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그로스만
David Grossman
이스라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될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 정부의 대팔 레스타인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쉼 없이 낸 평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1954년 예루살렘 출생으로 히브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연극을 공부했으며,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소설 두 권과 단편집 한 권을 출간했다. 소설 과 희곡, 논픽션, 아동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집필한 그로스만은 “국가적 갈등 상황이라는 외줄 위에서 끝없이 비틀대며 중심을 잡으려는 줄타기 곡예사_《가디언》”라는 평을 받으며, 힘과 정의의 균형이 위태로운 이스라엘의 현실을 과감히 작품으로 옮겨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에메트상,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독일 북스테후더 불레상, 프랑크푸르트 평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에서 아들이 사망하는 비극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땅끝까지To the End of the Land』로 전미 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A Horse Walks into a Bar』로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며 다시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핀란드, 러시아 등에서 36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사자의 꿀Lion’sHoney』, 『시간 밖으로Falling Out of Time』가 소개되었다.
See Under: LOVE
by David Grossman
Copyright © 1986 by David Grossman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8 Woongjin Think Big Co. Ltd.
This transla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David Grossman
c/o The Deborah Harris Agency through KOLEEN AGENC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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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1. 이 책의 번역은 영역본 See Under: LOVE(New York: Picador, 2002)를 저본으로 삼았다.
2. 브루노 슐스의 작품 인용과 외국어는 가는 고딕체, 조어와 강조는 굵은 고딕체로 표기했다.
3. 각주는 모두 옮긴이 주이다.
사건인즉슨 이랬다. 외할머니를 땅에 묻고 몇 달 후, 모미크에게는 새 할아버지가 생겼다. 할아버지는 유대력 5317년 셰바트 월, 즉 서력 1959년에 나타났는데 <귀향민들의 인사말과 이산가족 찾기>1라는 특별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모미크는 그 프로그램을 매일 점심때마다 1시 20분부터 1시 30분까지 들으면서 아빠가 쪽지에 적어 준 명단에 있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지 귀 기울여야만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대신 파란 모겐 다비드(다윗의 별)가 그려진 구급차를 타고 나타났다. 구급차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벨라 마르쿠스의 카페 겸 식품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피부색이 슈바르체르(흑인)처럼 까만 게 아니라 우리처럼 까무잡잡한, 덩치 크고 뚱뚱한 사내가 차에서 내리더니 벨라에게 혹시 이 동네 주민 중에 네우만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고, 벨라는 깜짝 놀라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네 네, 알아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그러자 사내가 말했다. 흥분하지 마세요, 부인. 아무 일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게 아니라 친척분을 모시고 왔거든요. 저기에요. 그러면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길가에 주차된 구급차는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벨라의 얼굴이 갑자기 회벽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녀는 겁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때만큼은 구급차 쪽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모미크에게만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때 그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성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벨라가 말했다. “바이 이즈 미르(어쩜 이런 일이).” 친척이라고요? 사내가 대답했다. “누(에), 부인, 저도 바쁜 사람이에요. 그러니 네우만 가족을 아신다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세요. 집에는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는 최근에 귀향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도 엉터리 히브리어로 말했다. 그러자 벨라가 그에게 대꾸했다. 그래, 뭘 기대한 거예요? 집에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죠. 그 사람들은 식충이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아침부터 밤까지 두 블록 밑에 있는 복권 판매소에서 일한다고요. 그리고 이 아이는 그 집 아들이에요.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가서 불러올 테니까. 그녀가 앞치마를 두른 채로 뛰어나가자 사내는 모미크에게 윙크를 했는데 아이가 낯선 사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하더니 벨라가 두고 간 신문을 읽기 시작하며 허공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올해는 가물 것 같군. 그래그래, 우리한테 필요한 게 바로 그거지. 평소엔 예의 바른 아이인 모미크는 거기서 더 알짱대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가 구급차 뒤에 기어올랐다. 작고 둥근 유리창에서 빗방울을 닦아 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수조 안의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그는 푸른 줄무늬가 있는 잠옷을 입고 있었고 생전의 외할머니처럼 쪼글쪼글했다. 가느다란 목과 팔을 감싼, 축 늘어진 피부는 거북이처럼 황갈색을 띠었고 머리는 벗어졌으며 멍한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그는 구급차 안의 공기를 가르며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모미크는 눈 내리는 작은 유리구—이드카 아주머니와 심미크 아저씨로부터 선물받았지만 실수로 깨뜨린—속에 있던 슬픈 스위스 농부를 떠올리고는 두 번 생각 않고 문을 열었지만 노인이 이상한 목소리로 혼잣말하는 것을 듣자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목소리는 흥분한 사람처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그다음엔 거의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마치 노인이 연기를 하고 있거나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운데—모미크는 이 노인이 외할머니의 남동생이자 엄마의 외삼촌인 안셸임을 1000퍼센트 확신했다. 모두들 모미크와 닮았다고, 특히 턱과 이마와 코가 닮았다고 말하던 사람. 유럽 잡지에 동화를 연재한다던 사람. 하지만 안셸은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사람은 멀쩡하게 살아 있다. 모미크는 부모님이 이 노인과 함께 사는 것에 찬성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엄마가 이제 자신의 소원은 평화롭게 살다가 죽는 것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엄마가 벨라와 함께 나타났다. 메릴린 먼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벨라는 아픈 두 다리를 절룩이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이디시어2로 진정하라고 소리쳤다. 애가 놀라면 안 되잖아! 그리고 그 뒤에서는 거구의 모미크 아빠가 숨을 헐떡이면서 시뻘건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두 분 다 복권 판매소를 팽개치고 올 정도면 정말 큰일인가 보다고 모미크는 생각했다. 어쨌든 구급차 운전기사는 침착하게 신문을 접으면서 당신들이 네우만 가족이냐고, 고(故) 헨니 바세르만—고이 잠드시길—의 유족이냐고 물었다. 엄마가 대답했다. 네, 제 어머니신데,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뚱뚱한 운전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왜 사람들은 항상 나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원. 저희는 그저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마젤 토브(축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구급차 뒤로 갔고, 운전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노인을 가볍게 안아 올리자 엄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오이(어머나), 이럴 수가, 외삼촌이잖아? 그러면서 그녀가 휘청하자 벨라가 카페로 뛰어가서 늦지 않게 의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운전사가 말했다. 자 자, 설마 저희가 나쁜 소식을 가져온 건 아니죠? 그는 노인을 땅 위에 내려 준 다음 그의 여위고 구부정한 등을 친근하게 툭 치며 말했다. 누, 바세르만 씨, 이분들이 미슈포헤(가족)예요.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바세르만 씨는 지난 십 년 동안 바트얌 시에 있는 저희 정신병원에 계셨습니다. 지금처럼 혼자 중얼거리실 때 뭐라고 하시는 건지는 아무도 몰라요. 기도를 하고 계신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네부흐(안타깝게도), 귀가 머셨는지 남의 말을 전혀 못 들으세요. 이분들이 미슈포헤라고요! 그는 할아버지가 정말로 귀먹었음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의 귀에 대고 소리를 꽥 질렀다.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놈들이 이분께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어요. 누, 바세르만 씨가 어느 수용소에 계셨는지는 모르지만 이보다도 못한 상태로 나온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아니, 모르시는 게 낫겠네요. 아무튼 한 달쯤 전의 일이었습니다. 바세르만 씨가 갑자기 입을 여시더니 헨니 민츠 부인 등등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저희 원장님은 탐정 흉내를 내시기 시작했고 결국 바세르만 씨가 말씀하시는 것이 죽은 사람들—고이 잠드시길—의 이름임을 알아내셨습니다. 그 명단에 이 댁의 민츠 부인이 포함돼 있었지만 그분 역시 고인이 되셨으니—고이 잠드시길—여러분이 생존해 있는 유일한 가족입니다. 바세르만 씨가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실 것 같지도 않고, 이미 혼자서는 식사도 못하시는 데다,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용변도 혼자 못 가리세요. 그런데 네부흐, 이 나라는 그리 부유하지 않고, 의사들 말로는, 바세르만 씨 정도의 상태면 집에서도 충분히 돌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가족은 가족이잖아요? 자, 여기 바세르만 씨의 옷과 서류와 소지품과 드시는 약의 처방전이 있습니다. 아주 온순하고 조용한 노인이세요.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돌아다니시긴 하지만 심각하진 않아요. 심각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모두 바세르만 씨를 좋아해요. 말레브스키 가족3이라고 부르죠. 바세르만 씨가 항상 노래를 부르시거든요. 마지막 얘기는 농담이에요. 자, 이제 가족들한테 인사해 보세요! 그가 노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아, 역시 아무것도 못 들으신다니까요. 자, 네우만 씨, 여기랑 여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제가 바세르만 씨를 모셔다드렸다는 서류입니다. 혹시 신분증 같은 거 갖고 계신가요? 없으세요? 아 뭐, 괜찮습니다. 제가 믿으니까요. 누, 쇼인(좋아요), 에, 마젤 토브. 아기가 태어난 날처럼 행복한 날이네요. 그렇고말고요.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럼 저희는 이만 바트얌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바세르만 씨, 저희를 잊지 마세요! 그는 노인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쾌활하게 웃어 보인 다음—비록 할아버지는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지만—구급차에 올라타더니 쌩하고 떠나 버렸다.
벨라는 엄마를 기운 차리게 해줄 레몬 한 조각을 가지러 뛰어갔다. 아빠는 가만히 서서, 시 당국에서 소나무를 심기로 했었으나 여전히 비어 있는 도랑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은 두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엄마의 얼굴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는 키가 너무 작아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모미크는 노인의 앙상한 손을 잡고 부드럽게 그를 벨라의 식품점 차양 밑으로 이끌었다. 모미크와 노인은 키가 비슷했다. 노인의 등이 심하게 굽은 데다 목덜미에 작은 혹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모미크는 문득 새 할아버지의 팔에 새겨진 숫자를 발견했다. 아빠와 이드카 아주머니와 벨라의 팔에도 숫자가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것은 종류가 다르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모미크가 그 숫자를 외우려 애쓰는 동안 벨라가 레몬을 가지고 돌아와서 엄마의 관자놀이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좋은 냄새가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모미크는 계속 기다렸다. 엄마가 그렇게 금방 깨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저쪽에서 누가 걸어왔는고 하니, 다름 아닌 막스와 모리츠였다. 그들의 본명은 긴즈부르그와 제이드만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모미크 외엔, 아무도 그 이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둘은 단짝이었다. 그들은 12번 건물의 창고에 같이 살면서 그곳에 자기들이 주워 모은 누더기와 온갖 고물을 보관했다. 한번은 시청 조사관들이 그들을 창고에서 쫓아내러 왔는데 벨라가 큰 소리로 알려 준 덕에 무사히 도망친 적도 있었다. 막스와 모리츠는 서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는 절대 말을 섞지 않았다. 더럽고 냄새나는 긴즈부르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면서 돌아다녔다.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지? 그가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로 인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키 작은 제이드만은 항상 누구한테나 미소를 지어 보여서 내면이 텅 빈 사내로 불렸다. 두 사람은 어디든 혼자 가는 법이 없었다. 까무잡잡한 긴즈부르그가 앞장서면, 제이드만이 1킬로미터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낡은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들고 허공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은 채 그 뒤를 따랐다. 엄마는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오이프 알레 포스테 팔데르, 오이프 알레 비스테 발데르. 아주 엎친 데 덮친 격이네. 그리고 당연히 모미크에게도 절대 그 둘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모미크는 그들이 괜찮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벨라가 시청 조사관들이 그들을 창고에서 쫓아내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무핌과 후핌’이나 ‘파트와 파타숀’ 같은 우스운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이스라엘로 오기 전에 살았던 곳에서 유행한 만화 주인공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아무도 두렵지 않은 듯한 태도로 사람들 곁을 천천히 지나친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곧장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때 모미크의 눈에는 할아버지의 코가 그들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코 없는 사람도 긴즈부르그의 냄새는 맡을 수 있음을 고려하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다음 순간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두 얼간이—엄마가 그들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모미크는 그 세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느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새 할아버지는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 화난 것처럼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양, 다시 바보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양팔을 헤엄치듯 혹은 가상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듯 내젓기 시작했다. 막스와 모리츠는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키 작은 제이드만이 소리를 내면서 할아버지처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다른 사람의 행동을 항상 따라 한다. 그러자 긴즈부르그가 으르렁거리더니 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곧 제이드만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모습은 모미크가 그린 황국 우표에서 언제든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엄마가 회벽처럼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휘청이며 일어서자 벨라가 부축하며 말했다. 나한테 기대, 기셀라. 엄마는 새 할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벨라에게 말했다. 이러다간 내가 죽을 거예요. 이건 진담이라고요. 하느님은 왜 우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거죠? 우리도 좀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벨라가 말했다. 트푸, 트푸(쯧, 쯧), 기셀라, 무슨 말 하는 거야? 고양이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을 놓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써. 엄마가 말했다. 내가 고아가 된 거로도 모자라서, 우리가 엄마 때문에 그렇게 고생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또 그 짓을 다 다시 하라고? 저 사람을 봐요. 상태가 어떤지 한번 보라고요. 저 사람은 여기 죽으러 온 거예요. 벨라가 샤, 샤(쉿, 쉿) 하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할아버지 바로 옆에서 부둥켜안고 있었지만 엄마는 고집스럽게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아빠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누, 왜 여기 서 계신 거예요? 그리고 용감하게 노인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모미크를 한번 쳐다보고는 노인을 데려갔다. 모미크는 그 노인이 설사 자신의 진짜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해도 그를 할아버지라 부르게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손이 닿았을 때 노인이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 멀리’4에서 온 사람은 안전하다는 뜻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날, 모미크는 뭔가를 찾으러 지하실에 갔다.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 내려가는 건 늘 두려웠지만 이번에는 꼭 가야만 했다. 거기에, 커다란 놋쇠 침대들과 밀짚이 밖으로 삐져나온 매트리스들과 옷 꾸러미들 및 신발 더미들과 함께, 외할머니의 키파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키파트란 밧줄로 잡아매는 일종의 상자인데 그 안에 할머니가 ‘저 멀리’에서 가져온 옷 같은 것들, 『테잇시 후마시』와 『체나 우레나』5라는 책, 그녀가 빵 반죽할 때 쓰던 빵판, 거위 깃털이 가득 든 가방 세 개가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발을 따듯하게 해줄 깃털 누비이불을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에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수많은 배와 기차를 갈아타며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동안 끔찍한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 가방들을 계속 끌고 다녔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도착해 보니 그녀보다 먼저 귀국해서 금방 부자가 된 이드카 아주머니와 심미크 아저씨가 두 겹으로 된 깃털 누비이불을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깃털 가방들은 지하실로 보내졌고 곧 곰팡이를 비롯한 여러 홀레라(불청객)로 들끓게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물건도 내버리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요점은 키파트 밑바닥에 이디시어로 적힌 할머니의 공책, 그녀에게 아직 기억력이 있었던 시절의 모든 기억이 담긴 공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모미크는 자신이 글도 깨치기 전이자 알터 콥프, 즉 똑똑한 노인의 머리가 되기도 전인 먼 옛날에 할머니가 아주 낡고 오래된 잡지에서 뜯어낸 페이지 하나를 보여 줬던 걸 기억해 냈다. 거기 실려 있던 것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안셸이 백 년 전에 쓴 이야기였는데, 엄마는 더 이상 회자되지도 않고 회자되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애를 심란하게 한다며 할머니한테 불같이 화를 냈었다. 모미크의 예상대로 잡지 페이지는 여전히 공책에 끼어 있었지만 집어 들자 바스러지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종이를 다시 공책에 끼운 다음 키파트를 밧줄로 묶으려고 그 위에 올라앉았지만 몸이 너무 가벼워서 상자가 닫히지 않았고 모미크는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키파트를 열린 채로 내버려 두기로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떠올라서 멍하니 서 있다가 자기가 이다음에 뭘 하려고 했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다행히 그의 고추가 잘 알고 있었던 덕에 늦지 않게 계단통으로 달려가 오줌을 눌 수 있었다. 그것은 모미크가 지하실에 내려올 때마다 매번 치르는 행사였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도 모르게 공책을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방으로 뛰어가서 펼쳐 보니, 오는 도중에 페이지가 조금 더 으스러지고 위쪽 한 귀퉁이가 찢겨 나가 있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데다 오래 가문 땅처럼 갈라져서 당장 그 내용을 다른 종이에 옮겨 적지 않으면 카푸트(끝장)임을 알 수 있었다. 모미크는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두었던 비밀 공책을 꺼낸 다음 몹시 흥분한 상태에서 찢어진 페이지에 있는 이야기를 한 자 한 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마음의 아이들 — 붉은 얼굴들을 구하
인기 작가 안셸 바세르만셰에라자
50장으로 이루어진 이야
27장
오, 꾸준한 독자여! 지난 호에서 우리는 마음의 아이들이 재빠르게 초(超)시간 여행선의 날개 위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여행선의 목적지는 달이라 불리는 작은 광원체. 이 비행선은 총명한 세르게이의 솜씨와 지성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놀라운 우주선을 만드는 데 사용된, 기술과 전류에 관한 세르게이의 해박한 지식은 지난 호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니 상세한 부분을 잊어버린 꾸준한 독자는 그쪽을 참조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마음의 아이들과 나란히 승선한 자들은 나바호족의 붉은 사내들과 ‘붉은 슬리퍼’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들의 오만한 왕이었다.(어쩌면 우리의 상냥한 독자는 붉은 얼굴들이 그런 환상적인 이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우리는 그 런 이름을 듣고 미소 지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들은 선조들의 땅에서 그들을 몰아내러 온 군인들의 잔인함을 피해 달아났다. 그 군인들의 우두머리는 피에 굶주린 잉글랜드 원주민 존 리 스튜어트였다. 고로 나바호족은 고난으로부터 쉼터와 위안을 찾아, 비참한 삶이라는 습자첩에서 새로운 페이지를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달로 향했다. 보라! 경이로운 비행선이 빛처럼 빠르게, 빛살 무늬를 그리며 별들을 가로지르고 토성의 고리들을 통과하는 모습을! 그들이 위험한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마음의 아이들 중에서 첫째이자 으뜸가는 상냥한 오토 브리크는 (아주 최근에야 적들의 손에서 풀려나 불 수레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붉은 얼굴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마음의 아이들의 영광스러운 업적을 쭉 늘어놓았다. 우리의 충실한 독자는 그 마지막 한 글자까지 다 알고 있을 테니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피곤한 짓은 하지 않겠다. 오토의 여동생인, 금발의 명랑한 파울라는 붉은 얼굴들이 복잡한 마음과 의기소침함을 떨쳐 낼 수 있도록 식사를 준비했다. 같은 시각에, 조용한 소년 알베르트 프리에트는 아무도 모르게 조타석에 앉아 인류가 달에 발을 딛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숭고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상냥한 독자도 잘 알고 있듯이, 알베르트 프리에트는 서캐에서 물소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생물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솔로몬왕처럼 모든 언어에도 정통했기 때문이다.6 그는 잠시 후에 관찰하게 될 과학적 사실들을 기록하기 위해 서둘러 자신의 작은 습자첩을 찾았다. 우리의 친구 알베르트 프리에트는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독자들은 이 밖에도 여러 면에서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필기를 하고 있던 알베르트의 귀에 나지막하고 감미로운 플루트 소리가 와 닿았고 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자신의 눈에 비친 광경에 어리둥절하여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각종 묘기와 요술에 능한 마법사, 키 작은 아르메니아인 하로티안이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신들린 듯 빠르게 연주하는 플루트 선율은 붉은 얼굴들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고 두려움을 잠재웠다. 그 연주는 그들에겐 위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 경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꼬마 하로티안 자신이 오래전에 마음의 아이들에게 구출됐었기 때문이다. 투르키스탄의 투르크인들이 아르메니아의 구릉지에 있는 마을을 약탈했을 때 하로티안이 홀로 살아남은 이야기는 「마음의 아이들, 아르메니아인들을 구하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하로티안은 이 여행자들의 슬픔을 가슴 깊이 느꼈다. 한편 갑판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세르게이에게는 짙은 근심이 엄습해 왔다. 그는 200배로 확대해 보여 주는 마법의 뿔을 쥐고 이렇게 외쳤다. “이런 재난에 직면한 자,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달아나라! 달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의 지도자인 오토가 마법의 뿔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의 심장은 멎는 듯했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파울라가 그의 손을 꼭 쥐며 물었다. “오빠, 대체 뭘 본 거야?” 오토의 혀가 천근만근 꼼짝하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그들에게 닥친 재앙을 생생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공포, 어쩌면 죽음이 창밖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빛》 다음 호에 계속
이것이 모미크가 잡지에서 발견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비밀 공책에 베껴 쓰기 시작하자마자 모미크는 그것이 이제껏 써진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잡지 종이는 천 년은 묵은 듯한 냄새를 풍겼고 성서에 나옴 직한 단어들 때문인지 마치 성서에서 뜯어낸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가 그 페이지를 수천 번 다시 읽는다 해도 무슨 말인지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런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라시7 같은 사람의 주석이 필요하다. 요즘 사람들은, 안셸 할아버지라면 모를까,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그 이야기가 지금껏 써진 모든 책과 문학작품의 기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후에 나온 책들은 모미크가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듯 운 좋게 찾아낸 이 페이지의 모방에 불과했다. 모미크는 자신이 이 이야기를 완전히 숙지하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거의 다 아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고난 좋은 머리로 즉시 그것을 외우기 시작했고 겨우 일주일 만에 몽땅 암기해 버렸다. 그러곤 잘 준비를 할 때에도, 다음 날 아침에 등교할 때에도 “각종 묘기와 요술에 능한 마법사, 키 작은 아르메니아인 하로티안이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등등을 암송하더니 결국은 이야기에 너무 푹 빠져서 그들이 마법의 뿔을 통해 본, 달 위에 있던 끔찍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끊임없이 궁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로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을까 추측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성서의 진짜 결말은 오직 안셸 할아버지만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엄마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외할머니가 쓰던 작은 방을 주기로 했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단 일 분도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고 심지어 자는 동안에도 몸을 움찔대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팔을 사방으로 휘둘러 댔다. 또 집 밖에 못 나가게 할 때마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서 내보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복권 판매소에 나가고 모미크도 학교에 가고 난 아침이면 안셸 할아버지는 지칠 때까지 길거리를 왔다 갔다 하다가 벨라의 식품점 겸 카페 밖에 있는 녹색 벤치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는 사라지기 전까지 다섯 달 동안 모미크네 가족과 같이 머물렀다. 함께 살기 시작한 첫 주에 모미크는 ‘안셸 바세르만: 홀로코스트에서 사망한 유대인 작가’라는 제목으로 황국 우표에 할아버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벨라는 묽은 차를 유리잔에 담아 가지고 나와서 할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러곤 부드럽게 “멘다르프 피셴(사람은 오줌을 눠야 해요), 바세르만 씨.”라고 말하면서 어린아이 다루듯 그를 자기 가게 화장실로 데려갔다. 벨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진짜 천사다. 아주 오래전 남편 헤즈켈 마르쿠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반항적인 메슈게네(미치광이) 같은 아들 요슈아를 홀로 키우게 되었는데 벨라는 자신의 두 손으로 그를 육군 장교이자 대학 졸업자로 키워 냈다. 헤즈켈은 벨라에게 요슈아 외에도 자신의 아버지 아론 마르쿠스 씨—잘 에르 제인 게준트 운드 슈타르크, 부디 건강하고 정정하시길—도 남기고 갔는데 이 노인은 병약한 데다 지적장애가 있었고 거의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헤즈켈이 진짜 여왕처럼 받들었던 벨라는—그녀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컵을 옮기는 것조차도 못 하게 했었다—남편이 죽은 뒤에 하루 종일 집에서 편하게 앉아 있는 대신 단골손님이라도 잃지 않겠다며 자신의 작은 식품점에 일하러 나갔고 심지어 가게를 확장해서 테이블 세 개와 음료수 기계와 에스프레소 기계를 들여놓기까지 했다. 벨라는 피를 토해 가며 새벽부터 황혼까지 서서 일했고 오직 그녀의 베개만이 그녀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요슈아는 한 번도 배를 곯은 적이 없었고 과로로 죽은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벨라의 카페에서는 안목 있는 사람들을 위한 아침 메뉴와 가정 요리를 팔았다. 모미크가 “안목 있는 사람들”이란 표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벨라의 테이블 세 개에 놓기 위해) 그 메뉴를 세 번 적고 그림—벨라네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 뒤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린—으로 장식까지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벨라는 집에서 만든 쿠키도 팔았는데, 언제 구운 거냐고 누가 물으면 자기보다는 덜 오래됐다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모로코인 건설 인부들 외엔 손님이 거의 없었으므로 물어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 베이트 마즈밀의 주택단지에서 일하는 모로코 인부들은 늘 아침 10시쯤에 나타나서 우유 1리터, 빵 한 덩어리, 요구르트 한 컵을 주문했다. 그 밖의 손님들로는 몇몇 동네 주민들, 그리고 물론 모미크가 있었다. 오직 모미크만 돈을 내지 않았다. 다른 단골들은 쇼핑센터에 신식 슈퍼마켓이 개점하자 더 이상 벨라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식료품을 30파운드어치8 사면 코르크 컵 받침 세트를 공짜로 줬다. 마치 사람들이 항상 컵 받침 위에 찻잔을 놓고 공주님과 담소라도 나누는 것처럼. 이제 사람들은 거기 가면 훈제 생선과 무 대신 황금이라도 찾게 될 것처럼 슈퍼마켓으로 몰려가. 거기 가면 철제 쇼핑 카트를 몰고 돌아다니기 때문이기도 하지. 벨라는 별로 성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슈퍼마켓 얘기를 할 때마다 모미크는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돌린다. 그도 가끔 그곳에 가기 때문이다. 불빛과 그들이 파는 모든 물건과 땡 소리를 내는 금전등록기와 수조에서 잉어를 꺼내 죽이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하지만 벨라는 단골손님들이 떠나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절대 얻을 수 없는 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말해 봐. 록펠러라고 저녁을 두 번 먹겠니? 아니면 로스차일드9 라고 침대 두 개 위에서 자겠니? 아니잖아. 무엇보다 더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권태, 지루함이다.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녀는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있느니 차라리 나가서 바닥이라도 박박 닦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올해 중에는, 할리우드에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다리 통증 때문이리라. 그러니 메릴린 먼로는 느긋하게 유대인 남편10과 신혼을 만끽해도 된다. 벨라는 빈 테이블 중 하나에 종일 앉아 《우먼스 오운》과 《이브닝 뉴스》를 읽으면서 사비온 담배를 연달아 피운다. 그녀는 아무것도 겁내지 않고 언제나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한다. 그래서 시청 조사관들이 막스와 모리츠를 창고에서 쫓아내러 왔을 때에도 그녀가 어찌나 한바탕 훈계를 해댔던지 그들은 그 후로 평생 동안 양심을 지키며 살았다. 그녀는 심지어 벤구리온11조차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를 “플론스크 출신의 작은 독재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라고 늘 그런 식으로만 말했던 건 아니다. 모미크가 아는 모든 어른처럼 그녀 역시 ‘저 멀리’에서 왔음을 잊지 말라. 너무 많이 언급하면 안 되는 곳,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면서 그들이 늘 그러듯 오이이이 하고 긴 크레흐츠(한숨)를 내뱉어야 하는 곳 말이다. 하지만 벨라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달랐으므로 모미크는 그녀에게서 그곳에 대한 정말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원래 어떤 비밀도 누설해선 안 됐지만 자신의 부모님이 ‘저 멀리’에서 살았던 곳에 대한 단서 몇 개를 흘렸고 모미크에게 ‘나치 짐승’에 대해 처음 말해 준 사람 역시 벨라였다.
사실 처음엔 벨라가 상상의 동물이나 한때 실존했던 거대한 공룡처럼 요즘 사람들이 누구나 무서워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아무한테도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새 할아버지가 나타나고, 엄마 아빠가 밤만 되면 그 어느 때보다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고, 상황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모미크는 다시 한번 벨라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세상에는,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아홉 살짜리 꼬마가 아직 몰라도 되는 것들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그러고는 찌푸린 얼굴로 모미크의 셔츠 단추 하나를 풀면서, 그렇게 단추를 끝까지 다 채운 걸 보기만 해도 자기는 숨이 막힌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미크는 이번만큼은 반드시 대답을 들을 작정이었으므로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치 짐승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냐고 물었다.(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런 가상의 동물도 없고 공룡은 더더욱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벨라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나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 크레흐츠를 내쉬고 모미크를 한번 쳐다봤다가 입술을 오므리면서 아무 말 않으려 했지만 결국엔, 제대로 돌보고 보살피기만 한다면 어떤 동물도 나치 짐승으로 만들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곤 재빨리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모미크는 오늘은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을 것임을 알고 거리로 나갔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젖은 아스팔트에 책가방을 질질 끌면서 무의식적으로 셔츠 단추를 다시 채웠다. 그러다 제자리에 우뚝 서서 안셸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길 건너 녹색 벤치에 앉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팔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상대방은 할아버지에게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이상 할아버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며칠 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주변에 끌어모으기 시작한 듯했다. 사실 그들은 그 전까지 동네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아주 나이 많은 노인들이거나, 긴즈부르그와 제이드만처럼 설사 누가 봤더라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애쓰던 이들이었다. 긴즈부르그와 제이드만은 할아버지에게 다가와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곤 했고 그중에서도 제이드만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기 때문에 곧바로 할아버지의 손동작을 따라 하곤 했다. 그다음으로 나타난 예디댜 무닌은 빈 유대교회당에서 모든 순교자와 함께 자는 사람이었다. 그는 탈장 때문에 오(O)다리로 걷고 안경 위에 또 다른 안경을 얹어서 도합 두 개를 쓰고 다니는데 하나는 실외용, 하나는 실내용이다. 음란한 사람이라 아이들은 근처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모미크는 무닌이 사실은 좋은 사람이고 그의 평생소원은 훌륭한 명문가 출신의 여자를 사랑해서 자기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그녀와 아이를 만드는 것뿐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매주 금요일마다 모미크는 벨라의 신문을 슬쩍해서 유명한 에스테르 레비네 부인—외국에서 온 방문객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신식 중매인이자 잘나가는 전문가—의 개인 광고를 오려 낸다. 하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다음은 벨라의 남편 헤즈켈의 아버지인 아론 마르쿠스 씨였다. 십 년 동안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웃들은 이미 그를 위한 카디시(추모 기도)를 왼 후였는데 그런 그가 멀쩡하게 살아서 보기 좋게 옷을 쪽 빼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벨라는 그를슐룸페르(얼간이)같은 행색으로 길거리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오직 그의 얼굴만이 안타깝게도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오만 가지 표정들로 찡그리고 삐죽대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온 사람은 한나 제이트린 부인이었다.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재단사 남편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지금 생과부 신세라고 스스로 항상 고래고래 외치고 다니는데 배상금12이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마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 프샤크레브(악당) 같은 재단사 놈이 손톱의 때조차도 안 남기고 몽땅 가져갔기 때문이다. 제이트린 부인은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창녀인 데다 슈바르체르(흑인)와도 짝짓기를 한다. 아 슈바르츠 야르 오이프 이르. 일 년 동안 재수 없어라.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제이트린 부인은 하포엘 예루살렘 축구팀의 풀백 사손 사손과도, 택시 운전사 빅토르 아루시와도, 쇼핑센터 정육점 주인 아주라와도 정말로 그걸 한다. 머리카락에 항상 깃털이 잔뜩 붙어 있는 아주라는 흘레붙기 따위는 안 할 듯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오입질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모미크는 처음엔 흑인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한나를 싫어했다. 그리고 자신은 중매인 에스테르 레비네의 광고에 나오는 여자들 같은 훌륭한 명문가 출신의 사람, 그의 잘생긴 얼굴과 총명함과 수줍음만을 보고 사랑해 줄 사람, 절대로 다른 남자들과 짝짓기를 하지 않을 사람과만 결혼하리라고 맹세했다. 그런데 벨라에게 한나 제이트린에 관한 얘기를 하자 벨라는 모미크에게 화를 내면서 한나 제이트린이 얼마나 불쌍한 여자인 줄 아느냐고 말했다. 너는 한나를 가엾게 여겨야 해. 다른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듯이 말이야. ‘저 멀리’에서 한나한테 있었던 일을 네가 다 알지는 못하잖니. 한나도 태어났을 때는 자기 인생이 이렇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했을 거야. 처음에는 누구나 희망과 꿈을 갖기 마련이니까. 벨라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모미크는 그때부터 한나를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고 그녀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의 커다란 금발 가발은 꼭 메릴린 먼로의 머리 같았고, 커다란 빨간 얼굴에는 작고 멋진 콧수염이 있었으며, 퉁퉁 부은 두 다리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름 예쁜 외모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끔찍이 싫어하고, 손톱으로 긁고, 그것을 나의 용광로이자 나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그렇게 외치는 이유를 모미크에게 설명해 준 사람은 무닌이었다. 그녀는 늘 짝짓기를 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어디론가 가버리거나 할지도 모른다. 재단사가 그녀에게서 도망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는 무쇠로 만들어진 사내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뿔13과 관련된 문제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벨라한테 물어봐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자 모미크는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어느 날 한나의 연인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는데 길을 걸어가는 모미크가 그녀의 눈에 띄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걱정은 제이트린 부인도 하느님한테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고, 별로 공손하지 않은 동작들을 하고, 폴란드어로 소리 지르고 욕을 한 다음에—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나쁜 짓이건만—이디시어로도 욕을 하기 시작한다. 후자는 그분이 알아들으리라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이 디누프 출신의 이 보잘것없는 여자 앞에 단 한 번이라도 그 뻔뻔한 얼굴을 내미는 것뿐인데 아직까지는 그분이 그럴 용기를 못 내고 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소리치면서 길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할 때마다 모미크는 창가로 달려가서 그들이 만나는 광경을 보려고 기다린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이 언제까지 그녀의 온갖 모욕을 참을 수 있겠는가. 남들도 다 듣고 있는데. 그분은 무쇠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쨌든 요즘 제이트린 부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벤치에 나타나 할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다. 착한 소녀처럼 예의 바르게, 여전히 온몸을 긁으면서, 하지만 소리 지르거나 다른 사람이랑 싸우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다. 그녀조차도 할아버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주 점잖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미크는 수줍음이 많아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대신 책가방을 보도에 질질 끌면서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불현듯 자기도 모르게 벤치 옆에 서게 되는데 거기서는 그들이 이디시어로 나누는 대화가 다 들린다. 그 이디시어는 엄마 아빠가 쓰는 말과는 좀 다르지만 모미크는 한마디도 빠짐없이 알아들을 수 있다. 키 작은 제이드만이 속삭인다. 우리 랍비님은 어찌나 똑똑했던지 최고의 의사들조차도 랍비님 뇌가 두 개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디댜 무닌이 에흐트!(그래서?)—그들 모두가 이 소리를 낸다—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야누카(신동)라 불렸던, 노이슈타트의 우리 레벨레(랍비)도 ‘그곳’에서 숨을 거두셨는데, 네부흐(안타깝게도), 그분은 주석서를 쓰시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누, 위대한 하시디즘14 신도들 중에는 그런 것을 원치 않는 분들이 분명 있었죠. 자, 그 뒤엔 어떻게 됐을까요? 제가 말씀드리죠. 축복받은 기억력을 가진 작은 레베(랍비)가 깨달아야 했던 세 가지는 ‘저 위’로부터의 계시였습니다! 제 말 듣고 계세요, 바세르만 씨? ‘저 위’로부터의 계시라고요! 그때 제이트린 부인이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한다. 내가 살던 디누프에서는요, 광장에 있던 야기에우워15 기념비가 높이는 거의 50미터에, 재질은 전부 대리석이었어요! 그것도 수입 대리석요!
모미크는 너무 흥분해서 입 다무는 것도 잊고 만다! 그들이 ‘저 멀리’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위험한 수준으로 그곳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서 모든 것, 모든 것을 기억한 다음에 집으로 달려가서 공책에 기록하고 그림도 그려야 한다. 어떤 것들은 그림으로 그리는 게 낫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저 멀리’의 어떤 장소에 대해 얘기하면 모미크는 그가 만들고 있는 비밀 지도책에 그곳을 스케치할 수 있다. 일례로 마르쿠스 씨가 얘기하는 산을, 그는 지금 지도책에 그려 넣을 수 있다. ‘저 멀리’의 고이(이교도)들이 “유대인 산”이라고 부르는 그 거대한 산은 마법의 산이다. 그러니까 바세르만 씨, 그 위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해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이거요. 끔찍한 광경이지요! 슈레클리히(끔찍하고말고)! 그 산에서 주운 나무에는 불이 붙지 않았어요! 타기만 할 뿐 재가 되진 않았지요! 이것이 마르쿠스 씨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표정을 바꿔 가며 한 말이다. 신이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하지만 무닌 씨는 어린아이처럼 할아버지의 외투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말한다. 한 가지 더요, 바세르만 씨. 제가 살던 노이슈타트에는 바인트라우프라는 사내가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를 샤야 바인트라우프라고 불렀지요. 젊은 친구였어요. 소년이었죠. 하지만 정말 대단한 천재였어요! 바르샤바에까지 소문이 퍼졌을 정도니까요!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직접 특별상을 받기도 했지요! 상상이 되세요? 폴란드인에게서 상을 받는 게? 자,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무닌 씨가 평소보다 더 깊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한다.(어떤 거지라도 찾아낼 법한 보물을 찾느라 그러는 거야. 벨라의 설명이다.) 이 바인트라우프라는 아이한테 타무즈 월16—타무즈 월이라고 가정합시다—에 묻는 거예요. 부탁인데, 샤야, 혹시 가능하다면 다음 유월절까지 몇 분 남았는지 말해 주지 않을래? 제 말 듣고 계시죠? 몇 분이에요. 며칠, 몇 주가 아닌 몇 분요.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우리 둘 다 자식들이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기를—바세르만 씨, 정확한 답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진짜 로봇처럼요. 그러자 한나 제이트린 부인이 긁기를 멈추고 치마를 홱 걷어 올리더니 다리 위쪽을 긁기 시작한다. 그러곤 무닌을 쳐다보면서 비웃듯이 묻는다. 혹시 그 바인트라우프가, 머리통이 옥수수 이삭처럼 생긴 사람, 크라쿠프로 이사 간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무닌 씨는 약간 짜증 난 듯한 표정으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한다. 그래요, 그 친구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 그러자 한나 제이트린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새된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그가 결국 어떻게 됐죠? 샤야 바인트라우프는 주식에 손댔다가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추락했잖아요. 천재는 무슨, 하!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말을 멈추지도,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모미크가 전에 어딘가에서—정확히 어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들은 적 있는 단조로운 가락에 따라 ‘저 멀리’의 언어로 일급비밀인 부호와 암호를 경솔하고 무신경하게 늘어놓는다. 르부프 지구, 브조주프주(州), 재래식 우시장, 클라우이즈(유대교회당)의 대화재, 군역, 상납금, 앙심 먹고 변절한 사람, 붉은 페이게 레아와 검은 페이게 레아, 스웨덴 왕이 러시아 군대를 피해 달아나다 금이 가득 든 상자들을 묻었다는, 제이드만네 마을 외곽의 황금 언덕 골데네 베르겔까지. 아, 모미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모든 것을 머릿속에 저장한다. 이런 유의 일에 필요한 빼어난 머리, 진짜 알터 콥프를 가졌기 때문이다. 뭐, 진짜 로봇이라 불리는 샤야 바인트라우프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모미크도 여름방학 전까지 체육 시간이 몇 번 남았는지, 학교 수업이 몇 시간 (혹은 몇 분) 남았는지뿐만 아니라 그가 아는 몇 가지, 예를 들면 예언 같은 것을 즉석에서 말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미크는 사실상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 같은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번 산수 깜짝 시험이 언제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알리자 선생님은 실제로 교실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자, 여러분, 공책 집어넣고 종이랑 연필만 꺼내세요. 아이들은 놀라서 모미크를 쳐다보았지만 사실 이 예언은 맞을 수밖에 없었다. 석 달 전 아빠가 비쿠르 홀림 병원에 심장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그들은 시험을 봤다. 모미크는 아빠가 심장 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조금 긴장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다음번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에도 또 시험을 봤다. 그래서 모미크는 사 주 후 월요일에 또 깜짝 시험이 있을 걸 예상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이런 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 주는 그들이 헤아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미크가 마술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밀 공책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매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또다시 일어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모미크는 탱크 행렬이 이십일 일마다 한 번씩 아침 10시에 말하 거리를 가로지를 거라는, 스파이 같은 정확한 예측으로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과학 담당인 네타 선생님의 얼굴이 끔찍한 여드름으로 뒤덮일 때가 언제인지도 맞힐 수 있다.(이 예언은 그가 생각해도 섬뜩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이들에게 놀림받지 않고 존경받기 위한 시시한 예언, 속임수에 불과하다. 정말로 중요한 예언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부모님 염탐하기나, ‘저 멀리’의 사라진 땅을 퍼즐 맞추듯 재구성하기 위한 모든 첩보 활동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을 통틀어 오직 모미크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누가 엄마 아빠를 공포와 침묵과 크레흐츠(한숨)와 저주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안셸 할아버지가 나타난 후로 한층 더 심해졌고 그들이 그토록 잊으려 애썼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려 애썼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모미크는 물론 안셸 할아버지도 구할 생각이다. 다만 그 방법을 아직 모를 뿐이다. 이미 한두 가지를 시도해 보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 효과가 없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에게 점심 식사를 가져다주고 그 옆에 앉을 때 가끔 라파엘 블리츠와 나흐만 파르카시17가 탈옥 계획을 짤 때 하던 것처럼 우연인 척 식탁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 행동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미크도 알지 못했지만 할아버지 안의 누군가가 응답하듯 식탁을 두드려 줄 거라는 예감, 아니,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모미크는 할아버지 팔에 적힌 암호를 풀려고 했다. 예전에 아빠와 벨라와 이드카 아주머니의 암호에 도전했을 때도 그는 실패했었다. 그 숫자들은 모미크를 미치게 했다. 잉크로 쓴 것도 아닌데 물이나 침으로도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미크는 할아버지 팔에서 암호를 지우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숫자는 말짱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 숫자들이 밖에서 써진 것이 아니라 안에서 써진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할아버지 안에 다른 누군가가, 어쩌면 한 명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이렇게 구조 요청을 하는 거라는 확신이 어느 때보다 더 강해졌다. 모미크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우선 비밀 공책을 펼치고 아빠랑 벨라랑 이드카 아주머니의 숫자 옆에 할아버지의 숫자를 적은 다음 온갖 종류의 계산을 다 해보았다. 그 후에 운 좋게도 학교에서 게마트리아18와 각 글자의 값에 대해 배웠는데 반에서 제일 먼저 이해한 학생은 당연히 모미크였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할아버지의 숫자를 이런저런 계산법을 통해 글자로 바꿔 봤지만 그 결과 얻은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이상한 단어들이었다. 그래도 모미크는 포기하지 않았고 어느 날 한밤중에 아인슈타인 같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부자들이 돈과 다이아몬드를 숨기는 금고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다. 이 금고라는 것은 어떤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다이얼을 일곱 번 돌려야만 열린다. 모미크가 반밤이 지나도록 그것을 실험했음은 물론이다. 다음 날 그는 하굣길에 벤치에서 할아버지를 데려오자마자 점심을 가져다주고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할아버지 팔에 있는 숫자를 다양하게 조합한 결과를 천천히, 엄숙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불렀다. 그 목소리는 마치 라디오에서 당첨금 3만 파운드짜리 복권의 당첨 번호를 발표하는 남자 같았다. 모미크는 할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노란 콩깍지처럼 둘로 쪼개지면서 그 안에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싱글벙글한 꼬마 할아버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모미크는 갑자기 묘하게 슬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늙은 할아버지에게로 가서 그를 꼭 끌어안고 오븐처럼 뜨거운 온기를 느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혼잣말을 멈췄다. 그는 30초가량 잠잠했고 얼굴과 손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 기울이는 듯했지만 그리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진 못했다.
그다음에 모미크는 자기가 정말로 자신 있는, 체계적인 접근법을 사용했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집에 남을 때마다 공책과 펜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할아버지의 횡설수설을 히브리어로 받아 적은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다 받아 적지는 않았지만—그건 너무 멍청한 짓이었을 테니까—할아버지가 내는 소리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겨우 이삼 일 만에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전부 의미 없는 웅얼거림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사실 그는, 모미크가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모미크는 외할머니가 안셸 할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그것은 아주아주 오래전, 모미크가알터 콥프같은 통찰력도 없고, ‘저 멀리’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가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가 어른들을 위한 시도 썼다는 것, 아내와 딸이 있었는데 두 사람 다 ‘저 멀리’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모미크는 옛날 잡지에 실려 있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도 해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사서인 고브린 부인에게, 혹시 안셸 바세르만이라는 작가가 쓴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브린 부인은 안경 너머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자기는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모르는 작가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모미크는 아무 말 않고 마음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발견—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러 벨라네 가게에 갔지만 그녀는 모미크가 싫어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차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셔츠 첫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얘야, 잉갈레(아가), 너도 이젠 정신 차려야지. 넌 너무 창백하고 비쩍 말랐어. 진짜 페르텔(해골)이란 말이야. 그래 가지고 어떻게 군대에 가겠니, 응? 하지만 고집 센 모미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안셸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할머니도 정신이 온전했을 때는 이야기 들려주는 걸 좋아했었다. 모미크는 할머니의 이야기할 때 특유의 목소리, 단어를 길게 늘여 발음하던 방식, 말로 가득 차 있었던 그녀의 배 속, 자신의 손바닥과 뒷무릎에서 이상하게 흐르던 땀을 기억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미크는 벨라에게, 이드카 아주머니와 심미크 아저씨가 스위스에서 가져온 농부—슬픈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었던—처럼 할아버지가 이야기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 농부는 눈 내리는 유리구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엄마 아빠는 유리구를 거실 찬장에 놓았는데 농부의 벌린 입을 참을 수 없었던 모미크가 어느 날 실수인 척 그것을 깨뜨려서 농부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모미크는 영악하게 ‘지리’라고 제목 붙인 비밀 공책에 계속해서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을 기록한다. 그리고 차츰차츰 여기저기서 단어처럼 보이는 것, 예를 들면 헤어나이겔, 예를 들면 셰에라자드19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히브리어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없자 그는 별생각 없이 벨라에게 셰에라자드가 무슨 뜻이냐고 묻고 벨라는 모미크가 ‘저 멀리’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는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뻐서 자기 아들 요슈아 소령한테 물어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틀 후 그녀는 모미크에게, 셰에라자드는 바그다드에 살았던 아라비아의 공주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다. 신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그다드에 공주는 없고 왕자 한 사람, 프샤크레브(악당) 카셈 왕자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는 떠올리지 않아야 마땅한’ 모든 고이(이교도)들처럼 우리 유대인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모미크는 ‘굴복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는 코끼리 같은 뚝심을 가지고 있고 오늘은 알쏭달쏭하고 무섭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도 내일이 되면 명확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논리 문제이기에 언제나 그에 합당한 설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산수에서도,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서 몇 시간씩 앉아 있고, 목을 구부정하게 내밀고 걷는다고 아이들이 낙타라고 놀려도 상처받지 않는다. 아, 그 아이들이 뭘 알겠는가. 또 안경과 치아 교정기—이것 때문에 모미크는 가급적이면 말을 하지 않는다—를 가지고 헬렌 켈러라고 놀려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다음 깜짝 시험이 언제인지 알아내기 위해 아첨을 해도 굴복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모미크는 매일 아침 그의 샌드위치를 훔쳐 가는 날도둑 라이제르와의 거래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산수를 이용해서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일이 남아 있다. 학교 정문에서 복권 판매소까지의 거리는 더도 덜도 말고 777걸음이다. 엄마 아빠는 좁아터진 복권 판매소 안에서 하루 종일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는다. 그들은 모미크가 모퉁이를 돌아 판매소로 걸어오는 것을 본다. 그들의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다. 모미크가 도착하면 엄마가 집 열쇠를 가지고 나온다. 엄마는 굉장히 땅딸막해서 꼭 1킬로그램짜리 밀가루 포대처럼 보인다.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하잔20의 아들 모틀21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다. 단정해 보이라고 그의 볼과 소매의 얼룩도 지워 준다. 하지만 모미크는 거기에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음을 잘 안다. 엄마는 그저 아들을 어루만지는 걸 좋아할 뿐이다. 아버지를 여읜 모틀은 끈기 있게 어머니의 손톱을 참아 내면서 그녀의 눈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본다. 혹시라도 그녀의 눈빛이 이상할 경우엔 미국으로 가는 데 필요한 서류를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은 모틀의 어머니라는 걸 모르는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한다. 네 아빠에 대한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 가고 있어. 그녀는 아빠의 아흔 살 노인네 같은 크레흐츠 소리를 일 분도 더 참을 수 없다고 말한 다음 몸을 홱 돌려서 아빠를 쳐다본다. 그는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꼼짝 않고 앉아서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모미크에게 아빠가 벌써 일주일째 씻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빠한테서 나는 냄새가 손님들을 쫓아 버리고 있고 지난 이틀 동안 온 손님이라곤 단골 세 명이 전부라는 것이다. 손님이 없으면 복권 위원회에서 허가를 취소할 텐데 그렇게 되면 어디서 먹고살 돈을 구할 건지 난 궁금하구나. 그녀가 하루 종일 여기서 통조림 속 정어리처럼 아빠와 붙어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에게 돈을 믿고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빠는 복권을 헐값에 팔아 버리거나 불한당들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왜 나한테 이런 벌을 주시는 거야? 조금씩 천천히 죽이지 말고 차라리 지금 당장 죽여 주면 좋으련만.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지쳐 있지만 문득 모미크에게 시선을 돌릴 때 한순간 그녀의 눈은 겁먹거나 화나기는커녕 예쁘고 젊어 보인다. 모미크를 웃게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헨델라흐(애교)를 시험해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그녀의 눈이 환해지지만 기껏해야 삼십 초 정도 지속되다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모미크는 그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본다. 모틀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속삭인다. ‘나의 형제 엘리야’의 목소리로 말하노니, 쉬, 누, 쉬, 엄마, 울지 마요. 의사 선생님도 우는 건 몸에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엄마, 제발, 우리를 위해서요. 그리고 모미크는 맹세한다. 제가 눈병을 비롯한 여러 홀레라(질병)들을 치료하는 녹색 돌을 찾지 못하거든 히틀러의 검은 무덤 속에서 잠들게 하소서. 그는 이 생각에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서 7학년짜리 불한당들이 크고 뚱뚱한 아빠로부터의 안전거리 밖에서 지어 부르는 노래를 듣지 않으려 애쓴다. “작은 복권, 큰 복권, 거지가 돼지 됐네.” 모미크와 엄마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아빠를 보니 슬픈 거인이자 황제인 그는 자신의 거대한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다. 세 사람 다 불한당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의 귀에는 자신들의 비밀 언어인 이디시어만 들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메릴린 먼로도 유대인인 밀러 씨와 결혼했으니 이제 곧 이디시어를 알게 될 테고 매일 새로운 단어를 세 개씩 배우겠지. 그리고 저 망나니들은, 확 고꾸라져 죽게 하소서, 아멘. 엄마가 모미크의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는 동안 그는 마법의 단어인 “하이모바”를 속으로 일곱 번 왼다. 하잔의 아들 모틀이 나오는 책에서는 변경의 술집에 가면 이교도들에게 이 말을 해야 한다. “하이모바”라는 말만 하면 그들이 모든 일을 팽개치고 복종하기 때문이다. 미국까지 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할 때도 그런데 하물며 7학년짜리 불한당들을 처리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은 말할 것도 없다. 모미크가 그 망나니들을 이교도들에게 던져 주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선량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에 닭 다리가 네 거 하나, 할아버지 거 하나가 있어.” 엄마가 말한다. “잔뼈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해. 하나라도 삼키면 안 돼.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조심하란 말이야.” “알았어요.” “가스도 조심해야 해, 슐레이멜레. 성냥은 곧바로 불어서 꺼. 그래야 불이 안 나지.” “알았어요.” “그리고 가스레인지 다 쓰고 나면 가스 불 끄는 거 잊지 마. 뒷벽에 있는 밸브도 꼭 잠그고. 벽에 있는 게 제일 중요해.” “네.”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소다수 꺼내 먹지 마. 어제 보니까 최소한 한 컵 이상 줄었더라. 네가 마셨지? 지금은 겨울이라 춥단 말이야. 그리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문은 두 번 잠가. 위 자물쇠랑 아래 자물쇠랑. 한 개만 잠그는 건 소용없어.” “알았어요.” “그리고 할아버지 점심 다 드시자마자 주무시게 해. 슐룸페르(부랑자)처럼 밖에 돌아다니시게 하면 안 돼.” “알았어요.” 그녀는 혼잣말을 조금 더 중얼거리면서 할 말이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한마디라도 빠뜨린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이 전부 헛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모미크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이렇게 말을 끝맺는다. “아무한테도 문 열어 주지 마. 찾아올 사람 없으니까. 아빠랑 엄마는 평소처럼 7시에 갈 테니까 걱정 말고. 일단 숙제부터 해. 추워도 난로는 켜면 안 돼. 숙제 다 하고 나면 나가 놀아도 되는데 거칠게 놀지는 말고. 책 너무 많이 읽지 마. 눈 나빠져.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누가 널 때리거든 곧장 여기로 와서 말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멀어져 갔다. “잘 가, 슐레이멜레. 아빠한테도 인사해야지. 안녕, 슐레이멜레. 조심해.”
엄마는 분명 궁궐의 아기방에서도 모미크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황제이자 특공대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황실 사냥꾼을 부른 다음 목멘 소리로, 이 아이를 숲속 깊숙이 데려가서 소위 독수리 밥이 되도록 놔두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그 시절 아이들에게 내리던 일종의 저주였다. 모미크는 아직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황실 사냥꾼이 모미크를 불쌍히 여겨 몰래 자기 아들로 키웠고 세월이 흐른 뒤 모미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궁전으로 돌아와 황제 황비의 은밀한 조언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무도 모르게 그는 자신을 황국에서 쫓아낸 불쌍한 황제 황비를 보호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상상이다. 모미크는 과학적, 수학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여서 4학년 중에는 그와 대적할 아이가 없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모미크도 상상과 단서와 직감과 대화—그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멈춰 버리는—를 이용해야만 한다. 엄마 아빠가 이드카, 심미크랑 독일로부터 받은 보상금 얘기를 할 때 실제로 그렇게 대화가 멈췄었다. 아빠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처럼 ‘저 멀리’에서 자식을 잃은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고. 이 말 때문에 모미크는 자신의 상상이 사실이 아님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가끔 정말로 우울할 때면, 사냥꾼한테 주었던 아들이 바로 자기라고 엄마 아빠한테 말하게 되는 날 그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곤 한다. 마치 요셉과 형제들22 같을 것이다. 때로는 다른 종류의 상상, 자신이 쌍둥이 형제를 잃어버린 소년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샴쌍둥이 동생이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태어나던 순간에 『믿거나 말거나: 세상을 뒤흔든 300개의 놀라운 이야기』에서처럼 둘로 나뉘었고 언젠가 다시 만나 하나로 합칠지도 모른다.(그들이 원한다면.)
그는 복권 판매소를 떠나 집을 향해 정확하고 체계적인 속도로 걸어간다.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낙타 걸음이라 부르는 이유는 모미크가 자신만이 아는 비밀 경로와 지름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중에 있는 나무 몇 그루는 우연히 부딪힌 것처럼 스치고 지나가 줘야 한다. 그 안에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드는데 만약 정말로 있다면 그의 존재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무닌 혼자 살고 있는, 버려진 유대교회당 뒤의 쓰레기덤을 넘어간다. 이곳은 서둘러 지나가야 한다. 무닌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룩한 순교자들 또한 자신들을 성전(聖戰)으로부터 해방해 줄 사람을 조바심 내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모미크네 마당 앞 대문까지는 딱 열 걸음이라 벌써 집이 보이는데 그것은 휘청거리는 네 개의 다리 위에 올라앉은 일종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밑에 작은 지하실이 딸려 있다. 원칙대로라면 모미크네 가족은 그 집을 다른 가족과 나눠 써야 했지만 심미크 아저씨가 시킨 대로 외할머니를 별도 세대로 신고한 덕에 건물 전체를 독차지하게 됐다. 건물 저쪽 반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그들도 들어가지 않지만 그래도 그들 소유인 것이다. ‘저 멀리’에서 그만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서 이 홀레라(망할 놈의) 정부를 속이는 것은 미츠바(훌륭한 일)다. 마당에는 해를 가릴 정도로 크고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아빠가 두 번이나 도끼를 들고 베러 나갔다가 매번 겁먹어서 자르지 못한 채 조용히 도로 들어왔고 엄마는 당신 아들이 햇볕을 쬐어야 생기는 비타민도 없이 어둠 속에서 자라게 생겼는데 자식보다 나무가 더 불쌍하냐며 아빠를 호되게 나무랐다. 모미크가 혼자 쓰는 방에는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초상화와 강철로 만들어진 새처럼 날개를 펼치고 당당하게 우리 나라 영공을 수호하는 전투기 독수리호의 사진이 있다. 엄마 아빠가 회반죽 망가진다며 사진을 더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로 회반죽을 조금 망가뜨린 그 사진들을 제외하면 그의 방은 굉장히 깔끔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돈돼 있다. 이 방은 틀림없이 다른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다. 혹시라도 그들이 이곳에 오는 일이 생긴다면 말이다.
이곳은 아주 조용한 거리다. 사실 샛길에 더 가깝다. 집이 여섯 채뿐이라 한나 제이트린이 주님을 욕되게 할 때만 빼면 늘 조용하다. 모미크네 집도 꽤 조용한 편이다. 엄마 아빠는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벨라와 이드카 아주머니 부부 외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엄마가 매주 토요일 오후에 벨라를 만나러 가면 아빠는 내의 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이드카 아주머니와 심미크 아저씨는 일 년에 두 번 모미크네 집에 와서 일주일 동안 머물다 가는데 그들이 다녀가고 나면 모든 것이 변한다. 그들은 엄마 아빠와 다르다. 오히려 벨라와 더 비슷하다. 이드카의 팔에도 숫자가 있지만 그들은 식당에도 가고, 극장에도 가고, 지간과 슈마헤르 콤비의 이디시어 코미디 공연도 보러 가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댄다. 엄마가 눈을 흘기며 손끝을 입술에 댔다가 이마로 가져가면 이드카가 말한다. 조금 웃는다고 해될 거 없잖아, 기셀라. 그러면 엄마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웃어. 해될 건 없지만 만약에 대비하려고. 이드카와 심미크는 카드놀이도 하고 해변에도 간다. 심미크는 심지어 수영도 할 줄 안다. 한번은 ‘예루살렘’이라는 호화로운 배를 타고 한 달 동안 항해를 한 적도 있다. 심미크는 네타니아에 있는 커다란 자동차 정비소의 주인이고 소득세를 탈루하는 법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샤크레브(악당) 같으니.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문제는 이드카가 ‘저 멀리’에서 온갖 종류의 과학 실험을 당한 탓에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모미크의 엄마 아빠는 절대 여행을 가지 않는다. 시외로도 안 나간다. 오직 일 년에 한 번, 유월절 이후에 티베리아스에 있는 작은 펜션에서 사흘을 보낼 뿐이다. 이상한 것은 학교를 사흘이나 결석시키면서까지 모미크를 함께 데려간다는 점이다. 티베리아스에서의 그들은 평소와 다르다.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어쨌든 조금 다르다. 일례로 카페에 앉아서 세 명분의 소다수와 케이크를 주문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사흘 중 하루는 아침에 다 같이 호숫가에 가서 파라솔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엄마의 노란 우산 밑에 가벼운 차림으로 앉아 있는다. 다리에는 피부가 타지 않도록 바셀린을 바르고, 코 위에는 셋 다 조그만 하얀색 플라스틱 선글라스를 얹어 놓는다. 모미크에게는 수영복이 없다. 일 년에 딱 한 번 쓸 물건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반바지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는 모미크가 물속까지 뛰어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가 갈릴리호의 정확한 깊이, 길이, 너비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물고기 종류 등에 대해, 거기서 헤엄치고 있는 어떤 녀석보다도 잘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예전에는 모미크와 부모님이 티베리아스에 갈 때면 이드카 아주머니가 예루살렘에 와서 외할머니를 돌봐 주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네타니아에서 폴란드 신문을 한 무더기씩 가져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벨라에게 주고 가곤 했다. 모미크는 그 신문들(특히 《프셰겔론트》)에서, 고양이처럼 점프하는 환상적인 골키퍼 심코비아크 같은 폴란드 축구 선수들의 사진을 스크랩하곤 했다. 그런데 안셸 할아버지가 온 해에는 이드카가 할아버지는 다루기 어렵다며 단둘이 있기 싫어했다. 그래서 엄마 아빠만 여행을 떠나고 모미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남았다. 모미크만이 할아버지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집과 예루살렘으로부터 달아나는 이유가 대학살일 때문임을 알게 된 것도 그해의 일이었다. 이때 모미크의 나이는 이미 아홉 살하고 4분의 1이었다. 벨라는 그를 동네 미지니크(막내)라고 부르곤 했지만 사실 그는 그 동네에서 유일한 꼬마였다. 그가 유모차를 타고 처음 도착한 날부터 쭉 그랬는데 이웃 여자들은 유모차 안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오이, 네우만 부인, 바스 파르 에인 미에스케이트.” 그 말은 ‘애가 엄청 못생겼네요.’라는 뜻이었다. 보다 지각 있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질병과도 같은 무언가로부터 모미크를 보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침을 세 번 뱉었다. 그 후로 9와 4분의 1년 동안 그는 길거리를 걸어갈 때마다 똑같은 인사와 침 뱉는 소리를 들었다. 모미크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상냥한 아이다. 사람들이 다른 동네 아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버릇없고 거친 슈바르체르(망나니)들이므로 모미크가 동네 어른들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모미크의 본명이 슐로모 에프라임 네우만임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누구누구가 기억하는 한에는 그렇다. 그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그에게 백 가지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외할머니는 모미크를 늘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할머니가 그를 모르데하이 레이벨레, 솁셀레, 멘델, 안셸, 슐람, 후마크, 슐로모 하임이라고 부른 까닭에 모미크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멘델은 러시아로 달아나서, 네부흐(안타깝게도),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실종됐고, 이디시어학자인 슐람은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가 난파 사고를 당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이세르는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에게 살해당했다. 꼬마 레이벨레와 솁셀레는 식탁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식구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신사처럼 식사를 하라고 말했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 믿으며 식탁 밑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슐로모 하임은 훗날 스포츠 챔피언이 되었고,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를 쓰던 안셸 에프라임은 바르샤바로 가서, 네부흐, 히브리어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어느 화창한 날 나치가 슈테틀(마을)을 포위해 들어오더니 주민들을 모두 강가에 모이게 했다. 아이이이, 영원히 식탁 밑에서 웃고 있을 꼬마 레이벨레와 솁셀레도, 반신불수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해 삼손이 된 (프루트강을 등진 유대인 올림픽23 경기장에서 영원히 근육을 움직이고 있을) 슐로모 하임도, 너무나 허약해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걱정한 사람들이 그가 얼어 죽지 않도록 침대 밑에 뜨거운 벽돌을 넣어 주던 꼬마 안셸도. 그는 세일러복을 입고, 앞가르마를 타고, 커다란 안경을 쓴 채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할머니가 손뼉을 쳤다. 아이고, 넌 그 애를 똑 닮았구나. 그녀는 아주 오래전, 아직 기억력이 남아 있던 시절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모미크에게 들려주었다. 가족들은 모미크가 너무 어려서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그의 눈이 더 이상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외할머니에게 당장 그만하라고 말했고 신기한 사진들이 있는 책도 숨겨 버렸다.(아마 이드카 아주머니에게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모미크는 온 힘을 다해서 그 사진과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다. 새로 생각난 것은 중요치 않아 보이는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기록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쟁이고, 전쟁에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프샤크레브(악당) 아랍인들과 싸울 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한다.
물론 벨라도 가끔 그를 도와주지만 그리 내켜서 하는 것은 아닌 데다 어차피 주요 부분은 혼자 힘으로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에게 화나 있다든가 한 건, 오, 절대 아니다. ‘저 멀리’에서 온 사람은 그에게 진짜 단서를 줄 수도 없고, 도와 달라는 간단한 말도 솔직하게 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황국에는 비밀 엄수에 관한 온갖 법률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모미크에게 이런 어려움들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그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몇 주 동안 그의 비밀 공책에는 삐뚤빼뚤한 줄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요즘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이불 속에서 쓴 탓이다. 때로는 아빠가 매일 밤 큰 소리로 외쳐 대는 잠꼬대를 히브리어로 어떻게 써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있다. 어쨌든 아빠는 한동안 악몽도 꾸지 않고 좀 진정된 듯했었는데 할아버지가 온 뒤로 모든 게 다시 시작됐다.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에겐 논리와 두뇌와 벨라가 있지 않은가. 이 비명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면 사실은 꽤 간단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황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빠는 황제이자 전사들의 우두머리, 즉 특공대원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 중에는 손다르(중위?)라는 자가 있었다. 이렇게 이상한 이름은 아마 에첼24과 레히25가 존재하던 시절에 지하운동권 같은 데서 쓰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복잡한 이름을 가진 커다란 캠프에서 모두 함께 살았고 그곳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훈련을 받았다. 너무나 비밀스러워서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임무였다. 그리고 그 주변을 운행하는 기차들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 부분은 확실치 않다. 어쩌면 그 기차들은 모미크의 쌍둥이 동생 빌이 말해 준, 야만적인 인디언들이 습격했던 열차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아빠의 황국에는 악치온(작전)이라는 대규모 군사작전들이 있었고 때로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이스라엘 독립 기념일에 하는 것 같은 굉장한 퍼레이드도 있었을 것이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아빠가 잠결에 소리 지른다. 링크스, 레히트. 그가 독일어로 외친다. 벨라는 틀림없이 이 말을 모미크에게 통역해 주지 않으려 하겠지만 그가 그녀에게 고함을 치다시피 하면 화가 나서 그것이 왼쪽, 오른쪽, 왼쪽으로, 오른쪽으로라는 뜻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모미크는 생각한다. 그게 다야? 그런데 왜 통역해 주지 않으려 했던 거지? 엄마는 밤마다 아빠의 비명 소리에 깨서는 그를 쿡쿡 찌르고 흔들면서 악을 쓴다. 누, 투비아, 샤, 조용히 해, 애가 듣겠어. 여긴 ‘저 멀리’가 아니야. 지금은 한밤중이란 말이야. 아 클라그 잘 임 트레핀, 애가 깬단 말이야, 투비아! 그러면 아빠는 잔뜩 겁먹은 채로 깨어나 뜨거운 프라이팬에 찬물을 부었을 때 나는 듯한 소리로 크레흐츠(한숨)부터 내쉰다. 한편 자기 방에 있는 모미크는 이미 공책을 덮고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아빠가 손바닥 사이로 한숨짓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린다. 이제 모미크는 예언자 아모스가 굉장히 흥미로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생각한다. 아빠가 자기 눈을 만졌는데도 눈이 정상적으로 보인다면 그의 손에 달라붙어 있던 죽음이 사라졌다는 뜻일까?
우선 엄마 아빠가 복권 판매소에 끼여 앉아 있을 때 아빠의 손은 때때로 엄마에게 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전에는 늘 아빠가 외할머니를 안아 들고 식탁까지 왔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곤 했었다. 게다가 지금은, 엄마가 진저리를 치기 때문에, 아빠가 목요일마다 수건과 작은 대야를 가지고 가서 안셸 할아버지 목욕도 시킨다.
그래그래, 그들은 ‘저 멀리’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바로 이거다. 아빠가 복권 판매소에서 복권을 팔 때는 열 손가락에 고무 골무 같은 것을 낀다는 점!
거기다 가장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를 말하면, 아빠의 손이 습진으로 뒤덮여서 마담 미란다 바르두고가 치료하러 왔을 때 거머리들에게 일어난 일을 들 수 있다. 모미크는 진짜 조사관처럼 다양한 이론을 세워 봤다. 끓는 주전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빠의 손을 본 사람은 아마 그냥 평범한 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사포? 호저의 가시? 모미크는 잠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벌써 꽤 오랫동안, 안셸 할아버지가 나타난 후로 줄곧,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라이아이스? 바늘?
매일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엄마 아빠는 늘 먼저 집을 나선다) 모미크는 새로운 가설을 재빨리 적어 나간다. “담대하게 캠프를 출발한 우리의 용맹스러운 주인공들은 우편 열차를 공격했던, 붉은 슬리퍼가 이끄는 야만스러운 인디언들을 놀라게 했다. 충성스러운 준마를 타고 달려온 황제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더니 사방으로 소총을 쏘아 댔다. 특공대의 손다르는 뒤에서 그를 엄호했다. 건장한 황제가 나를 향해 소리치자 그의 당당한 포효가 얼어붙은 황국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모미크는 거기서 펜을 멈추고 지금까지 쓴 것을 읽어 보았다. 평소 쓰던 글보다 확실히 나아진 게 보였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다곤 할 수 없었다. 부족한 면이 많았다. 핵심이 빠져 있다고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핵심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다. 이 글에 부족한 것은 안셸 할아버지의 글에서 느꼈던 힘, 성서와도 같은 장엄함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보다 더 대담해져야 할 것이었다. ‘저 멀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모두가 그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모미크는 요즘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을 자신의 글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오드 윙게이트26와 야간 소대, 그리고 일이 잘 풀린다면 이스라엘의 친구이자 영원한 우방인 프랑스로부터 받게 될 초음속 전투기 쉬페르 미스테르 같은 것들 말이다. 심지어는 나할루빈의 모래땅에 건설 중인, 이스라엘 최초의 원자로도 사용했다. 주간지 다음 호에는 실제 원자 어쩌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수조의 독점 사진과 함께 깜짝 놀랄 만한 기사가 실릴 것이다! 모미크는 수수께끼를 풀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그는 셜록 홈스가 「춤추는 사람 그림」에서 한 말, 만든 사람이 있다면 푸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는 말을 항상 기억해 왔기에 자기가 성공하리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부모님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은 이 싸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모미크는 빨치산처럼 싸우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그래야 그들이 평생 단 한 번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안심하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방법을 찾았다. 사실 위험한 방법이지만 모미크는 두렵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두렵긴 한데 다른 방법이 없다. 벨라가 나치 짐승을 언급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가장 큰 단서를 주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온 날 그의 소설이 실린, 성스러운 옛 잡지를 찾으러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모미크는 정확히 이해했다. 어떻게 보면 ‘짐승’을 찾아내서 길들이고, 착하게 만들고, 마음을 고쳐먹게 하고, 사람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만들고, ‘저 멀리’에서 있었던 일과 녀석이 사람들한테 한 짓을 털어놓도록 설득하기로 결심한 것이 바로 그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모미크가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 지도 한 달, 안셸 할아버지가 온 날로부터 꼬박 한 달이 됐다. 모미크는 아무도 모르게, 집 밑에 딸린 작고 컴컴한 지하실에서 나치 짐승을 키우고 있다.
그해 겨울을 그들은 수년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비 때문이 아니라—처음에는 비가 안 왔다—바람 때문이었다. 59년 겨울. 베이트 마즈밀의 노인들이 이렇게 말하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미크의 아버지는 밤만 되면 노란 갓케스(내복 바지)를 바지 밑으로 삐져나오게 입고 귀는 커다란 솜뭉치로 틀어막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바람이 들어오는 걸 막겠다고 찢은 신문지 조각을 열쇠 구멍에 쑤셔 넣곤 했다.(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바람은 여전히 들어왔다.) 그동안 엄마는 심미크와 이드카가 준 재봉틀로 밤마다 일했다. 벨라가 그걸 고쳐 준 덕분에 많은 여자들이 엄마한테 누비이불을 수선해 달라거나 낡은 이불을 기워 달라고 가져오곤 했고 엄마는 약간의 부수입을 살림에 보탤 수 있었다. 그것은 중고 싱거 재봉틀이었는데 엄마가 발판을 밟아서 재봉틀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모미크는 엄마가 바깥 날씨를 조종하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재봉틀 소음은 아빠를 안절부절못하게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도 엄마가 벌어들이는 약간의 부수입이 필요했고 엄마나 그녀의 입과 마찰을 일으키길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집 안을 서성거리며 크레흐츠(한숨)를 쉬거나 라디오를 켰다 껐다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바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문제도 전부 홀레라(망할 놈의) 정부 탓이야. 아빠가 항상 정통당에 표를 던진 이유는 자신이 정통파 교도였기 때문이 아니라—그는 정통파와는 거리가 멀었다—벤구리온이 정권을 잡고 있는 걸, 전(全) 시오니스트당이 야당인 걸, 메이르 야리27가 프샤크레브(사악한) 공산주의자인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바람과 가뭄의 겨울은 정통당이 야당 연합을 탈퇴했을 때 시작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는다는 계시라고, 아빠는 당당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 재봉틀을 돌리면서 큰 소리로 혼잣말할 뿐이었다. 다그 함마르셸드,28 오이흐 미르 아 폴리티카케르(망할 정치꾼 같으니).
한편 모미크는 꽤나 속을 태우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바람이 그가 최근에 친해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은 확실히 이상하고 약간 무서웠다. 한나 제이트린 부인을 예로 들어 보자. 그녀는 단치히29에 있었던, 가족 소유의 양복점에 대한 보상금의 2차 분할금을 받았는데 그 돈을 먹는 데 쓰거나 광 안의 낡은 구두 속에 쑤셔 넣는 대신 밖에 나가서 새 옷을 샀다. 아자 야르 오이프 미르. 나한테도 저런 날이 왔으면. 저 여자의 옷장도 가질 수 있었으면. 엄마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벨라에게 말한다. 엉덩이 씰룩대는 꼴 하고는. 창녀 같으니. 저 여자가 잃은 게 뭐가 있어요? 그러면, 한나에게도 차 한 잔을 공짜로 줄 정도로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가진 벨라가 웃으며 말한다. 왜 신경을 쓰는 거야, 기셀라? 한나는 자기가 나이 칠십에 낳은 딸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해? 여자가 왜 모피 코트를 사는지는 자기도 알잖아. 자기는 따뜻하고 이웃들은 열 받으라고 그러는 거지 뭐.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모미크는 벨라와 엄마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한나는 단지 예뻐 보이고 싶을 뿐이다. 엄마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심지어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녀가 노인들과 같이 벤치에 앉아서 혼잣말을 하며 몸을 긁을 때 옆에 있었던 모미크만이 아는, 새로운 아이디어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이 동네에서 유별나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한나 제이트린만이 아니다. 무닌 씨도 어느 때보다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 사실 무닌이 그러기 시작한 것은 할아버지가 오기 전부터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도가 지나치다. 무닌 씨는 올 초쯤에 러시아인들이 루나 1호를 달로 쏘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우주와 관련된 것들에 굉장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극도로 조급해져서는 모미크한테 스푸트니크(인공위성)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듣는 대로 즉시 와서 알려 달라고 시켰고 심지어 토요일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하는 <과학의 신세계>를 듣고 거기에 나온 “우리 친구”—그는 마치 친분이라도 있는 사이인 양, 루나 1호를 이렇게 불렀다—얘기를 전부 말해 주면 20프루타30를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래서 토요일 아침에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모미크는 밖으로 뛰어나와 울타리 구멍을 통해 기어 나와서 무닌 씨가 관리인으로 있는, 버려진 유대교회당의 뒷마당으로 간다.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프로그램에서 나온 얘기를 모두 들려주면 무닌은 금요일에 미리 써둔 쪽지를 모미크에게 준다. “안식일 이후에 이 쪽지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20(이십)프루타를 줄 것을 약속함.” 이 계약은 지금까지 이 주째 잘 지켜지고 있다. 모미크가 우주와 최근 발견들에 관한 정말 좋은 소식을 가져올 때면 무닌은 매우 행복해한다. 그는 허리를 굽혀서 막대기로 땅바닥에 둥근 공 모양의 달을 그리고 그 옆에 그가 이름을 달달 외우는 행성 아홉 개를 모두 그린 다음 몹시 우쭐대면서 그의 친구 루나 1호를 그린다. 루나 1호는 결국 달에 도착하지 못해서, 네부흐(안타깝게도), 10번 행성이 되었다. 무닌은 굉장히 유식해서 로켓과 반동추진과 잘리우코프라는 발명가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가 예전에 노벨상을 받을 만한 아이디어를 편지에 적어서 잘리우코프에게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카푸트(허사)가 됐다. 아직 이 얘기를 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언젠가는 전 세계가 무닌이 누군지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러워하는 것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멋진 인생, 참된 인생, 참된 행복이 뭔지 영원히 알지 못할 테니까. 그래, 그는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 그 단어는 행복이야, 모모. 행복, 분명 어디엔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아, 누, 내가 또 혼자 떠들었구나. 무닌은 얘기를 하는 동안 계속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모미크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채 옆에 서서 더러운 검은색 야르물케31를 쓴 대머리와 노란 고무줄로 묶은 안경 두 개와 무닌의 뺨 위에 길게 난 하얀 구레나룻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닌은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거의 항상 입에 물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모미크가 지금껏 맡아 본 어떤 냄새와도 달랐고 캐럽 열매 냄새와 좀 비슷했다. 어떤 면에선 모미크는 무닌 옆에 서서 그 냄새를 맡는 걸 좋아하고 무닌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예전에 미국인들이 파이어니어 4호를 쏘아 올렸을 때 모미크가 등교하기 전에 이 사실을 무닌에게 말해 주러 가 보니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양지바른 곳에 놓인 낡은 자동차 의자에 앉아 고양이처럼 햇볕을 쬐고 있었고 그 옆에 놓인 낡은 신문지 위에는 그가 항상 먹이를 주는 새들을 위한 젖은 빵 부스러기가 있었다. 새들은 이제 무닌을 기억해서 그가 어딜 가든 따라다닌다. 그때 무닌 씨는 표지에 벌거벗은 예언자들의 그림이 있는 경전을 읽고 있었다. 모미크는 전에 어딘가에서, 아마 쇼핑센터의 립시츠 서점에서, 그 책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무닌 씨가 신문광고에서 어떤 유의 여자들을 찾는지 모미크가 아는데 그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무닌은 재빨리 책을 감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 모모,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가?(그는 늘 이렇게하잘32의 언어로 말한다.) 그래서 모미크가 그에게 파이어니어 4호에 대해 말해 주자 무닌은 자동차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모미크를 번쩍 들어 올려서 온 힘을 다해 꼭 껴안고는 거칠거칠한 자기 수염과 외투와 악취에 대고 비빈다. 그리고 뜰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격렬하게 춤을 춘다. 이 하늘과 우듬지와 태양 아래에서 추기에는 이상하고 무서운 춤이다. 모미크는 지나가던 누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볼까 두렵다. 두 갈래로 갈라진 무닌의 외투 뒷자락이 등 뒤에서 펄럭인다. 그는 기진맥진해지고 나서야 모미크를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잇조각을 꺼내더니 쳐다보는 사람이 있나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모미크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한다. 아직도 꽤 어지러운 모미크가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일종의 지도인데 그가 모르는 언어로 여러 이름들이 쓰여 있고 사방에 작은 모겐 다비드(다윗의 별)가 수없이 그려져 있다. 무닌이 모미크의 얼굴에 바싹 다가들며 “여호와께서 눈 깜짝할 사이에 속량하시매, 빛의 아들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도다.”라고 속삭이더니 커다란 손으로 멀리뛰기하는 모양을 흉내 내면서 “피이이유우우!” 하고 외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렁차던지 아직도 어질어질한 모미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때 모미크는 냄새나고 시커멓고 우스꽝스러운 무닌이 강한 바람을 타고 하늘을 향해 대각선으로, 어떻게 보면 불 수레를 탄 예언자 엘리야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 순간, 그가 ‘절대로 영원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그 순간에, 모미크는 마침내 깨달았다. 무닌이 실은 라메드바브(삼십육 인의 의인)33 같은 일종의 숨겨진 마술사였다는 사실을. 한나 제이트린이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마녀고, 안셸 할아버지가 지나간 일을 이야기해 주는 역(逆)예언자인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막스와 모리츠나 마르쿠스 씨도 비밀 임무를 맡고 있고, 우연히 여기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모미크를 돕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위해 싸우기 전, 나치 짐승을 키우기 전에는 그들이 모미크의 눈에 띈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본 적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에는 무닌을 제외하곤 그들 중 누구와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고 항상 그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늘 그들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그들이 ‘저 멀리’에 대해 한 말을,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한때는 외모나 냄새 같은 것을 가지고 가끔 그들을 놀리곤 했었지만 이제 모미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이 무시무시한 바람이 그들을 휩쓸어 가버리기 전에 그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그들이 모든 비밀 단서를 그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모미크와 할아버지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한낮에는 바람에 맞서 한껏 몸을 수그려야 하기 때문에 길을 거의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수십 가지 언어처럼 들리는 이상한 소음들이 두렵다. 모미크는 나무 속과 아스팔트 틈새에 뭔가가 숨어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바람에 튕겨 나오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더욱더 깊이 찔러 넣으면서 지난여름에 좀 더 많이 먹어서 체중을 불려 놓을걸 하고 후회한다. 할아버지는 괴상한 몸짓으로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다가 문득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리고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본 다음 자기를 안아 올려 달라는 아기처럼 양손을 위로 뻗는다. 이 동작은 자칫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순간 바람이 그를 붙잡아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미크가 전설의 골키퍼 야코브 호도로브 같은 감각을 타고난 덕분에 늘 제때 나타나서 할아버지를 붙잡고 손바닥이 말랑말랑한 그의 손을 꼭 쥐고 함께 걸어간다. 이때쯤 되면 바람은 완전히 광포하게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에인 케렘 계곡과 말하 계곡에서 불쑥 솟아올라 두 사람에게 달려드는가 하면 젖은 신문지와 벽에 붙어 있던 낡은 포스터를 그들의 얼굴에 날려 보내기도 한다. 바람이 자칼처럼 울부짖는 소리에 측백나무들은 두려움에 미쳐 날뛰며 누가 배를 간질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를 뒤틀고 몸부림친다. 모미크와 할아버지가 영원처럼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마침내 집에 도착하면 모미크는 자물쇠 두 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래 자물쇠를 다시 잠근다. 그제야 귓속에서 윙윙대던 바람 소리가 멈추고 다른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모미크는 책가방을 던져 놓고 할아버지가 아빠의 크고 낡은 외투 벗는 것을 도운 다음 혹시 할아버지가 실례하진 않았나 재빨리 냄새를 맡고 나서 그를 식탁에 앉혀 두고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데울 수 있다. 외할머니는 혼자 힘으로 방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방에서 점심을 먹었지만 할아버지는 모미크랑 같이 먹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할 수 있는 진짜 할아버지가 생긴 것만 같아서 참 좋다.
모미크는 외할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지금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숨을 거뒀는지를 생각할 때도 그렇다. 외할머니는 일흔아홉 살 때 폴란드어, 이디시어, 여기 와서 조금 배운 히브리어까지 잊어버리고 난 뒤에는 자기만의 특별한 언어를 사용했다. 모미크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가 잘 있는지 보려고 뛰어 들어가곤 했고 그러면 그녀는 흥분으로 얼굴이 벌게져서는 자기만의 언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미크는 할머니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다음 곁에 앉아서 그녀를 쳐다보곤 했다. 그녀는 새처럼 접시 위의 음식을 쪼아 먹었다. 할머니의 조그마한 얼굴에는 늘 한결같은 미소, 꿈꾸는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고 그녀는 그 미소를 통해 모미크에게 말을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대개 그(멘델)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가족들을 떠나 보리스와프라는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을 할 수가 있느냐. 그리고 거기서 러시아로 흘러들어서 사라져 버릴 수가 있느냐. 어떻게 그런 짓을 해서 어머니 마음을 찢어 놓을 수가 있어? 그러고는 그(숄렘)에게 애원한다. 길거리가 황금으로 포장된 미국에 가더라도 절대 절대 자신이 유대인임을 잊지 말고, 꼭 테필린34을 착용하고 유대교회당에서 기도하라고. 그런 다음엔 그(이세르)에게 바이올린으로 <셰랄레>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눈을 감으면 그녀가 정말로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모미크는 방해할 생각 따윈 꿈에도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광경은 어떤 영화나 책보다 더 좋았고 또 흥미진진했으며 때로는 모미크의 눈에 정말로 눈물이 고일 때도 있었다. 엄마 아빠가 모미크에게, 외할머니랑 그렇게 오랫동안 방 안에 앉아서 그녀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하는 얘기를 듣는 게 뭐가 좋으냐고 물으면 모미크는 자긴 다 알아듣는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모미크에게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까지도 이해하는 재능이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지라는 말만 하는 긴즈부르그처럼 평생 동안 두 단어 정도만 말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무언의 언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모미크는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쓰레기통 안에서까지 찾고 있다는 걸 안다. 모미크는 긴즈부르그에게(그들은 최근 벤치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 왔다) <귀향민들의 인사말과 이산가족 찾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내라고 제안하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긴즈부르그를 아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가 누구고 어디서 기억을 잃었는지 생각나게 해줄지도 몰랐다. 그렇다. 모미크는 거의 모든 것을 통역할 수 있다. 그는 황국의 통역사다.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도 무언가로 통역할 수 있다. 아, 물론 그것은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없음을, 반드시 뭔가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긴 하다. 누, 안셸 할아버지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도 새처럼 콕콕 쪼고 꿀꺽꿀꺽 삼키면서 먹는다. 단지 외할머니보다 조금 더 겁먹은 듯이 먹을 뿐이다. 아마도 ‘저 멀리’에서 살 때,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유월절 전야에 그랬던 것처럼 허겁지겁 먹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35 모미크는 마침내 할아버지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는 할아버지가 헤어나이겔이라는 이름의 사내 혹은 소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을 안다. 할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른다. 때로는 화내면서, 때로는 아첨하듯이, 때로는 조금 슬프게. 그런데 사흘 전 모미크가 방에서 할아버지의 혼잣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그는 할아버지가 “프리에트”라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예전에 성스러운 잡지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흥분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모미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건 옛날이야기야. 할아버지가 똑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면서 그렇게 흥분하셨을 리 없잖아? 하지만 당연히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녹색 벤치에서 할아버지를 데려와 식탁 앞에 앉힌 다음 불쑥 이렇게 외쳤다. “프리에트! 파울라! 오토! 하로티안!” 그래, 그건 꽤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는 문득 할아버지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할아버지는 실제로 꽤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고 거의 일 분 가까이 가만있다가 굽은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어깨 너머를 가리키며 부드럽고 아주 정확하게 “헤어나이겔.”이라고 말했다. 마치 자기 뒤에 헤어나이겔이라는 어른 혹은 꼬마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나치카푸트!”라고 속삭이더니 갑자기 모미크에게 함박웃음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접시 위로 허리를 굽혀서 모미크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 대더니 선물이라도 준비했다는 듯한 말투로 속삭이듯 “카지크.”라고 말했다. 그는 두 손으로 작은 사람, 그러니까 난쟁이 아니면 아기 같은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는 아기를 어르듯이 그것을 품에 안고 흔들면서 모미크에게 계속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미크는 불현듯 할아버지가 정말로 외할머니를 닮았음을 깨달았다. 남매간이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 할아버지의 얼굴은 다시 닫혀 버렸다. 마치 안에 있는 누군가가, 시간이 없으니 밖에서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그다음엔 중얼거림과 바보 같은 노래와 경련하는 듯한 몸짓과 양 입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침이 다시 시작됐다. 모미크는 뒤로 기대앉아서 진짜 알터 콥프(똑똑한 사람)인 메이르 하르지온 대위처럼 할아버지 이야기의 핵심을 공략한 자신의 특공 전법을 몹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는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우선 안셸 할아버지와 이 헤어나이겔이란 사람이, 모미크가 얼마 전부터 나치 짐승을 상대로 벌여 온 전쟁과 관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할아버지가 ‘저 멀리’에서 오긴 했지만 어쩌면 싸움을 멈추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저 멀리’에서 온 사람들 중 유일하게 굴복하지 않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가 모미크와 밀약을 맺은 이유도 분명 그 때문일 터였다.
모미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감탄해 마지않는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에게 할아버지는 고대 예언자인 이사야나 모세처럼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될지에 관해 세웠던 계획들이 전부 큰 실수였고 인생에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안셸 할아버지 같은 작가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 생각에 마음이 두둥실 들떠서 몸이 풍선처럼 방 안을 날아다니다시피 하기 시작하자 급히 화장실로 내달렸지만 이번엔 지하실에 있을 때와 달리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모미크는 어리둥절한 채 자기 방으로 뛰어가서 비밀 공책을 꺼냈다. 그것은 그의 일기장이자 ‘저 멀리’의 것들—황제들과 왕들, 군인들과 이디시어학자들, 유대인 올림픽의 선수들, 우표와 화폐, 모든 동식물의 정밀화—에 관한, 정말로 과학적인 안내서이기도 하다. 모미크는 페이지 가로가 꽉 차도록 커다란 글씨로 “중요한 결정!!!”이라고 적은 다음 이 제목 밑에 중요한 결정, 즉 할아버지 같은 작가가 되겠다는 얘기를 썼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적어 놓은 것을 보니 굉장히 훌륭한 것이, 평소에 쓰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위대한 결정과 어울리는, 정말로 멋진 맺음말을 찾고 싶었다. 성서 한 권의 봉독이 끝날 때마다 외치는 “하자크, 하자크, 베닛하제크(굳세어라, 굳세어라, 우리 모두 굳셀지어다).”를 쓸까도 생각했지만 그의 손이 제멋대로 스포츠 캐스터 네헤미아 벤아브라함의 역사적인 구호 “이스라엘의 아들들이여,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을 대담하게 휘갈겼고 이 문장을 쓰자마자 그의 마음은 성숙해진 듯한 느낌과 의무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천천히, 책임감 있게 부엌으로 돌아가 할아버지의 턱에 묻은 닭기름을 부드럽게 닦아 낸 다음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서 옷 벗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본의 아니게 할아버지의 그곳을 얼핏 보고 말았다. 그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면서 중얼거렸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어.
모미크는 우선 주파수를 나타내는 문자판에 세계 각국의 수도 이름이 적혀 있는 커다란 라디오를 켜고 녹색등이 뜨거워지길 기다렸다. <귀향민들의 인사말과 이산가족 찾기>의 첫 부분은 이미 놓친 듯했으므로 자신의 명단에 있는 이름이 이미 지나가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그는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생처럼 커다란 글씨로 적어 준 명단을 들고 라디오에서 들리는 이름들을 입으로 따라 왰다. 파슈미슐 출신의 파울라와 아브라함 셀리그손 부부의 딸 로할레가 ○○년부터 ○○년까지 바르샤바에 살았던 여동생 레알레를 찾고 있습니다…… 스트리 출신의 요헤베드와 헤르셸 프룸킨 부부의 아들 엘리아후 프룸킨이 아내 엘리셰바, 구성(舊姓) 에이흘레르와 두 아들 야코브와 메이르를 찾고 있습니다…… 모미크는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종이를 흘끗 볼 필요도 없다. 모든 이름을 달달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테르 네우만 부인(구성 샤피라), 그 아들 모르데하이 네우만, 즈비 히르시 네우만, 사라벨라 네우만, ‘저 멀리’에서 떠돌던 수많은 사라진 네우만들. 이제 모미크는 라디오에 반만 귀 기울인 채 여자 아나운서의 발음을 흉내 내면서, 절망에 빠져들게 하는 슬픈 노래를 부르듯 이름들을 읊조린다. 읽기를 처음 배우고 부모님에게서 그 명단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매일 점심때마다 그 가락을 들어 왔다. 아브라함 네우만의 아들 이즈하크, 아리에 레이브 네우만, 히르셸 네우만의 딸 기텔, 모든 네우만들, 아빠의 가족, 아주아주 먼 친척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다. 그는 천 번의 점심 식사에서 묻은 기름으로 얼룩진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각각의 동그라미 안에는 이름이 하나씩 들어 있다. 그는 문득 이 가락이, 노인들이 ‘저 멀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곡조와 비슷함을 깨닫는다.
이제 1시 30분, 가야 할 시간이다. 그는 식탁을 꼼꼼하게 닦고 포크와 접시가 반짝반짝 빛나서 나헤스(뿌듯함)가 느껴질 때까지 자기만의 특별한 방식—비누칠, 헹굼, 비누칠, 다시 헹굼—으로 설거지를 한다. 그가 개수대에 더러운 은 식기가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사실은 녀석들도 잘 안다. 모미크는 손대지 않은 자기 몫의 닭 4분의 1마리를 갈색 종이봉투에 넣고 ‘짐승’에게 가져다줄 만한 게 뭐가 있나 냉장고 안을 훑어본다. 앞으로 다가올 성대한 만찬을 위해 준비해 둔 음식들로 가득 찬 단지들 사이에 놓인 오래된 약병들, 새 약병들, 빨간 고추냉이 병들, 안식일에 먹다 남은 사태 젤리가 담긴 접시를 뒤적거린다. 그리고 몇 년 전 익명의 손님으로부터 선물받은 로제 와인 병 뒤를 천 번째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손님은 모미크네 판매소에서 산 복권으로 1000파운드에 당첨됐다. 자신들의 가게에서 나온 당첨금으로는 최고액이었으므로 모미크는 판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쇄했다. “이 판매소에서 이러이러한 번호의 복권이 1000파운드에 당첨됐습니다.” 멘시(신사)였던 그 손님은 나중에 다시 찾아와 고맙다고 하면서 와인을 선물로 가져왔다. 정말 상냥한 행동이긴 했지만 이 동네에서는 아무도 그런 싸구려를 마시지 않는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모미크는 냉장고에서 요구르트—이건 자기가 먹었다고 몇 번을 말해도 상관없다—오이 하나, 달걀 한 개를 꺼낸 다음 할아버지 방문에 귀를 대고 그가 평소처럼 자거나 혼잣말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에 집 밖으로 나가서 현관문을 아래 자물쇠까지 모두 잠갔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콘크리트 기둥들 아래로 뻗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바람 속으로 곧장 내달린 다음 삐걱대는 지하실 문을 온 힘을 다해 밀어 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굴과 등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는 등을 벽에 바싹 붙인 채 주먹을 악물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가 나가 나가 안 그러면 잡아먹힐 거야. 하지만 그는 나가지 않는다. 나가선 안 된다. 이건 전쟁이다. 이 안은 답답하고 퀴퀴하다. 곰팡내, 동물 냄새, 동물 응가 냄새. 어둠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써억써억, 푸우푸우, 구구구구, 커다란 발톱으로 우리를 긁는 소리, 천천히 날개를 펴는 소리, 어디선가 부리를 딱딱 부딪치는 소리. 나가 나가. 하지만 나가지 않는다. 판지로 가린 작은 창문 중 하나에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온다. 이 빛 덕분에 그의 눈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지만 그래도 벽을 따라 늘어선 궤짝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직은 비어 있는 상자들도 있다. 사냥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진 꽤 괜찮은 편이다. 굉장한 걸 몇 마리 잡았다. 뒷마당에서 발견한 커다란 고슴도치는 난쟁이처럼 슬퍼 보이는, 뾰족하고 까만 얼굴을 가졌고, 에인 케렘에서 찾은 거북이는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으며, 길을 건너려던 두꺼비는 모미크가 구해서 여기로 데려왔고, 도마뱀은 붙잡히자마자 스스로 꼬리를 잘라 버렸지만 그래도 모미크는 포기할 수가 없어서 종잇조각에 꼬리를 쓸어 담아 온 다음—꽤 징그러웠다—별도의 우리에 넣고 다음과 같은 팻말을 붙였다. “미확인 동물. 독이 있을지도 모름.” 하지만 그때 과학자로서의 양심이 발동하여 좀 더 정직해 보이는 수정안을 덧붙였다. “꼬리에는 독이 있을지도 모름.” 지금으로썬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새끼 고양이는 컴컴한 우리 안에서 미쳐 버린 것이 거의 확실했고, 그다음으로는—이것이야말로 전체 무리 중 백미라 할 수 있었다—소나무 위 둥지에서 작은 발코니로 쿵 하고 떨어진 새끼 도래까마귀가 있었다. 이 까마귀의 부모는 모미크를 몹시 의심하고 있어서 그가 마당에서 눈에 띌 때마다 덤벼든다. 몇 주 전에는 등과 팔을 쪼기까지 해서 피가 나고 큰 소동이 있었지만 녀석들이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새끼 까마귀는 매일 닭 다리를 받아서 발톱과 구부러진 부리로 갈기갈기 찢고 모미크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잔인할 수가. 어쩌면 저 녀석이 ‘짐승’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결국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동물이 알맞은 먹이와 보살핌을 받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모미크는 가젤을 보았다. 에인 케렘으로 가는 길에, 바위 위의 옅은 갈색 점이 갑자기 휙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다. 갈색 점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는데 무척 아름다웠고, 겁먹어 있었고, 사람을 낯설어했다. 그것은 가젤이었다. 녀석이 모미크의 냄새를 맡으려고 목을 쭉 내밀자 모미크는 숨을 멈췄다. 그는 자신에게서 좋은 냄새, 우호적인 냄새가 나길 바랐다. 가젤은 한 발을 땅에서 들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러고는 뒤로 펄쩍 물러나 커다란 눈으로 경계하듯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모미크가 두려워 달아나 버렸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이나 바위 사이를 찾아다녔지만 녀석을 찾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그리고 과연 가젤 안에도 ‘짐승’이 도사리고 있을까 생각했다. 왜냐하면 벨라가 어떤 동물도 나치 짐승이 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도 된다고? 벨라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모미크는 벨라의 식품점 뒤에서 “트누바 주식회사”와 “상쾌한 템포 소다”라고 쓰인 궤짝들을 가져왔다. 그 안에 누더기와 헌 신문지를 깔고 철사로 작은 자물쇠도 만들었다. 원래 지하실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한쪽 벽으로 밀었다. 외할머니의 키파트, 유대인 협회에서 준 커다란 침대들(지린내 나는 짚 매트리스들), 슈마테(헌 옷) 때문에 터지기 직전이어서 홱 열리지 않도록 밧줄로 묶어 둔 여행 가방들, 신발로 꽉 찬 커다란 자루 두 개. 낡은 신발은 절대 버려선 안 되기 때문이란다. 20킬로미터에 달하는 눈밭을 맨발로 걸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거다. 아빠가 말했다. 그것은 모미크가 아빠한테서 얻은 거의 유일한 단서였다. 그는 즉시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눈이라는 것이 정말 아빠가 말한 대로라면 모든 사람을 얼려 버리는 눈의 여왕 이야기에 꽤 잘 들어맞았다. 모미크는 먹이통으로 쓰려고 부엌 찬장에서 낡은 접시와 반쯤 깨진 컵 두어 개를 훔쳤는데 당연히 엄마가 곧바로 눈치챘고 모미크는 자기가 안 그랬다고 소리쳤지만 엄마가 자기 말을 안 믿는다는 걸 알아채고는 마룻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떼를 쓰고 못된 소리까지 했다. 엄마가 자기를 내버려 둬야 하고 자기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짐승’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는 엄마에게건 다른 누구에게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엄마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었는데 입을 가린 손은 덜덜 떨었고 두 눈은 너무 크게 떠서 튀어나올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래, 하지만 그가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이미 뱉은 말인걸. 자신 안에 그런 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가 유별나게 수선 떤 탓이기도 하다. 엄마 아빠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지만, 그래, 그렇다고 꼭 참견을 해야만 하나?
그 후로 그는 집에서 물건 슬쩍하는 걸 그만두었다. 물건을 가져오는 건 위험하다. 왜냐하면 엄마는 뒤통수에도 눈이 있고,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며, 모미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맞힌 적도 몇 번 있다. 그녀는 이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뭐든 다 알고 있다. 저녁 식사 후에 포크와 스푼과 나이프의 물기를 닦을 때는 콧노래 같은 걸 흥얼거리면서 속으로 그 개수를 센다. 그녀는 거실 양탄자에 술이 몇 개 달렸는지도 알고, 항상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 안다. 손목시계를 안 차고 있을 때조차도. 예지는 집안 내력임이 틀림없다. 안셸 할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엄마를 거쳐 지금은 모미크에게 전해진 것 같으니까. 마치 병이 유전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모미크가 예언자라는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유월절까지 남은 시간이 몇 분인지 계산해 냈던 샤야 바인트라우프 같은 천재가 되려고 항상 노력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부터 모미크는 숫자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흥미롭다. 사람들이 말하는 단어의 음운 수를 손가락으로 세는 것이다. 예루살렘 베이트 마즈밀 출신의 모미크 네우만이, 손가락으로 로봇보다 빨리 셈하는 획기적인 방법의 창시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 원리를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겉보기엔 모미크가 상대방, 예를 들면 선생님, 예를 들면 엄마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과 손가락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모든 단어를 세지는 않는다. 모든 단어라니, 그가 미치기라도 했나? 특정한 느낌을 주는 단어, 그런 단어를 들으면 그의 손가락은 피아노 치듯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마치 반동추진을 이용해 음속 장벽이라도 돌파할 것처럼 쉬페르 미스테르 기(機) 같은 속도로 계산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라디오에서 ‘비밀 침투 요원’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그 즉시 그의 손가락은 자동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주먹(손가락 다섯 개), 주먹(손가락 다섯 개), 손가락 세 개. 모두 합쳐 열세 개란 뜻이다. 혹은 ‘전국 리그 코치’가 나왔다면 손가락이 곧바로 계산한다. 열네 개. 원자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마법의 단어 ‘우라늄’은 어떨까? 정답! 주먹 하나, 손가락 하나. 합치면 여섯 개다. 모미크가 연습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이제는 문장 전체를 손가락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 특히 ‘우리 군대가 무사 귀환 했습니다.’ 같은 흥미로운 문장은 더 잘 센다. 주먹 다섯 개, 손가락 네 개. 이것은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조용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일 뿐 아니라 손과 손가락의 근육도 단련해 준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모미크가 좀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키가 작다기보다는 마른 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 작은 사람도 강할 수 있다. 난쟁이—땅꼬마란 뜻이다—어니 테일러를 보라.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구했고, 올해에는 선덜랜드를 구하기 위해 또다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2) ‘저 멀리’ 출신의 유대인 프로레슬링 선수 라파엘 할페린 같은 의지력과 손가락 운동의 도움이 있다면 모미크는 곧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이교도들조차 두려워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 지셰 브레이트바르트보다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억지력(주먹 하나, 손가락 두 개)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그런데 모미크의 게임 규칙에 따르면 가운뎃손가락에서 끝나는 단어는 행운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단어에 관사를 덧붙여서 가운뎃손가락에서 끝나게 만들곤 한다. 안 될 것 없잖나? 전략은 써도 된다. 전쟁에서는 전략을 써야만 하니까.
그는 지하실에서 조금 더 기다린다. ‘짐승’에게는 충분치 않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탄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 거기에 머무는 것은 여전히 꽤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때 모미크가 화장실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아기처럼 바지에 오줌을 싸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뛰어간다. 그는 아직도 이 일을 사전에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까마귀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바지가 젖어 있다. 속셔츠도 흠뻑 젖어서, 두 시간 동안 체육 수업을 받고 난 뒤의 땀내를 풍긴다. 그러는 동안 고양이는 구슬프게 울고, 모미크의 눈은 반쯤 감겨 있다. 첫날 밤에는 집 안까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서 아빠가 지하실에서 녀석을 찾아내 악마에게 던져 주려고 했지만 엄마가 캄캄할 때 아빠 혼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결국 그 소리에 익숙해져서 아예 듣지 못하게 됐고 얼마 안 가 울음소리 자체도 고양이 배 속에서 나는 소리 정도로 줄어들었다. 모미크는 고양이가 불쌍해서 풀어 줄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유일한 문제는, 우리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달려들까 봐 두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는 여전히 지하실에 있지만 모미크는 자신이 고양이의 포로인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억지로 거기에 서 있고, 바짝 긴장한 온몸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전투태세(주먹 하나, 손가락 네 개)다. 까마귀와 고양이가 그를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까마귀가 주둥이를 벌리고 끔찍한 까악까악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모미크는 바깥에 나와 있고 그의 한쪽 다리는 발목까지 완전히 젖어 있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아래 자물쇠까지 잠근 다음 “할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외치고 나서 바지를 벗고 다리에 묻은 구역질 나는 오줌을 씻어 낸 뒤에 숙제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지만 먼저 손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됐다. 이제 정삼각형을 그리거나 성서 시간 숙제인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의 답을 쓰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숙제를 굉장히 빨리 끝낸다. 모미크에게 숙제는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숙제 미루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날 바로 끝내 버린다. 뭐 하러 굳이 마음의 부담을 지겠는가? 이제 그는 자리에 앉아 손목시계(심미크가 차던 진짜 시계)를 보며 호흡을 조절한다. 이렇게 연습을 해서 언젠가 대회에 나가면 중간에 숨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델타 리듬 보이스의 멤버인 흑인 가수 리 게인스와 노래 대결을 펼치기 위해서다. 델타 리듬 보이스는 지금 우리 나라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재즈라는 새로운 종류의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그 순간 그는 벨라네 가게에 들르는 걸 또 깜빡했음을 깨닫는다. 비밀 동생 빌의 말 블래키한테 줄 각설탕 만드는 법을 벨라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말이다. 모미크는 과학 선생님이 다다다음 시간에 내줄 숙제를 하기로 결심한다. 한 과가 끝날 때마다 연습 문제가 나오는데 그는 세 과씩 앞서가는 걸 좋아한다. 다른 과목도 그렇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이제 숙제를 끝내고 집 안을 돌아다닌다. 뭐 잊어버린 게 있나? 있다. 새끼 고슴도치에게 뭘 먹일 것인가가 문제다. 고슴도치가 점점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은데 암컷일지도 모르니 임신했을 경우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짐승’은 어디서 나올지 모른다.
그는 커다란 『히브리어 백과사전』들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아빠는 복권 위원회 직원들을 위한 특별 할인가와 할부제로 이 백과사전을 구입했다. 이것은 그들이 산 유일한 책이었다. 책은 언제든 도서관에 가서 읽으면 되니까. 모미크는 돈을 모아서 책을 사고 싶지만 책값이 워낙 비싼 데다 엄마가, 모미크 돈으로 사는 것조차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 말로는, 책이 먼지를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미크는 무조건 책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친척들이나 무닌 씨에게서 가끔 받는 돈이 비밀 장소에 충분히 모이면 립시츠 서점으로 달려가서 책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랑하는 모미크에게, 친구 우리가”라고 적거나 고브린 부인 글씨처럼 어른스럽고 큰 서체로 “베이트 마즈밀 초등학교 도서관”이라고 적는다. 이렇게 하면 혹시 엄마가 모미크의 학용품 사이에서 새 책을 발견하더라도 둘러댈 수 있다. 아무튼 이번에는 백과사전이 도움이 안 됐다. ‘임신’이 들어 있는 권은 아직 안 나왔고, ‘새끼’라는 항목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이 외면하려고 애쓰는 것이 굉장히 많은 듯했다. 마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예를 들면 무닌 씨가 최근 더더욱 자주 얘기하는 ‘행복’처럼 가장 흥미로운 것들을, 백과사전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경우 백과사전은 아주아주 똑똑하기 때문이다. 모미크는 그 커다란 책을 손에 쥐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부드러운 책장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데 마치 이 책장에 독자가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손가락이 미끄러지게 만드는 보호막이 있는 것만 같다. 왜냐하면 길고 곧게 내리뻗은 칸 속에서 우글거리는 쪼그마한 글자들과 크고 강력하고 조용한 군대—이 정의롭고 박식한 군대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대담하게 행진한다—를 위한 비밀 신호 같은 수수께끼 약어들로 가득한 백과사전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어 달 전 모미크는 이 백과사전에 있는 표제어를 1권부터 순서대로 매일 한 개씩 읽겠다고 맹세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 체계적인 꼬마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빠뜨린 날은 딱 하루, 안셸 할아버지가 온 날뿐이었고 다음 날 벌충하는 의미에서 두 개를 읽었다.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항상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책장을 만질 때 배 속과 심장 속 깊은 곳까지 느껴지는 힘과 고요함, 진지함, 그리고 모든 것을 명확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과학성이 좋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6권으로, 이스라엘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책인데 표지만 보면 다른 권들처럼 평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과학적이고 진지하고 똑똑해 보이므로—6권의 거의 마지막에 가면 갑자기 환상적인 색채가 만개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환상적인 두 페이지가 이스라엘에서 발행된 모든 우표의 사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모미크가 숨죽이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 아름다운 색상들이 그를 향해 튀어나오면서 커다란 꽃다발 혹은 코앞에서 펼쳐지는 공작새 꽁지깃과 그 안의 모든 무늬와 색깔과 야성미처럼 완전히 넋을 잃게 만든다. 조금이라도 이와 닮은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엄마의 검은 이브닝 백의 불타는 듯이 새빨간 안감일 것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바로 이 우표들이 모미크에게 ‘저 멀리’의 우표를 그리도록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저 멀리’에 대해 노인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바탕으로 지난 며칠 동안 우표첩 한 권을 거의 다 채울 수 있었다. 한때는 그가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것들, 얼마 되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않은 지식으로 임시변통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예를 들면 아빠는 30프루타짜리 파란 우표 속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처럼 그리고, 엄마는 1952년 신년 기념우표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평화 비둘기’(주먹 둘, 손가락 둘)를 안고 있는 여자로 그리고, 벨라는 에드몽 드 로칠드 남작처럼—그녀도 유명한 박애주의자니까—그린 다음 원본과 마찬가지로 한옆에 포도송이를 그려 놓곤 했던 것이다. 그때는 우표에 그릴 만한 소재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변했다. 모미크는 많은 우표에 안셸 할아버지를 23차 시온주의자 대회에 참석한 “나라의 선지자” 헤르츨 박사로 그린다.(바세르만 할아버지도 그 사람 같은 선지자이자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색 우표에는 아론 마르쿠스를 염주와 웃긴 모자를 걸친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로 그린다. 막스와 모리츠는 포도송이를 꿴 막대기를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들로 그리는데 앞에 선 긴즈부르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의 입에서 나온 작은 말풍선에는 “내가 누구지?”라고 쓰여 있다. 뒤에 선 제이드만은 키가 작고 붉은 얼굴에 공손한 모습인데 한 손에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풍선에는 긴즈부르그와 똑같은 말이 적혀 있다. 그는 늘 남이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것은 무닌을 그린 우표다. 그 탄생 과정은 이렇다. 1953년 신년 기념우표에는 하얀 비둘기가 우아하게 공중을 날아가는 그림이 있고 그 위에 “산골짜기 내 비둘기”라고 적혀 있다. 모미크는 사흘 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스무 장 남짓을 스케치한 끝에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얻었다. 그림 속 무닌 씨는 공중을 날고 있고 그 옆에는 그가 주는 빵 부스러기 때문에 늘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새 떼가 있다. 모미크는 무닌을 실제 모습 그대로, 검은 모자와 카르토펠레(감자)처럼 생긴 크고 빨간 코까지 똑같이 그렸다. 실제와 다른 점은 그에게 비둘기처럼 하얀 날개를 달아 주었다는 것뿐이다. 모미크는 한구석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