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읽어봅니다
네 번의 겨울을 이 소설과 함께 보냈다. 바람과 얼음, 붉게 튼 주먹의 계절. 이 소설 때문에,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 살얼음이 박힌 느낌이었다. (작가의 말, 389쪽)
인간의 연약한 몸이 얼음과 불길을 대면합니다. 폭설이 내리는 미시령 고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화가 서인주의 죽음을 두고 삶을 내던짐으로써 신화가 된 자살한 예술가로 서인주를 박제하려는 평론가 강석원의 욕망과 서인주의 예술과 삶을 향한 지독스러운 열의가 온전하게 기록되길 바라는 이정희의 소망이 부딪치며 이들은 얼음과 불을 향해 갑니다.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369쪽)
강렬한 증오와 열의로 타오르는 얼음장 같은 소설 속에서 죽어버린 많은 사람을 보며 인간이란 이토록 약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몸이 약한 외삼촌 이동주도, 인주의 모친 이동선도, 정희의 뱃속에서 자라나던 아이들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이 이토록 무른 몸으로 '창백한 푸른 점'(칼 세이건)에서 계속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지 한강의 소설은 치열하게 질문합니다. 인주는 그림을, 정희는 희곡을 쓰며 이들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삶 쪽으로 기어갑니다.
'눈을 감은 채 나는 앞으로, 깨끗한 공기가 있는 쪽으로, 차가운 쪽으로 기었다.' (382쪽)
기어서라도 삶쪽으로 나아가려는 이 연약한 몸들의 분투를 소설로 체험해보면 좋겠습니다. 미끄러지고 충돌하고 찢어지고 불타는 몸들이 삶을 향해 갑니다.
함께 읽어봅니다
<해변의 묘지 > / 폴 발레리 지음 / 민음사 / 2022
소설의 제목을 읽으면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삶을 향해 강인하게 맞부딪친 시인 윤동주도 발레리의 시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김현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라고 번역되던 이 시의 유명한 첫 줄을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창백한 푸른 점> / 칼 세이건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1
금성의 표면 온도는 약 470도씨, 화성의 표면 온도는 약 영하 63도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인주와 이정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삼촌 이동주는 천체물리학의 세계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습니다. '폭발하는 초신성의 불꽃들'(63쪽)을 들여다보던 인주와 정희의 세계에 다가가는 것으로 이 책을 함께 읽어봐도 좋겠습니다.
회복하는 인간