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히스테리아>의 번역본으로 전미번역상, 2020년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상한 김이듬의 시집이 눈보라의 계절 찾아왔다. 시집을 여는 첫 시는 <블랙 아이스>.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 갖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온 '에밀리'와 '나'는 지번 주소를 들고 부천에서 에밀리의 엄마를 찾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시내에는 때마침 폭설이 쏟아지고... 엄마 찾는 에밀리와 엄마를 잃은 적이 있는 나는 빙판 위를 '춤을 추듯 걷는다 / 어딘지도 모르면서'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이 시들은 내게 위로가 됐다. 북극한파를 맞이해 눈보라 내리는 빙판길을 걸으면서 이들은 이 막무가내인 삶을 묵묵히 걸어나간다. '스스로 만든 손목 흉터 가리려고 소매 잡아 늘리는'(<나의 정원에는 불타는 나무가 있었고>) 사람이 자꾸 흉한 일이 생기는 친구에게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부적 팔찌를 사주려는 순간, 인사동 골목길에 나란히 선 흉진 사람들의 마음이 연결된다. 책방을 잃고 엄마를 잃고 몸을 잃어도 밤은 찾아오고 밤이라면 명작을 쓸 수 있다. 막막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밤이 긴 이 겨울 읽기 좋은 시집이다. - 시 MD 김효선
방 모서리엔 낡은 회색 슬리핑 백이 있어요 오늘은 자지 않고 명작을 써요 반투명한 해파리처럼 생긴 전등을 켜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 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은밀하고 거칠며 쓰라린 글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