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브라운 Wendy Brown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역사 바깥의 정치》 《경계에서: 지식과 권력에 관한 비판적 에세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공저) 등을 썼고, 자넷 할리와 함께 《좌파 법치주의/좌파적 비판》을, 주디스 버틀러와 함께 《비평은 세속적인가》 등을 편집했다.
옮긴이
배충효
고려대학교 경영학부를 졸업한 후 펍헙 번역 그룹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청년 실업 미래 보고서》 《구글은 빅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했는가》 《미의 심리학》 《커쇼의 어라이즈》 《버큰헤드호 침몰사건》 《기적을 부르는 네트워킹》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방진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에서 국제무역 및 국제금융을 공부했다. 현재 펍헙 번역 그룹에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월요일에 말 잘하기》 《소설 솔 숨겨진 이야기》 《그림책 쓰기의 모든 것》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UNDOING THE DEMOS
Copyright ⓒ 2015 by Wendy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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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모순으로 가득한 세기에 이보다 더한 모순이 또 있을까 싶다. 냉전이 종식되고 주류 학자들이 민주주의의 전 지구적인 승리를 자축할 때, 민주주의를 개념적으로 방황하게 만들고 핵심을 비워낼 작업을 시작할 새로운 형태의 통치 이성의 서막이 북미·유럽권에서 오르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로부터 삼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구 민주주의는 생기를 잃고 그림자만 남아 그 미래가 급속히 불안정해지고 불투명해졌다.
민주주의의 의미와 내용을 시장 가치로 물들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신자유주의는 인민에 의한 지배를 말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관행·문화·주체·제도를 공격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살점을 떼어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민주주의의 더 급진적인 형태들, 즉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구현 형태에서는 제한적이었던 자유, 평등, 인민 지배의 더 확실한 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근대 북미·유럽 국가에서 단발적으로 나타났던 민주주의의 구현 형태들을 마비시켰다.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근간과 미래에 근본적으로 파괴적이라는 주장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든지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일련의 경제 정책, 이데올로기, 정부와 경제를 정립하는 새로운 방식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삼십 년에 걸쳐 인간 그 자체를 비롯해 인간의 모든 영역과 활동을 특정 경제적 이상에 맞춰 변형시킨 통치 합리성으로 널리 그리고 깊숙이 퍼지며 발전한 이성 체계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이성 체계에서는 모든 행위가 경제적 행위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직접적으로 금전화할 수 없는 공간조차도 모두 경제적인 관점과 지표에 의해 규정 및 평가된다. 신자유주의 이성과 그런 이성의 통치를 받는 영역에서 인간은 오로지, 언제나 역사 속에서 특정한 형상만을 지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취급된다. 오늘날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옮기고, 흥정하고, 교환”하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모든 활동과 장소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자신의(금전적·비금전적) 포트폴리오 가치를 향상시키는 과제에 의해 집중적으로 규정되고 통치되는 인적자본 단위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화된 국가, 대기업, 소규모 사업체, 비영리단체, 학교, 자문단, 박물관, 지방, 학자, 연예인, 공공 기관, 학생, 홈페이지, 운동선수, 스포츠 팀, 대학원, 보건 인력, 은행, 세계적인 법률 회사 및 금융 기관의 기획을 규정하는 지침이자 성향이다.
민주주의의 지침과 원칙이 이런 이성 및 통치 질서에 의해 재편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인과 집단의 자치의 약속과 그런 자치를 지원하는 제도가 자본 가치 증대, 경쟁력 및 신용 등급 제고 예찬에 의해 압도되고 대체될 때는? 표현, 심의, 법, 이민 주권, 참여, 교육, 공공재, 인민에 의한 지배에 수반되는 권력 공유의 관행과 원칙이 경제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책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서구에 이미 정착된 성과물이고, 그래서 잃을 수 없는 것이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다. 민주주의는 권리, 시민적 자유, 선거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규제받지 않는 시장과 결합한 헌법에 의해 보장된다는, 국가가 부여하는 질서와 안보라는 맥락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정치 체제로 축약될 수 있다는 그런 통념 말이다. 또한 인간이 민주주의를 향한 자연스럽고도 영속적인 열망을 지닌다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자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런 질문들은 민주적 자치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자 애쓰는 인민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소중히 여겨지고 육성되고 보살핌을 받으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변형하거나 잠식하려고 위협하려는 온갖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압력에 대해 경계를 늦추는 일 없이 언제나 대항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대항해야 할 세력과 문제들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더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들은 인민에 의해 공유된 지배라는 약속이 인류의 번영부터 지구의 보존에 이르는 다른 좋은 것들을 확보하기 위한, 불안하지만 잠재력이 무한한 수단이며 그 자체로도 목적으로 공들일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는 유일무이한 정치적 가치도 아니고 암울한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막는 확실한 대비책도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살 만한 미래를 확보하는 데 있어 글로벌 통치, 전문가에 의한 지배, 인권, 무정부주의 심지어는 비민주적 공산주의에까지 초점을 맞추는 좌파 기획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런 반박 가능한 전제들을 뒷받침하는 신성하거나 자연적이거나 철학적인 근거는 없으며 그렇다고 추상적인 연역이나 경험적인 증거를 통해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런 믿음은 그저 애착, 역사와 현재에 대한 학문적 고찰, 논증 같은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많은 동료, 학생, 연구 조교, 사랑하는 이들, 낯선 이들의 도움으로 탄생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들 중 몇몇만 언급하겠다. 안토니오 바스케즈‐아로요(Antonio Vásquez‐Arroyo)는 수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더 상세히 규정해보라고 부추겼고 최근에는 아직 미완성인 마르크스에 관한 책 대신 이 책을 쓰라고 종용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디어 다수는 미셸 페어(Michel Feher)의 것이다. 그가 동의하지 않는 아이디어들도 있지만 그의 비판과 제안 덕을 보았다. 로버트 마이스터(Robert Meister)와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acDonald)는 신자유주의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 소중한 참고자료이자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마이스터가 이끄는 브루스이니시어티브(Bruce Initiative)의 ‘자본주의 재고하기(Rethinking Capitalism)’ 프로젝트 또한 내 아이디어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디어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노출시킬 때마다 더 발전했다. 노출이 이루어진 현장을 주최한 이들과 현장에 참여한 청중에게 빚을 졌다. 줄리아 엘리야차르(Julia Elyachar)는 이 프로젝트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논문에 매우 뛰어난 논평을 해주었다. 스티브 쉬프린(Steve Schiffrin)은 고맙게도 이 책 5장의 원고에 대해 훌륭한 비판과 제안으로 응답해주었다. 이 책에 담긴 주장 일부가 탄생한 2011년 버크벡 비판이론 여름학교와 14주간 마르크스와 푸코를 함께 읽으며 만끽했던, 꿈만 같았던 2012년 버클리 대학원 세미나의 학생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 책의 몇몇 장의 초고를 가지고 브라이턴 대학교의 마크 드베니(Mark Devenney)가 주관한 워크숍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책을 쓰면서 일단의 연구 조교와 자신들의 노동력을 빌려준 이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초반부에는 잭 잭슨(Jack Jackson)이 자료를 찾아주고 훌륭한 연구와 논증을 통해 나를 이끌어 주었다. 후반부에는 니나 헤이글(Nina Hagel)과 윌리엄 칼리슨(William Callison)이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각주를 다는 작업 그 이상을 해주었다. 재정식화를 위한 수정, 의문 제기, 제안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해주었고, 그들의 인내심, 상냥함, 배려 덕분에 그들과의 작업은 언제나 즐거웠다. 니나는 색인 작업도 해주었다. 데린 맥크리오드(Derin McCleod)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여성형을 만들어내는 과제에 자신의 라틴어 지식을 빌려주었다. 버클리 학부를 졸업한 재원 순다르 샤르마(Sundar Sharma)와 버클리 대학원 졸업생이며 민주주의에 중첩된 자본주의를 잘라내는 일에 열성적인 제이슨 쾌닝(Jason Koenig)은 6장으로 발전한 논문들의 참고 자료를 찾아주었다. 존(Zone) 출판사와 작업하면서 이 책의 출판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곳곳에서 힘써준 메이건 게일(Meighan Gale), 최종 원고를 전문가답게 날카롭게 살펴보면서 여러 방면에서 조언해준 러모나 나다프(Ramona Naddaff), 뛰어난 디자이너인 줄리 프라이(Julie Fry), 교정교열의 달인 버드 바이낵(Bud Bynack)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버드는 저자가 종이 위에서 멍청하게 보이지 않도록 구제해주었을 뿐 아니라 예술이자 과학인 교정교열이라는 재능을 가지고 저자에게 기분 좋은 그리고 종종 재미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학습의 기회를 제공했다.
집에서는 주디스 버틀러가 신자유주의 이성이 배척하는 충만한 내면, 시, 관대함,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헌신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다. 그녀 또한 소중한 대화 상대이자 비평가이다. 아이작의 섬세한 영혼, 출중한 음악적 재능, 삶에 대한 혈기왕성한 기대는 미래에 대한 나의 절망에 반격을 가한다. 확장된 ‘늑대 무리‘는 우리 모두를 지탱해준다. 우리가 만든 대안 혈연관계 형태를 유지하는 열두 명 모두에게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의 ‘1936년 버클리 대학 초대 정치학과 교수 모임(the Class of 1936 First Chair)’과 ‘인문학 협회(Society for the Humanities)’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또한 나를 코넬 대학교 인문학 협의회에 초청해준 팀 머레이(Tim Murray)와 A.D. 화이트하우스에 나를 머물게 해준 브렛 드 브래이(Brett de Bray)에게 특히 빚을 졌다. 그들 덕분에 이타카의 멋진 가을을 즐기면서 이 책의 초고를 쓸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존재의 모든 측면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독특한 통치 이성 형식인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들을 조용히 해체하고 있는 방식을 이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해체되고 있는 기본 요소들에는 민주주의의 용어, 정의의 원칙, 정치문화, 시민의 관습, 법 관행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적 상상력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시장과 돈이 민주주의를 부패 혹은 타락시키고 있다거나 정치 제도와 정치 결과가 금융 자본과 기업 자본에 의해 점점 잠식당하고 있다거나 민주주의가 부자들이 집권하는 금권주의로 대체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오늘날 행정, 직장, 법정, 학교, 문화를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이성이 민주주의 구성요소의 명백하게 정치적인 특성, 의미, 실행을 경제적인 것으로 바꾸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제도, 행위, 관습은 이런 변환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급진민주주의의 이상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책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이런 어려운 시기에 속한 미래 민주주의의 기획에 잠재된 삭막함, 그 둘 모두를 추적한다.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와 원칙,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되는 문화, 민주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천하거나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열망하는 시민. 그런 것들 모두가 정치적 삶을 비롯한 비경제적인 공간과 활동을 ‘경제화’하는 신자유주의에 도전받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현대 자유민주주의 비워내기와 그보다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적 상상력에 대한 위협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자유민주주의의 관습과 제도는 대부분 그것들이 약속하는 바에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 그 약속을 냉정하게 저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자유민주주의 원칙은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적 지배와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담고 있으며 지키고 있다. 민주주의의 다른 형태들도 그런 이상을 공유하지만 자유주의의 형식주의, 사생활 보호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상대적 허용으로 인해 제한적으로만 실현되고 있는 그런 이상을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더 충실하게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주장하듯 신자유주의 이성이 현재 실제로 운용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에서 그런 이상과 열망을 제거하고 있다면 더 야심찬 민주주의 기획은 과연 어떤 토대에서 출발할 수 있을까?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조차 잿더미로 변해 버린 현실에서 더 풍부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그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라는 신기루 같은 구현 형태조차 사라졌을 때 과연 인민들이 민주주의를 원하고 구할까? 그리고 탈(脫)민주화된 주체와 주체성 내부에서 이 정치제체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솟아날 여지가 있을까? 원초적인 것도 아닌, 지금의 역사적인 조건에서 습득되지도 않은 그런 염원이? 이런 질문들은 어떤 국민과 문화가 민주주의를 추구하거나 구축할까라는 문제가 비서구사회에서만 중요한 문제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현대 서구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민주주의는 해체될 수 있다. 반(反)민주세력의 방해공작이나 전복작전 없이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비워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당연하거나 순결무구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루소와 밀 같은 민주주의 사상가들도 유럽적 근대성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민주주의 정신을 빚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인정한 바 있다.1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를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두 개념이 지닌 모호성과 다의성이라는 도전에 직면한다. ‘민주주의’는 현대 정치 용어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고 난삽한 개념 중 하나다. 대중이 머리에 떠올리는 ‘민주주의’는 자유선거부터 자유 시장까지,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부터 법과 질서까지, 권리의 중요성부터 국가의 안정까지, 조직된 다수의 목소리부터 개인의 보호와 다수의 횡포까지 등 모든 것을 망라한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서구 사회의 최고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서구 사회에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거나 서구 민주주의가 제국주의 야욕을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민주주의는 그 형태만도 사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급진민주주의, 공화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권위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투표민주주의 등 매우 다양해서 앞에서 예로 든 주장들은 서로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따로 논다. 정치학의 경우 계량정치학자들은 정치이론학자들이 문제 삼고 반대하는 용어와 데이터를 사용해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고정시키고자 한다. 정치이론 분야 내에서도 단 하나의 정식(자유)과 방법론(분석적)이 ‘민주주의 이론’을 독점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학자들이 바람직하거나 불만스럽게 여기는 정도도 제각각이다.
심지어 ‘민주주의’의 그리스 어원도 모호함과 논란을 낳고 있다. demos/ kratia는 ‘인민 통치’ 또는 ‘인민에 의한 통치’로 번역한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인민’은 누구였을까? 재산을 소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소외된 자들? 다수? 이것은 당시 아테네에서도 논쟁의 대상이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웠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가난한 이들에 의한 통치였다. 현대 대륙 철학에서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demos의 모호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demos가 정치체 전체와 가난한 사람들, 그 둘 모두를 가리키기 때문에 그런 모호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2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플라톤의 《법Laws》을 논의하면서) demos가 그 둘 중 어느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통치 권한이 없는, ‘소외된 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언제나 ‘참여하지 못하는 부분’의 분출이다.3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는 랑시에르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특징인 자유와 평등은 ‘소외된 자들의 혁명으로 강제된 것’이며 다만 언제나 ‘시민들에 의해 끝없는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한다.4
민주주의가 합의되지 않은, 논쟁적인 개념임을 인정하는 것은 앞으로 내가 하려는 논의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인민이 누구를 의미하든 간에 민주주의가 인민에 의한 정치적 자기‐지배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견지하면서도 민주주의를 특정 형태의 족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독재, 군주, 파시즘, 전체주의, 귀족주의, 금권주의, 조합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일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질서에 따라 지배가 통치와 경영으로 변질되는 현재의 현상과도 대립하는 개념이다.
‘신자유주의’ 또한 느슨하고도 유동적인 기표다. 학계의 통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 고정되거나 합의된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으며 그 담론 형식, 정책 제안, 구체적인 실천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5 이런 통념은 신자유주의의 다의적이고도 다양한 근원에 대한 인식이나, 신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렇게 보면 신자유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자체가 의심스럽다.6 물론 경제 정책, 통치 방식, 이성 체계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연속성, 통일성, 체계성, 순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스웨덴에서는 복지주의 유지의 정당성과 교차하고 남아프리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정부의 민주화와 재분배에 대한 기대감과 교차하며 중국에서는 유교와 탈(脫)마오이즘 그리고 자본주의와 교차하고 미국에서는 오랜 전통을 지닌 강력한 반(反)정부주의 및 신경영주의와 교차한다. 신자유주의가 칠레에서는 1973년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몰아낸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와 ‘시카고보이즈(Chicago Boys)’라 불리는 칠레 경제학자들에 의해 강제된 ‘실험’이었던 반면 그로부터 이십 년 동안 지구 남반구의 개발도상국에서 ‘구조조정’을 실시한 곳은 국제통화기금이었다. 마찬가지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과 레이건 전 미 대통령 모두 취임 초기에 자유 시장경제 개혁을 당당하게 추진하는 동안 서방 국가에서 신자유주의는 경제 용어와 경제적인 사회의식으로 민주주의적인 것을 강탈하는 통치 기법을 통해 더 은밀하게 전개되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합리성 그 자체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는데 여러 변화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생산 경제에서 금융 경제로 점차 중심이 이동했다는 점이다.7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역설이다. 신자유주의는 독특한 이성 양식이자 주체의 생산 방식이며 ‘행위의 행위(conduct of conduct)’이고 평가 지표다.8 역사적으로는 케인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맞서는 구체적인 경제적·정치적 대응과 다른 가치 체계의 통치를 받는 공간과 활동을 ‘경제화’하는 더 일반적인 관행을 가리킨다.9 하지만 국가, 지역, 분야에 따라 차별화되는 사례들과 현존하는 문화 및 정치적 전통과 교차하는 다양한 지점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담론 및 현상을 수렴·융합하는 과정을 보면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다채로운 내용과 하위 규범, 심지어 다른 용례들을 생성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펼쳐지고 있지만 시공간 전체에 걸쳐 그 자체로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다양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룰 이유들 때문에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보다는 ‘신자유주의’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이 시대와 서방 세계라고 부르는 이 공간에서 구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형태에 초점을 맞춰 논의할 때에도 신자유주의의 그런 점들—비균질성, 자아정체성 부재, 시공간적 다양성 그리고 무엇보다 재조합 가능성—은 여전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신자유주의의 불연속성과 변형성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유는 현재 관찰되는 신자유주의의 형태를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나 본모습으로 받아들이거나 이 책에서 하는 논의가 종말을 향해 꾸준히 이어지는 행렬의 암울한 단면에 불과한 목적론적인 이야기로 취급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플라톤은 《국가Republic》에서 도시국가와 영혼 간의 아주 명확한 상동관계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도시국가와 영혼은 모두 이성(통치자), 기개(수호자), 욕구(노동자)라는 동일한 구성요소를 지니며 같은 방식으로 적절하게 또는 부적절하게 질서를 유지한다. 만약 이성이 아닌 욕구나 기개가 개인의 삶이나 정치를 통치하면 정의나 도덕이 희생된다. 정치이론학자들이 충분히 반론을 제기했음에도 플라톤이 제시한 상동관계는 꾸준히 재조명되곤 한다.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 이성을 통해 그런 상동관계가 맹렬한 기세로 다시 부상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현대 기업을 모델로 삼아 개인과 국가를 해석하고 개인과 국가가 자기의 현재 자본 가치를 극대화하고 미래 가치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처신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개인과 정부는 기업가정신, 자기‐투자, 투자 유치 등을 통해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국가는 언제나 최소한 금융 위기, 신용등급, 통화가치, 채권 수익률 하락과 정당성 상실을 겪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국가 파산과 정부 해산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개인도 언제나 최소한 생계 곤란, 자존감 상실, 신용불량 상태에 빠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생존을 위협받고 만다.
새로 등장한 도시국가와 영혼 간 상동관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 기준점이 정치가 아닌 경제라는 것이다. 개인과 정부가 지배 대상이 아닌 경영 대상이 되면서 경제적 분석이 적용되고, 경제적인 목표가 정치적인 분석과 정치적인 목표를 대신하게 되면서, 일련의 관심사들이 자본 증식 기획에 흡수되거나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혹은 ‘경제화’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의(그리고 자유, 평등, 공평 같은 그 하위 요소들), 개인과 국민주권, 법치 등이 이에 해당한다. 민주 시민권의 가장 기본적인 실행에도 관여하는 지식과 문화적 소양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두 예는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하나는 영혼에 관한 예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관한 예다.
영혼 재정립. 북미와 유럽의 대학들이 최근 수십 년 동안 급격한 변화와 재평가를 겪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등록금 인상, 국가 보조 축소, 영리 목적 및 온라인 교육 확대, 기업의 ‘모범사례’를 따른 대학의 구조조정, ‘자격증’이 아닌 ‘능력’을 중시하는 경영 문화의 성장은 상아탑의 이미지를 불과 삼십 년 만에 시대착오적이고 사치스럽고 나태한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대부분의 공공 기관을 반(半)민영화했고, 정부 기금은 지식을 ‘영향력’에 따라 평가하는 학문 생산성 지표와 연동시켰다. 미국의 대표적인 변화들이 살짝 다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크라우드소싱(crowd sourcing)과 유사한 좀 더 비공식적인 순위 잣대가 득세하고 있다. 대학교의 질—이 또한 기부금과 함께 지원자 집단의 규모 및 수준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이미 논란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을 측정하던 기존의 기준들은 여러 새로운 ‘가성비’ 측정 기준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10 《키플링거즈퍼스널파이낸스Kiplinger’s Personal Finance》, 《프린스턴리뷰Princeton Review》, 《포브스매거진Forbes Magazine》 등의 매체가 제공하는 대학 순위는 그 순위를 산출하는 알고리즘이야 복잡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문화 변동은 간단하다. 즉 이 순위들은 교육의 질이 아닌 투자수익률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각 교육기관에서 학생 투자자들이 어떤 일자리를 구하고 연봉 인상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 평가 지표를 사용한다. 물론 그런 방식이 도덕적으로 어긋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등교육의 가치를 개인의 경제적인 위험·이득으로 축소시키고 개인의 발전과 시민의 양성이라는 고전적인 관심사들을 배척하며 때로는 그런 관심사들을 개인적인 이점을 극대화하는 문제로 한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새로운 평가 기준 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학교일수록 학생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연방 재정 1조5,000억 달러(한화로 1경8,149천조 원—옮긴이)를 배분하는 프로젝트를 정부가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가 도입될 가능성은 아주 높아 보인다. 실제로 실행된다면 대학의 순위도 다른 투자와 마찬가지로 리스크 노출도와 기대 수익이라는 관점에서 매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 순위에 따라 교육기관과 학생 모두 막연한 제안이나 ‘인센티브’를 받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평가지표에 의한 재편을 강요당할 것이다.11 이와 같은 평가 시스템은 그것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대학교의 비용 절감 등의 목표를 훨씬 넘어서는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졸업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교육 기간이나 이수 조건이 급속도로 압축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인문학 교육과 역사적으로 차별받아 온 사람들의 채용은 설자리를 잃고 더 광범위하게는 대학 졸업자들에게 기대하는 지식 습득의 수업법, 방식, 기준이 재편될 것이다. 새로운 평가 기준은 간단히 말해 고등교육의 개혁을 조종하고 규정할 것이다. 사려 깊은 지성인을 육성하고 문화를 재생산한다는 목적으로 시작해서 최근에는 기회 균등의 원칙을 실천하고 폭넓은 교육을 받은 시민을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이루어지던 고등교육은 이제 인적자본을 생산한다면서 고전적인 인본주의 가치에 역행하고 있다. 6장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고등교육이 이런 식으로 개편되면 더 나아가 영혼, 시민,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재구성. 2기 정부를 출범한 오바마 미 대통령은 겉으로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젠더, 장애, 이민 여부로 인해 아메리칸드림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처럼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1월 <우리 국민(We the People)>이라는 취임사에서 그런 관심을 소리 높여 표명했다. 이 취임사와 3주 후에 발표한 연두교서를 보면 오바마는 중도주의, 타협주의, 협상주의로 점철된 1기 정부를 마친 뒤 자신의 좌파 뿌리를 재발견했거나 정의감을 되찾은 것 같았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벌였던 이들은 미국적인 것이 무엇이며 미국인은 누구인지에 대한 대중의 담론을 자신들이 조금이나마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소박한 승리를 자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두 연설이 동성결혼에 대해 ‘진보’한 의식과 중동이라는 수렁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새로운 결심을 담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연설들에는 “기업들의 이윤이 …… 역사상 최고치를 달성하는” 동안 부를 향한 신자유주의 경쟁에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다.12 그래서 오바마에게 2008년 정권 쟁취의 원동력이었던 “희망과 변화”의 불이 다시 켜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두교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점은 다른 데 찍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바마는 메디케어의 유지, 누진세 개혁, 과학 및 기술 연구, 녹색 에너지, 내 집 마련, 교육에 대한 정부 투자 증대, 이민법 개정, 성차별과 가정 폭력 근절, 최저 임금 인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런 주제들을 모두 경제 성장과 미국의 경쟁력 제고에 기여하는 방안으로 다루었다.13
“질 좋은 중산층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장 경제. 바로 그것을 우리 노력의 지향점, 북극성으로 삼아야만 합니다”라고 오바마는 강조했다. 또한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매일매일 던져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14 법과 정책의 구상, 집단 및 개인의 활동을 이끄는 이런 지침들은 무엇일까? 바로 “어떻게 하면 이 땅에 더 많은 일자리를 끌어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그런 일자리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괜찮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였다.15
투자자를 모으고 적절한 보수를 받는 기술 인력을 개발하는 일. 바로 이런 것들을 정의감으로 충만한 대통령이 이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가 21세기에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 분야에서의 성공은 경제 전반에 걸친 ‘폭넓은 성장’이라는 국가와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 실현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오바마는 가정 폭력 줄이기부터 기후변화 속도 늦추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진보적인 가치가 경제 성장과 양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녹색 에너지는 이 나라의 경쟁력을 제고시킨다. ‘중국 같은 나라들이 녹색 에너지에 올인 한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16 이 나라의 오래된 기반 시설을 정비하는 일은 “미국만큼 사업하기 좋은 곳도 없다는 증거”가 된다.17 “책임의식 있는 젊은 가족”들이 대출 받아 첫 집을 마련하기 더 쉽게 해주는 것은 “우리 경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18 교육에 투자하면 경제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미혼모와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 “아이들을 좋은 일자리로” 인도하며 “중산층이 될 수 있도록 노력”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경제에 보탬이 되는 기술 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 “대학교 및 고용주”와 협력 관계를 맺고 “과학, 기술, 공학, 수학같이 현재 고용주들이 요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과목”을 늘리는 학교는 보상받아야 한다.19 이민 정책을 개혁하면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이민자들의 재능과 열망을 활용”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 뛰어난 기업가와 기술자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20 “내 아내, 엄마, 딸이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 또 …… 가정 폭력이라는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을 때”, 최저 임금을 인상해서 “정직한 노동에 정직한 대가를 지급할 때”, 쇠락한 공업 도시를 재건할 때, “저임금 근로자 커플이 결혼하는 데 장애가 되는 금융 제제를 없애고 자녀를 가지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펼쳐서” 가족에게 힘을 실어줄 때 경제 성장은 이루어진다.21
오바마의 2013년 1월 연두교서는 경쟁력을 제고하고 번영을 가져오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지된 경기 회복세를 이어갈 수 있는 경제 부흥책으로 자유주의 의제들을 포장하고 부활시켰다. 어떤 이들은 그런 포장이 반대 세력을 포섭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저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 정의, 정부 투자, 환경 보호를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정리함으로써 민주당은 세금을 걷고 써버린다는 반대 세력의 비난을 뒤집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아주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주목하면 금융화에 기댄 이윤 착취가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이 별개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정직한 경제학자들이 인정하고 나선 바로 이 시점에 얄궂게도 경제 성장이 정부의 목표이자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22 시장이 자신을 너무나도 잘 보살피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오바마의 연설은 경제 부양이 정부의 책임이며 (국가 안전 보장은 제외한) 다른 모든 업무들은 경제 부양의 일환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이런 행태는 경제 성장, 경쟁력 제고, 자본 축적에게 평등, 자유, 포용, 헌법보장이라는 민주국가의 의무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정치적인 의무들은 더는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며 오바마의 연설에 따르면 경제 목표 달성에 보탬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되면 가차 없이 버림받을 것이다.
또한 오바마의 연설은 정부의 목표와 선결 과제 목록이 현대 기업의 목표나 목록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현대 기업들이 정의와 지속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경제력 제고와 주가 또는 신용 등급의 향상 및 유지는 기업과 정부 모두의 최우선 과제다. 지속 가능한 생산 방식부터 근로자 대우에 이르기까지 다른 목표들은 그 최우선 과제 수행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만 추구된다. ‘돌봄’이 틈새시장이 되면서 자선단체에 이윤 (최소한만) 기부하기와 함께 녹색 운동, 공정 무역 등이 오늘날 많은 기업들의 대중 이미지 관리 및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오바마의 연두교서는 정의 관련 주제들이 경쟁력 제고와 연계된 것처럼 전제하는 식으로 의미상 순서를 살짝 바꿨을 뿐이다. 정부 활동과 기업 활동은 이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둘 모두 정의와 지속 가능성이라는 과제를 다루지만 그것들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이미 기업가화된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은 소비자와 투자자를 끌어 모으는 데 일조한다.23 결국 오바마의 연설은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를 보여주면서도 기업에서 그대로 따온 마케팅 전략을 영리하게 활용해 생태를 중시하거나 정의감이 충만한 대중에게 (재)투자를 받아냄으로써 대통령 자신의 신용도와 가치 모두를 상승시켰다.
가벼운 일화로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 책은 신자유주의가 개인과 정부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민주주의 원칙을 몰아내고 민주주의 기구를 무력화하며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적 상상력을 짓밟고 있는 큰 그림과 핵심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근본적으로는 정치이론 연구 작업이라는 말을 서둘러 덧붙인다. 이 책은 고전적인 의미로 비평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와 역학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 책에서 조명하는 질서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다만 이 책에서 분석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도해볼 수 있는 전략들만을 간간히 제안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현재 직면한 위기들과 그를 둘러싼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은 민주주의의 미래가 어떤 모습을 띠든 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대안과 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시장을 뒷받침하는 기본 원칙에 충실하게 일련의 경제 정책을 세우는 것이라고 통상적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자본의 흐름 및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 정부 복지와 약자 보호 정책의 대대적인 축소, 교육, 공원, 우편, 도로, 감옥 시설과 군대 등 공공재 공급의 민영화 및 아웃소싱, 누진세 대신 역진세·역관세 도입, 경제 정책이나 사회 정책을 통한 부의 재분배 중단, 인간의 필요와 욕구—대학 입학 준비와 장기 이식, 입양과 환경오염 문제, 차례 건너뛰기와 비행기에서의 좌석 공간 확보 등—의 이윤 추구 사업 아이템화 그리고 최근에는 모든 것의 금융화와 경제 및 일상생활에서 생산 자본을 잠식하고 있는 금융자본 등을 포함한다.
이런 정책과 관행에 대한 비판은 대개 다음의 네 가지 해악에 집중된다. 첫째는 불평등의 심화다. 현재 상위층은 부를 독차지하고서 꾸준히 그 부를 증식시키고 있는 반면 하위층은 거리로, 또 전 세계적으로 점점 늘어만 가는 도시 및 근교의 빈민가로 말 그대로 내몰리고 있다. 중산층은 더 일하고 덜 받고 복지 혜택은 축소되고 삶은 불안정해지고 은퇴 후는 막막해지고 지난 반세기에 비해 계급 이동 통로가 현저히 좁아지고 있는 상태다.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거의 쓰지 않지만 로버트 라이히(Robert Reich),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등이 서방 국가의 정부 정책에 대해,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 브란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ć) 등이 개발 정책에 대해 가하는 소중한 비판들이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24 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포스트‐케인스 자본주의의 토대라고 분석한 효과 중 하나가 불평등의 심화다.
둘째, 신자유주의 정부의 경제 정책과 규제 완화가 시장에 맡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물품이나 서비스의 어리석거나 혹은 비윤리적인 상업화로 이어진다고 비판한다. 이 주장의 핵심은 시장화가 모두가 공유하고 누구에게나 권리가 인정되는 것들(교육, 자연, 기반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제한하거나 차별적으로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에, 또는 지구를 파괴하거나 심각하게 훼손(장기 밀매, 환경 파괴, 무분별한 개발, 셰일가스 추출)하기 때문에 인간의 착취나 인간에 대한 모멸(선진국의 돈 많은 부부가 제3세계에서 대리모를 구하는 것이 그 예)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데브라 사츠(Debra Satz)의 《왜 어떤 것들은 시장에서 사고팔면 안 될까Why Some Things Should Not Be for Sale》와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에서 전면에 내세운 비판들이 이에 해당한다.25
셋째, 국가 경제 정책으로 이해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기업 및 금융 자본과 정부 사이의 친밀도 상승과 기업이 정치적인 결단과 경제 정책에 행사하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한다. 셸던 월린(Sheldon S. Wolin)의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Democracy, Incorporated》도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26 또한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도 이러한 면을 주로 다루며 폴 피어슨(Paul Pierson)과 제이콥 해커(Jacob Hacker)의 《승자독식 정치Winner‐Take‐All Politics》에서도 이런 비판을 다른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27
마지막으로 금융 자본의 등장과 방임, 그 중에서도 특히 금융 시장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버블 경제과 기타 과도한 부침들로 인한 경제 혼란을 비판한다. 2008~2009년의 금융 자본 위기로 인한 단기적 충격과 그에 따른 장기적인 경기 침체의 여파로 여전히 생생한 그런 폐단들은 월스트리트의 운명과 소위 ‘실물’경제 간 간극이 꾸준히 벌어지는 데서 더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한 비판은 제라르 뒤메닐(Gérard Duménil)과 도미니크 레비(Dominique Lévy)의 《신자유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Neo‐liberalism》,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의 《금융 자본주의와 그 적들Finance Capitalism and Its Discontents》, 이브 스미스(Yves Smith)의 《이콘드‐탐욕 경제학의 종말E‐CONned:How Unrestrained Self‐Interest Undermined Democracy and Corrupted Capitalism》, 맷 타이비(Matt Taibbi)의 《오 마이 갓!뎀 아메리카Griftopia:A Story of Bankers, Politicians and the Most Audacious Power Grab in American History》, 필립 미로우스키(Philip Mirowski)의 《엄청난 위기를 감히 낭비하지는 말자Never Let a Serious Crisis Go to Waste:How Neoliberalism Survived the Financial Meltdown》 등 다양한 사상가의 저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다.28
불평등의 심화, 무분별한 상업화, 정부에 대한 기업의 영향력 증대, 경제 혼란과 불안정. 이 모든 것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결과이며 대중의 반감과 시위의 대상이라는 건 분명하다. 실제로도 남유럽에서 벌어지는 긴축정책 반대 시위,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나 그 이전에 있던 ‘반세계화’ 운동은 그런 결과에 대한 증오와 저항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다소 다르게 규정하고 신자유주의의 다른 해악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일련의 정부 정책, 자본주의의 한 형태, 자본가 계급의 수익성 회복을 위해 시장을 방임하는 이데올로기로 보기보다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를 비롯한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를 그것이 강성할 때 특정 경제적 가치관, 경제 관행, 경제 지표를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확장·적용하는 통치 합리성의 형태를 띠는 규범적 이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29
이런 통치 합리성은 코레이 칼리스칸(Koray Çalışkan)과 미셸 칼롱(Michel Callon)이 비경제적인 공간 및 행위의 ‘경제화’라고 명명한, 비경제적인 공간과 행위에 적합한 지식, 형식, 내용, 지침을 재구성하는 절차와 관계가 깊다.30 중요한 것은 비경제적인 공간 및 행위의 경제화가 언제나 금전화를 동반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교육, 건강, 체력, 가족, 이웃 등 금전적인 부 형성이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닌 영역에서도 현대 시장의 주체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수도 있다31(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취급한다). 신자유주의가 삶의 모든 면을 꾸준히 그리고 어디에서나 경제화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말 그대로 모든 공간을 시장화한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시장화가 분명 신자유주의가 낳은 대표적인 결과 중 하나임에도 말이다. 핵심은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시장 모델을 모든 영역과 활동(돈과 아무 상관이 없는 영역과 활동에조차도)에 퍼뜨리고 있으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언제나, 오로지, 어디에서나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철저한 시장 행위자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데이트를 할 때도 우리는 그것이 금전적인 부의 생산, 축적, 투자의 영역이 아닌데도 기업가나 투자자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다.32 많은 고급 온라인 데이트 업체들은 시간과 돈만이 아닌 애정 투자에도 수익극대화가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그런 관점에서 고객과 서비스를 설명한다.33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 그 자체의 가치는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언론의 자유를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향상시키고 홍보하는 권리로 해석한다. 이에 대해서는 5장에서 다루는 시티즌 유나이티드(Citizens United) 판례를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어떤 학생은 자신의 대학 지원 서류를 보강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봉사활동에 대한 대가는 여전히 받지 않지만, 그 학생이 특정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 대학을 졸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연봉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초등학교를 결정할 때 아이비리그 합격률이 높은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키는 확률이 높은지 여부를 고려할 수도 있지만 그 이유가 자녀가 얻을 금전적인 이득이나 자녀의 미래 연봉을 최우선목표로 삼았기 때문은 아닐 수도 있다.
시장의 도입이나 금전화를 동반하지 않는 비경제적인 영역, 활동, 주체에 대한 경제화의 확산은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고유한 특징이다. 하지만 ‘경제화’도 그 자체가 포괄적인 용어여서 시공간상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제’의 사례를 통괄하는 공통적인 내용이나 경향은 없다. 신자유주의가 주체를 집요하게 경제 행위자로 취급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어떤 역할인지는 분명치 않다. 생산자? 상인? 기업가? 소비자? 투자자? 마찬가지로 사회와 정치의 경제화는 가족 경제, 근로자 집단, 고객이나 소비자 집단, 인적자본의 덩어리 등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최근 국가사회주의, 복지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역사 속에서 경제화를 통해 발현된 예들이다. 실제로 카를 슈미트(Carl Schmidt)는 자유민주주의가 이미 국가 및 정치경제화의 한 유형이라고 주장했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는 사회, 경제, 인간의 경제화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핵심이라고 보았다.34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경제화만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일까?
일부는 경제화를 적용하는 영역의 확장에서 기인한다. 신자유주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위와 욕구의 틈새까지도 공략한다. 게다가 그런 확장은 정도의 차이에 머물지 않는다. 현대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시간을 초월한 경제인의 모습을 들이대거나 그 대상 범위를 단순히 확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시대를 초월한 한결같은 모습이나 양상을 띠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백 년 전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그린 경제인의 모습은 교환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상인이나 행상이었다. 백 년 전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재현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기본 원칙은 고통은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기 또는 끊임없는 손익 계산이었다. 그리고 삼십 년 전 신자유주의 시대의 서막이 열릴 즈음에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익과 이윤 추구를 꾀하지만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기업가화한 인적자본으로 규정되었다. 푸코가 말했듯 이 주체는 이제 사회 체제 내에서 기업 형태의 모방과 보급을 수행하고 있다.35 오늘날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그런 기업가정신의 측면을 유지하는 한편, 금융화된 인적자본의 형태로 급격하게 재탄생되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과제는 실제 또는 수치화된 신용 등급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거나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존재를 영위하는 모든 공간에서 실천하는 것이다.36
따라서 현대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의한 주체의 ‘경제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고전 경제 자유주의와 달리 인간은 어디에서나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존재하며 오로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존재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정치적인 사유와 사회적인 사유에 새로이 도입한 것 중 가장 파괴력이 큰 요소이기도 하다. 애덤 스미스, 나소 시니어(Nassau Senior), 장 바티스트 세이(Jean‐Baptiste Say),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rt)는 모두 경제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후자를 전자에 포함시키거나 경제가 그 용어나 지표를 적용하고 전입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분야의 존재 자체를 재정립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37 심지어 이들은 경제가 도덕이나 윤리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에 너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위험하다고 때때로 지적하기까지 했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교환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인이 아닌 경쟁력 제고와 가치 상승을 추구하는 인적자본이라는 형태를 띤다. 이것 또한 신자유주의의 주체가 다른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뿐 아니라 제러미 벤담, 칼 마르크스(Karl Marx), 칼 폴라니(Karl Polanyi), 앨버트 허쉬만(Albert Hirschman)들이 그린 주체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점이다.
셋째, 그리고 이는 오늘날 특히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인적자본의 구체적인 형태와 활동 공간이 생산 자본이나 기업 자본이 아닌 금융 자본이나 투자 자본과 연동되고 있다. 물론 이윤을 창출하는 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 활동과 자신의 자산과 노력을 기업화하는 활동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여전히 현대 인적자본과 그 인적자본의 활동 일부를 차지한다. 하지만 미셸 페어(Michel Feher)가 주장하듯 인적자본으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투자와 투자자 모집이라는 방식으로 포트폴리오상 가치를 상승시키는 데 점점 더 신경을 쓰고 있다.38 그것이 소셜미디어에서의 ‘팔로우’나 ‘좋아요’나 ‘리트윗’을 통해서든, 모든 활동과 영역에 대한 평가와 순위 매기기를 통해서든, 금전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위를 통해서든 교육, 훈련, 여가, 출산, 소비 등 점점 더 많은 행위들이 자신의 미래 가치를 높이는 것과 관계된 전략적 결정과 활동으로 포섭되고 있다.
현대의 많은 회사가 여전히 이익, 이윤, 시장 교환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상품화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기업가주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는 금융 자본과 금융화가 새로운 경제 행위 모델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모델이 투자 은행이나 투자 회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비용 절감, 새로운 시장 발굴, 변화하는 환경에의 적응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실물 기업조차도 리스크 관리, 자본 증식, 외부 자본 차용, 투기, 기타 투자자를 모으고 신용 등급과 포트폴리오 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전략적인 관행들을 도입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 자본의 시대가 빚어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주체성 및 행위는 애덤 스미스 시대의 옮기고 흥정하고 교환하던 경제인, 제러미 벤담 시대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던 경제인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적자본으로 재규정하고 있으며 이익을 극대화하던 초기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기업의 일원이자 기업 그 자체인 그리고 그 둘 모두에서 기업에 적합한 관행을 답습한 행정 관행이 적용되는 경제인의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다. 4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관행들은 국가, 회사, 주체 모두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새로운 경영 기법이 수직적인 지배를 대체하게 만든다. 권력의 중앙집중화, 법, 경찰, 규칙, 할당은 인센티브, 지침, 모범사례를 강조하며 상호 연결되고 팀을 기준으로 삼으며 실천을 염두에 둔 기법으로 대체되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인간 존재와 인간 행위를 재정립하는 일이 정치적 삶을 비롯해 모든 공간으로 퍼지면 조직만이 아닌 각 공간의 목적과 성격 그리고 그들 서로 간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 이 책이 집중적으로 다루는 정치적 삶의 경우 신자유주의는 정의라는 민주주의 정치 원칙을 경제 용어로 바꾸고 회사를 모델로 삼아 국가를 국민의 관리자로 만들며(1990년대에 태국의 총리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이 스스로를 ‘태국 주식회사의 CEO’라고 공표한 바 있듯이) 민주 시민과 국민주권의 핵심을 비워낸다. 따라서 신자유주의화의 주요 효과 중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에 안 그래도 부족한 호모 폴리티쿠스의 씨를 말리고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의 제도, 문화, 상상력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인간은 어떻게 삶의 모든 공간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 더 구체적으로는 ‘인적자본’ 취급을 받게 되는가? 신자유주의라는 특정 이성 형식이 어떻게 평범한 제도의 실행과 일상생활의 담론까지 지배하는 통치 합리성이 되는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명령과 강요를 통해 억지로 집행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북미·유럽권에서 신자유주의화는 폭력, 독단적인 지시, 심지어 직접적인 정치적 수단조차도 배제된, 모범사례와 법 수정 등 합의나 협상 같은 ‘소프트파워(Soft Power)’를 활용하는 구체적인 통치 기법으로 실행되는 경향이 강하다. 신자유주의는 아주 정교하고 세련된 상식, 그것의 손길이 닿고 그것이 자리 잡고 인정받은 모든 곳에서 제도와 인간을 재구성하는 현실 원칙으로서 통치한다. 물론 공공재 공급의 민영화, 조합 해체, 복지 축소, 공공 서비스 중단 등의 문제로 경찰과의 정치적 충돌이나 시위 같은 잡음이 발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사자보다는 흰개미에 가깝다. 직장, 학교, 공공 기관, 사회·정치 담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줄기와 가지 속에 애벌레처럼 가늘고 긴 굴을 파는 게 신자유주의적 이성 양식이다. 흰개미 비유도 제대로 다 담아내지는 못할 정도다. 푸코라면 정치적 합리성의 득세는 언제나 파괴적일 뿐 아니라 새로운 주체, 행동, 관계, 세계를 등장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합리성 안에서 인적자본은 우리 존재의 ‘현실’이며 ‘지향점’이다.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지향점이고 합리성이 그 규범과 환경 설정을 통해 규정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신자유주의가 고전적 경제 자유주의와 다른 점 한 가지, 즉 모든 영역을 시장으로 보고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시장 행위자로 취급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푸코가 강조한 또 한 가지 차이점은 신자유주의 이성 하에서는 시장의 근본 원칙이자 기초 재화가 교환이 아닌 경쟁이라는 점이다39(앞으로 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푸코는 신자유주의 이성 하에서는 경쟁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규범적인 것으로 정식화되고 따라서 지원과 법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도 한다). 시장의 핵심이 교환에서 경쟁으로 전치되는 이런 미묘한 변동 때문에 모든 시장 행위자는 서로 교환 상대가 아닌 각각 하나의 작은 자본(소유자, 노동자, 소비자가 아닌)으로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인적자본이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추구하는 목표는 사람이 공부를 하든, 인턴 과정을 밟든, 직업에 종사하든, 은퇴를 계획하든, 새로운 삶을 마련해서 자신을 재탄생시키든 기업화에 힘쓰고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며 자신의 등급이나 순위를 높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기업, 국가, 학계, 저널, 대학교, 언론 매체, 웹사이트들의 지향점—기업가화, 경쟁력 및 가치 제고, 등급이나 순위 최대 상승—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기업 자본이자 투자 자본으로서의 인간상은 대학 지원서와 입사 지원서, 공부 전략 패키지, 인턴십, 새로운 운동 및 다이어트 프로그램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제아무리 뛰어난 학자더라도 단순히 지원금이나 펠로우십을 따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기존 연구에 보태 새로운 논문을 쓰면서 출판사와 학회를 저울질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자신과 자신의 연구를 외부에 알려야 기업가정신과 투자 마인드를 잘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40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너무나 흔한 네트워킹이라는 관행도 미셸 페어에 따르면 ‘투자자를 끌어 모으는’ 행위다.41 이런 예들은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시장 가치와 지표를 새로운 공간으로 퍼뜨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꼭 금전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장, 사람, 행위가 직접적인 부의 생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형태로 경제화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재구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인적자본 취급은 여러 가지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나의 주장과 관련 있는 것들만 다루겠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국가, 기타 우리가 속한 후‐국가집합체를 위한 인적자본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인적자본들이 속한 경쟁 사회에서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자기들의 경쟁력 제고에 신경 쓰는 회사 또는 국가를 위한 인적자본 취급을 받는 한 안정, 안전, 생명을 보장받지도 못한다. 그 자신 그리고 회사나 국가를 위한 인적자본으로 취급되고 규정된 주체는 자신이 얼마나 영리하고 책임감 넘치는 사람인가와는 전혀 무관하게 실패하거나 잉여 취급을 받거나 버림받을 위험에 끝없이 노출되어 있다. 스스로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더라도 말이다. 금융 위기, 구조조정, 아웃소싱, 해고 등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아주 영리하고 책임감이 투철한 투자자이자 기업가라 해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온갖 종류의 사회 안전 보장망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먹을 것과 쉴 곳이라는 생존의 최소 조건 충족마저도 위태롭다. 사회는 기업가적이고 자기‐투자적인 조각들로 파편화되어 연금이나 시민 사회 등 소속을 통한 보호막이 제거되었다. 3장에서 다루는 가족주의만이 사회적 안식처로 허용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는 주택공급, 교육 등 가족에 대한 공공 지원책을 축소하고 있다. 게다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서 인적자본은 칸트가 말하는 개인, 즉 그 자체로 목적이고 생래적으로 가치를 존중받는 개인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인적자본에게 특유한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지위는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으며 일관성이 사라지고 있다. 5장에서 살펴보듯이 권리 자체도 그 의미와 적용 범위를 아주 다르게 재조명하는 경제화의 대상이 된다. 인적자본으로서의 주체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자기 자신을 책임지지만 전체의 한 요소로서 도구화되는 한편 잠재적으로는 버림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사회계약은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둘째, 평등이 아닌 불평등이, 경쟁하는 자본들 간 소통의 매개체이며 관계를 지배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과 그 활동을 하는 모든 장소에서 우리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자연스러운 형태는 이제 평등이 아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화된 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이 더는 선험적 조건이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입법, 사법 그리고 대중의 머릿속에서 불평등은 당연한 것, 심지어 규범적인 것이 된다. 인적자본으로 구성된 민주주의에서는 동등한 대우나 동등한 보장이 사라지고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사회계약은 또 다시 주객이 전도된다.
셋째, 모든 것이 자본일 때 노동은 그 집합체인 계급과 함께 목록에서 아예 사라지고 소외, 착취, 노동자 간 연합의 분석적 근거도 마찬가지로 사라진다. 동시에 자본 간 카르텔을 제외한 조합, 소비자 단체 등 여러 경제적 연맹 형태의 존재 이유도 무너지고 만다. 이 때문에 북미·유럽권에서 수세기에 걸쳐 쌓아온 노동법을 비롯한 보호 장치와 복지 혜택이 위협받을 여지가 생기며 더 나아가 그런 보호 장치와 복지 혜택의 근거 자체가 정당성을 잃고 만다. 그런 정당성 제거의 예로는 미국에서 공공 기관 근로자들이 어렵게 쟁취한 연금, 고용 안정, 유급 휴가 등이 대중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들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2011~2012년 유럽 연합의 위기로 인해 긴축 정책을 강요받고 생존이 위협받는 처지에 놓인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동정 여론의 부재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한 저 악명 높은 <게을러빠진 그리스인들(lazy Greeks)> 연설은 북유럽 국가의 불만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을 뿐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근로자들이 편안한 삶이나 은퇴를 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당연한 상식인 양 전달하는 효과를 가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