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브리얼 제빈Gabrielle Zevin
197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독특한 시선, 재치 있는 구성, 유머러스한 문체로 청소년 문제에서 여성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 발표하는 작품마다 관심을 모으고 있다.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그린 『섬에 있는 서점』(2014)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이중잣대를 그려낸 소설 『비바, 제인』(2017)이 현실의 사건들을 환기시키며 화제를 모았다. 『마가렛 타운』(2006) 『다른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2005) 등의 작품을 썼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
섬에 있는 작은 서점의 주인 피크리는 얼마 전 아내를 잃고 혼자 산다. 성격도 까칠한데다 책 취향까지 까탈스러워 서점 운영은 어렵기만 하다. 포기를 꿈꾸던 어느 날 놀라운 꾸러미 하나가 서점에 도착하면서 그의 삶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섬에 있는 서점』은 책과 사랑을 그린 가슴 뭉클한 소설이다. 정말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이웃들(책과 담 쌓은 사람 포함), 절로 웃음이 나는 해프닝들(저자 사인회 등등), 피크리의 논평을 통해 맛보는 수많은 문학작품(취향에 유의), 스릴러급(그러나 피는 전혀 튀지 않는) 반전과 비밀을 만나는 동안 작은 서점 하나가 세상의 보물이 될 수도 있음을 느끼게 된다.
■ 미국 독립서점 연합 베스트 1위
■ 미국 도서관 사서 추천 1위
■ 전 세계 32개국 번역 출간
■ 뉴욕타임스, 아마존 장기 베스트셀러
표지 그림 Joan Griswold
THE STORIED LIFE OF A.J. FIKRY
by Gabrielle Zevin
Copyright ⓒ Gabrielle Zevin, 2014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2017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Sterling Lord Literistic,Inc. through Danny Hong Agenc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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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장기를 책으로 채워주신 부모님께,
그리고 어느 해인가 겨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단편집을
내게 준 남자아이에게.
어서, 그대여
그대와 내가
완전히 스러지기 전에
서로 열렬히 사랑합시다
―루미
일러두기
1. 각주는 모두 옮긴이주이다.
2. 본문 중 기울임체는 원문에서 이탤릭이나 대문자로 강조된 부분이다.
제1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로알드 달, 1953
냉동된 새끼양 다리로 남편을 살해한 후 여자는 경찰들에게 그 양고기를 먹여서 ‘흉기’를 감쪽같이 처리하지. 달의 이 아이디어가 썩 그럴싸하다면서도, 램비에이스는 의문을 제기했어. 과연 전업주부가 작품에 묘사된 방식으로 양 다리를 훌륭하게 요리할 수 있겠냐고. 해동도 시즈닝도 마리네이드도 안 하고 말이다. 그래 갖고서야 어디는 타고 어디는 설익은 질긴 고기가 되지 않겠어? 요리는(범죄도)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전체 이야기가 흐트러지지. 어쨌든 이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최종 목록에 선정된 이유가 있어. 내가 아는 어떤 여자애가 달의 작품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를 아주 좋아했거든.
—A. J. F.
하이애니스1에서 앨리스 섬으로 가는 페리 안, 어밀리아 로먼은 손톱에 노란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칠이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전임자의 메모를 훑어본다.
1 미국 매사추세츠주 남동쪽의 항만 도시.
‘아일랜드 서점, 연매출 대략 35만 달러, 매출의 대부분은 휴가철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 몇 달에 집중.’ 하비 로즈의 메모가 이어진다. ‘매장은 17평. 주인 외에 정규 직원 없음. 어린이 책이 매우 적음. 온라인 활동은 걸음마 수준. 주민을 위한 행사 등 거의 없음. 문학을 주로 취급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편이지만 피크리의 취향이 아주 독특함. 안주인 니콜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판매 수완은 신통치 않음. 피크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일랜드 서점은 섬 안의 유일한 책방임.’
어밀리아는 약간의 숙취 기운을 다스리며 하품을 하고, 쪼끄맣고 까다로운 서점 하나 때문에 이렇게 긴 여행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손톱의 매니큐어가 다 말라갈 즈음 어밀리아의 못 말리는 긍정적 기질이 고개를 든다. 당연히 그럴 가치가 있지! 그녀는 쪼끄맣고 까다로운 서점 전문이고, 그런 서점을 운영하는 까칠한 주인들에게 특히 강하다. 그녀의 재능은 그뿐만이 아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 하기, 저녁식사에 어울리는 와인 고르기(또한 고주망태가 된 친구들을 어르고 달래서 화합시키는 요령), 화초 기르기, 길냥이랑 놀기, 그 밖에 딱히 쓸모를 논하기 애매한 능력들.
배에서 내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어차피 친구들은 더이상 휴대폰을 전화 거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기분전환 거리가 생겨 반가웠고, 뜻밖의 상대로부터 걸려온 뜻밖의 전화는 좋은 소식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받고 보니 보이드 플래너건이다. 온라인 소개팅 사이트에서 만났다가 잘 안된 세번째 남자로, 대략 육 개월 전에 서커스를 보러 가자고 해서 같이 갔던 적이 있다.
“몇 주 전에 메일을 하나 보냈는데,” 보이드가 말했다. “못 받았어요?”
어밀리아는 최근에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장비가 뒤죽박죽이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 온라인 데이트라는 것에 대해 전반적으로 재고해보는 중이었거든요. 나하고는 좀 안 맞는 것 같아서.”
보이드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만날래요?” 그가 물었다.
그들의 데이트에 대해 말하자면, 잠깐 동안은 서커스라는 참신함에 콩깍지가 씌어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식사가 끝나갈 때쯤 그들 사이에 호환성이 전혀 없다는 중대한 진실이 드러났다.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다. 애피타이저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을 때, 혹은 메인코스 때 자기는 ‘오래된 것’—골동품, 집, 개, 사람—을 싫어한다는 자백을 들었을 때. 그래도 어밀리아는 판단을 유보하고 후식까지 가서,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뭐냐고 물었는데, 보이드는 『회계원리 제2권』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어밀리아는 상냥하게, 아니라고,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보이드의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거칠어지는 것이 들린다. 어밀리아는 그가 울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사람 우습게 보지 마.”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밀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마음 한켠에서 이야깃거리를 원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일화 하나도 못 건지면 꽝난 소개팅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네? 뭐라고요?”
“내가 당신한테 막바로 애프터 신청을 한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겠지, 어밀리아.” 보이드가 말했다. “다른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연락을 안 했는데, 그게 잘 안 돼서 당신한테 두번째 기회를 주기로 한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잘나서라고 생각하지 마. 웃는 얼굴이 제법 괜찮긴 해.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이빨도 너무 크고 엉덩이도 펑퍼짐하고 무슨 스물다섯 살짜리처럼 술을 마셔도 더이상 스물다섯은 아니야. 선물받은 말도 아가리 열어 건강 체크할 인간이네.” 선물받은 말이 히히힝 울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됐어요, 보이드.”
“내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서커스 재밌었잖아요? 그리고 나도 괜찮은 편이고.”
“당신은 훌륭했지요. 서커스도 아주 참신했고.”
“그래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봐요.”
이쯤 되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수십 개가 넘는다. 어밀리아는 그 중 하나를 골랐다. “내가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당신이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고 했던 것 기억해요?”
“잘난 척하긴.” 결론은 났다.
“몇 가지에 대해서는 잘난 척하는 면이 없진 않지. 저기, 보이드, 내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 가봐야 해서 이만.” 어밀리아는 전화를 끊었다. 외모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이드 플래너건의 의견은 전혀 맘에 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와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냥 보이드에게 그녀는 가장 최근에 실망을 안겨준 사람일 뿐이다. 그녀도 실망스러운 사람들을 적잖이 겪었다.
그녀는 서른한 살이고, 지금쯤 임자를 만나야 되지 않나 싶다.
그렇긴 해도……
긍정왕 어밀리아의 신념은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살 바에야 혼자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어밀리아의 어머니는, 소설 따위를 읽으니까 현실의 남자가 눈에 안 차는 거라고 곧잘 얘기했다. 그런 논평은 어밀리아에 대한 모욕인데, 왜냐면 전형적인 로맨틱한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만 읽는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로맨틱한 남주가 나오는 소설도 나쁘진 않지만, 어밀리아의 독서 취향은 그보다는 훨씬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게다가, 그녀가 비록 험버트 험버트2를 캐릭터로서 애정하긴 해도 평생의 반려자로서나 남자친구 혹은 어쩌다 만나는 지인으로라도 마다하게 될 거라는 점은 솔직히 인정한다. 홀든 콜필드3와 저 두 신사양반, 로체스터4와 다아시5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주인공.
3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4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의 주인공.
5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자주색 빅토리아풍 주택의 포치 위에 내걸린 간판은 거의 바래서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아일랜드 서점
앨리스 섬의 유일무이한 순문학 공급처. 1999년 개점.
“인간은 섬이 아니다.6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
6 영국 시인 존 던의 유명한 시구.
안에서는 웬 고등학생이 앨리스 먼로7의 최신 단편집을 읽으며 계산대를 지키고 있다. “아, 그 책 어때요?” 어밀리아가 물었다. 어밀리아는 먼로를 몹시도 사랑했지만 휴가 때 외에는 영업용 도서목록에 없는 책을 읽을 시간이 거의 나지 않는다.
7 섬세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일상을 촘촘하게 묘사한 캐나다의 단편소설 작가.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학교에서 읽으래요.” 여자애는 그걸로 답변이 다 되는 양 말한다.
어밀리아가 나이틀리 출판사의 영업사원이라고 밝히자 여고생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손가락을 드는 둥 마는 둥 애매하게 서점 안쪽을 가리킨다. “에이제이는 사무실에 있어요.”
통로를 따라 검토용 가제본과 견본쇄 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고, 익숙한 체념이 어밀리아의 마음을 스쳤다. 어깨에 멘 볼록한 토트백에는 에이제이의 저 책더미에 추가될 책 몇 권, 그리고 홍보해야 할 책들이 소개된 카탈로그가 들어 있다. 그녀는 카탈로그에 있는 책들에 대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법도 일절 없다. 보통은 뭐가 됐든 장점을 찾아내서 말한다. 책에 대해서, 그게 안 되면 표지에 대해서, 그게 안 되면 저자에 대해서, 그것도 안 되면 저자의 웹사이트에 대해서. 그러라고 월급을 받는 거니까, 하고 어밀리아는 이따금씩 혼잣말로 눙쳤다. 그녀의 연봉은 삼만 칠천 달러이고 성과급 보너스가 따로 있다. 이 직종에서 성과급을 받은 사람이 나온 지는 한참 됐지만.
A. J. 피크리의 사무실 문은 닫혀 있었다. 복도를 반쯤 지나는데 스웨터 소매가 책더미 한 귀퉁이에 걸리면서 백여 권 아니 수백 권쯤 되는 책이 당황스러운 우렛소리를 내며 와르르 쏟아졌다. 문이 열렸고, A. J. 피크리는 그 난장판을 먼저 본 뒤에 눈을 돌려 무너진 책더미를 허둥지둥 다시 쌓고 있는 칙칙한 금발에 덩치가 큰 여자를 보았다. “나 원, 당신 누구요?”
“어밀리아 로먼입니다.” 두꺼운 책을 여남은 권 넘게 쌓았을까 그중 절반이 다시 굴러떨어졌다.
“놔둬요.” 에이제이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래 봬도 다 순서가 있는 것들인데. 그런다고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냥 어서 가줘요.”
어밀리아는 일어섰다. 그녀는 에이제이보다 적어도 한 뼘은 크다. “오늘 만나뵙기로 약속을 했는데요.”
“약속은 무슨.” 에이제이가 말했다.
“분명히 했거든요.” 어밀리아는 힘주어 말했다. “지난주에 겨울 신간 목록에 관해 이메일을 드렸습니다. 목요일이나 금요일 오후 중에 찾아와도 된다고 하시길래 목요일에 오겠다고 말씀드렸고요.” 둘이 주고받은 이메일은 짧고 간결했지만 그녀 혼자 지어낸 것은 분명 아니었다.
“영업사원인가?”
어밀리아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출판사이신가?”
“나이틀리요.”
“나이틀리 프레스라면 하비 로즈 아닌가.” 에이제이가 말했다. “지난주에 이메일을 받고는 하비의 부하나 뭐 그쯤 되는 줄 알았는데.”
“저는 그분의 후임입니다.”
에이제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비는 어디 다른 출판사로 갔어요?”
하비는 죽었다. 순간 어밀리아는 하비가 저승 출판사에 취직했다고 질나쁜 농담을 던져볼까 생각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소식 들으신 줄 알았어요.” 그녀의 고객들은 거의 다 얘기를 들었다. 하비는 전설이었다. 출판사 영업사원도 전설이 될 수 있다면. “전미 서적상 협회 소식지에 부고가 실렸고, 『퍼블리셔스 위클리』에도 아마 실렸을 텐데요.” 그녀는 사과의 뜻으로 말했다.
“출판계 소식은 잘 안 봐서.” 에이제이가 말했다. 그는 두꺼운 검정테 안경을 벗어들고 한참 동안 테를 닦았다.
“뜻밖의 소식을 전해드려 유감입니다.” 어밀리아는 가볍게 에이제이의 팔뚝에 손을 얹었고, 에이제이는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뭔 상관이랍니까? 거의 알지도 못하는 양반인데. 일 년에 세 번쯤 보는 걸 친구 사이라고 하기도 뭣하지. 게다가 그 양반은 날 볼 때마다 나한테 뭘 팔려고 안달이었는걸. 그건 우정이 아니지.”
에이제이의 기분으로 보건대 겨울 신간 소개를 들이밀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하이애니스까지 오는 데 차로 두 시간이 걸렸고 앨리스 섬까지 팔십 분 동안 배를 탄데다 시월 이후로는 페리 운항시간이 더욱 들쑥날쑥해질 터였다. “어쨌든 온 김에,” 어밀리아는 운을 뗐다. “나이틀리의 겨울 도서목록을 좀 같이 훑어보시죠.”
에이제이의 사무실은 골방이다. 창문도 없고 벽에 그림도 없고 책상 위에 가족사진도 장식품도 없고 비상구도 없다. 방안에는 책들, 창고에서나 쓸 법한 저렴한 앵글 책장, 문서 보관함, 아마도 이십 세기의 유물인 듯한 데스크톱 컴퓨터가 있다. 에이제이는 마실 것 한잔 권하지 않았고, 어밀리아도 목이 마르긴 했지만 굳이 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 위에 쌓인 책을 치우고 앉았다.
그리고 곧장 도서목록 소개에 들어갔다. 종수로 보나 기대치로 보나 연중 가장 소박한 목록이었다. 굵직한(뭐 일단 유망하다고 여겨지는) 데뷔작이 몇 개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상업적으로 거의 기대를 접은 타이틀로 채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밀리아는 이 ‘겨울 타이틀’들이 제일 마음에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이 책들은 아직 빛을 못 봤을 뿐인 언더독, 중고신인, 최약체였다.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보는 시각과 일맥상통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밀리아는 가장 좋아하는 책을 맨 나중으로 아껴둔다. 여든 살 노인이 쓴 자서전으로, 노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일흔여덟의 나이에 결혼했다. 노인의 신부는 결혼식을 치른 다음다음 해에 여든셋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암이었다. 저자 약력에 따르면 노인은 중서부의 여러 신문매체에서 과학전문기자로 일했고, 문장은 빈틈없고 유머러스하며 넋두리 따윈 전혀 없었다. 어밀리아는 뉴욕에서 프로비던스로 오는 기차 안에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늦게 핀 꽃』이 소품이고 책 소개도 진부한 면이 없지 않지만, 일단 집어들고 읽다보면 다들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는 일단 이것저것 해보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한창 『늦게 핀 꽃』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데 에이제이가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어밀리아는 물었다.
“내 취향이 아닙니다.” 에이제이가 말했다.
“첫번째 챕터만이라도 읽어보세요.” 어밀리아는 견본쇄를 에이제이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소재가 엄청 진부할 수도 있겠지만 문체를 보—”
에이제이는 그녀의 말허리를 뚝 끊었다. “내 취향이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딴 걸 보여드리죠.”
에이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도 꽤 능력 있는 젊은 사람 같긴 하지만, 당신의 전임자는…… 요는, 하비는 내 취향을 잘 알고 있었어요. 취향이 나랑 똑같았으니까.”
어밀리아는 견본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은데요.” 말하면서 왠지 포르노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제이는 입속말로 뭔가 웅얼거렸다. 얼핏 듣기로 ‘무슨 소용이람?’ 한 것 같았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어밀리아는 출판사 카탈로그를 덮었다. “피크리 씨, 그냥 좋아하는 걸 말씀해 주세요.”
“좋아하는 거?” 그는 불쾌감을 담아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디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잖더군— 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TV 리얼리티쇼 스타의 대필 소설과 연예인 사진집, 운동선수의 회고록,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소설, 반짝 아이템,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뱀파이어물이라면 구역질이 납니다. 데뷔작과 칙릿,8 시집, 번역본도 거의 들여놓지 않아요. 시리즈물을 들이는 것도 내키진 않지만 그건 내 주머니 사정상 어쩔 수 없고. 당신 편의를 봐서 말하는데, ‘빅히트 예정 시리즈’ 같은 건 그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착하기 전까지는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마쇼. 그리고 로먼 씨,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없는 노인들이 별볼일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들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 제아무리 잘 쓴 글이라고 출판사 영업사원이 얘기해도. 제아무리 어버이날에 무진장 팔릴 거라고 장담해도.”
8 젊은 여성 독자를 겨냥한 소설. 이삼십 대 커리어우먼의 일과 사랑, 라이프스타일을 주로 다룬다.
어밀리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당황스럽다기보다 화가 났다. 에이제이의 말에도 일리가 없진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필요 이상으로 모욕적이었다. 어쨌든 나이틀리 프레스는 그런 종류의 책들 중 절반은 아예 취급도 안 한다. 어밀리아는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이차가 크진 않다, 열 살 이상은 아니다. 좋아하는 게 저렇게 없나 싶기엔 너무 젊다. “그럼 뭘 좋아하세요?” 그녀는 물었다.
“그 외엔 전부 다.” 그가 말했다. “내가 좀 단편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면이 없지 않죠. 손님들은 당최 사볼 생각을 안 하지만.”
어밀리아의 도서목록에 단편집은 딱 하나 있는데, 데뷔작이다. 어밀리아도 다 읽은 건 아니고 아마 시간 형편상 다 읽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첫 단편은 마음에 들었다. 미국의 6학년 한 반 아이들과 인도의 6학년 한 반 아이들이 국제 펜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화자는 인도 문화에 대한 정보를 웃기게 지어내서 미국 애들한테 들려줬던 미국 학교에 다니는 인도 아이다. 어밀리아는 여전히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목을 헛기침으로 가다듬었다. “『봄베이가 뭄바이가 되었던 그해』. 이건 특별히 관—“
“싫어요.” 그가 말했다.
“아직 어떤 책인지 얘기도 안 했는데요.”
“그냥 싫습니다.”
“아니 왜요?”
“우리 솔직히 말해봅시다. 당신이 그 책을 나한테 권하는 이유는 내가 인도계고 그게 내 특별한 관심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잖아요. 안 그래요?”
어밀리아는 저 구닥다리 컴퓨터로 이자의 머리를 내려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이 책을 당신한테 권하는 이유는 당신이 단편집을 좋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게 우리 목록에 있는 유일한 단편집이고요.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하는 거짓말이다.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기막히게 완벽한 책입니다. 데뷔작이긴 해도 말이죠. 그리고 그거 아세요? 난 데뷔작이 좋아요. 난 새로운 걸 찾아내는 걸 좋아하죠. 내가 그 낙으로 이 일을 하는 건데요.” 어밀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어제 너무 많이 마신 걸까?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벌렁벌렁 뛴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아니, 별로.” 그가 말했다. “당신이 뭐라고, 스물다섯9은 되셨나?”
9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는 최소 나이.
“피크리 씨, 여긴 참 예쁘고 사랑스러운 가게네요. 하지만 당신이 이런 식으로 계, 계, 계—” 어렸을 때 어밀리아는 말을 더듬었고 지금도 화가 나면 이따금 말을 더듬는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계속 케케묵은 사고방식으로 운영한다면, 머지않아 아일랜드 서점은 세상에서 사라질 겁니다.”
어밀리아는 겨울철 도서목록과 『늦게 핀 꽃』을 에이제이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나오면서 복도에서 책들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음 페리는 한 시간 후에나 출발하기 때문에 어밀리아는 느긋이 시내를 돌아보며 항구로 걸어갔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앞 청동 명판에는 이 건물이 앨리스 여관이었던 시절 이곳에서 허먼 멜빌10이 여름을 보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어밀리아는 휴대폰을 치켜들고 명판이 나오게 셀카를 찍었다. 앨리스 섬은 제법 근사한 곳이지만, 조만간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10 『모비 딕』을 쓴 미국 작가.
그녀는 뉴욕에 있는 상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섬에서는 주문이 전무할 것 같네요. -_- ’
상사에게서 답이 왔다. ‘애쓸 것 없어요. 애당초 거래량도 미미하고 섬의 주문은 거의 여름 관광객을 보고 하는 거니까. 거기 서점 주인이 좀 괴팍하죠. 하비도 늘 봄/여름 도서목록에서 운이 더 따랐어요. 어밀리아도 그럴 거예요.’
여섯시가 되자 에이제이는 몰리 클럭에게 그만 퇴근하라고 일렀다. 그러면서 “먼로의 신간은 어떠냐?” 하고 물었다.
몰리는 툴툴거렸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왜 다 나한테 그걸 물어보지?” 물론 어밀리아 한 사람을 말하는 거지만 몰리는 극단적으로 표현하길 좋아했다.
“네가 먼로 책을 읽고 있으니까 그렇지.”
몰리는 또다시 툴툴거렸다. “알았어요. 캐릭터들이 가끔, 뭐랄까, 너무 인간미가 넘치네요.”
“그게 먼로를 읽는 이유잖아.”
“글쎄요. 난 전작들이 더 낫던데. 그럼 월요일에 뵐게요.”
몰리를 어떻게 좀 해야겠다고, 영업 알림판을 ‘종료’ 쪽으로 뒤집으며 에이제이는 생각한다.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건 논외로 치고, 몰리는 책장사에 영 소질이 없다. 어차피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하고, 새로 누굴 들여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는 것도 귀찮은 일이긴 하다. 최소한 몰리는 훔치지는 않는다. 몰리를 뽑은 건 니콜인데, 분명 저 무례한 클럭 양에게서 뭔가 자질을 봤으니까 고용한 거겠지. 내년 여름쯤 되면 몰리를 자를 기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에이제이는 남아 있는 손님들을 쫓아내고(특히 아무것도 안 사면서 네시부터 진을 치고 잡지를 죄 들쑤시는 무슨 유기화학 스터디그룹인가 하는 사람들에 짜증이 났다. 분명 그 사람들 중에 화장실 변기를 막히게 한 범인이 있었다) 말만 들어도 우울한 작업, 즉 영수증 정리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거지인 위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냉동 빈달루11 한 봉지를 뜯어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겉포장에 쓰인 대로 9분에 맞춰 돌렸다. 전자레인지 앞에 서 있는데 나이틀리 출판사에서 온 여자가 생각났다. 1990년대 시애틀에서 날아온 시간여행자 같았다. 닻 모양이 프린트된 방수 덧신과 꽃무늬 할머니 드레스, 보풀이 일어난 베이지색 스웨터,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칼은 부엌에서 남자친구가 잘라줬을 것 같다. 여자친구일까? 아니, 남자친구다. 에이제이는 단정지었다. 커트 코베인12과 결혼할 무렵의 코트니 러브13가 생각난다. 사나운 장밋빛 입은 ‘어떤 놈도 날 해치지 못해’라고 말하지만, 여리고 푸른 눈은 ‘그래 넌 날 해칠 수도 있고 아마 해칠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커다란 민들레 같은 아가씨를 울리고 말았다. ‘자알했군, 에이제이.’
11 매운 맛의 카레 요리.
12 록 밴드 너바나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13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배우.
카레 향은 점점 짙어지는데 시간은 아직 7분하고도 30초가 남았다.
뭔가 일거리가 필요했다. 몸을 놀리되 힘은 그렇게 들지 않는.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 커터칼로 골판지 박스를 해체했다. 쓱싹. 납작. 차곡. 쓱싹. 납작. 차곡.
에이제이는 아까 그 영업사원한테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한다. 그녀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게 진작에 누구든 하비 로즈가 죽었다는 얘기를 나한테 해줬어야지.
쓱싹. 납작. 차곡.
아마 누군가 얘기를 하려고 하긴 했을 것이다. 에이제이는 이메일을 대강 훑어보기만 할 뿐 전화는 아예 받질 않는다. 장례식이 있었을까? 어차피 참석하진 않았겠지만. 하비 로즈를 거의 알지도 못했는걸. 아무렴.
쓱싹. 납작. 차곡.
그렇긴 해도…… 그 사람과는 지난 육 년 동안 몇 시간씩 함께 보냈다. 한 얘기라곤 책 얘기밖에 없었지만, 뭐, 이런 생활에서 책보다 더 사적이고 내밀한 화제가 있겠는가?
쓱싹. 납작. 차곡.
게다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얼마나 하늘의 별 따기인데? 두 사람이 충돌한 유일한 경우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14를 두고였다. 월리스가 자살한 즈음이었다. 에이제이는 추모글들의 숭배에 가까운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양반이 괜찮은 소설(제멋대로에다 너무 긴 감이 없진 않지만) 하나와 그럭저럭 통찰력 있는 수필을 몇 개 쓰긴 했지만, 그 외엔 별거 없었다.
14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 2008년 46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 『한없는 웃음거리』는 천 페이지가 넘는 매우 장황한 소설로, 온갖 주제를 다루고 수백 개의 주석이 달려 있는 풍자성 강한 작품이다.
“『한없는 웃음거리』는 명작이야.” 하비가 말했다.
“『한없는 웃음거리』는 끈기 대결이지. 꾸역꾸역 다 읽고 나면야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러면 인생에서 몇 주를 허비했다는 사실과 직면해야 할 텐데.” 에이제이가 반박했다. “알맹이는 없고 순 스타일이지, 이 친구야.”
하비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상체를 책상 위로 내밀었다. “자네는 자네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한테는 늘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
쓱싹. 납작. 차곡. 질끈.
위층에 올라와 보니 카레가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이걸 다시 데웠다간 필경 암에 걸려 죽고 말겠지.
그는 플라스틱 그릇을 식탁으로 가져왔다. 첫술은 뜨겁다. 두 숟갈째는 차디차다. 아빠곰 빈달루와 아기곰 빈달루.15 그는 그릇을 벽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하비에게 얼마나 미미한 존재였나. 하비는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나.
15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 빗댄 표현. 골디락스가 곰 가족의 죽을 먹어버린다. 첫번째 죽은 너무 뜨겁고, 두번째 죽은 너무 차갑고, 세번째 죽은 알맞다.
혼자살이의 고충은 자기가 싸지른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혼자살이의 진정한 고충은 내가 속상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거다. 서른아홉 먹은 남자가 왜 어린애처럼 카레가 담긴 플라스틱 그릇을 벽에 내던졌는지 아무도 관심없다. 에이제이는 메를로를 한 잔 따랐다. 그는 테이블 위에 식탁보를 깔았다. 거실로 걸어가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유리장의 잠금쇠를 열고 『태멀레인』16을 꺼냈다. 부엌으로 돌아와 『태멀레인』을 맞은편 의자 위에, 니콜이 앉던 그 의자 위에 세워놨다.
16 1827년 출간된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
“건배다, 이 망할 것아.” 에이제이는 그 얄따란 시집에게 말했다.
그는 잔을 홀짝 비웠다. 또 한 잔을 따르고, 딱 그 잔까지만 마시고 책을 읽기로 다짐한다. 제일 좋아하는 토비아스 울프17의 『올드 스쿨』이나 다시 읽을까, 아니, 그래도 뭔가 새로운 걸 읽는 게 시간이 덜 아깝겠지. 그 바보 같은 영업사원이 무슨 책 얘기를 했더라. 『늦게 핀 꽃』이라니, 우웩. 그 반응은 진심이었다. 홀아비들의 깜찍한 회고록만큼 끔찍한 것도 없다. 더구나 에이제이처럼 지난 이십일 개월 동안 홀아비로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 영업사원은 새로 온 사람이었으니, 에이제이의 흥미로울 것 없는 개인적 비극에 대해 몰랐다곤 해도 그녀 잘못은 아니다. 맙소사, 그는 니콜이 보고 싶다. 니콜의 목소리와 목, 심지어 겨드랑이마저 그립다. 니콜의 겨드랑이는 고양이 혀처럼 우둘투둘했고, 저녁 무렵이면 상하기 직전의 우유 같은 냄새가 났다.
17 미국의 소설가. 자신의 청소년기를 묘사한 자서전 『그 소년의 인생』으로 유명하다.
세 잔을 비운 후 에이제이는 식탁에 엎어진다. 그는 백칠십 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는 육십삼 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고, 냉동 빈달루의 영양도 섭취하지 않았다. 오늘밤 그의 독서 진도는 한 페이지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에이제이,” 니콜이 나직이 속삭인다. “들어가서 자.”
드디어 꿈을 꾸는구나. 그렇게 술을 퍼마신 건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니콜, 만취한 꿈에 등장한 그의 유령 아내는 그를 부축해 일으킨다.
“아주 볼만하군, 너드 양반. 안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냉동 빈달루에 오 달러짜리 와인이라니.”
“나는 유서 깊은 우리 문화의 전통을 존중하고 있다고.”
그와 유령은 비틀거리며 침실로 들어간다.
“축하해, 피크리 씨. 아주 독실한 알코올중독자가 되셨네.”
“미안.” 그가 말한다. 그녀는 에이제이를 침대에 누인다.
그녀의 갈색머리는 소년처럼 짧다. “머리 잘랐네.” 그가 말한다. “괴상해.”
“당신 오늘 그 아가씨한테 너무 심했어.”
“하비 때문이야.”
“물론 그랬겠지.”
“당신을 알던 사람들이 죽는 게 싫어.”
“그래서 몰리 클럭도 못 자르는 거지?”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잖아.”
“살 수 있어.” 에이제이가 말한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 거야.”
그녀는 그의 이마에 키스한다. “내 말은, 당신이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녀가 사라졌다.
사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니콜은 오후 행사를 마친 후 작가를 차로 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마도 앨리스 섬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페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속도를 냈을 것이다. 사슴을 치지 않으려고 핸들을 홱 꺾었을지도 모른다. 겨울철 매사추세츠의 빙판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 길은 없다. 병원에서 경찰은 자살의 기미가 있었냐고 물었다. “아뇨,” 에이제이는 말했다.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는 임신 두 달째였다. 부부는 아직 임신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전에 몇 번 유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안실 바깥 대기실에 서서 에이제이는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사람들한테 알릴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짧은 행복의 시기나마 누린 뒤에 이 기나긴…… 그는 이 시기를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뇨, 자살할 사람은 아닙니다.” 에이제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운전을 지지리도 못하면서 자긴 잘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요,” 경찰이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들 말하고 싶어하죠.” 에이제이가 받아쳤다. “하지만 누군가 잘못한 거요. 이건 니콜 잘못이야.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신파극에나 나올 멍청한 짓을 하다니. 무슨 되도 않는 다니엘 스틸18 같은 짓거리냐고, 니콜! 이게 만약 소설이라면 난 이 대목에서 책을 덮었을 거야. 집어던져 버렸을 거라고.”
18 부유한 최상층 집안의 갈등을 소재로 정형화된 대중소설을 쓰는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그 경찰(휴가 때 가끔 제프리 디버19의 염가 문고판을 읽는 것 외엔 딱히 독서가라고 보기 힘든)은 대화의 방향을 다시 현실세계로 틀어보려 애썼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서점을 하시죠.”
19 <링컨 라임>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범죄 미스터리 소설가.
“아내랑 둘이 같이 합니다.” 에이제이는 무심코 대답했다. “이런 젠장, 배우자가 죽었다는 걸 깜빡하고 실수로 우리 ‘둘’이라고 얘기하는 등장인물 같은 멍청한 짓을 했잖아. 이건 진짜 후진 클리셰인데. 저기요, 어—” 에이제이는 말을 멈추고 경관의 이름표를 보았다. “—램비에이스 경관님, 그거 아십니까? 당신과 나는 지금 어떤 삼류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지? 당신은 아마 속으로 ‘불쌍한 놈’ 하고 중얼거리겠죠. 오늘밤 집에 가서는 아이들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을 거고요. 이런 종류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들 행동이야 빤하니까. 내가 지금 어떤 종류의 책을 얘기하는 건지 아시죠? 거 왜 잘나가는 소설들 있잖아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조연을 얼마간 쭉 따라가서 포크너20 식 확장성을 과시하는. 작가가 소소한 인물들까지 얼마나 신경쓰는지 보라고! 평범한 사람인데! 이 작가 참 마음도 넓어! 당신 이름을 봐도 그렇지. 램비에이스 경관이라니, 흔하고 진부한 매사추세츠 경찰 이름으로 딱이잖아. 램비에이스 경관님,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입니까? 왜냐면 이런 부류의 경찰 캐릭터는 인종차별주의자여야 하거든요.”
2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남부사회를 무대로 몇 세대에 걸친 가족사를 묘사하며 영어라는 언어와 서술기법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활용한 현대 미국문학의 대표적 작가. 194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피크리 씨,”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누구 연락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