 늘 옆에 끼고 살던 참고서를 펼쳐 보는 게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 있을 국어사전을 찾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지금보다 예전에는 국어사전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졸업 시상품으로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 옥편 같은 걸 주곤 했다. 그만큼 어학 사전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어학 공부는 어휘 습득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요즘은 졸업 시상품으로 사전을 주는 학교를 찾기 힘들다. 지금은 어휘의 중요성을 예전만큼 크게 느끼지 않아서일까? 그렇지는 않을 테고, 종이 사전에서 전자사전 시대를 거쳐 인터넷이 모든 어휘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시대로 바뀐 탓이 크다. 더구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는 시대다 보니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 보면 된다. 그동안 우리말 관련 책을 몇 권 낸 바 있는 나 역시 이제 종이 사전은 거의 보지 않는다. 종이 사전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아쉬워할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제대로 된 국어사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찾고자 하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거나 뜻풀이가 모호하고 불친절한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어휘의 수는 50만 개가 넘는다. 그 많은 어휘를 남김없이 외울 도리도 없거니와 평생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어휘도 수두룩하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의 수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한자에도 기초 한자라는 게 있고, 영어도 꼭 알아 두어야 할 단어와 숙어만 모아서 펴낸 어휘집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국어도 아닌 우리말 어휘를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웬만한 어휘는 저절로 깨치는 경우가 많고, 정 궁금하면 앞서 말한 대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될 일이다. 국어학 전공자, 작가나 출판 편집자가 되고자 애쓰는 이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굳이 우리말 어휘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어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어휘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 중이다. ‘체계적으로’ 배울 필요까지는 없을지라도 어휘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대체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은 서로 관심사가 달라서 그럴 수 있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고, 스포츠는 좋아하지만 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사이에서 공통 화제를 끌어내기란 무척 어렵다. 두 번째는 정치 이념이나 종교 성향이 다른 경우다. 정치와 종교 영역은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이 확고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받아들일 여지가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어휘력이 빈약할 때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기초 상식이라 할 만한 어휘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라면 신뢰도와 호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릴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어서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물이 많은 곳에만 가면 겁이 나요”라고 했을 때 “트라우마가 뭐예요?”라고 하거나,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혐연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어”라고 했을 때 “혐연권? 흡연이나 금연은 들어 봤어도 혐연은 처음 들어 보는 말이네”라고 한다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는 상식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앞의 두 경우보다 심각하다. 예를 든 내용은 상황을 단순화한 사례지만, 사회 문제나 여성 문제 혹은 문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조금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면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대화에서 소외되거나 폭 넓은 사회관계를 이어 가기 힘들다.
만일 아르바이트나 임시직으로 채용되어 일할 때 ‘주휴수당’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정당하게 지급받아야 할 임금을 요구할 수 있을까? 커다란 보름달을 뜻하는 ‘슈퍼문’supermoon이라는 말을 몰라서 동네 슈퍼의 문으로 알아듣는다면 부끄럽지 않을까? ‘빙모’聘母는 다른 사람의 장모를 뜻하는 말인데 “어제 제 빙모님이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해 놓고 그게 틀린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런 예는 무척 많을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배우 이병헌이 했던 유명한 대사, “모히토 가서 몰디브나 한잔 하자”가 우스갯소리로 그냥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곧 4차산업혁명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 예로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같은 것을 든다. IoTInternetofThings는 원거리에서 인터넷을 통해 사물을 작동시킨다는 의미이고, AIArtificialIntelligence는 인공지능의 영어 약자다. AI는 조류독감을 뜻하는 약자로도 사용되므로 둘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 신문에서 IoT를 발견했을 때 앞의 스펠링이 i의 대문자인지 L의 소문자인지 몰라서 헷갈렸던 기억이 난다. 정확한 용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마주치다 보니 서체에 따라 I로도 보이고 l로도 보였다. 무슨 말인지 검색을 해 보고 나서야 제대로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듯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말을 따라잡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그런 용어를 부지런히 익혀 두어야 한다.
더불어 유행어도 적당히 알아 두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유용하다. 한때는 ‘궁서체’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최근에는 ‘급식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이 말은 사전적인 의미만 알아서는 해독을 못 한다. ‘궁서체로 쓴다’라고 하면 진지한 내용을 담아서 쓴다는 말이다. 급식체는 요즘 청소년이 쓰는 이상한 문장 구조의 말을 뜻하는데,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학생이 재미 삼아 쓴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유행어를 말장난에 치우친 가벼운 언어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모든 말은 필요에 의해 생겨나기 마련이므로 어느 것이 가치 있고 없는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유행어를 적절히 사용하면 대화가 즐거울 수 있다. 한편 유행어를 통해 시대상을 파악해 보는 일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말이지만 최근에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파고들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글쓰기가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글쓰기 요령을 담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판매량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 강좌도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요즘은 상급 학교 진학이나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자소서’, 즉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게 기본이다.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비싼 돈을 들여 남에게 대필을 부탁하거나 첨삭 지도를 받는다. 사회에 나가서도 각종 보고서나 평가서 따위를 작성해야 할 일이 많다. 자기표현의 시대를 맞아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글쓰기 책이 많이 팔리고 글쓰기 강좌가 성행을 이루는 이유는 이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 다른 능력이 뛰어나도 글쓰기를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한다. 어휘 없이 문장을 만들 수 없음은 당연하며, 어휘는 결코 문장의 하위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어휘는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뼈대이자 핵이다. 어휘와 어휘를 매끄럽게 연결하고 비문을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휘가 빈약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적확하게 사용된 어휘를 통해서 드러난다. 반대로 문장이 아무리 미려해도 잘못 사용한 어휘가 들어 있으면 그 문장은 가치를 상실한다.
{ 어휘가 중요한 이유 }
많은 사람이 요즘 아이들은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국어 교사로 오래도록 교단에 서 온 내 경험으로 보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얼마 전에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기를, 십 대 중반의 아이가 가마니가 무엇인지도 모르더라고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아이가 가마니라는 물건을 본 적이 없을 성싶었다. 본 적도 없는 물건 이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평소에 독서를 많이 했으면 알 수도 있겠으나, 가마니라는 말을 모르는 게 독서 경험 부족일지, 가마니라는 물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일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몇 년 전부터 추수를 끝낸 들판에 하얀 포장을 한 원통 모양의 큼직한 물건이 군데군데 놓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의 이름을 아는 성인은 얼마나 될까? 그 물건의 정확한 이름은 ‘곤포 사일리지’balingsilage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물건이 쓰인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부르기도 어려워 시골 사람도 정확한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곤포梱包,baling는 거적이나 새끼 따위로 짐을 꾸려 포장하는 것 또는 그렇게 꾸린 짐을 말한다. 사일리지는 동물의 사료로 쓰기 위해 곡물이나 목초를 저장해서 발효시킨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곤포 사일리지는 볏단을 밀폐된 상태로 단단히 압축시켜서 만든 숙성 사료를 뜻하는 말이다. 예전에는 묶은 볏단을 논 가운데에 쌓아 볏가리를 만들었는데, 요즘은 볏가리 대신 곤포 사일리지로 만들어 사료용으로 판매한다. 가마니를 모르는 청소년과 곤포 사일리지를 모르는 어른 중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청소년의 어휘력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예전에 흔히 볼 수 있던 물건이나 풍경, 관습이 사라지거나 어휘 자체가 바뀐 탓도 있을 테고, 한자 교육 비중이 낮아져서 한자로 된 개념어를 익힐 기회가 적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청소년일수록 새로 생겨난 말에 대한 적응력은 무척 높은 편이다. 게임 용어나 핸드폰과 컴퓨터 관련 용어는 웬만한 어른보다 훤히 꿰고 있는 청소년이 많다. 어른 중에 ‘득템’과 ‘만렙’이라는 말을 들이대면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득템은 게임에서 아이템을 얻는다는 데서 온 말로 무언가를 획득했을 때 쓰는 말이고, 만렙은 게임에서 도달하는 최고 레벨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 ‘○○을 득템했다’, ‘만렙을 찍었다’와 같이 쓴다. 득템은 알아듣겠다는 어른이 제법 있을 수 있으나 만렙에 관해서는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거릴 듯하다.
사실 청소년보다 성인의 어휘력 부족이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을 한다.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국제성인역량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문해력은 청년층(16–24세)에서는 OECD 국가 중 4위이지만, 55–65세는 뒤에서 세 번째, 45–54세는 뒤에서 네 번째에 해당한다.
—장은수, 『매일경제』(2017년 12월 1일 자)
문해력과 어휘력이 똑같지는 않다. 문해력은 글 내용, 즉 문장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어휘력은 낱말의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그런데도 문해력과 어휘력 사이에 어느 정도 비례 관계가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청년층보다 장년층에서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학생 시절에는 그래도 책을 읽지만 대학 졸업 이후에는 책을 멀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 수준이 부끄러울 정도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는 점일 테고, 한 발 더 나아가 지식의 변화 주기가 워낙 빠르다 보니 장년층 이상에서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도 주요한 원인이 되었을 법하다. 덧붙인다면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는 기성세대가 청소년이나 청년의 어휘력 부족을 탓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어느 쪽의 어휘를 더 많이 알고 있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청년이건 기성세대건 어휘를 늘릴 필요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휘를 늘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양과 질을 늘린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상은 대부분 언어 행위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어휘를 어떻게 늘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기 전에 우선 어휘가 왜 중요한지부터 따져 보자.
어휘가 중요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어휘가 지식 습득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어휘 없이 개념을 익힐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며,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지식을 익히기 위해서도 어휘 공부는 필수적이다.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기 위한 통로가 어휘 쪽에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휘를 익히고 늘려야 하는 이유는 꼭 기능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언어는 사유를 펼치는 데 필요한 기본 수단이다. 생각이 먼저 있고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생각과 언어 중에 무엇이 먼저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생각과 언어는 동시성을 지닌다는 게 언어학자 대다수의 견해다. 언어 없이도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람은 말을 할 때 머릿속에 모든 생각을 정리해 놓은 다음 이를 차례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대략의 틀이나 감만 잡아 놓고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말을 하는 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저절로 딸려 나오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말을 즉석에서 받아칠 때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이 먼저 나가기도 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에 뭔가 생각의 실마리가 있는데, 그게 아직은 정확지가 않다. 생각의 실마리는 아직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이다. 실마리를 언어로 잡아내서 정리할 때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즉 언어화하는 과정을 통해 미처 정돈되지 않았던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경험은 누구나 해 보았을 터이다.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립다’는 말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끌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소월은 언어가 감정을 끌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시인이었다. 김소월 시인의 탁월함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언어는 결코 의사 표현의 수단에 머무르지 않으며 언어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사유와 감정을 창조하는 역할도 한다.
언어가 사유를 이끌어 가는 측면이 있다면, 어휘량이 많은 사람이 더 풍부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어휘를 익힌다는 것은 교양을 넓히는 일일 뿐 아니라 세상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기르는 일이 된다.
독일 사상가이자 언어학자인 훔볼트는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현실이 언어를 규정하지 않고 언어가 현실을 규정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언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언어 결정주의는 비판받을 소지가 많지만 특정 언어가 우리의 생각이나 현실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실은 결코 고정적이거나 모든 이의 눈에 똑같이 다가오지 않는다. 고아라는 말이 부모가 없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들고, 부자라는 말이 돈 많은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앞에 있는 사람이 고아인지 부자인지 말해 주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해 아무런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언어로 사람을 규정하는 순간 그가 처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몇 년 전부터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갈수록 빈부 격차가 심해지는 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늘고 청년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우리나라의 현실이 마치 지옥과 같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살기 어려운 현실은 존재했으나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그런 현실에 관한 인식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 ‘정말 그 말이 맞아’라고 동조하는 사람이 늘면서 정치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비정규직을 줄이고 청년 실업을 막기 위한 정책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또한 언어는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 방향을 이끌어 주는 역할도 한다. 언어가 사유를 형성하고 사유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올바르다’와 ‘바람직하다’라는 말이 있을 때, 과연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정의할 수 있을까?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라는 관변단체가 있다. 이 단체가 말하는 ‘바르게 살기’와 각 개인이 생각하는 ‘바르게 살기’는 많은 차이가 있을 터이다. 국가나 관변단체가 주입하는 생각과 상관없이 모든 개인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르고 바람직한지 고민하면서, 고민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삶을 펼쳐 간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전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거기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정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을까? 개인 존재의 성격마저 국가가 규정해 주던 시대를 우리는 거쳐 왔다. 박정희 정권은 왜 「국민교육헌장」을 만들고 암송하도록 강요까지 했을까? 언어가 인간의 사상과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 내면에 국가주의가 스며들었음은 박정희가 숨졌을 때 수많은 국민이 운구 행렬을 뒤따르며 오열했던 사실로도 증명된다. 학교마다 성실이니 협동이니 하는 말을 앞세워 교훈을 만들고, 집에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가훈을 내거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원자력발전소라는 말과 핵발전소라는 말 중 어느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운 용어일까? 원자력발전소라는 말을 고집하는 사람과 핵발전소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원자력발전소가 아니라 핵발전소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인식을 바꿔 탈핵(탈원전이 아닌) 운동에 나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송전탑 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밀양의 할머니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성희롱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까지는 여성 앞에서 외모에 관해 성적인 표현을 하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 정도는 짓궂은 장난일지언정 범죄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성희롱이라는 말이 생기면서 남성이 이성을 대하는 말과 태도에 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성에 관한 새로운 가치관과 윤리 의식을 생성, 확장하는 데 성희롱이라는 말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서와 감각을 풍부하게 해 주는 언어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외씨버선은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을 뜻한다. 외씨버선이라는 말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 말을 통해 연상되는 그림은 또 얼마나 멋스러운가. 외씨버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선조들의 눈썰미가 고맙기만 하다.
서명숙 씨에 의해 제주도에 올레길이 생기더니 지리산과 북한산에 둘레길이 생기고, 강릉의 바우길에 이어 청송, 영양, 봉화, 영월을 잇는 외씨버선길도 생겼다. 도로에서 집 앞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 ‘올레’를 활용해 만든 올레길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이웃사촌을 거느린 셈이 되었다. 하나같이 정겨운 느낌을 주는 말인데, 그중에서도 조지훈 시인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외씨버선길은 어감이 참 예쁘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 모든 길의 시초가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길’이라는 말에 가장 많이 붙어 다니는 짝은 ‘나그네’가 아닐까? 나그네라는 말이 주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1970년대에 가수 박인희가 부른 「방랑자」라는 노래는 길과 방랑자를 이어 주는 역할을 했다. 나그네와 방랑자의 이미지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다가 산티아고 순례길이 유명해지면서 길과 순례가 만나게 되고, 길은 종교적 심상까지 갖는 어휘로 재탄생한다. 이렇듯 길과 나그네와 순례라는 말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 줄을 건드리면서, 이성과 다른 영역에 있는 정서와 감각을 자극한다. 시와 노래는 그런 어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