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당신은 한국을 아는가?
한국은 아직 그곳에 있는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단을 만났고 해림과 해민을 낳았다.
오래전 일이다.
해민은 바르샤바에 산다. 해민의 아내는 얼마 전 네 번째 아이를 낳았다. 아이 이름을 이보나라고 지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보나는 해민의 머리만큼 작다고 한다. 그렇게 작고 귀하고 위험한 생명을 나는 제대로 볼 수 없다.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입 맞출 수도 없다.
해림은 열한 살에 죽었다. 해림이 죽어서 우리는 한국을 버렸다. 한국을 떠나면서 나는 설명을 버렸다. 당시 해민은 일곱 살이었다. 질문이 많은 나이였다. 해민은 자전거와 컴퓨터와 누나의 방을 두고 집을 떠나자는 부모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해민에게 아무 설명도 해 주지 못했다. 우리라도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월요일 밤이었다. 안방에 누워 자정 뉴스를 얼핏 들었다. 먼 나라에서 기괴한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고 했다. 백신을 만들면 진화한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길 반복한다고. 감염 경로가 밝혀지지 않아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는 앵커의 말을 들으며,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나는 그달 지출한 경조사비를 가늠하고 있었다. 다음 날 거리마다 바람처럼 바이러스 뉴스가 흘러 다녔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먼 나라의 재앙이니까. 현대 의학과 정부가 그것을 막아 줄 테니까. 아메리카 대륙의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생활비와 노후와 자식 교육을 걱정했다. 그런데 해림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했다. 그날 아침 해림은 늦잠을 잤다. 세수를 하고 스스로 머리를 묶으면서 이마가 뜨겁다고 했다. 책가방을 메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불고기 와퍼를 먹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아득한 옛 소원을 읊조리듯 아련한 혼잣말이었다. 학교 끝나면 사 먹으라고 5000원을 쥐여 줬다. 해림은 내 허리를 꼭 안고 내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가 퇴근하면서 약 사 올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그날 공식적으로 집계된 국내 사망자 수만 10만 명이 넘었다. 다음 날 다섯 배 가까이 늘었다. 병원에 방치된 해림의 시신을 가져와 동네 뒷산에 묻었다. 울지도 않고 땅을 팠다. 벼락처럼 닥친 이별이었다. 죽음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구덩이에 해림의 시신을 두고 흙을 덮을 때 비로소 눈이 트였다. 나는 차디찬 땅바닥에 해림을 급히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로 들어가 해림을 안았다. 해림을 끌어안고 같이 묻히고 싶었다. 해림은 제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차가운 땅에 누워서도 수업 끝나고 불고기 와퍼 먹을 시간만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불고기 와퍼 하나 넣어 주지 못하고 흙을 덮었다.
은행과 기업의 파산은 질병을 넘어선 재앙을 불러왔다. 강도와 밀수와 방화와 인신매매와 살인과 폭력과 종교의 범람. 남성 치사율이 훨씬 높으며 어린아이 간을 먹으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정부는 사라지고 질서는 무너졌다.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던 날들.
그럼에도 그곳에 남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라고 믿는 사람들. 살도 뼈도 없이 기억만 남은 일상을 포기하지 않던 사람들. 죽더라도 내 집에서 죽겠다고 말하던 사람들. 숭고한 영웅처럼, 무기를 버린 전사처럼, 그들은 버텼다. 나는 버렸다. 단과 해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아버지와 언니와 그들의 가족을. 오랜 친구를. 그들 역시 나를 버렸다고 생각할까. 우리가 서로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지금은 헤어져도 언제든 한자리에 다시 모일 수 있으리라 다짐하던 순진한 기만.
모든 것을 버리고 어렵게 닿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혼돈에 빠졌다. 이제 어디로 가지? 이곳에 우리 자리가 있을까? 그래도 그곳은 넓었다.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바이러스와 강도를 피해 대륙을 헤맬 수 있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곳에서, 내일은 오늘과 다른 곳에서 지는 해를 보는 것. 되도록 빨리 지금을 벗어나는 것.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단단한 대지를 뚫고 태양처럼 솟아올라 매일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신을 믿었다. 신의 뜻, 신의 은총과 축복, 신이 내려 준 선물, 신이 보살피신다, 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신을 믿었고 두려워했다. 인간 따위 쓸모없다는 듯 무섭고도 무용하게 펼쳐진 그곳의 자연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울란우데 근처 작은 기도소 구석에서 제 동생을 끌어안고 나를 노려보던 도리. 나는 도리 품에 해민을 밀어 넣고 기도소 문을 닫았다. 러시아 땅에서 내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처음이었다. 도리는 제 동생을 품듯 해민을 끌어안고 몸을 낮췄다. 강도를 피한 뒤 해민을 되찾으려고 기도소 문을 열었을 때, 도리는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이 꾸짖고 있어. 이곳의 신이. 어서 여기를 떠나라고.
톰스크에서 다시 만났을 때 도리는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아서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런 도리가 두려웠지만, 그런 도리를 믿고 싶었다.
나는 이제 일흔 살이 넘었고, 아니, 여든 살인가, 모르겠다. 너무 오래 살았다. 살아온 세월에 비한다면 러시아에서 보낸 두어 달은 100마리 양 중 한 마리만큼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한 마리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어.
이제 신은 나를 꾸짖지 않는다. 신은 내게 관심이 없다. 덕분에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이 징그러운 목숨을 내 딸과 나눠 가질 수 있었다면.
당신은 한국을 아는가?
한국은 아직 그곳에 있는가?
전 세계를 뒤덮은 재앙을 피해 러시아를 떠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도리
하나만 생각한다. 미소를 홀로 남겨 두지 않는 것. 그러니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자로서 나의 일을 해야 한다. 나의 일은 미소를 홀로 남겨 두지 않는 것. 이 주문은 fine 없는 도돌이표, 내가 내게 바치는 기도다. 엄마는 죽으면서 아빠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했다. 아빠는 죽으면서 나에게 미소를 부탁한다고 했다. 미소는 전설 속 비밀의 열쇠처럼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아빠에게서 내게로 부탁되었다.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 사랑을 부탁받은 미소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부모님은 괜찮다는 말로 미소와 나를 안심시켰다. 인류는 영리하며 끈질기다고 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금세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니 그때를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내 생각은 반대였다. 세계는 확실히 전복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위기를 절망으로 바꿀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찾아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닌 더 큰 재앙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부모님과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빠가 죽은 날 바로 짐을 꾸렸다. 최대한 간단하게. 짊어지고 뛸 수 있을 만큼만. 미소의 손을 잡고 무조건 인천항으로 갔다. 이런 상황에 운항하는 배가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대신 티켓 값이 믿을 수 없이 비쌌다. 재앙을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 재앙에도 굶지 않고 뛰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세계는 저승보다 먼 곳에 있을 것이다. 배에 타려면 그들이 원하는 만큼 금과 다이아몬드를 바쳐야 했다. 금반지 하나로는 씹던 껌도 살 수 없었다. 신은 내게서 부모님을 뺏어 가는 대신 도둑질이라는 신묘한 재능을 줬다. 난 이전의 나보다 훨씬 잘 알게 되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절규와 몸싸움으로 뒤범벅된 아비규환을 쥐새끼처럼 파고들어 티켓을 훔쳤다. 칭다오행 티켓이었다. 칭다오에서 다시 티켓을 훔쳤다. 그렇게 울란우데까지 갔다. 내게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훔친 것은 티켓이나 돈이라기보다 목숨이다. 나는 이미 많은 이의 증오를 뒤집어썼다.
울란우데에서 도둑질을 하려다 들켰다. 미소와 나는 달렸다. 미소는 잘 달린다.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미소는 원하는 만큼 달릴 수 없다. 내 손을 잡고 뛰어야 하니까. 그럴 때 나는 미소의 날개를 찢어발기는 악마다. 나만 아니면 미소는 자동차나 기차 없이도 지치지 않고 대륙의 끝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달리고 달리다 새처럼 날아 버릴 수도 있다. 미소에게 끌려가다시피 뛰다가 마침내 미소의 손을 놓아 버렸다. 미소는 스위치가 꺼진 장난감처럼 우뚝 서 버렸다. 작은 천사가 깨끗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미소는 나 때문에 달릴 수 없다. 아버지의 부탁은 잘못됐다. 내게 미소를 부탁하는 대신 미소에게 부탁해야 했다. 언니가 손을 놓아도 계속 달려야 한다고. 손을 놓는 건 더 빨리 달리라는 신호라고.
아이 간을 파먹으려는 미친놈들은 러시아에도 있었다. 남자아이 간보다 여자아이 간이 훨씬 효과가 좋다는 소문까지 떠도는 것 같았다. 내가 마술사라면. 휴지를 장미로 바꾸고 모자 속 비둘기를 사라지게 하듯 미소를 주머니에 감출 수만 있다면…….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했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섣불리 산길을 택했다가는 산짐승을 만날 수도 있었다. 오래 굶은 개도 조심해야 했다. 기찻길을 따라 소처럼 말처럼 걷다 보면 드문드문 도시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경계가 심했다. 그들은 길 위의 사람을 두려워했고, 길 위의 사람도 그들을 두려워했다. 사소한 몸짓이나 표정이 오해를 부르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 닿을 때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워 모았다. 바람도 눈발도 가릴 곳 없는 허허벌판에서 추위에 포위당할 때마다 육체가 번거롭고 감각이 원망스러웠다. 말씀과 빛으로만 존재한다는 어느 신은 허기도 추위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완전하다 말할 수 없고 그러니 불멸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통한다면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싶었다. 이 땅의 겨울은 언제까지냐고. 러시아에도 봄이 있느냐고.
지난봄.
따뜻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고 담요를 두른 채 심야 라디오를 듣던 밤. 새벽 2시 넘어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하얀 꽃이 다 지겠구나 생각하니 아쉬우면서도 후련했다. 빗소리를 듣기 위해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중간고사가 끝난 때였다. 생각만큼 토익 점수가 나오지 않아 실망했었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고 미세한 두통이 성가셔 깊이 잠들 수 없던 밤. 아침에 눈을 뜨니 찬란한 태양빛이 지난밤 빗물을 조용히 먹어 치우고 있었다. 꿈이 있었다. 심야 라디오를 만들고 싶었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새벽을 보내고 싶었다.
그때 죽음은 멀리 있었고 코앞의 현실은 가파르고도 권태로웠다. 부모님은 10년 넘게 대출금을 갚고 있었고 나는 나만의 대출을 책임져야 했고 미소는 친구도 없이 외로웠던 날들.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도 약간의 우울감은 살 냄새처럼 배어 지워지지 않았고, 나와 세상 사이에는 늘 안개가 끼어 있어 어떤 질문에도 흐리멍덩한 대답만 간신히 뱉어 내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눈과 비를 막아 주는 천장과 차갑지 않은 바닥이 있었다. 모두 싫고 무서우면 방문을 닫고 책상 아래 숨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냉장고에는 물과 김치가, 쌀통엔 쌀이 있었다. 찬장을 열면 라면이 있었다. 불을 켤 수 있었고 더운물에 몸을 씻을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마실 수 있었다. 바코드를 찍으면 정해진 가격이 나왔다. 길가에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증오나 공포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바라만 볼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은 우리 집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대출이 끝나면 저 대출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따금씩 우리는,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죽음을 밀어냈을 것이다. 고요하게 담담하게 각자의 인생을 삭감해 나갔을 것이다.
우린 봄이 오기 전에 이 땅을 떠날 거야.
기도소에 숨어 있던 내 품에 자기 아들을 밀어 넣었던 여자가 말했다. 여자에겐 남편과 자동차가 있었다. 여자는 아들을 자동차 뒷자리에 숨기듯 태우고도 금방 떠나지 않았다. 미소와 나를 길 위에 두고 가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한국인이 아니고 미소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여자는 떠나길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 품에 자기 아들을 밀어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여자의 자동차를 봤고 차 안에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무엇이든 훔쳤을 것이다. 단 하나 남은 통조림이라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망설이는 여자 곁을 먼저 떠났다. 등 뒤로 자동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차를 몰고 천천히 내 옆으로 왔다. 차창을 열더니 뒷좌석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 가라고 했다. 자기 아들을 지켜 준 답례라고 했다. 뒷좌석에는 이불과 옷과 물병과 통조림과 건조식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훑어보다 여자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아득해 보였다. 소중한 것을 잃은 눈빛.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물과 통조림을 가득 실은 자동차를 타고도, 남자는 지쳐 있었다. 나는 차에서 생선 통조림 두 개를 꺼내고 물러났다. 그래도 여자는 떠나지 않았다. 다시 차로 다가가 분말수프와 콩 통조림을 두 개씩 꺼냈다. 여자가 검은 가방에서 사탕을 한 움큼 꺼내 내밀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 든 다음에야 차는 떠났다. 천천히 떠나다가 금세 속도를 올렸다.
받은 물건을 배낭에 넣고 미소의 입에 사탕을 넣어 주었다. 해져서 너덜거리는 신발에 눈이 갔다. 밤이 되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따뜻한 물에 오래도록 몸을 담그고 싶었다. 여름이라면 한결 나을까. 여름이라면 호수에서 목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벽과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희망은 내가 움직여야 닿을 수 있는 대륙이 아니라 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가 태양을 돌다 보면 나타나는 밝고 따뜻한 계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서 그 계절을 맞이하는 것뿐인지도.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겠지. 희망은 시간처럼 머무르지 않고 오고 가는 것.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저들도 가족을 잃었을까?
미소가 나를 흘깃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사람들 어디로 가?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미소가 다시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
우리는…… 여름을 찾아서.
여름은 어디에 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켰다.
저기, 해가 지는 곳에.
미소는 혀로 사탕을 굴리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만 남아 적막하고 황폐한 마을에 닿았다. 기찻길과 가까운 곳에 있는 낡은 집을 눈여겨봤다. 창문에는 유리가 없고 문짝은 떨어져 있었다. 창 안은 검고 깊었다. 그곳을 겨냥하여 돌을 여러 개 던졌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주변을 뒤져 불이 붙을 만한 것들을 긁어모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불을 피우고 통조림을 뜯어 미소와 나눠 먹었다. 바깥은 금세 어두워졌다. 미소는 몸을 잔뜩 구기고 앉은 채 잠들어 버렸다. 침낭을 꺼내고 미소를 흔들어 깨웠다. 미소는 잠결에도 침낭으로 기어 들어갔다.
담요를 덮어쓰고 나는 신발 생각만 했다. 자동차가 있다면 신발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니면 바이크라도. 아니다. 그런 것이 있어도 기름이 문제다. 기름을 훔치다가 총 맞은 사람을 본 적 있다. 그래, 자전거. 자전거를 찾아야 한다. ……자전거를 찾는다면, 자동차가 있고 기름이 충분하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세상의 끝에 닿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떠나고 머무르는 것이 과연 우리 선택인가. 어디로 가야 당신의 희망이 있는가. 신발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생각은 자꾸만 뻗어 나가 무력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기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통증이 올라왔다. 기차를 탈 수 있다면. 저 커다랗고 단단한 것 속에 들어가 이 빌어먹을 추위에서 조금이나마 멀어질 수 있다면. 미세하게 집이 흔들렸다. 미소가 몸을 뒤척였다. 밤이 깊으면 마을로 들어가자. 오늘 밤엔 꼭 신발을 구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는지.
눈을 떴다. 모닥불은 꺼져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말이었다.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미소를 깨우고 바깥을 엿봤다. 텃밭에 커다란 탑차 두 대가 서 있었다. 사람 수를 세었다. 열 명이 넘었다. 몇몇이 손전등으로 집안을 비췄다. 미소를 안고 벽 모서리에 숨었다. 사람들은 분주히 불을 피우고 음식을 데웠다. 쌓인 눈을 모아 더운물을 만들고 손과 얼굴을 씻었다. 구워진 고기 냄새가 흘러들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품 안의 미소를 세게 안았다.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한국말을 했다. 여보 자네 형님이라고 서로를 불렀다.
지나, 지나.
한 남자가 낮지만 짱짱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해. 혼자 다니지 마.
지나라는 자는 남자의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남자는 몇 번이나 더 지나를 불렀다. 손전등 불빛과 함께 작은 머리 하나가 창 안으로 불쑥 넘어왔다. 잠시 후 떨어져 나간 문 쪽에서 가볍고 날랜 발소리가 들렸다. 미소를 등 뒤로 숨기고 잭나이프를 꺼내 쥐었다.
까만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손전등 불빛이 나를 비췄다.
지나, 이리 와. 아무 데나 들어가지 마. 위험하다고.
손전등을 내린 채 내게 다가오던 자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알았어. 가, 간다고.
지나는 창에서 몸을 거두고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잭나이프를 가슴께까지 들어 보였다. 지나는 더 다가오지 않고 손전등 불빛이 자기 쪽을 향하게 내려놓았다. 모자와 옷으로 얼굴과 몸을 둘둘 감싸서 눈과 코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지나가 갑자기 털모자를 벗어 자기를 더 자세히 보여 줬다. 머리칼이 어두운 핏빛이었다.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등 뒤의 미소가 몸을 뒤틀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지나가 입을 열었다.
꼬마도 있네.
지나가 조금 다가왔다.
동생이야?
친구에게 말을 걸 듯 스스럼없이 질문했다.
설마 딸은 아니겠지.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너랑 꼬마랑 둘뿐이야?
지나는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거 맞지?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대답 없는 나를 바라보며 볼을 긁던 지나가 느닷없이,
아임 프롬 코리아.
영어를 했다.
웨어 알 유 프롬?
경상도 억양이 느껴졌다.
나이스 투 밋 유.
한 발 더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아니면…… 하지메 마시떼.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지나가 털모자를 다시 쓰며 말했다.
걱정 마. 우린 나쁜 사람들 아니야. 병에 걸린 사람도 없고 아이 간을 먹지도 않아. 저기 밖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떠날 거야. …… 그래도 여기서 널 본 건 비밀로 할게.
지나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질로 천천히 떠났다. 빛이 사라지고 허공은 다시 깜깜해졌다. 눈을 뜬 채 꿈을 꾼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니, 두려웠다. 아니, 두려운 게 아니라…… 두려웠다.
미소가 손짓으로 물었다.
우리 지금 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가로저었다. 미소에게 전했다.
오늘 밤 여기에 있자.
앉은 채로 자다 깨길 반복했다. 몇 번의 선잠을 지나는 동안 창밖은 서서히 검푸르게 변했다. 끝내 모로 누워 버렸다. 지옥에 빠져들 듯 까만 구멍으로 정신이 모조리 쏟아졌다. 잠결에도 지나의 영어가 생각나 잠깐 웃었다. 웃다가 놀라 눈을 떴다. 작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나가 작은 컵을 내밀었다.
커피.
지나가 내 손에 컵을 쥐여 주며 말했다. 꿈인가 생각하며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검은 물을 가만히 쳐다만 봤다. 지나는 자기 손으로 내 손을 감싸고 컵을 기울여 한 모금 먼저 마셔 보였다. 그러고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내 입술로 컵을 기울였다. 검은 물에 입술을 조금 축였다. 정말 커피였다. 진짜, 커피. 한 모금 달게 마셨다. 내장이 따뜻해지며 모든 세포가 황급히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컵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조금씩 계속 마셨다.
신발이 엉망이네.
지나가 내 신발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지난밤 지나의 머리칼은 핏빛이었다. 꿈을 꾼 건 아닌지 털모자를 벗겨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뿐이었는데 내 손이 털모자를 잡아당겼다. 빨간 머리칼이 드러났다.
아…… 머리카락 떡 진 거 엄청 잘 보일 텐데…….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너도 한국에서 왔지?
모닥불에 손을 쬐며 물었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면 돼?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