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조정민
25년 동안 언론인으로 열정을 불사르던 저자는 생명의 길인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꿈을 품고 목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많은 종교적 방황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 시대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 트위터 광장, 페이스북 우물가에서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MBC<무한도전>에서 고민 상담 멘토로 출연했으며,KBS<아침마당>에서 기독교의 진실에 대한 강연을 펼치는 등 강단과 매체에서 복음의 본질을 전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MBC사회부・정치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뉴스데스크〉 앵커, 보도국 부국장,iMBC대표이사, 온누리교회 목사,CGNTV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베이직교회 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 《WHYJESUS왜 예수인가?》, 《WHYSALVATION왜 구원인가?》,《WHYHOLYSPIRIT왜 성령인가?》,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선물이다》, 《인생은 선물이다》, 《길을 찾는 사람》,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열두 모금 생수》가 있다.
베이직교회 홈페이지www.basic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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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지은이 | 조정민
초판 발행 |2017년 5월 17일
전자책 발행 |2017년 5월 23일
등록번호 |제1988-000080호
등록된 곳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65길 38 두란노빌딩
발행처 |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영업부 | 2078-3352
출판부 | 2078-3331
책 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ISBN978-89-531-2856-9 03230
E-ISBN978-89-531-2870-5 05230
편집부에서 독자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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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서원은 바울 사도가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장소입니다. 사도행전19장8-20절의 정신에 따라 첫째 목회자를 돕는 사역과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사역, 둘째 세계선교(TIM)와 문서선교(단행본·잡지) 사역, 셋째 예수문화 및 경배와 찬양 사역, 그리고 가정·상담 사역 등을 감당하고 있습니다.1980년12월22일에 창립된 두란노서원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역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프롤로그
우리는 왜 일하는가?
장례는 우리의 모든 일상을 멈춥니다. 고인 자신의 일상만이 아닙니다. 가족이나 친구, 친지의 부음을 들으면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고인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건, 심지어 어떤 사람이건 우리는 그 앞에 숙연해집니다. 언론인 시절에는 그의 삶과 죽음을 파헤치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목회자가 된 후에는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들을 위로하는 데 마음을 쏟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삶을 멈추는 이유, 일상의 분주함을 멈추는 이유를 함께 돌아봅니다. 물론 장례식장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회귀합니다. 일로 가득한 세상의 호흡 속으로 또다시 한순간에 빨려듭니다.
그런데 원래 일이 이렇게 많지 않았고, 본디 이토록 바쁘게 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대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밑에서 한담을 나누시던 어른들, 가정의 대소사가 생기면 몇 날을 함께 지켜보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틈틈이 잔소리를 늘어놓던 어른들,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그리고 외지에 나간 자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저런 사정을 훤히 알려 주던 어른들…. 그분들은 어린 손자 손녀들까지 공동체의 삶 속으로 불러들여 우리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무심결에 배우도록 했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더 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관심일까요? 그리고 무슨 일로 이토록 다들 바쁠까요? 이 바쁜 일에 묻혀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왜 이렇게 바쁜지 허망한 생각이 드는 일은 없으신가요? 제게는 그런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때, 가슴이 아리도록 나를 뒤흔든 생각입니다.
‘나는 왜 죽도록 일하고 있나?’
밥벌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경쟁심이나 시기심만도 아니었습니다.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그 상태는 날마다 나를 너무 많이 의식하다 생겨난 일중독이었습니다.
때문에 쉴 줄 몰랐습니다. 쉬는 사람도 싫었습니다. 일로 질척거리는 사람은 외면했습니다. 관계의 균형이 무너진 사실을 몰랐습니다. 균형을 잃은 삶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기쁨을 잃고도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불안, 그 불안을 떨치고자 하는 본능적인 몸부림 끝에 덜컥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도 누구보다 바쁘셨고 꽤나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달랐습니다. 일하는 목적이 달랐고 일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곁눈질하다 배우기로 했습니다. 결론입니다. 배울 만합니다. 좀 더 강하게 말씀 드리자면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왜 일하는가?”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일하는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일하는가?” 일은 생명의 가치를 더하는 선물이자 사랑이 흘러가는 소중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일에 묶여 살던 남편 곁을 지켜 준 아내가 고맙고, 일이 더 없는 쉼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 주셨던 하용조 목사님이 그립습니다. 두란노 가족에게 늘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집니다.
2017년5월
조정민
1
왜 이렇게
일이 많은가?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피곤이 묻어납니다. 다들 지친 얼굴입니다. 기쁨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흔한 인사는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바쁘시지요?”
“네, 일이 끝도 없네요.”
사실입니다. 정말 일이 끝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한 가지 일을 마쳤나 싶으면, 또 새 일이 기다립니다. 어느 때는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일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일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장마다 비명이 가득하고, 미생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나도 밀려드는 일에 짓눌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여전히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일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를 잊어버리거나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결단이 없으면 일에 끌려가게 됩니다. 거대한 조직사회에서 마치 노예처럼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쏟아지는 일의 급류를 따라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일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성경은 일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는 왜 일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여정을 통해 우리 모두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우리는 아등바등
일벌레가 되었을까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6~28
성경은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직접 만드셨습니다. 그 일을 ‘창조’라 합니다. 성경의 첫 권 창세기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에 관한 기록입니다.
세상은 진화론에 물들어서 창조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을 자처하면서도 진화론적 사고에 깊이 빠져 있는 분이 많습니다. ‘진화’는 자연과학 분야에만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진화론적 사고는 인문, 사회, 과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회발전론, 경제성장론 등에서 사용되는 성장, 발전 개념 자체가 진화론적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진화의 시초는 무엇입니까? 빅뱅입니까? 정말 그럴까요? 성경은 무에서 유가 되는 상황을 조성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유에서 유로의 변화를 일으킬 뿐입니다. 무에서 유로 넘어가는 과정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만드십니다. 그게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둠과 빛을 나누고, 밤과 낮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지에 만물을 차례로 채우셨습니다. 천지창조의 클라이맥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또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다스리고 만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피조 세계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 사람의 책무입니다. 아파트에 관리인이 있고, 조직도 관리자가 있어야 잘 운영되듯이 온 세상을 관리할 책임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관리자는 주인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대사는 본국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파송된 사람이듯,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에 따라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땅과 하늘과 바다를 지키고 다스리는 것이 1차 임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이란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창1:26,28). 그 다스림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 다스림을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자신을 피조물과 연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구나 인간에게 전권을 위임하셨습니다. 관리와 위탁의 일을 주실 때 그 표시로 아담에게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창조에 버금가는 일입니다. 존재는 이름과 함께 있습니다. 이름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나는 지도를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도시나 거리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식물의 이름에 감탄합니다. 이름이 있어야 찾아가고, 이름이 있어야 식별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많은 이름을 제각각 특성에 맞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첫 주거지로 에덴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건 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지만, 한 가지를 제한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속아 기어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악을 알게 되자 경험한 첫 사건이 바로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인식하자마자 갖게 된 첫 판단은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느낀 첫 감정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행동은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만들었고,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실 때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으신 게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닙니다.
이 사건은 인간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 줍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퇴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은 동쪽으로 옮겨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한 일에 휘말립니다. 첫 번째가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입니다. 죄가 인간을 점령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합니다. 살인자 가인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 성을 쌓고, 그 후손 라멕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릅니다.
성경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합니다(창6:5). 인간은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 애를 낳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데, 왜 모든 것이 악할 뿐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으며 살기에 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에덴을 떠나 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 외의 일거리를 만든 탓입니다. 사탄이 일의 목적을 훼손하고 그 대상을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죄가 들어오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면서 일은 눈덩이처럼 불었습니다. 죄인들이 끝없이 일을 만들고, 그 일을 이웃에게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왜 성을 쌓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언가 부족하면 불안감을 느낍니다. 죄의 뿌리는 결핍, 즉 부족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을 느끼게 되고,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성을 쌓습니다. 이것이 죄의 징표이자 죄인들이 살아가는 패턴입니다.
인간은 불안하면 스스로 안전감을 확보하고자 몸부림칩니다. 일생 먹고 남을 만큼 돈이 있어도 왜 돈을 더 법니까? 부족감 때문입니다. 모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는 노후까지 먹고살기에 충분하지 않다. 내 자녀의 자녀 세대까지 먹고살기에 부족하다.’
대체 얼마나 부족할까요?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J.D.Rockefeller)에게 “돈을 얼마나 더 벌 생각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더 벌어야지요.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벌면 99달러가 100달러가 되고, 999달러가 1,000달러가 되니 말입니다.”
남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사업가 대부분이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습니다. 근로자들이 월급을 받고 나면 그다음 날부터 좀처럼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두 주 정도 지나서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하러 나옵니다. 돈이 생기면 놀고, 돈이 떨어지면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먹을 게 있는데 왜 일해야 하며, 돈이 있는데 왜 계속 벌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작은 섬으로 휴가를 떠난 독일인 관광객이 어부에게 하루에 고기를 얼마나 잡느냐고 물었습니다.
“먹고살 만큼 잡아요.”
“왜 더 많이 잡지 않으세요?”
“뭐하러 많이 잡아요?”
“그래야 돈을 모을 것 아닙니까?”
“돈을 왜 모아요?”
“그래야 나처럼 일을 쉬고 휴가를 떠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보세요.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소? 당신이 휴가 온 이 섬에서 나는 지금 쉬엄쉬엄 일하며 살고 있잖아요.”
일중독자에게
다가가시다
인간의 분주함은 노아의 홍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하는 일이 모두 악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홍수 사건으로 노아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의 후손도 아담의 후손과 동일한 삶의 길을 걷습니다. 노아 홍수로 심판을 받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을 끊임없이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에 닿기까지 탑을 쌓았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를 흩으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불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의 언어로 소통했습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고작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쓰이는 게 전부라면 언어 소통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튼 인간의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뿔뿔이 흩어집니다. 소통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같이 삽니까?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생각보다 가혹한 형벌입니다.
하나님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일하는 습관을 새롭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 사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도시로서 오늘날 서울이나 도쿄나 뉴욕 같은 대도시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바쁘게 살지만 기쁨을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일터에서 고민하는 한 사람, 아브람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우상을 팔던 장사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큰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한 가문의 아버지에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의 보상으로 이름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무슨 일을 잘하거나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거나 잘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삶의 자리에 불쑥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1~3
아마도 아브람이 인생에 대해 철저히 고민하며 모든 일에서 돌아서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고 그를 찾아가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별 의미 없이 일하며 살아온 아브람, 왜 일해야 하는지 늘 고민에 싸여 있던 아브람,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 하나 없으므로 집에 돌아가도 아무 기쁨이 없던 아브람,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머릿속에 늘 죽음을 떠올리고 죽음 이후를 생각하던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와 엄청난 제안을 하십니다.
서로 죽이고 빼앗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찾아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세상, 자기 성을 쌓고 열쇠를 겹겹이 채운 금고를 숨겨 두어야 하는 바로 그 곳에 오셔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십니다. 죄인의 방식이 아닌 의인의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방식을 제안하신 것입니다. 일에 짓눌려 살아가면서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마음 한구석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우리 삶의 방식을 통째 바꿔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오늘 밤 너를 데려가면, 네 일이 무슨 소용 있니?”
많은 돈을 넣기 위해 금고를 집에 들여놓는 부자에게도 물으십니다.
“내가 오늘 밤 너를 불러 가면, 그 돈은 누가 다 쓸까?”
하나님은 늘 이 문제를 건드리십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너는 지금 왜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일단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서 불러내어 그 일의 동기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게 하십니다. 아브람에게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살던 삶의 근거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현대의 이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결단입니다. 중동권이나 무슬림권에서는 지금도 가족을 떠난다는 것이 죽음과도 같습니다. 생활근거가 되는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목숨을 건 결정에 속합니다.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단 떠나라고 하십니다. 많은 일을 두고 떠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떠난다고 해서 별일이 있던가요? 휴가차 회사를 비우고 집을 떠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벌어집니까? 해외여행을 가느라 한국을 비운다고 큰일이 생깁니까? 떠나도 별일 없습니다. 산더미 같은 일이라도 내가 없으면 누군가 그 일을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일하는 인간에게
구원이란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자 아담을 찾으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자 하나님이 아벨을 찾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을 찾고, 더 많은 일거리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되찾는 일에만 관심 있으실 뿐입니다. 일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늘 두드리십니다.
저는 기업인들의 과로사를 애도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습니까? 일터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회사 일에 매달렸겠습니까? 숱한 일을 밤낮없이 처리하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겠습니까? 휴가인들 마음 놓고 다녀온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먼저 물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느냐?”
아브람은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상 사업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갈 바를 모른 채 일단 떠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긴 이야기의 제목은 바로 ‘구원’입니다.
일하는 인간에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훗날 돌이켜보면 별로 쓸모없음을 알게 될 오늘의 바쁜 삶에서 벗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두 아이가 길을 걷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길을 걷다가 한 아이가 갑자기 걸음을 재촉합니다. 같이 걷던 아이도 친구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빨리 걷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더 빨리 걷기 시작합니다. 친구도 빨리 걸어 따라잡습니다. 아이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친구도 달립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립니다. 둘 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립니다. 그러다가 앞서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넘어진 아이 위로 친구가 넘어집니다. 바닥에 엎드린 두 아이가 서로 묻습니다.
“너 어디로 가는 거야?”
“몰라, 나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아이와 죽을힘을 다해 뒤쫓는 아이가 바로 우리 모습 아닙니까? 어쩌면 둘 다 바닥에 누워서 다시 푸른 하늘을 보면서 잃어버린 하늘, 바다, 땅에 대해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도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쁜 목사는 나쁜 목사다.” 이 말을 들으면 움찔합니다. 마음에 찔려서 나는 바쁘지 않다고 연신 변명합니다. 만약 바쁘다면, 하나님 일로 바쁜지 자기 일로 바쁜지 점검하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일합니까? 왜 죽도록 일합니까? 왜 이토록 일이 많습니까? 무엇 때문에 바쁘게 삽니까? 하는 일마다 악할 뿐이라면 큰일 아닙니까?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서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간다면 큰일 아닙니까?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왜 사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습니까? 혹시 잘못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내게도 제안하신다면 나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을 가지길 원하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쥐꼬리만 한 권력만 주어져도 그걸 쥐고 흔들어서 누군가를 피곤하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과의 얽히고설킨 관계 때문에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고유한 일을 저버리고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고,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권력에 탐닉합니다. 탐욕스런 인간들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착취, 조정, 통제하며 자기 성을 쌓는 데 혈안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