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cia Benton
켄트 하루프
KENT HARUF
1943년에 플로리다 주 푸에블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오와 대학교의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작가가 되기 전 그는 콜로라도의 양계농장, 와이오밍의 건설 현장, 덴버와 피닉스의 병원, 아이오와의 도서관, 위스콘신의 대안학교에서 일했고, 터키의 평화지원단과 네브래스카와 일리노이의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84년 발표한 데뷔작 『결속의 끈The Tie That Binds』으로 와이팅 상을 받았고, 『플레인송』(1999)이 미국에서만 백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13년 출간된 『축복』은 그의 다른 모든 소설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마을 홀트를 배경으로 쓰였으며, 죽음을 앞둔 대드 루이스와 가족, 주위 사람들이 나눠 갖는 삶의 의미를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아마존 이달의 책, 셀프어웨어니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플레인송』 『이븐타이드Eventide』와 함께 ‘홀트 3부작’으로 불리며 동시대 미국을 그린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2014년 11월, 평소 앓던 폐질환으로 71세에 생을 마감했다. 사후 『밤에 우리 영혼은』이 출간되며 그는 총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BENEDICTION
by Kent Haruf
Copyright ⓒ Kent Haruf, 2013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2017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Nancy Stauffer Associates, USA through Danny Hong Agenc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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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주석은 모두 옮긴이주이다.
2. 본문 중 고딕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이다.
3. 성서의 인용은 주로 개역개정판에 따랐다.
캐시에게
베니딕션Benediction - 축복의 말, 은총을 빌어줌
1
검사 결과가 나오자 간호사가 그들을 진찰실로 불렀다. 의사가 들어오더니 별말 없이 그들을 쳐다본 다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들은 의사의 얼굴 표정만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서 말해요, 대드 루이스가 말했다. 그냥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의사가 말했다.
그들이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는 오후도 기울어 있었다.
당신이 운전해요. 대드가 말했다. 난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기분이 언짢은 거예요, 여보?
아니.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아요. 그저 이곳 전원 풍경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오.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거니까.
당신 대신 운전하는 건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언제든 당신이 원하면 다시 이리로 올 수 있어요.
그들은 산악지대에 있는 덴버를 빠져나와 고원지대로 돌아갔다. 목초지에서는 세이지브러시와 소프위드, 블루그라마, 버펄로그래스가 자랐고, 경작지에서는 밀과 옥수수가 자랐다. 고속도로 양옆에는 자갈이 깔린 카운티 도로가 깨끗한 청색 하늘 아래로 뻗어 있었는데, 평평하고 탁 트인 전원을 배경으로 여기저기 고립된 작은 마을들이 몇 있을 뿐 모든 도로가 책에 자를 대고 그어놓은 직선처럼 곧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녘이었다. 대기가 다시 서늘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홀트 서쪽 외곽의 자갈 도로에 있는 자신들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대드는 차에서 내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집을 바라보았다. 그 낡고 하얀 집은 1904년에 건축되었는데 당시에는 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이 도롯가에 처음 생긴 집이었다. 1948년 그가 메리와 결혼하면서 그 집을 매입했을 때도 그곳엔 집이 서너 채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스물두 살이었고 메인 스트리트의 철물점에서 일했는데, 철물점 주인이던 다리 저는 노인이 딸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으면서 대드에게 가게를 사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대드는 그때 벌써 마을에 제법 알려져 있었고, 은행가들도 그를 알고 있어서 이것저것 묻지 않고 대출을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 지역 철물점 주인이 되었다.
그 집은 붉은 지붕널을 덮고 미늘판벽을 댄 2층짜리 목조 가옥으로, 구식의 검정 장식 쇠울타리가 빙 둘러 세워져 있고 꼭대기에 뾰족한 창들과 고정형 고리 장식이 달린 철대문이 있었다. 뒤편으로 뚝 떨어진 곳엔 붉은 칠을 한 낡은 헛간 하나와 막대를 박아 만든 간단한 가축우리가 있었는데, 그곳은 온통 잡초가 우거져 있고 그 너머에는 탁 트인 전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에 들어간 그는 아래층 침실에서 낡은 바지와 스웨터로 갈아입은 다음 다시 밖으로 나와 포치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남편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지금 저녁식사를 하겠어요? 샌드위치를 만들어줄 수 있는데.
아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맥주 한 병만 갖다주면 좋겠는데.
음식은 전혀 먹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 빼고 당신 혼자 들어요.
잔도 갖다드려요?
아니, 잔은 괜찮아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차가운 맥주병을 들고 나타났다.
고마워요. 그가 말했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맥주를 병째 마시면서 여름날 저녁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를 바라보았다. 버타 메이의 노란 집이 이웃해 있고 그 너머로 다른 집들이 고속도로까지 자리잡고 있으며, 거리 바로 맞은편은 공터였다. 다른 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곳에는 철로가 나 있는데, 마을의 이쪽 구역, 그의 집과 철로 사이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 집 앞 나무들의 나뭇잎들이 조금씩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크래커와 치즈, 네 쪽으로 자른 사과와 아이스티 한 잔이 담긴 쟁반을 가져왔다. 이것 좀 들어봐요. 그녀가 그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그는 사과 한 쪽을 집어들었고 그녀는 그의 곁에 놓인 다른 의자에 앉았다.
이젠 끝이로군. 그가 말했다. 결정이 난 거야. 안 그래요?
의사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의사들도 종종 틀린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의사들 말을 꼭 믿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난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 말이 옳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될 게 분명한걸.
아직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싶지 않다니까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됐어요.
알아요…… 조만간 로레인에게 전화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가 말했다.
내가 전화를 할게요.
아직 집에 올 것까지는 없다고 해요. 그애한테 시간을 좀 주자고.
그는 맥주병을 보더니 눈앞에 들어올렸다가 작게 한 모금을 마셨다.
떠나기 전에 좀더 고급 맥주를 마셔볼까봐요. 어떤 친구가 무슨 얘기 끝에 벨기에 맥주 얘기를 하던데. 벨기에 맥주를 마셔볼까. 근방에서 구할 수 있다면 말이오.
그는 포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아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결국 진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는 여름이 끝나기 전에 죽을 것이다. 9월 초가 되면 마을 동쪽으로 3마일 떨어진 공동묘지에서 자신의 유해 위로 흙더미가 덮이리라. 누군가가 비석 위에 그의 이름을 새길 테고 그는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2
아침 아홉시, 그는 거실 창가 의자에 앉아 옆뜰을, 나무 아래의 짙은 그늘을, 그 나무 너머에 있는 장식 쇠울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아까 그는 아침을 먹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식사를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먹지 않으리라고, 남은 평생 절대로 쇠울타리를 다시 칠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메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들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한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물기를 닦아 찬장에 넣은 뒤 뒤편 잔디밭 스프링클러를 작동시키러 나갔다가 이제 실내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러 들어온 것이었다. 맑고 무더운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데 거실을 가로질러 오던 그녀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처럼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쓰러지면서 들고 있던 물뿌리개가 나동그라졌다. 장밋빛 벽지에 물이 튀면서 벽에 얼룩이 점점 번져갔다.
여보. 대드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는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메리.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몸을 굽혔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고 땀이 난 얼굴은 몹시 붉었다. 그러나 숨은 쉬고 있었다.
메리. 여보.
그는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가 뜨거웠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긴 다음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소파에 기대 앉혔다. 내 말 들려요? 전화를 해야겠어. 곧 돌아오리다. 그녀는 알아들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 혼자 둬도 괜찮겠어? 금방 돌아올게요. 그는 빠른 걸음으로 부엌으로 가서 병원 응급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 다음 돌아와 다시 바닥에 앉아 그녀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뺨에 입을 맞추고 축축한 흰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겨주고 팔을 토닥이며 기다렸다. 잠시 후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현관에 와서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대드가 소리쳤다. 맙소사. 어쩌자고 노크를 하는 겁니까? 어서 들어오라니까.
흰 셔츠에 까만 바지 차림을 한 남자 둘이 들어와 바닥에 있는 대드와 그의 아내를 보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절했어요. 거실을 걸어오다가 그냥 바닥에 쓰러졌어요.
젊은 쪽이 일어나더니 구급차로 가서 바퀴 달린 들것을 가져왔다.
뒤로 좀 물러나주시겠어요? 남자가 말했다.
뭐라고? 대드가 대꾸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선생님께서 뒤로 물러나셔야 부인을 돌봐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괜찮으신가요? 선생님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아니, 난 괜찮아요. 어서 일이나 해요.
그들은 백발 노파를 바퀴 달린 들것에 올리고 가슴과 다리를 가로질러 띠를 채웠다. 대드는 바닥에서 일어나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의 몸에 손을 얹었다.
아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줘요. 그가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이 사람은 내 아내란 말이오. 이 여자는 내게 이 세상 전부라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니, 여기에 토 달지 말아요.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자, 어서 출발해요. 그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몸을 숙이고는 뺨을 토닥이고 입을 맞추었다.
두 남자는 그녀를 구급차로 옮겼다. 잠시 후 집 앞에서 다시 사이렌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거리 위쪽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3
그녀는 메인 스트리트 남쪽 끝에 있는 홀트 카운티 메모리얼 병원에 거의 사흘을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그녀가 나이가 많은데다 일을 너무 많이 했고 혼자서 남편을 돌보느라 지쳤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원인을 찾지 못했다.
첫째 날 해질녘이 되자 환자의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그녀에게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간호사가 물었다. 혹시 병원에 와서 보살펴줄 만한 분이 있나요?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남편이 걱정되는군요. 그이가 혼자 있으니 말이에요.
남편분은 집에 계시는 게 괜찮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누구한테요?
환자분을 구급차로 실어온 사람들한테요. 그 사람들이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신 모양이에요.
아니, 괜찮지 않아요. 그이는 자기가 어떤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거예요. 낯선 사람들한테는 더 그랬을 거고요.
그 사람들 말이 남편분 성격이 조금 까다로워 보인다고 했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이는 그저 자기 식대로 굳어진 것뿐이에요. 특별히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요. 하지만 그이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지금 그이는 나도 없는 집에 혼자 있다고요.
이웃이나 다른 분은 없나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병실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저 전화기 좀 갖다주겠어요?
이웃분께 전화하고 싶으세요? 그러기엔 좀 늦은 시각인데요, 루이스 부인.
대드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서요. 남편과 통화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하고도 전화 통화를 하시면 안 돼요.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요.
전화기 좀 갖다주겠어요? 그리고 혼자 통화를 하고 싶어요. 부탁드려요.
간호사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전화기를 가져와 병상 곁 테이블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전화를 받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여보세요. 대드 루이스요. 거칠고 늙은 음성이었다.
여보, 어떻게 지내요?
당신이야?
네. 저예요. 괜찮은 거예요?
당신 지금 자고 있어야 하잖아요. 당신이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당신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요.
내가 오늘 아침에, 그리고 또 오후에도 전화했는데, 내가 전화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아뇨. 그런 말 없었어요.
그렇군. 아무튼 내가 전화를 했었다오.
병원에서 저에 대해 뭐라고 했나요?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했어요. 마음을 편히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난 그저 지친 거예요, 여보. 병원에 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어요.
사람들이 왔을 때부터 이미 그랬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 괜찮아지는 거지? 병원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그저 기운이 없는 것뿐이에요.
병실 밖 복도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간호사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와 있었다.
이제 전화를 끊으라고 하네요. 저녁은 좀 드셨어요, 여보?
좀 먹었어요.
뭘 드셨는데요?
수프를 데워 먹었어요. 당신 몸조리나 잘하도록 해요. 대드가 말했다. 그렇게 할 거지?
잘 자요, 여보. 그녀가 말했다.
그 옛날 첫날밤을 보낸 뒤로 그들은 여전히 늘 아래층 침실에 놓인 낡고 포근한 더블침대에서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며 밤중에 끊임없이 뒤척이는 지금도. 그녀는 남편 곁에서 자겠다고,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자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런데 이제 밤이 낯설고 쓸쓸했다. 그녀가 없는 밤은 외로웠다. 그는 새벽 세시에 잠을 깨어 화장실에 갔다가 침대로 돌아와, 방안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경대 서랍의 놋쇠 손잡이와 벽장 문에 붙은 거울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한동안 잠들지 못한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아침이 반쯤 지났을 때 이웃집 노파가 건너와 현관문을 두드리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뻐끔 열었다. 여보세요? 대드, 집에 있어요?
누구요?
옆집 버타 메이예요.
아, 그렇군.
좀 들어가도 될까요?
어서 들어와요.
그녀가 어린 소녀를 데리고 들어와 거실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트레이닝팬츠에 낡은 플란넬 셔츠 차림이었다.
메리가 전화를 했어요. 버타 메이가 말했다. 아저씨 혼자 집에 계실 거라고요.
집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군요.
아저씨가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그래요. 하지만 난 괜찮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아닐지도 모르고요.
대드가 그녀를, 그런 다음 소녀를 쳐다보았다. 자리에 좀 앉겠소? 내가 일어서지는 않을 거니까.
괜찮아요. 뭐 좀 도와드릴 일이 있는지 보러 왔어요. 필요하신 게 있는지 말이에요.
그런 거 없어요.
정말이에요?
난 괜찮아요. 그런데 같이 온 아이는 누굽니까? 그가 물었다.
손녀딸 앨리스예요. 전에 본 적이 없던가요?
울타리 너머로 아이가 마당에 있는 걸 보기는 했어요.
이제 나와 함께 살아요. 얘야, 대드 루이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렴.
소녀는 여덟 살이었고, 몸이 가냘프고 갈색 머리에 청색 데님 반바지와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이가 말했다.
그래, 반갑구나. 대드가 아이에게 말했다.
버타 메이가 말했다. 뭐 필요한 일이 있는지 잠깐 부엌 좀 봐도 되겠어요?
거긴 괜찮아요. 그저 정리가 좀 안 됐을 뿐이지.
잠깐 볼게요. 그녀가 거실을 나갔다. 소녀는 그대로 남아 주위를 둘러보고는 의자에 앉은 대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할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아이가 물었다.
뭘 말이냐?
‘대드*’라고 말이에요.
* ‘아빠’라는 뜻.
나한테도 너 같은 딸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애가 태어났을 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어. 오래전 일이란다.
제겐 아빠가 없어요. 아빠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저런, 안됐구나.
할아버지는 어디 아파요? 아이가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나를 먹어치우는 암덩어리가 있으니까.
아이가 잠시 그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암이 할아버지 가슴에 있는 거예요? 엄마는 가슴에 암이 있었거든요.
나는 온몸에 암이 있단다.
할아버지는 죽게 되나요?
그래. 그렇다고들 하는구나.
아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서 할머니 집이 보이네요. 뒷마당도 보여요.
거기서 내가 널 봤단다. 너는 어제도 뒷마당에 있었지. 대드가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있었어요?
모르겠다.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어.
내가 잔디밭에 앉아 있었나요?
그래. 그랬던 것 같구나.
그러면 그때 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일?
민들레를 파내는 일이요. 하나를 파낼 때마다 할머니가 돈을 주세요. 할머니 집에는 민들레가 많아요.
그러면 우리집 민들레도 파내주면 좋겠구나.
할아버지는 얼마를 줄 건데요?
네 할머니와 똑같이 주지.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를 거들 일이 있는지 가보는 게 좋겠어요.
이웃집 여자 버타 메이는 설거지를 하고 부엌을 청소한 다음 손녀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는데, 점심때가 되자 아이에게 하얀 마른행주를 덮은 쟁반 하나를 들려 보냈다. 앨리스가 들어오더니 물었다. 이걸 어디에 놓을까요?
그게 뭐냐?
할머니가 할아버지 점심을 만드셨어요. 소녀는 쟁반을 의자에 내려놓고 마른행주를 걷었다. 종이 접시에 감자튀김과 햄 샌드위치, 얼마간의 코티지치즈가 담겨 있고, 파라핀 종이로 싼 케이크도 한 조각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가 물이랑 드시거나 커피를 만들어 곁들여 드시라고 했어요.
너도 좀 먹겠니? 난 배가 고프지 않구나.
할머니가 저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계세요.
할머니께 고맙다고 전해주렴. 그래줄 거지?
소녀가 나갔다. 창문으로 아이가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노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셋째 날 오후 늦게 예고도 없이 메리가 대문을 지나 포치 계단을 올라와 집안으로 들어섰다. 대드는 거실 창가 의자에 앉아 〈홀트 머큐리〉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아내가 거실에 서 있었다.
이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병원에서 내보내줬어요.
밖에서 차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집에 온 거예요?
걸어왔어요.
걸어오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걸어서 집에 왔다니까요.
병원에서 집까지 걸어왔다는 거예요?
병원에서 바로 보내줄 수 없다고 했어요. 아마 다른 환자를 데리러 간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난 돈을 더 쓸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고요. 사실 비용이 꽤 나올 테니까요. 병원에서는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얼른 집에 오고 싶었으니까.
이런, 맙소사. 대드가 말했다. 당신이 병원에 입원한 이유가 몸이 지쳐서였는데 이 무더운 오후에 마을을 가로질러 집까지 걸어오다니.
지금은 그렇게까지 덥지 않아요.
대체 그 사람들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을 이렇게 보내다니.
병원에서도 나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내 마음대로 그냥 나온 거지. 당신한테 제대로 된 저녁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는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맹세코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거예요. 당신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도록.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오더니 작고 곧고 늙은 몸으로 남편 앞에 버티고 서서 느린 어조로 곧장 이렇게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런 못된 소리 하지 말라고요. 두 번 다시 그런 말 말아요. 당신한테는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어요. 알겠어요, 대드?
그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나는 그런 말 참고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 때문에 내 가슴이 갈가리 찢어질 테죠, 이 몹쓸 영감 같으니. 언젠가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자, 저녁으로 뭘 먹고 싶어요? 집에 제대로 된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모르겠소. 난 아무래도 좋아.
뭔가 괜찮은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녀는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한 팔로 어깨를 안아준 다음 그의 검버섯 핀 손을 다정하게 잡아 한참 동안 자신의 뺨에 갖다댔다.
부엌에 가봐야겠어요. 사흘이 아니라 삼 주 동안 집을 비운 기분이에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내고 대드를 잠자리에 들게 한 다음 메리는 덴버에 사는 로레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집에 올 때가 된 것 같구나, 얘야. 네가 시간이 된다면 말이야.
아빠가 더 나빠지셨어요?
그래. 네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무슨 말을요?
의사 말이 네 아빠에게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엄마, 그 사실을 언제 안 거예요?
지난주 금요일.
어째서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어요?
오, 얘야, 나도 그 사실에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중이란다. 아직도 그 사실을 말로 할 수가 없어.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나도 병원에 있었어. 그녀가 말했다. 그 사실도 알아두는 게 좋겠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며칠 전 내가 병원에 실려갔었어.
왜요? 어디가 잘못됐는데요?
내가 너무 지친 거라고 하더구나. 기절해서 쓰러졌어, 바로 이 거실에서.
맙소사. 엄마, 괜찮은 거예요?
그래, 괜찮아. 네가 여기서 좀 거들어줄 수 있으면 고맙겠다. 버타 메이에게 부탁했었지만 그건 옳지 않아. 네가 우리 딸이잖니.
최대한 빨리 갈게요. 먼저 사무실에 얘기를 해야 해요. 하지만 집에 갈게요.
그러면 좋겠구나. 그런데 미처 물어보지 못했네. 넌 괜찮은 거니?
괜찮아요.
리처드는?
그이도 괜찮아요. 별로 달라진 건 없어요.
흠. 그렇단 말이지.
그래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가능한 한 빨리 가도록 할게요.
다음날 로레인은 이미 해가 지고 모퉁이에 푸른 가로등이 켜지고 난 후, 홀트로 가는 34번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그녀에게는 모두가 낯익은 풍경이었다. 그녀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앞마당 안쪽 깊숙이 들어앉은 조용하고 불이 켜진 집들 앞을 지났다. 키 큰 해바라기와 비름, 명아주 같은 잡초가 우거진 텅 빈 공터 옆에는 마당에 나무나 관목 하나 없는 집들도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어릴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버타 메이의 집이 나오고, 자신들의 하얀 집이 나왔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포치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오십대 중반에 까만 머리의 예쁜 여자였다. 공기는 서늘했고 고지의 저녁답게 싱그러운 전원 냄새가 났다.
대드가 벌써 잠자리에 들어서 그녀는 엄마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벌써 잠드신 거예요? 여덟시 반밖에 안 됐는데.
정말 주무시는지는 모르겠어. 네 아빠는 잠자리에 일찍 들곤 하시지. 언제나 말이야. 너도 아빠가 그렇다는 거 알고 있잖니.
두 사람은 침실 문간에 섰다. 그는 창문을 열어놓고 이불을 몸에 덮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눈을 떴다. 내 딸이 온 거냐? 그가 말했다.
저예요, 아버지.
내가 볼 수 있게 가까이 오렴.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가 침대에 앉아 아버지에게 키스를 했다. 메리는 로레인이 아버지와 단둘이 있도록 방을 나왔다. 대드는 한동안 딸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레인의 눈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클리넥스 한 장을 뽑아 눈과 볼을 닦았다.
오, 아빠.
그래. 뭐 지옥은 아니잖니.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많이 아프세요?
아니. 지금은 아프지 않다.
통증이 전혀 없는 거예요?
이젠 아픈 것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지 않으면 몹시 아프겠지. 전에는 그랬어. 그래, 넌 좋아 보이는구나.
고마워요.
운전해서 오는 건 어땠니?
괜찮았어요. 차가 꽤 막혔지만 모두 산 쪽으로 가는 차들이었어요.
직장은?
괜찮아요.
회사에서 여기 오도록 휴가를 준 게로구나.
회사 입장에서도 휴가를 내주는 게 좋을걸요.
그래.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맞는 소리야.
지금은 좀 주무실 수 있어요, 아빠?
분명한 건 내가 여전히 잘 수 있다는 거란다. 네 엄마만 여기 있다면 말이야. 그 사람이 없을 때는 제대로 자지 못했어. 네 엄마가 병원에 실려갔었단다. 엄마가 그 얘기 하던?
했어요.
네 엄마가 글쎄 집까지 걸어왔단다. 그 얘기도 했니?
아뇨.
네 엄마가 그랬어. 찌는 듯이 더운 날에 말이야. 네가 와서 기쁘구나. 네 엄마는 지쳐 떨어졌단다. 너무 무리한 건 아닌지 걱정이 돼. 난 네 엄마가 날 이런 식으로 보살펴주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
알아요, 아빠.
뭐. 이제 됐다. 네가 왔으니.
좀 주무세요. 아침에 뵐게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시 키스를 한 다음 부엌으로 갔다. 아버지 상태가 아주 나빠 보여요, 엄마.
나도 알고 있단다, 얘야.
너무 여위셨어요. 안색도 아주 나쁘고요.
도통 음식을 들려고 하지 않아. 배가 고프지 않다면서 말이야. 그냥 깨작거리기만 하시는구나.
일요일 아침, 버치 스트리트에 있는 합동교회의 주보 뒷면에 메리 루이스에 관한 소식이 실렸다. 그녀가 홀트 메모리얼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으며 대드 루이스의 병세에는 차도가 없으니, 신도들에게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로레인이 집에 왔다는 소식도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월요일 오후 라일 목사와 존슨 집안의 두 여자가 루이스의 집을 방문했는데, 모두 같은 시각에 왔다. 사십대 후반인 롭 라일은 이 마을에는 신참으로, 키가 크고 여윈 몸집에 머리칼이 까맣고 눈동자가 짙은 사람이었다. 존슨 집안 여자들은 홀트 카운티의 오랜 주민이었다. 과부 윌라 존슨은 긴 백발을 구식으로 머리 뒤편에서 묶고 알이 두꺼운 안경을 썼다. 독신이며 예순이 넘은 그녀의 딸 에일린은 프런트레인지의 조그만 마을에서 근 사십 년간 교직에 있다가 조기 은퇴한 후 여름을 보내기 위해 집에 와 있었는데 좀더 머물지도 몰랐다. 그들은 홀트 동쪽,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마일가량 떨어진 사구砂丘의 카운티 도로 언저리에 살고 있었다.
그들 모녀가 왔을 때 라일은 거실 소파에 앉아 대드 루이스와 메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레인이 목사에게 블랙커피 한 잔과 작은 자기 접시에 담은 쿠키를 갖다주었다. 존슨 집안 모녀가 들어서자 로레인은 일어나 그들을 집안으로 안내했고, 라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했다. 로레인이 식사실에서 자신과 에일린이 앉을 의자를 가져왔다.
그런데 대드, 오늘은 좀 어떠세요? 윌라가 물었다. 좀 차도가 있나요?
그렇다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죠. 확실한 것은 딸애가 와서 한결 나아졌다는 겁니다.
그래요, 따님이 집에 왔다고 교회 주보에도 실렸어요. 윌라가 이번에는 로레인을 보고 말했다. 이제는 따님도 집에 있어야겠네요.
엄마가 병원까지 가셨으니 그래야겠죠.
그 일도 주보에 나왔지. 아주머니가 입원하셨던 일 말이에요. 우린 그걸 보고야 알았지 뭐예요. 우리한테 전화하지 그랬어요, 메리.
공연히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메리가 대답했다. 당신이라도 그랬을 거예요.
대드가 전화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이가 전화를 하지 않아 다행이죠.
이젠 로레인이 있어요. 대드가 말했다. 그러면 됐지요.
알겠어요, 그러면 이제 잠자코 있을게요. 나도 언제 입을 닫아야 하는지는 안답니다.
말씀하지 않으실 건 없어요. 그런 뜻이 아녜요. 메리가 말했다.
엄마가 정말 가만 계신다면 생전 처음 있는 사건이 될 거예요. 에일린이 말했다.
오, 이젠 내 딸까지 나를 공격하는구나.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웃었다.
라일은 소파에 앉아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얼마 후 그가 말했다. 이젠 가봐야겠습니다. 그전에 함께 기도를 좀 드릴까요.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들은 그런 그를, 그의 검은 머리를 바라보다가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목사가 기도했다. 오, 하느님 아버지시여. 저희는 당신께서 여기 이 가족과 이 사람을 특별히 보살펴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모든 인간이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고 확신함으로써 이르는 저 평온과 평화로 이 사람을 인도하시도록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청하옵나이다. 로레인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잡은 채 기도하고 있는 목사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아버지 쪽을 보았는데, 그녀의 아버지 역시 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라일이 기도를 마무리지었다. 오, 주여, 부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아멘. 그는 일어서서 모두와 악수를 나눈 다음 대드 루이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로레인이 포치로 통하는 문까지 그를 배웅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말했다.
부친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괜찮다면 다시 오겠습니다.
네. 괜찮을 거예요.
부친께서는 그다지 종교적인 분 같지 않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는 아니죠.
알겠습니다. 아마 그분 나름대로는 종교가 있으실 테죠.
아마도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목사는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녀가 포옹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보다 훨씬 키가 컸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차를 세워놓은 길가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그가 차를 몰고 떠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다음 그늘진 포치에 매어둔 그네에 앉아 담배를 꺼내 피웠다. 공기는 뜨겁고 건조하고 맑았지만 그늘에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얼마 후 이웃집 소녀 앨리스가 장식 쇠울타리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텅 빈 거리 쪽을 보더니 다시 로레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앨리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어머니가 말씀해주셨어. 여기 와서 이야기 좀 하자.
저는 아줌마가 누군지 모르는데요.
나도 예전에 여기 살았단다. 너처럼 어릴 때 말이야.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요. 앨리스가 말했다.
그러고 싶다면 네 할머니께 여쭤보렴. 네 엄마와 나는 예전에 함께 놀았단다.
아이는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거리 쪽을 보다가 마침내 대문을 열고 포치로 올라왔다.
원한다면 앉아도 좋아. 여기, 내 옆에.
아이는 미끄러지듯 그네에 올라앉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그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레인이 다시 담배를 꺼냈다.
아줌마는 늘 담배를 피워요?
가끔 피워.
엄마의 남자친구는 만날 담배를 피웠어요.
로레인이 옆으로 연기를 후 내뱉었다. 무더운 공기 속에서 그네를 흔들자 산들바람이 부는 것처럼 공기가 조금 시원해졌다.
엄마하고 뭐하고 놀았어요?
글쎄. 네 엄마는 나보다 어렸어. 내 동생 프랭크 또래였지. 우리는 밤이면 저쪽 모퉁이 가로등 아래에서 놀았어. 뒤편 헛간에서도 놀았고.
어떤 사람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아주 좋은 애였어. 함께 놀면 재미있었지.
아.
그래, 그랬단다. 네 엄마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다니 참 안됐구나. 로레인이 말했다. 정말 안됐어. 좋은 사람이었는데. 네 엄마가 보고 싶구나.
할머니 말씀이, 누군가 날 키워줄 사람이 있는 건 행운이라고 했어요.
그래, 그럴 거야. 행운인 것 같네. 어느 때든 오고 싶을 때 우리집에 와도 돼.
그분은 죽어가고 있는 건가요?
우리 아버지 말이니?
그분은 죽어가고 있는 거죠?
그래도 무서워할 건 없어. 그저 병든 노인일 뿐이니까. 그분은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우리집에 놀러오렴. 함께 뭔가 할 수도 있을 거야.
어떤 거요?
글쎄.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구나.
이제 담배 다 피웠어요?
이건 다 피웠어.
앨리스가 일어서더니 포치 난간에서 재떨이를 가져와 로레인이 재를 떨도록 받쳐들었다.
고맙구나. 로레인이 담배를 비벼 껐다.
별거 아닌걸요.
아이는 재떨이를 도로 갖다놓고 다시 그네에 앉았다. 두 사람은 무더운 오후에 함께 그네를 탔다.
집안에서는 여자들이 여전히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혹시 그분이 멕시코계라고 한 사람은 없나요? 윌라가 물었다. 피부가 너무 검잖아요.
아뇨. 메리가 대꾸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말은, 어머니 쪽으로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어쩌면 이탈리아계일지도 모르죠.
합동교회에 봉직하고 계시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멕시코계라면 프로테스탄트교회 성직자가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가톨릭교회 성직자가 됐겠죠.
잘생긴 분 같아요. 에일린이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딸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두꺼운 안경알 뒤로 보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 커 보였다.
정말이에요. 에일린이 말했다.
그분은 기혼자야. 아내와 십대 아들이 있지.
그래도 잘생길 수는 있는 거잖아요.
덴버의 교회에 있다가 여기로 전출된 거야, 윌라가 말했다. 거기서는 부목사였지.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메리가 말했다.
그분이 작은 마을에 익숙해졌는지 모르겠어요.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요. 대드가 말했다.
여자들이 고개를 돌려 대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가 잠든 줄 알았다. 그는 고개를 창 쪽으로 향한 채, 말할 때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어떤 일도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냥 일어나는 법은 없어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윌라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분, 덴버에서 뭔가 말썽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그래서 이곳으로 보내졌을 거예요.
어떤 말썽 말인가요? 메리가 물었다.
그분이 덴버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어떤 성직자를 지지했다가 교회에서 징계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런 종류의 일이었을 거예요.
대체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은 거예요, 엄마?
어떤 여자분한테서. 외지에서 온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했어.
동성애자도 사람이에요. 에일린이 말했다.
물론 그래. 그들이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야. 다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일례를 드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볼지 말이야.
방안이 조용해졌다. 앞쪽 포치에서 로레인과 소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말소리와 그네가 규칙적으로 찌걱대는 조그만 소리. 대드 뒤편 창으로 뜨거운 햇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밖에 좀 나가볼게요. 에일린이 말했다. 잠깐 실례해요.
커피가 더 있는데. 메리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봬서 반가웠어요, 대드. 그가 그녀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바로 하고 포치로 나갔다. 윌라와 메리는 나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윌라가 속삭였다. 당신도 저애가 어떤지 알잖아요. 집에 온 뒤로 내내 저런 식이에요.
따님이 행복해 보이지가 않네요. 메리가 말했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자기 집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저렇게 뚱하게 있을 건 없잖아요.
우린 따님을 봐서 반가웠어요. 메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실을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는 서쪽 창밖을 내다보았다. 뒷마당은 나무 그늘에 잠겨 있고 그 너머 축사와 헛간에는 뜨겁고 쨍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 주전자를 가져와 윌라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반잔만 주세요. 윌라가 말했다. 이제 곧 가봐야 하거든요.
메리는 대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잠들어 있었다. 대머리를 가슴팍으로 떨구고 커다란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채.
포치에 있던 두 사람은 그네에 에일린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들 세 사람, 두 여인과 어린 소녀는 더위 속에서 천천히 그네를 탔다. 로레인이 에일린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언제 너를 보게 될까 기다렸지. 에일린이 말했다.
우리 할머니를 아세요?
오래전부터 알았단다. 네 할머니와 아줌마의 엄마는 예전부터 친구였어.
할머니는 친구가 많아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친구들과 아무 일도 안 해요.
나이가 들면 그렇단다. 그래도 너와 나는 뭔가 함께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 아줌마도 그렇게 말했어요. 소녀는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뭔가를 하게 될 거야. 로레인이 말했다.
그런데 몇 학년이니, 얘야?
올해 3학년이 돼요.
내가 가르쳤던 학년이구나.
여기서 어느 분이 제 선생님이 될지 모르겠어요. 어떤 분일지도 모르겠고요.
알고 싶니?
그런 것 같아요.
원한다면 내가 너를 학교에 데려갈게. 우리가 함께 선생님을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어느 분인지 알아볼 수도 있고.
아줌마도 여기서 가르치세요?
아니. 난 산지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가르쳤어. 지금은 일을 그만뒀단다.
우리도 전에 산지에 살았어요.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요.
윌라가 포치로 나오자 그들은 그녀를 앨리스에게 소개했다. 그런 다음 존슨 집안의 두 여인은 차가 있는 곳으로 가 사구에 있는 집을 향해 떠났고, 앨리스는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
4
그 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사십 년 전이었다. 대드 루이스는 자신이 문제를 알아차리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데에 좀 놀랐다. 그는 그 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을 알고 나자 대드 루이스는 더는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토요일, 영업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작은 물건을 하나 팔고 온통 자국이 난 목재 카운터 너머로 거스름돈을 건네고 마지막 손님이 메인 스트리트의 어두워져가는 차가운 인도로 나가자 대드가 말했다. 문을 잠갔나?
클레이턴은 문 앞에 서서 텅 빈 겨울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은데요. 그가 말했다.
그렇군. 대드가 말했다. 다들 갔나?
네, 모두 갔어요. 저도 가려고요. 오늘은 저도 지치네요. 바빴잖아요.
우선 사무실로 좀 오게. 대드가 말했다.
할 일이 남았나요?
아니. 그저 사무실로 오라고.
그는 몸을 돌려 길고 좁게 늘어서 있는 배관용품과 L자 파이프와 철제 꺾쇠를 지나고, 감아놓은 사슬과 나일론 로프 꾸러미와 복도 끝에 걸어놓은 가느다란 밧줄을 지나 건물 후미, 뒷골목에 면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간 다음 책상에 앉았다.
젊은 점원 클레이턴이 그를 따라와 문 앞에 서서 문틀에 몸을 기댄 채 매일 장사가 끝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아올렸던 청색 셔츠 소매를 내렸다.
자리에 앉게. 대드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들어와서 자리에 앉아.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타니아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애를 돌봐줄 사람을 구해놓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어요. 밖에서 말이죠.
그러라고. 하지만 우선 자리에 앉게. 대드가 말했다.
클레이턴이 사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대드는 그를 쳐다보고는 그의 뒤편으로 사무실의 열린 문밖을 잠깐 바라보았다. 골목으로 차가 한 대 지나갔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에 난 네모난 창으로 차 지붕이 보였다. 그는 회전의자에서 몸을 돌려 뒤편 선반에서 폭이 넓고 청색 표지를 댄 현금영수증 장부를 꺼낸 다음, 몸을 앞으로 돌리고 천천히 의자를 바로 하고는 책상에서 장부를 펴고 원하는 페이지를 찾아 클레이턴이 바로 볼 수 있게끔 장부를 반쯤 돌려놓았다. 이것에 대해 할말이 있나? 대드가 물었다.
클레이턴은 그를 보다가 펼친 장부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숫자를 살펴보고는 바로 시선을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뇨. 전혀 모르겠어요. 지금 저를 나무라시는 건가요?
이 일을 필요 이상으로 힘들게 만들려는 건가? 대드가 말했다. 정말 그러고 싶어?
그는 이제 막 끝난 이달 치의 총액을 손끝으로 가리키고는 한 장을 뒤로 넘겨 전달 총액을 가리켰다.
자네는 이 숫자들을 이해하겠나?
저는 도무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요. 클레이턴이 대꾸했다.
내가 보여주지. 잘 보게.
그는 사 년 전 같은 달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이것이 보이나? 그가 그해의 총액을 가리켰다.
사 년 전에 비해 상점의 월 매출 평균이 삼백 달러 정도 줄어들었네. 대드가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되지? 대체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아마 다른 데서 물건을 사기 시작했나보죠.
다른 데 어디로 간다는 건가? 이 마을에는 철물점이 여기 하나뿐인데.
어쩌면 전만큼 손님이 없는 건지도 몰라요.
아닐세. 손님은 여전히 많아. 재고 명세를 보면 알 수 있지.
그렇다면 저로서는 알 길이 없네요.
자네가 뭔가 빠뜨렸을지 모르지.
이를테면 무엇을 빠뜨렸다는 건가요?
자네가 잃어버린 물건 같은 것 말일세. 오늘 아침 뒤편 옷걸이에 옷을 걸 때 자네의 윗옷 주머니에서 떨어졌는데 알아채지 못한 물건 말이야.
대드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한 다리를 뻗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그만 열쇠를 꺼낸 다음, 몸을 앞으로 숙여 책상 맨 밑 서랍을 열었다. 그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페이지들의 절반이 뜯겨 있는 조그만 영수증철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뜯기고 남은 부분은 바인딩 안쪽에 남아 있었지만, 원래 있었을 카본지는 없는 상태였다.
자네 외투가 걸려 있던 복도 바닥에서 이걸 발견했네. 그가 말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더군. 그래서 나는 자네가 이 일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알 수 있었네. 손님이 와서 뭔가를 사면 자네는 여기 있는 이 비밀 영수증철에서 영수증을 떼어주고, 손님이 나가고 문이 닫히고 나면 그 돈을 자네 주머니에 챙기는 거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겠지. 그랬다면 내가 알아차릴 테니까. 그리고 자네는 내가 가게 뒤쪽에 있는지, 아니면 여기 이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지, 또 어쩌면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도 확인해야 했을 거야. 지나치게 자주 그러지는 못했겠지. 그랬다가는 나처럼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의혹을 품게 될 테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삽이나 정원용 괭이를 도로 가져와 환불을 받기 위해 자네가 아니라 나한테 가짜 영수증을 내미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도 걱정해야 했겠지. 아마 자네는 그 일을 상당히 걱정했을 거야.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자 자네는 과욕을 부리게 됐을 거야. 자네가 일 년에 삼사백 달러만 훔쳤다면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걸세. 아니, 일 년에 천 달러쯤 훔쳤더라도 그랬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것도 자네가 외투 주머니에서 이 조그만 영수증철을 떨어뜨리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 그렇잖나.
대드는 말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클레이턴은 아무 말도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대드가 말했다. 나는 이 일로 화가 치밀었네. 정말이야. 이 일 때문에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말일세. 대체 왜 그랬나?
맞은편에 앉은 클레이턴의 둥글둥글한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중에 대드는, 클레이턴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땀을 흘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겨울인 2월이고 바깥은 추웠고 철물점 뒤켠 창문도 없는 그 조그만 사무실에는 온기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을 얼마나 주실 거죠? 클레이턴이 말했다.
무슨 시간 말인가?
돈을 갚을 시간 말입니다.
자네는 돈을 갚을 수 없네.
당장은 그렇지요. 하지만 시간을 주신다면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갚을 수 없어. 자네를 여기에 두지 않을 거니까. 자네는 이제 여기서 일하지 않을 거야. 자네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제겐 아내와 두 자식이 있어요.
그렇지. 대드가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자네는 가족 생각을 했어야 했어. 자네가 이런 짓을 하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말일세.
클레이턴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이마를 닦고 그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보안관한테 가실 건가요? 그가 물었다.
아니. 그러지 않기로 했네. 자네 아이들 때문이지. 하지만 여기에 서명을 하게 할 걸세.
어디에 서명을요?
여기 이 서류에.
그게 뭔데요?
대드는 앞에 있는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책상 건너편으로 밀었다. 클레이턴이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깨끗하게 타이핑된 서류에는 그가 상점에서 돈을 훔친 방식과 그가 그 내용을 인정했다는 사실, 그리고 훔친 돈의 총액 몇천 달러와 그가 그 내용 역시 인정했다는 것이 적혀 있었고, 하단에는 그의 이름을 써넣는 서명란과 날짜를 기록하는 난이 있었다.
만일 제가 서명한다면 이 서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오, 자넨 서명을 하게 될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좋아요. 서명한다고 치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서류를 은행 안전금고에 보관할 걸세. 혹시라도 자네가 홀트로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야.
하지만 전 홀트를 떠나지 않을 건데요.
아니, 떠날 걸세.
사장님께선 제가 마을을 떠나는 것도 원하시는 겁니까?
떠나지 않는다면 수시로 자네와 맞닥뜨리게 되겠지. 대드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메인 스트리트 어디선가 다시 볼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저는 여기서 자랐는데요.
알고 있네. 자네 부친과 모친 모두 알고 지냈지. 이 친구야, 안됐지만 이 일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고 말았어.
저보고 어쩌라는 말씀이죠?
그건 자네가 생각해야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니야. 아마 자넨 뭔가 배우게 될 테지.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대체—클레이턴은 절망적인 눈길로 작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대체 집사람한테 뭐라고 말해야 되죠? 타니아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 역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별로 재미있는 상황은 아닐 테지. 그것만은 확실해. 그건 내 경우도 마찬가지고.
클레이턴은 대드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용서라든가 온정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좋아요, 제기랄. 클레이턴은 책상에서 펜을 집어들고 재빨리 서류에 서명을 한 다음 책상 건너로 홱 밀쳐냈다.
대드는 팔을 뻗어 서류를 집어들고 서명과 날짜를 확인한 다음 서류를 두 번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가보게.
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온당치 않아요.
온당치 않다고? 난 온당한 것 이상으로 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요. 사장님 밑에서 오 년이나 일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만 가보라고 한 걸세. 안 그러면 그 사실까지 잊을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