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유미
SNS 채널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 작가
공감과 소통의 힘으로 120만 독자를 사로잡은 작가. 구독자가 남기는 수백 수천 개의 댓글을 매일 챙겨 볼 정도로 자신을 찾아와 주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오늘도 그녀는 따끔한 충고와 따뜻한 조언을 적절히 섞어 가며,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그녀만의 온도로 감성을 표현한다. 사랑과 이별을 섬세하게 그려 낸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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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좋아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되짚어 봐도 딱히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 나를 사랑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느끼기도 하지요. 당신도 이런 나와 비슷하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이유를 찾지 마세요.
이유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저도 한때는 이 말이 참 어려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인데 내가 나라서 좋다는 말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특별하다는 것을.
이 글들은 살아오면서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자꾸 잊어버릴 것만 같을 때, 마음속으로 외치던 마음의 주문입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날, 사랑이 어렵고 힘들기만 한 날, 타인의 시선에 하염없이 주눅 들고 흔들리는 날, 문득 주저앉고 싶은 날이면 나직이 힘을 주어 마음의 주문을 외워 보세요.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_______2017년 가을의 문턱
조유미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나에게
1st 마음 주문
좋아 보이는 것은 드러내고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은 감추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한껏 계산된 나를 마주하는 기분은 씁쓸했다.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은 내 모습이 시시해 감추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외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따로 시간을 내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SNS에서는 감추고 싶은 내 인간관계의 폭이 특히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상적인 글을 올렸을 때 댓글만 수십여 개가 달리는 지인들과 달리 고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소박한 댓글 수가 신경 쓰였다. 내 좁은 인간관계가 본의 아니게 드러나는 게 싫었다. SNS에만 접속하면 파티 룸을 빌려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즐기는 사진부터 단짝 친구들과 해외여행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진, 여러 활동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자기계발 모임을 하는 사진 등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이 쏟아졌다. 반면 나는 마음껏 부러워하지도, 응원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마음으로 그 사진들을 구경만 하는 처지였다.
다들 즐겁게 사는데 나 혼자만 잘못 살고 있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억지로라도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바로 독서 모임에 가입하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만나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집에만 있던 때와는 달리 하루를 채우는 사건들이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났다.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SNS 친구 등록을 하고, 주말에는 신촌이나 강남에 나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한때 구경만 하던 사진 속 주인공이 어느새 내가 되어 있었다. 딱히 용건이 없어도 연락을 주기적으로 주고받는 관계도 늘고, SNS에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와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첫 한 달은 만족스러웠다. 내가 살던 삶의 방식과 달라서 마치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다. 어떤 이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과거의 내가 누군가에게 가졌던 그 마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힘들고 쉬고 싶은데, 그동안 쌓아 놓은 관계 때문에 계속해서 약속은 늘어만 갔다. 외출이 잦아질수록 마음이 소진된다는 기분이 짙어졌다. 질소만 가득 든 과자 봉지처럼 속이 꽉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텅텅 비어 있는 상태.
그토록 부러워하던 삶인데, 왜 즐겁지 않을까.
부럽다고 생각했던 삶을 좇았는데, 왜 내 마음은 행복하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마음 때문에 억지로 꾸며 낸 모습.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니, 자연스러울 리가 없었다. 완벽한 화장으로 맨얼굴을 가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내 모습은 한없이 불편했다. 타고난 내 성격을 무시한 채 부러운 모습만 닮아 가려 했으니 목에 가시가 걸린 느낌처럼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아무리 흉내 내고 싶은 삶이라도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기로 했다.
화장기 없는 내 얼굴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인간관계도
창피해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좋고 나쁨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내 모습이니까.
보여 주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꾸며 낸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좋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발전하는 내가 좋다.
모두가 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 힘을 다해서 잘 해내도
나보다 ‘더 잘한’ 사람이 있으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게 계단이었다. 하늘까지 오르려면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했고, 그 계단을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지 시합을 해야 했다. 하늘은 너무나도 달콤해 보였으니까. 별도 있고, 달도 있고, 구름도, 태양도 있는 하늘. 모든 걸 가진 완벽한 이상향 같았다.
좋아 보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늘에 닿기를 탐내니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끌리는 것에 다른 사람도 끌리니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하늘에 닿고 싶었다.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려고 욕심을 내다가 알게 된 건, 이 세상의 적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빨리 일어나야 하는 나와 더 자고 싶은 나, 그만 먹어야 하는 나와 더 먹고 싶은 나, 공부해야 하는 나와 쉬고 싶은 나, 화를 내고 싶은 나와 참아야 하는 나, 그만두고 싶은 나와 버텨야 하는 나…….
내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남이 아니라 매 순간의 나였다.
이 승부에서 승리와 패배는 없었다.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느냐 조금 더 못난 사람이 되느냐의 결정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부족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언제는 잘 해내다가 또 언제는 형편없어서, 누군가는 나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할 테고 누군가는 못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매 순간의 내가 나와 싸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남과 싸우는 것보다 나와 싸우는 게 더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눈앞의 편한 길을 선택하면 나중에 힘들어지고, 지금 당장 힘든 길을 선택하면 지금 이 순간이 힘들다. 이걸 선택해도 힘들고 저걸 선택해도 힘들다. 이보다 더 고약한 눈치 싸움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늘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매 순간 나와 싸우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그토록 염원하던 하늘은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 내가 하늘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하늘 속에 있는 것이고, 내가 땅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땅 속에 있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누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하는 것.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보아야 했는데 엉뚱한 곳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
내가 들여다봐야 하는 건 내 안에 있는 마음이다.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내가 빛날 수 있는 자리를 찾을 테고
그곳이 곧 하늘이 될 테니까.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당신은 당신인걸요.
정작 왜 당신만 몰라요.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내가 알아줄게요.
내가 지켜봐 줄게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조금 실수해도 괜찮아요.
조금 못해도 괜찮아요.
항상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어떤 위로의 말로도 당신의 마음이
괜찮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한숨 쉬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었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 아파 보였으니까요.
당신만큼 좋은 사람도 없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매일 잘되고 있다.
아프고, 무너지고, 흔들리는 모습조차
잘되어 가는 인생의 선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불안한 시기가 있다. 이 반갑지 않은 시기는 오늘 왔다가 내일 갈 수도 있고,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오기도 한다. 게다가 나이가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는다. 10대에는 10대의 불안이, 20대에는 20대의 불안이, 30대에는 30대의 불안이 있다. 심지어 팔순을 맞은 할머니에게도 찾아온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든 계속해서 찾아오는 ‘친구 같은 존재’다.
불안의 시기가 찾아오면, 나는 모순적인 사람이 된다. 쫓기듯이 사는 인생을 그만두고 싶다가도 힘들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 망설인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쳐질까 봐 두려워한다. 결국 밤새 했던 고민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원점으로 돌아온다.
짧든 길든 얕든 깊든 불안한 시기를 겪고 나면 한층 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다. 불안 속에 매몰되어 있을 땐 나의 존재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 한 올보다 더 못한 존재로 느껴지지만,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그 순간을 되짚어 보면 내가 했던 고민들이 모두 나를 위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뚜렷해진다. 더 나은 시선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잘되다’라는 표현에는 성공하다, 이루다, 얻다 등의 가치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실패에 의연해질 수 있는 마음을 배우면, ‘잘된’ 것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어도 그 안에서 얻은 무언가가 있다면 ‘잘된’ 것이다. 이처럼 ‘잘된다’는 건 목표하던 것을 달성했는지의 유무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자랐는지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다.
。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나도 나를 못 믿겠고, 그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어서
마음 곳곳에 미움이 가득 차는 순간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나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힘을 내서 버텨야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니까.
나를 깎아 내더라도 하나의 조각이 되어야지
바닥에 떨어진 조각 부스러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일상이 모여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좋은 하루든 나쁜 하루든 겪어 낸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매일 잘되고 있다.
나를 탓하지 말 것.
나를 못났다 생각하지 말 것.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살다 보면 인생에 한 번씩 깊은 굴곡이 생긴다. 그 굴곡이 때로는 위로 굽이져서 최대의 행복을 주고, 때로는 아래로 굽이져서 최대의 불행을 주기도 한다. 굴곡이 아래로 굽이질 때에는 생각이 참 많아진다. 그때는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아리다, 속상하다, 답답하다, 억울하다…….’ 이런 말로는 내 마음이 온전히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을 ‘상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생의 상처. 그 상처는 평생을 가기도 하고, 자신을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며,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잊히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상처’라고 불리는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꽤 묵직하다. 아픔의 크기가 다를 뿐,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외부 상황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연연할 게 아니라,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마음을 다져야 한다. 부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상처를 받더라도 그게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나의 세계 안에 나를 우뚝 세워야 한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나고, 미쳐 버릴 것 같아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걸음을 막아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나누어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상황이 어그러져 버리면 마음속에 미움이 짙어지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탓하지는 않는다. 다만 잘 살고 있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황을 미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삶까지 미워하지는 않는다. 내 인생에 굴곡이 몇 번 있었지만 내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나를 미워하지 않는 자세 때문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 연습부터 하자.
。
나를 탓하지 말고,
나를 못났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
그것부터 시작해 보자.
어둠 속에서는 작은 빛이 환히 보이지만,
밝은 곳에서는 주변의 환함에 묻힐 때가 있다.
나는 이미 밝게 빛나는데도,
빛을 품고 있지 않은 것처럼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와 자꾸 비교하며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자존감이 낮아질 때가 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주변의 대상과 비교당할 때가 많아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점수를 매겨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는데도 누구는 이랬고, 누구는 저랬다는 말부터 나오니 시작하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내가 잘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찾기보다 비교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부터 본능적으로 찾는다.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해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버리고 남은 카드를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된다.
나는 빛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안정된 삶을 사는 가족들, 나보다 활기차게 사는 친구들, 나보다 좋은 곳으로 이직한 직장 동료들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집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참 우스운 생각이지만, 나는 잘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먼지보다 못한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웠다.
이토록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 있었던 건 아주 작은 생각의 전환 덕분이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켰는데 눈이 시릴 정도로 액정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면 밝기를 최대한 낮췄지만 그럼에도 내 눈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참 이상했다. 낮에는 화면 밝기를 최대로 밝게 하고 사용해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햇볕이 내리쬐던 곳에서는 휴대폰 화면이 잘 보이지 않던 순간도 있었다. 똑같은 휴대폰에, 똑같은 밝기인데도 주변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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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빛을 품고 있지 않은 게 아니었다.
내 주위에 빛나는 사람이 많은 것이었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빛나는 사람 곁에 빛나는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어서
내 주변이 얼마나 밝은지 몰랐다.
당신도 나처럼 그렇다.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